도다 조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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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다 조세이는 1900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나 홋카이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교육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를 만나 니치렌 불법에 입신했다. 마키구치와 함께 창가교육학회를 설립하고, 1943년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옥 후 창가학회 재건에 힘썼다. 그는 1951년 창가학회 제2대 회장에 취임하여 75만 세대 포교를 목표로 삼았으며, 1957년에는 지구민족주의 이념과 원수폭금지선언을 제창했다. 1958년 5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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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조세이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도다 조세이 (戸田 城聖) |
본명 | 도다 진이치 (戸田 甚一) |
출생 | 1900년 2월 11일 |
출생지 | 일본 이시카와현 가가시 |
사망 | 1958년 4월 2일 |
사망 장소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스루가다이 니혼 대학 병원 |
묘소 | 조자이 사원, 미나미-이케부쿠로, 도시마구, 일본 (1958–2000) 다이세키지 본산, 고주노토 탑 옆 (전면 좌측), 후지노미야시, 시즈오카현, 일본 (2001–현재) |
학력 | |
출신 학교 | 주오 대학 경제학부 중퇴 |
경력 | |
직함 | 제2대 창가학회 회장 |
임기 시작 | 1951년 5월 3일 |
임기 종료 | 1958년 4월 2일 (재임 중 사망) |
이전 직함 | 초대 창가학회 이사장 |
이사장 임기 시작 | 1940년 10월 20일 |
이사장 임기 종료 | 1950년 11월 12일 |
이사장 퇴임 사유 | 도쿄 건설 신용 조합의 파탄에 따른 책임 |
개인 정보 | |
배우자 | 도다 이쿠에 |
2. 생애
1945년 7월 3일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도다 조세이는 도쿄 구치소에서 출소하여,창가학회 재건에 힘썼다.[7] 옥중에서 법화경을 깨달은 그는 강의를 시작했고, 1947년 8월 이케다 다이사쿠를 만나 제자로 삼았다.
이후 이케다 다이사쿠를 지도하며 1951년 창가학회 제2대 회장에 취임, 75만 세대 포교 목표를 달성했다. 1957년 9월 8일에는 '''지구민족주의 이념'''과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하며 평화 운동의 원리를 제시했다. 1958년 3월 다이세키사 대객전 낙경식을 계기로 광선유포 후계 기념식을 열었고, 1958년 4월 2일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연보
연도 | 사건 |
---|---|
1900년 (메이지 33년) | 2월 11일 - 이시카와현에누마군시오야 촌 (현: 가가시 시오야)에서 키타마에선 중개상인 아버지 "진시치"와 어머니 "스에" 사이에서 일곱째 아들 "진이치"로 출생. |
1902년 (메이지 35년) | 일가족이 홋카이도아쓰타군아쓰타 촌으로 이주. |
1908년 (메이지 41년) | 아쓰타 심상 소학교에 입학. |
1917년 (다이쇼 6년) | |
1918년 (다이쇼 7년) | |
1920년 (다이쇼 9년) | 상경, 마키구치 츠네사부로를 방문[5], 가이세이 중학 야간부 (후의 쇼헤이 고교)에 입학. |
1921년 (다이쇼 10년) | "하카호"로 개명. 입소 전에 "조가이"로 개명. 전전에는 "조가이"로 통용, 전후에 "조세이"로 개명. |
1925년 (다이쇼 14년) | 주오 대학 예과 입학. |
1928년 (쇼와 3년) | 마키구치 츠네사부로가 니치렌 정종의 법화강원 미타니 로쿠로 (소케이)에게 포교되자, 도다도 마키구치와 함께 니치렌 정종에 입신. 주오 대학경제학부 입학. |
1930년 (쇼와 5년) | 마키구치가 창가 교육학 체계를 저술. |
1943년 (쇼와 18년) | |
1945년 (쇼와 20년) 7월 | 도요타마 형무소 (후의 나카노 형무소)에서[5] 출소했다는 설도 있지만, 도다 자필 서한에 "구치소에서 출소했습니다"라고 적혀[7]있으므로, 도쿄 구치소에서 출소. |
1946년 (쇼와 21년) 5월 3일 | 창가교육학회를 창가학회로 개칭. |
1949년 (쇼와 24년) | 도쿄 건설 신용 조합을 설립. |
1950년 (쇼와 25년) | 도쿄 건설 신용 조합이 다액의 부채를 안게 되어, 대장성으로부터 업무 정지를 명받음. |
