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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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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롭 홀은 뉴질랜드 출신의 산악인으로, 1990년 7대륙 최고봉 완등에 성공했다. 이후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여 1991년 어드벤처 컨설턴츠를 설립, 1996년까지 39명의 등반가를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안내했다. 1996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 발생한 참사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여러 다큐멘터리와 영화, 책으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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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브 홀
로브 홀
본명로버트 에드윈 홀
출생일1961년 1월 14일
출생지크라이스트처치, 뉴질랜드
사망일1996년 5월 11일
사망지에베레스트산, 네팔
사망 원인저체온증
안장 장소에베레스트 남봉
국적뉴질랜드
배우자얀 아놀드
자녀1명
직업산악 가이드
고용주어드벤처 컨설턴츠
알려진 이유1996년 에베레스트 산 재난
훈장

2. 어린 시절과 등반 경력

롭 홀은 뉴질랜드에서 성장했으며, 남알프스에서 광범위한 등반을 했다.[14]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9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부터 남알프스 산맥에서 등산을 즐겼다. 15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웃도어 용품 제조 및 판매 회사에서 일하며 등반 경력을 쌓았다. 19세에 아마 다블람(6812m) 등정에 처음 성공한 후, 21세에 아마 다블람(두 번째)과 눔부르(6957m, 두 번째) 등정에 성공했다.[14] 1981년 6월에는 쿡산의 동계 등반에서 등반자가 없었던 캐롤라인 루트를 초등하는 등 뉴질랜드 국내에서 유명한 등산가로 활동했다.[14]

1988년, 롭 홀은 등반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 게리 볼을 만났다.[14] 다른 대부분의 산악 등반가들과 마찬가지로 홀과 볼은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후원을 모색했다. 두 파트너는 세븐 서미트 등반을 결정했지만, 7개월 만에 7개 봉우리 모두를 등반하는 것으로 난이도를 높였다. 그들은 1990년 5월에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마감 시한 몇 시간 전에 남극의 빈슨 매시프를 1990년 12월 12일에 마지막으로 등반하여 7대륙 최고봉 등반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당시 29세)[14] 같은 해,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등산가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뉴질랜드 기념 메달 1990"을 수여받았다.[14]

이 성공 이후, 홀과 볼은 후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등반이 더욱 위험하고 더 장관을 이루어야 하며, 사고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홀과 볼은 전문 등반을 그만두고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4] 1991년, 등산 가이드 회사 "홀 앤 볼 어드벤처 컨설턴츠(AC사)"(본사는 크라이스트처치)를 공동 설립하여 상업 등산 전문 가이드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1992년에는 K2를 정복하고, 같은 해 5월에 공모대를 조직하여 고객 6명을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14]

1994년 퀸스 생일 기념 명예 훈장에서 홀은 산악 등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 1993년 10월, 다울라기리 등반에 성공했지만, 동행한 게리 볼이 등산 중 뇌부종과 폐수종을 발병하여 사망했다.[3][4] 홀은 파트너를 잃고, 어드벤처 컨설턴츠사를 개인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14] 1994년에는 로체, 초오유, 마칼루 등반에 성공했고, 1995년에는 두 번째 초오유 등반에 성공했다.[14]

2. 1. 어린 시절

2. 2. 초기 등반 경력

홀은 뉴질랜드에서 성장했으며, 남알프스에서 광범위한 등반을 했다. 1989년, 홀은 등반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 게리 볼을 만났다. 다른 대부분의 산악 등반가들과 마찬가지로, 홀과 볼은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후원을 모색했다. 두 파트너는 세븐 서미트 등반을 결정했지만, 7개월 만에 7개 봉우리 모두를 등반하는 것으로 난이도를 높였다. 그들은 1990년 5월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마감 시한 몇 시간 전인 1990년 12월 12일에 남극의 빈슨 매시프를 마지막으로 등반했다.

