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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기 제3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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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카베오기 제3서는 칠십인역에 포함되어 보존되었으나, 후대 유대교의 타나크에는 포함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려다 실패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박해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실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헬레니즘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00년에서 서기 7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과의 일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문학적인 윤색과 과장이 많아 역사적 신뢰성은 낮게 평가된다. 신학적으로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배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방 정교회와 일부 오리엔트 정교회에서 제2경전으로 인정받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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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기 제3서
개요
제목마카베오기 제3서
원제마카바이온 감마 (Μακκαβαίων Γ´)
분류구약성경외경 또는 제2경전
기록 언어고대 그리스어
기록 시기기원전 1세기
주요 내용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유대인 박해 시도와 기적적인 구원
특징역사적 정확성 논란, 문학적 과장, 종교적 교훈 강조
구성
7장
주요 등장인물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시몬 (성전 감독관)
유대인 공동체
내용 요약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박해 시도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려다 실패한 후, 유대인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박해를 시작한다.
유대인 학살 명령왕은 이집트 전역의 유대인들을 모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절망에 빠진다.
기적적인 구원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도하자, 하느님이 기적을 베풀어 학살을 막고 유대인들을 구원한다.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주제 및 신학적 의미
주요 주제하느님의 보호와 구원
신앙의 중요성
박해에 대한 저항
신학적 의미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역사적 논란
역사적 정확성본서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부 학자들은 과장된 묘사와 비현실적인 사건 전개로 인해 역사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역사적 배경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전승
교회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정교회에서는 구약성경의 일부로, 천주교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한다.

2. 배경

2. 1. 역사적 배경

2. 2. 문학적 배경

마카베오기 3서는 그리스 유대교 성경인 칠십인역에 포함되어 보존되었다.[28] 헬레니즘 유대교가 쇠퇴하면서 후대 유대인들이 사용한 타나크(히브리어 성경)의 마소라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이 칠십인역을 기독교 구약의 기초로 보존하여 분실되지 않았다.[28] 그러나 칠십인역 초기 필사본의 책 목록은 표준화되지 않아 바티칸 사본에는 마카베오기가 없고, 시나이 사본에는 1 마카베오기와 4 마카베오기만 포함되어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만 1, 2, 3, 4 마카베오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28]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는 칠십인역의 자신의 버전에 많은 변경을 가하여 다양한 판본이 나오게 했다. 루키아노스 판본은 시리아, 소아시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표준이 되었고, 시리아어 페쉬타에 있는 3 마카베오기 판본은 루키아노스적 특징을 보일 뿐만 아니라 몇 가지 확장이 포함된 다소 자유로운 번역이었다. 또한 서기 400~600년에 만들어진 의역적인 아르메니아어 버전도 존재한다.[12] 로버트 한하르트는 1960년에 그리스어 텍스트의 비평판을 출판했으며, 1980년에 제2판을 출판했다.[13]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칠십인역은 이 작품에 "3 마카베오기"라는 제목을 부여했는데, 이는 2 마카베오기와의 명백한 연관성 때문으로 추정된다.[14] 2 마카베오기의 이야기와 유사한 점으로는 대제사장 시몬 2세가 등장하고, 2 마카베오기에서 언급되며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예루살렘 성전 침입 시도를 막아낸 오니아스 3세의 아버지의 이야기, 이집트 유대인의 고난이 엘르아살과 일곱 아들을 둔 여인의 순교와 유사하게 묘사되며, 엘르아살 자신이 이 이야기에 다시 등장하고, 두 천사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왕의 반유대주의적 행위를 막는다는 점 등이 있으며, 이는 헬리오도루스의 이야기와 유사하다.[15] 이 책은 가짜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프톨레마이카"(Ptolemaica)로 언급되었을 수 있다.[16]

3. 주요 내용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는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한 후, 예루살렘제2성전을 방문하여 지성소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당했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된다.[1][2][3]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왕국 내 모든 유대인들을 등록하고, 인두세를 부과하고, 노예 신분으로 만들라고 명령한다. 디오니소스 숭배에 참여하기로 동의한 유대인들은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신앙을 굳게 지켰다.[1][2]

모든 유대인을 처형하기 전에 등록하려는 시도는 유대인의 엄청난 수에 의해 좌절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코끼리에 깔려 죽음으로써 유대인들을 죽이려 하고, 그들을 격분시키기 위해 500마리의 코끼리에게 술을 먹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처형은 반복적으로 좌절된다. 하나님은 먼저 프톨레마이오스가 늦잠을 자게 하시고, 다음에는 그가 유대인에 대한 분노를 기적적으로 잊게 하신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침내 코끼리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경마장으로 들어가 직접 유대인들을 파괴하려 하지만, 엘르아자르의 열정적인 기도 이후, 하나님은 이를 막는 두 천사를 보내신다.[1][2][3]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술 취한 코끼리로 유대인들을 죽이려 하자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두 천사에 의해 구원받는 모습 (마카베오 3서 5장); 네덜란드 판화


