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다다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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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다다키요는 에도 시대의 무사로, 도쿠가와 이에쓰나 쇼군을 보좌하며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했다. 1653년부터 1666년까지 로주, 1666년부터 1680년까지 다이로로 재직하며, 다테 소동과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뇌물 수수 의혹과 겐로쿠 시대의 사치 풍조를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는 자기 도취적이고 부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680년 쇼군 이에쓰나 사망 후, 황족을 후계자로 추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이로에서 해임되었으며,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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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키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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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사카이 씨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생일 | 간에이 원년 음력 10월 19일(1624년 11월 29일) |
사망일 | 엔포 9년 음력 5월 19일(1681년 7월 4일) |
아명 | 구마노스케(熊之助) |
통칭 | 요시로(与四郎), 하마쇼군(下馬将軍) |
계명 | 대창원전종사품전우림차장장득원성대거사(大昌院殿従四品前羽林次将長得源成大居士) |
묘소 | 군마현 마에바시시 고운정(紅雲町) 류카인(龍海院) |
가몬 | Japanese Crest Himeji ken katabami.svg |
관위 | 종5위하・가와치노카미(河内守), 종4위하・좌근위권소장(左近衛権少将), 가가쿠노카미(雅楽頭) |
관직 | |
막부 | 에도 막부 소샤반 → 로주 슈자 → 다이로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이에쓰나→쓰나요시 |
번 | 고즈케 우마야바시번 번주 |
가계 | |
씨족 | 사카이 씨 |
아버지 | 사카이 다다유키(酒井忠行) |
어머니 | 기쿠히메(菊姫, 마쓰다이라 사다카쓰松平定勝의 딸) |
형제 | 동생: 다다요시(忠能) |
정실 | 쓰루히메(鶴姫, 마쓰다이라 사다쓰나松平定綱의 딸) |
계실 | 세이간인(清岸院, 아네가코지 긴카게姉小路公景의 딸) |
자녀 | 다다타카(忠挙) 다다히로(忠寛) 가메히메(亀姫, 도도 다카히사의 정실) 마쓰히메(松姫, 마쓰다이라 요리쓰네의 정실) 나가히메(長姫, 미즈노 가쓰타네의 정실) 기이히메(紀伊姫, 나카가와 히사미치의 정실) 나아히메(奈阿姫, 가토 야스쓰네의 측실) 히코히메(彦姫, 마쓰다이라 노부쓰네의 정실) 등 |
2. 생애
사카이 다다키요는 1624년 사카이 다다유키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1636년 아버지 다다유키가 사망하자 마에바시 번 10만 석을 상속받았다. 1651년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로주가 되었다.
로주 재임 기간 동안 순사 금지 법령에 관여했으며, 다테 소동과 에치고 소동 등 주요 사건에도 관여했다.[9] 다테 소동에서는 다테 쓰나무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건 해결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았다.[9][10]
1666년부터 1680년까지 로주 의회 수장인 다이로를 역임했다.[7] 다이로 재임 기간 동안에는 아베 다다아키 등으로부터 뇌물 수수와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며,[8] 다테 소동 처리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10]
1680년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사망하자 황족 출신을 후계자로 제안했다가 홋타 마사토시의 반발을 사 다이로 직에서 물러났다.[11] 1681년 은거 후 사망했다.
