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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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 불린은 1499년에서 1508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잉글랜드 귀족 여성으로, 토머스 불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딸이며 앤 불린의 언니이다. 헨리 8세의 정부였으며, 윌리엄 캐리와 윌리엄 스태퍼드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시녀로 활동했으며, 1543년 사망했다. 그녀는 여러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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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불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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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메리 불린 |
원어 이름 | Mary Boleyn |
출생 | 1499년/1500년 경 |
출생지 | 아마도 블릭링 홀, 노퍽 |
사망 | 1543년 7월 |
사망지 | 로치포드 홀, 에식스, 잉글랜드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추정: 헤버 성) |
배우자 | 윌리엄 캐리 (1520년 결혼, 1528년 사별) 윌리엄 스태퍼드 (1534년 결혼) |
자녀 | 캐서린 캐리, 레이디 놀리스 헨리 캐리, 제1대 헌즈던 남작 에드워드 스태퍼드 (논쟁 중) 앤 스태퍼드 (논쟁 중) |
가문 | 부ól린 가문 |
아버지 | 토머스 부ól린, 제1대 윌트셔 백작 |
어머니 | 엘리자베스 하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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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
직업 | 헨리 8세의 정부 |
2. 생애
메리 불린은 노포크의 블리클링 홀에서 태어나 켄트의 헤버 성에서 자랐다.[4] 아버지는 토머스 불린으로, 장미 전쟁 이후 부상한 신흥 귀족 가문 출신의 부유한 외교관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토마스 하워드, 노퍽 공작의 장녀였다.[19] 따라서 메리는 제3대 노퍽 공작의 조카였으며, 헨리 하워드, 서리 백작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의 사촌이었다.
메리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1499년에서 1508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499년에 태어난 맏이로 보고 있다.[5][2] 1597년 메리의 손자 조지 캐리, 제2대 헌즈던 남작이 오르먼드 백작위를 주장했는데, 만약 앤 불린이 맏딸이었다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더 나은 주장이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6] 또한, 메리는 1520년 2월 4일에 먼저 결혼했고,[7] 1532년 앤이 펨브로크 후작 부인으로 임명되었을 때 "토마스 불린의 딸 중 한 명"으로 언급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메리는 어린 시절 조지 불린, 앤과 함께 헤버 성에서 교육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본적인 산술, 문법, 역사, 읽기, 쓰기 외에도 춤, 자수, 에티켓, 가정 관리, 음악, 바느질, 노래, 카드, 체스 등의 여성적인 재능을 배웠으며, 궁술, 매사냥, 승마, 사냥도 배웠다.[8]
1514년경, 15세 무렵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 메리 튜더의 시녀로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19] 루이 12세와의 혼인 후, 대부분의 잉글랜드 출신 시녀들은 귀국했지만, 메리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프랑스 궁정에 남았다. 이후 메리 튜더가 루이 12세 사후 찰스 브랜던과 결혼하여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메리는 프랑스에 남아 프랑수아 1세와 그의 왕비 프랑스의 클로드를 보필하였다.
메리는 언니 앤과 함께 프랑스 궁정에 있었지만, 먼저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앤과는 다른 미모로 헨리 8세의 눈에 띄어 애인이 되었다.[26] 1520년 잉글랜드 귀족인 윌리엄 캐리와 결혼했다.[26]
2. 1. 초기 생애
메리 불린은 노포크의 블리클링 홀에서 태어나 켄트의 헤버 성에서 자랐다.[4] 아버지는 토머스 불린으로, 장미 전쟁 이후 부상한 신흥 귀족 가문 출신의 부유한 외교관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토마스 하워드, 노퍽 공작의 장녀였다.[19] 따라서 메리는 제3대 노퍽 공작의 조카였으며, 헨리 하워드, 서리 백작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의 사촌이었다.메리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1499년에서 1508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499년에 태어난 맏이로 보고 있다.[5][2] 1597년 메리의 손자 조지 캐리, 제2대 헌즈던 남작이 오르먼드 백작위를 주장했는데, 만약 앤 불린이 맏딸이었다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더 나은 주장이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6] 또한, 메리는 1520년 2월 4일에 먼저 결혼했고,[7] 1532년 앤이 펨브로크 후작 부인으로 임명되었을 때 "토마스 불린의 딸 중 한 명"으로 언급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메리는 어린 시절 조지 불린, 앤과 함께 헤버 성에서 교육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본적인 산술, 문법, 역사, 읽기, 쓰기 외에도 춤, 자수, 에티켓, 가정 관리, 음악, 바느질, 노래, 카드, 체스 등의 여성적인 재능을 배웠으며, 궁술, 매사냥, 승마, 사냥도 배웠다.[8]
1514년경, 15세 무렵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 메리 튜더의 시녀로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19] 루이 12세와의 혼인 후, 대부분의 잉글랜드 출신 시녀들은 귀국했지만, 메리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프랑스 궁정에 남았다. 이후 메리 튜더가 루이 12세 사후 찰스 브랜던과 결혼하여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메리는 프랑스에 남아 프랑수아 1세와 그의 왕비 프랑스의 클로드를 보필하였다.
