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노부쓰네 (16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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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노부쓰네는 1666년에 태어나 1717년에 사망한 사사야마 번의 번주이다. 12세에 가독을 상속받아 번학을 장려하고, 교토 쇼시다이와 로주를 역임했다. 교토 쇼시다이 시절에는 교토 대화재 수습과 천황 즉위 의식에 관여했으며, 로주로 재임 중에는 질병으로 사임했다. 사카이 다다키요의 딸과 결혼하여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의 교호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재임 기간 동안 홍수, 가뭄 등의 재해로 백성들의 잇키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사야마 번의 제2대 번주 마쓰다이라 스케노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이자 3대 번주인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병약하여 자식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형의 후계자가 되어 12세로 가독을 상속했다.
사카이 다다키요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기 때문에, 쓰나요시 정권 시대에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교토 쇼시다이 시대인 호에이 2년(1705년)에, 의형이자 대 루스이역인 사카이 다다카게가 쇼군의 대리로서 상락하여, 노부쓰네가 영지로부터의 수입으로는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았다. 후에 다다카게는 요시무네의 정치 고문으로서 정책 입안에 관여했을 때, 노부쓰네가 적은 영지에서 대임을 다하는 고생을 제언했다. 요시무네는 다다카게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호 개혁에서 아시다카노 세이를 시행했다.
2. 생애
번주가 된 뒤, 산술가이자 경제학자인 마오 도키하루와 고의학자이자 이토 진사이의 고제(高弟)인 마쓰자키 란코쿠를 번에 초청하여 번학(藩学)의 기초를 확립했다. 한편으로 유학자인 나라 요리와 오타 스케오키에게 《사사야마 영지 지지》를 편찬하게 했다.
막부에서는 쇼군의 근습인 오쿠즈메(奥詰)를 거쳐, 교토 쇼시다이에 발탁되었다. 쇼시다이 재임 중에는 교토에서 발생한 대화재 수습, 나카미카도 천황의 즉위 의식 등을 담당했다. 그 후 로주에 올랐지만, 1715년(쇼토쿠 5년) 무렵부터 병을 앓아 재임 1년 반 만에 사임했다.
사카이 다다키요의 딸을 정실로 맞았기 때문에, 쓰나요시 시절에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1705년(호에이 2년) 교토 쇼시다이 시절, 의형이자 오루스이역(大留守居役)을 맡고 있던 사카이 다다타카가 쇼군 대리로 상락하여, 노부쓰네가 영지에서만의 수입으로는 임무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후에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에서 사카이 다다타카는 요시무네의 정치 고문 격인 존재로 종종 정책 입안에 관여하게 되는데, 이때 다다타카는 노부쓰네가 적은 영지로 대임을 달성하고 있는 노고를 제언했다. 이에 요시무네는 다다타카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호 개혁에서 다시다카제(足高の制)를 시행했다.
2. 1. 유년기 및 번주 시절
마쓰다이라 스케노부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형이자 3대 번주인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병약하여 자식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형의 후계자가 되어 12세로 가독을 상속한다. 번주가 된 뒤, 산술가이자 경제학자인 마오 도키하루와 고의학자이자 이토 진사이의 고제(高弟)인 마쓰자키 란코쿠를 번에 초청하여 번학(藩学)의 기초를 확립했다. 한편으로 유학자인 나라 요리와 오타 스케오키에게 《사사야마 영지 지지》를 편찬하게 했다.
노부쓰네가 번주였던 시기에는 1703년(겐로쿠 16년)의 홍수, 1709년(호에이 6년)의 가뭄, 1715년에는 다시 홍수로 재해가 이어져, 백성의 잇키가 일어나기도 했다.
2. 2. 번 재정의 어려움과 백성 봉기
1703년 (겐로쿠 16년)의 홍수, 1709년 (호에이 6년)의 가뭄, 1715년 (쇼토쿠 5년)에는 다시 홍수가 겹쳐 재해가 잇따랐고, 번 재정이 어려워져 백성들의 잇키가 일어나기도 했다.
