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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퓨지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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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퓨지오 전투는 1836년 텍사스 혁명 당시 멕시코군과 텍사스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멕시코의 중앙 집권화 시도에 반발하여 텍사스 혁명이 발발했고, 멕시코군은 텍사스 걸프 해안을 장악하려 했다. 텍사스군 제임스 패닌 대령은 멕시코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요새를 보강하고, 윌리엄 워드와 에이몬 킹을 파견했으나 킹과 워드의 지휘권 갈등으로 부대가 분열되었다. 결국 텍사스군은 멕시코군에 각개 격파당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는 텍사스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멕시코군의 진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2. 배경

텍사스 혁명이 진행 중이던 시기, 제임스 패닌 대령이 이끄는 텍사스군은 옛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 요새를 보강하고 "디파이언스 요새"라는 이름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초기에 프랜크 W. 존슨과 제임스 그랜트가 지휘하던 텍사스 부대가 멕시코군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골리아드에 모인 지원병들에게 사기를 높이기보다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더불어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이 진군해오면서, 텍사스 반란을 지지했던 인근 정착민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패닌은 인지하게 되었다.

3월 10일, 패닌은 위험에 처한 정착민 가족들을 구출하여 골리아드로 안전하게 데려오기 위해 에이몬 B. 킹과 소규모 부대를 레퓨지오 지역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킹은 현지의 멕시코군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파악하고 레퓨지오의 옛 전도소로 피신하면서 패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패닌은 조지아 대대를 이끌던 윌리엄 워드를 추가로 파견하여 킹을 돕도록 했다. 하지만 워드가 레퓨지오에 도착한 후, 두 지휘관 사이에 지휘권을 놓고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텍사스군이 여러 작은 부대로 나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우레아가 이끄는 멕시코군에게 개별적으로 격파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텍사스군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일부는 이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

킹과 워드가 레퓨지오로 떠나 있는 동안, 샘 휴스턴 장군은 패닌에게 우레아의 멕시코군이 도착하기 전에 골리아드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우레아군의 빠른 진격은 결국 콜레토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텍사스 혁명의 발발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대통령이 이끄는 멕시코 정부는 연방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더욱 중앙 집권적 정부 형태로 나아가려 했다. 1835년 초, 1824년 멕시코 헌법 폐지를 포함한 산타 안나의 점증하는 독재적 정책은 멕시코 전역에서 연방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3] 멕시코군은 오아하카사카테카스 등지에서 일어난 민병대의 봉기를 신속하고 때로는 잔혹하게 진압했다.[4][5]

그러나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의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 특히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 정착민들인 텍시안이 거주하는 텍사스 지역에서는 불안이 계속되었다. 1835년 10월, 텍시안들은 결국 텍사스 혁명이라 불리는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6] 다음 달, 텍시안들은 코아우일라 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824년 헌법의 원칙에 따라 임시 주 정부를 수립했다.[7] 그해 연말까지 텍사스 내의 모든 멕시코 군대는 축출되었다.[8]

텍사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한 산타 안나는 대규모 병력 동원을 시작했고, 1835년 말에는 6,019명의 군대를 확보했다.[9] 12월 말, 그의 지시에 따라 멕시코 의회는 토르넬 칙령을 통과시켰다. 이 칙령은 멕시코 군대에 맞서 싸우는 외국인들을 "해적으로 간주하여, 현재 공화국과 전쟁 중인 국가의 시민이 아니며, 인정된 깃발 아래에서 싸우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규정했다.[10] 당시 해적은 붙잡히면 즉결 처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칙령은 사실상 멕시코군에게 텍사스와의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고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셈이었다.[10]

산타 안나는 직접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산 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진격했으며, 호세 데 우레아 장군에게는 550명의 병력(추후 증원 예정)을 주어 아타스코시타 로드를 따라 골리아드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우레아 부대의 임무는 멕시코군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고, 텍사스 걸프 해안을 정리하며 여러 항구를 점령하여 텍사스로 유입되는 병력과 물자를 차단함으로써 반란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골리아드 작전으로 알려졌으며, 비록 우레아가 궁극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기는 했지만, 작전 지연과 상당한 사상자 발생으로 인해 산타 안나의 주력 부대에 대한 중요한 지원이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다.[11]

