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움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라티움 전쟁은 고대 로마와 라틴족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통칭하며, 로마 왕정 시대부터 로마 공화정 시대까지 여러 차례 발생했다. 초기 전쟁은 로마의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 시대에 라티움 부족의 침략으로 시작되었고,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도 라틴족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클루시움, 포메티아, 레길루스 호수 등에서 라틴족과의 전쟁이 벌어졌으며, 기원전 493년에는 카시우스 조약을 통해 상호 군사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80년대에는 프레네스테를 중심으로 한 라틴 도시들의 반란이 있었고, 기원전 361년에는 티부르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최종적으로 기원전 340년부터 338년까지 이어진 라티움 전쟁에서 로마는 승리하여 라티움 동맹을 해체하고, 라틴족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4세기 로마 공화국 - 알리아 전투
알리아 전투는 기원전 390년경 세노네스족이 로마 공화국군을 격파하여 로마에 큰 피해와 "갈리아 공포증"을 남기고 군사 시스템 재정비에 영향을 준 전투이다. - 기원전 4세기 로마 공화국 -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기원전 367년에 로마 공화정의 평민인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가 제안한 법률로, 평민의 채무 문제 해결, 토지 소유 제한, 집정관의 평민 선출, 종교적 직책에 대한 평민 개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특히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로마 최고 관직에 평민의 진출을 보장하고 정치적 기회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라티움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명칭 | 라티움 전쟁 |
로마자 표기 | Bellum Latinum |
시기 | 기원전 643년 – 기원전 338년 |
장소 | 라티움 |
결과 | 로마의 승리 |
상세 결과 | 라틴 동맹 해체 |
교전 세력 (기원전 509년 이전) | |
공격측 | 로마 왕국 |
방어측 | 라틴족 |
교전 세력 (기원전 509년 이후) | |
공격측 | 로마 공화정 |
공격측 동맹 | 삼니움 아리차 |
방어측 | 라틴 동맹 (기원전 793년 – 기원전 338년) |
방어측 동맹 | 클루시움 포메티아 코라 캄파니아인 볼스키족 시디키니 티부르 아룬키 |
주요 전투 목록 | |
주요 전투 상세 목록 | |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 |
지휘관 | 데키우스 무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2. 로마 왕정 시대의 전쟁 (기원전 7세기 - 기원전 6세기)
초기 라티움 부족들은 로마 왕정에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7세기 안쿠스 마르키우스 시대에 라티움인들은 로마와 최초로 전쟁을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항목에서 다룬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통치 시기, 라틴족은 두 차례에 걸쳐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항목에서 다룬다. 이 전쟁은 전승상의 로마 건국 시기 기록이므로, 전설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로마 왕정의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던 타르퀴니우스의 원군이 된 라티움인들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레길루스 호수 전투는 기원전 496년경 벌어진 최대 격전이었다. 로마 측은 독재관(딕타토르)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와 그의 마기스테르 에퀴텀 티투스 에부티우스 엘바 등이 군대를 이끌었다. 라티움 측은 투스쿨룸의 왕자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와 타르퀴니우스,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지휘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었다. 타르퀴니우스가 참전했기에 로마군은 이전보다 격렬하게 싸웠고, 격전 끝에 로마군이 승리했다.
포스투미우스와 에부티우스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고, 포스투미우스는 이 승리로 '레길렌시스'(Regillensis) 칭호를 얻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원전 495년경 클루시움(현 키우시)에서 사망했다.
레길루스 호수 전투 이후에도 잠시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기원전 493년에 휴전했다.
