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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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은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된 연방 국가이다.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3개의 자유시로 구성되었으며, 프로이센 왕이 황제를 겸하고 프로이센 재상이 제국 재상을 겸임했다.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책을 바탕으로 중공업 육성과 군사력 증강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다른 유럽 열강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면서 제정이 붕괴,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독일 제국은 긍정적, 부정적 유산을 모두 남겼으며, 특히 독일의 독자적인 근대화 과정을 의미하는 존더베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 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알자스-로렌, 서프로이센 등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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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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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Deutsches Reich |
통칭 | 독일 제국 |
존속 기간 | 1871년 – 1918년 |
수도 | 베를린 |
최대 도시 | 베를린 |
공용어 | 독일어 |
사용 언어 | 저지 독일어 폴란드어 덴마크어 이디시어 림뷔르흐어 프리지아어 소르브어 롬어 리투아니아어 카슈브어 스와힐리어 아랍어 |
종교 | 다수: 62.63% 개신교 (연합 개신교, 루터교, 칼뱅주의) 소수: 35.89% 로마 가톨릭교회, 1.24% 유대교, 0.17% 기타 기독교, 0.07% 기타 |
종교 통계 연도 | 1880년 |
표어 | Gott mit uns (독일어), Nobiscum Deus (라틴어) ("신은 우리와 함께") |
국가 | Heil dir im Siegerkranz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
비공식 국가 | Die Wacht am Rhein ("라인의 감시") |
통화 | 페라인슈탈러, 남독일 굴덴, 브레멘 탈러, 함부르크 마르크, 프랑스 프랑 (1873년까지) 독일 금 마르크(1873–1914) 독일 파피어마르크(1914–1918) |
정치 | |
정치 체제 | 연방 의회 반입헌 군주제 (1916년–1918년 군사 독재) |
황제 | 빌헬름 1세(1871–1888) 프리드리히 3세(1888) 빌헬름 2세(1888–1918) |
재상 | 오토 폰 비스마르크(1871–1890) 레오 폰 카프리비(1890–1894)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슐링스퓌르스트(1894–1900) 베른하르트 폰 뷜로(1900–1909)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1909–1917) 게오르크 미하엘리스(1917)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1917–1918) 막시밀리안 폰 바덴(1918) |
입법부 | 양원제 |
상원 | 분데스라트 |
하원 | 라이히스탁 |
역사 | |
건국 | 독일 통일(1871년 1월 18일) |
헌법 제정 | 1871년 4월 16일 |
베를린 회의 | 1884년 11월 15일 |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 1914년 7월 28일 |
독일 혁명 | 1918년 11월 3일 |
빌헬름 2세 퇴위 | 1918년 11월 9일 |
휴전 협정 | 1918년 11월 11일 |
멸망 | 바이마르 헌법(1919년 8월 11일) |
이전 국가 | 북독일 연방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
계승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 메멜 지역 자르 분지 지역 자유 도시 단치히 제2 폴란드 공화국 |
인구 | |
1871년 | 41,058,792명 |
1900년 | 56,367,178명 |
1910년 | 64,925,993명 |
면적 | |
면적 | 540,857.54 km² |
참고 | 식민지 영토 제외 |
기타 | |
면적 (추정) | 1,750,000 km² |
인구 (추정) | 70,000,000명 |
2. 역사
신성 로마 제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제정의 침략으로 1806년에 붕괴되어 여러 영방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독일 연방이 탄생했지만, 통일 국가는 아니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북독일 연방을 발족시켰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 제2제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3공화국에 승리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의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다.
1850년 이후, 독일의 각 영방 국가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고, 1871년 약 4100만 명이었던 인구는 1913년에는 약 68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건국부터 독일 혁명에 의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이행까지 47년 동안 독일의 산업, 기술,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수상하며 세계 2위의 경제를 구축했다.
