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마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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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다마 요시오는 20세기 일본의 초국가주의 활동가, 첩보원, 그리고 정치적 거물이었다. 그는 1911년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나 여러 우익 단체를 거치며 활동했고,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 해군 항공대에 물자를 납품하며 스파이 활동을 했다.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며, 이후 미군정과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흑막'으로 군림했다. 1970년대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어 탈세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1984년 CIA 공작원이었음을 고백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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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마 요시오 | |
---|---|
기본 정보 | |
![]() | |
로마자 표기 | Kodama Yoshio |
출생일 | 1911년 2월 18일 |
출생지 | 니혼마쓰시, 후쿠시마현, 일본 제국 |
사망일 | 1984년 1월 17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배우자 | 사요코 (1940–1958) |
자녀 | 하기와라 기치타로 (장남) (児玉博隆) 고다마 모리히로 (삼남) (児玉守弘) |
직업 | 해군 장교, 사업가, 정치 해결사, 스파이 |
범죄 정보 | |
혐의 | 전쟁 범죄 혐의, 뇌물 수수 |
유죄 판결 및 형벌 | 총 6년 6개월의 징역 |
관련 정보 | |
알려진 이유 |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자이자 조직 범죄 파워 브로커 |
2. 생애
고다마 요시오는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경성산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초국가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현양사의 도야마 미쓰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여러 우익 단체를 거치며 국회 삐라 살포 사건, 이노우에 준노스케 장관 협박 사건 등을 일으켜 투옥되기도 했다. 1932년 석방된 후 만주로 건너갔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일본 해군 항공대에 물자를 납품하며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1946년 A급 전범 용의자로 연합군에 체포되었으나, CIA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1948년 석방되었다.[6]
1950년대 일본 미군정 참모제2국(G2)과 야쿠자 조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섰다. 이후 총리대신 임명에도 관여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으며, 1955년 자유민주당 탄생 당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권의 흑막으로 군림했다. 1960년대 야쿠자를 동원해 안보투쟁을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주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세지마 류조와 함께 적극적으로 역할했다.
1970년대 록히드 사건으로 탈세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84년 CIA 공작원이었음을 고백한 뒤 발작으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우익 활동
고다마 요시오는 1911년 2월 18일 일본 후쿠시마현 니혼마쓰에서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6] 아버지는 파산한 사업가였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1920년 결혼한 누나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가 3년간 생활했다.[6] 제철소에서 일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청소년기에 일본으로 돌아온 고다마는 여러 우익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1920년대 말 현양사에 가입했고, 1929년에는 아카오 빈의 국가 건립 협회(겐코쿠카이)에 들어갔다. 같은 해 히로히토 천황에게 탄원서를 전달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되었다("천황 직소 사건"). 출소 후 쓰쿠이 다쓰오의 급진 애국당에 가입했고, 현양사의 도야마 미쓰루 밑에서 활동하며 만주로 건너가 도이하라 겐지 대령 아래에서 항일 저항 세력 탄압에 관여하기도 했다. 1931년 "국회 전단 살포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1932년에 풀려났다.
1933년, 고다마는 자신의 초국수주의 단체인 독립 청년회(独立青年社, ''도쿠리츠 세이넨샤'')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아편 수출을 통해 한국과 만주에서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을 꺾으려 했다. 또한, 천행회(天行会)와 협력하여 일본, 한국, 중국의 평화로운 공존을 옹호하는 일본 정치인 세 명을 살해하는 데 관여했다. 1934년 사이토 마코토 총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3년 반 동안 복역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직전 출소했다.
호적상으로는 후쿠시마현 아다치군 모토미야정(현 모토미야시) 출생이다.[27] 아버지의 원래 성은 야마다였으나, 양자로 들어가 고다마 성을 쓰게 되었다.[29] 그러나 이러한 가계는 고다마 요시오 본인이 만든 "설정"으로 보이며, 실제 출신은 불분명하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판잣집에서 살았고, 8세에 조선의 친척 집에 맡겨져 경성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30]
1929년 아카오 빈의 '건국회'에 가입, 18세에 '''천황 직소 사건'''으로 복역했다. 석방 후 쓰쿠이 다쓰오의 급진 애국당에 들어갔다. 1931년 '''국회 삐라 살포 사건'''과 '''이노우에 준노스케 재무장관 협박 사건'''으로 복역했다. 1932년 석방 후 만주로 건너가 가사기 요시아키[31]의 다이유호회에 참가했다가 귀국, '''독립청년사'''를 설립했다. 1932년 '''천행회 독립청년사 사건'''을 일으켜 3년 반 형을 선고받았다.