프톨레마이오스는 갑자기 유대인에 대한 분노를 잊고 그들에게 다양한 면제와 연회를 베풀며, 여러 날짜를 기념 축제로 정한다.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그들을 용서받기 위해 신앙을 버리기로 선택한 모든 유대인을 죽일 수 있는 허가를 요청하고 받는다. 이 책에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내용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1][2][3]

3. 1. 라피아 전투와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예루살렘 방문

3. 2. 유대인 박해와 기적적인 구원

3. 3. 엘르아자르의 기도와 천사의 출현

3. 4. 박해의 종식과 유대인들의 귀환

4. 저자와 저술 시기

이 책의 저자는 헬레니즘 유대교의 일부로서 그리스어로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 저자는 수사적인 구성을 즐겨 사용하고 과장된 문체를 보인다.[4][27] 그의 그리스어는 드물고 시적인 단어를 포함하여 훌륭하고 자연스러우며, 번역본일 가능성은 있지만 히브리 문학에도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4] 책의 주제와 문체는 마카베오기 2서, 아리스테아스 서간, 에스더기와 유사하며, 저자가 이 책들을 읽었음을 시사한다.[5] 에스더기의 그리스어 번역의 경우, 그 번역가가 마카베오기 3서를 읽었을 수도 있다는 대안이 제기되었으며, 어떤 책이 먼저 쓰였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11] 마카베오기 2서와 유사하게 저자는 신부와 신랑이 집에서 끌려가는 이야기와 같이 감정과 정서에 호소하려는 그리스적 논증의 "비애적인"(''pathos''의 의미)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9] 저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정의 정치와 의전에 관심이 있고 능숙한 것으로 보인다.[12][6]

정확한 저술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텍스트와 일치하는 가장 넓은 범위는 기원전 100년에서 서기 70년 사이로 여겨진다.[3] 기원전 100년은 그리스어 다니엘 부록에 대한 언급, 특히 아사랴의 기도가 기원전 100년경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한되며, 서기 70년은 저자가 명백히 성전이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가정하고, 성전이 서기 70년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11]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 역사의 세 가지 시기 중 하나를 옹호한다: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100–30년), 초기 로마 시대(기원전 30–20년), 후기 로마 시대(c. 서기 40년).[11]

초기 로마 시대를 지지하는 학자로는 모세 하다스(Moses Hadas), 빅토르 체리코버(Victor Tcherikover), 마탄 오리안이 있다.[7] 그들은 이 작품이 아마도 기원전 25–15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8][9] 이는 이야기가 인구 조사 (''laographia'', 로마인 이전에는 드문 단어)와 관련된 인두세를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며, 로마인들은 기원전 24년에 로마 이집트에서 그러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경솔하게 행동하고 좌절되는 이야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여전히 통치하는 동안 출판하는 것은 매우 대담한 일이며, 기원전 30년에 이집트가 로마에 흡수된 이후의 출판 날짜를 시사한다. 그러면 이 작품은 로마 정책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으로 기능할 수 있다.[8]

후기 로마 시대를 지지하는 학자로는 하인리히 에발트(Heinrich Ewald), 휴고 빌리히(Hugo Willrich), 존 J. 콜린스(John J. Collins)가 있다. 그들은 이 책이 황제 칼리굴라에 대한 논쟁으로 쓰여졌으며, 따라서 서기 4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에는 제2성전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집트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어 있는데, 서기 3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났고 칼리굴라가 서기 39–40년경에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시도하는 등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이 시기에 발생했지만 순서가 바뀌었다. 이 이론에 반대하는 주장은 칼리굴라의 행동이 책에 나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그렇게 가깝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고 칼리굴라처럼 자기를 신격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동은 3 마카베오서와 같이 정부 대신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부터 일어났다. 저자는 성지 모독과 같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킨 1세기 후반의 로마 활동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8][11]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를 선호하는 학자로는 엘리아스 비커만(Elias Bickerman), 휴 앤더슨(Hugh Anderson), 사라 라우프 존슨이 있다.[11] 인구 조사에 대해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인구 조사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 시골 인구에게만 부과되는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지위를 이집트 원주민 (프톨레마이오스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과 동일하게 전락시킬 위협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 설령 ''laographia''가 실제로 로마 인구 조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이는 이 관점에서 볼 때 몇 구절에 대한 사후 출판 수정에 대한 주장일 뿐이다. 이 작품의 나머지는 마카베오기 2서와 같이 저자에게 영감을 준 헬레니즘 유대교 작품의 전통에 딱 들어맞으며, 이 작품은 기원전 100년경에 쓰여졌으므로 마카베오기 3서도 같은 문화적 환경과 시대에 들어맞아야 한다. 더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위협적인 절멸이 극단적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쇠퇴하는 로마 시대에 더 적합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현상 유지를 옹호한다. 그 어조는 주로 긍정적이며, 맹렬한 종말론적 선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12] 심지어 왕실이 그들을 박해할 때에도 저자는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선의와 변함없는 충성을 유지했다"고 기록한다.[10] 유대인들은 결국 왕으로부터 법적 특권을 부여받고 그리스 정부에 대한 만족스러운 충성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기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무관심한 로마 시대의 먼 총독들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11]