메리는 언니 앤과 함께 프랑스 궁정에 있었지만, 먼저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앤과는 다른 미모로 헨리 8세의 눈에 띄어 애인이 되었다.[26] 1520년 잉글랜드 귀족인 서 윌리엄 케어리(Sir William Carey)와 결혼했다.[26]
2. 2. 프랑스 궁정 생활
메리 불린은 노포크의 블리클링 홀에서 태어나 켄트의 히버 성에서 자랐다.[9][10] 아버지 토머스 불린은 유복한 외교관이었고, 메리는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1499년에서 1508년 사이로 추정되나, 현재는 1499년생으로 세 남매 중 맏이라는 것이 정설이다.1514년경, 메리는 루이 12세와 혼인한 잉글랜드 공주 메리 튜더의 시녀로 프랑스에 갔다.[9][10] 대부분의 잉글랜드 출신 시녀들이 본국으로 보내졌지만, 메리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프랑스 궁정에 남았다. 루이 12세 사후, 메리 튜더는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메리는 남아 동생 앤 불린과 함께 새 왕 프랑수아 1세와 그의 왕비 프랑스의 클로드를 보필하였다.
메리는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1세와의 성관계 등 의심스러운 평판을 얻었다.[9][10] 프랑수아는 메리를 "''una grandissima ribalda, infame sopra tutte''"("가장 악명 높은 매춘부)라고 불렀다고 한다.[9][10] 1519년 영국으로 돌아온 메리는 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가 되었다.[11]
2. 3. 잉글랜드 귀환 및 헨리 8세와의 관계
1519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메리 불린은 1520년 2월 4일 부유한 가문의 윌리엄 캐리와 결혼하였다.[19] 헨리 8세 또한 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았다.[19] 이 결혼식을 전후해서 헨리 8세와 메리의 관계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들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12] 메리는 왕의 정부로서 누릴 수 있었던 부와 명예를 누리지 못했다.[12]
메리의 두 자녀 가운데 한 명 혹은 둘 다의 진짜 아버지가 헨리 8세라는 소문이 있었으나,[13] 헨리 8세는 이들을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14] 헨리 8세가 다른 정부 엘리자베스 블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헨리 피츠로이를 사생아로 인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4]
헨리 8세는 첫 아내인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의 결혼 무효를 주장하며, 캐서린과 그의 형 아서의 결혼으로 인해 친족 관계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1527년,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 판결을 얻는 과정에서 전 정부의 여동생인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한 면제를 요청했다.[15] 교회법에 따르면 메리와 헨리 8세의 관계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불법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불린은 언니 앤 불린과 함께 프랑스 궁정에 있었으나, 먼저 귀국하여 앤과는 다른 미모로 헨리 8세의 눈에 띄어 애인이 되었다. 앤 불린이 매력이 부족했다는 당시의 1차 사료가 남아있지만[26], 미모를 갖춘 메리는 1520년에 잉글랜드 귀족인 윌리엄 캐리와 결혼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재혼 상대로 여겨지지 않고 애인으로 대우받았다.
