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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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회는 1948년 재일 한국인 야쿠자 두목 마치이 히사유키에 의해 도세이카이로 결성된 조직이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극우 단체로 시작하여, 일본의 전후 경제 성장과 함께 세력을 확장했다. 1965년 경찰 단속으로 도세이카이를 해산하고 동아우애사업조합으로 이름을 변경했으며, 이후 동아우애와 동아회로 개칭했다. 창립자 마치이는 1980년대에 은퇴했으며, 2002년 사망했다. 동아회는 간토 하쓰카이에 속해 있었으며, 야마구치구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오키나와에는 요시미 공업을 지부로 두고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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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회 | |
---|---|
개요 | |
이름 | 동아회 (東亜会) |
다른 이름 | 도세이카이 (東声会, "동쪽의 목소리 갱") |
로마자 표기 | Tōa-kai (Toa-kai) |
상세 정보 | |
창립 | 1948년 |
창립자 | 정건영 (Hisayuki Machii) |
창립 장소 | 긴자, 도쿄, 일본 |
활동 시기 | 1948년–현재 |
민족 구성 | 재일 한국인, 일본인 |
활동 지역 | 롯폰기 |
주요 활동 | 불명 |
조직 | |
두목 | 하야노 야스시 (早野 泰) |
본부 위치 | 과거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3-15-25 젠린회관 2층, 현재 불명 |
규모 | 20여명 |
관계 | |
라이벌 | 불명 |
협력 관계 | 불명 |
기타 | |
특징 |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야쿠자 신디케이트 |
관련 단체 | 동아유애사업조합 (東亜友愛事業組合) |
참고 | 19세기 말의 아시아주의 단체인 동아회 (아시아주의 단체)와는 관련 없음 |
2. 역사
동아회는 1948년 재일 한국인 야쿠자 두목인 마치이 히사유키가 설립한 도세이카이(東声会)에서 시작되었다.[1] 도세이카이는 도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2] 1965년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자 마치이는 조직을 해산하고 동아우애사업조합(東亜友愛事業組合)을 새로 설립했다.[5] 이후 조직은 동아우애(東亜友愛)를 거쳐 현재의 동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창립자인 마치이 히사유키는 1980년대에 은퇴했으며,[4] 2002년 사망했다.[6]
2. 1. 도세이카이 (1948년-1965년)
동아회의 전신인 도세이카이(東声会)는 1948년 재일 한국인 야쿠자 두목인 마치이 히사유키에 의해 결성되었다.[1] 마치이는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에 동조하여 이 단체를 이끌었으며, 초기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극우 단체의 성격을 띠었다.[2]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도세이카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연계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2]도세이카이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도쿄에서 가장 강력한 폭력 조직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일본의 전후 경제 성장 시기를 거치며 크게 성장하여, 1960년대에는 조직원 수가 1,500명에 달하는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2] 조직의 수장으로서 마치이는 일본과 대한민국 사이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수행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4]
그러나 1965년, 일본 경찰의 야쿠자 단속이 강화되면서 마치이는 도세이카이를 공식적으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해산 후 그는 東亜友愛事業組合|동아우애사업조합일본어 (Toa Yuai Jigyo Kumiai)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설립했으며, 이는 '동아우애사업협동조합'으로도 불렸다. 이와 함께 그는 東亜相互企業|동아상호기업일본어 (Toa Sogo Kigyo)이라는 합법적인 기업체를 설립하고, 당시 일본의 유력한 우익 거물이었던 고다마 요시오를 이사회 회장으로 영입했다.[5] 이후 동아우애사업조합은 東亜友愛|동아우애일본어 (Toa Yuai)를 거쳐 현재의 동아회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2. 2. 동아우애사업조합 (1965년-?)
1965년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자, 마치이 히사유키는 기존의 도세이카이를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인 東亜友愛事業組合|동아우애사업조합일본어(Toa Yuai Jigyo Kumiai)을 설립했다. 이 조직은 "동아우애사업협동조합"으로도 불렸다. 이와 함께 마치이는 東亜相互企業|동아상호기업일본어(Toa Sogo Kigyo)이라는 합법적인 회사를 세우고, 당시 일본의 유력자였던 고다마 요시오를 이사회 회장으로 임명했다.[5] 이후 동아우애사업조합은 東亜友愛|동아우애일본어(Toa Yuai)를 거쳐 현재의 동아회로 명칭을 변경했다.창립자인 마치이는 1980년대에 은퇴했으며,[4] 2002년 9월 14일 도쿄에서 심부전으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성공적인 사업가로도 알려져 있었다.[6]
2. 3. 동아우애 (?)
