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홉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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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 홉킨은 웨일스 출신의 가수로, 1968년 폴 매카트니의 프로듀싱으로 데뷔하여 싱글 "Those Were the Days"로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69년 앨범 《Post Card》를 발표하고 "Goodbye"로 2위를 차지했으며, 1970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Knock, Knock Who's There?"로 2위를 했다. 이후 토니 비스콘티와 결혼 후 은퇴했다가 복귀하여 1976년 "If You Love Me (Hymne à l'amour)"를 발표했으며, 2023년에는 딸 제시카 리 모건과 함께 앨범 《Two Hearts》를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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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홉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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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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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50년 5월 3일 |
출생지 | 웨일스 니쓰 포트 탤벗 폰타르다웨 |
직업 | 싱어송라이터 |
활동 기간 | 1968년–현재 |
장르 | 포크 팝 |
악기 | 보컬, 기타 |
레이블 | 애플, 만티코어, 클랜, Numero Uno|it|Numero Uno (casa discografica)}}, 메리 홉킨 뮤직 |
관련된 활동 | 폴 매카트니, 토니 비스콘티, 데이비드 보위, 랠프 맥텔, 베니 갤러거 |
배우자 | 토니 비스콘티 (1971년–1981년, 이혼) |
웹사이트 | 메리 홉킨 뮤직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메리 홉킨은 웨일스 폰타다우에(Pontardawe)에서 태어나 웨일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성장했다.[39] 메이저 데뷔 전에는 포크 그룹 "더 셀비 세트 앤 메리"의 멤버로 활동했고, 웨일스어 음반을 현지 음반사인 캄브리아에서 몇 장 발매하기도 했다.
그룹 해산 후, 홉킨의 에이전트는 탤런트 등용문으로 알려진 TV 프로그램 《Opportunity Knocks》에 응모했고, 홉킨은 합격하여 1968년 5월 5일 방송에 출연, 〈턴 턴 턴〉을 연주하며 노래했다. 이를 본 모델 트위기가 폴 매카트니에게 홉킨을 추천하여, 비틀즈의 애플 레코드와 계약한 첫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되었다.
매카트니가 프로듀스한 싱글 〈슬픈 천사〉는 1968년 8월 30일 영국에서 발표되어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최고 3위를 기록했다. 1969년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개최된 제19회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하여 칸초네 〈눈동자는 멀리〉를 불러 2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2월 21일, 매카트니의 프로듀싱으로 첫 번째 앨범 《포스트 카드》를 발표했다.[38] 이 앨범에는 도노반의 곡 3곡과 조지 마틴, 해리 닐슨의 작품이 각각 1곡씩 수록되었다. 3월 28일에는 레논-매카트니 작사·작곡(실제로는 매카트니 단독 작품)의 〈굿바이〉를 두 번째 싱글로 발표하여 영국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했다. 홉킨은 이 곡을 매카트니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세세한 간섭을 그만두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했다.[40]
세 번째 싱글은 필라모어 링컨(Philamore Lincoln)의 곡을 리어레인지한 〈Temma Harbour|꿈꾸는 항구영어〉였다. 이 곡은 매카트니가 프로듀스를 맡지 않은 첫 싱글로, 1970년 1월 16일에 발매되어 영국에서 최고 6위, 캐나다에서 최고 42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라다 크리슈나 템플(Radha Krishna Temple)의 곡 〈Govinda|고빈다영어〉에 코러스로 참여했다.[44]
1970년 3월, 네 번째 싱글 〈행복의 문〉을 발표하여 다시 영국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영국 대표로 출전하여 아일랜드 가수 다나에게 밀려 2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오사카 만박에 출연하기 위해 방한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두 번째 앨범 《대지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브리티시 포크의 향기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홉킨 자신도 이 앨범에서 메이저 데뷔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성과 합치점을 찾았다고 한다. 같은 해, 《대지의 노래》를 프로듀스한 토니 비스콘티와 결혼 후 음악계를 은퇴하고 전업주부로 전념했다. 하지만 버트 얀슈의 《문샤인》(1973년), 데이비드 보위의 《로우》(1977년) 등 남편 비스콘티가 참여한 앨범 레코딩에는 참여하기도 했다.[45]
1981년 비스콘티와 이혼했다. 비스콘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Jessica Lee Morgan|제시카 리 모건영어은 2010년에 가수로 데뷔했다.[46] 1984년에는 싱어송라이터 피터 스켈런, 첼리스트 줄리언 로이드 웨버 등과 Oasi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동명의 앨범을 발표했다. 반젤리스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사운드트랙에서 〈Rachel's Song〉을 불렀다.
