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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도모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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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도모노리는 1738년에 태어나 1768년에 사망한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그는 시라카와번 번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히메지번을 상속받았으나, 곧 마에바시번으로 전봉되었다. 마에바시번 통치 중 도네강의 홍수와 성곽 파괴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가와고에로 거성을 이전했다. 그는 3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가독은 차남 마쓰다이라 나오쓰네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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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도모노리
기본 정보
씨명결성 마쓰다이라가
이름마쓰다이라 도모노리
마쓰다이라 도모노리 상 (고켄지 소장)
마쓰다이라 도모노리 상 (고켄지 소장)
시대에도 시대
출생겐분 3년 3월 14일 (1738년5월 2일)
사망메이와 5년 6월 10일 (1768년7월 23일)
개명기하치로 (유명) → 나오카타 (초명) → 도모노리
별명규타로 (통칭)
계명레이주인덴넨게미쇼다이코지
묘소사이타마현가와고에시고센바 정의 기타인
관위종사위하, 야마토노카미, 시종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시게 → 이에하루
하리마히메지번 번주 → 고즈케마에바시번 번주 → 무사시가와고에번 번주
씨족결성 마쓰다이라가
부모아버지: 마쓰다이라 아키노리, 어머니: 나리타 씨
형제도모노리, 노리미치, 유라 사다미치
배우자정실: 미네 (야마우치 도요시게의 딸)
계실: (후지이 가네노리의 딸)
자녀도이 도시타카, 나오쓰네, 노리미네, 아키야마 마사나가, 고리키 나오노부, 기사히메 (쓰가루 노부아키라 정실)
가계 계승 정보
대수5
임기1748년 ~ 1768년
전임자마쓰다이라 아키노리
후임자마쓰다이라 나오쓰네
대수2
임기1748년 ~ 1749년
전임자마쓰다이라 아키노리
후임자사카이 다다즈미
임기1749년 ~ 1767년
전임자사카이 다다즈미
후임자가와고에 번의 원격 영지(마쓰다이라 나오카쓰)
대수1
임기1767년 ~ 1768년
전임자아키모토 스케토모
후임자마쓰다이라 나오쓰네

2. 생애

호레키 9년(1759년) 12월 1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우대신 전임에 따라, 무쓰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노부와 함께 조정에 사자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오미 히코네번 번주이자 다이로(최고 권력자)인 이이 나오유키가 막부 내 서열을 이유로 공작을 벌여, 마쓰다이라 가타노부와 이이 나오유키가 사자가 되었다. 이후 이이 나오유키는 양부의 병세 치료를 이유로 사퇴하고, 마쓰다이라 요리타카(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가 사자가 되었다.

元文일본어 5년(1768년) 6월 10일(마쓰다이라 가계보에 따름, 도쿠가와 실기에 따르면 12일) 가와고에번에서 사망, 향년 31세였다. 가독은 차남인 나오쓰네가 이었다. 묘소는 가와고에 기타인이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겐분 3년(1738년) 3월 16일, 무쓰국 시라카와번 번주 마쓰다이라 아키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간포 원년(1741년), 아버지 아키노리가 히메지번으로 전봉되었다. 간엔 원년(1748년) 11월 27일, 11세 때 아버지가 급사하여, 다음 달 27일에 히메지번 15만 석을 상속받았다. 같은 달 히메지번에서는 가뭄과 태풍으로 인한 피해에 더해 연공 감면을 요구하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1]

이 봉기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히메지가 서국을 억누르는 요지였고 번주가 어린 경우 타국으로 전봉되는 불문율에 따라, 아키노리의 히메지번주로서의 역할은 곧 끝나게 된다. 증조부 나오노리도 어린 나이를 이유로 히메지에서 에치고 무라카미번으로 이봉된 적이 있었다. 간엔 2년(1749년) 1월 15일, "어린 아키노리에게는 히메지번주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져, 마에바시번 번주이자 막부의 중신 사카이 다다요시와 교체되어 마에바시 15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간엔 4년(1751년) 11월 11일 원복(성인식)을 치렀고, 다음 호레키 2년(1752년) 5월 7일 마에바시성에 처음 입성했다. 호레키 8년(1758년) 정월 11일, 아키노리로 개명했다.[1]