이 성공 이후, 그들은 후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등반이 더욱 위험하고 더 장관을 이루어야 하며, 사고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홀과 볼은 전문 등반을 그만두고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9세에 아마 다블람 등반을 시작으로 1981년에는 눔부르와 쿡 산을 등반했다. 1990년에는 7대륙 최고봉 등반에 성공했다. 1992년에는 K2와 에베레스트를 등반했고, 1993년에는 다울라기리 등반 중 게리 볼이 폐부종으로 사망했다. 1994년에는 로체와 초 오유를 등반했다.

1994년 퀸스 생일 기념 명예 훈장에서 홀은 산악 등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

2. 3. 7대륙 최고봉 등정

롭 홀은 뉴질랜드에서 성장했으며, 남알프스에서 광범위한 등반을 했다. 1989년 등반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인 게리 볼을 만났다. 홀과 볼은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후원을 모색했고, 세븐 서미트 등반을 7개월 만에 완료하는 목표를 세웠다. 1990년 5월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1990년 12월 12일 남극의 빈슨 매시프를 마지막으로 등반하여 목표를 달성했다.[5] 이후 전문 등반을 그만두고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여 1992년 어드벤처 컨설턴트를 설립했다. 1993년 10월, 게리 볼은 다울라기리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고,[3][4] 홀은 혼자 회사를 운영하며 1996년까지 39명의 등반가를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

3. 어드벤처 컨설턴츠 설립

홀은 뉴질랜드에서 성장했으며, 남알프스에서 광범위한 등반을 했다. 1989년 롭 홀은 등반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 게리 볼을 만났다. 다른 대부분의 산악 등반가들과 마찬가지로 홀과 게리 볼은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후원을 모색했다. 두 파트너는 세븐 서미트 등반을 결정했지만, 7개월 만에 7개 봉우리 모두를 등반하는 것으로 난이도를 높였다. 그들은 1990년 5월에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마감 시한 몇 시간 전에 남극의 빈슨 매시프를 1990년 12월 12일에 마지막으로 등반했다. 이 성공 이후 그들은 후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등반이 더욱 위험하고 더 장관을 이루어야 하며, 사고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홀과 볼은 전문 등반을 그만두고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회사인 어드벤처 컨설턴츠는 1992년에 법인화되었고, 빠르게 최고의 원정 가이드 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 해 그들은 6명의 고객을 에베레스트 산 정상까지 안내했다. 1993년 10월, 게리 볼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산인 다울라기리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고,[3][4] 홀은 어드벤처 컨설턴츠를 혼자 운영하게 되었다. 1996년까지 홀은 39명의 등반가를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 가이드 등반 시도 가격은 미화 65,000달러였는데, 이는 다른 원정대의 가격보다 훨씬 높았지만, 홀의 신뢰성과 안전성에 대한 명성은 전 세계의 고객을 끌어들였다. 롭 홀은 산악계에서 "산양" 또는 "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94년 퀸스 생일 기념 명예 훈장에서 홀은 산악 등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

3. 1. K2 등정 및 게리 볼의 죽음

롭 홀은 뉴질랜드에서 성장했으며, 남알프스에서 광범위한 등반을 했다. 1989년 롭 홀은 등반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 게리 볼을 만났다. 홀과 게리 볼은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후원을 모색했고, 세븐 서미트 등반을 결정했지만, 7개월 만에 7개 봉우리 모두를 등반하는 것으로 난이도를 높였다. 그들은 1990년 5월에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1990년 12월 12일에 남극의 빈슨 매시프를 마지막으로 등반했다. 이 성공 이후 그들은 후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등반이 더욱 위험하고 더 장관을 이루어야 하며, 사고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홀과 볼은 전문 등반을 그만두고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회사인 어드벤처 컨설턴트는 1992년에 법인화되었고, 빠르게 최고의 원정 가이드 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 해 그들은 6명의 고객을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 1993년 10월, 게리 볼은 다울라기리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고,[3][4] 홀은 어드벤처 컨설턴트를 혼자 운영하게 되었다. 1996년까지 홀은 39명의 등반가를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 가이드 등반 시도 가격인 65,000달러는 다른 원정대의 가격보다 훨씬 높았지만, 홀의 신뢰성과 안전성에 대한 명성은 전 세계의 고객을 끌어들였다. 롭 홀은 산악계에서 "산양" 또는 "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94년 퀸스 생일 기념 명예 훈장에서 홀은 산악 등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