2. 2.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하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고, 일본군은 중국 본토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고다마는 그의 옛 스승 도이하라 겐지에 의해 상하이로 소환되었다.[3] 1939년에는 중국 협력자인 왕징웨이의 보디가드로 일했다.[3] 이 일로 해군 부제독이자 훗날 가미카제 부대의 창시자인 오니시 다키지로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1939년부터 1941년까지 그는 일본 첩보원으로 중국을 여행하며 일본과 협력하는 다양한 삼합회를 포함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4] 그는 "고다마 기관"('Kodama Kikan')을 설립했는데, 오니시 다키지로 제독과의 관계 덕분에 일본 해군 항공대를 위해 중국에서 독점적인 구매 대행 계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고다마는 만주와 중국에서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고 훔친 물품을 일본에서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그는 또한 아편과 마약을 유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고다마는 이 활동을 순전히 이상주의적이고 애국적인 것으로 여겼다.[5] 1945년까지 고다마는 1.75억달러에 해당하는 자산을 가진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고다마는 일본 제국 해군에서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3]


1941년 11월, 고다마는 사사카와 료이치의 소개로 해군성(해군대신은 시마다 시게타로)의 해군 항공 본부 (본부장은 야마모토 이소로쿠)로부터 초청받아 항공기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했다. 전시 하의 외국은 인플레이션 상태였고 물류도 정체되었으며, 국민 감정으로는 내셔널리즘 고조에 따른 배일 운동이 일어났다. 육군, 함본 기관과 경쟁 때문에 각 방면에서의 간섭도 예상되었지만 고다마는 승낙하고 총무 부장 (야마가타 마사사토)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고다마 기관의 본부를 두었다. 고다마는 해군의 촉탁(사관 대우)이 되었다.
1942년 3월, 총무 부장은 오니시 다키지로가 되었고, '''특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니시 중장이 패전 후에 자결하는 자리에 입회하는 인연이 닿았다.[34] 겐다 미노루와 알게 되었고, 전후에 겐다가 고다마에게 세지마 류조를 소개했다.[35] 1941년 진주만 공격 직전, 해군 항공 본부 독자적인 물자 조달을 위해 사사카와가 야마가타 마사사토 소장에게 소개했고, 그 후임자가 오니시 타키지로 소장(당시)이며, 후에 오니시 중장이 자결하는 날까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36] 상하이에 '''고다마 기관'''[37]은 '''텅스텐'''[38], 라듐, 코발트, 니켈 등의 전략 물자를 사들여 해군 항공 본부에 납입하는 독점 계약을 맺었다.[39] 고다마는 이 일로 다이아몬드, 플래티넘 등 1.75억달러 상당의 자금을 갖게 되었다.[40] 미국 육군 정보국의 보고에 따르면, 고다마 기관은 철, 소금, '''몰리브덴'''[38] 광산을 관할했고,[45] 농장, 양어장, 비밀 무기 공장도 운영했다. 전략 물자, 특히 텅스텐을 얻기 위해 일본의 헤로인을 팔았다.[41]
고다마의 행동에 대해 헌병의 감시는 있었지만, 오니시 타키지로와 같은 거물이 비호하고 있어 체포해도 바로 석방되었다. 1942년 4월 30일에 열린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일명 익찬 선거)에 5명 당선 구역의 도쿄 5구에서 비추천 후보로 입후보하여 8위로 낙선했다.