4. 1. 저자

이 책의 저자는 헬레니즘 유대교의 일부로서 그리스어로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 저자는 수사적인 구성을 즐겨 사용하고 과장된 문체를 보인다.[4][27] 그의 그리스어는 드물고 시적인 단어를 포함하여 훌륭하고 자연스러우며, 번역본일 가능성은 있지만 히브리 문학에도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4] 책의 주제와 문체는 마카베오기 2서, 아리스테아스 서간, 에스더기와 유사하며, 저자가 이 책들을 읽었음을 시사한다.[5] 마카베오기 2서와 유사하게 저자는 신부와 신랑이 집에서 끌려가는 이야기와 같이 감정과 정서에 호소하려는 그리스적 논증의 "비애적인"(''pathos''의 의미)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9] 저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정의 정치와 의전에 관심이 있고 능숙한 것으로 보인다.[12][6]

정확한 저술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텍스트와 일치하는 가장 넓은 범위는 기원전 100년에서 서기 70년 사이로 여겨진다.[3]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 역사의 세 가지 시기 중 하나를 옹호한다: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100–30년), 초기 로마 시대(기원전 30–20년), 후기 로마 시대(c. 서기 40년).[11]

초기 로마 시대를 지지하는 학자로는 모세 하다스, 빅토르 체리코버, 마탄 오리안이 있다.[7] 그들은 이 작품이 아마도 기원전 25–15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8][9] 이는 이야기가 인구 조사 (''laographia'', 로마인 이전에는 드문 단어)와 관련된 인두세를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며, 로마인들은 기원전 24년에 로마 이집트에서 그러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경솔하게 행동하고 좌절되는 이야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여전히 통치하는 동안 출판하는 것은 매우 대담한 일이며, 기원전 30년에 이집트가 로마에 흡수된 이후의 출판 날짜를 시사한다. 그러면 이 작품은 로마 정책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으로 기능할 수 있다.[8]

후기 로마 시대를 지지하는 학자로는 하인리히 에발트, 휴고 빌리히, 존 J. 콜린스가 있다. 그들은 이 책이 황제 칼리굴라에 대한 논쟁으로 쓰여졌으며, 따라서 서기 4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에는 제2성전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집트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어 있는데, 서기 3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났고 칼리굴라가 서기 39–40년경에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시도하는 등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이 시기에 발생했지만 순서가 바뀌었다. 이 이론에 반대하는 주장은 칼리굴라의 행동이 책에 나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그렇게 가깝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고 칼리굴라처럼 자기를 신격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동은 3 마카베오서와 같이 정부 대신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부터 일어났다. 저자는 성지 모독과 같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킨 1세기 후반의 로마 활동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8][11]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를 선호하는 학자로는 엘리아스 비커만, 휴 앤더슨, 사라 라우프 존슨이 있다.[11] 인구 조사에 대해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인구 조사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 시골 인구에게만 부과되는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지위를 이집트 원주민 (프톨레마이오스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과 동일하게 전락시킬 위협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 설령 ''laographia''가 실제로 로마 인구 조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이는 이 관점에서 볼 때 몇 구절에 대한 사후 출판 수정에 대한 주장일 뿐이다. 이 작품의 나머지는 마카베오기 2서와 같이 저자에게 영감을 준 헬레니즘 유대교 작품의 전통에 딱 들어맞으며, 이 작품은 기원전 100년경에 쓰여졌으므로 마카베오기 3서도 같은 문화적 환경과 시대에 들어맞아야 한다. 더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위협적인 절멸이 극단적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쇠퇴하는 로마 시대에 더 적합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현상 유지를 옹호한다. 그 어조는 주로 긍정적이며, 맹렬한 종말론적 선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12] 심지어 왕실이 그들을 박해할 때에도 저자는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선의와 변함없는 충성을 유지했다"고 기록한다.[10] 유대인들은 결국 왕으로부터 법적 특권을 부여받고 그리스 정부에 대한 만족스러운 충성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기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무관심한 로마 시대의 먼 총독들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11]

4. 2. 저술 시기

마카베오기 제3서의 저자는 헬레니즘 유대교의 일부로서 그리스어로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 저자는 수사적인 구성을 즐겨 사용하고 과장된 문체를 보인다.[4][27] 그의 그리스어는 드물고 시적인 단어를 포함하여 훌륭하고 자연스러우며, 번역본일 가능성은 있지만 히브리 문학에도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4] 책의 주제와 문체는 마카베오기 2서, 아리스테아스 서간, 에스더기와 유사하며, 저자가 이 책들을 읽었음을 시사한다.[5]

정확한 저술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원전 100년에서 서기 70년 사이로 추정된다.[3] 학자들은 이집트 역사의 세 가지 시기, 즉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100–30년), 초기 로마 시대(기원전 30–20년), 후기 로마 시대(c. 서기 40년) 중 하나를 지지한다.[11]