2. 2. 산타 안나의 반격 준비와 토르넬 칙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대통령이 이끄는 멕시코 정부는 연방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점차 중앙 집권적 정부 형태로 나아가고 있었다. 특히 1835년 초 1824년 멕시코 헌법을 폐지하는 등 독재적인 정책들은 멕시코 전역에서 연방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3] 멕시코군은 오아하카사카테카스 등지에서 일어난 민병대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4][5] 이러한 불안은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의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지역의 텍사스에는 주로 텍시안이라 불리는 영어 사용 정착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1835년 10월 이들은 텍사스 혁명이라 알려진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6] 다음 달, 텍시안들은 코아우일라 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824년 헌법 원칙에 기반한 임시 주 정부를 세웠다.[7] 1835년 말에는 텍사스 내 모든 멕시코 군대가 축출된 상태였다.[8]

텍사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한 산타 안나는 대규모 병력 소집에 나섰고, 1835년 말 그의 군대는 6,019명으로 증강되었다.[9] 같은 해 12월 말, 산타 안나의 지시에 따라 멕시코 의회는 이른바 토르넬 칙령을 통과시켰다. 이 칙령은 멕시코 군대에 맞서 싸우는 외국인들을 "해적으로 간주하여, 현재 공화국과 전쟁 중인 국가의 시민이 아니며, 인정된 깃발 아래에서 싸우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규정했다.[10] 당시 해적은 붙잡히면 즉결 처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 칙령은 사실상 멕시코군에게 텍사스와의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고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10] 산타 안나는 직접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산 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진격하는 한편, 호세 데 우레아 장군에게는 550명의 병력을 주어 아타스코시타 로드를 따라 골리아드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우레아 부대의 임무는 멕시코군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고, 텍사스 걸프 해안을 장악하여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텍사스로 향하는 병력과 물자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골리아드 작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1] 우레아는 결국 목표를 달성했지만, 작전 지연과 상당한 사상자 발생으로 인해 산타 안나의 주력 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1]

2. 3. 호세 데 우레아의 골리아드 작전

멕시코 대통령 Antonio López de Santa Anna 치하에서, 멕시코 정부는 연방주의 모델에서 더욱 중앙 집권적 정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835년 초 1824년 멕시코 헌법의 철회를 포함한 그의 점점 더 독재적인 정책은 전국적으로 연방주의자들을 봉기하게 만들었다.[3] 멕시코군은 오아하카사카테카스에서 민병대를 진압하는 등, 멕시코 내에서의 봉기를 신속하게 진압했다.[4][5] 불안은 멕시코 주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에서 계속되었다. 미국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인 텍사스는 주로 텍시안으로 알려진 영어를 사용하는 정착민들이 거주했다. 10월에 텍시안들은 텍사스 혁명으로 알려진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6] 다음 달, 텍시안들은 스스로 코아우일라에서 독립한 주로 선언하고 1824년 헌법의 원칙에 기반한 임시 주 정부를 수립했다.[7] 연말까지 모든 멕시코 군대가 텍사스에서 축출되었다.[8]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심한 산타 안나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했고, 1835년 말까지 그의 군대는 6,019명의 병력으로 늘어났다.[9] 12월 말, 그의 명령에 따라 멕시코 의회는 토르넬 칙령을 통과시켜 멕시코 군에 맞서 싸우는 외국인을 "해적으로 간주하여, 현재 공화국과 전쟁 중인 국가의 시민이 아니며, 인정된 깃발 아래에서 싸우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10] 19세기 초, 포획된 해적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따라서 이 결의안은 멕시코군에게 텍시안과의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을 권한을 부여했다.[10] 산타 안나는 직접 대부분의 군대를 내륙으로 이끌고 산 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진격하여 José de Urrea 장군에게 550명의 병력[추가 부대가 뒤따를 것이다]을 아타스코시타 로드를 따라 골리아드로 이끌도록 명령했다. 우레아의 임무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멕시코군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둘째, 텍사스 걸프 해안을 정리하고 다양한 항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진행 중인 병력 및 물자의 흐름을 가로막고 중단시켜 텍사스 반란을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비록 우레아가 결국 그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지연과 많은 사상자는 장군과 그의 부대가 산타 안나 장군의 주력군에게 중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 작전과 텍사스 걸프 해안에서의 반란 진압은 골리아드 작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1]

3. 레푸지오 전투의 전개

제임스 패닌 대령과 그의 병력은 옛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 요새를 보강하고 "디파이언스 요새"로 명명했다. 그러나 초기 전투에서 텍사스군 일부가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과 우레아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의 진격 소식은 골리아드의 텍사스군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패닌은 우레아의 진군으로 인해 텍사스 혁명을 지지하던 레퓨지오 지역 정착민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월 10일, 패닌은 이들 정착민을 구출하기 위해 에이몬 B. 킹 대위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를 레퓨지오로 파견했다. 킹은 현지 멕시코군의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파악하고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에 패닌은 조지아 대대 사령관인 윌리엄 워드 중령을 추가로 파견했다.