2. 1. 안쿠스 마르키우스 시대의 전쟁
리비우스에 따르면, 라티움인들은 로마의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그의 할아버지 누마 폼필리우스처럼 평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먼저 로마를 침략했다. 로마 사절단이 피해 배상을 요구하자, 라티움인들은 경멸적인 답변을 했다. 이에 안쿠스는 라티움에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는 로마가 페티알 의례를 통해 전쟁을 선포한 최초의 사례였다.[1]안쿠스 마르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라티움 도시 폴리토리움을 점령했다. 폴리토리움 주민들은 사비니족과 알바 롱가와의 전쟁에서처럼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 정착하여 새로운 로마 시민이 되었다. 이후 다른 라티움인들이 폴리토리움을 점령하자, 안쿠스는 다시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2] 또한 안쿠스는 라티움 도시 텔레니와 피카나를 정복하여 더 많은 시민들을 로마로 이주시켰다.[2]
이후 전쟁은 라틴 도시 메둘리아에 집중되었다. 메둘리아는 강력한 수비대를 갖추고 요새화도 잘 되어 있었다. 도시 밖에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로마가 승리했다. 안쿠스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왔다. 더 많은 라티움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이주되었고, 팔라티노 언덕 근처 무르키아 신전 옆 아벤티노 언덕 기슭에 정착했다.[2]
2. 2.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의 전쟁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 라틴족은 로마와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첫 번째 전쟁은 ''개선 축제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88년 이전에 발생했는데, 타르퀴니우스는 라틴 도시 아피올라이를 급습하여 로마로 많은 전리품을 가져왔다.[3]두 번째 전쟁에서 타르퀴니우스는 라티움을 완전히 정복하고 코르니쿨룸, 고대 피쿨레아, 카메리아, 크루스투메리움, 아메리올라, 메둘리아, 노멘툼 등 라틴족에 속하거나 그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여러 도시를 점령한 후 평화 협정을 맺었다.[4]
3. 로마 공화정 초기 시대의 전쟁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5세기)
기원전 501년, 로마는 투스쿨룸의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가 주도하는 라틴 도시 30곳의 동맹 결성 소식을 접했다. 이 소식과 사비니족과의 분쟁으로 인해 티투스 라르키우스가 로마 최초의 독재관으로, 스푸리우스 카시우스가 그의 기병장관으로 임명되었다.[8]
라틴족과의 본격적인 전쟁은 기원전 499년 또는 기원전 496년에 시작되었다. 피데나이 포위, 크루스투메리움 점령, 프레네스테의 로마 귀순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레길렌시스가 독재관으로, 티투스 에부티우스 엘바가 기병장관으로 임명되어 로마 군대를 이끌고 라틴 영토로 진격하여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승리했다.[9]
기원전 495년, 라틴족은 볼스키족의 로마 공격 동참 요청을 거부하고 볼스키족 사절을 로마로 인도했다. 로마 원로원은 이에 감사하며 6,000명의 라틴인 포로를 석방했고, 라틴족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에 금관을 보내 화답했다. 석방된 라틴인 포로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이 감사를 표하며 로마와 라틴족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라틴족은 그해 볼스키족의 침략을 로마에 경고하기도 했다.[10]
기원전 493년, ''포에두스 카시아눔'' 조약이 체결되어 로마를 중심으로 라틴 도시들 간의 상호 군사 동맹이 맺어졌다. 헤르니키족도 이 동맹에 참여했다. 라틴 동맹의 정확한 작동 방식은 불확실하지만, 5세기 동안 아에퀴족과 볼스키족의 침략 위협에 맞서는 공동 방위 목적은 분명했다. 이 시기 아펜니노 산맥에서 평원으로 이동하는 사벨리안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침입이 잦았고, 일부 라틴 공동체가 점령되기도 했다. 고대 자료에 따르면 5세기 전반에 걸쳐 아에퀴족, 볼스키족과의 전투가 거의 매년 벌어졌으며, 이는 격렬한 전투보다는 습격과 반격 위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은 로마 건국 초기 기록의 일부이므로 전설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 왕정의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추방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에트루리아 출신 타르퀴니우스의 원군이 된 라티움인들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레길루스 호수 전투는 이 전쟁의 최대 격전으로, 기원전 496년경 벌어졌다. 로마군은 독재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레길렌시스와 그의 기병장관 티투스 에부티우스 엘바가 이끌었다. 라티움 군은 투스쿨룸의 왕자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 타르퀴니우스, 그리고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지휘했다. 타르퀴니우스의 참전으로 로마군은 이전보다 격렬하게 싸웠고, 격전 끝에 라티움 군을 격파했다. 포스투미우스는 '레길렌시스' 칭호를 얻고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기원전 495년경 클루시움에서 사망했다.