2. 3. 전후 활동과 정치적 영향력
1946년 3월, 고다마는 미국에 의해 A급 일본 전쟁 범죄자로 의심되어 체포되었다.[6] 그는 사사카와 료이치와 함께 스 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 둘은 오랜 우정을 쌓았다. 고다마는 A급 전쟁 범죄 혐의자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기시 노부스케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수감 중, 고다마는 ''스 가모 일기''(형무소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연대기)와 ''나는 패배했다''(자서전)를 썼다.고다마는 다른 많은 일본 전쟁 범죄 혐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감 중 찰스 A. 윌러비 휘하의 미국 G-2 (정보)에 의해 포섭되었다. 1948년 미국 정보 기관은 그가 아시아에서 G-2 CIC 부서의 모든 반공주의 활동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그에 대한 모든 혐의를 철회했다. 1948년 12월 24일, 그는 자유의 몸으로 스가모 형무소를 나왔고, 이후 평생 다시는 투옥되지 않았다. 고다마는 총 6년 반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우익 극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과 인맥을 활용하여 노사 분쟁을 진압하고 공산주의 동조자를 색출하며 일본 내 사회주의 활동에 맞서는 등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다. 1949년 CIA는 그에게 텅스텐을 중국에서 밀수하도록 돈을 지불했으나,[7] 텅스텐은 도착하지 않았고 고다마는 돈을 보관했다.[7]
1949년 고다마는 노동조합과 호쿠탄 탄광에서 메이라키구미 갱을 이끌었다. 그는 중국에서 축적하여 숨겨둔 재산(백금과 다이아몬드 제외) 7천만 엔을 사용해 전후 일본의 선거 정치에 은밀하게 영향을 미쳤다.[8]
1955년 고다마의 스가모 형무소 동료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CIA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병을 통해 보수적인 자유민주당(LDP)을 결성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CIA는 정보 수집과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대한 보루로 일본을 만들기 위해 LDP에 수백만 달러를 지원했다.[2] 고다마는 CIA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보수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은밀하게 지원하는 정치적 조정자(쿠로마쿠) 역할을 했다.[2]
보수 정치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고다마에게 의지했다. 1960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이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일본어로 '안포'로 알려짐)과 관련하여 미일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조약 비준을 막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문을 막기 위해 좌파 성향의 야당과 시민 단체의 연합이 대규모 1960년 안보 조약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60년 6월 시위가 극적으로 확대되자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오랜 친구 고다마에게 우익 폭력배와 야쿠자 갱단을 사설 경찰력으로 조직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문을 위한 거리를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다마는 이에 동의하여 우익과의 연계를 이용하여 "아이크 대통령의 일본 환영 동원 계획"을 준비했는데, 그는 좌익 시위대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15만 명에 가까운 젊은 우익들을 거리에 배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다마의 상세한 계획은 정확히 146,879명을 동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일본 경찰청은 현실적으로 최대 120,506명만 동원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 결과, 다양한 갱단의 약 28,000명의 야쿠자가 자체적으로 그리고 경찰과 협력하여 경비 서비스를 조직했다.[9] 우익 단체들도 조약을 찬성하는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여성 대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폭력적인 6월 15일 사건으로 인해 기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문을 취소해야 했고, 고다마의 군대는 필요하지 않았다.
