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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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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거릿 머레이는 영국 태생의 이집트학자이자 인류학자, 민속학자로, 1863년 7월 13일에 태어나 1963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이집트학을 연구하며 고고학 강사로 활동했고, 아비도스, 사카라 등 이집트 유적 발굴에 참여했다.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간호사로 봉사했다. 민속학 연구를 통해 서유럽 마녀 숭배 가설을 주장하며, 이 이론은 현대 이교의 한 분파인 위카(Wicca)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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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머레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8년의 머리
본명마거릿 앨리스 머리
출생일1863년 7월 13일
출생지영국령 인도 제국, 콜카타
사망일1963년 11월 13일
사망지잉글랜드, 하트퍼드셔 주
국적영국
직업이집트 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민속학자
부모제임스 머리, 마거릿 머리
모교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고용주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1898년–1935년)

2. 생애

머레이는 UCL 윌킨스 빌딩에서 이집트학을 공부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권유로 머레이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이집트학과에 등록했다. 이 학과는 윌리엄 플린더스 피트리 경이 운영했으며, UCL 사우스 클로이스터의 에드워즈 도서관에 있었다.[3] 1894년, 30세의 나이로 UCL에서 공부를 시작한 머레이는 고대 이집트어콥트어 강좌를 수강했다.[3]

머레이는 피트리의 필사자이자 삽화가가 되었고, 키프트 발굴 보고서 그림을 제작했다.[3] 1895년에는 첫 연구 논문 "이집트 역사 초기 시대의 재산의 계보"를 발표했다.[3] 피트리의 비공식 조수가 된 머레이는 프랜시스 르웰린 그리피스가 없을 때 언어 수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1898년, 영국 최초의 여성 고고학 강사가 된 머레이는 UCL에서 일주일에 이틀을 보내며 이집트 역사, 종교, 언어 강좌를 가르쳤고, 나머지 날은 어머니를 돌봤다.[3]

머레이가 처음 발굴한 오시리온


1902-03년, 머레이는 이집트 아비도스에서 피트리의 발굴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간호사로 합류했지만, 이후 발굴 방법을 배우고 선임직을 받았다.[3] 레지날드 엥겔바흐, 조지나 에이트킨 등 주목할 만한 이집트학자를 양성했으며, 대영 박물관에서 야간 강좌를 가르치기도 했다.[3]

여성 명령을 싫어하는 남성 발굴자들과의 갈등, 그리고 페미니스트 운동 참여자들과의 논의를 통해 머레이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3] 아비도스에서 오시리온을 발견한 머레이는 1904년 현장 보고서 ''아비도스의 오시리온''을 출판, 건물의 목적과 사용을 식별하기 위해 비문을 조사했다.[3]

1903-04년, 카이로 근처 사카라 묘지에서 조사를 시작한 머레이는 법적 허가 문제로 1860년대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발굴한 10개 무덤의 비문을 필사했다.[3] 1905년 ''사카라 마스타바 I''을 출판했고, 1937년 비문 번역을 담은 ''사카라 마스타바 II''를 출판했다. ''아비도스의 오시리온''과 ''사카라 마스타바 I''은 이집트학계에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피트리는 머레이의 공헌을 인정했다.[3]

2. 1. 초기 생애 (1863–1893)

마거릿 머레이는 1863년 7월 13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수도였던 캘커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머레이는 영국계 사업가였고, 어머니 마거릿(결혼 전 성은 카)은 선교사였다.[1] 머레이는 인도와 영국의 문화가 혼합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영국과 인도 모두에 속하는 초국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1]

1870년, 머레이는 여동생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삼촌 존의 집에서 살았다. 삼촌은 머레이에게 기독교 교육과 여성 혐오적인 가르침을 했지만, 머레이는 이를 거부했다.[1] 1873년에는 독일 본에서 독일어를 유창하게 익혔다.[1] 1875년, 머레이는 캘커타로 돌아갔다가 1877년 영국 시든햄으로 이주했다.[1]

1880년, 머레이는 다시 캘커타로 돌아가 7년간 간호사로 활동하며 1881-96년 콜레라 범유행에 대응했다.[1]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5,000개의 항목을 제출하기도 했다.[1] 1887년, 영국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사회 복지사로 일했다.[1]

2. 2. 런던 대학교에서의 초기 (1894–1905)



어머니와 여동생의 권유로 머레이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신설된 블룸스버리, 중앙 런던의 이집트학과에 등록하기로 결심했다. 아멜리아 에드워즈의 기부로 설립되었으며, 이집트 탐사 기금(EEF)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 이 학과는 선구적인 초기 고고학자 윌리엄 플린더스 피트리 경이 운영했으며, UCL의 사우스 클로이스터의 에드워즈 도서관에 있었다. 머레이는 1894년 1월 30세의 나이로 UCL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녀의 반은 주로 다른 여성들과 나이 많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고대 이집트어콥트어 강좌를 들었는데, 각각 프랜시스 르웰린 그리피스와 월터 유잉 크럼이 가르쳤다.

머레이는 곧 피트리를 알게 되어 그의 필사자이자 삽화가가 되었고, 키프트의 발굴에 대한 출판 보고서를 위한 그림을 제작했다. 그는 그녀가 첫 번째 연구 논문인 "이집트 역사 초기 시대의 재산의 계보"를 쓰도록 돕고 격려했으며, 이 논문은 1895년 ''성서 고고학회 회보''에 게재되었다. 피트리의 비공식 조수가 된 머레이는 그리피스가 부재중일 때 언어 수업을 일부 가르치기 시작했다. 1898년 그녀는 이집트학과의 언어 강좌를 가르치는 주니어 강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녀를 영국 최초의 여성 고고학 강사로 만들었다. 이러한 자격으로 그녀는 일주일에 이틀을 UCL에서 보냈고, 나머지 날들은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데 전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고대 이집트 역사, 종교 및 언어에 대한 강좌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머레이는 현장 고고학 경험이 없었고, 1902-03년 현장 시즌 동안 이집트로 가서 피트리의 아비도스 발굴에 참여했다. 피트리와 그의 아내 힐다 피트리는 1899년부터 프랑스 콥트 학자 에밀 아멜리노로부터 고고학 조사를 인계받아 현장을 발굴해 왔다. 머레이는 처음에는 현장 간호사로 합류했지만, 이후 피트리로부터 발굴 방법을 배우고 선임직을 받았다.