레퓨지오 전투 현장 지도


워드가 3월 13일 레퓨지오에 도착했지만, 킹과 워드 사이에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이 내부 분열로 인해 텍사스군은 효과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결국 킹이 이끄는 부대는 독자적인 작전에 나섰다가[14] 멕시코군에게 포위되어 항복 후 처형되었고,[17] 미션에 남았던 워드의 부대 역시 격렬한 전투 끝에 탄약이 소진되어 후퇴를 시도했다.

워드와 그의 부대는 3월 14일 밤 또는 15일 새벽 미션을 탈출하여[19] 빅토리아로 향했으나, 고된 후퇴 과정과 멕시코군의 추격으로 인해 결국 3월 22일 우레아 군대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22] 레퓨지오에서 분리되어 싸웠던 킹과 워드의 부대원 대부분은 항복 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23][24] 킹과 워드가 레퓨지오에서 고립되어 있는 동안, 패닌은 샘 휴스턴 장군으로부터 골리아드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는 이후 콜레토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3. 1. 패닌의 초기 대응과 분열

제임스 패닌 대령과 그의 부하들은 옛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 요새를 보강하고 "디파이언스 요새"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샌 패트리시오 전투에서 프랜크 W. 존슨 휘하 부대가, 아구아 둘세 전투에서 제임스 그랜트 휘하 부대가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골리아드에 모인 지원병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설상가상으로 패닌은 우레아 장군의 진군으로 인해 텍사스 혁명을 지지하던 정착민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월 7일, 루이스 에이어스는 패닌에게 골리아드에서 남쪽으로 약 약 40.23km 떨어진 마을인 레퓨지오의 소식을 전했다. 일주일 전, 중앙 정부를 지지하는 테하노 그룹인 ''빅토리아나 가르데스''가 마을을 약탈했으며, 이후 카를로스 데 라 가르자 대위가 이끄는 민병대가 마을 외곽에 주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에이어스의 가족을 포함한 일부 친독립 성향의 앵글로계 정착민들은 멕시코 군대에게 잡히거나 데 라 가르자 민병대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며 레퓨지오 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다.[12]

패닌은 수송 수단이 확보되는 대로 이들 정착민을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3월 11일, 보급품 수송을 마치고 돌아온 수레를 이용하여 에이몬 B. 킹 대위와 28명의 병력을 레퓨지오로 파견했다.[12][14] 킹의 부대는 그날 저녁 레퓨지오의 옛 전도소(미션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레퓨지오)에 도착하여 밤을 보냈다.[15] 다음 날(12일), 킹은 에이어스 가족이 머물던 에스테반 로페즈의 목장으로 이동하여 약탈 혐의로 테하노 6명을 체포했다. 이후 약 약 12.87km 떨어진 곳에서 다른 테하노들이 약탈 중이라는 정보를 듣고, 병력 절반을 이끌고 무단으로 추격에 나섰다가 데 라 가르자 부대와 카랑카와 인디언의 매복 공격을 받고 목장으로 후퇴했다. 모든 가족들은 전도소로 옮겨졌다.[15]

킹과 가족들이 전도소로 돌아온 직후, 우레아 군대의 선봉 기병대와 데 라 가르자의 민병대(총 100명 규모)가 도착하여 전도소를 포위했다. 킹은 즉시 패닌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15][14] 같은 날 패닌은 알라모 전투에서 텍사스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16] 킹의 요청에 따라 패닌은 조지아 대대의 사령관인 윌리엄 워드를 구원 부대로 파견했다.

그러나 워드가 레퓨지오에 도착하자 킹과 워드 사이에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이 내부 분열로 인해 텍사스군은 여러 소규모 분견대로 나뉘었고, 결국 우레아의 멕시코군에게 각개 격파당했다. 텍사스군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포로 중 일부는 이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 킹과 워드가 레퓨지오에서 고립되어 있는 동안, 패닌은 샘 휴스턴 장군으로부터 우레아 군대가 접근하기 전에 골리아드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이후 콜레토 전투의 배경이 된다.