1963년 고다마는 일본의 조직 범죄 집단의 연합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타오카 카즈오는 협상 초기에 야마구치구미를 철수시켰고, 고다마는 간토-카이로 알려지게 될 도쿄 중심의 집단을 갖게 되었다. 이 조직은 7개의 야쿠자 집단(스미요시-카이와 마츠바-카이 포함)으로 구성되었으며, 집단 간의 관계를 증진하고 우익 목표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고다마가 내부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서 간토-카이는 1965년 1월 해산되었다.[10]
고다마는 야쿠자와 연계된 자유민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와 같은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11] 록히드 사건에서 핵심 쿠로마쿠로 밝혀질 때까지 그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았다. 고다마는 1958년부터 록히드의 유료 에이전트였으며 TriStar 항공기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700만달러를 받았다.[12][13]
2. 4. 한일 관계와 박정희 정권과의 유착
고다마 요시오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했다.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고 5억달러의 대일 배상 자금이 공여되자, 한국에는 일본 기업이 진출하여 이권이 얽히게 되었다. 고다마 요시오도 이때부터 종종 방한하여 박정희 정권 요인들과 만나 일본 기업과 야쿠자의 해결사로서 이익을 얻었다. 고다마뿐만이 아니었다. 전 만주국 군 장교이자, 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65]와는 만주 인맥이 형성되었고, 기시 노부스케[66],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 정치인과 전 대본영 참모 출신으로 상사 임원인 세지마 류조가 한일협력위원회까지 만들어 한국 이권에 뛰어들었다.2. 5. 록히드 사건과 몰락
1970년대에 고다마가 록히드 L-1011 뇌물 스캔들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우익 해결사로서의 경력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1] 록히드 사건 이후, 마에노 미츠야스는 가미카제 스타일로 세타가야 구 토도로키에 있는 고다마의 저택으로 비행기를 몰아 암살을 시도했다.[15] 이 시도는 실패했는데,[14] 마에노는 고다마의 저택 2층을 들이받고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지만, 고다마는 다른 방에서 무사했다. 그는 당시 뇌졸중에서 회복 중이었다.[15]1977년 6월, 고다마는 스캔들과 관련된 탈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사망하기 전에 재판이 완료되지 못했다.[1][16] 고다마는 1984년 1월 17일 도쿄에서 뇌졸중으로 잠을 자다가 사망했다.[1]
록히드 사건과 고다마 요시오의 관련성은 록히드사 또는 일본 정계라는 사건의 귀착점에만 초점이 맞춰져 보도 및 출판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록히드사가 고다마에게 비밀 송금하는 창구로, 전 OSS 요원이 사장이었던 디크 페렐라사를 이용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76]
고다마는 이미 1958년부터 록히드사의 비밀 대리인이 되어 일본 정부에 동사의 F-104 “스타파이터” 전투기 선정을 위한 공작을 벌였다. 고다마가 접촉한 정부 측 인물은 자민당의 오노 반보쿠, 고노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 등이었다. 1960년대 말 계약이 갱신되면서 대한민국도 포함되었다. 고다마는 친분이 있던 대한민국 박정희 정권에 록히드사의 제트 전투기 선정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오노도 고노도 사망하였고,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인 사토 에이사쿠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는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77]
그래서 고다마는 다나카와의 친구인 고사노 겐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고사노는 일본항공이나 전일본공수의 대주주이기도 하며, 록히드사 제트 여객기 판매에도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이미 일본항공은 맥도넬 더글러스사의 DC-10형 기종의 구매를 결정한 상태였기에, 그 방향을 전일공으로 돌렸다.
1972년에 다나카 가쿠에이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자 고다마의 공작은 성과를 거두어, 그 후 전일공은 해당 기종을 21대 구매했고, 이 결과 록히드사의 일본 내 매출은 확대되었다. 게다가 전일공은 록히드로부터 받은 자금을 자사의 권익 확대를 위해 항공족 의원이나 운수 관료에게 뇌물로 사용했고, 이후 이 사실은 록히드 사건에 관련된 전일공 루트로 추궁받게 되었다.
록히드사 사장 아치볼드 코크란은 "고다마의 역할은 P-3C 도입을 정부 관계자에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고다마는 다음 장관이 누가 될지 알려주었다. 일본에서는 장관이 금방 바뀌기 때문에 특정 장관과 친해져도 소용없다. 그는 나의 국무성이었다."라고 진술했다.
1976년 미국 상원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록히드사가 일본의 초국가주의자를 비밀 대리인으로 고용하여 거액의 현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본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 후, 미키 다케오 총리에 의해 이 사건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65세의 고다마는 중의원에서 증인 소환을 받기 직전에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다.[78]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다마는 탈세와 외국환 관리법 위반으로 재택 기소되어 재판에 임하게 되었다. 1977년 6월에 한 번 공판에 출석한 후 뇌경색과 후유증을 이유로 자택을 떠나지 않았다.
1979년 10월 11일에는 3명의 재판관, 검찰관, 변호사가 자택을 방문하여 임상 심문이 이루어졌다. 검찰은 고사노와의 관계, 록히드사의 컨설턴트가 된 경위를 심문했지만, 1시간 정도 지나 고다마가 목의 고통을 호소하여 중단되었다.[79]
전 총리인 다나카 가쿠에이는 수뢰 혐의로 체포되어 1983년 10월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고다마는 임종을 앞두고 "나는 CIA의 대일 공작원이었다"고 고백했다. 72세의 고다마는 판결이 나오기 직전인 1984년 1월에 다시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고, 재판은 중단되었다. 또한, 고다마의 사망 후 유산 상속에서는 암암리에 수수한 21억엔이 개인 재산으로 인정된 후 상속세가 계산되었다.