메리는 헨리 8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애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27]。
2. 4. 동생 앤 불린의 부상
1522년 메리의 동생 앤 불린이 프랑스 궁정에서 잉글랜드 궁정으로 돌아왔다.[16] 두 자매는 서로 다른 무리에서 활동했고,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16] 일반적으로 메리가 앤보다 더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으나, 더 야심만만하고 궁정 내에서 인기를 누렸던 것은 동생 앤이었다.[16] 왕이 관심을 두기 시작했을 때, 앤은 메리와 달리 그의 애정이 사그라질 것을 걱정하여 그의 정부가 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거부하였다.[16] 1527년 헨리 8세는 앤 불린에 대한 애정과 더 젊은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얻고 싶다는 욕심으로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앤과 재혼하기로 하였다.1528년 메리의 남편 윌리엄 캐리가 상당한 빚을 남긴 채 발한열로 사망하면서,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조카 헨리 캐리의 후견인으로 인정해 주었다.[17] 앤 불린은 그를 시토회 수도원에 보내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17] 앤은 메리가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매해 100파운드가량의 연금을 보장해 주었고,[17] 1532년 왕비 즉위가 임박한 당시 헨리 8세와 함께 칼레를 방문할 즈음에는 메리를 자신의 시녀로 받아들여 궁정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1534년 메리는 윌리엄 스태퍼드와 비밀리에 재혼하였는데, 그가 지위도 없고 소득도 너무 낮아 신분 이하의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의절당하고 궁정에서도 추방당하였다. 윌리엄 스태퍼드는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평범한 신사에 불과했고, 병사로서 헨리 8세를 섬겼으며,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메리가 사망한 후, 그는 스태퍼드 남작의 막내딸 도로시와 재혼했다. 재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메리는 토머스 크롬웰을 비롯해 아버지와 삼촌, 동생 모두에게 자비를 구걸하였으나 모두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이런 와중에 가장 먼저 메리에게 손을 뻗어 상당한 돈을 보내준 것은 앤 불린이었다. 비록 메리가 다시 궁정에 나타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 화해의 손짓을 통해 두 자매의 사이는 1534년부터 앤이 처형당하는 1536년까지 매우 가까워졌다.
2. 5. 두 번째 결혼과 몰락
1522년 메리의 자매 앤 불린이 프랑스 궁정에서 잉글랜드 궁정으로 돌아왔다.[19] 일반적으로 메리가 앤보다 더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으나 앤은 더 야심만만했고 궁정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헨리 8세가 앤에게 관심을 보이자, 앤은 메리와 달리 왕의 애정이 사그라질 것을 걱정하여 정부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1527년 헨리 8세는 앤 불린에 대한 애정과 젊은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얻고 싶다는 욕심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앤과 재혼하기로 결심하였다.[19]1528년 메리의 남편 윌리엄 캐리가 상당한 빚을 남긴 채 역병으로 사망하자,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조카 헨리 캐리의 후견인으로 인정해 주었다. 앤 불린은 그를 시토회 수도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앤은 메리가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매해 100파운드의 연금을 보장해 주었고, 1532년 왕비 즉위가 임박한 헨리 8세와 함께 칼레를 방문할 때 메리를 시녀로 받아들였다.[19]
1534년 메리는 윌리엄 스태퍼드와 비밀리에 재혼하였는데, 그는 지위도 없고 소득도 너무 낮아 신분 이하의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의절당하고 궁정에서도 추방당하였다. 스태포드는 군인이었고, 둘째 아들이라 장래성이 거의 없었으며, 수입도 적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을 사랑의 결합이라고 믿었다. 메리가 임신하자 결혼 사실이 발각되었고, 앤 여왕은 분노했으며, 볼린 가문은 메리를 의절했다. 재정 형편이 어려워진 메리는 토머스 크롬웰에게 자비를 구걸하였으나 모두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앤 불린은 메리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주었지만, 궁정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두 자매의 사이는 1534년부터 앤이 처형당하는 1536년까지 가까워졌다.[19]
1534년과 앤 불린의 5월 19일 처형 사이에 메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추적하기 어렵다. 메리는 어머니를 방문하지도 않았고, 런던 탑에 투옥된 자매에게도, 조지 불린의 처형식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메리가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증거 또한 없다. 메리의 딸인 캐서린 캐리가 앤 불린의 요청에 따라 시녀로서 처형 직전까지 이모를 모셨다.[19]
메리와 남편은 에식스의 로치퍼드에 거주했다. 앤의 처형 이후, 그들의 어머니는 궁정을 떠나 1년 만에 사망했고, 아버지 토머스 역시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사망 이후, 에식스에 있는 약간의 재산을 상속받은 메리는 남은 삶을 남편과 함께 조용히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메리는 1543년 4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망했다.[18][19][20]
3. 가족 관계
1520년 윌리엄 캐리와 결혼하여 슬하에 캐서린 캐리(1524년 – 1569년 1월 15일)와 헨리 캐리, 1대 헌스던 남작(1526년 3월 4일 – 1596년 7월 23일)을 두었다. 캐서린은 앤 오브 클레베스와 캐서린 하워드의 시녀였으며, 프랜시스 놀리스 경과 결혼했다. 헨리 캐리는 엘리자베스 1세 즉위 후 귀족 작위를 받고 가터 훈장 기사가 되었다.
