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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카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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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오카 요시유키는 일본의 유도 선수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유도 경량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효고현 출신으로, 사촌의 영향으로 유도를 시작하여 교토 산업 대학을 졸업한 후 효고현 경찰에 입문했다. 1982년 헝가리 국제 대회와 체코슬로바키아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1983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85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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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카 요시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가일본
체급65kg급
선수 정보
이름 (한글)마쓰오카 요시유키
이름 (일본어)松岡義之
이름 (로마자)Matsuoka Yoshiyuki
출생1957년 3월 6일
출생지일본 효고현
164cm
몸무게65kg
8단
소속고마쓰 제작소 여자 유도부
올림픽 성적
올림픽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 (-65kg급)
세계 선수권 대회 성적
세계 선수권 대회1983 모스크바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은메달 (-65kg급)

2. 선수 경력

효고현 칸자키군 후쿠사키정 출신으로,[5] 중학교 시절 유도를 시작했다.[6] 교토 산업 대학 졸업 후 효고현 경찰에 입문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선수 초기에는 큰 성과가 없었으나, 담낭염 투병을 계기로 유도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으며 기량이 발전했다.[5] 24세에 처음 전일본 유도 연맹 강화 선수로 선발되었고,[5] 1982년 국제 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가능성을 보였다.[5][7]

1983년 모스크바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고,[5]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65kg급 결승에서 한국황정오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 선수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7] 1985년에는 일본 국내 대회를 석권했으나, 같은 해 서울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3위에 머물렀다.

2. 1. 학창 시절 (중학교 ~ 대학교)

효고현 칸자키군 후쿠사키정 출신이다.[5] 사촌의 영향으로 지역의 후쿠사키정립 타하라 중학교(현·정립 후쿠사키 히가시 중학교)에 입학하며 부활동으로 유도를 시작했다.[6] 당시 유행하던 텔레비전 드라마 『유도 일직선』을 보고 화려한 스포츠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소박했다"고 느꼈다.[5] 중학교 시절에는 이지메 같은 어려움 없이 즐겁게 유도를 했으며,[5] 학교 유도부는 지구 대회에서는 우승할 정도였지만 현 대회에서는 실력 차이가 컸다고 한다.[5]

현립 후쿠사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중학교 선배가 유도부에 있어 계속 유도를 하게 되었다.[5] 1학년 때 현 대회 3위를 했지만, 3년 내내 인터하이에는 출전하지 못했다.[5] 2학년 때는 고등학교부터 유도를 시작한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했으며,[5] 부활동 분위기는 화목하여 마쓰오카는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유도를 좋아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5][6]

1975년 , 교토 산업 대학에 진학해서도 유도를 계속했지만, 그의 목표는 큰 대회 우승이나 단위 획득이 아니라 "중간에 부활동을 그만두지 않고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것이었다.[6] 처음 겪는 엄격한 연습 환경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5]

그럼에도 마쓰오카는 1학년 때부터 단체전의 주전 선수로 발탁되어 부장이나 대장으로 출전했다. 마쓰오카는 "항상 접전이라 출전 기회가 돌아왔기 때문에 압박감이 강했다", "상대는 체중 100kg 이상의 선수들뿐이었기 때문에, '제발 봐주세요'라는 마음도 있었다"라고 회고한다.[5]

또한, 동 대학에 코치로 재직하고 있던 현역 세계 챔피언 후지이노 쇼타의 지도를 받아서, 후지이노가 특기로 하는 매트 바로 위에서 무릎을 굽혀 들어가는 업어치기에 관해 직접 조언을 받을 수 있었고,[7] 그 덕분에 잔기술 유도 스타일로 흘러가는 일은 없었다.[5] 중학교 시절 선배에게 "이 작으니까"라는 이유만으로 권해진 업어치기는, 이렇게 해서 후일 마쓰오카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승화되었다.[6] 마쓰오카의 전성기 때의 신장은 164cm였다.[8]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렇다 할 전적도 없이 평범한 학생 유도 생활을 계속한 마쓰오카였지만,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효고현 경찰로부터 취업 제안이 있었다.[5]

2. 2. 효고현 경찰관 시절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효고현 경찰로부터 취업 제안을 받은 마쓰오카는 이에 응하여 경찰관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없고 내키지 않는 마음이었다[5]。하지만 4학년 후반이 되면서 조금 더 유도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고, 점차 취업이 기대되기 시작했다[5]