베를린 회의를 통해 식민주의를 내걸고 아프리카로 진출했지만,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독일 제국은 발달된 철도, 세계 최고 수준의 군대 및 독일 제국 해군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독일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제정은 붕괴되었다. 정식 국호는 독일 혁명 등에 의한 국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Deutsches Reich'''였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시대를 통해서도 동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선전을 통해 “제3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으로 할 경우, 독일 제국을 “제2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1. 성립 이전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은 독일 지역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프랑스의 압력을 증대시켰다. 18세기 후반 프로이센 왕국이 성장하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 독일 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1834년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 동맹 결성으로 경제 통합 기반이 마련되었다. 1848년 독일 혁명과 자유주의적 통일 시도는 좌절되었고, 이후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 과정이 전개되었다.독일 연방은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설립되었다.[36] 1848년 혁명은 자유주의자들과 도시 장인들 사이의 관계가 깨진 후 진압되었다.[37]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리얼폴리티크는 귀족과 농민들에게 호소력을 지녔으며, 그는 독일 여러 주에 호엔촐레른 가문의 패권을 확장하려 했다.[37] 이는 독일 통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배제를 의미했다. 비스마르크는 보수적이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을 구상했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범독일주의적 이상을 불러일으켰고 독일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로 독일 연방은 종식되었고, 1867년 북독일 연방으로 부분적으로 대체되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고조된 애국심은 통일된 독일에 대한 반대를 압도했고, 1870년 11월 조약에 따라 남부 4개 주가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다.[38]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하여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공동 관리하게 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북독일 연방을 결성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관리권을 빼앗고 오스트리아를 독일에서 배제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 제2제정을 격파하고,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가 되면서 독일 제국이 성립했다.
2. 1. 1. 30년 전쟁과 종전 이후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30년 전쟁으로 독일 국토는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36]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은 끝났지만, 이 조약은 독일을 더욱 여러 나라로 분할시켰다.[36] 그 결과, 독일 제후국들의 세력은 약해졌고, 프랑스 등 주변 강대국의 영향력이 커졌다.[36]2. 1. 2. 프로이센과 나폴레옹 전쟁
18세기 후반부터 독일 북부 지역에 프로이센 왕국이 크게 강성해졌지만,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눌려 꼭두각시 신세로 지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인 1830년대에는 독일 지역에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6]2. 1. 3. 관세동맹과 독일 혁명
1834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 동맹이 결성되어, 39개의 군소 국가로 분리되어 있던 독일의 경제 통합이 촉진되었다. 관세 동맹은 독일 내 국가 간 무역에서 부과되던 관세를 폐지하여 독일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독일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36]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로베르트 블룸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평화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내 보수파(융커 계층)의 반대로 실패하였다.[37]
2. 2. 프로이센의 통일 과정과 독일 제국 성립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한 군사력과 군비 증강을 주장하여 이른바 "철혈정책"을 추진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덴마크와 전쟁(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을 벌여 프로이센이 승리하고 덴마크 북부 지방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점령하였다.[37]1866년에는 산업과 군사력이 증강한 프로이센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일으켜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북독일 연방을 결성, 오스트리아 제국을 독일 연방에서 추방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 이후 독일의 핵심 세력이었던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소독일주의 형태로 통일이 진행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를 크게 물리치고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는 등 승승장구하여 파리에 입성,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 때 오랜 세월 동안 프랑스와 영유권을 두고 다투었던 엘자스-로트링겐 지방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획득했다.[38]

2. 3. 비스마르크 체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의 보복을 막기 위해, 여러 강대국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맺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1873년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제 동맹을 맺었으나, 이후 러시아 제국은 이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1879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방위 동맹을 체결했다. 1882년에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 삼국 동맹을 맺었다. 1887년에는 발칸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 제국과 재보장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영국은 비스마르크와 별다른 대립이 없었고, 이미 국력이 강했기 때문에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체제로 인해 고립되었다.[68] 비스마르크는 1871년 이후 유럽 질서를 안정시키고 전쟁을 예방하는 데 외교 정책의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의 외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가 사임한 후 외교적 긴장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2. 4.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지만, 재위 6개월 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이어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빌헬름 2세가 즉위하는데, 이를 "3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여 1890년에 그를 은퇴시킨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마자 친정을 실시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과 달리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오스만 제국과 '바그다드 철도 부설 조약'을 맺어 베를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 정책"이라는 제국주의적인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68]이러한 팽창 정책은 유럽 국가들을 긴장시켜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았으며, 영불 협상을 맺어 러시아 제국-영국-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삼국 협상'을 맺어 독일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영국은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캘커타를 연결하는 "3C 정책"을 내세웠는데, 서아시아에서 독일 제국과 충돌하여 대립했다.