1534년에는 윌리엄 스태포드와 비밀리에 재혼했다.[19] 스태포드는 군인이었고, 수입이 적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사랑에 의한 결합으로 여겨진다. 메리가 임신하자 결혼이 발각되었고, 앤 불린은 분노하여 메리를 궁정에서 추방했다.[19]
메리는 토머스 크롬웰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헨리 8세는 무관심했다. 앤은 금잔과 돈을 보냈지만, 궁정 복귀는 거부했다.[19] 1534년부터 1536년 5월 19일 앤 불린의 처형 전까지 메리의 삶은 기록이 거의 없다.
메리는 윌리엄 스태포드와의 사이에서 에드워드 스태포드 (1535–1545), 앤 스태포드 (1536년 출생?)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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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윌트셔 백작 토머스 불린 | 엘리자베스 하워드 | 잉글랜드의 헨리 8세 | 메리 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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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캐리 | 제1대 헌스던 남작 헨리 캐리 |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 레티스 놀리스 |
3. 1. 첫 번째 결혼 (윌리엄 캐리)
메리 불린은 1520년에 윌리엄 캐리 경과 결혼하여 레이디 캐리가 되었다. 1525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로치포드 자작이 되면서 레이디 캐리; 명예로운 메리 캐리 부인이 되었고, 1529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윌트셔 백작이 되면서 레이디 메리 캐리가 되었다.메리 불린은 캐서린 캐리(1524년 – 1569년 1월 15일)와 헨리 캐리, 1대 헌스던 남작(1526년 3월 4일 – 1596년 7월 23일)의 어머니였다. 캐서린 캐리는 앤 오브 클레베스와 캐서린 하워드 모두의 시녀였으며, 청교도인 프랜시스 놀리스 경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헨리 캐리, 1대 헌스던 남작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즉위 직후 귀족 작위를 받았고, 이후 가터 훈장 기사로 임명되었다.
3. 2. 두 번째 결혼 (윌리엄 스태퍼드)
1534년, 메리는 에식스 지방 지주 아들 중 둘째 아들인 윌리엄 스태포드(후에 경 윌리엄 스태포드)와 비밀리에 결혼했다.[19] 스태포드는 군인이었고, 둘째 아들이라 장래성이 거의 없었으며, 수입도 적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 결혼을 사랑의 결합이라고 믿었다. 메리가 임신하자 결혼 사실이 발각되었다. 앤 불린 여왕은 분노했고, 볼린 가문은 메리를 의절했다. 부부는 궁정에서 추방되었다.[19]메리의 재정 상황이 매우 어려워지자 그녀는 국왕의 수석 고문인 토머스 크롬웰에게 헨리와 앤에게 말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녀는 "더 훌륭한 가문의 남자"를 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정직한 남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함께 빵을 구걸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여왕이 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저는 진실로 믿습니다... 그가 저를 왕이 되기 위해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헨리는 그녀의 곤경에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리는 크롬웰에게 그녀의 아버지인 삼촌과 오빠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앤은 마음을 누그러뜨려 메리에게 금잔과 약간의 돈을 보냈지만,[19] 여전히 궁정에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부분적인 화해는 두 자매가 이룬 가장 가까운 관계였으며, 메리가 국왕의 궁정에서 추방된 후에는 서로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1534년과 그녀의 여동생 앤이 1536년 5월 19일에 처형되기 전까지의 메리의 삶은 추적하기 어렵다. 그녀가 부모님을 방문했다는 기록도 없고, 그녀의 여동생 앤이나 오빠 조지가 런던탑에 갇혔을 때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거나 방문했다는 증거도 없다.
메리는 윌리엄 스태퍼드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을 수도 있다.
- 에드워드 스태포드 (1535–1545).
