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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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사제이자 순교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폴란드에서 무염시태에 대한 신심을 증진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2년에는 월간지 『무염시태의 기사』를 창간했으며, 193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일본어판 잡지를 발행하고 수도원을 설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대인 난민을 보호하다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순교했으며, 1982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저널리스트, 아마추어 무선가, 정치범, 약물 중독자, 가족, 생명 존중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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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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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성인 |
이름 |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출생명 | 라이문트 콜베 |
수도회 | OFMConv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 |
출생일 | 1894년 1월 8일 |
출생지 | 즈둔스카볼라,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 |
사망일 | 1941년 8월 14일 |
사망지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독일 |
공경하는 교파 |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
시복일 | 1971년 10월 17일 |
시복 장소 | 바티칸 시국 |
시복자 |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일 | 1982년 10월 10일 |
시성 장소 | 바티칸 시국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주요 성지 | 모든 영광의 옴니-메디아트리스 대성당 |
기념일 | 8월 14일 |
상징물 |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Rycerz Niepokalanej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나치 강제 수용소 죄수복 나치 강제 수용소 배지 십자고상 묵주 |
수호 성인 | 죄수 약물 중독자 가정 언론인 아마추어 무선 운영자 생명권 운동 섭식 장애 환자 |
생애 및 활동 | |
추가 정보 |
2. 생애
1907년 콜베는 형 프란치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경을 넘어 리보프에 있는 꼰벤투알 프란치스코회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견습 수사로 수도복을 입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1911년 첫 서원을 하고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14년 로마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1912년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1915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1919년 성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마 유학 중 프리메이슨이 교황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시위를 목격하고, 1917년 10월 16일 여섯 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성모 기사회를 결성했다. 콜베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과 가톨릭교회의 적대자, 특히 프리메이슨 회원들에 맞서 싸우고 그들을 개심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모든 회원들에게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생활하며 다음의 화살기도를 바치도록 했다.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는 저희와 어머니의 도움을 외면하는 이들, 특별히 교회를 적대시하는 이들과 어머니께 맡겨진 모든 이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한국어[71]
성모 기사회 수사들은 현대적인 인쇄 기술을 활용하여 교리문답과 기도 소책자, 23만 부수의 일간지, 백만 부수가 넘는 월간지를 출간하였다.[72]
191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919년 폴란드로 돌아와 원죄 없이 잉태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을 촉진하고 성모 기사회와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 신학교, 라디오 방송국 및 출판물 등을 감독하였다.
1922년 월간지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ej)》를 창간하고, 1927년 드루츠키 공작에게 땅을 기증받아 니에포칼라누프 프란치스코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 일본에 6년간 머물렀으며, 1935년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서 《작은 신문 (Maly Dziennik)》을 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출생명: 라이문도 콜베, Rajmund Kolbepl)는 1894년 1월 8일, 당시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69][70] 아버지 율리우스 콜베는 독일계 폴란드인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스카는 폴란드인이었다. 콜베는 형제 중 둘째 아들이었으며, 프란치스코, 요셉, 발렌티, 안드레아 등의 형제가 있었다.1903년, 9살 때 콜베는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5] 그는 이 사건을 훗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날 밤 나는 하느님의 어머니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쭈었다. 그러자 그녀는 흰색과 붉은색 두 개의 왕관을 들고 내게 나타나 어느 왕관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었다. 흰색은 내가 순결을 지켜야 함을 의미했고, 붉은색은 내가 순교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나는 두 왕관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1907년, 콜베는 형 프란치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리비우에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수련기를 거쳐 1911년 첫 서원을 하고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14년에는 로마에서 종신서원을 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드러내고자 '마리아'를 덧붙였다.[6]
1912년 콜베는 로마로 유학을 떠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1915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1919년 (또는 1922년) 성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2. 사제 서품과 폴란드 활동
1918년 콜베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69] 1919년 제2 폴란드 공화국으로 돌아온 그는 원죄 없이 잉태된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1922년 1월, 콜베는 월간지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ej)》를 창간하여 성모 신심을 전파하였다.[36] 그는 그로드노에서 종교 출판사를 운영하며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7년, 콜베는 바르샤바 근교 니에포칼라누프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은 주요 종교 출판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2년 후에는 부제 신학교도 개교하였다. 콜베는 루베키 공작에게 토지를 기증받았는데, 처음에는 공작의 부친을 위한 영구적인 추도 미사를 봉헌하는 조건이 있었으나, 콜베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토지가 성모 마리아의 것이라며 마리아상을 세웠고, 이에 감동한 루베키 공작은 무조건적으로 토지를 기증하였다.[39]
2. 3. 아시아 선교 활동
콜베는 1930년부터 1936년까지 동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추종자를 모으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이동하여 1931년까지 나가사키 외곽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인 '무겐자이노소노'(無原罪の園일본어)를 설립했다.콜베는 일본어판 『무염시태의 기사』(無原罪の聖母の騎士일본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10] 그가 설립한 수도원은 일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콜베는 산비탈에 수도원을 지었는데, 신도의 믿음에 따르면 이곳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을 때,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은 살아남았지만, 폭발의 주력을 받은 산의 반대편에 위치했던 무염시태 성당은 파괴되었다.