이는 여성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일부 남성 발굴자들과 몇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이 경험은 다른 여성 발굴자들(그들 중 일부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과의 논의와 결합하여 머레이가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아비도스에서 발굴하는 동안 머레이는 파라오 세티 1세의 명령에 따라 신왕국 시대에 건설된 신 오시리스에게 헌정된 사원인 오시리온을 발견했다. 그녀는 1904년에 현장 보고서를 ''아비도스의 오시리온''으로 출판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녀는 건물의 목적과 사용을 식별하기 위해 현장에서 발견된 비문을 조사했다.

1903-04년 현장 시즌 동안 머레이는 이집트로 돌아와 피트리의 지시에 따라 카이로 근처 사카라 묘지에서 조사를 시작했는데, 그 묘지는 고왕국 시대부터였다. 머레이는 현장을 발굴할 법적 허가를 받지 못했고, 대신 1860년대에 오귀스트 마리에트에 의해 발굴된 10개의 무덤에서 비문을 필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1905년에 발견 내용을 ''사카라 마스타바 I''로 출판했지만, 1937년까지 비문의 번역을 ''사카라 마스타바 II''로 출판하지 않았다. ''아비도스의 오시리온''과 ''사카라 마스타바 I''은 모두 이집트학계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피트리는 머레이가 자신의 경력에 기여한 바를 인정했다.

2. 3. 페미니즘, 제1차 세계 대전, 민속학 (1905–1920)

머레이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원봉사하고 재정적으로 기부했으며, 여성 사회 정치 연합에 가입하여 1907년 진흙 행진과 1911년 6월 여성 대관식 행렬 등 대규모 행진에 참여했다. 학계에서 존경받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과격하게 드러내지 않았다.[2] 고고학 및 학계 전반에서 여성의 전문적 경계를 넓히고 다른 여성들을 지도했다.[2] 여성은 남성의 공동 휴게실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UCL이 여성용 공동 휴게실을 개설하도록 성공적으로 캠페인을 벌였고, 이후 더 크고 잘 갖춰진 방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 방은 나중에 마거릿 머레이 룸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2] UCL에서 동료 여성 강사인 위니프레드 스미스와 친구가 되었고, 함께 대학 내 여성의 지위와 인정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머레이는 여성 직원이 남성 대학 관계자를 불쾌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에 짜증을 냈다.[2] 학생들에게 영양가 있고 저렴한 점심을 제공하기 위해 수년 동안 UCL 매점 위원회에서 활동했다.[2] 이집트학부 내에서 비공식적인 행정 역할을 맡았으며, 1910년 이집트 고고학 공식 자격증 도입에 크게 기여했다.[2]

영국 전역의 여러 박물관들이 머레이에게 이집트 유물 컬렉션에 대한 조언을 구했으며, 더블린 국립 박물관, 에든버러 국립 골동품 박물관, 스코틀랜드 골동품 협회 소유 이집트 유물을 목록화했고, 스코틀랜드 골동품 협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2]

머레이는 맨체스터 박물관(사진)에서 많은 강연과 목록 작성 작업을 수행했다.


플린더스 피트리는 맨체스터 박물관의 이집트학 부서와 관계를 맺었고, 그의 많은 발견물들이 그곳에 보관되었다. 머레이는 종종 박물관을 방문하여 유물을 목록화했고, 1906-07 학년도에는 정기적으로 그곳에서 강의했다.[2]

1907년, 페트리는 두 명의 이집트 사제 나크트-앙크와 크눔-나크트의 두 형제의 무덤을 발굴했고, 머레이는 미라화된 시신을 공개적으로 풀기로 결정했다. 1908년 5월 박물관에서 열린 이 행사는 여성이 공개적으로 미라를 푸는 최초의 사례였으며, 500명 이상의 관람객이 참석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 머레이는 이 작업이 중왕국과 매장 관행에 대한 학문적 이해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을 비판했다. "고대 유물의 모든 흔적은 무감각함 없이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중하게 연구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선언했다.[2] 이후 두 시신에 대한 분석을 담은 ''두 형제의 무덤''을 출판했으며, 이 책은 21세기까지 중왕국 미라화 관행에 대한 주요 출판물로 남아 있었다.[2]

글래스톤베리 수도원(사진)은 머레이의 영국 민속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머레이는 대중 교육에 헌신하여 고대 이집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자 했고,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을 저술했다.[2] 1905년 ''초급 이집트 문법'', 1911년 ''초급 콥트(사히딕) 문법''을 출판했다.[2] 1913년, 존 머레이의 "동방의 지혜" 시리즈를 위해 ''고대 이집트 전설''을 출판했다.[2]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무덤 발견(1922) 이후 이집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을 기뻐했다.[2] 1911년부터 1940년 사망할 때까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인류학자 찰스 가브리엘 셀리그먼과 친한 친구였으며, 함께 인류학적 청중을 위한 다양한 이집트학 논문을 공동 저술했다. 이 논문들은 자궁에 대한 "사" 기호처럼 이집트학 저널에서 다루지 않을 주제를 다루었기에 로열 인류학 연구소의 ''인간''에 게재되었다.[2] 1916년 셀리그먼의 추천으로 로열 인류학 연구소 회원으로 초청받았다.[2]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영국이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페트리와 다른 직원들은 이집트 발굴을 할 수 없었다.[2] 대신 페트리와 머레이는 지난 수십 년간 획득한 유물 컬렉션을 재정비했다.[2] 머레이는 영국의 전쟁 노력을 돕기 위해 대학 여성 연합 사회의 자원 항공 분대에 자원 간호사로 등록했고, 몇 주 동안 프랑스 생말로에 배치되었다.[2]

병을 앓은 후 서머싯 글래스톤베리로 요양을 갔고, 글래스톤베리 수도원, 아서 왕 전설, 성배가 아라마대 요셉에 의해 옮겨졌다는 주변 민속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 이러한 관심으로 ''고대 이집트''에 "성배 로맨스에 나타난 이집트적 요소" 논문을 발표했지만, 제시 웨스턴 등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2]

3. 후기 생애

머레이는 민속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근대 초기 유럽의 마녀 재판 연구에 몰두했으며, 이는 그녀의 학문적 생애 후반기까지 이어졌다. 1921년 UCL에서 강사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선임 강사로 승진했다.[2] 1921년부터 1927년까지는 몰타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을 주도하며 산타 소피아를 비롯한 청동기 시대 거석 기념물을 발굴했다. 이 시기 몰타 섬의 민속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32년에는 마누엘 마그리 등의 자료를 번역하여 ''몰타 민담''을 출판하기도 했다.

