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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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소포타미아 건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전한 건축 양식으로, 건축 재료와 기술, 도시 계획, 건축 양식, 주요 건축물, 조경 건축 등의 특징을 갖는다. 건축 재료로는 햇볕에 구운 벽돌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도시 계획은 수메르인에 의해 시작되어 도시를 주거, 상업, 시민 공간으로 구획했다. 건축 양식은 수메르-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시대로 구분되며, 주택, 궁전, 신전, 지구라트 등이 주요 건축물로 나타났다. 특히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종교적 의미를 지닌 거대한 피라미드형 사원 탑이었다. 조경 건축으로는 정원과 분수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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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건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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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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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양식 | |
사용 시기 | 기원전 10천년기 - 기원전 6세기 |
영향 받은 문화 |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
주요 특징 | |
재료 | 진흙 벽돌 구운 벽돌 돌 (일부) |
구조 | 지구라트 궁전 사원 성벽 문 |
장식 | 채색 벽돌 조각 기둥 |
대표적인 건축물 | |
지구라트 | 우르의 지구라트 에리두의 지구라트 |
궁전 | 코르사바드 궁전 마리 궁전 |
문 | 이슈타르 문 |
기타 | 바벨탑 (성경 속 이야기) 니므루드 |
건축 요소 | |
아치 | 초기 형태 사용 |
돔 | 초기 형태 사용 |
기둥 | 장식적인 용도로 사용 |
기타 | |
지역 | 메소포타미아 |
2. 건축 재료 및 기술
메소포타미아 건축은 주로 진흙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건축 기술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긴 흙을 섞어 벽을 만들었다. 키시 궁전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중정(中庭) 둘레에 원주(円柱)를 세운 회랑(廻廊)을 두는 건축 방식이 사용되었다. 우르의 왕묘에서는 석회암 조석(粗石)에 점토를 보충하여 벽을 만들고, 석회암 또는 소성연와(燒成煉瓦)를 사용하여 까치발 천장, 궁륭천장(穹隆天障), 원통천장(円筒天障)을 만드는 기술이 사용되었고, 이는 후대의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4]
아누/백색 신전 지구라트는 우루크에 위치해 있다. 원래의 피라미드 구조인 "아누 지구라트"는 기원전 4000년경 수메르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백색 신전은 기원전 3500년경에 그 위에 세워졌다.[3]
건축 재료로는 진흙 벽돌, 갈대, 암석, 나무, 애슐러, 진흙 플라스터, 나무 문 등이 사용되었다.[7] 특히 진흙 벽돌은 점토와 잘게 썬 짚을 섞어 틀에 넣고 햇볕에 말려 만들었으며, 벽에는 흙 플라스터를 사용하고 지붕에는 흙과 포플러를 사용했다. 우바이드 시대에는 소성 점토를 벽에 눌러 넣기도 했다.
벽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였는데, 수메르인들은 둥근 벽돌을 선호했지만 안정성이 떨어져 몇 줄마다 직각으로 벽돌을 쌓아 보완했다. 제조 속도가 빠르고 마감 석고 코팅 유지에 유리한 편평하고 볼록한 벽돌도 사용되었다. 햇볕에 구운 벽돌은 내구성이 약해 건물이 주기적으로 훼손되었고, 이에 따라 같은 장소에 반복적으로 재건축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도시의 높이를 점차 높여 주변 평원보다 높은 언덕, 즉 텔을 형성하게 했다.[4]
벽돌의 형태와 크기는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4]
시대 | 벽돌 종류 | 크기 (cm) |
---|---|---|
우루크 시대 후기 (기원전 3600–3200년) | 파첸 | 80×40×15 |
우루크 시대 후기 (기원전 3600–3200년) | 림첸 | 16×16 |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3100–2300년) | 편볼록형 | 10x19x34 |
바빌로니아 시대에는 역청을 모르타르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건물 외벽은 채색된 돌 원뿔, 테라코타 패널, 점토 못 등으로 장식되었으며, 레바논산 삼나무, 아라비아산 섬록암, 인도산 청금석 등 수입 건축 자재가 사용되기도 했다.
바빌론 사원은 부벽으로 지지되는 거친 벽돌 구조물이었으며, 빗물 배수를 위한 배수로가 설치되었다. 우르에서는 납으로 만든 배수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벽돌 사용은 필라스터와 기둥, 프레스코와 에나멜 타일의 발달을 이끌었으며, 벽은 화려한 색상으로 칠해지거나 아연, 금으로 도금되거나 타일로 덮였다. 횃불용 테라코타 원뿔이 석고에 박히기도 했다.
