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낀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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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낀찌는 막 왕조의 인물로, 당안왕에 봉해졌으며 1592년 후 레 왕조의 찐뚱에게 막 왕조가 멸망한 후 황제를 자칭하며 저항했다. 1564년 간통으로 인해 병권을 빼앗기고 폐위되었으며, 막 왕조가 멸망한 후 동조 지역에서 자립하여 청림을 근거지로 삼고 바오딘으로 개원했으나, 1593년 찐뚱에게 패배하여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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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낀찌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막 낀찌 (Mạc Kính Chỉ)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통치 | |
재위 기간 | 1592년 – 1593년 |
이전 통치자 | 막 머우 헙 |
다음 통치자 | 막 낀 꿍 |
연호 | 바오 딘 (Bảo Định, 寶定, 1592년 – 1593년) 캉 흐우 (Khang Hựu, 康佑, 1593년 – 1593년) |
생애 | |
출생 | 알 수 없음 |
사망 | 1593년 |
아버지 | 막 낀 디엔 |
왕조 | |
왕조 | 막 왕조 |
2. 생애
막낀찌는 당안왕(唐安王) 또는 단웅왕(端雄王)으로 불렸다.[1]
2. 1. 초기 생애와 권력 투쟁
1564년, 막낀디엔의 첩과 간통한 것이 드러나 병권을 빼앗기고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막 왕조는 병권을 막낀디엔의 둘째 아들인 단량공(端亮公, 일설에는 당안왕(唐安王)) 막낀푸에게 주었다. 막낀디엔이 죽자 막 왕조는 막낀찌를 웅례공(雄禮公)에 봉했지만, 병권은 위임하지 않았다.[1]1592년, 후 레 왕조의 찐뚱이 막 왕조를 쳐서 탕롱을 함락하고 황제 막머우헙을 죽였다. 이때 막낀찌는 동조(東潮) 지역에 있었는데, 이를 듣고 부(部)를 거느리고 지령현(至靈縣)에 이르러 자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청림(靑林)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지켰고, 바오딘으로 개원했다. 막 왕조의 종실인 막낀푸, 막낀타인(莫敬誠), 막낀턴(莫敬愼) 등이 분분히 귀부해 왔고, 해양(海陽), 고평(高平)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지켰으며, 병력이 7만 명이 된다고 하였다. 막머우헙의 아들 막또안은 인심이 불복하자 막낀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찐뚱이 응우옌텃리(阮七里), 부이반쿠에(裴文奎), 쩐박니엔(陳百年), 응우옌응아(阮峨) 등을 보내 막낀찌를 쳐서 패배시켰다.[1]
1593년, 찐뚱이 호앙딘아이(黃廷愛), 응우옌흐우리에우(阮有僚) 등의 부대를 이끌고 청림을 양면에서 협공하였고, 막낀찌와 막 왕조의 많은 종실 및 대신들을 포로로 잡았다. 찐뚱은 초진(草津) 일대에서 막낀찌를 참수하였고, 탕롱으로 보내 민중에게 이를 보였다. 막 왕조의 유신 막응옥리엔이 막낀찌의 동생 돈후왕(敦厚王) 막낀꿍을 찾아내 문란주(文蘭州)에서 황제로 옹립하였다.[1]
2. 2. 황제 즉위와 저항
1592년, 후 레 왕조의 찐뚱이 막 왕조를 공격하여 탕롱을 함락하고 황제 막머우헙을 죽였다. 이때 막낀찌는 동조(東潮) 지역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지령현(至靈縣)에 이르러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청림(靑林)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지켰고, 바오딘으로 개원했다.[1] 막 왕조의 종실인 막낀푸, 막낀타인(莫敬誠), 막낀턴(莫敬愼) 등은 잇따라 그에게 귀순해 왔고, 해양(海陽), 고평(高平)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지켰으며, 병력이 7만 명이라고 하였다.[1] 막머우헙의 아들 막또안은 인심이 따르지 않자 막낀찌에게 의탁하였다.[1] 찐뚱은 응우옌텃리(阮七里), 부이반쿠에(裴文奎), 쩐박니엔(陳百年), 응우옌응아(阮峨) 등을 보내 막낀찌를 공격하여 패배시켰다.[1]1593년, 찐뚱이 호앙딘아이(黃廷愛), 응우옌흐우리에우(阮有僚) 등의 군대를 이끌고 청림을 양쪽에서 협공하였고, 막낀찌와 막 왕조의 많은 종실 및 대신들을 사로잡았다.[1] 찐뚱은 초진(草津) 일대에서 막낀찌를 참수하였고, 탕롱으로 보내 백성들에게 이를 보였다.[1] 막 왕조의 유신 막응옥리엔이 막낀찌의 동생 돈후왕(敦厚王) 막낀꿍을 찾아내 문란주(文蘭州)에서 황제로 옹립하였다.[1]
2. 3. 최후
1592년, 후 레 왕조의 찐뚱이 막 왕조를 공격하여 탕롱을 함락하고 황제 막머우헙을 죽였다. 이때 막낀찌는 동조(東潮) 지역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부(部)를 거느리고 지령현(至靈縣)에 이르러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청림(靑林)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지켰고, 바오딘으로 개원했다.[1] 막 왕조 종실인 막낀푸, 막낀타인(莫敬誠), 막낀턴(莫敬愼) 등은 잇따라 귀부해 왔고, 해양(海陽), 고평(高平)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지켰으며, 병력이 7만 명이라고 하였다.[1] 막머우헙의 아들 막또안은 인심이 따르지 않자 막낀찌에게 의탁하였다.[1] 찐뚱은 응우옌텃리(阮七里), 부이반쿠에(裴文奎), 쩐박니엔(陳百年), 응우옌응아(阮峨) 등을 보내 막낀찌를 공격하여 패배시켰다.[1]1593년, 찐뚱은 호앙딘아이(黃廷愛), 응우옌흐우리에우(阮有僚) 등의 부대를 이끌고 청림을 양면에서 협공하였고, 막낀찌와 막 왕조의 많은 종실 및 대신들을 사로잡았다.[1] 찐뚱은 초진(草津) 일대에서 막낀찌를 참수하였고, 탕롱으로 보내 백성들에게 이를 보였다.[1] 막 왕조의 유신 막응옥리엔이 막낀찌의 동생 돈후왕(敦厚王) 막낀꿍을 찾아내 문란주(文蘭州)에서 황제로 옹립하였다.[1]
3. 가족
막낀찌의 부인은 1590년에 충의장홍군공(忠義將弘郡公)의 집에 숨었다가 후에 일이 밝혀져서 둘이 피살되었다.[1]
참조
[1]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https://vi.wikisourc[...]
[2]
서적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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