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데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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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데 해전은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 반란의 마지막 전투로, 페르시아 제국과 이오니아 도시들의 연합 함대 간에 벌어졌다. 이오니아 반란은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소아시아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지배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원을 받았으나, 라데 해전에서 이오니아 함대가 패배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밀레투스는 파괴되었고, 이오니아 지역은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라데 해전의 패배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으며,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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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폼페이우스 대왕의 아들로, 로마 공화정 말기에 활동하며 카이사르 암살 이후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키웠으나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 끝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 이오니아 반란 - 아르타페르네스
아르타페르네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족이자 다리우스 1세의 형제로, 소아시아 사트라프를 역임하며 이오니아 반란 진압과 페르시아 제국의 팽창에 기여했다. - 이오니아 반란 - 밀티아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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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이오니아 반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날짜 | 기원전 494년 |
장소 | 밀레토스 연안 라데 섬 근처 (현재의 튀르키예) |
좌표 | google_map: 라데 섬 |
결과 | 페르시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이오니아 |
교전국 2 | 페르시아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포카이아의 디오니시오스 |
지휘관 2 | 다티스(?) |
병력 규모 | |
병력 1 | 353척 (헤로도토스) |
병력 2 | 600척 (헤로도토스) |
피해 규모 | |
피해 1 | 246척 |
피해 2 | 57척 |
관련 전투 | |
이오니아 반란 | 낙소스 공성전 사르디스 에페소스 전투 키프로스 마르시아스 전투 라브라운다 전투 페다수스 전투 라데 해전 밀레토스 함락 키오스 말레네 전투 |
2. 배경
미케네 문명 붕괴 후 암흑 시대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들은 아이올리스인, 도리스인, 이오니아인의 세 부족 집단이었다.[42] 이오니아인들은 리디아와 카리아 해안을 따라 이오니아를 구성하는 12개의 도시를 세웠다.[42] 이 도시들은 밀레투스, 미우스, 카리아의 프리에네, 에페소스, 콜로폰, 레베도스, 테오스, 클라조메나이, 포카이아, 리디아의 에리트라이, 사모스 제도, 키오스 제도였다.[43] 이오니아 도시들은 서로 독립적이었지만, 공동의 유산을 인식하고 '문화적 연맹체'를 형성했다.[44][45]
이오니아 도시들은 기원전 560년경 크로이소스 왕에게 정복될 때까지 독립적이었다.[46]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게 리디아가 정복될 때까지 리디아의 통치를 받았다.[47]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지역을 통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토착 엘리트 집단을 통해 통치했지만, 당시 그리스 도시에는 그런 집단이 없었다. 귀족 정치가 존재했지만, 분열된 파벌로 나뉘었다.[48] 페르시아는 각 도시에 참주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했지만, 이는 내부 갈등을 야기했다.[42]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정복한 지 40년 후, 다리우스 1세 통치기에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곤경에 처했다.[49] 기원전 500년,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섬 추방자들에게서 섬을 장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49] 낙소스 정복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라고 여긴 아리스타고라스는 리디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에게 공동 공격을 제안했고, 아르타페르네스는 동의했다.[50]
기원전 499년 봄, 원정은 시작되었지만 실패했다.[51] 군대는 낙소스를 4개월 동안 포위했지만, 결국 군비가 소진되어 본토로 퇴각했다.[52] 아리스타고라스는 아르타페르네스에 의해 지위가 박탈될 것을 확신하고, 밀레토스 전체를 선동하여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이것이 이오니아 반란의 시작이었다.[53] 이오니아인들에게는 반란을 일으킬 충분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고, 페르시아가 시행한 참주제가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54]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은 이오니아, 아이올리스, 도리스까지 반란을 선동했고, 참주제는 폐지되고 민주정이 확립되었다.[55]