효고현 경찰은 강한 선수들이 많아 연습의 질과 양 모두 이전보다 훨씬 엄격해졌다. 마쓰오카는 단체전의 경량급 선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훈련에 매진하며 자신을 단련해 나갔다[5]。다양한 스타일의 선수들과 연습하면서 그동안 약점이었던 샅바 싸움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5]

그러나 취업 2년 차 겨울, 담낭염을 앓게 되어 의사의 권고로 유도 훈련을 중단하고 약 1개월간 요양해야 했다[5]。마쓰오카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나는 유도에 맞는가"라는 오랜 질문에 대해 "나를 살리는 것은 유도밖에 없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유도를 하고 싶다"는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5]

이후 마쓰오카는 건강 관리를 위해 일상생활을 개선하기로 마음먹고, 우선 담배를 끊었다[5]。식사도 좋아하는 음식 대신 몸에 좋은 것을 섭취하고, 마사지 등 몸 관리에 힘쓰는 등 생활의 모든 부분을 유도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었다[5]

이러한 의식 변화는 유도 자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특별한 전략 없이 자신의 형태가 되면 던지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던 담백한 스타일이었으나, 이후에는 시합 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5]

의식 변화의 효과는 시합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24세에 처음으로 전일본 유도 연맹의 강화 선수로 선발되었다[5]。마쓰오카는 당시 "기뻤지만 불안함도 있었다", "강화 합숙은 미지의 세계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해외에 가는 느낌이었다"라고 회고했지만, 첫 강화 합숙에서 정신없이 연습하며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5]

어느덧 일본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게 된 마쓰오카였지만, 국내 타이틀은 없는 상태에서 1982년 제6회 헝가리 국제 대회에 자비로 출전했다[5][7]올림픽세계 선수권 선발전을 앞두고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스승 후지이노의 "여기서 승부를 걸어보는 게 어때"라는 말이 큰 힘이 되었다[5]

25세 생일에 열린 이 대회에서 마쓰오카는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진 체코슬로바키아 국제 대회에서도 우승하며 비어 있던 자신의 경력에 첫 타이틀을 기록했다. 마쓰오카는 "헝가리와 체코에서 우승한 덕분에 세계 선수권에서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5]

그의 예감대로 198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3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니콜라이 솔로두힌에게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패배했지만 준우승을 차지하며 단숨에 세계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시합은 마쓰오카가 주도했지만 양 선수 모두 포인트 없이 시간이 흘렀고, 종료 28초 전 마쓰오카의 안다리가 성공하여 유효 포인트로 보였으나 주심은 인정하지 않았다. 종료 후 마쓰오카는 우세를 확신했지만, 깃발 판정은 2-1로 솔로두힌의 승리였다. 한편, 그해 국내 전일본 선발 선수권과 고도칸배에서는 모두 3위에 머물렀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 선발전인 5월 전일본 선발 체중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아사미 미키오에 이어 준우승했지만, 과거 실적 등을 인정받아 65 kg 이하급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8월 올림픽 본선에서는 결승에서 한국황정오를 상대로 특기인 업어치기로 유효 포인트를 따내는 등 우세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7]。27세의 쾌거였다. 마쓰오카는 당시를 회상하며 "장난인가요", "인생 버릴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5][6]。이는 세계 선수권 4연패를 달성하고도 정치적 문제로 인한 보이콧 등의 불운으로 올림픽 출전조차 못 했던 스승 후지이노의 한을 제자가 풀어준 셈이 되었다[7]

1985년에는 4월 고도칸배와 7월 전일본 선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명실상부한 일본 경량급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9월 서울에서 열린 제14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3회전까지 순조롭게 한판승으로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홈팀인 한국의 이경근에게 판정패하며 3위에 머물렀다.

