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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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평군은 조선 인조의 손자이자 숭선군의 장남으로, 숙종 대에 혜민서 제조를 역임하며 백성 구제에 힘썼다. 문장력이 뛰어나 장렬왕후의 사책관으로 활동했으나,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조정 대신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았다. 특히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에게 역모 누명을 쓰고 1701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으나, 숙종은 그의 아들들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지 않았다. 1864년에 신원되었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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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1년 사망 - 인현왕후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는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서인 명문가 딸이었으나 희빈 장씨와의 갈등 속에 폐위되었다가 복위 후 건강 악화로 34세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삶은 권력 다툼 속 희생으로 평가받고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 1701년 사망 - 희빈 장씨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로, 뛰어난 미모와 숙종 시대의 당쟁 속에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1660년 출생 - 조지 1세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 출신으로 1714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휘그당을 중용하고 로버트 월폴을 기용하여 내각을 이끌게 했고, 1727년 하노버에서 사망했다. - 1660년 출생 - 마쓰마에 노리히로 (5대)
마쓰마에 노리히로는 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의 5대 번주로, 샤쿠샤인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번정 혼란을 겪었으며, 에조치의 섬주로서 다이묘로 승격되었지만 낮은 영지로 조롱받기도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다. - 조선 숙종 - 경신환국
경신환국은 1680년 숙종 때 서인이 유악 사건과 삼복의 변을 계기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서인이 요직을 차지하며 조선 정계가 서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조선 숙종 - 심재
심재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좌의정 심희수의 후손이며, 문과 급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나 갑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동평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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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조선의 왕족 |
휘 | 이항(李杭) |
출생일 | 1660년 4월 8일 (음력) |
사망일 | 1701년 11월 8일 (음력) |
별칭 | 자(字): 제보(濟甫) 호(號): 존오당(存吾堂) |
배우자 | 박혜(朴蕙) |
부친 | 숭선군 |
모친 | 영풍군부인 평산 신씨 |
자녀 | 2남 1녀 |
2. 생애
1660년(현종 1) 숭선군의 장남으로 태어나 처음 동평정(東平正)에 제수받고, 1680년(숙종 6)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87년(숙종 13) 숙종의 특명으로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임명되어[1]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고,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사책관으로 국상 중에 왕후의 행장을 쓸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동평군의 혜민서 제조 임명은 규정에 없어 조정의 반발을 샀고, 김구, 이단하 등이 임명 철회를 거듭 요청하였다.[2][3] 1688년(숙종 14) 박세채가 동평군 파직을 건의했으나,[4] 숙종은 인조의 친손자인 동평군을 후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종친들을 조사하고, 박세채와 그를 변호한 남구만, 여성제를 위리안치시켰다.[5][6] 동평군의 친척 조사석 또한 박세채를 변호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사 사직하였다.[7]
1689년(숙종 15)부터 숙종의 신임을 얻어 동지사, 사은사의 정사로 중국에 세 차례 다녀오는 등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690년(숙종 16) 숭선군 묘역 작업 중 조정 대신들이 이기양(李基陽)을 시켜 동평군이 가옥을 철거하고 묘를 옮긴다는 상소를 올렸다. 신문고를 울린 동평군의 호소로 조사 결과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관련자들은 귀양을 가고 묘역 일대는 숭선군 가문의 사패지로 하사되었다.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의 모함으로 1701년(숙종 27) 12월 7일(음력 11월 8일) 귀양지에서 42세에 사사되었다. 숙종은 동평군을 아껴 아들들에게는 연좌율을 적용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다.
동평군은 "원통함을 안고 땅속에 들어가지만 황천과 일월이 나의 무죄함을 비추어 줄 것이며 후세에 군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숭선군 묘역 작업은 중단되어 신도비 비신은 없고 좌대만 있다.