- 앤 스태포드 (1536년 출생?), 아마도 메리의 여동생인 앤 불린 여왕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메리는 1543년 7월 19일[18] 또는 30일[19]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망했으며, 에식스의 로치포드 홀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20][19]
4. 유산
메리 불린은 마거릿 캠벨 반스, 에블린 앤서니, 노라 로프츠, 모린 피터스, 캐롤리 에릭슨, 진 플라이디, 로절린드 마일스, 로빈 맥스웰, 웬디 J. 던, 캐롤린 마이어, 힐러리 맨텔의 소설에 등장한다. 또한 아일린 아미티지, 카렌 하퍼, 필리파 그레고리의 소설에서는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필리파 그레고리는 ''BBC 역사''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메리를 자신의 여주인공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메리는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에도 등장하는데, ''천일의 앤''(1969)에서는 발레리 기어론이, ''또 다른 불린 소녀''(2003)에서는 나타샤 맥켈혼이 연기했다. Showtime 텔레비전 시리즈 ''튜더스''(2007–2010)에서는 퍼디타 윅스가, ''또 다른 불린 소녀''(2008)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했다. 힐러리 맨텔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미니시리즈 ''울프 홀''(2015)에서는 채리티 웨이크필드가 메리 역을 연기했다.
메리는 앨리슨 웨어, 켈리 하트, 조세핀 윌킨슨의 논픽션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메리 불린의 자손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 외에, 윈스턴 처칠, P. G. 우드하우스[28][29], 엘리자베스 왕대비, 다이애나비, 세라비, 찰스 다윈 등 많은 유명인이 포함된다.
5. 평가
메리 불린은 여러 소설,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에 등장하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소설에서는 마거릿 캠벨 반스의 ''Brief Gaudy Hour: A Novel of Anne Boleyn''(1949), 에블린 앤서니의 ''Anne Boleyn''(1957), 노라 로프츠의 ''The Concubine: A Novel Based Upon the Life of Anne Boleyn''(1963) 등 다양한 작품에 등장했다. 특히 필리파 그레고리의 ''또 다른 불린 소녀''(2001)는 메리 불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큰 인기를 얻었지만,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레고리는 BBC 역사 잡지 인터뷰에서 메리를 자신의 여주인공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영화와 텔레비전에서도 메리 불린은 여러 차례 등장했다. 영화 ''천일의 앤''(1969)에서는 발레리 기어론이, BBC 텔레비전 영화 ''또 다른 불린 소녀''(2003)에서는 나타샤 맥켈혼이 메리 역을 맡았다. Showtime 텔레비전 시리즈 ''튜더스''(2007–2010)에서는 퍼디타 윅스가, 영화 ''또 다른 불린 소녀''(2008)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메리를 연기했다. 힐러리 맨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니시리즈 ''울프 홀''(2015)에서는 채리티 웨이크필드가 메리 역을 맡았다.
메리 불린은 앨리슨 웨어의 《메리 불린: 왕들의 정부》(2011), 켈리 하트의 《헨리 8세의 정부들》(2009), 조세핀 윌킨슨의 《메리 불린: 헨리 8세의 정부의 진실》(2010) 등 논픽션 책의 주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5. 1. 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메리 불린은 여러 소설,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에 등장하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소설에서는 마거릿 캠벨 반스의 ''Brief Gaudy Hour: A Novel of Anne Boleyn''(1949), 에블린 앤서니의 ''Anne Boleyn''(1957), 노라 로프츠의 ''The Concubine: A Novel Based Upon the Life of Anne Boleyn''(1963) 등 다양한 작품에 등장했다. 특히 필리파 그레고리의 ''또 다른 불린 소녀''(2001)는 메리 불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큰 인기를 얻었지만,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레고리는 BBC 역사 잡지 인터뷰에서 메리를 자신의 여주인공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영화와 텔레비전에서도 메리 불린은 여러 차례 등장했다. 영화 ''천일의 앤''(1969)에서는 발레리 기어론이, BBC 텔레비전 영화 ''또 다른 불린 소녀''(2003)에서는 나타샤 맥켈혼이 메리 역을 맡았다. Showtime 텔레비전 시리즈 ''튜더스''(2007–2010)에서는 퍼디타 윅스가, 영화 ''또 다른 불린 소녀''(2008)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메리를 연기했다. 힐러리 맨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니시리즈 ''울프 홀''(2015)에서는 채리티 웨이크필드가 메리 역을 맡았다.
메리 불린은 앨리슨 웨어의 《메리 불린: 왕들의 정부》(2011), 켈리 하트의 《헨리 8세의 정부들》(2009), 조세핀 윌킨슨의 《메리 불린: 헨리 8세의 정부의 진실》(2010) 등 논픽션 책의 주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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