3. 2. 에베레스트 등반

롭 홀은 뉴질랜드에서 성장했으며, 남알프스에서 광범위한 등반을 했다. 1989년 롭 홀은 등반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 게리 볼을 만났다. 다른 대부분의 산악 등반가들과 마찬가지로 홀과 게리 볼은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후원을 모색했다. 두 파트너는 세븐 서미트 등반을 결정했지만, 7개월 만에 7개 봉우리 모두를 등반하는 것으로 난이도를 높였다. 그들은 1990년 5월에 에베레스트 산을 시작으로, 마감 시한 몇 시간 전에 남극의 빈슨 매시프를 1990년 12월 12일에 마지막으로 등반했다.

이 성공 이후 그들은 후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등반이 더욱 위험하고 더 장관을 이루어야 하며, 사고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홀과 볼은 전문 등반을 그만두고 고산 가이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회사인 어드벤처 컨설턴트는 1992년에 법인화되었고, 빠르게 최고의 원정 가이드 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 해 그들은 6명의 고객을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 1993년 10월, 게리 볼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산인 다울라기리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고,[3][4] 홀은 어드벤처 컨설턴트를 혼자 운영하게 되었다. 1996년까지 홀은 39명의 등반가를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안내했다. 가이드 등반 시도 가격인 65,000달러는 다른 원정대의 가격보다 훨씬 높았지만, 홀의 신뢰성과 안전성에 대한 명성은 전 세계의 고객을 끌어들였다.

1994년 퀸스 생일 기념 명예 훈장에서 홀은 산악 등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

  • 1990년 5월 10일 (29세) - 7대륙 최고봉
  • 1992년 (31세) - K2
  • 1992년 5월 12일 (31세) - 에베레스트 (두 번째)
  • 1993년 (32세) - 다울라기리
  • 1993년 5월 10일 (32세) - 에베레스트 (세 번째)
  • 1994년 5월 9일 (33세) - 에베레스트 (네 번째)
  • 1994년 5월 16일 (33세) - 로체
  • 1994년 10월 6일 (33세) - 초 오유
  • 1995년 5월 18일 (34세) - 마칼루
  • 1995년 9월 26일 (34세) - 초 오유 (두 번째)
  • 1996년 5월 10일 (35세) - 에베레스트 (다섯 번째, 하산 중 조난사)

4. 1996년 에베레스트 참사

롭 홀이 이끌었던 어드벤처 컨설턴츠의 1996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8명의 고객과 3명의 가이드(홀, 마이크 그룸, 앤디 해리스)로 구성되었다.[6] 고객 중에는 잡지 ''아웃사이드''의 기자 존 크라카우어가 있었는데, 홀은 ''아웃사이드''와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상업적 인기에 대한 기사를 대가로 계약을 맺고 그들의 작가 중 한 명을 정상까지 안내하기로 했다.[6]

1996년 5월 10일 자정 직후,[6] 홀과 어드벤처 컨설턴츠 원정대는 사우스 콜 꼭대기의 캠프 IV에서 정상 등반을 시작했다.[6] 이들은 스콧 피셔의 마운틴 매드니스 회사, 대만인도 정부가 후원하는 원정대와 합류했다.[6] 그러나 원정대는 곧 지연에 직면했는데, 힐러리 스텝에 고정 로프가 설치되지 않아 1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다.[6] 약 33명의 등반가들이 같은 날 정상에 오르려고 시도했고, 홀과 피셔는 등반가들에게 서로 150m 이내에 머물도록 요청했기 때문에, 힐러리 스텝의 단일 고정 로프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6]

많은 등반가들이 밤이 되기 전 캠프 IV로 돌아갈 수 있는 안전 시간인 오후 2시까지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6] 홀의 사르다르인 앙 도르제 셰르파와 다른 셰르파들은 고객들을 위해 정상에서 기다렸다가 오후 3시쯤 하산을 시작했다.[6] 내려오는 길에 앙 도르제는 힐러리 스텝 위에서 고객 더그 한센을 만나 하산을 명령했지만, 한센은 거부했다.[7] 홀은 셰르파들에게 다른 고객들을 돕도록 하고, 산소 공급이 떨어진 한센을 돕기 위해 남았다.[7]