2. 3. 교토 쇼시다이 시절
1698년(겐로쿠 11년) 5월 25일 오쿠즈메를 거쳐 교토 쇼시다이에 발탁되었다. 재임 중, 교토에서 발생한 대화재의 수습, 나카미카도 천황의 즉위 의식을 담당하는 등의 일에 관여했다.
1705년(호에이 2년) 교토 쇼시다이 시절, 의형이자 오루스이역(大留守居役)을 맡고 있던 사카이 다다타카가 쇼군 대리로 상락하여, 노부쓰네가 영지에서만의 수입으로는 임무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에서 사카이 다다타카는 요시무네의 정치 고문 격인 존재로 종종 정책 입안에 관여하게 되는데, 이때 다다타카는 노부쓰네가 적은 영지로 대임을 달성하고 있는 노고를 제언했다. 이에 요시무네는 다다타카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호 개혁에서 다시다카제(足高の制)를 시행했다.
2. 4. 로주 시절과 사망
1715년(쇼토쿠 5년) 로주에 올랐지만, 같은 해 무렵부터 병을 앓아 재임 1년 반 만에 사임하였다. 사카이 다다키요의 딸을 정실로 맞았기 때문에, 쓰나요시 시절에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1705년 (호에이 2년) 교토 쇼시다이 시절, 의형이자 오루스이역(大留守居役)을 맡고 있던 사카이 다다타카가 쇼군 대리로 상락(上洛)하였고, 노부쓰네가 영지에서만의 수입으로는 임무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에서 사카이 다다타카는 요시무네의 정치고문격인 존재로 종종 정책 입안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다다타카는 노부쓰네가 적은 영지로 대임을 달성하고 있는 노고를 제언했다. 이에 요시무네는 다다타카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호 개혁에서 다시다카제(足高の制)를 시행했다.
노부쓰네가 번주였던 시기에는 1703년 (겐로쿠 16년) 홍수, 1709년 (호에이 6년) 가뭄, 1715년 홍수등 재해가 이어져 백성들의 잇키가 일어나기도 했다.
3. 교호 개혁에의 영향
4. 약력
출생 1666년 (간분 6년 6월 1일) 가독 상속 및 개명 1676년 (엔포 4년 11월 19일) 형의 후계자가 되어 마사노부(政信)로 개명하였다. 1677년 (엔포 5년 2월 6일)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를 상속받았다. 1680년 (엔포 8년 8월 18일)에는 노부나리(信慈)로 개명하고 종5위하 부젠노카미(豊前守)에 임명되었다. 1693년 (겐로쿠 6년 6월 21일) 노부쓰네로 다시 개명하고 기이노카미(紀伊守)가 되었다. 주요 관직 역임 1694년 (겐로쿠 7년) 오쿠즈메가 되었다. 1697년 (겐로쿠 10년 4월 19일)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고 종4위하 시종에 올랐다. 1714년 (쇼토쿠 4년 9월 6일) 로주가 되었으나, 1716년 (교호 원년 3월 28일) 사임하고 제감간诘이 되었다. 사망 1717년 (교호 2년 5월 10일) 향년 52세로 사망하였다. 5. 가계
관계 이름 비고 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노부 어머니 센쇼인 이타쿠라 시게무네의 딸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토시 정실 히코히메 사카이 타다키요의 딸 계실 키쿠히메 마에다 토시아키의 딸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미네 차남 마쓰다이라 쓰네노리 생모 불명 삼남 마쓰다이라 쓰네치카 생모 불명 사남 토다 타네타츠 생모 불명 육남 마쓰다이라 노부타카 생모 불명, 마쓰다이라 노부하루의 양자 장녀 히데코 생모 불명, 난부 히로노부의 정실 차녀 요시 생모 불명, 나가이 나오즈미의 정실 삼녀 타네코 생모 불명, 호린인, 미야케 야스타카의 계실
6.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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