1951년 (쇼와 26년) | 창가학회 제2대 회장에 취임. |
1952년 (쇼와 27년) 9월 8일 | 창가학회가 종교 법인화됨. |
1953년 (쇼와 28년) | 도쿄도신주쿠구신노마치에 있던 전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저를 구입, 창가학회 본부로 함. |
1958년 (쇼와 33년) 4월 2일 | 급성 심부전으로 스루가다이 니혼 대학 병원에서 사망 (58세). |
1999년 (헤이세이 11년) 12월 1일 | 아쓰타 촌 (현 이시카리시 아쓰타구) 의회로부터 아쓰타 촌 영예 촌민 수여. |
2. 1. 초기 생애 (1900년 ~ 1928년)
1900년 2월 11일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났다. 홋카이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도쿄로 상경해 교사로 생활하던 중 교육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28년 스승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함께 니치렌 불법에 귀의했다.[5]2. 2. 창가교육학회 시절 (1930년 ~ 1945년)
1928년 스승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함께 니치렌 불법에 입신했다. 당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자신의 교육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당량의 메모를 작성해 왔는데, 이를 논문으로 발간하고자 했으나 종이가 부족한 시절이라 편집이 쉽지 않았다. 이에 제자 도다 조세이가 스승의 뜻을 실현하고자 직접 원고를 편집하고 자비로 '창가교육학체계'를 발간했다. 1930년 11월 18일, 창가교육학체계 발간일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교육자를 중심으로 창가교육학회를 설립하였다.[8]1930년 창가교육학회는 '대선생활'실험증명 좌담회를 실시했다. 일반 가정집에 모여 각자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철학을 실천한 후, 그 체험을 서로 교류하는 이 모임은 현재 SGI 좌담회의 시초가 되었다. '대선생활'이란 크게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니치렌 불법을 믿게 하여 행복하게 인도(절복)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했다.
1942년 6월 일본 제국주의 국가신도 체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국민 총동원과 사상통일정책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다. 이 여파는 창가교육학회에도 미쳤다.
국가의 탄압에 일련종 승려 측은 신도단체인 창가학교육학회 측에 신찰을 받으라고 강요했지만, 창가교육학회 초대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그 자리에서 단호히 거부하였다.[9]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회장은 "신찰을 받는 것은 한 종파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가 망하는 길이다"라며 신찰을 거부하고 일련종으로부터 등산 및 참배 거부 징계를 받는다.
군부정부 특별고등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마키구치와 도다 조세이를 비롯한 창가교육학회는 니치렌 불법의 정의를 주장하며 좌담회를 계속했고, 1943년 7월에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10]
이후 군국주의 정부의 일방적 불평등 취조와 불합리한 재판으로 계속 감옥 생활을 했으며, 검사의 취조가 있을 때조차도 니치렌 불법의 정의를 굽히지 않았다. 계속되는 취조와 부실한 영양, 노쇠한 체력으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회장은 1944년 11월 18일 감옥에서 순교했다.
1943년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이사장 도다 조세이가 구속될 당시 21명의 간부들도 같이 감옥에 갔지만, 모두 신앙을 포기하고 석방되었다. 오직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도다 조세이 두 명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다 조세이는 1944년 1월부터 법화경 독파를 결심하고 그해 봄 무렵 불가사의한 옥중 오달을 하고 난해한 법화경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후 한 번 더 불가사의한 체험을 통해 생애 동안 이루어야 할 사명을 자각했다.