2005년에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서 고다마는 다음과 같이 평가받고 있다.
당시 고다마가 경영하는 기업의 임원을 맡았던 히요시 슈지에 따르면, 사건 발각 직후, 고다마의 비서로부터 급하게 호출되어, 골판지 상자 5개 분량의 서류를 즉시 소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히요시는 인터뷰에서 "이게 천하의 고다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역시 일본을 위한 국사이니까, 뭔가를 일으키려면 역시 자금이 없으면 안 되죠. (자금의)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건 역시 록히드 사건과 관련된 서류라고 생각합니다. 전표 같은 것도 있었고, 여러 가지 묶여 있는 서류도 있었고, 그렇게 일일이 보면서 이건 태워도 되는가, 그거 안 합니다. 저는, 의외로 충실하니까, 들으면 휙 태워 버려요. 다만 태우고 있는 힐끗 보이는 중에는, 영어로 된 것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고다마의 통역인 후쿠다 타로도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다.
- 후쿠다 "미국 공청회에서 영수증 일부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록히드사에서 고다마 씨에게 사과해 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 고다마 "그건 말이 다르다. 나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말했었잖아."
- 비서 "그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모른다고 하면 됩니다. 도장과 서류는 태워 버립니다."
호리타 치카라 전 검사는 "핵심은 P3C가 아닐까. P3C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 텐데. ('''고다마 요시오'''가 록히드사에서) 돈을 교묘하게 챙기는 수법은 증언으로 확보되어 있다. (거기서부터 앞의) 돈의 사용처라든가, 여기에서 해명해야 하지만, 그 부분이 안 되고 있다. 그건 이미 깊고 엄청나게 깊은 어둠이 아직도 있어서, 일본의 큰 정치 경제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어둠의 부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것은 틀림없지만, 국민의 눈으로 보면 검찰, 더더욱 그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돈을 받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둠의 부분을 전부 비춰 달라고. 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3. 평가
4. 관련 작품
종류 | 제목 | 연도 | 출판사 | 비고 |
---|---|---|---|---|
저서 | 『나는 패배했다』 | 1949년 | 교우사(協友社) | 원제 "I was Defeated" (스모가 형무소에서 자료로 쓰여짐) |
저서 | 『운명의 문』 | 1950년 | 록메이샤(鹿鳴社) | |
저서 | 『잔디는 짓밟혀도 - 스가모 전범의 기록』 | 1956년 | 신석간신문사(新夕刊新聞社) | |
저서 | 『악정·총성·난세』 | 1961년 | 고분도(弘文堂) | |
저서 | 『옥중 옥외』 ― 고다마 요시오 일기 | 1974년 | 코사이도 출판(広済堂出版) | |
저서 | 『나는 이렇게 싸웠다』 ― 고다마 요시오 수필·대담 | 1975년 | 코사이도 출판(広済堂出版) | |
저서 | 『싱싱한 강태공』 ― 고다마 요시오 수필 | 1976년 | 코사이도 출판(広済堂出版) | |
영화 | 아아 결전 항공대 | 1974년 | 토에이 | 고다마 요시오 역: 고바야시 아키라 |
영화 | 야쿠자 전쟁 일본의 수령 | 1977년 | 토에이 | 오야마 키쿠오(모델: 고다마 요시오) 역: 우치다 아사오 |
영화 | 일본의 수령 야망편 | 1978년 | 토에이 | 오야마 키쿠오(모델: 고다마 요시오) 역: 우치다 아사오 |
영화 | 일본의 수령 완결편 | 1978년 | 토에이 | 오야마 키쿠오(모델: 고다마 요시오) 역: 가타오카 지에조 |
영화 | 일본의 흑막 | 1979년 | 토에이 | 야마오카 쿠니토모(모델: 고다마 요시오) 역: 사부리 신 |
영화 | 실록 도세이회 초대 마치이 히사유키 | 2006년 | GP 뮤지엄 소프트 | 고다마 요시오 역: 소네 하루미 |
영화 | 실록 도세이회 초대 마치이 히사유키 완결편 | 2006년 | GP 뮤지엄 소프트 | 고다마 요시오 역: 소네 하루미 |
영화 | 극장판 MOZU | 2015년 | 도호 | 요시다 코마오(모델: 고다마 요시오) 역: 비트 다케시 |