유럽의 판도는 신흥 강국인 독일 제국을 필두로 하는 동맹국 세력과 기존의 열강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협상국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1905년~1906년과 1911년에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지배권을 확보하여 영향권을 행사하려 하자, 독일 제국은 모로코에 두 차례 걸쳐 개입하여 프랑스와 충돌(모로코 사건)하기도 했다. 또한,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여 영구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범게르만주의와의 대립 등으로 발칸반도에서 문제가 확산되면서 더욱더 심화되어갔다.
독일은 팽창 정책으로 삼국 협상 구성 국가와 외교적 마찰과 경제적 부담을 안았고, 양상이 점점 심화됨에 따라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2. 5. 제1차 세계 대전과 제정의 종식 및 전후 사회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한 연방 국가였다. 1871년 통일 이후, 독일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어 1913년에는 인구가 약 68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건국부터 독일 11월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47년 동안 독일의 산업, 기술,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수상하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133]베를린 회의를 통해 독일은 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확장했지만, 이는 영국, 프랑스와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독일 제국은 발달된 철도, 강력한 군대, 그리고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에 의해 건설된 세계 2위 규모의 해군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패배, 그리고 독일 11월 혁명으로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제정은 붕괴되었고,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이행했다.
독일 제국의 구성국은 다음과 같다.
구성국 | 수도 | 면적 (km²) | 연방 참의원 의석 수 |
---|---|---|---|
왕국 (Königreichde) | |||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 | 베를린 뮌헨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 | 348702km2 75870km2 19511km2 14992km2 | 17 6 4 4 |
대공국 (Großherzogtumde) | |||
바덴 메클렌부르크-슈베린 헤센 올덴부르크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칼스루에 슈베린 다름슈타트 올덴부르크 바이마르 노이슈트렐리츠 | 15067km2 13126km2 7688km2 6428km2 3611km2 2929km2 | 3 2 3 1 1 1 |
공국 (Herzogtumde) | |||
브라운슈바이크 작센-마이닝겐 안할트 작센-코부르크 및 고타 작센-알텐부르크 | 브라운슈바이크 마이닝겐 데사우 코부르크/고타 알텐부르크 | 3672km2 2468km2 2299km2 1977km2 1323km2 | 2 1 1 1 1 |
후국 (Fürstentumde) | |||
리페 발덱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 로이스-게라 샤움부르크-리페 로이스-그라이츠 | 데토몰트 바트 아롤센 Rudolstadt|루돌슈타트de Sondershausen|존더스하우젠de 게라 뷔케부르크 그라이츠 | 1215km2 1121km2 940km2 862km2 826km2 340km2 316km2 | 1 1 1 1 1 1 1 |
자유 도시 (Freie Stadtde) | |||
함부르크 뤼베크 브레멘 | 함부르크 자유 한자 도시 뤼베크 브레멘 | 413km2 297km2 256km2 | 1 1 1 |
제국 직할주 (Reichslandde) | |||
엘자스-로트링겐 | 스트라스부르 | 14517km2 | 3 |
합계 | 540766km2 | 61 |
전후 사회는 법률 제정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각 주 사이의 법적 차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1871년 제국 형법(Reichsstrafgesetzbuch)이 도입되었고, 1877년에는 공통 재판 절차가 수립되었다. 1873년 헌법 개정으로 제국은 각 주의 민법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고, 1881년 Bürgerliches Gesetzbuch (BGB) 제정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 1900년 1월 1일에 시행되었다. 이러한 법전화들은 오늘날에도 시행되고 있다.[81][82][83][84]
2. 5. 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지던 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그러자 발칸반도에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 지원을 선언한 뒤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국이었던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 프랑스, 벨기에, 대영제국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프랑스의 예상 외의 격렬한 저항과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부 전선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과 장기전 형식으로 되어갔다. 또한, 동부 전선 역시 러시아 제국의 대규모 전선 배치로 인해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고착화되었다.