오후 5시, 눈보라가 에베레스트 남서면을 강타하여 시야가 좁아지고 캠프 IV로 돌아가는 길이 사라졌다.[6] 얼마 후 홀은 무전을 통해 한센이 의식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알리며 도움을 요청했다.[6] 가이드 앤디 해리스는 오후 5시 30분에 물과 산소 공급기를 가지고 힐러리 스텝으로 구조를 위해 등반을 시작했다.[6]

5월 11일 오전 4시 43분, 눈보라가 시작된 지 거의 12시간 후, 홀은 무전을 통해 자신이 에베레스트 남봉(8750m)에 있다고 말했다.[6] 그는 해리스가 두 사람에게 도달했지만 한센은 밤중에 사망했고 해리스도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6] 홀은 산소 조절기가 얼음으로 막혀 병에 든 산소를 호흡하지 못하고 있었다.[6] 오전 9시까지 홀은 산소 마스크를 고정했지만, 동상에 걸린 손과 발 때문에 고정 로프를 건너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6]

오후 늦게 홀은 베이스 캠프에 무전을 보내 아내 얀 아놀드에게 위성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했다.[6]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아내에게 비교적 편안하다고 안심시키며 "잘 자요, 내 사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6] 그는 그 직후 사망했다.[6] 그의 시신은 IMAX 원정대의 산악인들에 의해 5월 23일에 발견되었으며, 데스 존(죽음의 영역)이라 불리는 해발 8000m 이상에 그대로 남아있다.[6] 홀은 사후 1999년 뉴질랜드 용감상에서 뉴질랜드 용감성 훈장을 수여받았다.[8]

4. 1. 등반 준비

4. 2. 등반 과정과 사고 발생

1996년 에베레스트 참사 당시, 롭 홀이 이끌던 어드벤처 컨설턴츠 원정대는 8명의 고객과 3명의 가이드(롭 홀, 마이크 그룸, 앤디 해리스)로 구성되었다.[6] 고객 중에는 잡지 ''아웃사이드''의 기자 존 크라카우어가 있었는데, 홀은 ''아웃사이드''와의 계약을 통해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상업적 인기에 대한 기사를 대가로 그들의 작가 중 한 명을 정상까지 안내하기로 했다.[6]

1996년 5월 10일 자정 직후,[6] 롭 홀과 어드벤처 컨설턴츠 원정대는 사우스 콜 꼭대기에 있는 캠프 IV에서 정상 등반을 시작했다.[6] 이들은 스콧 피셔의 마운틴 매드니스 팀, 중화민국 정부 파견 원정대 등과 합류했다.[6] 그러나 힐러리 스텝 등에서 고정 로프 미설치로 인해 지연이 발생했고,[6] 많은 등반가들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6]

사르다르인 앙 도르제 셰르파를 포함한 셰르파들은 정상에서 고객들을 기다렸으나, 오후 3시경 하산을 시작했다.[7] 앙 도르제는 힐러리 스텝 위에서 고객 더그 한센을 만나 하산을 명령했지만, 한센은 이를 거부했다.[7] 홀은 셰르파들에게 다른 고객들을 돕도록 하고, 산소 공급이 떨어진 한센을 돕기 위해 남았다.[7]

오후 5시경, 눈보라가 에베레스트 남서면을 강타하여 시야가 좁아지고 캠프 IV로 돌아가는 길이 사라졌다.[7] 홀은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냈고, 한센은 의식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말했다.[7] 가이드 앤디 해리스는 물과 산소 공급기를 가지고 힐러리 스텝으로 등반을 시작했다.[7]

5월 11일 오전 4시 43분, 홀은 에베레스트 남봉(8750m)에 있다고 무전을 보냈고, 해리스가 도착했지만 한센은 밤중에 사망했고 해리스도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8] 홀은 산소 조절기가 얼어붙어 산소 호흡을 할 수 없었고, 동상으로 인해 고정 로프를 건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8] 오후 늦게 홀은 베이스 캠프에 무전을 보내 아내 얀 아놀드와 위성 전화 연결을 요청했고, "잘 자요, 내 사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8]