2. 2. 히메지 번 농민 봉기

간엔 원년(1748년) 11월 27일, 아버지 마쓰다이라 아키노리가 급사하면서 같은 해 12월 27일에 히메지번 15만 석을 상속받았지만, 같은 달 히메지번에서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1] 이 해에는 가뭄과 태풍으로 히메지번 내에 피해가 발생했고, 번은 연공 납기를 연기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농민들이 연공 감면을 요구하며 강소하려 한 것이 발단이었다.[1]

2. 3. 마에바시 번으로의 전봉

겐분 3년(1738년) 마쓰다이라 아키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간엔 원년(1748년) 아버지의 급사로 히메지번 15만 석을 상속받았다.[1] 그러나 같은 해 히메지번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1]

이 봉기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히메지는 서쪽 지역을 통제하는 중요한 곳이었고, 번주가 어릴 경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관례가 있었다.[1] 간엔 2년(1749년) 1월 15일, 마에바시번 번주 사카이 다다요시와 교체되어 마에바시 15만 석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에바시번은 도네강의 홍수로 자주 피해를 입는 곳이었고[2], 마에바시성도 도네강의 침식으로 파괴가 진행되어 혼마루까지 침수될 정도로 위험했다. 메이와 4년(1767년) 윤 9월 15일, 혼마루 붕괴 위기로 막부의 허가를 받아 거성과 번청을 마에바시에서 가와고에로 옮겼다. 마에바시성은 메이와 6년(1769년)에 폐성되었다.

2. 4. 마에바시 번의 어려움과 가와고에 번으로의 이전

겐분 3년(1738년) 마쓰다이라 아키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난 도모노리는 간엔 원년(1748년) 아버지의 급사로 히메지번 15만 석을 상속받았다.[1] 그러나 같은 해 히메지번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했는데,[1] 이는 가뭄과 태풍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연공 감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발생한 것이었다.[1]

이 봉기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히메지가 서쪽 지역을 통제하는 중요한 곳이었고, 번주가 어릴 경우 다른 곳으로 번을 옮기는 관례에 따라,[1] 도모노리는 간엔 2년(1749년) 마에바시번으로 옮겨졌다.[1] 이는 마에바시 번주이자 막부의 중신이었던 사카이 다다요시가 히메지 번을 원했기 때문이었다.[1]

마에바시 번은 도네강의 홍수로 자주 피해를 입는 곳이었다.[2] 마에바시성 또한 도네강의 격류로 인해 성곽이 파괴되고 있었고, 도모노리 대에는 혼마루까지 침수되어 거주하기 위험한 상태였다.[2] 결국 메이와 4년(1767년) 막부의 허가를 얻어 가와고에번으로 거성을 옮겼고, 마에바시성은 메이와 6년(1769년)에 폐성되었다.[2]

2. 5. 사망

元文일본어 5년(1768년) 6월 10일(마쓰다이라 가계보에 따름, 『도쿠가와 실기』에 따르면 12일) 가와고에번에서 사망하였으며, 향년 31세였다. 가독은 차남인 나오쓰네가 이었다.[1]

묘소는 가와고에 기타인이다.

3. 계보

구분내용
아버지마쓰다이라 아키노리
어머니나리타 씨 (타바타 씨라고도 함)
정실미네 - 야마우치 도요시키의 딸
계실도 - 후지이 가네노리의 딸
장남도이 도시타케 (1759-?) - 측실 오쿠보 씨 소생
차남마쓰다이라 나오쓰네 (1762-1810)
기타 자녀마쓰다이라 노리미네|마쓰다이라 노리미네일본어 (측실 야마다 씨 소생)
아키야마 마사나가 (측실 야마다 씨 소생)
고리키 나오노부 (측실 야마다 씨 소생)
키사히메 - 쓰가루 노부아키의 정실 (생모 불명)


4. 관력

松平朝矩|마쓰다이라 도모노리일본어1749년(간엔 2년) 쇼군가 첫 어메미에를 하였고, 종4위하·야마토노카미였다. 1765년(메이와 2년)에는 지주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前橋市史 第2巻 前橋市 1973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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