초기 로마 시대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작품이 기원전 25–15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8][9] 이는 이야기가 인구 조사(''laographia'')와 관련된 인두세를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며, 로마인들은 기원전 24년에 로마 이집트에서 그러한 인구 조사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이야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여전히 통치하는 동안 출판하는 것은 매우 대담한 일이며, 기원전 30년에 이집트가 로마에 흡수된 이후를 시사한다.[8]

후기 로마 시대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책이 황제 칼리굴라에 대한 논쟁으로 쓰여졌으며, 따라서 서기 4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에는 제2성전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집트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어 있는데, 서기 3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났고 칼리굴라가 서기 39–40년경에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시도하는 등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이 시기에 발생했지만 순서가 바뀌었다.[8][11]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를 선호하는 학자들은 인구 조사에 대해 프톨레마이오스 인구 조사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 시골 인구에게만 부과되는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지위를 이집트 원주민과 동일하게 전락시킬 위협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12]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현상 유지를 옹호하며, 맹렬한 종말론적 선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 유대인들은 결국 왕으로부터 법적 특권을 부여받고 그리스 정부에 대한 만족스러운 충성으로 돌아간다.[11]

5. 역사성과 신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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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기 제3서의 내용은 전설적인 성격을 띠며 역사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7] 이는 로망스 또는 역사 소설에 더 가까우며, 유딧기그리스 로망스와 유사하다.[17] 이야기 중 이집트의 모든 종이를 차지한 유대인들의 이름이나, 왕이 배교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면허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했다는 내용은 명백한 허구이다.[18] 또한, 기원전 165년경에 쓰여진 다니엘서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여기서는 "남쪽 왕")가 성전을 공격했다는 어떠한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는다.[18] 다니엘은 성전에 대한 위협을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성전을 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8] 다른 고대 자료나 역사서에는 필로파토르 치하에서 그러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19] 독일 역사가 에밀 쉬러는 이 책을 거의 전적으로 허구이며 최악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0][21]

이야기의 많은 요소가 의심스럽지만, 일부 학자들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3마카베오기에 진정한 박해에 대한 기억이 묘사되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 필스콘 (기원전 146–117년)의 통치 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클레오파트라 2세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처형은 술에 취한 코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22] 이것이 3마카베오기 이야기의 역사적 중심일 수 있으며, 저자는 그것을 더 이른 시대로 옮기고 예루살렘과의 비역사적인 연관성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다.[23][24][27]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조차 과장되었을 수 있으며, 독립적인 증거는 없다.[25] 후고 빌리히는 기원전 88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의 박해를 이야기의 근원으로 보았지만, 이는 요르다네스의 의심스러운 해석에 근거한다.[25] 모세 하다스는 로마 시대의 시민권 상실에 대한 반대를 묘사한 것으로, 이집트 유대인 공동체가 겪었던 어려움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19] 또 다른 가능성은 2마카베오기에 기록된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에 대한 이집트 작가의 반응일 수 있다.[25]

라피아 전투의 재현은 폴리비오스의 버전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평가된다.[9]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점에서 쓰여진 기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성전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2마카베오기의 헬리오도루스에 관한 이야기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그 시대에 코엘레-시리아의 마을을 방문하여 지역 사원에 제물을 바쳤지만, 예루살렘 방문 여부는 불확실하다.[9]

3마카베오기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가능한 해석은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혼합주의 종교를 만들어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통합하려 했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로서 시민권을 대가로 디오니소스 신비주의에 입문시켜 징집된 비그리스인들의 충성을 확보하려 했을 것이며(3:21), 일부 유대인들은 순종했지만 대부분은 거부했다(2:31–33, 3:22–23). 왕은 분노하여 시민인 유대인들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위협했고, 유대인들은 뇌물을 시도했다(2:32). 천사들에 의해 저지된 히포드롬에서의 대량 처형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방의 일부 유대인들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3:12–30), 결국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17]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며, 다른 그리스 저술은 신비주의 종교로서의 디오니소스 숭배가 제한적이었다고 나타낸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숭배를 개방했다면, 그것은 이례적인 행위였을 것이다.[9]

아돌프 뷔클러는 이 책이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집트 파이윰 지역에서 유대인 박해를 묘사한다고 주장했다. 제5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승리하면서 기원전 200년에 코엘레-시리아의 유대인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충성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 유대인들이 의심을 받아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21]

5. 1. 역사적 사실과의 불일치

마카베오기 제3서의 내용은 전설적인 성격을 띠며 역사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7] 이는 로망스 또는 역사 소설에 더 가까우며, 유딧기그리스 로망스와 유사하다.[17] 이야기 중 이집트의 모든 종이를 차지한 유대인들의 이름이나, 왕이 배교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면허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했다는 내용은 명백한 허구이다.[18] 또한, 기원전 165년경에 쓰여진 다니엘서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여기서는 "남쪽 왕")가 성전을 공격했다는 어떠한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는다.[18] 다니엘은 성전에 대한 위협을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성전을 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8] 다른 고대 자료나 역사서에는 필로파토르 치하에서 그러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19] 독일 역사가 에밀 쉬러는 이 책을 거의 전적으로 허구이며 최악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0][21]