2. 3. 창가학회 재건과 회장 취임 (1945년 ~ 1958년)
1945년 7월 3일, 도요타마 형무소(후의 나카노 형무소)에서 출옥한[5] 도다 조세이는 창가학회 재건에 힘썼다. 옥중에서 법화경을 깨달아 강의를 시작했고, 1947년 8월에는 이케다 다이사쿠를 만나 제자로 삼았다.[11]1951년 5월 3일, 도쿄 무코지마의 조센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도다 조세이는 창가학회 제2대 회장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7년 안에 75만 세대를 포교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11]
1957년 9월 8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가나가와구의 미쓰자와 공원 경기장에서 열린 창가학회 제4회 동일본 청년부 체육대회에서 도다 조세이는 '''지구민족주의 이념'''과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창가학회의 평화 운동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1958년 3월 16일, 다이세키사 대강당에서 '광선유포 후계 기념식'(3.16 기념식)을 열어 청년들에게 광선유포의 미래를 맡겼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후계자를 구체적으로 지명하지는 않았다.[20]
1958년 4월 2일, 도다 조세이는 급성 심부전으로 스루가다이 니혼 대학 병원에서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1]
3. 교육자로서의 활동
도다 조세이는 홋카이도 유바리 초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퇴근 후에는 지역의 젊은 탄광 노동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정치와 역사 등을 토론하기도 하였고, 교사 처우 개선 및 유능한 학교 지도자 육성에 대한 교육 개혁안을 문부성에 제출하기도 하였다.[8]
그는 스승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교육 이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30년 11월 18일, 마키구치의 주 저서인 『창가교육학체계』가 출판되었는데, 도다는 마키구치의 원고를 정리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 책의 출판에는 이누카이 쓰요시 등 28명의 주요 인사들이 지지를 보냈다. 창가학회는 이 날을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다.[8]
도다는 니치렌 정종 신자였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권유로 니치렌 정종을 믿게 되었다. 이후 학습 학원 '지슈가쿠칸(자율학관)'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8] 학습 참고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추리식 지도 산술』을 출판하여 100만 부 이상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 당시 수험생들 사이에서 "입시의 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8]
4. 창가학회 회장으로서의 활동
도다 조세이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가 강제 전근을 당했을 때 함께 가지 않고, 1924년 메구로역 근처에 자율 학관이라는 학원을 열어 독자적으로 가치 창조 교육학을 실천했다. 자율 학관은 20년 동안 운영되며 높은 명성을 얻었다.[1]
도다는 마키구치와 협력하여 개발한 자유롭고 창의적인 학습 방식을 사용했다. 1930년에는 『수리식 지도 산술』을 출판하여 백만 부 이상 판매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마키구치는 이 책이 자신의 이론을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평가했다.[1]
도다는 가치 창조 교육학을 알리기 위해 교육 잡지 『신신 교재 환경』을 창간하고 편집했으며,[1] 이 잡지는 6년 이상 발행되며 제목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는 『수학 지도 지침』, 『가치 창조 교육학 체계의 확립』 등 저서를 집필하고, 다른 분야에도 자신의 방법론을 확장했다.[1] 1940년에는 학습 잡지 『소학생 일본』을 창간하여 군국주의 체제에서도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1]
종전 후, 도다는 일본정학관의 통신 교육과 출판 사업을 이어갔지만, 경영난으로 1949년 도산했다.[1] 도쿄건설신용조합을 설립했으나 대장성의 영업 정지 명령으로 파산했다.[1] 1950년 창가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닛쇼 고문으로 취임했다.[1]
4. 1. 조직 확대 및 발전
도다 조세이는 종전 후, 창가교육학회를 창가학회로 개칭하고 조직 정비를 시작했다. 마키구치의 창가교육학회가 교직원 중심이었던 반면, 창가학회는 니치렌정종 신앙을 중심으로 일반인을 ব্যাপকভাবে 받아들여 회원 수가 늘었다.[1]1951년 5월 3일, 도쿄 무코지마의 조센지에서 제2대 창가학회 회장에 취임했다. 도다는 사업가 경험을 바탕으로 창가학회를 운영하며, 취임 연설에서 7년 안에 75만 세대 포교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규모 포교 운동을 펼쳤다.[11]
일본 전국에 창가학회 조직을 정비하고, 청년부, 부인부 등 조직을 만들었다. 창가학회의 정치 진출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설파했는데, 이는 훗날 공명당의 기반이 되었다.[12] 도다 회장 시대에 잡지 『다이하쿠렌게』와 기관지 『세이쿄 신문』이 창간되었다.