아리스타고라스는 소아시아 전체를 반란에 가담시켰지만,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서는 다른 동맹국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56] 기원전 499년 겨울, 그는 그리스로 가서 동맹군을 얻으려 했다. 스파르타 설득에는 실패했지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반란을 지원하기로 했다.[42]
2. 1. 이오니아 반란의 발발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많은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들은 아이올리스인, 도리스인, 이오니아인의 세 부족 집단이었다.[1] 이오니아인들은 리디아와 카리아 해안에 정착하여 이오니아를 구성하는 12개의 도시를 세웠다.[1] 이 도시들은 밀레투스, 뮈우스, 프리에네, 에페수스, 콜로폰, 레베도스, 테오스, 클라조메네, 포카이아, 에리트라이, 사모스, 키오스였다.[2] 이 도시들은 크로이소스 왕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독립적이었다.[3] 이후 리디아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2세에게 정복될 때까지 리디아의 지배를 받았다.[4]페르시아인들은 이오니아를 통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현지 엘리트 집단을 통해 통치했지만, 당시 그리스 도시에는 그런 집단이 없었다. 귀족 정치가 존재했지만, 분열된 파벌로 나뉘었다.[5] 페르시아인들은 각 도시에 참주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했지만, 이는 내부 갈등을 야기했다. 참주들은 시민들의 증오를 피하면서 페르시아의 호의를 유지해야 했다.[1]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정복한 지 약 40년 후, 다리우스 1세 통치기에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곤경에 처했다.[6] 기원전 500년,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추방자들에게서 섬을 장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7] 낙소스 정복으로 밀레투스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라고 여긴 아리스타고라스는 리디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에게 공동 공격을 제안했고, 아르타페르네스는 동의했다.[8]
원정대는 기원전 499년 봄에 출항했지만 실패했다.[9] 군대는 낙소스인들을 4개월 동안 포위했지만, 결국 자금이 고갈되어 본토로 돌아왔다.[10] 아리스타고라스는 아르타페르네스에 의해 지위가 박탈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밀레투스인들을 선동하여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이것이 이오니아 반란의 시작이었다.[11] 이오니아는 반란을 일으킬 여건이 무르익었고, 페르시아가 세운 참주들이 주요 불만이었다.[12]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은 이오니아 전역의 반란을 선동했고, 참주제는 폐지되고 민주정이 수립되었다.[13]
아리스타고라스는 소아시아 전체를 반란에 가담시켰지만,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서는 다른 동맹국이 필요했다.[14] 기원전 499년 겨울, 그는 동맹을 위해 그리스 본토로 갔다. 스파르타 설득에는 실패했지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반란을 지원하기로 했다.[1] 기원전 498년 봄, 아테네 군대(총 25척의 삼단노선)가 이오니아로 출항했다.[15] 그들은 에페수스 근처에서 이오니아 군대와 합류했다.[16]
이 군대는 산을 넘어 아르타페르네스의 수도 사르디스로 향했다.[1]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의 허를 찔러 하부 도시를 점령했지만, 불이 붙자 퇴각하여 에페수스로 돌아갔다.[17]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군대는 그리스 군대를 뒤쫓아 에페수스 외곽에서 따라잡았다. 사기가 저하된 그리스인들은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배했다.[1] 살아남은 이오니아인들은 자기 도시로, 아테네인과 에레트리아인들은 배로 돌아갔다.[1][18]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확산되었다. 이오니아인들은 헬레스폰트와 프로폰티스로 사람을 보내 비잔티움 등을 점령했다.[1] 카리아도 반란에 참여했다.[19] 키프로스 왕국도 페르시아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20] 3년 동안 페르시아 군은 카리아와 키프로스 반란 진압에 전념했고, 이오니아는 불안한 평화를 누렸다.[21] 페르시아의 반격이 절정에 달하자 아리스타고라스는 지도자 지위를 포기하고 밀레투스를 떠났다.[22]
반란 6년째(기원전 494년), 페르시아군은 재정비되었다. 육군과 해군(키프로스, 고대 이집트, 킬리키아, 페니키아 함대)이 모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밀레투스로 직행하여 반란을 진원지에서 해결하려 했다.[23] 메디아 장군 다티스가 이오니아로 파견되어 페르시아 공세의 지휘를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1] 이오니아인들은 파니오니움에서 만나 육지에서의 싸움을 포기하고, 밀레투스인들에게 성벽 방어를 맡겼다. 대신 모든 배를 모아 라데 섬으로 가서 "바다에서 밀레투스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다.