오늘날 다다키요는 자기 도취적이고 부패한 인물로, 그의 정책은 겐로쿠 시대의 쾌락주의와 방탕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2. 1. 출생과 가문
사카이 다다키요는 1624년(간에이 원년) 10월 19일, 사카이 다다유키의 장남으로 에도의 사카이 가문 저택에서 태어났다.[4] 어린 시절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도 저택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카이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을 섬긴 후다이 다이묘 가문으로, 다다키요는 이 가문의 적통을 이어받았다.[4] 사카이 씨족은 미나모토노 아리치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아리치카의 아들 마쓰다이라 야스치카는 마쓰다이라 성을, 다른 아들인 사카이 지카우지는 사카이 성을 사용했다.[5]
사카이 지카우지의 아들인 사카이 히로치카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사카이 씨족의 두 주요 분가를 이루었다. 히로치카의 차남인 사카이 마사치카는 도쿠가와 노부타다, 도쿠가와 기요야스, 도쿠가와 히로타다 등 여러 도쿠가와 씨족의 지도자들을 섬겼으며, 1561년에는 미카와에 있는 니시오 성의 성주가 되었다.[5]
사카이 마사치카의 아들인 사카이 시게타다는 1590년에 무사시 국의 가와고에 번을 받았고, 1601년에는 고즈케 국의 우마야바시 번으로 옮겨졌다.[6]
다다키요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사카이 다다유키 | |
어머니 | (이름 미상) | |
정실 | 쓰루히메 | 마쓰다이라 사다쓰나의 딸, 1650년 사망 |
계실 | (이름 미상) | 아네코지 스에쓰나의 딸 |
장남 | 사카이 다다아키 |
2. 2. 어린 시절과 교육
1624년(간에이 원년) 10월 19일, 사카이 다다유키의 장남으로 에도에 있는 사카이 가문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도 저택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1630년(간에이 7년) 1월 26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다다키요의 할아버지 다다요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다다키요는 처음으로 이에미쓰를 만나 금으로 만든 마구(馬具)를 선물했고, 이에미쓰는 라이쿠니미쓰의 협차(脇差)를 하사했다.[1] 같은 해 1월 29일에는 오고쇼(쇼군의 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시 다다요의 저택을 방문했고, 이때도 다다키요는 히데타다를 처음 만나 태도(太刀)와 마구(馬具)를 선물하고 구니토시의 협차(脇差)를 받았다.[2] 1632년(간에이 9년) 12월 1일에는 동생 다다요시와 함께 에도성에 처음 들어가 쇼군 이에미쓰를 알현했다.[3]
1636년(간에이 13년) 3월 19일에 할아버지 다다요, 같은 해 11월 17일에 아버지 다다유키가 연이어 사망했다.[4] 이듬해인 1637년(간에이 14년) 1월 4일, 다다키요는 유산 12만 2,500석 중 우에노 우마야바시 번 10만 석을 상속받았고, 같은 날 동생 다다요시에게는 우에노 이세사키번이 분할 상속되었다.[5]
1638년(간에이 15년), 종5위하 가와치노카미에 임명되었다. 다다키요는 가가쿠노카미 가문의 적류(嫡流)로서 아버지 다다유키가 맡았던 주자반 직책을 이어받아 무가의 예법을 익히고 조정 의례를 담당했다. 같은 해, 다다요시와 함께 우에노 지역을 처음 방문했다. 또한, 도이 도시카쓰와 사카이 다다카쓰가 중요한 시기에 등성(登城)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는 훗날 다이로의 시초가 되었다.
1641년(간에이 18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적자 이에쓰나가 태어났다. 다다키요는 이에미쓰를 모시는 가신이었고, 어린 이에쓰나와는 의례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지만, 다다요시는 이에쓰나를 모시는 가신단에 합류했다. 1644년(쇼호 원년) 12월, 마쓰다이라 사다쓰나의 딸 쓰루히메와 결혼했고, 1648년(게이안 원년)에는 장남 다다아키가 태어났지만, 쓰루히메는 1650년(게이안 3년)에 사망했다. 1651년(게이안 4년) 4월, 이에미쓰가 사망하고 8월에 이에쓰나가 쇼군직을 계승했다. 다이로 사카이 다다카쓰,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후견인 호시나 마사유키, 이에쓰나 가신단의 마쓰다이라 노리히사 등이 보좌하는 이에쓰나 정권이 성립되었고, 다다키요는 계속해서 주자반을 맡았다. 10월에는 사콘에곤쇼조에 임관되고 가가쿠노카미로 개명하라는 명을 받았다.