4. 2. 평화 운동
1957년 9월 8일, 도다 조세이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미쓰자와 경기장에서 개최된 창가학회 제4회 동일본 청년부 체육대회 '젊은이의 축전'에서 5만 명의 창가학회 청년 회원들 앞에서 핵무기 폐지를 촉구하는 '원수폭 금지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핵 대결에는 승자도 인류도 없다는 점을 간결하게 밝히며, 냉전 시대의 핵 억지력 논리를 비판하고 "우리, 세계 시민에게는 침해할 수 없는 생존권이 있다"고 주장했다.[11] 핵무기를 "인류의 궁극적인 악"으로 규정한 이 "도다 선언"은 창가학회 평화 운동의 지도 원칙이 되었다.[11][12]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대해 이케다 다이사쿠와 논의하면서, 조지프 로트블랫 경은 도다의 핵무기 비난을 "도덕적 접근"이라고 평가했다.[13]
비록 이 선언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도다는 이를 회원들에게 유훈으로 남겼고, 이후 창가학회의 제2차 세계 대전 체험 증언 출판, 패널 전시 순회 등 반핵 운동 및 평화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952년 2월 17일, 도다는 "지구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했는데, 이는 "세계주의" 또는 "하나의 세계"로 번역되며, 현대적으로는 "세계 시민"과 유사하다.[10] 도다는 국가 이익보다 인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계관을 옹호했다.[10]
4. 3. 니치렌 정종과의 관계
도다 조세이는 니치렌 쇼슈와 더욱 긴밀한 협력을 구축하려는 결의로 소카가이 회장직을 시작했다. 그는 종종 "나쁜 승려"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자신의 신앙이 일부 승려들보다 강하다고 결론 내렸다.[2] 1951년 5월 12일, 도다는 조직의 포교 목표 달성을 위해 니쇼 고승에게 특별한 고호존을 요청했고,[2] 1951년 5월 20일에 하사받아 소카가이 본부에 안치했다. 2013년 11월 18일, 이 고호존은 도쿄 소카가이 본부 근처에 새로 건설된 "대원(大願)의 전당"으로 옮겨졌다. 전 세계 회원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이 고호존을 향해 창제한다.도다는 극우 민족주의 사제인 오가사와라 지몬을 매우 비판했다.[2] 오가사와라는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불교와 신토를 혼합하여 신토를 불교보다 우위에 두었다.[2] 도다는 오가사와라가 소카 교육 학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 자신과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투옥, 그리고 마키구치의 죽음에 주요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 1942년 오가사와라는 니치렌 쇼슈에서 제명되었다.
1952년, 소카 학회 회원들이 오가사와라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 이 사건으로 도다와 니치렌정종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곧 회복되었다. 1952년 4월 28일, 도다는 니치렌의 저작물을 모은 단권본인 『대성인 니치렌 어서 전집(新編日蓮大聖人御書全集)』의 초판을 발행했다.[2] 1952년 11월, 다이세키지의 관장인 닛쇼는 4월 27일 사건에 대해 도다를 꾸짖었고, 도다는 소카 갓카이 신문에 "사과"라는 제목의 기사로 응답했다.[2] 1955년 5월, 오가사와라는 소카 갓카이와의 갈등에 대한 경솔함을 뉘우치는 소책자를 발행했다.
