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밸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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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치 밸런스는 1941년 멕시코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59년 17세의 나이로 사망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로큰롤 음악가이다. 1958년 데뷔하여 "Come On, Let's Go", "Donna", "La Bamba"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특히 스페인어로 된 "La Bamba"는 라틴 음악과 로큰롤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59년 버디 홀리, 빅 보퍼와 함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으며, '음악이 죽은 날'로 기억된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은 치카노 록과 라틴 록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삶은 영화 《라 밤바》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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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밸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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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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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처드 스티븐 발렌수엘라 |
다른 이름 | 리치 발렌스 |
출생일 | 1941년 5월 13일 |
출생지 | 샌 페르난도 밸리, 캘리포니아, 미국 |
사망일 | 1959년 2월 3일 |
사망지 | 클리어 레이크, 아이오와, 미국 |
사망 원인 | 둔기 외상, 비행기 사고 결과 |
안장지 | 샌 페르난도 미션 묘지 |
직업 | 음악가 작곡가 |
활동 기간 | 1957년–1959년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음악가 정보 | |
장르 | 로큰롤 치카노 록 |
악기 | 기타 보컬 |
관련된 활동 | 웨일론 제닝스 버디 홀리 |
2. 생애
리치 밸런스는 멕시코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로스앤젤레스 샌퍼낸도밸리 근교의 파코이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멕시코 음악과 R&B를 듣고 자랐으며, 기타를 배웠다. 16세에 밴드를 시작하여 1958년에 스카우트되어 "Come On, Let's Go"로 데뷔했다. 이어서 두 번째 싱글 "도나"를 발표했는데, B면은 멕시코 민요를 로큰롤풍으로 리메이크한 "라 밤바"였다.
1959년 2월 3일,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에서의 투어 후 탑승한 비행기가 악천후로 인해 같은 주 세로고도군 그랜트 타운십의 옥수수밭에 추락하여, 동승했던 버디 홀리, 빅 보퍼, 그리고 조종사와 함께 사망했다. 향년 17세였다. 한 번에 3명의 로큰롤러가 죽은 이 사건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훗날 돈 매클린의 곡 "아메리칸 파이"에서 "음악이 죽은 날"로 언급되었다.
밸런스 사후 "도나"는 미국에서 2위[45][46], "라 밤바"는 22위[47]를 기록했다. "라 밤바"는 스페인어 노래로는 미국에서 최초로 히트한 곡이다.
2. 1. 초기 생애 (1941-1957)
리치 밸런스는 1941년 5월 13일 로스앤젤레스 파코이마에서 리처드 스티븐 발렌주엘라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 샌퍼낸도밸리 근교에 거주했다. 아버지 조셉 스티븐 발렌주엘라(1896–1952)와 어머니 콘셉시온 "콘차" 레예스(1915–1987)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복 형제 로버트 "밥" 모랄레스(1937–2018)와 마리오 라미레즈, 여동생 코니와 이르마가 있었다.밸런스는 전통적인 멕시코 마리아치 음악과 플라멩코 기타,[7] R&B 및 점프 블루스를 들으며 자랐다. 다섯 살 때부터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기타와 트럼펫을 배우고, 나중에는 드럼을 독학했다. 밸런스는 왼손잡이였지만, 기타를 배우고 싶어 오른손잡이 악기를 완벽하게 익혔다.
15세 때인 1957년 파코이마 공중 충돌 사고 당시 파코이마 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그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8][9] 이 사고로 비행 공포증을 겪게 되었다.[10]
파코이마 중학교 재학 시절, 기타를 학교에 가져와 관람석에서 친구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곤 했다.[11] 16세 때 지역 밴드인 실루엣츠(히트곡 "Get a Job"으로 유명한 동명의 그룹과는 다름)에 합류했다. 기타리스트로 시작했다가 메인 보컬이 그룹을 떠나자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57년 6월 19일, 실루엣츠와 함께 데뷔 공연을 가졌다.