1928년 런던의 머레이


1924년 UCL 조교수로 승진한 머레이는 1927년 이집트학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테크의 메리 왕비가 UCL을 방문했을 때 이집트학 부서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강의 부담이 줄어든 머레이는 이집트, 남아프리카, 소련, 북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연구를 이어갔다.

1935년 UCL에서 은퇴한 후, 머레이는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의 탈 알-아줄 발굴을 돕거나 요르단의 페트라 유적을 탐사하는 등 고고학 연구를 계속했다.[1] 1937년에는 페트라의 동굴 거주지에서 소규모 발굴을 진행하고 관련 보고서와 안내서를 저술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케임브리지로 피난하여 군인 교육에 자원봉사하며 지역 역사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전후 런던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대영 박물관과 시티 문학 연구소 등에서 이집트학 연구와 강의를 지속하며 대중에게 이집트 문화를 알리는 데 힘썼다. 1949년에는 《고대 이집트 종교 시》와 《이집트의 화려함》을 출판하여 이집트 문명이 서구 사회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1953년 민속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머레이는 1955년까지 재임하며 잉글랜드 민속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 1960년에는 자신의 연구 자료를 민속학회에 기증했다.[3] 말년에는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100세 생일을 맞이한 1963년에는 《종교의 기원》과 자서전 《나의 첫 백 년》을 출간했다.[8] 같은 해 11월 13일, 머레이는 하트퍼드셔의 퀸 빅토리아 기념 병원, 웰윈에서 생을 마감했다.[8]

머레이는 자신의 연구가 "마녀 재판에 대한 최초의 페미니스트 연구"이며, "마녀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최초의 연구였다고 주장한다.

3. 1. 마녀 숭배설, 몰타, 메노르카 (1921–1935)

머레이는 민속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근대 초기 유럽의 마녀 재판에 주목했다. 1917년 민속학회 저널 ''Folklore''에 논문을 발표하여 마녀 숭배 이론을 처음으로 명확히 제시했다. 그녀는 유럽 역사에서 박해받은 마녀들이 "믿음, 의식, 조직이 다른 어떤 숭배만큼이나 잘 발달된 명확한 종교"를 따르는 이들이라고 주장했다.[1] 이후 ''Man'' 및 ''스코틀랜드 역사 검토'' 저널에도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2]

1921년, 머레이는 저서 ''서유럽의 마녀 숭배''를 출판하여 자신의 견해를 더욱 구체화했다. 이 책은 헨리 발푸어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으며, 학계에서 비판과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3] 역사학자들은 머레이가 동시대 기록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했다고 비판했지만,[4] 이 책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5]

1929년, 머레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4판에 "마녀 숭배" 항목을 기고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그녀는 다른 학자들의 이론은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만을 제시했으며, 이 항목은 1969년까지 백과사전에 남아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6] 특히 디온 포춘 등 오컬트 신봉자들은 머레이의 주장이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한다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7]

1933년, 머레이는 ''마녀의 신''을 출판하여 비학술적 독자층을 대상으로 자신의 이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동물 희생 등 마녀 숭배의 부정적인 측면을 삭제하거나 완화하고, 이 종교를 "고대 종교"로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8]

1921년부터 1927년까지 머레이는 몰타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을 이끌었다. 그녀는 산타 소피아 등 청동기 시대 거석 기념물을 발굴했으며, 이 작업은 퍼시 슬라덴 기념 기금의 지원을 받았다. 머레이의 발굴 보고서는 몰타 고고학 분야에서 중요한 출판물로 평가받는다. 발굴 과정에서 머레이는 섬의 민속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1932년 ''몰타 민담''을 출판했다. 같은 해, 머레이는 몰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청동기 시대 도자기 컬렉션 목록 작성에 참여하여 ''몰타 청동기 시대 도자기 연구''를 출판했다.

머레이는 몰타의 보르지 인-나두르(사진)에서 발굴을 진행했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머레이는 루이스 클라크 (고고학자)의 초청으로 메노르카 섬에서 발굴을 이끌었다. 그녀는 탈라이오트 문화 유적인 트레푸코 등을 발굴하여 ''메노르카의 케임브리지 발굴''을 출판했다.

1924년, UCL은 머레이를 조교수로 승진시켰고, 1927년에는 이집트학 경력으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5년, 머레이는 UCL에서 퇴직했다.

3. 2. 페트라, 케임브리지, 런던 (1935–1953)

1935년 머레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가자 시티 남쪽에 있는 청동기 시대 언덕인 탈 알-아줄에서 페트리 부부의 발굴을 도왔다.[1] 이 시기 팔레스타인 여행 중, 머레이는 인접한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하여 그 유적지에 매료되었다. 1937년 3월과 4월에 그녀는 페트라의 여러 동굴 거주지에서 작은 발굴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방문했으며, 이후 페트라에 대한 발굴 보고서와 안내서를 모두 작성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케임브리지 기튼 칼리지에서 이집트 골동품 목록 작성 작업을 도왔으며, 1942년까지 해당 대학에서 이집트학 강의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런던의 블리츠를 피해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전후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군인을 교육하는 단체(아마도 육군 시사국 또는 왕립 육군 교육대)에서 자원 봉사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머레이는 런던으로 돌아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과 UCL 고고학 연구소(당시에는 독립 기관이었으나 현재는 UCL의 일부) 근처인 엔즈레이 거리의 침대 겸 거실에 정착했다. 그녀는 UCL에 계속 관여하고 후자의 도서관을 이용했다. 거의 매일 대영 박물관을 방문하여 도서관을 참고했고, 일주일에 두 번 시티 문학 연구소에서 고대 이집트 역사와 종교에 대한 성인 교육 강좌를 가르쳤다. 은퇴하면서 자신의 제자였던 베로니카 세튼-윌리엄스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머레이는 대중에게 이집트학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1949년 그녀는 존 머레이의 "동양의 지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고대 이집트 종교 시》를 출판했고, 같은 해 UCL 강연 내용을 모아 《이집트의 화려함》을 출판했다.

