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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의 통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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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말의 통화 문제는 에도 시대 후기 일본에서 발생한 금과 은의 교환 비율 불균형으로 인한 혼란을 다룬다. 당시 일본은 은 약세 현상으로 인해 금이 해외로 유출되었고, 막부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푼 은화를 발행했지만, 이는 금 유출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개항 이후 미국과의 통화 교환 협상에서 1달러를 3푼 은화로 교환하는 불리한 조건으로 합의하면서 금 유출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막부는 만엔 소판을 발행하여 금은 비율을 조정하려 했지만,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며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2. 에도 중기까지

전국 시대 말기 일본에서는 금과 은 모두 생산 및 유통이 증가했지만, 특히 은 생산 증가로 덴쇼 연간에는 금은 교환 가치가 1:10, 게이쵸 연간에는 1:12 정도로 외국에 비해 '은 약세'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은은 중국유럽으로 수출되었고, 반대로 일본으로 금이 유입되는 구조가 전국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성립되었다. 일본에서는 쇄국 실시 후에도 잠시 금과 은의 수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7세기 전반에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금은 교환 가치의 평준화가 진행되어, 일단은 1:13 전후로 수렴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3. 1푼은 발행

덴포 1푼은


에도 막부는 본위 화폐를 금으로 했고, 은(銀)은 ‘조긴’(丁銀)과 ‘마메타긴’(豆板銀)의 형태로 무게로써 화폐 가치를 결정하는 칭량화폐로 유통시켰다. 그러나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 막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은화이면서 액면가가 포함된 표기화폐(계수 화폐)인 1푼은 (1량 = 4푼)이 발행된다. 처음에 발행된 덴포 1푼은(1837년 덴포 8년 발행)의 1량당 무게는 9.2돈에 불과해 덴포 조긴의 내용은 양을 1량을 기준으로 환산한 15.6돈에 훨씬 못 미쳤다. 즉 막부의 재정난을 메우기 위한 재정(개주 이익) 획득 목적의 명목 화폐였다. 덴포 1푼은, 안세이 1푼은 모두 발행 규모는 조긴을 훨씬 뛰어 넘어 은화 유통의 주류가 되었다. 1푼은 발행 이후 시장에서 두 단위 화폐 유통의 대부분을 1푼은이 차지하게 되었다. 막말 개항 시기인 1859년 (안세이 6년)에는 1:4.65의 금은 비가가 되었다. 한편, 여러 외국의 시세는 1:15.3 정도였고, 큰 차이가 있었다.

4. 개국

가나가와 조약 체결 후 1854년 6월 12일(안세이 원년)에 시모다 료젠지에서 일본 화폐와 서양 화폐의 교환 비율 협상이 이루어졌다.[2][3]

막부 측은 일본의 본위 화폐는 금이고, 1푼은은 증명에 의해 통용되는 정위화폐이기 때문에 금 가격을 기준으로 1달러 = 1푼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8.8돈 무게의 20달러 금화는 1돈=은 19돈, 즉 1장당은 167.2돈으로 평가되어 달러당 은 8.36돈이었다.
  • 또한 1달러 은화 즉 양은은 지금(地金)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순은량 6돈 2푼(23.2g)에 대해 26쌍체로 통용되는 은(덴포 조긴)은 16돈쭝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1량의 약 1/4이기 때문에 1 달러 = 1푼이다.
  • 1푼은 명목 화폐이며, 금화 4달러어치의 금을 함유하는 본위 화폐인 엽전의 태환권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금화, 은화는 각각 동종 동량을 가지고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이야기는 결말이 나지 않고 협상은 추후로 넘겨졌다.

1856년10월 7일 (안세이 3년 9월 9일) 시모다 어용소에서 미국 총영사 해리스는 덴포 이치분긴과 1달러 은화의 질량 비교를 통해 1달러 은화의 약 1/3의 중량(질량)인 1분 은화 3매를 가지고 1달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막부는 해리스의 주장에 밀려, 동종 동량 교환의 1달러 = 3분의 교환 비율을 승낙하게 된다.[1]

5. 금 유출

미일 화친 통상 조약의 원안에서는 일본 통화의 수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안대로라면 금 유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 통화와 일본 통화의 교환을 꺼린 막부는 국내에서 외국 통화의 통용을 허용하고, 그 대신 화폐 교환 조건을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해리스는 갑자기 외국 통화를 통용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답변했지만, 막부는 통화 교환을 1년 동안만 허용하고, 대신 일본 통화의 수출을 인정하는 재제안을 했고, 결국 이것이 최종 합의가 되었다.[4]

이 때문에, 외국인 상인이 1달러 은화를 먼저 1분 은 3개로 교환하고, 환전상에게 가져가 4개를 소판으로 환전하여, 국외로 반출하여 지금으로 판매하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으로서의 1냥은 4달러에 해당한다. 따라서 1달러(멕시코 달러) → 3분(1분 은) → 0.75냥(덴포 소판) → 3달러(20달러 금화)와 같이, 환전만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개항 직전인 1859년 6월 25일(안세이 6년 5월 25일)의 포고문에서, 당시 소판으로 가장 많이 유통되던 덴포 소판은 1분 은 5개의 증보 통용으로 정해졌고, 게다가 시장에서는 소판 1개와의 교환에 대해 1분 은 6개를 요구하는 상황이었으며, 9월경에는 8개에서 9개로 치솟았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이러한 환전을 5~6회 반복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3][6] 그 결과, 대량의 금(소판)이 해외로 유출되게 된다. 해리스 자신도 이 환전을 통해 사재를 늘린 것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멕시코 달러 4개1분 은 12개소판 3개멕시코 달러 12개
멕시코 8 레알
환전
덴포 소판
덴포 소판
→ 매각