2. 3. 노중 시대
사카이 다다키요는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는 로주(老中, 최고 고문) 중 한 명으로 일했다.[7] 1651년 4월,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사망하고 8월에 이에쓰나가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오로(大老) 사카이 다다카쓰,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후견인 호시나 마사유키, 그리고 이에야스 이래 가신단의 마쓰다이라 노리히사 등이 보좌하는 이에쓰나 정권이 성립되었다. 다다키요는 계속해서 주자번(奏者番)을 맡았고, 10월에는 사콘에권 소장(左近衛権少将)으로 임관하면서 우타노카미(雅楽頭)로 개명했다.로주 재임 기간 동안 다다키요는 여러 중요한 정책 결정과 정치적 사건에 참여했다. 그는 순사를 금지하는 법령에 관여했는데, 이는 주군이 사망했을 때 가신들이 할복하는 관행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다테 소동과 에치고 소동 등 주요 사건에도 관여했다.[9]
다테 소동은 1658년부터 1674년까지 센다이의 다테 씨족 내에서 벌어진 계승 분쟁이었다. 다다키요는 이 사건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1660년 음주와 방탕 혐의로 직위에서 물러난 다테 쓰나무네와 친밀했다. 쓰나무네의 어린 아들 다테 쓰나무라를 다스린 섭정들은 부패와 형편없는 통치로 기소되었다. 다다키요는 관련자들을 에도로 소환하여 조사를 실시했고, 이 사건은 결국 센다이 가신 한 명이 다른 가신의 손에 죽고, 그 가신이 다이로의 경호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9]
일부 역사가들은 다다키요가 뇌물을 받고 사건을 늦추고 조치를 피하려 했다고 판단한다.[10]
2. 4. 다이로 취임과 권력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쇼군으로 섬긴 사카이 다다키요는 1653년부터 1666년까지 로주 (최고 고문) 중 한 명이었고, 1666년부터 1680년까지는 로주 의회 수장인 다이로를 역임했다.[7]다다키요는 가마쿠라 시대에 집권한 호조씨의 이름으로, 다이로 취임 후에는 [좌양정사마(左陽正士馬)]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에쓰나 쇼군 아래서 권세를 발휘한 전제적 인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다테 소동을 다룬 문예 작품 등 창작물에서는 다테 무네카츠와 결탁한 극악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다다키요가 다이로로 재임할 당시, 그에게 반대할 만한 유능한 정치가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다.[8] 1671년 사망한 아베 다다아키는 그의 유일한 주요 비판자로, 다다키요의 정책 감각과 느긋한 태도를 비난하며 뇌물을 받는다고 비판했다.[8] 오카야마현의 이케다 씨족을 포함한 여러 다이묘들도 지방의 열악한 상황과 농민 반란의 위협을 경고하며 다다키요를 비판했다.[8]
다다키요는 센다이의 다테 씨족 내의 계승 분쟁인 다테 소동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다.[9] 그는 음주와 방탕 혐의로 직위에서 물러난 다테 다다무네의 아들 다테 쓰나무네와 친밀했다. 쓰나무네의 어린 아들 다테 쓰나무라를 다스린 섭정들은 부패와 형편없는 통치로 기소되었다. 다다키요는 핵심 당사자들을 에도로 소환하여 공식 조사를 실시했지만, 이 사건은 10년 동안 이어졌고, 결국 센다이 가신이 다른 가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가신은 다이로의 경호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9] 일부 역사가들은 다다키요가 뇌물을 받고 사건을 늦췄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10]
오늘날 다다키요는 일반적으로 자기 도취적이고 부패한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정책 (또는 정책 부재)은 겐로쿠 시대 (1688–1704)를 특징짓는 쾌락주의와 방탕으로의 전환을 시작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평가된다.[8] 겐로쿠 시대는 예술의 황금기였지만, 다음 세대의 관료들에게는 부도덕, 부적절함, 과도한 사치의 시대로 여겨졌다.[8]
1680년 쇼군 이에쓰나가 사망했을 때, 다다키요는 황족의 일본 황실에서 후계자를 선택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로주 홋타 마사토시의 반발을 샀고, 다다키요는 사임했다. 이에쓰나의 남동생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다음 날 즉위하여 마사토시를 다다키요의 후임 다이로로 임명했다.[11]
2. 5. 만년과 죽음
延宝일본어 8년(1680년) 1월, 가즈사 구루리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15만 석이 되어, 아버지 다다유키 시대의 가문 지위를 회복했다. 같은 해 5월 이에쓰나가 사망하자, 8월에는 이에쓰나의 이복 동생 쓰나요시가 쇼군 선하를 받았다. 그해 12월 9일, 다다키요는 병 치료를 이유로 다이로 직에서 해임되었다.[11]이듬해인 延宝일본어 9년(1681년) 2월 27일 은거하였고, 5월 19일에 사망했다. 향년 58세(만 56세)였다. 유해는 류카이인(현재의 군마현 마에바시시)에 매장되었다. 도다 모스이의 『고토다이키』에 따르면, 쓰나요시는 에치고 소동의 재심을 실시하여 다카다번을 개역(영지를 몰수하고 가문을 해체하는 것)하려 했지만, 다다키요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쓰나요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다키요가 사망한 후 6월 21일에 재심을 실시, 6월 26일 개역이 이루어졌다.[7]
다다키요는 도쿠가와 이에쓰나 쇼군 밑에서 1653년부터 1666년까지 로주(최고 고문) 중 한 명이었으며, 1666년부터 1680년까지는 로주 의회 수장인 다이로를 역임했다.