1864년(고종 1년) 7월 10일 신원 복작되었다.[8]
2. 1. 출생과 가계
李杭|이항중국어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제보(濟甫), 호는 존오당(存吾堂)이다. 인조와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의 장남이다.2. 2. 관직 생활과 숙종의 총애
1660년(현종 1) 숭선군의 장남으로 태어나 처음에는 동평정(東平正)에 제수받았고, 1680년(숙종 6) 21세에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1687년(숙종 13) 6월 4일 27세 때 숙종의 특별 명령으로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임명되어[1]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에 앞장섰다. 문장이 뛰어나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사책관으로 국상 중에 왕후의 행장을 써 문장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동평군의 혜민서 제조 임명은 규정에 없는 일이라 하여 조정에서 반발했고, 김구, 이단하 등이 임명을 철회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2][3] 1688년(숙종 14) 박세채가 다시 차자를 올려 동평군을 파직하고 다른 종친과 비슷하게 대하라고 건의하였다.[4] 이에 숙종은 동평군이 인조의 친손자로 조금 후하게 대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종척 사이에 시기하고 모함하려 한다며 분노하며 종친을 조사하여 죄를 정하기 전에는 숭선군, 낙선군, 동평군과 그 아우인 동성정 외에는 문안을 들지 못하게 하였다.[5] 또한 박세채의 관직을 체차시키고 박세채를 변호한 남구만과 여성제를 위리안치시켰다.[6] 이때 동평군의 친척인 조사석 또한 박세채를 변호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사 사직하였다.[7]
1689년(숙종 15) 29세 때부터는 숙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중국에 동지사의 정사(正使) 및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세 차례나 다녀오는 등 사신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외교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690년(숙종 16) 동평군은 아버지 숭선군이 죽으면서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공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받들어 묘역 작업을 하던 중에, 숙종이 평소 동평군을 편애하는 것을 투기하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이기양(李基陽)을 시켜 가옥 수백 호를 철거하고 자신의 아버지 묘를 옮기는 행패를 부린다는 상소를 하여 작업이 중단되었다. 동평군이 신문고를 울려 숙종에게 호소하자 임금은 경조(京兆)에 명하여 낭관(郞官)을 시켜 은밀히 현장에 보내어 조사 보고토록 한 결과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어 이기양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귀양을 보내고 숭선군 묘역 일대를 숭선군 가문의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간신들의 끊임없는 투기와 모함을 받았으며, 급기야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집에서 부리던 종을 첩으로 보내어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1701년(숙종 27) 12월 7일(음력 11월 8일) 절도(絶島)의 귀양지에서 향년 42세에 사사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간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사약을 내렸지만 평소 신임하고 아끼던 종숙(당숙)이라 전례를 깨뜨리고 동평군의 아들인 반양도정과 반릉군에게는 연좌율을 적용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려 멸문지화를 면하게 하였다.
동평군이 사사되자 조성하고 있던 숭선군 묘역 작업이 중단되어 현재도 신도비 비신은 찾을 길 없고 좌대만 있을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불자락에 "나는 원통함을 안고 땅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황천과 일월이 나의 무죄함을 비추어 줄 것이며 후세에 군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자료는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3. 외교 활동
1689년(숙종 15년) 동평군은 29세 때부터 숙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중국에 동지사의 정사(正使) 및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세 차례나 다녀오는 등 사신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외교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1]2. 4. 숭선군 묘역 문제
1690년(숙종 16년), 동평군은 아버지 숭선군이 죽으면서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공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받들어 묘역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평소 동평군을 편애하는 것을 투기하던 조정 대신들이 이기양(李基陽)을 시켜 가옥 수백 호를 철거하고 자신의 아버지 묘를 옮기는 행패를 부린다는 상소를 하여 작업이 중단되었다. 동평군이 신문고를 울려 숙종에게 호소하자 임금은 경조(京兆)에 명하여 낭관(郞官)을 시켜 은밀히 현장에 보내어 조사 보고토록 하였다. 조사 결과는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어 이기양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귀양을 보내고 숭선군 묘역 일대를 숭선군 가문의 사패지로 하사하였다.동평군이 사사되자 조성하고 있던 숭선군 묘역 작업이 중단되어 현재도 신도비 비신은 찾을 길 없고 좌대만 있을 뿐이다.