이야기의 많은 요소가 의심스럽지만, 일부 학자들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3마카베오기에 진정한 박해에 대한 기억이 묘사되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 필스콘 (기원전 146–117년)의 통치 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클레오파트라 2세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처형은 술에 취한 코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22] 이것이 3마카베오기 이야기의 역사적 중심일 수 있으며, 저자는 그것을 더 이른 시대로 옮기고 예루살렘과의 비역사적인 연관성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다.[23][24][27]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조차 과장되었을 수 있으며, 독립적인 증거는 없다.[25] 후고 빌리히는 기원전 88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의 박해를 이야기의 근원으로 보았지만, 이는 요르다네스의 의심스러운 해석에 근거한다.[25] 모세 하다스는 로마 시대의 시민권 상실에 대한 반대를 묘사한 것으로, 이집트 유대인 공동체가 겪었던 어려움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19] 또 다른 가능성은 2마카베오기에 기록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에 대한 이집트 작가의 반응일 수 있다.[25]

라피아 전투의 재현은 폴리비오스의 버전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평가된다.[9]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점에서 쓰여진 기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성전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2마카베오기의 헬리오도루스에 관한 이야기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그 시대에 코엘레-시리아의 마을을 방문하여 지역 사원에 제물을 바쳤지만, 예루살렘 방문 여부는 불확실하다.[9]

3마카베오기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가능한 해석은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혼합주의 종교를 만들어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통합하려 했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로서 시민권을 대가로 디오니소스 신비주의에 입문시켜 징집된 비그리스인들의 충성을 확보하려 했을 것이며(3:21), 일부 유대인들은 순종했지만 대부분은 거부했다(2:31–33, 3:22–23). 왕은 분노하여 시민인 유대인들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위협했고, 유대인들은 뇌물을 시도했다(2:32). 천사들에 의해 저지된 히포드롬에서의 대량 처형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방의 일부 유대인들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3:12–30), 결국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17]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며, 다른 그리스 저술은 신비주의 종교로서의 디오니소스 숭배가 제한적이었다고 나타낸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숭배를 개방했다면, 그것은 이례적인 행위였을 것이다.[9]

아돌프 뷔클러는 이 책이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집트 파이윰 지역에서 유대인 박해를 묘사한다고 주장했다. 제5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승리하면서 기원전 200년에 코엘레-시리아의 유대인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충성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 유대인들이 의심을 받아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21]

5. 2. 문학적 윤색과 과장

3마카베오기의 내용은 전설적인 성격을 띠며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17] 이는 로망스 또는 역사 소설에 더 가깝다.[17] 유딧기 또는 그리스 로망스와 유사하다.[17] 이야기에 나오는 몇몇 부분은 허구이다.[18] 예를 들어, 이집트의 모든 종이를 차지한 유대인들의 이름이나, 왕이 배교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면허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했다는 내용은 명백한 허구이다.[18]

일반적으로 기원전 16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다니엘서는, 저자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한 11장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여기서는 "남쪽 왕")가 성전을 공격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18] 다니엘은 성전에 대한 위협을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성전을 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8] 다른 고대 자료나 역사서에는 필로파토르 치하에서 그러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19] 독일 역사가 에밀 쉬러는 이 책을 거의 전적으로 허구이며 최악의 작품이라고 불렀다.[20][21]

이야기의 많은 요소가 의심스럽지만, 많은 학자들은 왜곡되었을지라도 3마카베오기에 진정한 박해에 대한 기억이 묘사되어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22] 요세푸스는 많은 (물론 전부가 아닌) 유대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 8세 필스콘 (기원전 146–117년)의 통치 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경쟁자 클레오파트라 2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처형은 실제로 술에 취한 코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22] 이것이 3마카베오기 이야기의 역사적 중심일 수 있으며, 이 이론이 맞다면 저자는 그것을 더 이른 시대로 옮기고 예루살렘과의 비역사적인 연관성을 추가했을 수 있다.[23][24][27]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조차도 크게 과장되었을 수 있다.[25] 그러한 박해에 대한 독립적인 증거는 없으므로, 그는 3마카베오기와 동일한 전설에서 단순히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25] 후고 빌리히는 이 이야기의 근원이 기원전 88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의 박해라고 주장했지만, 요르다네스가 수세기 후에 쓴 의심스러운 해석에 근거했다.[25] 이 이론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5]