2000년대에는 자체 레이블 "메리 홉킨 뮤직"(Mary Hopkin Music)을 설립하여 커버 아트를 포함한 셀프 프로듀스로 전환했다. 2005년에는 돌리 파튼의 앨범 《Those Were the Days》에도 참여했다.
2018년에 데뷔 50주년을 맞이했다.
2. 1. 웨일스 민요 가수 시절
홉킨은 웨일스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폰타다웨에서 태어났다.[2][3] 어릴 때부터 주간 노래 레슨을 받았으며, '셀비 세트 앤 메리(Selby Set and Mary)'라는 지역 그룹과 함께 포크 가수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비틀즈가 소유한 애플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 고향에 있는 '캄브리안(Cambrian)'이라는 지역 음반 회사를 위해 웨일스어 노래 EP를 발매했다.[4]2. 2. ''Opportunity Knocks'' 출연 및 애플 레코드 계약
홉킨은 탤런트 등용문으로 알려진 텔레비전 프로그램 《Opportunity Knocks》에 출연하여 합격했다. 1968년 5월 5일 방송분에서 〈턴 턴 턴〉을 직접 연주하며 노래했다.[30] 이를 본 모델 트위기가 폴 매카트니에게 홉킨을 추천했고, 홉킨은 비틀즈의 애플 레코드(Apple Records)의 첫 번째 아티스트로 데뷔하게 되었다.[4]3. 전성기 (1968-1971)
메리 홉킨은 웨일스 폰타다우에(Pontardawe)에서 태어나 웨일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성장했다.[39] 메이저 데뷔 전에는 포크 그룹 "더 셀비 세트 앤 메리"의 멤버로 활동했고, 웨일스어 레코드를 현지 레코드 회사인 캄브리아에서 몇 장 발매했다.
그룹 해산 후, 홉킨은 탤런트 등용문으로 알려진 텔레비전 프로그램 『오퍼튜니티 녹스』에 응모하여 합격했다. 1968년 5월 5일 방송분에 출연하여 「턴 턴 턴」을 연주하며 노래했고, 이를 본 트위기가 폴 매카트니에게 추천하여 비틀즈의 애플 레코드에서 데뷔하게 되었다.
폴 매카트니가 프로듀스한 싱글 「슬픈 천사」는 1968년 8월 30일 영국에서 발표되어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1969년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개최된 제19회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하여 「눈동자는 멀리」를 불러 2위를 차지했다.
1969년 2월 21일, 매카트니의 프로듀싱으로 첫 번째 앨범 『포스트 카드』를 발표했다.[38] 앨범에는 도노반의 곡 3곡과 조지 마틴, 해리 닐슨의 작품도 각각 1곡씩 수록되었다.
1969년 3월 28일, 레논-매카트니 작사·작곡 (실제로는 매카트니 단독 작품)의 「굿바이」를 싱글로 발표하여 영국 싱글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다. 홉킨은 자신을 "여성 팝 가수"로 위치시키는 것에 불쾌감을 느껴, 이 곡을 매카트니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간섭을 그만두겠다는 약속의 곡으로 해석했다.[40]
세 번째 싱글 「」는 의 곡을 리어레인지한 곡으로, 홉킨의 싱글 중 처음으로 매카트니가 프로듀스를 맡지 않았다. 1970년 1월 16일에 발매되어 영국에서 최고 6위를 기록했다.[42]
1970년 3월, 네 번째 싱글 「행복의 문」을 발표하여 다시 영국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영국 대표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하여 2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오사카 만박에 출연하기 위해 방한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두 번째 앨범 『대지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브리티시 포크의 향기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홉킨 자신도 이 앨범에서 자신의 음악성과의 합치점을 찾았다고 한다.