2. 5. 무고의 옥과 죽음
1689년(숙종 15년) 동평군은 숙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중국에 동지사의 정사(正使) 및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세 차례나 다녀오는 등 사신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외교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1690년(숙종 16년), 동평군은 아버지 숭선군이 죽으면서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공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받들어 묘역 작업을 하던 중에, 숙종이 평소 동평군을 편애하는 것을 투기하던 조정 대신들이 이기양(李基陽)을 시켜 가옥 수백 호를 철거하고 자신의 아버지 묘를 옮기는 행패를 부린다는 상소를 하여 작업이 중단되었다. 동평군이 신문고를 울려 숙종에게 호소하자 임금은 경조(京兆)에 명하여 낭관(郞官)을 시켜 은밀히 현장에 보내어 조사 보고토록 한 결과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어 이기양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귀양을 보내고 숭선군 묘역 일대를 숭선군 가문의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동평군은 간신들의 끊임없는 투기와 모함을 받았으며, 급기야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집에서 부리던 종을 첩으로 보내어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1701년(숙종 27) 12월 7일(음력 11월 8일) 절도(絶島)의 귀양지에서 향년 42세에 사사되었다.[8] 그러나 숙종은 간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사약을 내렸지만 평소 신임하고 아끼던 종숙(당숙)이라 전례를 깨뜨리고 동평군의 아들인 반양도정과 반릉군에게는 연좌율을 적용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려 멸문지화를 면하게 하였다.
동평군이 사사되자 조성하고 있던 숭선군 묘역 작업이 중단되어 현재도 신도비 비신은 찾을 길 없고 좌대만 있을 뿐이다. 동평군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불자락에 "나는 원통함을 안고 땅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황천과 일월이 나의 무죄함을 비추어 줄 것이며 후세에 군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자료는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6. 사후
1701년(숙종 27)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집에서 부리던 종을 첩으로 보내어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12월 7일(음력 11월 8일) 귀양지에서 향년 42세에 사사되었다.[8] 숙종은 간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사약을 내렸지만 평소 신임하고 아끼던 종숙(당숙)이라 전례를 깨뜨리고 동평군의 아들인 반양도정과 반릉군에게는 연좌율을 적용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려 멸문지화를 면하게 하였다.동평군이 사사되자 조성하고 있던 숭선군 묘역 작업이 중단되어 현재 신도비는 비신은 찾을 길 없고 좌대만 남아있다. 동평군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불자락에 "나는 원통함을 안고 땅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황천과 일월이 나의 무죄함을 비추어 줄 것이며 후세에 군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 자료는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1864년(고종 1년) 7월 10일 신원 복작되었다.[8]
3.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조부 | 인조(1595~1649) |
조모 | 귀인 조씨(?~1651) - 김자점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됨 |
아버지 | 숭선군(1639~1690) |
외조부 | 신익전(1605~1660) |
외조모 | 조수임(1607~1661) - 장렬왕후의 큰언니 |
어머니 | 영풍군부인(永豊郡夫人) 평산 신씨(1639~1692) |
누나 | 이효순(1659~?) |
여동생 | 이철순(1661~?) |
여동생 | 이희순(1663~?) |
남동생 | 동성도정 이강 |
여동생 | 이종순(1667~?) |
부인 | 군부인(郡夫人) 박혜(1659~1727) - 박세장의 딸 |
장남 | 반양도정 이소(1686~1739) |
차남 | 반릉군 이현(1693~1713) |
장녀 | 윤경구의 처 이씨 |
4. 관련 작품
다음은 동평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 1981년 MBC 드라마 《장희빈》 (배우: 김용건)
- 1988년 MBC 드라마 《인현왕후》 (배우: 임정하)
-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 (배우: 최상훈)
- 2002년~2003년 KBS 드라마 《장희빈》 (배우: 유인촌)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배우: 이상엽, 곽동연)
4. 1. 드라마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18권,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6월 2일(무신) 1번째기사
[2]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18권,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6월 4일(경술) 2번째기사
[3]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18권,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6월 13일(기미) 3번째기사
[4]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19권, 14년(1688 무진 / 청 강희(康熙) 27년) 7월 13일(계미) 1번째기사
[5]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19권, 14년(1688 무진 / 청 강희(康熙) 27년) 7월 14일(갑신) 1번째기사
[6]
서적
명재유고 제11권 서(書)
[7]
백과사전
조사석
[8]
서적
조선왕조실록 고종 1권, 1년(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7월 11일(기유)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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