오늘날 다다키요는 일반적으로 자기 도취적이고 부패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정책 (또는 정책 부재)은 겐로쿠 시대(1688–1704)를 특징짓는 쾌락주의와 방탕으로의 전환을 시작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겐로쿠 시대는 예술의 황금기였지만, 다음 세대의 관료들에게는 부도덕, 부적절함, 과도한 사치의 시대로 여겨졌다.[8]
1680년 쇼군 이에쓰나가 사망했을 때, 다다키요는 그의 후계자를 황족 출신의 일본 황실 인사로 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전년도에 임명된 로주 홋타 마사토시를 격분시켰고, 마사토시는 다다키요가 자신을 위해 권력을 잡으려는 명백한 시도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로주와 다이로는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쇼군 후계자를 통제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는 쇼군 자신에 대한 권력을 얻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다다키요는 직책을 사임했고, 이에쓰나의 남동생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다음 날 즉위하여 마사토시를 다다키요의 후임 다이로로 임명했다.[11]
3. 인물됨과 평가
사카이 다다키요는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섬기며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했다.[7] 가마쿠라 시대의 호조씨를 본받아 다이로 취임 후에는 '사요세이 님(左様せい様)'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쇼군 이에쓰나 아래에서 권세를 휘두른 전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1] 다테 소동을 다룬 문예 작품 등에서는 다테 무네카쓰와 결탁한 극악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1]
에도성 오테몬 하마찰 부근에 거주하며 막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후 쓰나요시 시대에는 '하마 쇼군(下馬将軍)'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노자어록(老子語録)』, 『견문수필(見聞随筆)』, 도다 시게히데가 쓴 『어당대기(御当代記)』 등의 사료에 남아있다.[1]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에 취임하자 다이로에서 해임되었고, 에치고 소동의 재심이 진행되던 중 해임된 지 불과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쓰나요시는 자살이 아닌지 의심하여 "무덤을 파내라"라고 명할 정도로 집요하게 여러 번 검시를 요구했지만, 도도 다카히사 등 사카이 가문과 친척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 때문에 다다키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유해는 마에바시에서 화장되었기 때문에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1]
3. 1. 성격과 능력
사카이 다다키요는 말이 매우 빠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백물두(百物頭)」나 「나카무라 잡기(中村雜記)」와 같은 낙서에는 "말이 빠른 두령", "말이 빠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한편, 가정에서는 성실한 애처가였다는 평가도 있다. 역사 작가 가이온지 조고로는 다다키요의 자녀들 대부분이 정실 부인의 소생이며, 유일하게 정실 부인의 자녀가 아닌 넷째 아이도 첫 번째 아내와 사별 후 재혼하기 전 독신 시절에 얻은 자녀라는 점을 들어 이러한 추측을 제기했다.[1]
또한 「나카무라 잡기」에서는 다다키요와 이나바 마사노리를 비교하고 있다. 다다키요는 키가 작고 잘 웃으며 예능을 좋아하는 반면, 마사노리는 키가 크고 엄격하며 유학을 좋아해 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이었다고 한다.[3]
「담해」 22권에서는 다다키요를 "대해(大海)"라고 칭했는데, 이는 "화목하고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4]
3. 2. 정치 스타일과 리더십
사카이 다다키요는 도쿠가와 이에쓰나 쇼군을 섬기며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한 인물로, 그의 정치 스타일은 권위적이고 전제적인 경향으로 평가받는다.[7] 특히 다테 소동과 에치고 소동에서 보여준 그의 미온적인 태도와 뇌물 수수 의혹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10]다다키요는 다테 소동에서 다테 쓰나무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쓰나무네의 섭정들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9][10] 이러한 의혹은 다다키요가 사건을 신속하게 해결하지 않고 10년 동안이나 지속시킨 배경으로 지목된다.[9]
또한, 다다키요는 홋타 마사토시와의 갈등을 통해 권력 지향적인 면모를 드러냈다.[11] 쇼군 이에쓰나가 사망하자, 다다키요는 황족 출신의 후계자를 제안했으나, 이는 홋타 마사토시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11] 이 사건은 다다키요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되며, 이로 인해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11]
다다키요의 정책은 겐로쿠 시대의 쾌락주의와 방탕으로의 전환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8] 아베 다다아키는 다다키요의 정책 부재와 뇌물 수수, 상황 대처 능력을 비판했으며, 오카야마현의 이케다 씨족을 포함한 여러 다이묘들도 지방의 불만을 경고하며 농민 반란의 위협을 제기했다.[8]