3. 3. 말년 (1953–1963)

Margaret Murray영어는 1953년에 전임 회장 앨런 고메가 사임한 후 민속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머레이는 1955년까지 두 임기 동안 회장직을 역임했다.[1] 1954년 회장 연설 "민속 연구를 위한 잉글랜드"에서 그녀는 다른 국가의 민속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잉글랜드 사람들이 자신의 민속에 무관심하다고 본 것을 한탄했다.[2]

1960년, 머레이는 전국 각지의 다양한 개인들과의 서신을 포함한 자신의 논문 컬렉션을 민속학회 기록 보관소에 기증했으며, 현재 "머레이 컬렉션"으로 알려져 있다.[3]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머레이는 런던 북부의 노스 핀칠리에 있는 한 집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은 은퇴한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녀는 가끔 거기에서 런던 중심부로 택시를 타고 가서 UCL 도서관을 방문했다.[4]

건강이 악화되자 1962년 머레이는 하트퍼드셔의 퀸 빅토리아 기념 병원, 웰윈으로 이사하여 24시간 간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여기서 생애 마지막 18개월을 보냈다.[5] 1963년 7월 13일,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의 친구, 전 제자, 의사 그룹이 인근 에이엇 세인트 로렌스에서 파티를 열었다.[4] 이틀 후, 그녀의 의사는 그녀를 UCL로 데려가 두 번째 생일 파티를 열었다. 이 파티에는 다시 한번 그녀의 많은 친구, 동료, 전 제자들이 참석했다. 그곳은 그녀가 대학을 방문한 마지막 날이었다.[6] 왕립 인류학 연구소의 저널 ''

4. 마녀 숭배 가설

마거릿 머레이는 1921년 《서유럽의 마녀 숭배》에서 초기 근대 유럽 전역에 비밀리에 조직된 마녀 숭배가 존재했으며, 이는 기독교 이전의 뿔 달린 신을 숭배하는 종교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 신이 야누스와 같은 고대 신들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머레이는 초기 근대 마녀 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제시했다. 재판 기록에 등장하는 악마는 실제 마녀 숭배의 신이며, 마녀들은 안식일에 모여 춤, 연회, 신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안식일은 기독교 이전 종교 축제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1931년 《마녀의 신》에서 머레이는 자신의 이론을 확장하여, 마녀의 신이 구석기 시대부터 유럽에서 숭배되었고, 청동기 시대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숭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모헨조다로의 뿔 달린 형상(파슈파티로 해석됨), 이집트의 오시리스아몬, 미노아 크레테의 미노타우루스를 증거로 제시했다. 유럽 내에서는 그리스의 , 골의 케르눈노스, 스칸디나비아 암각화에서 뿔 달린 신이 표현되었다고 주장했다.

1954년 《영국의 신성한 왕》에서 머레이는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의 영향을 받아, 전 세계 사회가 자연의 신에게 왕을 희생했으며, 이는 중세 잉글랜드까지 계속되어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의 죽음이 의식적 희생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머레이의 저서들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마녀의 신》은 대중 시장을 겨냥했다. 그녀의 이론은 1929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마녀 숭배" 항목에 포함되어 1969년까지 유지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4]

4. 1. 주장

머레이는 『서유럽의 마녀 숭배』에서 자신의 연구를 영국으로 제한했지만, 프랑스, 플랑드르, 뉴잉글랜드의 자료에도 의존한다고 밝혔다.[3] 그녀는 "조작 마법"(부적과 주문 사용)과 "의례 마법"(비옥함을 기반으로 한 "서유럽의 고대 종교")을 구분했다.[3] 머레이는 이 숭배가 남성 신과 "어머니 여신"을 모두 숭배했지만, 기록된 시점에는 여성 숭배가 남성 숭배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3]

머레이는 재판 기록에서 악마로 언급된 인물이 마녀의 신이며, "현현하고 육화된" 존재라고 주장했다. 마녀들은 그에게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마녀들의 모임에서 신은 보통 남성, 때로는 여성 또는 동물로 의인화되었다. 머레이는 인간이 이 존재를 의인화할 때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마녀의 안식일에는 완전한 의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3]

말을 탄 악마. ''뉘른베르크 연대기'' (1493).


머레이는 어린 시절이나 성인기에 "입회 의식"을 통해 숭배에 가입하며, 지원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을 섬기는 데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경우에는 서약을 하거나 신앙에 침례를 받기도 했다.[3] 그러나 이 종교는 주로 세습적으로 전해졌다.[3]

머레이는 이 종교가 열세 명의 구성원을 포함하는 코벤으로 나뉘어져 있으며,[3] "대사부"라고 불리는 코벤 지도자가 이끌었다고 묘사했다.[3] 코벤의 기록은 비밀 책에 보관되었으며, 코벤은 반역자를 처형하기도 했다.[3]

이 마녀 숭배를 "즐거운 종교"라고 묘사하며,[3] 5월 이브와 11월 이브에 주요 축제가 열렸고, 2월 1일과 8월 1일, 동지 및 하지, 부활절도 종교적 관찰 날짜였다.[3] "안식일"은 모든 구성원의 일반 회의였고, "에스밧"은 더 사적인 의례 모임이었다.[3] 에스밧은 자정부터 시작되는 야간 의식으로, 사업과 마법 의식이 수행되었다. 안식일 의식에는 마녀들이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충성과 순종을 맹세하며, 이전 안식일 이후 수행한 마법 행위를 설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사업 후에는 숭배 가입, 결혼, 의식, 비옥 의식이 거행되고, 잔치와 춤으로 끝났다.[3]