롭 홀의 시신은 5월 23일 IMAX 원정대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사우스 서밋 바로 아래에 그대로 남아 있다.[8] 1999년 뉴질랜드 용감상에서 롭 홀은 사후 뉴질랜드 용감성 훈장을 수여받았다.[8]

4. 3. 롭 홀의 죽음

1996년 5월 10일 자정 직후, 롭 홀이 이끄는 어드벤처 컨설턴츠 원정대는 사우스 콜 꼭대기에 있는 캠프 IV에서 정상 등반을 시작했다.[6] 이들은 스콧 피셔의 마운틴 매드니스 원정대 등과 합류했다.[6] 그러나 힐러리 스텝에 고정 로프가 설치되지 않아 지연이 발생했고,[6] 많은 등반가들이 안전 귀환 시간인 오후 2시까지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6]

롭 홀은 사르다르인 앙 도르제 셰르파와 함께 고객들을 위해 정상에서 기다렸다.[6] 오후 3시쯤 하산을 시작했지만, 힐러리 스텝 위에서 고객 더그 한센을 만나 하산을 명령했으나 한센은 거부했다.[7] 홀은 셰르파들에게 다른 고객들을 돕도록 하고, 산소 공급이 떨어진 한센을 돕기 위해 남았다.[7]

오후 5시, 눈보라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고 캠프 IV로 돌아가는 길이 사라졌다.[6] 홀은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냈고, 한센은 의식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말했다.[6] 가이드 앤디 해리스가 물과 산소 공급기를 가지고 힐러리 스텝으로 등반을 시작했다.[6]

5월 11일 오전 4시 43분, 홀은 무전을 보내 사우스 서밋에 있다고 말했다.[6] 그는 해리스가 두 사람에게 도달했지만 한센은 밤중에 사망했고 해리스도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6] 홀은 산소 조절기가 얼음으로 막혀 산소를 호흡하지 못했고,[6] 동상에 걸린 손과 발 때문에 고정 로프를 건너기 어렵다고 말했다.[6]

오후 늦게, 홀은 베이스 캠프에 무전을 보내 아내 얀 아놀드에게 위성 전화를 걸었다.[6] 그는 아내에게 비교적 편안하다고 안심시키며 "잘 자요, 내 사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6] 그는 그 직후 사망했다.[6] 그의 시신은 5월 23일에 발견되었으며, 사우스 서밋 바로 아래에 여전히 남아 있다.[6] 홀은 그의 행동에 대해 사후에 뉴질랜드 용감성 훈장을 수여받았다.[8]

4. 4. 사고 이후

롭 홀이 이끌던 어드벤처 컨설턴츠의 1996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8명의 고객과 3명의 가이드로 구성되었다.[6] 고객 중에는 잡지 ''아웃사이드''의 기자 존 크라카우어가 있었다. 홀은 ''아웃사이드''와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상업적 인기가 높아지는 것에 대한 기사를 대가로 계약을 맺고 그들의 작가 중 한 명을 정상까지 안내하기로 했다.[6]

1996년 5월 10일, 원정대는 사우스 콜 꼭대기에 있는 캠프 IV에서 정상 등반을 시작했지만, 힐러리 스텝에 고정 로프가 설치되지 않아 지연에 직면했다.[6] 약 33명의 등반가들이 같은 날 정상에 오르려고 시도했고, 홀과 스콧 피셔는 등반가들에게 서로 150m 이내에 머물도록 요청했지만, 힐러리 스텝의 단일 고정 로프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6]

많은 등반가들이 밤이 되기 전에 캠프 IV에 도달하기 위해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안전 시간인 오후 2시까지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 홀의 사르다르인 앙 도르제 셰르파와 다른 셰르파들은 고객들을 위해 정상에서 기다렸다가 오후 3시쯤 하산을 시작했다. 앙 도르제는 힐러리 스텝 위에서 고객 더그 한센을 만나 하산을 명령했지만, 한센은 거부했다.[7] 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셰르파들에게 다른 고객들을 돕도록 하고, 산소 공급이 떨어진 한센을 돕기 위해 남겠다고 말했다.

