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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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옹 반란은 프랑스 혁명 시기 리옹에서 발생한 반혁명 운동과 그 진압 과정을 말한다. 혁명 초 부르주아와 노동자 간 갈등이 심화된 리옹에서 급진화된 혁명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샤리에파의 처형과 국민공회의 보복으로 리옹은 포위되었고, 결국 항복했다. 이후 국민공회는 리옹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처형하는 등 가혹한 보복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조제프 푸셰는 "리옹의 산탄 학살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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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 반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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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일부 | 프랑스 혁명 전쟁 |
날짜 | 1793년 8월 9일 - 1793년 10월 9일 |
장소 | 프랑스, 리옹 |
결과 | 프랑스 공화국의 승리 |
좌표 | 4.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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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공화국 |
교전국 2 | 프랑스 왕당파 |
지휘관 | |
지휘관 1 | 뒤부아-크랑세 |
지휘관 2 | 루이 프랑수아 페랭 드 프레시 |
병력 규모 | |
병력 1 | 35,000명 |
병력 2 | 약 20,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2 | 반란 진압 후 2,000명 이상 처형 |
관련 정보 | |
전쟁의 일부 |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연방주의자 반란 |
2. 배경
당시 리옹은 프랑스에서도 공업 도시로서 번성하였으며, 새롭게 성립된 부르주아와 노동자(상퀼로트) 간의 충돌은 파리보다 심각했다. 그러던 중 파리에서 불붙은 프랑스 혁명의 발발은 급진적 혁명의 지속을 요구하는 상퀼로트와 반혁명주의자, 혹은 온건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대립을 더 심각한 양상으로 만들었다. 상퀼로트는 광신적인 자코뱅주의자 조제프 샤리에(Joseph Chalier)의 선동 아래 샤리에파라는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리옹은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공업 도시로, 부르주아와 노동자 간의 갈등이 파리보다 심각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은 상퀼로트와 반혁명주의자, 온건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상퀼로트는 광신적인 자코뱅주의자 조제프 샤리에(Joseph Chalier)를 중심으로 '샤리에파'를 결성했다.
샤리에는 원래 성직자였다가 혁명을 환영하고 바스티유 감옥의 돌담을 가지고 6일 밤낮을 걸어서 파리에서 리옹으로 찾아와 이것을 성체로 섬길 정도의 광신적인 혁명가였다. 또한 마라를 신처럼 숭배하는 등 그들의 정치적 급진성과 카리스마가 반혁명파에게는 위협이었다.[1]
3. 반혁명 반란
샤리에는 바스티유 감옥의 돌을 성체로 섬길 정도로 광신적인 혁명가였으며, 마라를 숭배하는 등 샤리에파의 정치적 급진성과 카리스마는 반혁명파에게 큰 위협이었다.
3. 1. 샤리에의 처형
샤리에는 혁명 정부에 반대하는 도시의 왕당파들에 의해 투옥되었다. 왕당파는 편지를 위조하여 샤리에의 죄를 조작하고, 다른 샤리에파와 파리에 대한 본보기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국민공회는 서둘러 샤리에를 구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국민공회가 협박으로 단두대를 보내자 리옹에서는 거꾸로 그 단두대를 사용하여 샤리에를 처형하기로 결정하고 7월 17일에 집행했다. 그러나 단두대 취급에 익숙하지 않은 리옹의 처형인 리페르는 단두대의 칼날을 세 번이나 떨어뜨려도 샤리에의 목을 절단할 수 없었고, 마지막에는 도끼(칼이라고 하는 문헌[2]도 있다)를 사용하여 겨우 목을 떨어뜨렸다. 이 광경에 샤리에파뿐만 아니라 반혁명파 민중들도 충격을 받았다.