모세 하다스는 이 책이 로마 시대의 시민권 상실에 대해 묘사하고 반대하는 것일 수 있으며, 비교적 온화한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들이 몰락하고 로마 통치로 전환된 후 이집트 유대인 공동체가 겪었던 어려움을 묘사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제안한다.[19] 저작 연대에 대한 추측에서 설명했듯이, 이 책은 실제로 동시대 로마 박해를 묘사했지만 설정을 더 이른 시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19]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작품에 영감을 준 박해가 가장 잘 입증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2마카베오기에 기록된 유대 지역의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였고, 이집트 작가는 "만약 이런 일이 여기에서 일어났다면?"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25]

책의 시작 부분인 라피아 전투의 재현은, 폴리비오스의 버전만큼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대략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9] 이는 필로파토르의 키프로스 총독인 메갈로폴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사라진 역사에 기초했을 수 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점에서 쓰여진 기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성전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2마카베오기의 헬리오도루스에 관한 이야기에 기초한 것으로 여겨진다.[9]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그 시대에 코엘레-시리아의 마을을 방문하여 지역 사원에 제물을 바쳤지만, 그러한 방문과 관련된 논란에 대한 다른 증거는 없으며, 그 방문이 예루살렘까지 확장되었는지조차 불확실하다.[9]

3마카베오기의 역사적 정확성을 인정하는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는 많은 그리스인보다 더 개방적이어서, 특히 토착 이집트인과 같은 비그리스인을 군대와 행정에 통합하려 했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사람, 즉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통합하기 위한 혼합주의 종교를 만들어야 했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로서, 아마도 그는 시민권을 대가로 디오니소스 신비주의에 입문시켜 징집된 비그리스인들의 충성을 확보하려 했을 것이다(3:21). 일부 유대인들은 순종했지만 대부분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2:31–33, 3:22–23). 왕은 분노하여 이미 시민인 유대인들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위협했는데, 이는 수세기 동안 기억될 잠재적인 재앙이었다. 유대인들은 뇌물을 시도했다(2:32). 천사들에 의해 저지된 히포드롬에서의 대량 처형 시도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방의 일부 유대인들은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3:12–30), 결국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17]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특히 다른 그리스 저술은 신비주의 종교로서의 디오니소스 숭배가 모든 사람에게 널리 개방되기보다는 입장을 제한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사람들이 입문해 달라고 청원해야 하는 지위의 상징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숭배를 개방했다면, 그것은 이례적인 행위였을 것이다.[9]

이 책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은 1899년 아돌프 뷔클러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이 책이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집트의 파이윰 지역에서 유대인 박해를 묘사한다고 주장했다. 제5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승리한 결과로, 기원전 200년에 코엘레-시리아의 유대인들이 갑자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충성을 바꾸었다. 뷔클러는 예루살렘 성전이 라이벌인 셀레우코스에게 복종하는 대제사장에 의해 이끌리면서 이집트 유대인들이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21]

5. 3. 역사적 배경의 가능성

마카베오기 제3서의 내용은 전설적인 성격을 띠며 역사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7] 이 책은 로망스 또는 역사 소설에 더 가깝고, 유딧기그리스 로망스와 유사하다.[17] 이야기의 몇몇 부분은 명백히 허구이며,[18] 다니엘서에서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성전을 공격했다는 언급이 없다.[18] 다른 고대 자료나 역사서에도 필로파토르 치하의 박해 주장은 기록되지 않았다.[19] 독일 역사가 에밀 쉬러는 이 책을 거의 전적으로 허구이며 최악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0][21]

하지만 이야기의 많은 요소가 의심스럽지만, 많은 학자들은 3마카베오기에 왜곡되었을지라도 진정한 박해에 대한 기억이 묘사되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 필스콘 (기원전 146–117년) 통치 하에 많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처형은 술에 취한 코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22] 이것이 3마카베오기 이야기의 역사적 중심일 수 있으며, 이 이론이 맞다면 저자는 그것을 더 이른 시대로 옮기고 예루살렘과의 비역사적인 연관성을 추가했을 것이다.[23][24][27]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조차 과장되었을 수 있으며, 독립적인 증거는 없다.[25] 후고 빌리히는 기원전 88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의 박해가 이 이야기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수용되지 않았다.[25] 모세 하다스는 로마 시대의 시민권 상실에 대한 묘사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19] 또 다른 가능성은 2마카베오기에 기록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25]

책의 시작 부분인 라피아 전투의 재현은 폴리비오스의 버전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9]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점에서 쓰여진 기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성전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2마카베오기의 헬리오도루스 이야기에 기초한 것으로 여겨진다.[9] 필로파토르가 실제로 코엘레-시리아의 마을을 방문하여 지역 사원에 제물을 바쳤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지만, 논란에 대한 다른 증거는 없으며, 예루살렘 방문 여부도 불확실하다.[9]

3마카베오기의 역사적 정확성을 인정하는 가능한 해석은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혼합주의 종교를 만들어 비그리스인을 군대와 행정에 통합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디오니소스 신비주의에 입문시켜 징집된 비그리스인들의 충성을 확보하려 했을 것이며(3:21), 일부 유대인들은 순종했지만 대부분은 거부했다(2:31–33, 3:22–23). 왕은 분노하여 유대인들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며, 다른 그리스 저술은 신비주의 종교로서의 디오니소스 숭배가 제한적이었다고 나타낸다.[9]