1965년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자, 마치이는 기존의 도세이카이를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인 東亜友愛事業組合|동아우애사업조합일본어(Toa Yuai Jigyo Kumiai) 또는 "동아우애사업협동조합"을 설립했다.[5] 이와 함께 그는 東亜相互企業|동아상호기업일본어(Toa Sogo Kigyo)이라는 합법적인 회사를 세우고, 당시 일본의 유력한 우익 인물이었던 고다마 요시오를 이사회 회장으로 임명했다.[5] 이후 동아우애사업조합은 東亜友愛|동아우애일본어(Toa Yuai)를 거쳐 현재의 동아회로 이름을 변경했다.창립자인 마치이는 1980년대에 은퇴했으며,[4] 2002년 9월 14일 도쿄에서 심부전으로 7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6]
2. 4. 동아회 (?)
동아회는 1948년 재일 한국인 야쿠자 두목인 마치이 히사유키가 도세이카이(東声会)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었다.[1] 도세이카이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성이자 전범 용의자였던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에 동조한 마치이가 이끌었던 조직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극우 성향을 띠었다.[2]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와 자주 충돌했다.[2]도세이카이는 빠르게 세력을 키워 도쿄에서 손꼽히는 폭력 조직으로 성장했다. 특히 일본의 전후 경제 성장 시기에 조직 규모가 크게 늘어나, 1960년대에는 조직원 수가 1,500명에 이르렀다.[2]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마치이는 당시 일본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4]
1965년, 일본 경찰의 야쿠자 단속이 심해지자 마치이는 도세이카이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東亜友愛事業組合|일본어 또는 "동아우애사업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겉으로는 합법적인 회사처럼 보이는 東亜相互企業|일본어 또는 동아상호기업을 세우고,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거물이자 '정계의 흑막'으로 불리던 고다마 요시오를 이사회 회장으로 앉혔다.[5] 이후 동아우애사업조합은 東亜友愛|일본어와 동아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립자인 마치이는 1980년대에 조직 운영에서 손을 뗐고,[4] 2002년 9월 14일 도쿄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79세였으며, 야쿠자 두목 외에 성공한 사업가로도 알려져 있었다.[6]
3. 다른 조직과의 관계
동아회는 간토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4개의 다른 야쿠자 단체인 스미요시회, 이나가와회, 마츠바회, 소아이회와 함께 바쿠토(도박꾼) 계열의 친목 연합인 관동20일회(간토 하쓰카이)를 결성하였다.[7][14] 이 단체는 2024년 현재 '관동친목회'로 이름이 바뀌었다.[14]
또한 동아회는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와 오랜 기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2] 이 관계는 20세기 야마구치구미 3대 두목 타오카 카즈오와 동아회의 전신인 도세이카이 회장 마치이 히사유키가 의형제를 맺으면서 시작되었다.[2] 이후 오키타 모리히로(설위초)가 3대 및 4대 야마구치구미 체제에서 "와카가시라 보좌 대우"를 받는 등 관계가 이어졌고, 동아회는 야마구치구미의 주요 친척 단체 중 하나가 되었다. 2005년 야마구치구미 6대 두목으로 취임한 츠카사 시노부가 동아회의 후견인이 되면서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7]
3. 1. 오키나와 진출
동아회의 주목할 만한 지부 조직으로 誼興業일본어이 있다.[10] 요시미 공업은 동아회의 유일한 도쿄 외 지역 지부 조직이다.[9] 오키나와에 기반을 둔 요시미 공업은 극류회 및 오키나와 극류회와 함께 오키나와 지역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로 꼽힌다.[11]요시미 공업의 기원은 20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키나와 출신 폭력배인 기보 도시오가 고다마 요시오의 영향을 받아 오키나와에서 반좌익 민족주의 단체인 '마코토회'를 결성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기보는 고다마를 통해 동아회의 전신인 도세이회 회장 마치이 히사유키와 연결되었고, 오키나와에 도세이회의 제휴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3]
오키나와의 암흑가는 20세기부터 외부 세력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지역 기반이 강한 극류회는 섬에 진출하려는 다른 야쿠자 조직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폭력적으로 몰아냈다. 그럼에도 동아회가 오키나와에서 활동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조직이 역사적으로 합법적인 사업에 더 집중해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키나와 진출을 시도했던 야마구치구미나 도진회 같은 다른 야쿠자 조직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실제로 2002년 오키나와에서 체포된 야쿠자 조직원 수를 보면, 요시미 공업 소속은 1명에 불과했던 반면, 극류회 소속은 56명, 오키나와 극류회 소속은 95명에 달했다.[12]
4. 역대 지도부
- '''도세이카이''' 시대
::회장: 마치이 히사유키 (본명 '''정건영''')
- '''동아우애사업조합''' 시대
::초대 회장/이사장: 히라노 후지마츠
::2대 회장/이사장: 오키타 모리히로
- '''동아우애''' 시대
::회장/이사장: 니무라 쇼헤이
- '''동아회''' 시대
::초대 회장: 니무라 쇼헤이
::2대 회장: 김해방웅
- '''동성회''' 시대
::회장: 하야노 야스시 (2019년 11월 총포도검법 위반 혐의로 체포[15])
5. 2대 동아회 최고 간부 (2022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