3. 2. 킹과 워드의 지휘권 갈등

3월 11일, 에이몬 B. 킹 대위는 레퓨지오의 앵글로계 정착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제임스 패닌 대령의 명령으로 부하 28명과 수레를 이끌고 출발했다.[12][14] 킹의 부대는 그날 저녁 레퓨지오의 옛 전도소(미션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레퓨지오)에 도착했다.[15] 다음 날, 킹은 일부 부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약 약 12.87km 떨어진 곳에서 약탈을 벌이는 테하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카를로스 데 라 가르자의 부하들과 카랑카와 인디언들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교전 후 킹의 부대는 다시 미션으로 후퇴했다.[15]

킹은 곧 우레아 장군의 선봉 기병대와 데 라 가르자의 민병대(총 100명 규모)에게 미션이 포위되자, 패닌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15][14] 패닌은 알라모 전투의 소식을 접한 후, 윌리엄 워드 중령이 이끄는 조지아 대대를 킹의 구원을 위해 파견했다. 워드의 부대는 3월 13일 이른 아침 골리아드를 출발하여 같은 날 오후 레퓨지오에 도착했고, 도착 직후 미션을 공격하던 멕시코군을 잠시 물리쳤다.

그러나 워드가 도착하면서 킹과의 지휘권 다툼이 벌어졌다. 킹은 먼저 현장에 도착한 지휘관으로서 통합 부대의 지휘권을 주장했지만, 워드는 자신의 계급이 더 높고 패닌의 명령(신속히 민간인을 데리고 골리아드로 복귀)을 따라야 한다고 맞섰다. 킹은 워드의 지시를 거부하고, 14일 새벽 자신의 부하들과 일부 조지아 대대 병력을 이끌고 데 라 가르자를 지원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목장을 공격하러 떠났다. 이 결정은 패닌의 전체 지휘 체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4]

킹의 부대는 얼마 가지 못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멕시코 정규군과 마주쳤고, 숲 속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탄약이 떨어져 결국 항복했다. 멕시코 측 기록에 따르면, 킹과 그의 부하들은 데 라 가르자의 민병대에게 항복한 후 멕시코 정규군에게 넘겨졌으며, 1836년 3월 15일 또는 16일 새벽 레퓨지오 미션 근처에서 처형되었다.[17]

한편, 킹이 떠난 후 레퓨지오 미션에 남은 워드의 부대는 다시 우레아의 증원군에게 포위되었다. 14일 하루 동안 멕시코군은 여러 차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지만, 워드의 조지아 대대는 격렬한 저항 끝에 이를 모두 격퇴했다. 조지아 대대는 3명의 부상자만 발생한 반면, 멕시코군은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6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워드의 부대 역시 탄약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14일 늦게, 워드는 우레아 장군에게 항복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는 멕시코군 포로가 전달한 패닌의 편지를 통해 빅토리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8] 탄약이 거의 떨어진 워드는 그날 밤 또는 15일 새벽 폭우를 틈타 부상자와 민간인, 멕시코인 포로들을 남겨두고 미션을 몰래 빠져나와 코파노를 거쳐 빅토리아로 향했다.[19]

워드와 그의 부대는 멕시코 기병대를 피해 늪지대를 따라 이동하며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빅토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우레아 군대가 점령한 상태였고, 짧은 교전 후 부대는 흩어졌다. 워드와 남은 병사들은 3월 22일 디미트의 상륙 지점 근처에서 우레아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22] 그들은 콜레토 전투에서 패닌의 부대에게 약속되었던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항복했지만, 골리아드로 이송된 후 골리아드 학살 당시 대부분 처형되었다. 레퓨지오를 탈출한 워드의 부대원 약 81명 중 워드를 포함한 55명이 처형되었고, 26명은 후안 호세 홀징거와 프란시타 알라베즈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23][24] 킹과 워드의 지휘권 갈등과 분열은 결국 두 부대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 3. 전투의 진행과 텍사스군의 패배



제임스 패닌 대령과 그의 병사들은 옛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 요새를 보강하여 "디파이언스 요새"로 이름을 바꾸었다. 초기 교전에서 프랜크 W. 존슨과 제임스 그랜트가 지휘하던 텍사스군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골리아드에 모인 지원병들을 분발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에 빠뜨렸다. 설상가상으로 우레아 장군의 진군으로 텍사스 혁명을 지지하던 정착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패닌은 알게 되었다.