3. 2. 반란 진압
국민공회는 리옹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약 3만 명의 공화국군을 파견하여 8월 8일부터 리옹을 포위했다. 리옹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였지만, 공화국군은 대포를 사용하여 시내에 직접 포격을 가해 도시를 파괴했다.[1]
곧 시내에서 샤리에파가 린치를 당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공화국군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리옹에 대해 철저히 포격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되어 공화국군이 쉽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던 점도 리옹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10월 9일, 리옹은 혁명 정부에 휴전을 제의하고 성문을 열었다.[1]
이 포위전에는 훗날 제1제국 육군 원수가 되는 루이 가브리엘 쉬셰도 참여했다. 그는 리옹 출신으로, 고향을 공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포격에 앞서 여러 차례 리옹과의 협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1]
알프스 군은 켈레르만의 지휘 아래 사보이에서 피에몬테와 교전 중이었으나, 리옹에서 중앙 정부의 권위를 재확립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793년 8월 10일, 알프스 군은 새로운 임무에 착수했고, 이틀 뒤 반란을 일으킨 데파르트망은 둘로 나뉘었다. 8월 21일, 파리 정부는 공안 위원회의 주요 멤버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인 조르주 쿠통을 포함한 고위급 팀을 리옹으로 파견했다. 다음 날 혁명군은 포격을 시작했고, 9월 동안 리옹은 포위되었다. 1793년 9월 29일, 도시 남서쪽에 있는 생트-푸아 요새가 파괴되었다.[1]
1793년 10월 3일, 쿠통은 리옹 시민들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10월 7일까지 휴전이 지켜졌다. 10월 8일, 프레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 대표들과 협상하기 위한 대표단이 파견되었다. 동시에 수비군이 지키던 요새 두 곳(생-이레네, 생-쥐스트)이 함락되었다.[1]
다음 날 새벽, 프레시는 리옹 북서부의 베즈 구역을 통해 탈출하여 숨어 있다가 스위스에 나타났다. 도시의 민간 행정 당국은 정오에 중앙 정부 대표에게 항복했다.[1]
4. 리옹 대학살
10월 11일, 국민공회 대표들은 리옹의 성벽 파괴를 결정했다. 10월 12일, 바레르는 리옹의 이름을 빌-아프랑쉬(해방된 도시)로 바꾸고 도시를 파괴한다는 포고령을 의회에 통과시켰다.[1] 이 포고령에 따라 부유한 사람들의 재산은 철거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추방되었던 애국자들의 집, 산업 건물, 그리고 인류와 공공 교육을 위한 기념물만 남게 되었다. 또한 리옹의 폐허에는 "리옹은 자유에 전쟁을 걸었다: 리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비문과 함께, 리옹의 왕당파가 저지른 범죄와 그들이 받은 처벌을 후세에 알릴 기념비가 세워질 예정이었다.[1] 그러나 실제로는 철거 예정이었던 600채의 집 중 약 50채만 파괴되었다.[1]
4. 1. 국민 공회의 대응
국민 공회는 리옹에 대해 철저하게 보복할 것을 결정했다. 10월 12일 국민공회 의장 루이 조제프 샤를리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했다.[5]#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리옹의 반혁명을 즉시 무력으로 징벌하기 위하여 다섯 위원으로 구성된 비상위원회를 임명한다.
# 리옹의 모든 주민은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공화국의 수호자들에게 넘겨야 한다.
# 무기의 일부는 부자와 반혁명가들에게 탄압을 받았던 애국자들에게 지급될 것이다.
# 리옹시는 파괴될 것이다. 유복한 사람들이 거주하던 집들은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 남겨두어도 되는 것은 빈민의 집, 피살당하거나 추방당한 애국자들의 집과 공장 건축물, 자선사업과 교육에 사용되는 건물 뿐이다.
# 리옹이란 이름을 공화국의 도시 목록에서 삭제한다. 이제부터 남겨진 건물일체는 해방도시Ville Affranchie란 이름을 갖는다.
# 왕당파 도시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고 어떤 벌을 받았는지를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리옹의 폐허에 기념비를 세운다. 기념비에는 "리옹은 자유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리옹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비문을 새긴다.[5]
의회는 이견없이 자코뱅파의 지도자이며,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인 조르주 쿠통을 국민 공회 대표로 리옹으로 파견했다. 이 선언을 들은 리옹 시민들은 혁명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겁에 질려있었다.