1954년부터 도다는 니치렌정종에 많은 사찰을 기증하고 재정을 지원했다. 그는 다이세키지 오중탑과 소몬 문 복원 자금을 지원했다.[2] 1955년에는 다이세키지 부지에 다이고혼존을 안치하기 위한 호안덴을 건설했고, 1958년에는 대강당을 건설했다.[2] (후자의 건물은 1995년 니치렌정종에 의해 철거되었다.) 1956년 새해 첫날, 니치준은 도다가 건설한 소카 갓카이에 대해 매우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2]
도다는 니치렌정종을 지원했지만, 승려들을 경계했다.[2] 1951년, 그는 "소카 갓카이의 역사와 신념"이라는 에세이에서 타락한 승려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했다.[2] 도다가 사망하자, 니치준은 도다에게 "호케쿄(법화경)의 모든 설법자의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도다가 "평신도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진다"라고 말했다.[2]
도다는 닛렌정종의 외호라는 창가학회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이세키사에 대강당을 건립·기증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종문과는 제59세 관장 호리 닛코, 제63세 관장 아키야마 닛만, 제64세 관장 미즈타니 닛쇼, 제65세 관장 호리코메 닛준, 제66세 관장 호소이 닛타쓰(회장 재임 당시 서무 부장·총감, 도다 사후에 등좌)등과 좋은 관계를 구축했으며, 특히 제65세 닛준과는 인연이 깊었다.
닛렌계 교단의 교의에서는 불음주계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말법무계), 도다는 술을 좋아하여[13], 종종 술을 마시고 취한 채 설법을 했다.[14]
어본존의 서사 (書寫)에 관해서는, 도다는 "단지 어본존을 흉내내서는 안 됩니다. 어본존을 쓰는 것은 법주님 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지도하고 있다.[15]
5. 사상과 유산
도다 조세이는 옥중에서 부처의 생명력과 자신의 사명감을 연결하는 깨달음을 얻어 '삶의 참된 의미'와 동일시했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생명력 철학"("세이메이론")을 강의하고 저술했다.
스승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의 사제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으며,[4] 그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소카갓카이를 재건하고 이케다 다이사쿠를 후계자로 훈련시켰다.[8][9]
1952년, "지구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하여 국가 이익보다 인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계관을 옹호했다.[2] 1957년에는 핵무기 폐지를 선언하며 핵무기를 "인류의 궁극적인 악"이라고 규정하고, 냉전 시대의 핵 억지력 논리를 비판했다.[3][4] 그의 핵 군축 사상은 도다 국제 평화 및 정책 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져 평화 연구를 장려하고 있다.[7]
5. 1. 생명 철학
도다 조세이는 옥중에서 부처의 생명력과 자신의 사명감을 연결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삶의 참된 의미"와 동일시했으며, 이후 "인간 혁명"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인간 혁명"은 1947년 도쿄 대학 총장 난바라 시게루가 사용한 문구에서 차용한 것으로,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개념이다.출소 후, 도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생명력 철학"("세이메이론")이라고 칭하며, 이에 대해 광범위하게 강의하고 저술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니치렌, 샤카무니, 그리고 영원한 다르마와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5. 2. 사제불이(師弟不二) 정신
도다 조세이는 스승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의 사제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4] 그는 마키구치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신앙을 굽히지 않고 옥중에 함께 있었다.[7]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전쟁으로 붕괴된 조직을 되살리고, 이케다 다이사쿠를 후계자로 훈도했다.[8] 11년 동안 이케다 다이사쿠를 훈련시켜 훗날 소카갓카이를 이끌도록 이끌었다.[9]5. 3. 세계 평화 사상