3월 10일, 패닌은 정착민 가족들을 구출하여 골리아드로 안내하기 위해 에이먼 B. 킹(Amon B. King)과 마차를 끄는 소부대를 파견했다. 킹은 레퓨지오 지역의 멕시코군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파악하고 옛 전도소로 대피하여 패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패닌은 조지아 대대 사령관인 윌리엄 워드 중령을 보내 킹을 돕게 했다. 워드가 3월 13일 오후 레퓨지오에 도착하면서, 두 장교 간에 지휘권을 놓고 갈등이 생겼다. 킹은 현장에 먼저 도착한 지휘관으로서 자신이 연합 부대를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워드는 잠시 휴식 후 민간인들을 모아 골리아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킹은 이를 거부하고, 카를로스 데 라 가르자 대위와 멕시코 민병대에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목장을 공격하겠다며 14일 새벽 자신의 부하들과 일부 조지아 대대원들을 이끌고 미션을 떠났다. 킹이 패닌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패닌의 전체 지휘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8.[14]

킹은 멀리 전진하기 전에 이 지역에 훨씬 더 강력한 멕시코 군사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미션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숲 속에서 은신하며 멈춰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 데 라 가르자가 지휘하는 멕시코 현지 민병대가 작은 텍사스 군대를 발견하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킹의 부대는 나무와 바위 뒤에서 한동안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며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탄약이 떨어졌다. 멕시코 측 기록에 따르면 킹과 그의 부하들은 부상당한 채 가르자의 민병대에게 항복했다. 그들은 정규 멕시코군에게 넘겨졌고, 1836년 3월 15일 또는 16일 이른 아침 레퓨지오 미션 근처에서 처형되었다.[17]

한편, 킹이 떠난 후, 우레아의 병력이 더 많이 도착하여 워드가 있던 미션을 완전히 포위했다. 14일, 멕시코군은 미션을 향해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워드의 조지아 대대는 탄약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미션의 두꺼운 돌담 덕분에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랜시스 매리언 헌트(Francis Marion Hunt) 상사가 지휘하는 중대는 미션 동쪽의 낮은 돌담에서 멕시코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했다. 조지아 대대는 3번, 어쩌면 4번의 주요 공격을 격퇴했다. 조지아 대대에서 부상당한 사람은 3명뿐이라고 보고되었다. 한 병사의 상처는 치명적인 것으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다리에 총을 맞아 걸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워드 대령은 대포 사격으로 떨어지는 석재에 맞아 쓰러졌다. 멕시코군 사상자 추정치는 부상자 및 사망자 150명에서 600명까지 다양하다. 우레아 장군의 보고는 시기에 따라 달라졌으며, 텍사스 측 생존자들의 증언도 다양하다. 14일 늦게, 워드는 우레아 장군에 의해 항복 요구와 함께 파견된 멕시코군 포로 에드워드 페리를 통해 패닌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페리는 워드의 전령과 패닌이 보낸 전령 모두 우레아에게 가로막혔다고 전했다. 이 편지는 워드에게 텍사스군이 재집결할 빅토리아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18]

14일 저녁 무렵, 우레아는 보병과 기병 1,200명으로 추정되는 병력, 100~200명의 멕시코 기병 민병대, 그리고 여러 점의 포병을 집결시켰다. 우레아 장군은 위협으로 항복을 강요하려는 의도로 자신의 병력 규모를 숨기지 않았다. 워드는 페리 씨를 그의 대답과 함께 우레아에게 돌려보냈다. "조지아인들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알과 화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가자 워드는 패닌의 명령을 따를 계획을 세웠다. 그날 밤 또는 3월 15일 이른 아침 폭우 속에서 조지아 대대는 소총과 아주 적은 양의 탄약, 그리고 다른 몇 가지만을 가지고 멕시코 초병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멕시코군 라인을 통과했다. 부상자와 부대의 다른 건강한 구성원 최소 한 명, 민간인, 약 25명의 멕시코인 포로(무해)가 남겨졌다.[19] 미션에 남아 있던 멕시코군은 적의 탈출을 이전의 멕시코인 포로들이 미션을 떠날 때까지 몰랐다. 나중에, 일부 일반 병사들이 돌아와 부상자들을 처형했다. 그들이 명령에 따라 행동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후안 호세 홀징거, 독일계 멕시코 장교는 루이스 T. 에이어스, 프란시스 디터리히, 벤자민 오들럼과 현지 가족 8명을 구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20][21]