제1차 대전 기간 동안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등 주변 국가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국 혹은 협상국에 참전하였다. 한편, 독일 제국은 영국에 제해권을 빼앗기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가했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제정 체제와 자유주의 정부 체제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1918년 3월, 독일 제국과 소비에트 정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조건으로 소비에트 정권은 과거 러시아 제국 때 상당 부분 영토와 배상금을 독일 제국에 제공해야 했다. 신생 정권인 소비에트 정권이 1차 대전 협상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세력으로부터 이탈하자 동부 전선에 배치돼 있던 독일 병력이 대거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의 패배로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수십만 명의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게 되어 연합국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새로운 잠입 전술로 병사들을 재훈련시킨 독일은 전장의 교착 상태를 돌파하고 미국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105] 소위 "카이저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독일은 병력을 집중시켜 연합군을 밀어붙이는 여러 차례의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1918년 봄의 독일군의 반복적인 공세는 모두 실패했는데, 연합군이 후퇴하여 재편성했고 독일군은 얻은 이득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예비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편, 병사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급진화되어 더 이상 싸우려는 의지를 잃어갔다. 전쟁은 독일 내부에서 민중 봉기의 불씨를 지폈고, 끊임없이 전장에 머물러 휴식조차 없던 병사들은 지쳐 승리의 희망을 잃었다. 1918년 여름, 영국군은 서부 전선에서 최대 450만 명의 병력과 100일 공세를 위한 4,000대의 전차를 보유하며 최정점에 달했고, 미국군은 하루 1만 명의 속도로 도착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고, 독일 제국의 병력은 고갈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연합군 공세가 독일군을 궤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106]
2. 5. 2. 제정의 종식 및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1917년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자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사건과 치머만 전보사건을 계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200만 명의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서부 유럽 전선에 참전하면서 전쟁은 독일 제국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133]1918년에는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탈퇴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반전 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18년 11월 9일 독일 킬 군항의 수병 반란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합세하여 독일 11월 혁명으로 확산되었다. 11월 10일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정부 수반으로 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8년 11월, 독일 임시 정부는 협상국(영국, 프랑스,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2. 5. 3. 전후 사회
비스마르크의 노력은 수 세기 동안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독일 각 주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 특히 법률 제정 측면의 차이를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1871년 공통 제국 형법(Reichsstrafgesetzbuch)이 도입되었고, 1877년에는 법원 제도에 공통적인 재판 절차가 수립되었다. 1873년 헌법 개정으로 제국은 각 주의 다양하고 상이한 민법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1881년 제국 전체를 위한 공통 민법을 제정하기 위해 최초의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는 Bürgerliches Gesetzbuch (BGB)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 법은 1900년 1월 1일에 시행되었다. 이러한 모든 법전화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81][82][83][84]3. 정치
독일 제국은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그리고 3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프로이센 왕이 황제를 겸하고, 프로이센 재상이 제국의 재상을 겸임했다. 황제는 정치, 군사, 외교권을 장악했으며, 의회는 상원인 연방참의원과 남성 중심의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제국의회라는 하원으로 구성되었으나, 하원의 권한은 예산 심의 정도에 그쳤다.[36]
각 지방 정부를 대표하는 연방참의원이 제국의 중대한 사안을 결정했다. 그러나 각 지방 정부는 자체적인 정치 제도, 법률, 행정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 정부 형태를 띠었다.
독일 제국 정부는 황제의 임명과 의지에 따라 운영되었고,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프로이센은 면적과 인구의 3/5를 차지하여 사실상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형태였고, 그 권한은 막강했다.