오후 5시, 눈보라로 시야가 좁아지고 캠프 IV로 돌아가는 길이 사라졌다. 홀은 한센이 의식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냈고, 가이드 앤디 해리스가 물과 산소 공급기를 가지고 힐러리 스텝으로 등반을 시작했다.[6]

11일 오전 4시 43분, 홀은 사우스 서밋에 있다고 무전을 보내 해리스가 두 사람에게 도달했지만 한센은 밤중에 사망했고 해리스도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 홀은 산소 마스크 조절기가 얼음으로 막혀 산소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전 9시까지 홀은 산소 마스크를 고정했지만, 동상에 걸린 손과 발 때문에 고정 로프를 건너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오후 늦게, 그는 베이스 캠프에 무전을 보내 아내 얀 아놀드에게 위성 전화를 걸어 "잘 자요, 내 사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6] 그는 그 직후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5월 23일에 발견되었으며, 사우스 서밋 바로 아래에 여전히 남아 있다.[6] 1999년 뉴질랜드 용감상에서 홀은 그의 행동에 대해 사후에 뉴질랜드 용감성 훈장을 수여받았다.[8]

5. 1996년 에베레스트 참사에 대한 논란

5. 1. 존 크라카우어의 비판

존 크라카우어는 재난 직후 ''아웃사이드''에 기사를 게재했고,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책을 출판했다. 두 매체 모두에서 그는 고정 로프의 부재로 인한 지연과 가이드들이 오후 2시 턴어라운드 시간을 준수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사망의 원인이라고 추측했다. 크라카우어는 홀의 미망인으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대화를 출판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9] 홀의 정상 능선에서 전송된 무선 통신은 연결되어 집에 있는 그의 아내에게 전달되었다. 홀의 아내와의 마지막 대화 내용은 책에 재수록되었다.[9]

5. 2. 엇갈리는 평가

존 크라카우어는 재난 직후 ''아웃사이드''에 기사를 게재했고,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책을 출판했다. 두 매체 모두에서 그는 고정 로프의 부재로 인한 지연과 가이드들이 오후 2시 턴어라운드 시간을 준수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사망의 원인이라고 추측했다. 크라카우어는 홀의 미망인으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대화를 출판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9] 홀의 정상 능선에서 전송된 무선 통신은 연결되어 집에 있는 그의 아내에게 전달되었다. 홀의 아내와의 마지막 대화 내용은 책에 재수록되었다.[9]

1996년 에베레스트 참사를 다룬 TV 영화인 ''희박한 공기 속으로: 에베레스트 죽음''에서 나다니엘 파커가 롭 홀 역을 맡았다. 세컨즈 프롬 디재스터 시리즈는 "죽음의 지대 속으로"라는 제목의 1996년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를 방영했는데, 롭 홀의 고난이 에피소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닐 핀의 노래 "The Climber"는 롭 홀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1996년 에베레스트에 있었던 데이비드 브레셔스가 감독한 또 다른 다큐멘터리 "에베레스트 위의 폭풍"은 2008년 PBS 프로그램인 ''프론트라인''에서 방영되었다.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장편 영화 ''에베레스트'' (2015)는 워킹 타이틀 필름과 유니버설 픽처스에 의해 제작되었고, 발타자르 코르마쿠르가 감독했다.[10] 롭 홀은 제이슨 클라크가 연기했다.

롭 홀은 영국 작곡가 조비 탤벗의 오페라 ''에베레스트'' (2015)의 등장인물이며, 이 오페라는 1996년 에베레스트 산사태의 주요 사건들을 따라간다. 안잔 더트의 앨범 케우 간 가예에 수록된 노래 "Mr. Hall"은 롭 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다.

6. 유산과 평가

1996년까지 어드벤처 컨설턴츠는 39명의 고객을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성공시켰다. 홀 자신도 5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기록했다. 셰르파를 제외한 등산가로서는 당시 에베레스트 최다 등정 횟수 기록을 세웠다.