다다키요는 '하마 쇼군'으로 불릴 정도로 막부의 권위를 중시했으며, 도사 번과 우와지마 번의 영지 분쟁에서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의 선례를 따르는 등 보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3. 3. 긍정적 평가
교호 6년(1721년)에 성립된 《갈등별지》에는 다다키요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게이안 4년(1651년), 다다키요는 상락하여 이타쿠라 시게무네의 하인의 안내를 받아 동산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구걸하는 사람들을 위한 오두막이 많이 건설되고 있었다. 다다키요는 이것이 구걸하는 사람들을 위한 오두막이라는 설명을 듣고, "진정한 인정(仁政)이란 구걸하는 사람들을 위한 오두막을 짓는 것이 아니라, 구걸하는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사카이 다다키요에 대한 평가가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담해》 22권에는 간분 8년(1668년) 당시 로주들의 평이 실려 있는데, 다다키요는 "대해(大海)"라고 칭해지고 있다. 이는 "화목하고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1]
역사 작가 가이온지 조고로는 다다키요가 넷째를 제외한 모든 자녀를 정실 부인에게서 얻었고, 유일하게 정실 부인의 자녀가 아닌 넷째도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후 재혼하기 전 독신 시절에 얻은 자녀라는 점을 지적하며, 가정에서는 성실한 애처가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3. 4. 부정적 평가
다다키요는 도쿠가와 이에쓰나 치하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전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다테 소동을 다룬 문예 작품 등에서는 다테 무네카쓰와 결탁한 악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1]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에는 '''하마 쇼군'''으로 불릴 정도로 그 권세가 대단했다는 기록이 『노자어록(老子語録)』, 『견문수필(見聞随筆)』, 『어당대기(御当代記)』 등의 사료에 남아있다.[1]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에 취임한 후 다이로에서 해임되고, 에치고 소동 재심이 진행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 때문에 쓰나요시는 자살을 의심하여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할 정도로 집요하게 검시를 요구했으나, 사카이 가문과 친척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정황은 다다키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다.[1] 다만, 유해가 마에바시에서 화장되었기 때문에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1]
3. 5. 종합적 평가
다다키요는 가마쿠라 시대의 호조씨를 본받아 다이로(大老) 취임 후 '사요세이 님(左様せい様)'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쇼군 이에쓰나 아래에서 권세를 휘두른 전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또한 다테 소동을 다룬 문예 작품 등에서는 다테 무네카쓰와 결탁한 극악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사카이 가문은 1636년(간에이 13년) 에도성 오테몬(大手門) 하마후다부츠(浜札) 부근의 마키노 타다나리 저택을 받아 그곳에 거주하였다. 하마후다부츠는 막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으로, 다다키요의 권세와 맞물려 사후 쓰나요시 시대에는 '하마 쇼군(下馬将軍)'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노자어록(老子語録)』, 『견문수필(見聞随筆)』 등의 사료에 남아있다. 도다 시게히데가 쓴 『어당대기(御当代記)』에도 다다키요가 하마 쇼군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다다키요는 말이 매우 빠른 인물로, 낙서인 「백물두(百物頭)」나 「나카무라 잡기(中村雜記)」 등에 "말이 빠른 두령", "말이 빠른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다.[1]
가이온지 조고로는 다다키요가 넷째 아들을 제외한 모든 자녀가 정실 부인의 소생이며, 유일하게 정실 부인의 자녀가 아닌 넷째 아들 역시 첫 번째 아내와 사별 후 재혼 전 독신 시절에 얻은 자식이라는 점을 들어 가정 내에서는 성실한 애처가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에 취임하자 다이로에서 해임되었고, 에치고 소동의 재심이 진행되던 중 다다키요는 해임된 지 불과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쓰나요시는 자살이 아닌지 의심하여 "무덤을 파내라"라고 명할 정도로 집요하게 여러 번 검시를 요구했지만, 사카이 가문과 친척 관계에 있던 도도 다카히사 등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 때문에 다다키요의 죽음이 심상치 않았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유해는 마에바시에서 화장되었기 때문에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
『나카무라 잡기』는 다다키요와 이나바 마사노리를 대비하여 언급한다. 다다키요는 키가 작고, 마사노리는 키가 큰 남자였으며, 다다키요는 잘 웃고 예능을 좋아하는 반면, 마사노리는 엄격하고 유학을 좋아하는 등 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이었다.[1]