재상의 권한도 컸기 때문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같이 유력한 인물이 재상일 때는 사실상 독재가 이루어졌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일 의지가 약화되었다.
독일 제국은 의회가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자유주의적 성향이 약한 융커 계층(대지주, 귀족)이 군부와 관료의 중심 세력을 독점하여 근대적인 의식과 개혁이 크게 저해되었다.[37]
독일 연방은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설립되었다.[36] 1848년 혁명이 진압된 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리얼폴리티크는 귀족과 농민들에게 호응을 얻었다.[37] 비스마르크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패권을 확장하고자 했으며, 이는 독일 통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배제를 의미했다. 그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을 구상했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은 범독일주의적 이상을 불러일으켰고, 독일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로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고, 1867년 마인강 북쪽의 22개 주로 구성된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고조된 애국심은 마인강 남쪽의 4개 주에서 통일에 대한 반대를 압도했고, 이들은 1870년 11월 조약을 통해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다.[38]
1870년 12월 10일, 북독일 연방 의회는 연방의 이름을 "독일 제국"으로 바꾸고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의 칭호를 부여했다.[39] 새로운 헌법과 황제 칭호는 1871년 1월 1일에 발효되었다.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40]
1871년 4월 16일 선포된 두 번째 독일 헌법[40]은 비스마르크의 북독일 헌법을 기반으로 했다. 정치 체제는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제국에는 보편 남성 참정권으로 선출된 라이히스타크라는 의회가 있었다. 그러나 1871년에 그려진 원래 선거구는 도시 지역의 성장을 반영하여 재구성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890년대와 1900년대 독일 도시의 대규모 확장이 있을 무렵까지 농촌 지역은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루었다.
입법은 27개 주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분데스라트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행정권은 황제에게 있었으며, 그에게만 책임이 있는 독일 총리가 그를 보좌했다. 황제는 헌법에 의해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고, 군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모든 외교 문제의 최종 결정자였으며, 라이히스타크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총리는 1인 내각이었으며 모든 국가 문제의 처리에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무장관이 다른 군주국의 장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라이히스타크는 법안을 통과, 수정 또는 거부하고 입법을 시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지만, 실제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고, 그는 자신의 총리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명목상으로는 연방 제국이자 동등한 국가들의 연합이었지만, 실제로 제국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다. 프로이센은 새로운 라이히의 북쪽 3분의 2에 걸쳐 있었고 국가 인구의 5분의 3을 차지했다. 황제의 왕위는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세습되었다. 1872~1873년과 1892~1894년을 제외하고 총리는 항상 프로이센 총리직을 겸임했다. 분데스라트에서 58표 중 17표를 가진 베를린은 소규모 주의 몇 표만 더 얻으면 효과적인 통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다른 주들은 자체 정부를 유지했지만 주권의 일부만 제한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표와 통화는 제국 전체를 위해 발행되었다. 1마르크까지의 동전은 제국의 이름으로 주조되었고, 그보다 가치가 높은 동전은 각 주에서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가의 금화와 은화는 사실상 기념주화였고 유통이 제한적이였다.
각 주는 자체 훈장을 발행했고 일부는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소규모 주의 군대는 프로이센의 통제하에 놓였다. 바이에른 왕국과 작센 왕국과 같은 대규모 주의 군대는 프로이센 원칙에 따라 조정되었으며, 전시에는 연방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독일 제국의 발전은 10년 전에 통일 국가가 된 이탈리아의 병행 발전과 다소 일치한다. 독일 제국의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의 핵심 요소는 메이지 천황 시대 일본 제국의 보수적인 근대화와 러시아 제국의 차르 통치하에서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의 유지를 위한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부들의 사회적 구조의 한 요소는 농민과 도시 지역의 혁명적 돌파구가 없었기 때문에 토지 귀족, 즉 융커들이 정치 권력에서 상당한 지분을 유지한 것이다.