1932년 중반, 콜베는 인도 말라바르 지역으로 일본을 떠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수도원을 설립했지만 이후 문을 닫았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처음에는 중국 선교를 생각했지만, 일본으로 선교 활동을 가게 된 것은 당시 로마에 유학 중이던 신학생 사토와키 아사지로(훗날 나가사키 교구 대주교 및 추기경)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사토와키는 "중국은 정세가 불안정하니 잠시 일본에서 대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며 콜베에게 일본행을 권유했고, 일본에 지인이 없다는 콜베를 위해 나가사키 교구의 하야사카 규노스케 주교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40] 콜베를 포함한 5명의 선교사는 1930년 3월 7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상하이행 앙제호에 승선하여 4월 11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41] 상하이에서는 실업가이자 자선가인 가톨릭 신자 루보훙과 면식이 있어 원조 제안을 받았지만, 선교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다.[42][43] 이후 루보훙은 1931년에 방일하여 다시 원조를 제안했다.[44]
1930년 4월 24일 콜베 신부, 제노 수사, 히라리오 수사 3명이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하야사카 주교에게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의 출판 허가를 요청했다. 주교는 콜베 신부가 철학 및 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나가사키 교구 오우라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조건으로 출판을 허가했다.[45][46] 다음 달인 5월 24일에는 나가사키 오우라의 임시 수도원에서 일본어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 제1호 1만 부가 발행되었다.[47][48] 다음 해 1931년 5월 16일, 나가사키시 혼카와치에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했다. 당시 생활은 절약하는 것이었고, 쇠고기, 감자, 우유는 거의 먹지 못했으며, 빵, 보리, 당근이 조금 들어간 수프와 차가 주식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자 정육점 주인이 가끔씩 곁다리 고기와 라드를 넣어주었다.
1932년 5월에는 인도에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고베에서 배를 타고 에르나쿨람을 방문하여 교구 주교로부터 환영을 받고 출판 허가도 받았지만, 콜베가 폴란드로 돌아간 탓에 이후 계획은 진행되지 못했다.[49]
2. 4. 폴란드 귀국과 제2차 세계 대전
1936년, 콜베는 니에포칼라누프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폴란드로 귀국했다. 1938년에는 ''라디오 니에포칼라누프''라는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는 SP3RN이라는 호출 부호를 가진 아마추어 무선 면허 소지자였다.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콜베는 수도원에 남아 임시 병원을 조직했다. 그는 독일계 혈통을 인정하는 대가로 독일 시민과 유사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이체 폴크스리스트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폴란드에서 온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독일의 박해를 피해 숨어든 2,000명의 유대인도 포함되었다. 수도원은 반나치 성향의 출판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콜베의 활동은 축소되거나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도 병원으로 징발되어 많은 수사들이 수도원을 떠났다.
2. 5. 아우슈비츠 수용소 투옥과 순교
1941년 2월 17일, 콜베는 독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파비아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해 5월 28일, 죄수번호 16670번을 부여받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1년 7월 말,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발생하자, 부소장인 SS-하우프트슈름퓌러 카를 프리츠는 다른 탈주 시도를 막기 위해 지하 벙커에서 굶어 죽을 10명을 골랐다. 이 중에는 프란치셰크 가요비니체크라는 폴란드인 하사가 있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며 울부짖었다. 콜베는 그를 대신해 자원했다.