3. 1. "Those Were the Days" 데뷔 및 성공
메리 홉킨은 웨일스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주간 노래 레슨을 받으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2][3] 지역 그룹에서 포크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비틀즈가 소유한 애플 레코드(Apple Records)와 계약하며 본격적인 가수 경력을 시작했다.[4] 이는 모델 트위기가 텔레비전 탤런트 쇼 ''Opportunity Knocks''에서 홉킨을 보고 폴 매카트니에게 추천한 덕분이었다.[4]1968년 8월 30일, 매카트니가 제작한 홉킨의 데뷔 싱글 "Those Were the Days"가 발매되었다.[5] 이 곡은 영국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는 2위에 올랐다.[6] 캐나다 RPM 싱글 차트에서도 2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미국에서만 150만 장 이상 판매되어 RIAA로부터 골드 디스크를 받았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8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7]
1969년 2월 21일에는 매카트니가 프로듀싱한 데뷔 앨범 ''Post Card''가 발매되었다.[9] 이 앨범은 UK 앨범 차트에서 3위,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28위에 올랐다.[5][6]
이어 1969년 3월 26일 발매된 "Goodbye"는 레논-매카트니가 작곡하고 매카트니가 프로듀싱한 곡으로, 영국 싱글 차트 2위,[5] ''빌보드'' 핫 100 13위,[10] 캐나다 ''RPM'' 차트 15위에 올랐다.[11]
홉킨의 세 번째 싱글 "Temma Harbour"는 1970년 1월 16일에 발매되었으며, 영국에서 6위, 캐나다에서 42위를 기록했다.[15] 미국에서는 ''빌보드'' 핫 100에서 39위, 이지 리스닝 차트에서 4위에 올랐다.[16]
3. 2.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참가
1970년 3월, 홉킨은 1970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영국 대표로 참가하여 "Knock, Knock Who's There?"로 2위를 차지했다.[4] 홉킨은 대회를 앞두고 유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아일랜드 가수 데이나가 부른 "All Kinds of Everything"에 밀려 우승을 놓쳤다.[18] 미키 모스트가 프로듀싱한 "똑똑 누구세요?"는 1970년 3월 23일에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에서 2위를 기록했다.[5]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어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3. 3. ''Earth Song/Ocean Song'' 발매
''Earth Song/Ocean Song''은 1971년 10월 1일 애플 레코드에서 발매된 메리 홉킨의 두 번째 앨범이다. 토니 비스콘티가 프로듀싱했으며, 캣 스티븐스, 갤러거 앤 라일, 랄프 맥텔이 쓴 곡의 커버 버전과 리즈 토르센이 쓴 두 개의 타이틀곡을 포함하고 있다. 홉킨은 이 앨범이 자신이 항상 만들고 싶었던 앨범이라고 생각했으며, 비스콘티와 결혼하면서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다고 느껴 음악계를 떠났다.[19]앨범의 싱글 "Water, Paper and Clay"는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 곡은 홉킨이 1972년 3월 애플 레코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발매한 싱글이었다.
4. 결혼 및 은퇴 (1971-1976)
1971년 비스콘티와 결혼한 후,[4] 홉킨은 가정을 꾸리기 위해 팝 음악계에서 은퇴했다. 그녀는 쇼 비즈니스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녹음을 중단하지 않았다. 1972년 1월 비스콘티와 함께 호주로 가서 여러 주요 도시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 외에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대규모 야외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3월에 홉킨은 애플 레코드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고, 그녀의 매니저인 조 러스티그는 "세 개의 주요 [음반] 회사"로부터 제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28] 6월에는 "Summertime Summertime" / "Sweet and Low" 싱글이 Hobby Horse라는 이름으로 벨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A면은 더 제이미스의 1958년 노래를 커버한 곡이었다. 비스콘티의 도움을 받아 1972년 크리스마스 싱글 "Mary Had a Baby" / "Cherry Tree Carol"을 리갈 조노폰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홉킨은 1972년 7월 29일 BBC 1에서 자신의 단독 TV 스페셜에 출연했다. ''Sing Hi, Sing Lo''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메리 홉킨 주연의 가벼운 엔터테인먼트"로 간단하게 소개되었다.[29]
1976년까지 그녀의 이름으로 다른 싱글이나 앨범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편이 프로듀싱한 많은 녹음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톰 팩스턴, 랄프 맥텔, 데이비드 보위 (''Low''), 버트 얀쉬, The Radiators from Space, 씬 리지, 카르멘, 사르스테드 형제, 오시비사, 스파크스, 헤이즐 오코너, 엘레인 페이지 등이 있다. 이 모든 녹음(그리고 남편의 앨범 ''Inventory'')에서 그녀는 "메리 비스콘티"로 등재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또한 실라 블랙의 TV 쇼를 비롯한 다양한 TV 쇼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5. 복귀 및 이후 활동 (1976-현재)
1976년, 홉킨은 본명으로 음반 활동을 재개하여 싱글 "If You Love Me (Really Love Me)"를 발표했다. 이 곡은 에디트 피아프의 "Hymne à l'amour"를 영어로 번안한 곡으로, 영국 차트에서 32위를 기록했다.[5] 싱글 B면에는 홉킨의 오리지널 곡인 "Tell Me Now"가 수록되었다. 이후 "Wrap Me in Your Arms"를 싱글로 발표했으며, B면에는 역시 홉킨이 작곡한 "Just A Dreamer"가 수록되었다. 이 싱글들은 비스콘티의 Good Earth Records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5] 당시 앨범을 위해 녹음된 곡들은 현재 홉킨 자신의 레이블인 Mary Hopkin Music에서 발매되고 있다.[1]
스티리 스팬의 밥 존슨과 피트 나이트는 홉킨을 그들의 컨셉 앨범 ''엘프랜드 왕의 딸''에서 "리라젤 공주" 역으로 캐스팅했다. 그녀는 캠브리지 민속 축제에서 버트 얀쉬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1970년대 말, 데카 레코드는 홉킨의 캄브리아 녹음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메리 홉킨의 웨일스 세계''를 발매했다.