아돌프 뷔클러는 이 책이 파이윰 지역에서 유대인 박해를 묘사한다고 주장했다. 제5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승리한 결과, 기원전 200년에 코엘레-시리아의 유대인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충성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 유대인들이 의심을 받게 되어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21]

6. 신학적 주제

마카베오기 제2서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 책의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과 악을 묘사하면서도, 이 책은 의로운 자들의 부활이나 악당에 대한 미래의 응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두 천사가 기도를 듣고 나타나지만, 저자는 특별히 그 천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썼는데, 이는 하나님보다 천사에게 권능이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꺼리거나 상반된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다.[26][27][3] 저자는 마카베오기 제2서가 포함하고 있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리스 사상과 같이,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영향에 반대하며 유대교의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었을 수 있다.

이 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이집트 유대인들이 기념하는 푸림 축제와 유사한 축제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축제의 기원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졌고, 저자는 기존의 박해 이야기를 확장하여 하나님이 이집트의 유대인들을 구원하신 이야기가 되었다.[2]

저자는 기도의 힘을 높이 평가한다. 이 책은 유대인들이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자주 묘사한다. 시몬, 유대인 공동체, 그리고 엘르아자르 모두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러한 기도는 직접적으로 응답받는다.[3]

저자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유대교 배교를 날카롭게 비난한다. 최초 등록 당시 신앙을 버린 300명의 유대인들이 독실한 유대인들에게 살해된다. 이 이야기는 300명이 살해되는 에스더 9장에 부분적으로 근거할 수 있지만, 거기서는 유대인들을 파멸시키려 했던 이방인들이 적대자였던 반면, 여기서는 단지 유대인 민간인일 뿐이며, 위기가 이미 지난 후였다.[9]

6. 1.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저자는 기도의 힘을 높이 평가한다. 이 책은 유대인들이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자주 묘사한다. 시몬, 유대인 공동체, 그리고 엘르아자르 모두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러한 기도는 직접적으로 응답받는다.[3]

마카베오기 제2서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 책의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과 악을 묘사하면서도, 이 책은 의로운 자들의 부활이나 악당에 대한 미래의 응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두 천사가 기도를 듣고 나타나지만, 저자는 특별히 그 천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썼는데, 이는 하나님보다 천사에게 권능이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꺼리거나 상반된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다. 저자는 마카베오기 제2서가 포함하고 있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리스 사상과 같이,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영향에 반대하며 유대교의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었을 수 있다.[26][27]

6. 2. 유대교 신앙의 수호

저자는 마카베오기 제2서의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과 악을 묘사하면서도, 의로운 자들의 부활이나 악당에 대한 미래의 응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두 천사가 기도를 듣고 나타나지만, 저자는 특별히 그 천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썼는데, 이는 하나님보다 천사에게 권능이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꺼리거나 상반된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다.[26][27][3] 저자는 마카베오기 제2서가 포함하고 있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리스 사상과 같이,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영향에 반대하며 유대교의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었을 수 있다.

이 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이집트 유대인들이 기념하는 푸림 축제와 유사한 축제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축제의 기원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졌고, 저자는 기존의 박해 이야기를 확장하여 하나님이 이집트의 유대인들을 구원하신 이야기가 되었다.[2]

저자는 기도의 힘을 높이 평가한다. 이 책은 유대인들이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자주 묘사한다. 시몬, 유대인 공동체, 그리고 엘르아자르 모두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러한 기도는 직접적으로 응답받는다.[3]

저자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유대교 배교를 날카롭게 비난한다. 최초 등록 당시 신앙을 버린 300명의 유대인들이 독실한 유대인들에게 살해된다. 이 이야기는 300명이 살해되는 에스더 9장에 부분적으로 근거할 수 있지만, 거기서는 유대인들을 파멸시키려 했던 이방인들이 적대자였던 반면, 여기서는 단지 유대인 민간인일 뿐이며, 위기가 이미 지난 후였다.[9]

6. 3. 배교에 대한 경고

저자는 마카베오기 제2서의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의로운 자들의 부활이나 악당에 대한 미래의 응보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두 천사가 기도를 듣고 나타나지만, 특별히 그 천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26][27][3] 이는 하나님보다 천사에게 권능이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꺼리거나 상반된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다. 마카베오기 제2서가 포함하고 있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리스 사상과 같이,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영향에 반대하며 유대교의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으로 해석된다.[26][27][3]

기도의 힘을 높이 평가하여, 유대인들이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자주 묘사한다. 시몬, 유대인 공동체, 그리고 엘르아자르 모두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러한 기도는 직접적으로 응답받는다.[3]

유대교 배교를 날카롭게 비난하며, 최초 등록 당시 신앙을 버린 300명의 유대인들이 독실한 유대인들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이야기는 300명이 살해되는 에스더 9장에 부분적으로 근거할 수 있지만, 에스더에서는 유대인들을 파멸시키려 했던 이방인들이 적대자였던 반면, 본서에서는 단지 유대인 민간인일 뿐이며, 위기가 이미 지난 후였다는 차이점이 있다.[9]