도다 조세이는 1952년 2월 17일에 "지구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했는데, 이는 세계 시민과 유사한 현대적 개념으로, 국가의 이익보다 인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계관을 옹호했다.[2]1957년 9월 8일, 소카갓카이 청년 회원 5만 명 앞에서 도다는 핵무기 폐지를 선언하며 미래 세대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이 선언문은 핵 대결에는 승자도 인류도 없다는 점을 간결하게 밝히며, 냉전 시대의 핵 억지력 논리와 "우리, 세계 시민에게는 침해할 수 없는 생존권이 있다"는 기본적인 부인을 뒤집었다.[3] 핵무기를 "인류의 궁극적인 악이며, 타인의 침해할 수 없는 생존권을 빼앗으려는 우리의 무감각하고 무자비한 준비"라고 선언한 이 "도다 선언"은 소카갓카이 평화 운동의 지도 원칙으로 남아 있다.[4]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관해 이케다 다이사쿠와 논의하면서, 조지프 로트블랫 경은 도다의 핵무기 비난을 "도덕적 접근"이라고 특징지었다.[5] 도다의 핵 군축에 대한 분석과 접근 방식은 지지를 얻고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6]
도다의 핵 군축 촉구는 현재 이케다 다이사쿠가 1996년에 설립한 도다 국제 평화 및 정책 연구소에서 제도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연구소는 회의 조직, 도서 출판, 연간 저널 ''평화와 정책'' 발간을 통해 평화 연구를 장려한다. 도다 연구소는 인류 안보와 인권, 대화와 비폭력 분쟁 전환, 그리고 세계 거버넌스와 세계 시민 의식이라는 세 가지 주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핵무기 폐지, 유엔 개혁, 환경 보전과 사회 정의를 통한 지속 가능한 평화라는 세 가지 주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7]
6. 논란
1957년(쇼와 32년), 참의원 오사카부 선거구 보궐 선거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등 창가학회 회원 일부가 선거 위반 혐의(오사카 사건)로 체포 및 기소되었다.[18] 호별 방문 및 매수 혐의였으며, 이케다 다이사쿠와 코이즈미 타카시는 무죄, 다른 회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케다는 구류 중 혐의를 인정하고 자백했으나, 무죄 판결까지 5년 가까이 걸렸다. 도다는 두 간부의 무죄를 옹호했고, 위반을 저지른 회원들은 제명했다.[18]
6. 1. 강압적인 포교 방식
도다 조세이는 샤쿠부쿠(折伏)를 기반으로 한 공격적인 포교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된 믿음'을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가져다주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 또는 "비판하고 설득하는" 방법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대중 언론과 다른 불교 종파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과열된 회원들이 도다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1957년 (쇼와 32년), 참의원 오사카부 선거구 보궐 선거를 둘러싸고, 이케다 다이사쿠와 일부 창가학회 회원이 선거 위반 사건(오사카 사건)을 일으켰다. 호별 방문과 매수 혐의로, 이케다 다이사쿠, 코이즈미 타카시를 포함한 최고 간부 수십 명이 체포 및 기소되었다. 공판에서는 창가학회 최고 간부의 지시 여부, 증거로 채택된 자백의 신빙성이 다투어졌다. 이케다와 코이즈미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른 회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케다도 구류 단계에서 호별 방문과 매수 혐의를 인정하고 자백, 서명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5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도다는 두 간부의 무죄를 믿고 옹호했지만, 위반을 범한 회원에 대해서는 기소 후 즉시 제명 등의 엄격한 처분을 내렸다.[18]
6. 2. 니치렌 정종과의 관계
도다 조세이와 니치렌 쇼슈와의 관계는 그의 소카 갓카이 회장 재임 기간 동안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도다는 극우 민족주의 사제인 오가사와라 지몬을 매우 비판했다.[2] 오가사와라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며, 불교와 신토를 혼합하여 신토를 불교보다 우위에 두는 주장을 펼쳤다. 도다는 오가사와라가 소카 교육 학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 자신과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투옥, 그리고 마키구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
1952년에는 '다누키 승려 사건'이 발생했다. 니치렌의 종파 선언 7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비밀리에 사제로 복귀한 오가사와라가 참석한 것을 알게 된 도다와 이케다 다이사쿠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오가사와라의 사제복을 찢고 "타누키 보즈"(너구리 승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 마키구치의 묘소로 끌고 가 강제로 사과 편지에 서명하게 했다.[2] 이 사건으로 인해 소카 학회는 폭력적인 컬트라는 대중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도다는 니치렌정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2년, 소카 갓카이는 일본에서 종교 단체로 법적 등록을 받았으며, 이는 니치렌정종 승려들의 초기 반대를 극복한 결과였다. 같은 해, 호리고메 니치준은 소카 갓카이에게 법의 광선 유포를 위임한다고 말했다.