3. 1. 클루시움과 아리키아 간의 전쟁 (기원전 508년)
라르스 포르세나가 로마와의 전쟁을 끝낸 후, 그의 아들 아룬스는 군대를 이끌고 라틴 도시 아리키아를 공격했다. 아리키아인들은 라틴 동맹과 쿠마이에 도움을 요청했고, 아리키아 성벽 밖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클루시움 군대를 격파했다.[8]3. 2. 포메티아 반란 (기원전 503년)
포메티아(Pometiala)와 코라(Corala)는 로마의 식민 도시였으나, 아우룬키 부족의 지원을 받아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8] 로마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포메티아를 파괴했다.[9]3. 3. 레길루스 호수 전투와 카시우스 조약 (기원전 498년 - 기원전 493년)
레길루스 호수 전투는 기원전 496년경 로마와 라틴 동맹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로마군은 독재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레길렌시스와 그의 기병장관 티투스 에부티우스 엘바가 이끌었다. 라틴 동맹군은 투스쿨룸의 왕자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와 로마 왕정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그리고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지휘했다.타르퀴니우스가 이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싸웠고, 격전 끝에 라틴 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포스투미우스는 '''레길렌시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9] 타르퀴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원전 495년경 클루시움에서 사망했다.
레길루스 호수 전투 이후에도 전쟁은 잠시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493년에 포에두스 카시아눔(카시우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로마와 라틴 도시들은 상호 군사 동맹을 맺었고, 로마가 라티움 지역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4. 로마 공화정 중기 시대의 전쟁 (기원전 4세기)
라티움인들이 로마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기원전 340년, 라티움 동맹은 로마 원로원에 로마와 대등한 조건으로 하나의 국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과거 로마가 라티움 동맹의 맹주였던 적도 있었지만, 로마 원로원은 이 요구를 거부했고, 이에 라티움 동맹은 로마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전, 로마는 삼니움인과 제1차 삼니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나, 기원전 341년에 삼니움인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라티움인 중 라우렌테스족(Laurentes)과 캄파니아 지방의 에퀴테스(기사 계급)만이 파엘리그니족(Paeligni)의 지원을 받은 로마 측에 가담했다.
라티움군은 삼니움 지방으로 진입했고, 로마군은 라티움군을 피해 푸키네 호수(Fucine Lake)까지 이동하여 캄파니아 지방을 침공, 베수비우스 산 근교에서 라티움 동맹군 및 캄파니아군을 공격했다. 이 '''베수비우스 전투'''에서 집정관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쿠아투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라티움군을 격파했다. 로마 측 기록에 따르면, 만리우스는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하여 군기를 바로잡았고, 데키우스 무스는 로마군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기원전 339년, 만리우스는 '''트리파눔 전투''' (현재의 카세르타 근교)에서 다시 라티움군을 격파했다. 두 번의 패배로 캄파니아에서 철수한 라티움군은 로마군에 저항할 힘을 잃었다. 패배한 라티움인들은 로마의 힘을 인정해야 했다. 몇몇 라티움 도시들은 로마화되었고, 다른 도시들은 로마의 행정관을 받아들이거나 로마의 식민시가 되었다.
전쟁은 라티움 동맹의 해체와 라티움 동맹이 로마의 영향 아래 놓이는 결과를 낳았고, 라티움 동맹에는 로마 시민권과는 다른 라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라티움 전쟁 종결 약 10년 후, 삼니움인과의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4. 1. 라틴족의 로마 이탈 (기원전 389년 - 기원전 385년)
갈리아인의 로마 약탈 이후, 라틴족과 헤르니키족은 로마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로마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로마의 세력 약화를 틈탄 시도였다.[37][38][39]기원전 381년, 투스쿨룸은 로마 영토에 거의 둘러싸이게 되었고, 로마는 투스쿨룸을 합병하여 영토와 인력을 늘리고, 티부르와 프레네스테를 알바 언덕의 도시들로부터 분리하는 이점을 얻었다.[40] 투스쿨룸은 로마 시민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최초의 로마 ''무니키피움''이 되었다.[41] 그러나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조작되었거나 후대의 사건을 투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42]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80년 로마에서 인구 조사가 실패한 후, 평민 호민관들은 부채 탕감을 요구하며 프레네스테와의 전쟁을 위한 군단 모집을 방해했다. 프레네스테인들이 가비 지역으로 진격했다는 소식에도 호민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로마에 야전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프레네스테 군은 콜린 문 앞까지 진격했다. 이에 로마인들은 T. 퀸크티우스 친친나투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프레네스테인들은 앨리아로 물러나 주둔했는데, 이는 이전에 같은 장소에서 갈리아인에게 패배했던 기억이 로마인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라틴인과의 이전 승리를 떠올리며 복수할 기회를 잡았다. 독재관은 A. 셈프로니우스에게 기병대로 프레네스테인의 중앙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군단과 함께 혼란에 빠진 적을 공격했다. 프레네스테인들은 첫 공격에 무너져 프레네스테가 보일 때까지 도망쳤다. 로마인들은 프레네스테에 종속된 8개 마을을 점령하고, 벨리트라이를 공격했다. 로마군이 프레네스테 앞에 도착하자 프레네스테인들은 항복했다. 티투스 퀸크티우스는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와 프레네스테에서 가져온 유피테르 임페라토르의 조각상을 카피톨 언덕에 세웠다.[44]
