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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처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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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등처눌은 당나라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소주 출신이다. 그는 민욱 휘하에서 안남에 파견되었다가, 민욱이 호남을 장악한 후 소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886년 민욱이 주악에게 살해당하자, 등처눌은 복수를 결심하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893년 뇌만과 연합하여 담주를 공격, 주악을 죽이고 무안군 유후를 자칭했으며, 이듬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894년 유건봉과 마은의 공격을 받아 패배, 사로잡혀 참수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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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처눌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국가당나라
직책무안군절도사
이름등처눌
원어명鄧處訥
출생일불명
출생지소주
사망일894년
사망지담주
국적당나라
경력소주자사 → 무안군(武安軍)절도사
소속민욱 → (이하 명목상) 당 소종 (사실상 독자 세력)
직업당나라 말기 군벌, 무안군(武安軍)절도사
자(字)충온(沖韞)

2. 생애

등처눌은 소주(지금의 후난성 사오양 시) 출신으로, 출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젊은 시절, 강서도(지금의 장시성 난창 시) 출신 장수 민욱의 휘하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며 안남(지금의 북베트남)에 배치되었다.[5]

881년, 민욱이 안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탄저우(지금의 창사 시)를 지나면서 후난 관찰사를 몰아내고 그 지역을 장악했다.[2] 민욱은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하며 등처눌을 소주 지사로 임명했다.[1]

이후 등처눌은 제장들의 동의를 얻어 7년간 군대를 훈련시켰다. 893년 뇌만과 연합하여 담주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무안군 유후를 자칭하였다. 894년 봄, 당 소종은 등처눌을 정식 절도사로 임명하였다.[8]

그 해 연말, 유건봉마은이 이끄는 군대가 무안군으로 접근했다. 등처눌은 장수 장훈과 등계숭을 파견하여 소주 군대와 함께 용회관(지금의 사오양 시)에서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마은은 이들을 설득하여 군대를 해산시켰고, 그들의 군복을 접수하여 담주로 진군했다. 담주 수비군은 이들을 소주 병사로 오인하여 방비하지 않았고, 마은은 곧장 성 안으로 들어가 잔치를 벌이던 등처눌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유건봉에게 번진을 넘겼다.[8]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등처눌은 소주(邵州, 지금의 후난성 사오양 시) 출신으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젊었을 때, 그는 강서도(江西道, 본거지는 지금의 장시성 난창 시)에서 온 장수였던 민욱의 휘하 사병이 되어 안남(安南, 지금의 북베트남)에 배치되었다.[5] 881년, 민욱과 그의 병사들이 안남에서 돌아오면서 탄저우(현재의 창사시, 후난성)를 거쳐 갔고, 민욱은 후난의 지사를 축출하고 그 지역을 장악했다.[2] 그 후 민욱은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했고 등처눌을 소주의 지사로 임명했다.[1]

2. 2. 민욱 휘하에서의 활동

881년, 민욱과 그의 병사들이 안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담주(潭州, 지금의 후난성 창사 시)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민욱은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본거지는 담주)를 추방하고 호남도를 점령하였다.[6] 그 직후, 민욱은 유후(留後)를 자칭하였고, 등처눌을 소주자사(邵州刺史)에 임명하였다.[5]

2. 3. 무안군 번진 탈취

등처눌은 제장들의 동의를 얻어 7년간 군대를 조련시켰다. 893년 낭주자사(朗州刺史, 지금의 후난성 창더 시) 뇌만과 결탁하여 담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등처눌은 주악을 죽이고 무안군(당시 흠화군은 무안군으로 군호가 다시 명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후를 자칭하였다. 894년 봄, 당 소종은 등처눌을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하였다.[8]

2. 4. 패망

그 해 연말, 유건봉마은이 이끄는 군대가 무안군에 다가왔다. 등처눌은 그의 장수인 소주지휘사(邵州指揮使) 장훈(蔣勛)과 등계숭(鄧繼崇)을 파견하여 소주 군대와 함께 용회관(龍回關, 지금의 사오양 시에 있었다)에서 공격을 저지하게 하였다. 마은은 장훈과 등계숭에게 유건봉의 성공은 예고되었으며, 저항할 수 없다고 설득하였고, 그들은 군대를 해산시켰다. 마은은 그들이 입었던 군복들을 접수하고, 곧장 담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담주 수비군은 이들이 소주에서 온 병사들이라 믿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마은은 곧장 성 안과 군부(軍府)로 들어가서, 마침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등처눌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유건봉에게 번진을 점령하게 하였다.[8]

참조

[1]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신당서 https://zh.wikisourc[...]
[6]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7]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8]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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