2. 3. 국제 대회 활약

언제부터인가 일본 최고 수준의 실력을 쌓은 마쓰오카였지만, 국내 타이틀 미획득 상태로 1982년 제6회 헝가리 국제 대회에 자비로 원정하여 출전하게 되었다[5][7]올림픽 대회세계 선수권 대회의 선발전을 내다보면서, 국제 무대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통할지를 아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저금도 별로 없는 가운데 이를 뒷받침한 것은 스승 후지이노의 "여기서 승부를 걸어보는 게 어때"라는 말이었다[5]

25세의 생일 당일에 맞이한 이 대회에서 마쓰오카는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진 체코슬로바키아 국제 대회도 제패하여, 비어 있던 자신의 프로필의 타이틀 란을 드디어 채울 수 있었다. 마쓰오카는 "헝가리와 체코에서 우승한 덕분에,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5]。그 예감대로, 198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3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니콜라이 솔로두힌에게 논란이 있는 판정 끝에 패했지만 준우승을 차지하여 단숨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한편, 국내에서 열리는 전일본 선발 선수권 대회·고도칸배와 같은 체중별 주요 대회는, 이 해에는 모두 3위였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 선발전인 5월 전일본 선발 체중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아사미 미키오에 이어 준우승에 그쳤지만, 과거 실적 등을 인정받아 65 kg 이하급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8월에 열린 올림픽 본선에서는 결승전에서 한국황정오를 상대로 특기인 업어치기로 유효 포인트를 따내는 등 우세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7]。이는 27세에 이룬 쾌거였다. 마쓰오카는 당시를 회상하며 "장난인가요", "인생 버릴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5][6]。 그의 스승인 후지이노는 세계 선수권 4연패를 달성했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인한 참가 보이콧 등 불운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는데, 제자인 마쓰오카가 스승의 한을 풀어준 셈이 되었다[7]

1985년에는 4월 고도칸배와 7월 전일본 선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일본 경량급 최강자로 자리매김했지만, 9월 서울에서 열린 제14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3경기를 순조롭게 한판승으로 이겨 올라갔지만 준결승전에서 홈팀인 한국의 이경근에게 판정패하며 3위에 머물렀다。

3.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후, 고마쓰 제작소 여자 유도부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처음에는 여자 유도 지도 경험이 없고 도쿄 생활도 처음이라 망설였지만, "같은 일본이고 같은 유도니까"라는 생각으로 수락했다.[5] 당시 팀에는 에토 히로미, 시모다 히토미, 쿠니요시 마코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1997년 4월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팀 분위기는 다소 느슨했다고 한다. 마쓰오카는 선수들의 의식 개혁부터 시작하여, 명확한 목표 설정과 프로 의식을 강조했다.[6] 하루 약 3시간의 훈련은 엄격하게 진행하면서도, 때로는 배구, 씨름, 테니스 등 다른 종목을 도입하여 즐겁게 훈련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6] 또한 선수 개개인의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고, 오랜 노력 끝에 정상에 섰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5]

이러한 노력의 결과, 팀은 점차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부임 2년 만인 1999년 전일본 실업 유도 단체 대항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고, 2000년2001년에는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에도 고마쓰 여자 유도부는 4연패를 포함하여 총 8번의 전일본 실업 유도 단체 대항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여자 유도계의 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마쓰오카는 팀 성적뿐만 아니라 선수 육성에도 힘썼다. 타니모토 아유미, 아사미 하루나와 같은 올림픽세계 선수권 대회 챔피언을 배출하며 명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현재는 제자 중 한 명인 스기모토 미카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총감독으로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9]

마쓰오카는 선수들의 기술적인 성장 외에도 은퇴 후의 삶, 즉 세컨드 커리어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선수 생활이 끝난 뒤에도 가족처럼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6]

4. 주요 전적

연도대회명체급성적
1982년헝가리 국제 대회-우승
1982년고도칸배경경량급우승
1982년가노 지고로배경경량급3위
1982년체코슬로바키아 국제 대회-우승
1983년고도칸배경경량급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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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대륙별 대항전단체전2위
1985년환태평양 유도 선수권 대회-우승


참조

[1] Sports-Reference
[2] 뉴스 松岡義之-師弟の夢を叶える金メダル http://www.sanspo.co[...] Sankei Sports
[3] 웹사이트 Yoshiyuki Matsuoka Judoka https://www.judoinsi[...]
[4] 웹사이트 Women's judo club https://www.komatsu.[...] 2022-01-17
[5] 뉴스 転機-あの試合、あの言葉 第5回-松岡義之-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2-03-20
[6] 뉴스 著名な柔道家インタビュー -松岡義之- https://www.judo-ch.[...] 東建コーポレーション 2011-09
[7] 뉴스 ヒストリー 【第80号】松岡義之 -師弟の夢を叶える金メダル 産業経済新聞社 2004
[8] 웹사이트 Biography and Olympic Results http://www.sports-re[...]
[9] 뉴스 女子柔道部 -部員紹介- https://www.komatsu.[...] 小松製作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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