5. 1. 금 유출의 구체적인 양과 영향

일본에서 유출된 금화의 구체적인 양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부족하여 일치된 견해가 없다. 다케다 하루토가 2009년에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개항 이후 6개월 동안 유출된 액수는 10만 량에서 50만 량에 달한다고 하여 큰 폭을 보인다.[10] 시즈메 마사토는 2016년에 발표한 워킹 페이퍼에서 과거의 연구에서는 대량 유출이라는 견해가 주류였음을 전제하면서도 "최근의 연구에서는 유출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고 하였다.[11]

금 유출이 일본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케다는 1861년에는 진정된 것으로 보아 "금화 유출의 영향은 일시적인 것에 그쳤다"고 평가했다.[10]

6. 안세이 2주은 발행

막부는 금 유출을 막기 위해 1859년 6월 30일(안세이 6년 6월 1일)부터 무역 전용 통화인 안세이 니슈긴(1분 = 4슈)과 덴포 코반의 양의 4/5배로 낮춘 안세이 코반을 발행하여 금은 비율 조정을 시도했다.

안세이 니슈긴


하지만, 개항장에서 다음 7월 1일 (6월 2일)부터 1달러 은화와의 교환이 시작된 이 니슈긴은 개항장에서만 통용되었고, 교환된 화폐가 일본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1달러 은화의 일본 국내에서의 구매력을 1/3으로 낮추는 이 정책에 올콕 등 외국 영사는 조약 위반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결국 7월 21일 (6월 22일), 막부는 1달러 은화를 1분 은 3개로 교환하도록 개항장 봉행에 지시했고 다음 날 통용이 중지되었다. 따라서 안세이 니슈긴의 통용은 불과 22일 만에 끝났고, 안세이 코반도 4개월도 채 안 되어 주조 중단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코반 입수를 목적으로 하는 양은의 1분 은으로의 환전 요구는 하루 16000개에 달했고, 곧 1분 은은 바닥났다. 해리스는 양은의 주조에 의한 1분 은의 주조, 양은에 개 3분의 극인을 찍어 3분으로 통용시키는 것 등을 제안하며 막부에 대응을 촉구했다.

7. 미국과 협상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비준을 위해 막부는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그곳에서 비공식적으로 통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사절단의 감찰이었던 오구리 타다마사는 1분 은화 및 그것과 같은 액면을 가진 1분 금화를 필라델피아 조폐국에서 분석하게 하여, 1분 은화의 35.6센트에 대해 1분 금화는 89센트에 상당함을 확인시켰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양은화와 1분 은화의 교환은 금지하고, 90센트 = 1분으로 1분 금화와의 교환을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은 오구리의 주장의 정당성은 이해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8. 만엔 소판 발행

만엔 소판


막부는 금 유출을 막기 위해 금은 비율을 국제 수준으로 조정하고자 했다. 외국 영사들의 항의로 안세이 소판 및 이주은 주조가 중단된 상황에서, 해리스는 금은 비율 시정을 위한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5] 1안은 은화 중량 증대, 2안은 소판 중량 저하였다. 막부는 금 보유량 부족으로 2안을 채택, 덴포 소판의 품위는 유지하면서 중량을 3할 이하로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함유 금량은 게이초 소판의 약 8.1분의 1이 되었다.[2]

새로운 소판, 즉 만엔 소판 발행에 앞서 1860년 2월 11일(만엔 원년 1월 20일) 기존 소판의 통용 가치를 조정하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7][8] 덴포 소판 1매는 3냥 1분 2주, 안세이 소판 1매는 2냥 2분 3주로 통용되었다.[7][8] 이로 인해 에도에서는 환전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혼란이 발생했다.[9]

만엔 이분판


이러한 조치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물가가 폭등했다. 신 소판 주조량은 적었고, 실제로는 만엔 이분판이 통화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만엔 이분판의 1냥당 함유 금량은 게이초 소판의 약 11.4분의 1 수준이었다.[2][7] 이 때문에 상품 가격 표시는 '유합건(ありあいだて)' 방식으로 이루어졌다.[8]

이후 영국 총영사 올콕은 저서 『대군의 도시』에서 일본의 통화 문제와 금 유출의 원인을 분석했지만, 이는 소판 대량 유출 이후의 일이었다.

9. 결론

참조

[1] 서적
[2] 서적 江戸の貨幣物語 東洋経済新報社
[3] 서적 近世銀座の研究 吉川弘文館
[4]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5] 서적 大君の通貨 幕末「円ドル」戦争 文藝春秋
[6] 서적 The capital of the Tycoon
[7] 서적 日本の貨幣の歴史 吉川弘文館
[8] 서적 日本の貨幣 至文堂
[9] 서적 図録 日本の貨幣・第4巻 東洋経済新報社
[10] 간행물 「両」制度の崩壊――幕末の金流出 https://www.boj.or.j[...] 日本銀行
[11] 간행물 銀貨の歴史〜激動の時代をささえた貨幣〜 https://www.boj.or.j[...] 早稲田大学現代政治経済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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