샌 페르난도 고등학교에도 다녔다.[12]
2. 2. 음악 경력 (1958-1959)
1958년 밥 케인(Bob Keane)은 델파이 레코드라는 작은 음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샌퍼낸도의 한 고등학생으로부터 리치 밸런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13] '샌퍼낸도의 리틀 리처드'라고 불리던 밸런스의 공연을 본 케인은 그를 자신의 집 지하실에 있는 녹음실로 초대하여 오디션을 보게 했다. 이 오디션에서 2트랙 Ampex 휴대용 녹음기와 노이만 U-47 콘덴서 마이크 2대를 사용했다.[13]1958년 5월 14일, 케인은 밸런스와 계약하고, '리처드'라는 이름이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리치'로, 성은 좀 더 폭넓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밸런스'로 줄이도록 권유했다.[13] 이후 밸런스는 골드 스타 스튜디오에서 르네 홀, 캐롤 케이, 얼 팔머 등과 함께 첫 번째 곡인 "Come On, Let's Go"와 "Framed"를 녹음하여 발매했고, 이 음반은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 음반은 여자친구 도나 루드비히를 위해 쓴 "도나"[14]와 멕시코 민요를 로큰롤로 편곡한 "라 밤바"를 함께 수록한 더블 A-사이드 싱글이었다. 이 음반은 100만 장 이상 판매되어 미국 음반 산업 협회로부터 골드 디스크를 받았다.[15]
1958년 10월 6일, 밸런스는 딕 클라크의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에 출연하여 "Come On, Let's Go"를 불렀고, 이후 호놀룰루에서 공연했다.[17] 1958년 12월에는 파코이마 중학교에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공연은 사후에 ''Ritchie Valens in Concert at Pacoima Jr. High''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17] 같은 달 뉴욕에서 앨런 프리드의 크리스마스 쇼에 출연하여 에벌리 브라더스, 보 디들리, 척 베리, 재키 윌슨, 에디 코크란 등과 함께 공연했다.[16] 1958년 12월 27일에는 ''딕 클라크 쇼''에서 "Donna"를 불렀다.[17]
1959년 1월, 밸런스는 샘 쿡과 함께 웨스트 코비나 고등학교에서 열린 자선 행사에도 참여했다.[17]


2. 3. 죽음 (1959)
1959년 1월 23일, 밸런스는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시작된 "윈터 댄스 파티" 투어에 참여했다. 이 투어에는 버디 홀리, J. P. 리처드슨, 다이온 앤 더 벨몬츠, 프랭키 사르도 등 5명의 출연진이 함께했다. 그러나 이 투어는 영하의 기온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투어 버스는 두 번이나 고장 났고, 밸런스와 리처드슨은 독감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다. 1월 31일 미네소타주 덜루스에서는 버스가 멈춰 섰고, 홀리의 드러머 칼 번치가 심한 동상으로 입원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번치를 대신해 홀리, 밸런스, 다이온이 번갈아 가며 드럼을 연주했다.
1959년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 공연이 끝난 후, 홀리, 리처드슨, 밸런스는 홀리가 전세 낸 소형 비행기를 타고 아이오와주 메이슨 시티 공항을 이륙했다. 밸런스는 홀리의 백업 기타리스트 토미 올섭과의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비행기에 탑승했다. 당시 메이슨 시티의 KRIB-AM의 디스크 자키였던 밥 헤일은 그날 밤 콘서트의 사회자였으며, 음악가들이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무대 옆 방에서 동전을 던졌다. 밸런스는 "내 평생 처음으로 뭔가를 이겨봤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홀리의 베이시스트인 웨일론 제닝스는 독감에 걸린 J.P. 리처드슨에게 자발적으로 비행기 좌석을 양보했다.
1959년 2월 3일 오전 12시 55분경, 4인승 비치크래프트 보난자 (N3794N)가 노스다코타주 파고로 출발했지만, 이륙 몇 분 만에 추락했다. 원인은 기상 악화에 대한 자격이 없는 조종사 로저 피터슨의 조종 미숙인 것으로 보인다. 충돌로 인해 네 명 모두 즉사했다. 홀리, 리처드슨, 피터슨과 마찬가지로 밸런스는 심각한 치명적인 머리 부상과 함께 가슴에 둔기 외상을 입었다. 17세의 밸런스는 이 사고로 사망한 최연소자였다.[4]
이 비극은 가수 돈 맥클린이 1971년 히트곡 "아메리칸 파이"를 쓰도록 영감을 주어 2월 3일을 "음악이 죽은 날"로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밸런스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미션힐스에 있는 샌 페르난도 미션 묘지에 묻혔다.[4]
3. 사후 영향 및 유산
리치 밸런스는 치카노 록과 라틴 록의 선구자로, 많은 멕시코계 미국인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로스 로보스, 로스 론리 보이즈, 카를로스 산타나와 같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당시 미국 록과 팝 음악계에서 전국적인 성공을 거둔 라틴계 음악가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류 록 음악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최초의 라틴계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라 밤바"는 스페인어로만 불린 팝 차트 히트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라틴 아메리카 음악과 록 음악을 성공적으로 혼합하여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녹음으로 입증되었다. 밸런스는 이 공식을 처음으로 활용했으며, 이후 카를로스 산타나, 셀레나, 카이파네스, 카페 타쿠바, Circo, 엘 그란 실렌시오, 아테르시오펠라도스, 구스타보 산타올라야 및 라틴 얼터너티브 씬의 많은 다른 아티스트들이 이를 채택했다. 밸런스는 스페인어로 "라 밤바"를 녹음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가사를 배웠다.[25][26] 2019년, "라 밤바"의 밸런스 버전은 미국 의회 도서관에 의해 "문화적, 역사적, 미학적으로 중요한" 국가 녹음 기록 보관소에 보존하도록 선정되었다.