3. 라데 해전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제국 함대와 이오니아 연합 함대가 밀레투스 앞바다의 라데 섬에서 격돌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이오니아 반란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오니아 반란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었다. 기원전 499년, 밀레투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 섬을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 전체를 선동하여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오니아인들은 고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사르디스를 점령하는 등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세가 불리해졌다.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육군과 해군은 반란의 중심지인 밀레투스로 향했다.
이오니아인들은 밀레투스의 방어를 밀레투스인들에게 맡기고, 바다에서 밀레투스를 방어하기 위해 라데 섬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페르시아인들은 이오니아 함대를 회유하려 했고,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결국 사모스 함대가 페르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투에서 이탈했다. 이로 인해 이오니아 함대의 전열이 무너졌고, 키오스 함대 등 일부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이오니아 함대는 대패했다.
라데 해전의 패배로 이오니아 반란은 거의 종식되었다. 이듬해 페르시아인들은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고 소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다.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처벌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492년, 1차 페르시아 원정이 시작되면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1. 전력
이오니아 연합 함대는 밀레투스, 키오스, 레스보스, 사모스 등 여러 도시 국가의 함선 353척으로 구성되었다.[66][24] 각 도시 국가별 함선 수는 다음과 같다.
헤로도투스는 전선의 배열 순서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밀레투스—프리에네—뮈우스—테오스—키오스—에리트라이아—포카이아—레스보스—사모스 순으로 기록했다.[42][1]
페르시아 함대는 페니키아, 고대 이집트, 킬리키아, 키프로스 등에서 징발한 함선 600척으로 구성되었다.[67][1] 페르시아 함대는 노련한 메디아 출신 장군 다티스가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9][1]
3. 2. 경과
페르시아 군은 이오니아 함대의 규모를 보고 두려움을 느껴 내분을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42] 이오니아 참주들을 통해 각 도시를 회유하려 했으나 처음에는 거부당했다.[42]
이오니아인들은 회의를 열어 전쟁 수행 방식을 논의했다. 포카이아의 장군 디오니시우스가 군사 훈련을 제안했고, 이오니아 함대는 7일 동안 훈련을 받았으나, 고된 훈련에 불만을 품은 선원들은 이후 복종을 거부했다.[70]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사모스 함대는 이를 보고 페르시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투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28]
전투가 시작되자 사모스 함대는 약속대로 돛을 올리고 전장을 이탈했다.[1] 그러나 11척의 사모스 배는 남아 전투에 참전했고, 훗날 사모스인들은 이들의 용기를 기리는 기둥을 세웠다.[1] 사모스 함대의 이탈을 본 레스보스 함대도 도주하면서 이오니아 함대의 전열은 무너졌다.[1]
키오스 함대를 비롯한 일부는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이오니아 함대는 대패하고 말았다.[30]
3. 3. 결과
라데 해전에서 이오니아 함대가 패배하면서 이오니아 반란은 사실상 끝났다. 밀레투스는 포위되었고, 페르시아군은 "벽에 굴을 파고 모든 장치를 사용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자는 죽임을 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32] 고고학적 증거는 라데 해전 이후 도시가 광범위하게 파괴되고 버려졌음을 보여준다.[1] 그러나 일부 밀레토스인들은 도시에 남아 있거나 빠르게 돌아왔지만, 밀레토스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1] 페르시아인들은 도시와 해안 토지를 차지하고, 나머지 밀레토스 영토는 페다수스에서 온 카리아인들에게 주었다.[34] 포로로 잡힌 밀레토스인들은 수사로 끌려가 다리우스 1세 앞에 섰고, 다리우스는 그들을 페르시아 만 해안, 티그리스 강 어귀 근처에 정착시켰다.