1997년에 AC대의 고객 멤버이자, 아웃도어 잡지 편집자 존 크라카우어에 의해 에베레스트 조난 사고의 진상을 기술한 논픽션 저서 『희박한 공기(Into Thin Air)』가 발표되었다. 이 저서에서 크라카우어는 조난 원인에 대해 ① 가이드와 셰르파의 지시를 무시한 고객 멤버가 있었다는 점, ② 고객(아마추어 등산가)의 고산 등산 경험 부족, ③ "발코니"와 "힐러리 스텝"에서의 고정 로프 설치 및 정체로 인한 시간 초과를 지적했다. 크라카우어는 아웃도어 잡지에 어드벤처 컨설턴츠(AC사)의 광고 게재를 조건으로 AC대의 고객 멤버로서 이 등산에 참가했다.

1997년, 어드벤처 컨설턴츠(AC사)는 창업자 2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홀의 아내 잔 아놀드는 도중부터 가이드로서 AC사에 참가한 개리 코터에게 사업을 매각했다. 가이드 사업을 인수한 코터는 본사 기능을 와나카로 이전하고, CEO·디렉터 겸 수석 가이드로서 가이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10년 4월에 조직된 네팔의 셰르파대에 의한 청소 등산에서 홀의 유해를 수습할 계획이 세워졌지만, 2015년 시점에서 유해는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유해는 티베트 측으로 추락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011년 10월, 홀의 딸 사라와 아내 잔 아놀드는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했다. 사라는 아버지 롭이 조난사한 2개월 후에 출생했으며, 15세에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했다.

6. 1. 등반 업적

롭 홀은 1990년 세븐 서미트를 완등했다. 1992년에는 K2 등반을 시도했으나, 등반 파트너인 게리 볼이 부종으로 인해 하산하면서 등반에 실패했다. 스콧 피셔, 에드 비에스터스 등이 게리 볼의 구조를 도왔다. 1993년에는 다울라기리 등반 중 7300m 지점에서 게리 볼과 베이카 구스타프손이 부종으로 쓰러져 구조를 시도했으나, 게리 볼은 결국 사망했다.[11][12]

롭 홀은 에베레스트 산을 여러 차례 등정했다. 1992년, 1993년(아내 잰 아놀드와 함께[1]), 1994년, 그리고 1996년(하산 중 사망)까지 총 5번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했다. 이는 당시 셰르파를 제외한 등산가 중 최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이었다. 1994년에는 로체, K2,[13] 초 오유, 마칼루를 등정했다. 1995년에는 초 오유를 다시 등정했다.

1996년까지 그가 운영하던 어드벤처 컨설턴츠는 39명의 고객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게 했다. 1997년, 에베레스트 조난 사고에 대한 논픽션 저서 《희박한 공기(Into Thin Air)》가 존 크라카우어에 의해 발표되었다.

6. 2. 훈장

6. 3. 미디어

존 크라카우어는 재난 직후 ''아웃사이드''에 기사를 게재했고,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책을 출판했다. 두 매체 모두에서 그는 고정 로프의 부재로 인한 지연과 가이드들이 오후 2시 턴어라운드 시간을 준수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사망의 원인이라고 추측했다. 크라카우어는 홀의 미망인으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대화를 출판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9] 홀의 정상 능선에서 전송된 무선 통신은 연결되어 집에 있는 그의 아내에게 전달되었다. 홀의 아내와의 마지막 대화 내용은 책에 재수록되었다.[9]

1996년 에베레스트 참사를 다룬 TV 영화 ''희박한 공기 속으로: 에베레스트 죽음''에서 나다니엘 파커가 롭 홀 역을 맡았다. 세컨즈 프롬 디재스터 시리즈는 "죽음의 지대 속으로"라는 제목의 1996년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를 방영했는데, 롭 홀의 고난이 에피소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닐 핀의 노래 "The Climber"는 롭 홀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1996년 에베레스트에 있었던 데이비드 브레셔스가 감독한 또 다른 다큐멘터리 "에베레스트 위의 폭풍"은 2008년 PBS 프로그램 ''프론트라인''에서 방영되었다.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장편 영화 ''에베레스트''(2015)는 워킹 타이틀 필름과 유니버설 픽처스에 의해 제작되었고, 발타자르 코르마쿠르가 감독했다.[10] 롭 홀은 제이슨 클라크가 연기했다.

