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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카 제4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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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카 제4군단은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창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로마 군단이다. 디라키움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하여 카이사르의 승리에 기여했고, 이후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며 '마케도니카'라는 명칭을 얻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칸타브리아 전쟁을 치르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이동했으며, 이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마인츠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69년 비텔리우스를 지지하여 오토 황제 군대와 싸웠으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해산되었고,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로 재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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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카 제4군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군사 정보
라인자베른에서 발견된 "LEG IV MAC" 벽돌 스탬프
부대 명칭마케도니카 제4군단
원래 명칭Legio IV Macedonica (Legio Quarta Macedonica)
복무 기간기원전 48년 ~ 4세기
소속 국가로마 공화국(말년) 및 로마 제국

2. 역사

제4군단 마케도니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48년 이탈리아에서 창설한 로마 군단이다.[2] 창설 초기에는 파르살루스 전투 등 카이사르의 내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며 '마케도니카'라는 별칭을 얻었다.

카이사르 암살 후 이어진 내전에서는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서 필리피 전투, 악티움 해전 등에 참전했다.[2][3][5] 로마 제국 수립 후에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로 이동하여 칸타브리아 전쟁 진압에 기여했으며, 서기 43년까지 히스파니아에 주둔했다.[5][3] 스페인 로그로뇨에서 발견된 Caius Valerius Donatus|카이우스 발레리우스 도나투스la라는 군단병의 비문은 이 시기 군단의 활동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서기 43년경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마인츠로 이동하여 라인 강 방어 임무를 맡았다.[3][6] 사황제의 해(서기 69년)에는 비텔리우스를 지지했으나,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패배했다.[3] 서기 70년 바타비아 반란 진압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비텔리우스를 지지했던 전력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군단은 이후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편성되었다.[3][7][8] 군단의 상세한 역사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창설과 카이사르 시대 (기원전 48년 ~ 기원전 44년)

로마 공화정의 군대 해산 명령에 반발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자, 폼페이우스, 카토 (소) 등 원로원의 공화파그리스로 후퇴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추가 병력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기원전 48년 이탈리아에서 제4군단을 창설했을 가능성이 높다.[2]

제4군단은 창설 직후 디라키움 전투에서 첫 실전을 경험했다.[2] 이후 파르살루스 전투에도 참전하여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 이후 제4군단은 마케도니아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마케도니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제4군단은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원정 계획은 취소되었다.[2]

2. 2.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내전 (기원전 44년 ~ 기원전 3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기원전 44년)된 후, 로마는 다시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제4군단은 본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이탈리아로 이동되었으나, 분쟁이 발발하자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2]

기원전 43년, 군단은 무티나 전투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와 격돌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3][4] 이듬해인 기원전 42년에는 필리피 전투에 참전하여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싸웠다. 이 전투에서 군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살아남아 재건될 수 있었다.[5] 이 전투에서의 활약 또는 재건을 기념하여 군단이 '마케도니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5] 필리피 전투 이후, 군단은 옥타비아누스를 따라 이탈리아로 복귀했다.[5]

기원전 41년 겨울, 제4군단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페루자(Perusia|페루시아la)로 피신했을 때 이를 포위 공격한 페루자 포위전에도 참여했다.[3] 내전의 마지막 단계인 기원전 31년에는 악티움 해전에 참전하여, 옥타비아누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3]

2. 3. 히스파니아 주둔 시기 (기원전 30년 ~ 서기 43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후인 기원전 30년, 제4군단은 칸타브리아 전쟁을 치르기 위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 있는 율리오브리가로 이동했다.[5] 제4군단은 아우구스투스의 지휘 아래 칸타브리아인의 반란 진압에 참여했으며, 기원전 13년에 반란이 최종적으로 진압된 이후에도 히스파니아에 계속 주둔했다. 이들의 주둔은 전쟁 이후 히스파니아 지역을 안정시키고 로마 제국의 속주로서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일부 병사들은 히스파니아에서 공무원으로 복무하기도 했다.[3] 제4군단은 서기 43년까지 히스파니아에 주둔하다가 고지 게르마니아로 이동했다.