『담해(談海)』의 22권에는 1668년(간분 8년) 당시 로주(老中)들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그중 다다키요는 "대해(大 হেসে)"라고 칭해진다. 이는 "화목하고 너그러움"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1]
4. 정책과 업적
사카이 다다키요는 도쿠가와 이에쓰나 쇼군 시대에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하며 막부 정치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 다양한 사건에 관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능력과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특히 다테 소동에서 다다키요는 센다이 번 다테 가문의 권력 승계 분쟁에 개입했다. 그는 분쟁을 오랫동안 방치하다가 뒤늦게 공식 조사를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살인 사건까지 발생했다. 일각에서는 다다키요가 뇌물을 받고 사건 해결을 지연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0]
또한 다다키요는 도사 번과 우와지마 번 사이의 영지 분쟁에도 관여했다. 그는 평정소가 아닌 에도 성에서 재정을 진행하여 도사 번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다다키요가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고 뇌물 수수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미온적인 대처는 겐로쿠 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8]
4. 1. 다테 소동과 에치고 소동
사카이 다다키요는 도쿠가와 이에쓰나 쇼군 치하에서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하며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다테 소동과 에치고 소동(언급되지 않았으나, 섹션 제목에 포함되어 추가)은 그의 정치적 역량과 도덕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다테 소동은 센다이 번 다테 씨족 내부의 권력 계승 분쟁이었다. 1658년부터 1674년까지 이어진 이 사건은 전 다이묘 다테 타다무네의 아들 다테 쓰나무네의 방탕한 생활과 그로 인한 실각, 어린 아들 다테 쓰나무라의 섭정들의 부패와 무능한 통치로 인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9] 다다키요는 쓰나무네와 친분이 있었고, 이 사건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다.[9]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이나 사건을 방치하다가 에도에서 핵심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공식 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센다이 가신들 간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9] 일부 역사가들은 다다키요가 쓰나무라의 섭정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건 해결을 고의로 지연시켰다고 비판한다.[10]
다다키요는 도사 번과 우와지마 번의 영지 분쟁에도 관여했다. 이 분쟁은 평정소에서 다루어졌는데, 평정중이자 우와지마 번의 인척인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등은 우와지마 번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간조 봉행 이타미 가쓰나가는 이 문제가 이에미쓰 시대의 중요한 선례를 변경하는 것이므로 공방(이에쓰나)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다키요는 공방이 성인이 된 후에 재정을 연기할 것을 주장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정소가 아닌 에도성에서의 재정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도사 번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다다키요는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고 뇌물 수수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의 미온적인 대처는 겐로쿠 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8]
5. 논란과 의혹
다다키요는 가마쿠라 시대에 집권한 호조씨의 이름으로, 다이로(大老) 취임 후 [좌양정사마(左陽正士馬)]라는 칭호를 받으며 쇼군 이에쓰나 아래서 권세를 휘두른 전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또한 다테 소동을 다룬 문예 작품 등에서는 다테 무네카츠와 결탁한 극악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사카이가는 1636년(간에이 13년) 에도성 오테몬하마후다부츠 부근 마키노 다다나리의 저택을 하사받아 실내가시키로 되었다. 하마찰은 안쪽으로 걸어서 하마지례를 해야 하는 막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곳으로, 다이로 시대의 권세와 맞물려 사후 쓰나요시 시기에 '하마쇼군(下馬将軍)'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노자어록>, <견문수필> 등 여러 사료에 나타난다. 도다 시게히데의 『어당대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비젠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아버지의 사촌)와 교류하며 광정일기(光政日記)에도 관련 기사가 있지만, 1668년(간분 8년)에는 미쓰마사가 다다키요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다는 기록이 <이케다 가문서>에 있다. 이는 다다키요의 전횡을 비판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광정일기에는 의견서 제출 기록이 없어 동시대의 간언서라고도 한다.