1954년부터 도다는 여러 지역 사찰에 재정을 지원하고 다이세키지 오중탑과 소몬 문 복원 자금을 지원했다. 1955년에는 다이세키지 부지에 다이고혼존을 안치하기 위한 호안덴을 건설했고, 1958년에는 대강당을 건설했다.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도다는 승려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타락한 승려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남기기도 했다.
7. 저서
- 生命論|생명론일본어 (대백련화 창간호, 1949년 6월)
- 니치렌 대성인 어서 십대부 강의 1-4 (창가학회, 1953년 - 1955년)
- 인간혁명 상하 2권 (정문관서점, 1957년 7월)
- 방편품수량품정해 : 니치렌 정종 (편: 다다 쇼고) (정문관서점, 1958년 3월 13일)
- 도다 조세이 선생 권두언집 (창가학회, 1960년 5월 3일)
- 도다 조세이 선생 논문집 (창가학회, 1960년 8월 23일)
- 도다 조세이 선생 강연집 상 (창가학회, 1961년 5월 3일)
- 도다 조세이 선생 강연집 하 (창가학회, 1961년 10월 12일)
- 도다 조세이 선생 질문회집 (창가학회, 1963년)
- 도다 조세이 전집
- * 도다 조세이 전집 전 5권 (1965년 - 1966년, 와코샤)
- * 도다 조세이 전집 전 9권 (1981년 - 1990년, 세이쿄 신문사)
참조
[1]
웹사이트
measuringworth.com
https://web.archive.[...]
[2]
문서
tanuki
[3]
서적
Josei Toda snippet view
https://books.google[...]
The Tablet
1960
[4]
서적
評伝 戸田城聖 上
[5]
서적
小説『人間革命』より
[6]
서적
人間革命』第11巻
[7]
서적
若き日の手記・獄中記
青娥書房
1971
[8]
서적
社会学大事典14巻
1970
[9]
서적
人間革命』第11巻
[10]
웹사이트
創価学会
https://kotobank.jp/[...]
[11]
서적
神サマのつごう 終末のフィールドワーク
法藏館
1992
[12]
서적
社会学大事典12巻
1970
[13]
문서
映画「人間革命」
[14]
웹사이트
【中田考の近未来、世界はこうなる!講座 第2回】【対談】中田考×島田裕巳 未来の宗教はどうなるのか? これから世界はどうなるのか? - Ohta Collective 太田コレクティブ
http://www.ohtabooks[...]
[15]
문서
戸田城聖先生の教えの中の可延定業書講義の後の質問会
[16]
서적
戸田城聖全集』第四巻
和光社
[17]
서적
戸田城聖全集』第二巻
聖教新聞社
[18]
서적
人間革命』第11巻
[19]
문서
安倍晋太郎
[20]
서적
戸田城聖全集
和光社
[21]
기사
随筆・人間世紀の光 128 桜花の『4・2』に恩師を思う
聖教新聞
2007-04-01
[22]
간행물
会長就任50周年記念企画 永遠に師と勝利を共に
大白蓮華
2010-04
[23]
뉴스
創価学会初代会長らの墓 79基荒らされる 骨ツボまであばく 集団の犯行無残に倒壊
朝日新聞
197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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