2. 4. 게르마니아 주둔 시기 (서기 43년 ~ 70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서기 43년경으로 추정) 혹은 칼리굴라 황제가 카티와 전쟁을 벌이던 서기 39년에[3][6], 군단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마인츠(모군티아쿰)로 이동하여 기존에 주둔하던 제14 쌍둥이 군단을 대체했다.[3] 마인츠에서 제4 마케도니카 군단은 새로 창설된 제22 원시군단과 요새를 공유했는데, 제4군단이 더 명예로운 우측을, 제22군단이 좌측을 점유했다.[3] 이들은 함께 게르만 부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네로 황제가 자살한 후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져 네 명의 황제가 난립했던 사황제의 해(서기 69년) 동안, 제4군단은 당시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를 가장 먼저 지지했다.[3] 군단 병력의 일부는 비텔리우스를 따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진격했으며, 크레모나와 베드리아쿰에서 경쟁자였던 오토 황제의 군대와 싸워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일부 병사들은 포상을 받기도 했다.[3]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결국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가 새로운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5]

서기 70년,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4군단은 주둔지인 마인츠를 방어하고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의 지휘 아래 반란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이는 로마 군단으로서 당연한 임무 수행이었으나, 과거 내전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했던 전력 때문에 새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제4 마케도니카 군단은 해체되었고, 군단의 병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군단이 창설되었다.

2. 5. 바타비족 반란과 해체 (70년)

네로 황제 사후 혼란기에 비텔리우스를 지지했던 제4군단 마케도니카는 70년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일으킨 바타비족 반란에 직면했다.[3][7][8] 반란 기간 동안 군단은 주둔지인 모군티아쿰(마인츠)을 카티족, 우시페테스족, 마티아치족 같은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3][7][8]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의 지휘 아래 반란 세력과 싸웠다.

이러한 군단의 활약은 로마 군대로서 마땅한 행동이었으나, 과거 내전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했던 전력 때문에 새로운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완전한 신임을 얻지는 못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는 제4군단 마케도니카를 해체하고,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군단으로 재편성하는 결정을 내렸다.[3][7][8] 이 새로운 군단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숭배했던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사자 문양이 새로운 상징으로 부여되었다.[5]

3. 주요 인물

마케도니카 제4군단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문서를 참고한다.

3. 1.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도나투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도나투스(Caius Valerius Donatuslat)는 마케도니카 제4군단 소속의 고대 로마 병사였다. 그의 존재는 스페인로그로뇨에서 발견된 비문을 통해 알려졌다. 이 비문에는 그의 이름, 소속, 나이 등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가이 필리우스 볼티니아 도나투스, 마케도니카 제4군단 병사, 39세, 여기에 (...)" (Caius Valerius Cai filius Voltinia Donatus miles legionis IIII Macedonicae annorum XXXIX hic (...)lat). (출처: Hisp. Epi. 14626)

3. 2. 루키우스 블라티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마케도니카 제4군단의 백인대장을 역임했다.[11]

3. 3. 루키우스 마르티우스 마케르

마케도니카 제4군단의 군단장을 지냈다.[12] 그러나 그가 언제 이 직책을 맡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12]

4. 명칭과 상징

마케도니카 제4군단은 원래 '마케도니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후 군단이 재편성되면서 '플라비아 펠릭스 제4군단'(IV Flavia Felixla)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사자를 새로운 상징으로 부여받았다.[3][7][8] 이 사자 상징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숭배했던 헤라클레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군단의 명칭과 상징 변경에 대한 자세한 배경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4. 1. 플라비아 펠릭스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에서 바타비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제4 마케도니카 군단은 게르만 부족인 카티족, 우시페테스족, 마티아치족의 공격으로부터 마인츠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군단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새로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 군단을 다소 의심스럽게 여겼다. 결국 군단은 일종의 처벌로서 '제4 플라비아 펠릭스'(IV Flavia Felixl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편성되었고, 새로운 상징인 사자를 부여받았다.[3][7][8] 이 사자 상징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특별히 숭배했던 신인 헤라클레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

5. 주둔지

제4군단 마케도니카는 창설 이후 로마 제국의 여러 핵심 지역에 주둔하며 활동했다. 초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창설되어 카이사르의 내전 등에 참여했으며, 이후 마케도니아 속주에 배치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로 이동하여 칸타브리아 전쟁을 치렀고, 스페인 로그로뇨에서는 이 시기 군단 병사였던 카이우스 발레리우스 도나투스(Caius Valerius Donatusla)의 비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부터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마인츠(모군티아쿰)로 주둔지를 옮겨 라인강 국경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5. 1. 이탈리아

이 군단은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창설했을 가능성이 있다.[2] 창설 직후 디라키움 전투에서 첫 실전을 치렀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끝난 뒤에는 마케도니아 속주에 주둔했다. 본래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원정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 사이의 내전에도 참전했다. 분쟁이 시작되기 전 안토니우스가 군단을 이탈리아로 이동시켰지만, 군단은 아우구스투스의 편에 섰다.[2] 무티나 전투에서는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싸우다 큰 손실을 입었다.[3][4]