머레이는 의례 마법을 "비옥 숭배"로 여기며, 비옥함과 비를 내리게 하는 의식이 많았다고 주장했다.[3] 마녀들이 수행한 희생에는 신참의 혈액, 동물, 비 기독교 어린이, 비옥함을 위한 마녀의 신 희생이 있었다.[3]

머레이는 마녀들이 동물로 변신하는 이야기가 마녀들이 특정 동물을 성스럽게 여기고 분장하는 의식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3] 가족신 이야기는 마녀들이 사용한 동물에 기초한 것이며, "점치는 가족신"과 "가정 가족신"으로 나누었다.[3]

머레이는 기독교화 과정에서 영국에서 기독교 이전의 비옥함 기반 종교가 "특정 장소와 특정 계층"에서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3] 요정에 대한 민속 이야기는 초기 근대까지 섬에 살았던 난쟁이 종족에 기반하며, 이 종족이 마녀와 동일한 이교도 종교를 따랐다고 주장했다.[3] 부록에서 잔 다르크와 질 드 레가 마녀 숭배의 구성원이었고 처형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역사학자들은 반박했다.[3]

머레이의 주장은 처음 출판되었을 때 많은 독자와 일부 학자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3]

4. 2. 학계의 반응

머레이의 주장은 처음 출판되었을 때 많은 독자, 특히 마녀 재판 전문가가 아닌 몇몇 중요한 학자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5] 조지 노먼 클라크와 크리스토퍼 힐 같은 초기 근대 영국의 역사가들은 그녀의 이론을 자신의 저서에 포함시키기도 했지만, 힐은 나중에 이 이론에서 거리를 두었다.[6] 1961년 ''서유럽의 마녀 숭배'' 재판본에 대해 중세 역사가 스티븐 런시먼은 서문에서 머레이의 "사소한 세부 사항은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7]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 외에는 그녀의 주장을 지지했다.[8] 그녀의 이론은 아르노 루네베르그가 1947년 저서 ''마녀, 악마, 다산 마법''에서, 페네손 휴즈는 1952년 저서 ''마녀''에서 요약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62년에 글을 쓴 캐나다 역사가 엘리엇 로즈는 머레이의 마녀 재판 해석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거의 논쟁의 여지없이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며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로즈는 머레이의 이론이 이처럼 많은 지지를 받은 이유가 부분적으로 UCL 직원의 자격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그녀의 이론에 많은 독자들의 눈에 더 큰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또한 머레이주의적 견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프레이저나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독자들이 익숙해할 전 기독교 유럽에 대한 일반적인 그림"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허튼은 머레이주의 이론의 인기가 "시대를 거스르는 비밀로 가득한 영국의 시골"이라는 생각, 판의 문학적 인기, 대다수의 영국인이 기독교화 과정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교도로 남아 있었다는 널리 퍼진 믿음, 그리고 민속 관습이 이교도의 생존을 나타낸다는 아이디어를 포함하여 "당대의 많은 감성적 충동에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동시에 허튼은 마녀 재판이 대중의 망상에 의한 것이라는 이전의 지배적인 합리주의적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고 제안했다.

이와 관련하여 민속학자 재클린 심슨은 머레이주의 이론의 매력의 일부는 그것이 어떤 마녀도 없었다고 부인하는 합리주의자들과, 몽타규 서머즈처럼 초기 근대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실제 사탄적 음모가 있었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마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무의미한 논쟁에 대한 합리적이고, 탈신비화하며, 해방적인 접근 방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역사학자 힐다 엘리스 데이비슨은 "그녀의 첫 번째 책이 얼마나 상쾌하고 흥미로웠는지.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고,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언급했다.

5. 유산

마거릿 머레이의 이론은 초기 근대 마녀 재판 전문가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그녀의 초기 출판물부터 많은 아이디어가 "사실 오류와 방법론적 결함"을 지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그녀의 저작에 대한 대부분의 학술적 평가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다.[2] 조지 L. 버는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서 머레이의 마녀 컬트에 관한 초기 저서 두 권을 검토하면서[2] 그녀가 "현대 학자들의 신중한 일반 역사"에 익숙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또한 고문과 강압을 통해 고백이 얻어졌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재판 기록이 마녀 혐의자들의 실제 마법 경험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가정하는 것을 비판했다.[2] 그는 재판 기록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사건을 생략하는 등 자신의 해석에 맞춰 증거를 선택적으로 사용했다고 비난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 기록 전문가 L'Estrange Ewen은 머레이의 해석을 거부하는 책을 출판했다.[2] 로즈는 머레이의 마녀 컬트에 관한 책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소한 사실 오류나 계산 오류, 그리고 몇 가지 추론의 불일치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이 기독교화된 시점과 마녀 재판이 시작된 시점 사이에 약 1,000년의 간극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기간 동안 마녀 컬트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머레이가 기독교 이전의 영국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획일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며, 실제로는 다양한 사회와 종교적 믿음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세 시대 영국인 대다수가 이교도로 남아 있었다는 머레이의 주장을 "무지에 근거한 견해"라고 비판했다.[2]

머레이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비판에 직접 대응하지 않고, 비판자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말년에는 자신의 저작에 대한 서평을 읽는 것을 중단했으며, 비판자들이 비기독교 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편견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었다고 주장했다.[2] 심슨은 이러한 비판적인 서평에도 불구하고, 영국 민속학 분야 내에서 머레이의 이론이 "예의상 또는 아무도 그 주제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아서 도전받지 않고 승인되지 않은 채 통과되도록 허용되었다"고 지적했다.[2]

1963년 머레이가 사망한 이후에도 비판이 잇따랐으며, 머레이의 마녀 숭배 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학문적 거부는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2] 1971년, 역사학자 키스 토마스는 머레이가 이븐의 재판 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매우 선택적으로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머레이의 결론은 "거의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2]