현대 역사가들은 티투스 퀸크티우스의 독재관 재임과 기원전 380년의 연대를 대체로 받아들인다. 프레네스테에 종속된 아홉 개의 마을을 점령하고 프레네스테인들이 평화를 간청하게 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여겨진다.[49]
4. 2. 로마와 프레네스테 간의 전쟁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9년)
제시된 소스에는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9년 프레네스테와 로마 간의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대신 투스쿨룸과의 분쟁, 볼스키족 및 라틴족과의 전투 등 로마의 다른 군사 활동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와 요약만으로는 "로마와 프레네스테 간의 전쟁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9년)" 섹션의 내용을 작성하기 어렵다. 주어진 소스에서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으므로, 요약문의 내용을 기반으로 간단하게 서술하는 것이 최선이다.(내용 없음 - 주어진 소스에 해당 기간 동안 프레네스테와 로마 간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음)
4. 3. 투스쿨룸 합병 (기원전 381년)
리비우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밀루스는 볼스키족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투스쿨룸인들을 발견하고 로마로 데려와 심문 후 투스쿨룸에 전쟁을 선포했다.[37] 플루타르코스는 카밀루스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투스쿨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기록했다.[38] 투스쿨룸은 저항하지 않았고, 카밀루스는 투스쿨룸 지도자들에게 로마에서 변호하도록 명령했다. 로마는 투스쿨룸에게 평화를 허락하고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39]기원전 381년까지 투스쿨룸은 거의 로마 영토에 둘러싸여 합병은 로마에게 이득이었다. 로마는 영토와 인력을 늘리고, 티부르와 프레네스테를 알바 언덕의 도시들로부터 분리할 수 있었다.[40] 투스쿨룸은 최초의 로마 ''무니키피움''이 되었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조작되었거나 후대의 사건을 투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코넬(1995), 오클리(1998), 포사이트(2005)는 기원전 381년의 투스쿨룸 합병을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41] 리비우스와 다른 후대 작가들은 투스쿨룸의 합병을 자비로운 행위로 묘사했지만, 이는 공격적인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후대의 사건들은 투스쿨룸이 아직 로마의 손아귀에 확실히 들어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42] 로마 시대에 투스쿨룸의 최고 행정관들은 아이딜의 칭호를 가졌지만, 기원전 381년에는 투스쿨룸이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3]
4. 4. 티부르와의 전쟁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54년)
Tiburla는 라틴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지만, 문헌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리비우스는 로마와 티부르 간의 기원전 361년부터 354년까지 이어진 긴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과 관련된 두 번의 개선식이 개선식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59]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원전 361년에 티부르테스인들이 헤르니키에 대한 원정에서 돌아오는 로마 군대에 문을 닫으면서 발생했다. 양측 모두에서 수많은 불만이 제기되었고, 로마인들은 페티알레스(fetials)가 배상을 받지 못하면 티부르테스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60] 이 해에는 약탈하는 골족 군대가 로마 영토를 침략하는 사건도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이 골족들은 티부르 인근으로 이동했고, 골족과 티부르테스인들은 동맹을 맺었다. 티부르테스인들에게 재보급을 받은 골족들은 캄파니아로 이동했다.[61]
다음 해인 기원전 360년, 집정관 가이우스 포에틸리우스(리비우스에 따르면 ''코그노멘'' "발부스"였지만, 다른 자료에 따르면 "리보 비솔루스"였다[62])는 티부르에 맞서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골족들이 캄파니아에서 다시 나타났고, 티부르테스인들의 지휘하에 라비키, 투스쿨룸, 알바의 영토를 약탈했다. 이에 로마인들은 Q. 세르빌리우스 아할라를 독재관으로 임명했다. 독재관은 콜린 문 근처에서 골족들을 격파했다. 골족들은 티부르로 도망쳤지만 집정관에게 가로막혔다. 티부르테스인들은 동맹군을 돕기 위해 출격했지만 실패했고, 티부르테스인과 골족은 모두 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독재관은 집정관들을 칭찬하고 직에서 물러났다. 포에틸리우스는 골족과 티부르테스인에 대한 이중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티부르테스인들은 로마인들의 업적을 폄하했다.[63] 파스티 트리움팔레스(Fasti Triumphales)는 집정관 C.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가 7월 29일에 골족과 티부르테스인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59년에 티부르테스인들은 밤에 로마 시를 공격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날이 밝아 비교적 소규모 병력임을 확인하자, 두 개의 문에서 공격하여 티부르테스인들을 격파했다.[64]
로마와 티부르 사이의 전쟁 원인에 대한 일부 불일치가 있으며, 이 해의 세부 사항 중 많은 부분이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 이 갈리아 전쟁의 역사적 사실 자체도 다소 의심스러우며, 이는 리비우스와 F.T.가 모두 개선식을 집정관에게 귀속시킨다는 사실과 함께, 세르빌리우스의 독재관직의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의문을 낳았다.[65]
5. 라티움 전쟁 (기원전 340년 - 기원전 338년)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38년까지 벌어진 라티움 전쟁은 라틴족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 마지막 시도였다.