10월 11일, 정부 대표들은 도시 성벽 파괴를 결정했다. 10월 12일, 정부의 주요 구성원인 바레르는 리옹이 이름을 잃고, 대신 빌-아프랑쉬(해방된 도시)로 불리며 파괴될 것이라는 포고령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부유한 사람들이 점유한 모든 재산은 철거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과 속거나 추방된 애국자들의 집, 산업에 특별히 헌정된 건물 및 인류와 공공 교육을 위한 기념물만 남게 될 것이었다. 리옹의 폐허에는 "리옹은 자유에 전쟁을 걸었다: 리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비문과 함께, 이 도시의 왕당파가 저지른 범죄와 그들이 받은 처벌을 후세에 증명할 기념비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실제로는 철거 예정이었던 600채의 집 중 약 50채만 파괴되었다.[1]
4. 2. 쿠통의 처리
반란 종결 후 쿠통은 리옹에 대한 보복으로 건물의 지붕에서 기와를 벗겨내거나 벽을 망치로 두드려 모양만 훼손하거나, 반란 지도자 여러 명을 처형하는 등 비교적 관용적인 처리 밖에 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리옹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서운 선언 후에, 기대치보다 약한 처분에 거리의 사람들은 안도했지만, 이 같은 처리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은 쿠통의 파면을 요구했다.[1]4. 3. 푸셰, 데르브와의 파견
조제프 푸셰, 코로 데르브와 등이 쿠통을 대신하여 파견되었다. 코로 데르브와는 11월 7일, 푸셰는 11월 10일에 각각 리옹에 도착했다. 전직 배우였던 코로 데르브와는 리옹에서 무대에 섰을 때 관중의 야유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리옹 시민에 대한 처벌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푸셰와 데르브와는 반란에 동조했던 리옹 시민들을 가차없이 살해하고 리옹 시의 문화유적들을 파괴했다. 그들은 쿠통의 처분을 미온적이라고 여기고 리옹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시작했다. 먼저, 처형된 샤리에의 유해를 들고 나와 그를 기리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다음 날 혁명 재판소가 설치되었고, 12월 4일부터 본격적인 처형이 시작되었다.

기요틴에 의한 처형은 "너무 느리다"며 대포에 의한 처형이나,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한 뒤의 총살 등이 행해졌다. 푸셰는 도시 인구의 10%를 처형한다는 할당량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다고도 한다. 이로 인해 리옹 반란에 관련된 사람들은 처형되었고, 프로토 평원에는 시체가 넘쳐났다. 또한 국민 공회의 선언에 따라 리옹의 거리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처형이 계속되자 시체는 론 강·손 강에 수장되었지만, 일부는 뗏목에 실려 하류로 흘려보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난 툴롱까지 시체가 흘러가면 반도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푸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툴롱 탈환 소식이 전해지자, 그날의 축하 행사로 200명이나 되는 반도들을 추가로 처형했다.
3개월에 걸친 학살로 2,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푸셰는 이 사건 이후 "리옹의 산탄 학살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5. 그 후
국민공회는 리옹을 철저히 파괴하고 반혁명 세력을 거의 소멸시켰다. 리옹은 빌-아프랑시(Ville-affranchie, 해방 도시) 또는 코뮌-아프랑시로 개명되었다.[1]
푸셰와 콜로 드르부아는 과격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아 파리로 소환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들의 과격한 보복에 분노했다. 툴롱의 바라스와 프레롱, 보르도의 탈리앙 등 다른 파견 의원들도 가혹한 보복으로 문제가 되었다. 처형될 것을 두려워한 파견 의원들은 푸셰가 주도하는 반 로베스피에르 음모에 가담했고, 이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이어졌다.
1794년 10월 7일, 쿠데타 이후 도시 이름은 다시 리옹으로 복구되었다.[1]
참조
[1]
서적
Lyon
2005
[2]
서적
死刑執行人サンソン
集英社
[3]
서적
ジョゼフ・フーシェ -或る政治的人間の肖像-
岩波書店
[4]
서적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이화북스
2019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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