롭 홀은 영국 작곡가 조비 탤벗의 오페라 ''에베레스트''(2015)의 등장인물이며, 이 오페라는 1996년 에베레스트 산사태의 주요 사건들을 따라간다. 안잔 더트의 앨범 케우 간 가예에 수록된 노래 "Mr. Hall"은 롭 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다.

7. 주요 등반 목록


  • 1980년(19세) - 아마 다블람
  • 1981년(20세) - 눔부르, 쿡 산
  • 1982년(21세) - 아마 다블람 (두 번째), 눔부르 (두 번째)
  • 1990년 - 세븐 서미트(배스 목록: 아콩카과, 에베레스트 산, 엘브루스 산, 킬리만자로 산, 데날리 산, 코지우스코 산, 빈슨 산괴)
  • 1990년 5월 10일(29세) - 7대륙 최고봉
  • 1992년 - K2 등반 시도 (스콧 피셔, 에드 비에스터스, 찰리 메이스가 홀이 그의 등반 파트너인 게리 볼을 부종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을 도왔다.)
  • 1992년 5월 12일(31세) - 에베레스트 산(두 번째)
  • 1993년 - 다울라기리 (게리 볼 및 베이카 구스타프손과 함께 7300m 도달. 베이카와 롭은 부종으로 산에서 사망한 게리를 구조하려 했다.)[11][12]
  • 1993년 5월 10일(32세) - 에베레스트 산 (세 번째, 아내 잰 아놀드와 함께[1])
  • 1994년 5월 9일(33세) - 에베레스트 산 (네 번째)
  • 1994년 5월 16일(33세) - 로체
  • 1994년 10월 6일(33세) - 초 오유
  • 1994년 - K2[13]
  • 1995년 5월 18일(34세) - 마칼루
  • 1995년 9월 26일(34세) - 초 오유 (두 번째)
  • 1996년 5월 10일(35세) - 에베레스트 산 (다섯 번째, 하산 중 조난사)

참조

[1] 웹사이트 After Everest http://www.people.co[...] Time Warner 2012-05-21
[2] 웹사이트 Meet our team, Dr Jan Arnold http://www.inp.co.nz[...] INP Medical Clinic 2012-05-21
[3] 간행물 Gary Ball, climber, dies on mountain https://www.highbeam[...] Reuters 1993-10-11
[4] 웹사이트 Statistics of 7 summits climber Ball http://7summits.com/[...] www.7summits.com 2011-08-12
[5] 간행물 London Gazette 1994-06-11
[6] 웹사이트 Fixed ropes – climbers guide to Everest http://www.mountever[...] 2015-03-23
[7] 뉴스 Storm Over Everest PBS Frontline 2008-05-13
[8] 웹사이트 Special honours list 1999 (Bravery Awards) https://dpmc.govt.nz[...] Department of the Prime Minister and Cabinet 2020-09-07
[9] 뉴스 Vom Leben verabschiedet http://www.spiegel.d[...] Der Spiegel 1998-02-23
[10] 뉴스 "'2 Guns' Helmer Kormakur Set to Climb 'Everest'" https://variety.com/[...] 2014-01-17
[11] 서적 The Other Side of Everest: Climbing the North Face through the Killer Storm https://books.google[...] Three Rivers Press 2016-10-03
[12] 서적 Kohti huippua WSOY 1995
[13] 웹사이트 Ascents - K2 http://www.8000ers.c[...] 2016-05-31
[14] 뉴스 死亡履歴書 ロブ・ホール http://www.independe[...] インデペンデント 1996-05-22
[15] 뉴스 Hall's daughter follows in her father's footsteps http://www.nzherald.[...] The NZ Herald 2003-05-27
[16] 뉴스 Retrieving Everest climber's body 'too risky' - window http://news.bbc.co.u[...] BBC News 2010-04-22
[17] 뉴스 11 Facts about the tragic Everest climb not in the movie http://www.sheknows.[...] 2015
[18] 뉴스 Teenager conquers mountain http://www.stuff.co.[...] Fairfax NZ News 201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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