당시 조수였던 한 목격자에 따르면, 콜베는 감방에서 수감자들을 이끌고 기도했다. 경비병들이 그를 확인할 때마다 그는 감방 가운데에 서 있거나 무릎을 꿇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2주 동안 굶고 물을 빼앗긴 후에도 콜베와 다른 세 명은 살아남았다.[13]
결국 경비병들은 벙커를 비우기 위해 남은 네 명의 수감자에게 석탄산 치사 주사를 놓았다. 콜베는 왼팔을 들고 치명적인 주사를 차분히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1941년 8월 14일에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 화장되었다.
3. 시성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콜베 신부를 복자로 시복하였으며,[67]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신부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시성 당시 교황은 막시밀리아노 콜베를 고해자이자 자비의 순교자로 선언했다. 그의 시복을 확증하는 데 사용된 기적은 1948년 7월 안젤라 테스토니의 장 결핵 치유와 1950년 8월 프란치스코 라니에르의 동맥 석회화/경화증 치유였으며, 두 경우 모두 콜베에게 드린 기도를 통해 그의 중재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콜베가 아우슈비츠에서 구한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으며, 시복식과 시성식에 모두 초청받아 참석했다.[15]
4. 유산과 영향
콜베는 무염시태의 군대 운동을 통해 자신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영적 방식을 본받아 무염시태의 마리아 선교회 - 콜베 신부, 무염시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회, 수녀회 등 새로운 종교 및 재속회가 창설되었다. 무염시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회는 콜베가 모국어로 부르던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를 수 있도록 기본적인 폴란드어를 배운다.
콜베의 로마 가톨릭 마리아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과 전 세계에는 즈둔스카 볼라의 성 막시밀리아노 성당, 슈체친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당 등 그의 수호 아래 있는 여러 교회가 있다. 1998년 니에포칼라누프에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박물관 "어떤 사람이 있었다"가 개관했다.
1971년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로, 1982년 10월 10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67] 시성식에는 콜베에게 생명을 구원받은 가이오니체크가 참석했다. 1998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문에 "20세기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콜베의 조각상이 장식되었다.
1963년 롤프 호흐후트는 콜베의 삶에서 큰 영향을 받아 그에게 헌정된 희곡 ''대리인''을 발표했다. 2000년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는 메리타운을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국립 성지로 지정했다. 일리노이주 리버티빌에 위치한 이곳에는 콜베 홀로코스트 전시관이 있다. 1991년 크시슈토프 자누시는 콜베의 삶을 다룬 폴란드 영화 ''Życie za życie. Maksymilian Kolbe|Life for Life: Maximilian Kolbepl''를 개봉했는데, 에드워드 젠타라가 콜베 역할을 연기했다. 폴란드 상원은 2011년을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해로 선포했다.
호주 서부 로킹엄의 콜베 가톨릭 대학교를 비롯하여 전 세계 가톨릭 기관들이 콜베를 수호 성인으로 삼고 있다. 1989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콜베의 카리스마와 연결하기 위해 "용기, 신앙, 탁월함"이라는 모토를 사용한다. 2014년, 대학 25주년을 기념하여 교직원과 학생들이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순례하며 콜베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2023년 멕시코 제작사 Dos Corazones Films는 프란치스코회의 삶의 일부를 다룬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 ''맥스''를 개봉했다.[21]
4. 1. 성모 기사회
1917년 10월 16일, 콜베 신부는 로마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여섯 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성모 기사회를 결성했다.[71] 프리메이슨의 회심을 위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8] 콜베는 모든 회원들에게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생활하도록 하고, 날마다 다음의 화살기도를 바치도록 하였다.[71]“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는 저희와 어머니의 도움을 외면하는 이들, 특별히 교회를 적대시하는 이들과 어머니께 맡겨진 모든 이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71]
성모 기사회 수사들은 현대적인 인쇄 기술을 활용하여 교리문답과 소책자, 일간지(23만 부), 월간지(100만 부 이상)를 출간하였다.[72]
4. 2. 반유대주의 논란
콜베 신부의 저술에서 반유대주의적인 표현이 발견되어 논란이 되었다. 1926년, 월간지 ''원죄 없으신 기사의 기사'' 창간호에서 콜베는 프리메이슨을 "교회를 파괴하려는 열광적인 유대인으로 조직된 파벌"로 간주한다고 말했다.[17] 1924년 칼럼에서는 ''시온 의정서''를 "시온주의 창시자들이 실제로 전 세계를 예속시키려 했다는 중요한 증거"라고 인용했다.[18] 1939년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점점 더 맹렬하게 날뛰는 것처럼 보인다. 그 기원은 프리메이슨이라고 불리는 범죄 마피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명확한 목표를 향해 인도하는 손은 국제 시온주의이다."라고 썼다.[19]홀로코스트 연구 학자인 다니엘 L. 슐라플리 주니어와 워렌 그린 등은 이러한 반유대주의 혐의를 비난했다. 많은 작가들은 "유대인 문제는 콜베의 생각과 업적에서 매우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콜베의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은 유대인 난민을 보호했다.