권위주의적이었지만, 제국은 어느 정도 민주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보편 남성 참정권 외에도 정당의 발전을 허용했다. 비스마르크는 권위주의 정책의 지속을 감출 수 있는 헌법적 허울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 시스템을 만들었다. 프로이센과 독일의 선거 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센은 납세액에 따라 투표 가중치를 매기는 프로이센 3계급 선거제도를 사용하여 보수적 다수를 거의 보장했다.[41] 프로이센 국왕과 (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프로이센 총리는 또한 제국의 황제와 총리였다. 즉, 같은 통치자들이 완전히 다른 참정권에 의해 선출된 입법부에서 다수를 얻어야 했다. 1890년대부터 농촌 지역의 과다 대표로 인해 보편적 참정권은 상당히 희석되었다. 세기말에 이르러 1871년과 비교하여 도시와 농촌 인구의 균형이 완전히 역전되었고 제국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도시에 거주했다.
빌헬름 2세 치하에서 독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같은 장기 집권한 강력한 총리들을 더 이상 갖지 못했다. 새로운 총리들은 그들의 역할, 특히 독일 헌법에 명시된 프로이센 총리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무역을 자유화하여 실업을 감소시킨 레오 폰 카프리비 총리의 개혁은 프로이센 지주들을 제외한 카이저와 대부분의 독일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지주들은 개혁에 반대하는 여러 캠페인을 벌였다.
프로이센 귀족들이 통일된 독일 국가의 요구에 도전하는 동안, 1890년대에는 국가에 부과되고 있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적 프로이센 군국주의에 도전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군사 교육을 강조하는 독일 국가 운영 학교에 반대하는 교육자들은 개인과 자유를 장려하는 독립적인 자유주의 학교를 설립했다.[85] 그러나 제국 독일의 거의 모든 학교는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지식의 현대적 발전과 보조를 맞추었다.[86]
예술가들은 빌헬름 2세가 전통 예술을 지지하는 것에 반대하여 실험적인 예술을 시작했고, 빌헬름 2세는 "내가 정한 법과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응답했다. 독일의 대부분의 인쇄물이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는 로마체 대신 고딕체를 사용한 것은 주로 빌헬름 2세의 영향 덕분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세대의 문화 창작자들이 등장했다.[87]
1890년대부터 군주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반대는 급진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 신생 독일 사회민주당(SPD)에서 나왔다. 독일 군주제와 산업가들에게 SPD의 위협은 국가가 당 지지자들을 단속하고 불만을 달래기 위한 자체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독일의 대기업들은 사회주의자나 노조원으로 분류되지 않는 한 직원들에게 상당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과 양호한 처우를 제공했다. 대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연금, 질병 급여, 심지어 주택까지 제공했다.[85]
빌헬름 2세는 문화투쟁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데 집중했다. 이 정책은 사회민주당이 1912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3분의 1의 득표율을 얻어 독일 최대 정당이 되었을 때 실패했다. 정부는 우익 자유주의자나 가톨릭 성직자의 지지를 받는 일련의 보수 연합의 손에 남아 있었고 카이저의 호의에 크게 의존했다. 빌헬름 2세 치하의 군국주의 고조는 많은 독일인들이 의무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식민지로 이민을 가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이저는 그의 권력을 점점 더 독일 최고 사령부 지도자들에게, 특히 미래의 독일 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와 참모총장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에게 위임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카이저로부터 총사령관의 역할을 맡았고,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사실상 참모총장이 되었다. 1916년까지 독일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통치하는 사실상의 군사 독재 국가가 되었고, 카이저는 단순한 명목상의 지도자로 전락했다.[88]
독일 제국은 연방 의원내각제 입헌 군주국이었다.