드라마 | 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 File.5 「록히드 사건」 | 2016년 | 고다마 요시오 역: 카리야 슌스케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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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黙のファイル : 「瀬島龍三」とは何だっ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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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西中将が自決に使った刀は児玉が贈った物といわれる。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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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翼団体]]・[[大化会]]の村岡健次(後の[[暴力団]][[北星会]]会長・[[岡村吾一]])らが児玉機関で働いていた。中国人や満州人を銃で脅し、恐ろしく安い値で物資を獲得したため略奪と呼ばれた。他の部下には副機関長となった[[吉田彦太郎]]や[[岩田幸雄]]、[[藤吉男]]、[[許斐氏利]]ら[[右翼]]の無法者がそろった。: この類の「○○機関」は当時大陸において非常に多く、前述の表の仕事と比して裏の仕事として中国側へのスパイ活動、抗日スパイの検挙や殲滅等を請け負っていた。以下は里見機関と水田機関とに対する関係である。:: ・児玉は吉田彦太郎を[[里見甫]]のもとへ何度もやって、里見から中国の情報をもらっていた。里見が親しい人にこぼすには、こと中国の情報収集に関しては、児玉はだめだった。 竹森久朝 『見えざる政府-児玉誉士夫とその黒の人脈』 白石書店 1976年 P 70:: ・当初、現地で商事会社東光公司を経営していた'''[[水田光義]]'''の水田機関を通じて物資を調達していた。1943年、水田が暗殺される。'
[38]
문서
'児玉のタングステン保有状況は、[[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の1943年12月14日付調査報告書に詳細な記述がある。: 児玉は1948年の釈放後、'''東京レアメタル'''という会社を[[銀座]]に作った。目的は[[連合国軍最高司令官|SCAP]]のためにタングステンとモリブデンを調達することだった。のちに大元産業と改称された。Glenn Davis and John G. Roberts 守山尚美訳 『軍隊なき占領-ウォール街が「戦後」を演出した』 新潮社 1996年12月 P 100:: [[朝鮮戦争]]の頃、[[大久保利通#家族・子孫|大久保利春]]が代表取締役であった日本海商事は、東京レアメタルの輸送部門を請け負っていた。 竹森久朝 『見えざる政府-児玉誉士夫とその黒の人脈』 白石書店 1976年 P70-71そして児玉は、小松信之助という人物がCIAにタングステンを納入する契約書の保証人となっている。 1954年8月10日に報告された情報。CIA Name Files, the Second Release 2002, Yoshio Kodama.'
[39]
문서
児玉機関のような仕事はすでに[[三井財閥|三井]]、[[三菱財閥|三菱]]などの大企業が入っていたが即決主義で集めたため現地では重宝された。
[40]
문서
巣鴨拘置所での1947年4月21日付取調べによると、児玉機関の資産の総額は当時の日本円に換算して7000万円あったという。また、資産の2/3を吉田彦太郎に与えたとしている。: ただし、終戦時の資産評価額。[[有馬哲夫]]『児玉誉士夫-巨魁の昭和史』文春新書 2013年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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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隊なき占領-ウォール街が「戦後」を演出した
新潮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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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本宮・平沼・平田ら五十九人に逮捕命令
毎日新聞(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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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문서
'{{要出典|date=2014-11|「1948年末、釈放された児玉は中央情報局(CIA)に協力するようになった」と後にアメリカでも報道された}}という。しかし、1953年に記録され2005年に機密解除されたCIA文書で、児玉は次のように評されている。: 諜報工作員としての価値は事実上ゼロ。職業的な嘘つき、ギャング、ペテン師、根っからの泥棒。……。実際の諜報工作技能は皆無であり、金儲け以外に関心がない。Edward Drea, Greg Bradsher, Robert Hanyok, James Lide, Michael Petersen, and Daqing Yang, ''[http://www.archives.gov/iwg/japanese-war-crimes/introductory-essays.pdf Researching Japanese War Crimes - Introductory Essays]'' (2006),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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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児玉誉士夫-巨魁の昭和史
文春新書
2013
[45]
문서
'1948年6月4日の尋問。所有していたという鉱山は以下の通り。{{see also|日本の鉱山の一覧}}: 山梨県 塩山 乙女鉱山(タングステン、モリブデン): 滋賀県 鮎川(ひょうたん石): 京都府 鐘打鉱山(タングステン): 福岡県 福岡鉱山(タングステン): 島根県 清久鉱山(モリブデン): 秋田県 平沢 北日本カーバイド社(タングステン鉄、モリブデン鉄)前掲書『児玉誉士夫-巨魁の昭和史』P.48.'