1981년 비스콘티와 이혼 후, 1984년 싱어송라이터 피터 스켈런, 첼리스트 줄리언 로이드 웨버 등과 밴드 Oasis를 결성하여 동명의 앨범을 발표했다. 반젤리스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사운드트랙에서 "Rachel's Song"을 부르기도 했다.
2000년대에 홉킨은 자체 레이블 "메리 홉킨 뮤직"(Mary Hopkin Music)을 설립하고, 커버 아트를 포함하여 셀프 프로듀싱으로 전환했다. 2005년 돌리 파튼의 앨범 ''Those Were the Days''에 참여했으며, 2018년 데뷔 50주년을 맞이했다.
5. 1.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1971년 비스콘티와 결혼한 후,[4] 홉킨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팝 음악계에서 은퇴했다. 그녀는 쇼 비즈니스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녹음을 중단하지 않았다. 1972년 1월 비스콘티와 함께 호주로 가서 여러 주요 도시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 외에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대규모 야외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3월에 홉킨은 애플 레코드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고, 그녀의 매니저인 조 러스티그는 "세 개의 주요 [음반] 회사"로부터 제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28] 6월에는 Summertime Summertime / "Sweet and Low" 싱글이 Hobby Horse라는 이름으로 벨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비스콘티의 도움을 받아 1972년 크리스마스 싱글 "Mary Had a Baby" / "Cherry Tree Carol"을 리갈 조노폰 레코드에서 발매했다.1976년까지 그녀의 이름으로 다른 싱글이나 앨범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편이 프로듀싱한 많은 녹음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톰 팩스턴, 랄프 맥텔, 데이비드 보위 (''Low''), 버트 얀쉬, The Radiators from Space, 씬 리지, 카르멘, 사르스테드 형제, 오시비사, 스파크스, 헤이즐 오코너, 엘레인 페이지 등이 있다. 이 모든 녹음(그리고 남편의 앨범 ''Inventory'')에서 그녀는 "메리 비스콘티"로 크레딧되었다.
1980년대 홉킨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레딩, 버크셔의 헥사곤 극장에서 공연한 ''록 네이티비티''에서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것이었다.[30] 이 후, 마이크 허스트(음반 프로듀서이자 더 스프링필즈 출신)가 그녀에게 ELO의 마이크 데 알부커키와 함께 결성한 새로운 그룹 선댄스의 리드 싱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4] 그들의 유일한 싱글 "What's Love"는 그녀가 닥터 후크 앤 더 메디신 쇼와 함께 영국 투어를 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홉킨은 공연에 불만을 품고 곧 그룹을 떠났다. "What's Love"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고, 1982년 4월 10위로 정점을 찍으며 유일하게 차트에 진입한 지역이었다.