기원전 42년에는 필리피 전투에서 싸웠고, 전투 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왔다.[5] 필리피 전투에서 군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나,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이때 '마케도니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5] 기원전 41년 겨울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농성하던 페루자 포위전에도 참여했다.[3] 또한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에도 참전하였다.[3]

5. 2. 마케도니아

카이사르가 사망한 후, 군단은 마케도니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본래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카이사르의 암살로 인해 원정은 취소되었다.[2] 이후 군단은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당시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내전이 발발하기 전, 군단은 안토니우스의 명령으로 이탈리아로 이동했지만,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편에 섰다.[2] 기원전 43년 무티나 전투에서는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싸웠으나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3][4]

기원전 42년, 제4군단은 필리피 전투에 참전하여 공화정파에 맞서 싸웠고, 전투 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복귀했다.[5] 이 전투에서 군단은 거의 전멸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지만, 살아남아 재건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기려 '마케도니카'라는 별칭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5] 다른 기록에 따르면,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에 주둔하게 되면서 '''마케도니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필리피 전투 이후에도 군단은 아우구스투스 휘하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기원전 41년 겨울에는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농성하던 페루자 포위전에도 참여했다.[3] 또한 기원전 31년에는 악티움 해전에도 참전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3]

5. 3.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제4군단은 필리피 전투악티움 해전에 참전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를 칭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에 제4군단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율리오브리가로 파견하여 칸타브리아 전쟁에 참여시켰다.[5] 이 전쟁은 칸타브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며 기원전 13년에 종결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제4군단은 히스파니아에 계속 주둔했으며, 일부 병사들은 공무원으로 복무하기도 했다.[3] 이들의 주둔은 히스파니아가 로마 제국의 속주로서 안정적으로 지배되는 데 기여했다. 스페인 로그로뇨에서는 제4군단 소속 병사였던 Caius Valerius Donatus|카이우스 발레리우스 도나투스la의 비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43년에는 제4군단이 고지 게르마니아로 이동했다. 이는 선임 부대였던 제14군단 게미나가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 후임을 맡게 된 것이다. 제4군단은 모군티아쿰에서 제22군단 프리미게니아와 함께 주둔했다.

5. 4.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마인츠)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 혹은 이르면 칼리굴라 황제가 게르만족 카티와 전쟁을 벌였던 서기 39년에 군단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마인츠(모군티아쿰)로 이전되어, 기존에 주둔하던 제14 쌍둥이 군단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3][6] 일부 학자들은 이전 시기를 서기 41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3] 마인츠에서 제4 마케도니카 군단은 새로 창설된 제22 원시군단과 요새를 함께 사용했는데, 제4군단이 더 명예로운 위치인 우측에 주둔하고 신설 부대인 제22군단은 좌측을 점유했다.[3]

네로 황제가 자살한 후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져 네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상황(네 명의 황제의 해)이 벌어지자, 제4군단은 당시 고지 게르마니아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를 지지했다. 이들은 비텔리우스를 도와 경쟁자였던 오토 황제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결국 비텔리우스는 살해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최종 승자가 되어 새로운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

70년,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주도한 바타비아 반란이 일어나자, 제4군단은 주둔지인 마인츠를 방어하고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의 지휘 아래 반란군과 싸웠다. 제4군단은 로마 군단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수행했지만, 과거 내전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했던 전력 때문에 새로운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제4 마케도니카 군단은 해체되었고, 그 병력들을 기반으로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군단이 창설되었다.

참조

[1] 서적 Legions and Veterans: Roman Army Papers 1971–2000
[2] 서적 Legio https://books.google[...] Lulu.com 2015-12-16
[3] 웹사이트 Legio IIII Macedonica – Livius https://www.livius.o[...] 2020-08-04
[4] 서적 Dio's Rome
[5] 서적 Legions of Rome https://books.google[...] Quercus 2013-09-03
[6] 서적 Cornelii Taciti historiarum libri qui supersunt: The histories of Tacitus, with introduction, notes, and an index Macmillan and Company
[7] 서적 The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UP Oxford
[8] 서적 Handbook to Roman Legionary Fortresses
[9] 서적 Dio's Rome
[10] 서적 Annals
[11] 서적 Arms and Armour of the Imperial Roman Soldier: From Marius to Commodus, 112 BC–AD 192 Pen & Sword Books
[12] 서적 Birthday of the Eagle: The Second Augustan Legion and the Roman Military Machine https://books.google[...] National Museum Wales 2002
[13] 서적 Legions and Veterans: Roman Army Papers 1971-2000
[14] 웹사이트 Empotrado en la Legio Nona. http://www.muyintere[...] 200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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