1975년, 역사학자 노먼 콘은 머레이의 "유럽사, 심지어 영국사에 대한 지식도 피상적이었고, 역사적 방법에 대한 이해도 전무했다"고 언급하며, 그녀의 생각은 "프레이저식 틀의 과장되고 왜곡된 버전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덧붙였다.[2] 같은 해 종교 역사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머레이의 연구를 "희망이 없을 정도로 부적절하며, 무수히 많은 끔찍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묘사했다.[2]

허튼은 머레이가 자신의 자료를 "무모하게 포기"했으며, "광대한 공간과 시간에서 흩어져 있는 자료"에서 "마녀 행위의 생생한 세부 사항"을 가져와 그것들을 숭배 전체의 규범으로 선언했다고 말했다.[2] 심슨은 머레이가 재판 기록에서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사건에 대한 모든 설명을 무시하거나 합리화하는 등 증거를 매우 구체적으로 선택하여 자신이 묘사하고 있던 사건을 왜곡했다고 지적했다.[2] 제프리 버튼 러셀은 독립 저자 브룩스 알렉산더와 함께 "전반적으로 머레이의 자료 사용은 끔찍하다"고 말했다.[2] 그들은 "오늘날 학자들은 머레이가 틀린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기본 전제에서 완전히 그리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틀렸다는 데 동의한다"고 주장했다.[2]

머레이의 마녀 숭배 이론은 올더스 헉슬리, 로버트 그레이브스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5] 실비아 타운센드 워너는 1926년 소설 ''롤리 윌로우즈''에 머레이의 저서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6]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도 머레이의 저서가 인용되었다.[7]

5. 1. 학계



어머니와 여동생의 권유로 머레이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신설된 이집트학과에 등록했다. 이 학과는 윌리엄 플린더스 피트리 경이 운영했으며, 머레이는 1894년 1월 30세의 나이로 UCL에서 공부를 시작했다.[1] 그곳에서 고대 이집트어콥트어 강좌를 들었다.[1]

머레이는 곧 피트리를 알게 되어 그의 필사자이자 삽화가가 되었고, 키프트의 발굴에 대한 출판 보고서를 위한 그림을 제작했다.[1] 그는 머레이가 첫 번째 연구 논문인 "이집트 역사 초기 시대의 재산의 계보"를 쓰도록 도왔고, 이 논문은 1895년 ''성서 고고학회 회보''에 게재되었다.[1] 피트리의 사실상 비공식 조수가 된 머레이는 언어 수업을 일부 가르치기 시작했다.[1] 1898년 그녀는 이집트학과의 언어 강좌를 가르치는 주니어 강사로 임명되어 영국 최초의 여성 고고학 강사가 되었다.[1]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대 이집트 역사, 종교 및 언어에 대한 강좌를 가르치게 되었다.[1]

머레이의 학생들 중에는 레지날드 엥겔바흐, 조지나 에이트킨, 가이 브런튼, 머틀 브룸 등 이집트학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1] 그녀는 대영 박물관에서 이집트학 야간 강좌를 가르치면서 UCL 급여를 보충했다.[1]

1902-03년 현장 시즌 동안 머레이는 이집트로 가서 피트리의 아비도스 발굴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현장 간호사로 합류했지만, 이후 피트리로부터 발굴 방법을 배우고 선임직을 받았다.[1] 아비도스에서 발굴하는 동안 머레이는 파라오 세티 1세의 명령에 따라 신왕국 시대에 건설된 신 오시리스에게 헌정된 사원인 오시리온을 발견했다.[1] 그녀는 1904년에 현장 보고서를 ''아비도스의 오시리온''으로 출판했다.[1]

1903-04년 현장 시즌 동안 머레이는 이집트로 돌아와 피트리의 지시에 따라 카이로 근처 사카라 묘지에서 조사를 시작했다.[1] 머레이는 현장을 발굴할 법적 허가를 받지 못했고, 대신 1860년대에 오귀스트 마리에트에 의해 발굴된 10개의 무덤에서 비문을 필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1] 그녀는 1905년에 발견 내용을 ''사카라 마스타바 I''로 출판했지만, 1937년까지 비문의 번역을 ''사카라 마스타바 II''로 출판하지 않았다.[1] ''아비도스의 오시리온''과 ''사카라 마스타바 I''은 모두 이집트학계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으며,[1] 피트리는 머레이가 자신의 경력에 기여한 바를 인정했다.[1]

런던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머레이는 또한 자신의 경력 전반에 걸쳐 여성의 전문적 경계를 넓혔고, 고고학 및 학계 전반에서 다른 여성들을 지도했다.[1] 여성은 남성의 공동 휴게실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UCL이 여성용 공동 휴게실을 개설하도록 성공적으로 캠페인을 벌였고, 나중에는 더 크고 더 잘 갖춰진 방이 그 목적으로 개조되도록 했다.[1] UCL에서 그녀는 동료 여성 강사인 위니프레드 스미스와 친구가 되었고, 함께 대학 내 여성의 지위와 인정을 향상시키기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1]

영국 전역의 다양한 박물관들이 머레이에게 이집트 유물 컬렉션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그 결과 더블린 국립 박물관, 에든버러 국립 골동품 박물관 및 스코틀랜드 골동품 협회가 소유한 이집트 유물을 목록화했으며, 그 협회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1]

페트리는 맨체스터 박물관의 이집트학 부서와 관계를 맺었고, 그의 많은 발견물들이 그곳에 보관되었다. 머레이는 종종 박물관을 방문하여 이러한 유물을 목록화했고, 1906-07 학년도에는 정기적으로 그곳에서 강의를 했다.[1]

1907년, 페트리는 두 명의 이집트 사제인 나크트-앙크와 크눔-나크트의 중왕국 매장인 두 형제의 무덤을 발굴했고, 머레이가 후자의 미라화된 시신을 공개적으로 풀기로 결정되었다. 1908년 5월 박물관에서 열린 이 행사는 여성이 공개적으로 미라를 푸는 행사를 주도한 최초의 사례였다.[1] 머레이는 이 풀기가 중왕국과 그 매장 관행에 대한 학문적 이해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1] 그녀는 이후 두 시신에 대한 분석에 관한 책, ''두 형제의 무덤''을 출판했으며, 이 책은 21세기까지 중왕국 미라화 관행에 대한 주요 출판물로 남아 있었다.[1]