[46]
문서
'1953年9月1日付報告書『日本人インテリジェント・サービス』が児玉の取り組んでいる課題とするものを4点掲げている。: ・日本共産党を破壊し、共産主義の影響力をアジアから排除すること。: ・日本を反共産主義連盟の主要国とすること。: ・軍閥の再武装を通じて、国家主義的日本を再建すること。: ・予想される日本共産党による流血革命に対抗する計画を練り、それに備えること。前掲書『児玉誉士夫-巨魁の昭和史』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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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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角栄が恐れ、中曽根が泣きついた…戦後「最恐のフィクサー」児玉誉士夫の正体
https://genda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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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戦時犯罪の疑いをかけられたくなかった海軍は児玉に処分を依頼。この海軍の秘密資金を[[米内光政]]海相の了承を得て掌中にしていた。旧海軍の資産のためアメリカも没収せずに、宙に浮いた。そして吉田彦太郎の管理する緑産業ビル地下に隠匿。後の[[本州製紙]]本社所在地。
[50]
문서
'[[北一輝]]、[[大川周明]]と並ぶ右翼のボス。[[児玉源太郎]]の私設秘書であった。[[政友会]]系の黒幕として隠然たる影響力を持った。児玉の出所3日前に病死。 春名幹男 『秘密のファイル : CIAの対日工作』 上巻 共同通信社 2000年 p.264{{see also|隠退蔵物資事件}}'
[51]
문서
「あきらぐみ」と読む。{{see also|萩原吉太郎}}
[52]
문서
アメリカ諜報担当・[[参謀第2部]]。{{see also|キャノン機関}}
[53]
문서
'[[町井久之]]ともに[[芸能|芸能界]]とのつながりも深く、特に[[三田佳子]]と親しい。 「芸能界新興勢力の首領 バーニング・プロ社長の『実力』研究」 p.18'
[54]
문서
'{{see also|永田雅一}}'
[55]
문서
1959年(昭和34年)から1960年(昭和35年)の第一波。[[ドワイト・D・アイゼンハワー|アイゼンハワー]][[アメリカ合衆国大統領|大統領]]の訪日を日本政府に中止させた。
[56]
문서
警察の動員数では大統領の移動経路を確保できなかった。
[57]
문서
このとき自民党からは6億円前後の資金が提供されていたが、右翼と暴力団の間で行方不明となった。児玉らは嫌疑をかけられ真相究明会まで設けられたが、いつしか沙汰やみになった。 竹森久朝 『見えざる政府-児玉誉士夫とその黒の人脈』 白石書店 1976年 P 79-80
[58]
문서
田岡を兄とする
[59]
문서
顧問には日本国粋会、松葉会、義人党などの親分がいた。実名では[[天野辰夫]]や[[橘孝三郎]]、[[小沼正]]、[[佐郷屋留雄]]、[[笹川良一]]、[[三浦義一]]らがいた。全愛会議はスト破りや組合潰しを暴力で行った。
[60]
문서
'[[日乃丸青年隊]]の[[高橋正義]]を議長とし、下部組織には[[住吉会]]系の元組長や[[東声会]]の[[町井久之]]が代表を務める組織があった。新潟県の山中で軍事訓練を行い、児玉は訓練後、「君達各人が一人一殺ではなく一人で百人を殺してくれることを望む」と会員に語った。青思会は日本最大の行動右翼として児玉に反目する者を恐れさせた。{{see also|三和銀行#脚注}}'
[61]
문서
世界反共連盟の地域団体。後に[[統一教会]]系の[[反共]]団体・[[国際勝共連合]]の設立につながる。「[[朝日ジャーナル]]」によれば、米国では、[[文鮮明]]-児玉誉士夫-笹川良一などを通ずる関係が、米下院国際機関小委員会(フレーザー委員会。委員長はドナルド・M・フレーザー民主党議員)での証言で明らかになっている。
[62]
문서
[[山梨県]][[本栖湖|本栖湖畔]]にあった[[日本モーターボート競走会|全日本モーターボート競走連合会]]の施設で開催。
[63]
문서
前身は楠皇道隊
[64]
문서
朴政権の政策には[[統一教会]]が呼応し、[[安岡正篤]]が共鳴した。
[65]
문서
[[統一教会]]に大変賛同的であったことは有名である。
[66]
문서
当時[[銀座]]4丁目の雑居ビルに事務所を構えていた。
[67]
문서
報酬は現金1億円だった。
[68]
문서
日本精蝋では太刀川恒夫が役員に名を連ねたこともある。 竹森久朝 『見えざる政府-児玉誉士夫とその黒の人脈』 白石書店 1976年 P 160
[69]
문서