연방평의회 (Bundesratde)는 제국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최고 권위 기관으로서 기능했다.[110] Bundesratde은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 발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법률에 대한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실상 라이히스타크에서 온 모든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111] Bundesratde는 행정부 내에서 지침을 설정하고 조직 개편을 할 수 있었으며, 주들 간의 행정 분쟁에 대한 최고 중재자 역할을 하고, 헌법재판소가 없는 주에 대해 헌법재판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111] 연방평의회는 주 정부가 임명하고 주 정부에 보고하는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112]
제국 의회(''Reichstag'')는 보통 남성 선거권에 의해 선출된 입법 기관으로서 사실상 의회 역할을 했다. 라이히스타크는 법안을 제안할 권리가 있었고, Bundesratde의 동의를 얻어 매년 국가 예산과 1893년까지는 7년, 그 이후에는 5년 단위의 군사 예산을 승인했다. 모든 법률은 라이히스타크의 승인을 받아야 통과될 수 있었다.[113] 1918년 10월 독일 헌법 개정 이후 제15조 변경을 통해 라익스총리가 황제가 아닌 라이히스타크의 신임에 의존하게 되었다.[114]
황제(''카이저'')는 제국의 국가 원수였지만 통치자는 아니었다. 황제는 총리를 임명했는데, 일반적으로 라이히스타크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총리는 황제와 협의하여 정부의 광범위한 정책 지침을 결정하고 라이히스타크에 제시했다.[113] 황제는 총리의 자문을 받아 장관과 – 적어도 형식적으로 – 다른 모든 제국 공무원을 임명했다. 군사 지시를 제외한 황제의 모든 행위[115]에는 총리의 반서명이 필요했다. 황제는 또한 법안에 서명하여 법률로 제정하고, 전쟁을 선포(연방평의회의 동의 필요), 평화 협상, 조약 체결, Bundesratde과 라이히스타크의 회기를 소집 및 휴회하는 책임이 있었다. 황제는 제국의 육군(제63조)과 해군(제53조)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111] 군사 권한을 행사할 때는 전권을 가졌다.
총리는 정부 수반이었으며 Bundesratde과 제국 정부를 주재하고, 입법 과정을 주도했으며 황제의 모든 행위(군사 지시 제외)에 반서명을 했다.[113]
4. 경제
1862년 프로이센 재상으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바탕으로 독일은 중공업 육성과 군사력 증강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은 융커 계층 관료들의 후원으로 1870년대부터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융커 계층 주도의 산업화 정책은 시장 규모를 제한하여 경제 불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독일 제국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수한 기술과 경제 발전을 위한 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 자본 투자처로서 해외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에 비해 늦게 식민지 정책을 시작했기 때문에 1890년대 빌헬름 2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134]
20세기 초, 독일은 중공업 생산에서 세계 2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독일의 산업화는 경제 시장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의 결과로 독일 사회는 보수층인 융커 및 그들을 후원하는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무산층) 노동자 세력으로 양분되어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은 장기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134]
1900년까지 독일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자랑했으며, 미국과 영국 제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독일과 미국, 영국은 주요 경제 경쟁국이었다. 독일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과 근대화를 이루었다. 1871년 당시 독일 인구는 대부분 농촌 인구(4천 1백만 명)였으나, 1913년에는 주로 도시 인구(6천 8백만 명)로 변화했다.[53]
5. 행정 구역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한 연방 국가였다. 1885년 당시의 인구 밀도 지도와 1893년 도시 및 대도시를 표시한 상세 지도를 통해 행정 구역을 확인할 수 있다.
5. 0. 1. 소속 국가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
작센
뮌헨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
75870km2
19511km2
14992km2
6
4
4
메클렌부르크-슈베린
헤센
올덴부르크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슈베린
다름슈타트
올덴부르크
바이마르
노이슈트렐리츠
13126km2
7688km2
6428km2
3611km2
2929km2
2
3
1
1
1
작센-마이닝겐
안할트
작센-코부르크 및 고타
작센-알텐부르크
마이닝겐
데사우
코부르크/고타
알텐부르크
2468km2
2299km2
1977km2
1323km2
1
1
1
1
발덱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
로이스-게라
샤움부르크-리페
로이스-그라이츠
바트 아롤센
Rudolstadt|루돌슈타트de
Sondershausen|존더스하우젠de
게라
뷔케부르크
그라이츠
1121km2
940km2
862km2
826km2
340km2
316km2
1
1
1
1
1
1
뤼베크
브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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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km2
256km2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