머레이는 대중 교육에 헌신하여, 고대 이집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고대 이집트에 대한 견고한 학문을 불어넣기를 희망했고, 이를 위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책을 저술했다.[1] 1905년에 ''초급 이집트 문법''을 출판했고, 1911년에는 ''초급 콥트(사히딕) 문법''을 출판했다.[1] 1913년, 존 머레이의 "동방의 지혜" 시리즈를 위해 ''고대 이집트 전설''을 출판했다.[1]

1935년 팔레스타인 여행 중 머레이는 인접한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 유적지에 매료된 그녀는 1937년 3월과 4월에 그곳의 여러 동굴 거주지에서 작은 발굴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방문했으며, 이후 페트라에 대한 발굴 보고서와 안내서를 모두 작성했다.[1] 영국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케임브리지 기튼 칼리지에서 이집트 골동품 목록 작성 작업을 도왔으며, 1942년까지 해당 대학에서 이집트학 강의를 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머레이는 런던의 블리츠를 피해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전후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군인을 교육하는 단체에서 자원 봉사를 했다.[1]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과 UCL 고고학 연구소 근처인 엔즈레이 거리의 침대 겸 거실에 정착했고, 전자에 대한 관여를 계속하고 후자의 도서관을 이용했다.[1] 거의 매일 대영 박물관을 방문하여 도서관을 참고했고, 일주일에 두 번 시티 문학 연구소에서 고대 이집트 역사와 종교에 대한 성인 교육 강좌를 가르쳤다.[1]

1949년 그녀는 존 머레이의 "동양의 지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고대 이집트 종교 시》를 출판했다.[1] 같은 해 그녀는 또한 그녀의 UCL 강연을 많이 모아 《이집트의 화려함》을 출판했다. 이 책은 이집트가 그리스-로마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따라서 현대 서구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문화 간 확산 관점을 채택했다. 이 책은 고고학계에서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1]

1963년 7월 13일,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의 친구, 전 제자, 의사 그룹이 인근 에이엇 세인트 로렌스에서 파티를 열었다.[1] 이틀 후, 그녀의 의사는 그녀를 UCL로 데려가 두 번째 생일 파티를 열었다. 그곳은 그녀가 대학을 방문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1] 왕립 인류학 연구소의 저널 ''인간''에서 머레이는 "기억 속에, 아니 역사 전체에서 그들의 백주년을 맞이한 유일한 연구소 회원"이라고 언급했다.[5] 그 해 그녀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중 하나는 ''종교의 기원''이었는데, 그녀는 인류 최초의 신이 남신이 아닌 여신이었다고 주장했다.[1] 두 번째는 그녀의 자서전 ''나의 첫 백 년''이었는데, 이 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5. 2. 위카(Wicca)

머레이의 마녀 숭배 이론은 현대 이교 종교인 위카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4] 위카는 머레이의 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적 내러티브를 구성했으며,[4] 신학, 의례, 조직 구조 등 많은 부분이 머레이 이론에서 차용되었다.[4] 머레이는 '위카의 할머니'로 불린다.[4] 학계의 비판 이후에도 일부 위카들은 머레이 이론을 옹호한다.[4]

머레이의 이론은 현대 이교 종교인 위카의 청사진을 제공했으며,[4] 머레이는 "위카의 할머니"라고 불렸다.[4] 이교 연구 학자 에단 도일 화이트는 이 이론이 "위카가 자체적으로 구축한 역사적 내러티브를 형성했다"고 언급했다.[4]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영국에서 등장했을 때, 위카는 이 마녀 숭배의 생존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4] 뿔 달린 신과 어머니 여신을 중심으로 하는 위카의 신학적 구조는 고대 마녀 숭배에 대한 머레이의 아이디어에서 채택되었고,[4] 위카 그룹은 "코벤"이라고 불리고 그들의 모임은 "에스바트"라고 불렸는데, 이는 머레이가 대중화한 단어였다.[4] 머레이의 마녀 숭배와 마찬가지로 위카의 수행자들은 입문 의식을 거쳤으며,[4] 마녀들이 주문을 책에 적어두었다는 머레이의 주장은 위카의 그림자 책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4] 위카의 초기 계절 축제 시스템 또한 머레이의 틀에 기반을 두었다.[4]

머레이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는 위카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메리필드는 20세기 영국에서 자신만의 마녀 코벤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머레이는 이상적인 요정 대모였을 수 있으며, 그녀의 이론은 그들이 갈망했던 환상의 영역으로 그들을 데려다 줄 호박 마차로 여겨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역사가 필립 헤슬턴은 뉴 포레스트 코벤 – 가장 오래된 위카 그룹으로 알려짐 – 이 머레이의 이론을 알고 있고 자신이 마녀 숭배의 환생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는 밀교주의자들에 의해 1935년경에 설립되었다고 제안했다.[4] 제럴드 가드너는 뉴 포레스트 코벤의 입문자라고 주장했으며, 가드너 위카 전통을 확립하고 이 종교를 대중화했다. 심슨에 따르면, 가드너는 머레이의 마녀 숭배 가설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민속학회의 유일한 회원이었다.[4]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지냈으며, 머레이는 가드너의 1954년 저서 ''오늘날의 마법''에 서문을 썼지만, 그 서문에서 그녀는 가드너가 자신의 마녀 숭배의 생존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믿는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4] 2005년 노블은 "머레이의 이름은 제럴드 가드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거의 잊혀졌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4]

머레이의 마녀 숭배 이론은 밥 클레이-에거턴, 로버트 코크레인, 찰스 카델, 로잘린 노턴과 같은 사람들이 1930년에서 1970년 사이에 영국과 호주에서 설립한 가드너 위카가 아닌 위카 전통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4] 저명한 위카 도린 발리엔테는 머레이의 마녀 숭배의 다른 잔재가 영국 주변에 남아있다고 믿고 열심히 찾았다.[4] 발리엔테는 학문적으로 거부된 후에도 머레이의 마녀 숭배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으며,[4] 머레이를 "놀라운 여성"이라고 묘사했다.[4]