밸런스는 1988년 "라 밤바"로 그래미상 올해의 노래상 후보에 올랐다.
2015년, ''빌보드'' 매거진은 밸런스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 아티스트 3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의 영향력은 오늘날의 라틴 얼터너티브 아티스트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언급했으며, "선구적인 라틴 아티스트의 지속적인 크로스오버 히트곡 "라 밤바"는 멕시코 음악과 스페인어 가사가 주류에 어필한다는 것을 일찍이 증명했다"고 언급했다.
"Come On, Let's Go"는 로스 로보스, 라몬즈와 팔리 브라더스 (라몬즈가 기타, 베이스, 드럼을 연주하고 팔리 브라더스가 보컬을 맡음), 토미 스틸, 헌팅턴스, 걸 인 어 코마, 맥코이스가 녹음했다. 조니 렙과 그의 레벨스는 호주에서 리든/카네토드 레코드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Donna"는 MxPx, 마티 와일드, 영블러즈, 클렘 스나이드, 카파도나, 미스피츠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녹음했다.
로버트 퀸은 밸런스의 기타 연주를 그의 스타일에 대한 초기 영향으로 언급했다. 밸런스는 또한 지미 헨드릭스, 찬 로메로, 카를로스 산타나, 비틀즈, 크리스 몬테즈, 키스 오코너 머피, 비치 보이스 및 레드 제플린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
1987년에 사망한 밸런스의 어머니 콘차는 그의 옆에 묻혔다.[27]
4. 음반 목록
리치 발렌스의 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앨범 상세 정보 | 미국 최고 차트 순위 |
---|---|---|
리치 발렌스 | 23 | |
리치 | — |
레드 제플린의 앨범 ''피지컬 그래피티''에 수록된 "Boogie with Stu"는 발렌스의 "Ooh, My Head"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곡은 발렌스나 밥 케인을 크레딧하지 않고 발렌스의 어머니를 크레딧했다. 결국, 케인이 소송을 제기했고, 보상의 절반은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발렌스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33]
발렌스의 싱글 음반 목록은 여기를 참조하라.
4. 1. 스튜디오 앨범
레드 제플린의 앨범 ''피지컬 그래피티''에 수록된 "Boogie with Stu"는 발렌스의 "Ooh, My Head"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곡은 발렌스나 밥 케인을 크레딧하지 않고 발렌스의 어머니를 크레딧했다. 결국, 케인이 소송을 제기했고, 보상의 절반은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발렌스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33]4. 2. 주요 컴필레이션 앨범
제목 | 앨범 상세 정보 | 미국 최고 차트 순위 |
---|---|---|
리치 발렌스 | 23 | |
리치 | — |
(변경 사항 없음: 주어진 출력 결과물이 지시사항을 모두 만족합니다.)
4. 3. 싱글
B-사이드: "Framed""La Bamba"
22
49
B-사이드: "Big Baby Blues"
(초판은 "Arvee Allens"로 표기, 이후 "Ritchie Valens"로 표기)
B-사이드: "In a Turkish Town"
B-사이드: "We Belong Together" (Ritchie Valens 수록)
B-사이드: "Cry, Cry, Cry"
(위 세 싱글은 골드 발렌스 기념 시리즈 레이블로 발매. Del-Fi 4117은 그림 소매와 함께 발매)
B-사이드: "La Bamba" (Ritchie Valens'' 수록 오리지널 버전)
B-사이드: "La Ba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