'児玉が介入した乗っ取り事件は数多い。: ・例えば[[野村證券]]社長の[[瀬川美能留]]から莫大な資金提供を受けていた。: ・[[1973年]]には粉飾決算に揺れる[[殖産住宅相互]]株式会社の株主総会乗り切りに絡んで、同社長の東郷民安から児玉や、配下の[[岡村吾一]]に金銭が渡っている。{{see also|総会屋#総会屋の歴史|神戸製鋼所#政治的問題|M資金}}: ・他にも[[インドネシア]]への政府開発援助では[[東日貿易]]秘書として[[スカルノ]]大統領の夜の相手に選ばれたクラブホステス根元七保子([[源氏名]]はデビ、後の[[デヴィ・スカルノ|デヴィ夫人]])を送り込んで荒稼ぎをしている。'
[71]
문서
博報堂ルート以外でも言論に圧力をかけた例は数多い。悪事を書き立てる正論新聞を黙らせるため、巽産業株式会社代表取締役石井唯博(後の稲川会会長石井隆匡|石井進)を送り込んだこともあった。
[72]
문서
1960年10月設立。現在の実質的な持ち株会社は博報児童教育振興会。
[73]
서적
見えざる政府-児玉誉士夫とその黒の人脈
白石書店
1976
[74]
문서
1972年11月30日に社長就任。9日前に「亜土」という会社を設立。資本金は200万円。のちに博報堂の株式30.6%を所有するトンネル会社となる。株式保有の過程に特別背任容疑をかけられ、1975年11月27日に福井は東京地検特捜部に逮捕された。
[75]
서적
見えざる政府-児玉誉士夫とその黒の人脈
白石書店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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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衆議院会議録情報 第077回国会 予算委員会 第15号
https://kokkai.ndl.g[...]
1976-02-17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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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年11月17日の佐藤栄作日記では、安西浩が中曽根派との協力を得るために児玉と会うことを持ちかけてきたが、佐藤は折角遠のいた児玉と再び接触を持つことや中曽根康弘が児玉の影響を受けることを嫌い、言下に断ったと綴られている。更に佐藤は腹心の福田赳夫や田中角栄に対しても児玉の動向に注意を払うよう伝えている。
[78]
문서
同年3月23日の児玉誉士夫邸セスナ機特攻事件|自宅へのセスナ機の特攻事件では、右翼から非難される退廃ぶりを露呈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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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ロ事件公判 児玉を臨床尋問 苦痛を訴え途中で中止
朝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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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未解決事件 File.05「ロッキード事件」
https://www.nhk.or.j[...]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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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松本清張 時代の闇を見つめた作家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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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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徳間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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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日本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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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領 昭和闇の支配者 三巻
다이와쇼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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