멕시코 기병대를 피하기 위해 워드와 그의 부하들은 강과 많은 늪을 따라 나무와 수풀 사이를 이동해야 했다. 그들은 매일 몇 시간씩 허리 깊이의 물속에서 걸어 다녔고, 비가 자주 왔으며 밤은 추웠다. 병사들은 나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야 했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패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빅토리아로 향하려 애썼다. 생존자들은 그들이 빅토리아에 가까워지기 이틀 전에 콜레토 크릭 방향에서 총성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빅토리아에서는 휴식할 틈이 없었다. 우레아의 군대가 점령했다. 이 그룹은 우레아 기병대와의 짧은 교전 후 흩어져야 했다. 나머지는 3월 22일 디미트의 착륙지에서 약 3.22km 떨어진 곳에서 우레아에게 포위되어 체포되었다.[22] 패닌의 항복 소식을 들은 워드와 조지아 대대 병사들은 콜레토 크릭에서 패닌의 부대에 부여된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빅토리아로 행진하여 홀징거가 다시 26명의 병사를 구출하여 우레아를 위해 그들을 강제 징집했다. 우레아는 텔레스포로 알라베즈 대령을 빅토리아의 책임자로 남겨 두었다. 프란시타 알라베즈 부인은 남편에게 개입하여 포로 노동자들의 생명을 구했다. 나머지는 3월 25일까지 골리아드로 보내졌고, 부상당한 패닌과 나머지 골리아드 수비대에 합류했다. 이틀 후, 병사들은 텍사스 해안과 자유를 향해 행진할 것이라고 들었지만, 대신 그들은 이전 요새에서 약 1.61km 떨어진 곳으로 행진하여 산타 안나 장군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총에 맞아 죽었다. 레퓨지오를 탈출한 워드의 지휘하에 있던 총 81명의 병사 중 워드를 포함한 55명이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고, 프란시타 알라베즈와 알라베즈 대령에 의해 26명이 구출되었다.[23][24]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레퓨지오 전투는 텍사스 혁명 과정에서 텍사스군에게 큰 손실을 안긴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에이몬 B. 킹과 윌리엄 워드가 이끌었던 텍사스 분견대는 레퓨지오 지역에서 우레아 장군이 지휘하는 멕시코군에 의해 사실상 궤멸되었다. 내부적인 지휘권 다툼으로 분열된 텍사스군은 멕시코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많은 병사들이 전투 중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들 중 일부는 이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 전투의 패배는 골리아드에 주둔하던 제임스 패닌 대령의 주력 부대 운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패닌은 레퓨지오로 파견했던 부대의 생사를 확인하고 합류를 기다리면서 샘 휴스턴 장군이 내린 즉각적인 퇴각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이러한 지연은 우레아의 멕시코군에게 추격할 시간을 주었고, 결국 패닌의 부대는 콜레토 크릭에서 포위되어 콜레토 전투를 치르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레퓨지오와 이후 콜레토 전투에서 텍사스 자원병들이 벌인 격렬한 저항은 결과적으로 우레아 장군의 진격을 상당 기간 늦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우레아의 부대는 산하신토 전투에서 산타 안나가 이끄는 멕시코 주력군과 제때 합류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는 텍사스 혁명의 최종적인 결과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4. 1. 골리아드 학살로의 연장선

제임스 패닌 대령과 그의 부대는 옛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 요새를 보강하고 "디파이언스 요새"라고 불렀다. 하지만 프랜크 W. 존슨과 제임스 그랜트가 이끄는 텍사스군이 초기 교전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골리아드에 모인 지원병들의 사기를 높이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패닌은 우레아 장군의 진군으로 인해 텍사스 혁명을 지지하던 정착민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월 10일, 패닌은 정착민 가족들을 구출하여 골리아드로 데려오기 위해 에이몬 B. 킹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를 레퓨지오로 보냈다. 킹은 레퓨지오 지역의 멕시코군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고 옛 전도소로 피신하며 패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패닌은 윌리엄 워드가 지휘하는 조지아 대대를 보내 킹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워드가 레퓨지오에 도착하자 킹과 워드 사이에 지휘권을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이 내부 갈등으로 인해 텍사스군은 여러 소규모 부대로 나뉘었고, 결국 우레아의 멕시코군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로로 잡혔다.