많은 사모스인들은 라데 해전에서 그들의 장군들이 보인 행동에 경악하여, 아이케스가 돌아와 그들을 다스리기 전에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장클레에서 온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 시칠리아 해안에 정착하기로 했고, 페르시아인에게서 탈출한 밀레토스인들을 데려갔다.[1] 사모스 자체는 라데 해전에서의 배신 때문에 페르시아인에 의한 파괴를 면했다.[35]
라데 해전 이후 대부분의 카리아는 페르시아에 항복했지만, 일부 요새는 무력으로 점령해야 했다.[1] 페르시아 함대와 군대는 밀레토스에서 겨울을 보낸 후 기원전 493년에 반란의 마지막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출항했다. 그들은 키오스, 레스보스, 테네도스 섬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본토로 이동하여 이오니아의 나머지 도시들을 점령했다.[36]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그 이후에 고통을 겪었지만, 밀레토스와 같은 운명을 겪은 곳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37] 그 후 페르시아군은 프로폰티스 아시아 측의 정착지를 재정복했고, 함대는 헬레스폰트의 유럽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각 정착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아시아 전역이 이제 페르시아 통치로 확고히 돌아오면서, 반란은 마침내 종결되었다.[38]
페르시아인들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처벌이었다.[39] 이오니아 반란은 다리우스 제국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본토 그리스의 국가들은 처리하지 않으면 그 안정을 계속 위협할 것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1] 그리하여 제1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다음 해인 기원전 492년에 시작되었고, 마르도니우스가 파견되어 그리스로 가는 육상 접근로를 평정하고, 가능한 경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로 진격했다.[40] 트라키아는 다시 정복되었고,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종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해군 재난으로 인해 진전이 중단되었다.[1] 기원전 490년에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에게 해를 건너 키클라데스를 정복한 후 에우보이아 앞바다에 도착했다. 에레트리아는 포위되어 점령되고 파괴되었고, 그 부대는 아티카로 이동했다. 마라톤 만에 상륙한 그들은 아테네 군대와 맞붙어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첫 번째 페르시아 시도는 종식되었다.[41]
4. 이오니아 반란의 의의와 영향
이오니아 반란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반란은 페르시아의 팽창 정책에 제동을 걸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기원전 499년,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섬 정복 실패의 책임을 모면하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다.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이 이에 호응하여 반란에 참여했고, 고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도 반란군을 지원했다.
초기에는 반란군이 사르디스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페르시아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고, 라데 해전에서 이오니아 함대를 격파하면서 반란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이오니아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게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을 인식시키고, 이후 벌어질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반란 지원은 페르시아의 1차 페르시아 원정의 빌미가 되었다.
이오니아 반란은 강대국의 억압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역사적 사례로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중시하는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 관련 인물
- '''아리스타고라스''' : 밀레투스의 참주였으며, 이오니아 반란을 주도했다.[6] 낙소스 섬 정복 실패 후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반란을 일으켰다.[11]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지도자 지위를 포기하고 도망쳤다.[22]
- '''다리우스 1세''' :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6] 이오니아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 '''아르타페르네스''' :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프(총독).[8] 아리스타고라스와 함께 낙소스 원정을 공동 지휘했으나 실패했다.[10]
- '''디오니시오스''' : 포카이아 출신 장군.[70] 라데 해전에서 이오니아 함대를 지휘할 것을 제안했다.[70]
- '''히스티아이오스''' : 밀레투스의 참주였으나, 다리우스 1세에게 불려간 후 아리스타고라스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6. 관련 자료
라데 해전에 관한 주요 고대 자료는 다음과 같다.
- 헤로도토스, ''역사''[1]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2]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총서''[3]
- 키케로, ''법률론''[4]
6. 1. 고대 자료
- 헤로도토스, ''역사''[1]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2]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총서''[3]
- 키케로, ''법률론''[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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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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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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