기원전 358년, 라티움은 갈리아족의 침략 위협을 받았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는 라틴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라틴족은 프라에네스테에 도달하여 페둠 주변에 정착한 갈리아족에 대항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고,[66] 로마 독재관 C. 술피키우스 페티쿠스가 이끄는 로마-라틴 연합군은 갈리아족을 격파했다. 같은 해, 로마는 폼티나 부족을 설립했다.[67]
이 라틴족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이전 몇 년 동안 로마와 전쟁을 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라틴 도시들은 로마가 폼틴 지역에 영구 주둔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을 수 있지만, 갈리아족의 위협은 로마와의 동맹을 재개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티부르와 프라에네스테는 로마에 적대적이었다.[68] 다른 라틴 도시들은 로마에 적대적이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358년 이후에도 계속 병력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350년대와 340년대에 로마의 팽창 속도가 빨라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69]
1년 뒤 트리파눔 전투에서 만리우스는 라티움을 다시 무찔렀다. 캄파니아에서 밀려난 라티움군은 라티움으로 가서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로마의 역년 목록(fasti)에 따르면 기원전 338년에 전쟁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78]
5. 1. 전쟁의 발발
기원전 343년 삼니움이 카푸아 북부의 작은 도시 국가 시디키니를 공격하여 제1차 삼니움 전쟁이 일어났는데, 기원전 341년 로마와 삼니움이 평화조약을 맺어 삼니움에 시디키니를 넘겨주었다.[77] 당초 로마 편에서 싸우던 라티움과 캄파니아 동맹국은 이 조약을 시디키니에 대한 치욕스러운 배반으로 여겼다.[78] 기원전 340년경 한 대사가 로마 원로원에 파견되어 라티움과 로마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단일 국가 형성을 요구했다. 이전부터 로마는 라티움 동맹의 맹주였으므로, 이 제의를 거부하였고 전쟁이 일어났다.라티움인들은 삼니움으로 진입했다. 로마-삼니움 연합군은 푸치노 호수로 이동해서 라티움을 피해 캄파니아 영토로 들어가 베수비우스 화산 인근에서 라티움과 캄파니아군을 공격했다. 베수비우스 전투에서 데키우스 무스와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지휘를 받은 로마군은 라티움을 격파했다. 로마측 사료에 따르면 만리우스의 아들이 우연히 불복종을 저지르자 그를 처형하여 일벌백계로 삼았다고 하며, 데키우스는 로마의 승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신에게 희생했다고 한다.
5. 2. 주요 전투
베수비우스 전투에서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라티움군을 격파했다.[78] 로마 측 기록에 따르면, 만리우스는 명령을 어긴 아들을 처형하여 군기를 바로잡았고, 데키우스 무스는 로마군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신에게 바쳤다고 한다.기원전 339년, 만리우스는 트리파눔 전투에서 다시 라티움군을 격파했다.[78]
5. 3. 전쟁의 결과
라티움 전쟁에서 로마는 라티움족과 볼스키족을 상대로 승리했다. 전쟁 결과, 라틴 동맹은 해체되었고 로마는 라티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일부 라틴 도시는 로마에 완전히 통합되었고, 나머지는 제한적인 자치권을 가진 동맹 도시로 남았다. 캄파니아는 ''무투표 시민권(civitas sine suffragio)''을 부여받아 로마의 영향권 아래에 놓였는데, 이는 로마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가지지만 로마 민회에서의 투표권은 제외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로마가 다른 지역을 통합하는 모델이 되었다.[76]
패배한 라티움인들은 로마의 세력을 인정해야 했다. 몇몇 라티움 도시들은 로마화되었고, 다른 도시들은 로마의 행정관을 받아들이거나 로마의 식민시가 되었다. 라티움 전쟁으로 라티움 동맹은 해체되고 로마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라티움 동맹에는 로마 시민권과는 다른 형태인 라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6. 결과
기원전 339년, 트리파눔 전투(현재의 카세르타 근교)에서 만리우스는 라티움군을 격파했다. 캄파니아 지방에서 밀려난 라티움군은 라티움 지방으로 이동했지만, 로마군에 저항할 전력이 부족했다. 결국 라티움인들은 로마의 세력을 인정해야 했다. 일부 라티움 도시는 로마화되었고, 다른 도시들은 로마의 행정관을 받아들이거나 로마의 식민시가 되었다.