킹과 워드 부대가 레퓨지오에서 고전하는 동안, 샘 휴스턴 장군은 패닌에게 골리아드를 버리고 즉시 빅토리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패닌은 킹과 워드의 부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철수를 미루었고, 이로 인해 우레아의 군대에게 퇴로가 차단당하면서 콜레토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레퓨지오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된 텍사스군 병사들 중 다수는 이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 레퓨지오에서의 분열과 패배, 그리고 패닌의 철수 지연은 결국 골리아드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 2. 텍사스군의 사기 저하와 휴스턴의 전략 변화

제임스 패닌 대령과 그의 병사들은 옛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 요새를 보강하고 "디파이언스 요새"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프랜크 W. 존슨과 제임스 그랜트가 지휘하던 텍사스 부대가 초기 교전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골리아드에 모인 지원병들의 사기를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에 빠뜨렸다. 게다가 우레아 장군의 진군 소식은 텍사스 독립을 지지하던 정착민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고, 이는 패닌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3월 10일, 패닌은 위험에 처한 정착민 가족들을 구출하기 위해 에이몬 B. 킹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를 파견했다. 킹은 레퓨지오에서 예상보다 강력한 멕시코군과 마주치자 패닌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패닌은 윌리엄 워드가 지휘하는 조지아 대대를 보냈다. 하지만 레퓨지오에 도착한 워드와 킹 사이에 지휘권 다툼이 벌어졌고, 이 내부 갈등으로 인해 텍사스군은 분열되어 결국 우레아의 멕시코군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생존자 대부분은 포로로 잡혔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

킹과 워드의 부대가 레퓨지오에서 고립된 사이, 샘 휴스턴 장군은 패닌에게 우레아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골리아드를 포기하고 빅토리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전황의 불리함을 인지하고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 휴스턴의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패닌은 흩어진 부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철수를 주저했고, 이로 인해 결국 콜레토 크릭에서 우레아 군대에게 따라잡혀 콜레토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패닌은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데 필요한 조직 능력 부족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 텍사스 혁명 정부가 제대로 된 수송 및 보급 지원을 제공하지 못한 책임도 있었다.

레퓨지오와 콜레토 크릭에서의 전투는 텍사스군에게 큰 손실을 안겼지만, 동시에 우레아 군대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진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워드 중령과 조지아 대대는 3월 14일 밤 레퓨지오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7일간의 어려운 후퇴를 감행했는데, 이는 주목할 만한 군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열악한 장비와 보급에도 불구하고 워드 부대는 군율을 유지하며 멕시코군의 추격을 여러 차례 뿌리치고 빅토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비록 빅토리아 도착 직전 포위되어 항복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우레아 군대의 발목을 일주일이나 붙잡아 샘 휴스턴의 주력 부대가 산 자신토 전투를 준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레퓨지오 전투에서의 패배와 혼란은 텍사스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지만, 역설적으로 휴스턴이 전략을 재정비하고 최종 승리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4. 3. 멕시코군의 진격 지연과 산타 안나의 패배

레퓨지오와 콜레토 전투에서 텍사스 자원병들이 보여준 저항과 희생은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의 진격을 상당히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지연은 우레아의 부대가 산하신토 전투에서 멕시코 주력군에 합류하는 것을 막았고, 이는 멕시코군 전체의 패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패닌 대령은 샘 휴스턴 장군으로부터 골리아드를 포기하고 빅토리아로 신속히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레퓨지오로 보냈던 에이먼 버틀러 킹과 윌리엄 워드의 분견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철수를 지연했다. 킹과 워드의 부대가 레퓨지오에서 임무 수행 중 고립되고 결국 패배한 것은 패닌의 지연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패닌이 적절한 시기에 퇴각 명령을 따랐다면, 그의 부대는 우레아 군에게 따라잡히지 않고 샘 휴스턴의 주력군과 합류하여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닌의 우유부단함과 지연은 결국 우레아 군에게 추격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는 콜레토 전투에서의 포위와 항복으로 이어졌다. 패닌은 짧은 지휘 기간 동안 대규모 부대를 효과적으로 기동시키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조직 능력 부족을 드러냈지만, 당시 텍사스 혁명 정부가 고정된 수비 부대를 기동 부대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인 수송 및 보급 지원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책임도 있었다.