5. 1. 궁장군 옹립설
1680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위독해지자, 다이로였던 사카이 다다키요는 가마쿠라 시대의 예를 따라 도쿠가와 가문 및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과 인연이 깊은 아리스가와노미야 유키히토 친왕을 궁장군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11] 이는 도쿠가와 미쓰쿠니, 홋타 마사토시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11] 이 설은 『도쿠가와 실기』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 등장하여 통설로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역사가 쓰지 다쓰야가 실각 후 유포된 풍설일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했다.궁장군 옹립설의 배경에는 이에쓰나의 동생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자질에 대한 의문, 혹은 이에쓰나의 측실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출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1]
일부 역사가들은 다다키요가 다테 소동과 같은 사건에서 뇌물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쇼군 후계자 문제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10] 그러나 홋타 마사토시는 다다키요의 제안에 강력히 반대하며, 로주와 다이로는 쇼군 후계자를 통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1] 결국 다다키요는 사임하고, 쓰나요시가 쇼군에 즉위했다.[11]
5. 2. 뇌물 수수 의혹
사카이 다다키요는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하면서 여러 뇌물 수수 의혹에 휩싸였다. 아베 다다아키는 다다키요가 뇌물을 받고 정책 결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8] 오카야마 번의 이케다 가문을 포함한 여러 다이묘들도 다다키요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8]1658년부터 1674년까지 다다키요는 센다이 번의 다테 가문 계승 분쟁인 다테 소동에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다다키요가 다테 쓰나무네의 섭정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건 해결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0]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10]
5. 3. 죽음을 둘러싼 의혹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에 취임하면서 다이로에서 해임되고 에치고 소동 재심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다키요는 해임된 지 불과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1] 이 때문에 쓰나요시는 자살이 아닌지 의심하여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할 정도로 집요하게 여러 번 검시를 요구했다고 한다.[11] 그러나 사카이 가문과 친척 관계였던 도도 다카히사 등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11] 이러한 정황 때문에 다다키요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11] 다만, 시신은 마에바시에서 화장했기 때문에 후세의 창작으로도 여겨진다.[11]일부 역사가들은 다다키요가 다테 소동과 같은 사건을 늦추고 조치를 피하려는 섭정들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10] 1680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사망했을 때, 다다키요는 후계자를 황족에서 선택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홋타 마사토시를 격분시킨 사건으로, 다다키요가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로 여겨져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11]
6. 한국사와의 비교
사카이 다다키요는 에도 시대의 유능한 관리이자 다이묘였지만, 그의 생애와 업적은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의 시대적 배경과 활동 영역이 한국사와는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7. 현대적 의의
사카이 다다키요|사카이 다다키요일본어는 에도 막부의 권력 구조를 안정시키고, 무가 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의 통치 방식과 정책은 현대적 관점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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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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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199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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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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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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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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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nterstei[...]
2003
[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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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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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kai Tadakiyo
https://books.google[...]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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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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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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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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