6. 1. 정치적 변화
라티움인들이 로마로부터 자립하려는 움직임은 라티움 전쟁 시작의 큰 원동력이었다. 기원전 340년, 라티움 동맹 측은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파견하여 로마와 라티움 동맹이 대등한 조건으로 하나의 국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과거 로마는 라티움 동맹의 맹주였던 시기도 있었지만, 로마 원로원은 라티움 동맹 측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에 라티움 동맹은 로마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78]전쟁은 라티움 동맹의 해체와 라티움 동맹이 로마의 영향 아래 놓이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라티움 동맹에는 로마 시민권과는 다른 형태의 권리인 라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79] 패배한 일부 라티움 도시는 로마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제한적인 시민권(투표권 없는 시민권)을 얻게 된다. 로마의 이러한 정책은 이후 다른 지역의 정복 및 통합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라티움 전쟁 종결 약 10년 후 삼니움인과의 전쟁(삼니움 전쟁)이 다시 발발하게 되었다.
6. 2. 영향
라티움 전쟁은 라티움 민족들이 로마에서 독립하고자 하면서 벌어졌지만,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한 라티움인들은 로마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다. 일부 라티움 도시는 로마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투표권이 없는 제한적인 시민권(civitas sine suffragio)을 얻었다.[79]이 전쟁으로 라티움 동맹은 해체되었고,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라티움 동맹에는 로마 시민권과는 다른 형태의 권리인 라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또한, 라티움 전쟁이 끝난 후 약 10년 뒤에 삼니움인과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2]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3]
서적
Ab Urbe Condita
s:From the Founding [...]
[4]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5]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6]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7]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8]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9]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10]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s:From the Founding [...]
[11]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2]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3]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4]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5]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6]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7]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8]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19]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20]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21]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22]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23]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Italy and Rome from the Bronze Age to the Punic Wars (c. 1000–264 BC)
Routledge
[24]
서적
A Commentary on Livy Books VI-X, Volume 1 Introduction and Book VI
Oxford University Press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29]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34]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s:From the Founding [...]
[35]
서적
Camillus
[36]
서적
Okley
[37]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6#25
s:From the Founding [...]
[38]
서적
Plutarch, Camillus
[39]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6#25
s:From the Founding [...]
[40]
서적
Cornell
[41]
서적
A Critical History of Early Rom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2]
서적
Cornell
[43]
서적
Oakley
[44]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6#27
s:From the Founding [...]
[45]
서적
D.H.
[46]
서적
Fest.
[47]
서적
D.S
[48]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6#30
s:From the Founding [...]
[49]
서적
Cornell
[50]
서적
Oakley
[51]
서적
Oakley
[52]
서적
Forsythe
[53]
서적
Forsythe
[54]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6#32
s:From the Founding [...]
[55]
서적
Oakley
[56]
서적
Oakley
[57]
서적
Oakley
[58]
서적
A Commentary on Livy Books VI-X, Volume 2 Books VII-VII
Oxford University Press
[59]
서적
Oakley
[60]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9
s:From the Founding [...]
[61]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1
s:From the Founding [...]
[62]
서적
Oakley
[63]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1
s:From the Founding [...]
[64]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2
s:From the Founding [...]
[65]
서적
Oakley
[66]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2
s:From the Founding [...]
[67]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5
s:From the Founding [...]
[68]
서적
Cornell
[69]
서적
Oakley
[70]
서적
Livy,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7
s:From the Founding [...]
[71]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8
[72]
서적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Book 7#19
[73]
간행물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Italy and Rome from the Bronze Age to the Punic Wars (c. 1000–264 BC)
London, Routledge
1995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