한편, 윌리엄 워드 중령과 그가 이끈 조지아 대대의 1836년 3월 14일 밤 레퓨지오에서의 탈출과 이후 7일간 이어진 후퇴는 주목할 만한 군사적 업적이다. 워드와 그의 부하들은 장비, 식량, 의복이 부족한 극도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며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강과 늪지대를 건너는 험난한 행군 중에도 최소 두 차례 멕시코 기병대의 추격을 격퇴하고 성공적으로 접촉을 끊으며 빅토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이는 훨씬 더 큰 병력과 짧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던 패닌이 이루지 못한 성과였다.

빅토리아가 이미 멕시코군에게 점령된 것을 확인한 워드 부대는 피난처를 찾아 계속 이동했으나, 딤미트 착륙장에서 불과 약 3.22km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멕시코 정규군에게 포위되었다. 조지아 대대는 남은 탄약과 총검을 모두 소진하고, 심지어 소총을 곤봉처럼 사용하며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 결국 우레아 장군은 패닌에게 제시했던 것과 유사하게 가석방 후 미국 송환 가능성을 암시하는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워드는 숲과 늪으로 후퇴하여 행군을 계속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항복에 반대했지만, 조지아 대대는 자원병 부대였으므로 최종 결정은 병사들의 투표에 맡겨졌다. 굶주림, 피로, 추위에 시달린 병사들은 결국 멕시코군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워드와 조지아 대대가 결국 항복했지만, 그들의 끈질긴 저항과 일주일간의 성공적인 후퇴는 우레아 군대의 발을 묶어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우레아는 수백 명의 병력을 워드 부대 추격에 투입해야 했고, 샘 휴스턴과 그의 군대는 산하신토 전투를 준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처럼 레퓨지오와 콜레토에서의 저항과 지연은 텍사스 혁명의 최종 승리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5. 역사적 의의 및 유산

(내용 없음)

5. 1. 기념 및 추모

레퓨지오 카운티 법원 맞은편 공공 광장에는 에이먼 버틀러 킹 대위와 그의 부하들을 기리기 위한 킹 기념비가 서 있다. 1900년대 초, 이 광장은 텍사스주 소유였으며 킹스 주립 공원으로 불렸다.[25]

1850년대에 텍사스 주지사와 의회는 조지아주가 텍사스에 제공한 무기와 군수품에 대한 대가로, 윌리엄 워드가 이끌었던 조지아 부대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텍사스 주 비용으로 건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텍사스 주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기념비 건설을 계속 미루었고, 결국 약속된 기념비는 세워지지 않았다. 텍사스 주는 오늘날까지 이 명예의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앨버니 시에서는 1976년에 워드와 조지아 부대를 기념하는 분수를 자체적으로 건설했다.[26]

참조

[1] 서적 The Mexican Side of the Texan Revolution Graphic Ideas
[2] 웹사이트 Battle of Refugio {{!}} BORDER LAND: The Struggle for Texas, 1820-1879 https://library.uta.[...] 2020-06-20
[3] 서적 Davis
[4] 서적 Davis
[5] 서적 Hardin
[6] 서적 Davis
[7] 서적 Davis
[8] 서적 Davis
[9] 서적 Hardin
[10] 서적 Scott
[11] 서적 Hardin
[12] 서적 Scott
[13] 서적 Stuart
[14] 서적 Hardin
[15] 서적 Stuart
[16] 서적 Stuart
[17] 서적 Todish
[18] 서적 Todish
[19] 서적 Todish
[20] 간행물 GOLIAD CAMPAIGN OF 1836 http://www.tshaonlin[...]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2011-04-04
[21] 간행물 GOLIAD MASSACRE http://www.tshaonlin[...]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2011-04-03
[22] 서적 Davis
[23] 서적 The Mexican Side of the Texan Revolution Graphic Ideas
[24] 간행물 REFUGIO, BATTLE OF http://www.tshaonlin[...]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2011-03-30
[25] 서적 Texas; a Guide to the Lone Star State Hastings House
[26] 웹사이트 georgia-battalion https://www.tshaonli[...]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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