196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레이의 저술은 에이단 A. 켈리가 자신의 위카 전통인 뉴 리폼드 정통 골든 던을 창시하는 데 사용된 자료 중 하나였다.[4] 197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주자사 부다페스트가 페미니스트 지향의 디아닉 위카 전통을 확립할 때 사용했다.[4] 머레이의 이론은 미국의 게이 해방 운동가 아서 에반스가 쓴 1978년 저서 ''마법과 게이 반문화''에서 옹호된 아이디어의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4]

위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점차 학계가 마녀 숭배 이론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문자적 진실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고, 많은 위카들은 대신 그것을 은유적 또는 상징적 진실을 전달하는 신화로 간주하게 되었다.[4] 다른 사람들은 종교의 역사적 기원은 중요하지 않으며, 대신 위카는 참가자들에게 제공하는 영적인 경험에 의해 정당성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헛튼은 위카의 초기 발전을 탐구하는 역사 연구인 ''달의 승리''를 저술했다. 1999년 출판된 이 책은 영국 이교 공동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 위카들 사이에서 머레이 이론에 대한 믿음을 더욱 약화시켰다.[4] 반대로 다른 수행자들은 이 이론을 고수하며 그것을 중요한 신념 조항으로 취급하고 유럽 마법에 대한 머레이 이후의 학문을 거부했다.[4] 몇몇 저명한 수행자들은 위카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을 가진 종교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역사적 학문의 타당성을 거부하고 직관과 감정을 진실의 중재자로 강조했다.[4] 몇몇 "반수정주의" 위카 – 도널드 H. 프루, 자니 파렐-로버츠, 벤 휘트모어 등 – 가 머레이 이후의 학문을 비판했지만, 머레이의 원래 가설을 완전히 옹호한 사람은 없었다.[4]

5. 3. 문학

머레이의 마녀 숭배 이론은 올더스 헉슬리, 로버트 그레이브스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5] 실비아 타운센드 워너는 1926년 소설 ''롤리 윌로우즈''에 머레이의 저서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6]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도 머레이의 저서가 인용되었다.[7]

6. 저서

출판 연도제목공동 저자출판사
1903이집트 골동품 컬렉션 가이드에든버러 과학 예술 박물관 (에든버러)
1904[https://archive.org/details/the-osireion-at-abydos 아비도스의 오시리온]이집트 연구 계정 (런던)
1905[https://archive.org/details/saqqara-mastabas-part-1 사카라 마스타바 제1부]; [https://archive.org/details/saqqaramastabasp11murr 제2부]쿠르트 세테의 챕터 포함버나드 쿼리치 (런던)
1905[https://archive.org/details/saqqaramastabasp10murr 사카라 마스타바 제1부와 구로브]L. 로트 (구로브 저)이집트 연구 계정 (런던)
1905[https://archive.org/details/elementaryegypti00murr 초급 이집트 문법]유니버시티 칼리지 프레스 (런던)
1908[https://archive.org/details/cu31924026854814 고왕국 이름 및 직함 색인]이집트 영국 고고학 학교 (런던)
1910[https://archive.org/details/b24875624/page/n3/mode/2up 두 형제의 무덤]셰라트 & 휴즈 (맨체스터)
1911[https://archive.org/details/elementarycoptic0000murr/page/n9/mode/2up 초급 콥트어 (사히딕) 문법] (2판 1927)유니버시티 칼리지 프레스 (런던)
1913[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06804/page/n5/mode/2up 고대 이집트 전설]존 머레이 (런던); 동양의 지혜 시리즈
1921[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24123/page/n3/mode/2up 서유럽의 마녀 숭배]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옥스퍼드)
1923몰타 발굴, 제1부버나드 쿼리치 (런던)
1925몰타 발굴, 제2부버나드 쿼리치 (런던)
1929몰타 발굴, 제3부버나드 쿼리치 (런던)
1930[https://archive.org/details/egyptiansculptur0000murr_r3e9/page/n5/mode/2up 이집트 조각]덕워스 (런던)
1931[https://archive.org/details/egyptiantemples0000murr/page/n5/mode/2up 이집트 사원]샴손 로우, 마스턴 & Co. (런던)
1931[https://archive.org/details/godofwitches00murr 마녀의 신] (1960년판)페이버 & 페이버 (런던)
1932몰타 민담엠파이어 프레스 (몰타)
1933버나드 쿼리치 (런던)
1934미노르카의 케임브리지 발굴, 사 토레타버나드 쿼리치 (런던)
1934몰타 청동기 시대 도자기 코퍼스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 잠미트버나드 쿼리치 (런던)
1937사카라 마스타바 제2부이집트 연구 계정 (런던)
1938미노르카의 케임브리지 발굴, 트라푸코버나드 쿼리치 (런던)
1939페트라, 에돔의 바위 도시블랙키
1940이집트 영국 고고학 학교 및 버나드 쿼리치
1949고대 이집트 종교 시존 머레이 (런던)
1949[https://archive.org/details/in.gov.ignca.2616 이집트의 영광]철학 도서관 (런던)
1954페이버 & 페이버 (런던)
1963[https://archive.org/details/myfirsthundredye0000murr/page/n7/mode/2up 나의 첫 백 년]윌리엄 킴버 & Co. (런던)
1963[https://archive.org/details/genesisofreligio0000murr/page/n5/mode/2up 종교의 기원]케건 폴 (런던)


참조

[1] 서적 The Dictionary People: The unsung heroes who created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Vantage 2024
[2] 간행물 Murray, Margaret Alice (1863–1963)
[3] 저널 Obituary: Ethel H. Rudkin, 1893–1985 https://doi.org/10.1[...] 1986-01-01
[4] 뉴스 Who put Bella down the Wych Elm? https://strangeremai[...] 2015-04-24
[5] 웹사이트 Lammas Night: Magical smack down on the Führer https://fantasyliter[...] Fantasy Literature 2010-07-16
[6] 서적
[7] 서적 https://archive.org/[...]
[8]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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