4. 3. 한국과의 인연
콜베는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 나가사키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1930년 4월 24일, 콜베 신부, 제노 수사, 히라리오 수사 3명이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하야사카 규노스케 주교에게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의 출판 허가를 요청했다. 주교는 콜베 신부가 철학 및 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나가사키 교구, 오우라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조건으로 출판을 허가했다.[45][46] 이듬달 5월 24일에는 나가사키 오우라의 임시 수도원에서 일본어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 제1호 1만 부가 발행되었다.[48] 1931년 5월 16일, 나가사키시 혼카와치에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했다. 당시 생활은 매우 검소했으며, 쇠고기, 감자, 우유는 거의 먹지 못했고, 빵과 보리, 당근이 조금 들어간 수프와 차가 주식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자 정육점 주인이 가끔씩 곁다리 고기와 라드를 넣어주기도 했다.콜베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일본어판 『성모의 기사』(無原罪の聖母の騎士|무겐자이노 세이보노 기시|일본어)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10] 그가 설립한 수도원은 일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콜베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강점기 한국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헌신적인 삶과 순교는 한국 천주교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영성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4. 기념과 헌정
콜베의 이미지는 유럽 전역과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폴란드에는 즈둔스카 볼라의 성 막시밀리아노 성당이나 슈체친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당과 같이 그의 수호 하에 있는 여러 교회가 있다. 1998년에는 니에포칼라누프에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박물관 "어떤 사람이 있었다"가 개관했다.2000년,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는 꼰벤투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공동체가 있는 메리타운을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국립 성지로 지정했다. 메리타운은 일리노이주 리버티빌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는 콜베 홀로코스트 전시관이 있다. 폴란드 상원은 2011년을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해로 선포했다.
1971년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같은 국적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67] 복자 시성식 및 시성식에는 콜베에게 생명을 구원받은 가이오니체크가 참석했다. 1998년에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 문에 "20세기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콜베의 조각상이 장식되었다.
5. 콜베의 기도
콜베가 지은 무염시태 기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봉헌 기도이다.[71]
Oratio ad Deiparam Immaculatamla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하느님의 성령의 궁전이시며 성전이시여.
당신은 태양보다 더 빛나시나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 계시오며
당신은 죄의 그림자조차 없으시나이다.
당신은 온전히 아름다우시나이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하느님을 닮으셨나이다.
저를 보소서.
당신은 저의 희망이시며 저의 기쁨이시나이다.
저의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소서.
하느님만이 저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나이다.
하느님만이 저의 마음을 만족시키실 수 있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것으로 창조하셨나이다.
저는 당신의 도구이오니
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저로 하여금 예수를 다른 이들에게 알리게 하소서.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이끌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도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의 자녀는 또한 당신의 자녀이기도 하나이다.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하느님의 사랑으로 타오르는 당신 마음의 불꽃을 제 마음에도 주소서.
그리하여 제 마음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시나이다.
저는 당신의 겸손과 순결과 사랑을 간절히 원하나이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나이다.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저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저의 영혼과 육신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오니
저를 하느님께 이끄소서.
아멘.
참조
[1]
웹사이트
'I would like to take his place' – DW – 08/14/2016
https://www.dw.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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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립되었던 가수도원(다나카 우모리 병원 터의 목조 양관)은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적벽돌의 난로는 남았다. 1982년 3월,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는 나가사키를 취재차 방문했을 때, 난로의 보존을 호소했다. 1996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가수도원의 난로를 둘러싼 「콜베 기념관」이 완성되었다. 난로는 나가사키시의 남산테 전통적 건조군에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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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がさき歴史散歩 第20回 聖人コルベ神父の面影を訪ねて 旅する長崎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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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木慎一郎 プロフィー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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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会社ローソンエンタテインメン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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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崎登明の93歳日記:「長崎のコルベ神父」。英訳と校正、完了。園医の診察。ハラはハラハ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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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小崎修道士の著書「長崎のコルベ神父」 アメリカで出版へ 長崎純心大・荒木教授 遺志継承し英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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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St. Maximi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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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Italy
200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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