홉킨과 비스콘티는 1981년에 이혼했다. 이듬해 그녀는 반젤리스의 ''블레이드 러너'' 사운드트랙에 "Rachael's Song"으로 보컬을 제공했다. 1984년경, 피터 스켈런은 그녀에게 자신과 줄리안 로이드 웨버와 함께 오아시스라는 그룹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의 동명의 유일한 앨범인 ''오아시스''는 WEA를 통해 두 개의 싱글과 함께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1984년 영국 앨범 차트에서 23위에 올랐고 14주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영국 투어가 계획되었지만 홉킨이 병에 걸리면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그룹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1980년대 동안 홉킨은 랄프 맥텔과 함께 런던 팔라디움에서 공연하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자선 쇼에 출연했다. 1988년, 그녀는 조지 마틴이 제작한 딜런 토머스의 ''언더 밀크 우드''에 참여했다. 그녀는 로지 프로버트 역을 맡아 캡틴 캣 역의 프레디 존스와 함께 "Love Duet"이라는 곡을 불렀다. 1992년, 출연진은 찰스 왕세자를 위해 프린스 트러스트를 위해 토머스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연극을 다시 공연했다.[30]
1989년에 ''Spirit''라는 앨범을 녹음했다. 이 앨범은 Trax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으며, 가벼운 클래식 노래 모음집으로, 싱글 "아베 마리아"가 수록되었다. 이 음반은 갤러거 앤 라일의 베니 갤러거가 프로듀싱했으며, 그는 그녀가 애플 레코드 시절에 곡을 제공했었다.
5. 2. 1990년대 이후
1990년대 초, 홉킨은 자선 쇼에서 더 치프턴스와 함께 런던 팔라디움에서 노래를 불렀고, 이후 영국 투어에 합류했다.그녀는 줄리안 콜벡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등 자신이 선택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다. 그녀는 그의 CD "Back to Bach"에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또한, 마크 세론의 연극/오페라 "The Collector"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 작품의 CD와 비디오에 두 곡을 불렀다. 그녀는 옛 친구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윌러비와 데이브 커즌스(스트로브스)와 함께 그들의 CD "The Bridge" 작업을 다시 했다. 그녀는 또한 램 피에츠가 제작한 비틀즈 트리뷰트 앨범에 출연했다.

1996년, 웨일스 레이블 세인은 캄브리안의 백 카탈로그를 구입하여 홉킨의 모든 웨일스어 녹음을 "Y Caneuon Cynnar/The Early Recordings"라는 CD로 발매했는데,[31] 이 CD에는 데카 녹음에서 발견되었던 오버더빙된 드럼이 제거되었다.
1999년, 그녀는 다시 더 치프턴스와 함께 영국 투어에 합류했고, 그해 말 베니 갤러거, 짐 다이아몬드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콘서트를 열었다.[30] 그녀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도 세 편 제작되었는데, 각각 HTV(1998), BBC 텔레비전(1998), S4C(2000)에서 방영되었다.[30]
그녀는 더 크로케츠의 앨범 "The Great Brain Robbery"에 게스트로 출연했고, 빌리 코놀리의 BBC TV 시리즈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세계 일주''의 테마곡을 불렀으며, 로빈 윌리엄스가 랩을 하는 "Those Were The Days"를 다시 녹음했다. 그녀는 또한 사라 슈가만의 영화 "베리 애니 메리"에 출연했다.
2005년 9월, 그녀는 딸이 운영하는 레이블인 Mary Hopkin Music에서 회고 앨범인 ''Live at the Royal Festival Hall 1972''를 발매했다.[1] 이어서 2006년 12월에는 크리스마스 녹음인 "Snowed Under"가 다운로드 전용으로 발매되었다.
2007년, 그녀의 57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동명의 레이블에서 ''Valentine''이라는 앨범을 발매했다.[1] 이 앨범에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의 미발표 트랙 12곡이 수록되었으며, 이 중 3곡은 홉킨이 작사했다.[1] 2008년에는 그녀의 자체 레이블에서 새 앨범 ''Recollections''가 발매되었다.[1] 이 앨범에는 1970년에서 1986년 사이에 녹음된 11곡과 함께 "Mary Had a Baby"와 "체리 트리 캐럴"을 포함한 3개의 크리스마스 노래 CD가 포함되어 있다(이 곡들은 1972년 Regal Zonophone에서 처음 발매되었다). 또한 2006년에 다운로드 전용으로 발매된 "Snowed Under"도 수록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아카이브 CD인 ''Now and Then''은 2009년 5월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1970년부터 1988년까지 녹음된 14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는 2009년 6월 Smithsonian Folkways Recordings에서 발매한 앨범 ''Blodeugerdd: Song of the Flowers – An Anthology of Welsh Music and Song''에서 "Y 'deryn pur"("Gentle Bird")라는 노래를 불렀다.
6. 음반 목록
(일본: 東芝TOCP-6892)
(Post Card)
(일본: 東芝TOCP-7097)
(Earth Song, Ocean Song)
(Spirit)
(Valentine)
(Recollections)
(Now and Then)
(You look familiar)
(Painting By Numbers)
(Another Road)
(A Christmas Chorale)
(Pieces)
(Two He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