7. 영향 및 의의

3 마카베오기는 고대 시대의 유대인 작가들에게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심지어 그리스어로 글을 쓴 사람들조차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으로 번역되지 않았고, 따라서 서방 교회는 그것을 제2경전의 일원으로조차 포함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책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의 성경에 보존되었지만, 매우 드물게 언급되거나 암시될 뿐이다.[28][3] 테오도레토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3 마카베오기를 간략하게 요약했지만, 이는 드문 예외이며, 이 작품은 기독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12] 3 마카베오기는 동방 정교회와 일부 오리엔트 정교회, 즉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그리고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제2경전에 포함되어 있다. 692년 동방 교회의 트룰로 공의회에서 승인된 사도 규례는 1, 2, 3 마카베오기가 제2경전임을 확인했지만, 이 공의회는 서방 교회의 교황 세르기우스 1세에 의해 거부되었다.[29]

7. 1. 기독교 전통에서의 수용

칠십인역에 포함되어 보존된 3 마카베오기는 후대 유대인들이 사용한 타나크 (히브리어 성경)의 마소라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이 칠십인역을 기독교 구약의 기초로 보존하여 분실되지 않았다.[28] 그러나 칠십인역 초기 필사본의 책 목록은 아직 표준화되지 않았다. 바티칸 사본에는 마카베오기가 없고, 시나이 사본에는 1 마카베오기와 4 마카베오기만 포함되어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만 1, 2, 3, 4 마카베오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28]

3 마카베오기는 고대 시대의 유대인 작가들에게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라틴어 불가타 성경으로 번역되지 않아 서방 교회는 제2경전으로조차 포함하지 않았다.[28][3] 이 책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의 성경에 보존되었지만, 테오도레토스가 자신의 저술에서 3 마카베오기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드물게 언급되거나 암시될 뿐이다.[3][12] 3 마카베오기는 동방 정교회와 일부 오리엔트 정교회, 즉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제2경전에 포함되어 있다. 692년 동방 교회의 트룰로 공의회에서 승인된 사도 규례는 1, 2, 3 마카베오기가 제2경전임을 확인했지만, 이 공의회는 서방 교회의 교황 세르기우스 1세에 의해 거부되었다.[29]

7. 2. 현대적 의의: 종교의 자유와 소수 집단 보호

3 마카베오기는 고대 유대인 작가들에게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리스어로 글을 쓴 작가들조차 이 책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으로 번역되지 않아 서방 교회에서는 제2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에 보존되었지만, 매우 드물게 언급되거나 암시될 뿐이었다.[28][3] 테오도레토스가 자신의 저술에서 3 마카베오기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며, 이 작품은 기독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12]

3 마카베오기는 동방 정교회와 일부 오리엔트 정교회(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제2경전에 포함되어 있다. 692년 동방 교회의 트룰로 공의회에서 승인된 사도 규례는 1, 2, 3 마카베오기가 제2경전임을 확인했지만, 이 공의회는 서방 교회의 교황 세르기우스 1세에 의해 거부되었다.[29]

8. 한국적 관점

8. 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8. 2. 진보/보수 진영에 따른 관점

참조

[1] 서적 1953
[2] 간행물 Third Book of Maccabees Macmillan Reference USA 2007
[3]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the Apocrypha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4] 서적 1953
[5] 서적 1953
[6] 서적 2004
[7] 논문 The Date of III Maccabees: Additional Support for the Roman Period https://scriptaclass[...] 2017-06
[8] 서적 1953
[9] 서적 Studies in History Magnes Press 1961
[10] 성경 3 Maccabees 3:3
[11] 서적 2004
[12] 서적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Doubleday 1985
[13] 서적 Septuaginta: Vetus Testamentum Graece. Maccabaeorum liber III Vandenhoeck & Ruprecht 1980
[14] 서적 1953
[15] 서적 1953
[16] 서적 The Books of the Maccabees: History, Theology, Ideology Brill 2007
[17] 서적 1953
[18] 서적 1953
[19] 서적 1953
[20] 서적 A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https://books.google[...] Scribner 2023-04-16
[21] 서적 Die Tobiaden und die Oniaden im II. Makkabäerbuche und in der verwandten jüdisch-hellenistischen Litteratur https://books.google[...] null 1899
[22] 위키문헌 Against Apion: Book II null 1879
[23] 서적 1953
[24] Jewish Encyclopedia Books of Maccabees https://jewishencycl[...]
[25] 서적 2004
[26] 서적 1953
[27] 서적 The Uncanonical Jewish Books https://archive.org/[...] The Macmillan Company 1918
[28] 서적 1953
[29] 서적 The Apostolic Canons. Canon 85 http://www.newadvent[...] newadvent 2016-10-12
[30] 서적 Understanding the Bible Mayfield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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