2. 1. 벽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조적술에 일반적으로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역청을 사용했다. 벽돌 형태는 시대에 따라 크게 달랐으며,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4]시대 | 벽돌 종류 | 크기 (cm) |
---|---|---|
우루크 시대 (기원전 3600년 ~ 3200년) | 파첸 | 80×40×15 |
우루크 시대 (기원전 3600년 ~ 3200년) | 림첸 | 16×16 |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3100년 ~ 2300년) | 편볼록형 | 10x19x34 |
메소포타미아 벽돌공들은 둥근 벽돌을 선호했으나, 둥근 벽돌은 다소 불안정했기 때문에 몇 줄마다 나머지 벽돌과 직각으로 벽돌을 쌓았다. 편볼록형 벽돌은 제조 속도가 빠르고 울퉁불퉁한 표면이 마감 석고 코팅을 더 잘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었다.[4]
벽돌은 햇볕에 구워 굳혔다. 이러한 유형의 벽돌은 오븐에서 구운 벽돌보다 내구성이 떨어져 건물은 결국 훼손되었다. 따라서 건물을 정기적으로 파괴하고 평탄화하여 동일한 장소에 다시 짓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계획적인 구조적 수명 주기로 인해 도시의 높이는 점차 높아져 주변 평원보다 높게 솟아올랐다. 그 결과로 생긴 언덕은 텔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근동 전역에서 발견된다.[4]
2. 2. 기타 재료
메소포타미아 주택 건설에는 현대와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는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도시 주변에서 자연적으로 구할 수 있는 갈대, 암석, 나무, 애슐러,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나무 문 등이 사용되었다.[7] 수메르의 일부 도시에서는 나무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은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포플러로 만들어졌다.주택은 삼분법, 둥근형, 직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으며, 긴 지붕이 있는 중앙 복도, 안뜰, 층을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의 주택은 사각형 중앙 방에 다른 방들이 부착된 형태였지만, 주택의 크기와 재료는 거주자들이 직접 지었음을 시사할 정도로 다양했다.[8] 가장 작은 방이 반드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 외부에 갈대와 같이 썩기 쉬운 재료로 집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9] 주택에는 상점, 작업장, 창고, 가축을 들여놓는 공간도 포함될 수 있었다.
수메르의 원통형 인장에는 갈대 집이 묘사되어 있지만, 주요 주택 유형은 안뜰 주택이었다. 이 주택은 ''é'' (설형 문자: 𒂍, ; 수메르어: e₂; 아카드어: bītu)로 불렸으며, 대류 현상을 통해 냉각 효과를 제공하는 열린 안뜰을 향해 안쪽으로 향하는 구조였다. ''tarbaṣu''(아카드어)로 불리는 안뜰은 집의 주요 구성 요소였으며, 모든 방이 안뜰로 연결되었다. 외부 벽에는 특징이 없었고, 집과 거리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입구만 존재했다. 집과 거리 사이를 이동하려면 작은 전실을 통해 90° 회전해야 했다. 거리에서는 전실의 뒷벽만 보였고, 안뜰에서도 거리를 볼 수 없었다. 이는 수메르인들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수메르 주택의 크기는 90m2였다.
간단한 주택은 묶어서 땅에 꽂는 갈대 묶음으로 지을 수 있었고, 더 복잡한 주택은 돌 기초 위에 흙벽돌로 지어졌다.[10][11] 목재, 애시러 블록, 잡석도 주택 건설에 널리 사용되었다.[16] 흙벽돌은 점토와 잘게 썬 짚을 섞어 틀에 넣고 햇볕에 말려 만들었다. 벽에는 흙 플라스터를 사용했고, 지붕에는 흙과 포플러를 사용했다. 우바이드 시대에는 소성 점토를 벽에 눌러 넣기도 했다. 벽에는 예술 작품이 그려지기도 했으며, 지붕은 갈대로 덮인 종려나무 판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지붕 꼭대기는 벽돌이나 나무 계단을 통해 집과 연결되었다. 구운 벽돌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호화로운 건물에만 사용되었다. 문과 문틀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12] 때로는 소가죽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택 사이의 문은 종종 너무 낮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려면 몸을 구부려야 했다. 주택에는 일반적으로 창문이 없었으며, 창문이 있는 경우 점토 또는 나무 격자로 만들어졌다. 바닥은 보통 흙으로 만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 주택은 자주 무너졌기 때문에 자주 수리해야 했다.[13][14]
2. 3. 기술
메소포타미아 건축 기술은 벽돌 사용과 그 형태 변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초기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긴 흙을 섞어 벽을 만들었으며, 키시 궁전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중정(中庭) 둘레에 원주(円柱)를 세운 회랑(廻廊)을 두는 건축 방식이 사용되었다.[4] 시간이 지나면서 벽돌의 형태는 직사각형에서 한쪽 면이 볼록한 형태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수메르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4]벽돌 제작 방식은 다음과 같이 시대별로 변화하였다.
시대 | 벽돌 종류 | 크기 (cm) | 특징 |
---|---|---|---|
우루크 시대 후기 (기원전 3600–3200년) | 파첸 | 80×40×15 | |
우루크 시대 후기 (기원전 3600–3200년) | 림첸 | 16×16 | |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3100–2300년) | 편볼록형 | 10x19x34 | 제조 속도가 빠르고, 마감 석고 코팅 유지에 유리 |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계획은 건축 발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수메르인들은 도시를 계획적으로 건설한 최초의 사회였으며, 이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나타나 있다.
우르의 왕묘에서는 석회암 조석(粗石)에 점토를 보충하여 벽을 만들고, 석회암 또는 소성연와(燒成煉瓦)를 사용하여 까치발 천장, 궁륭천장(穹隆天障), 원통천장(円筒天障)을 만드는 기술이 사용되었다.[4] 이는 후대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바빌로니아 시대에는 역청을 모르타르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선호되는 벽돌 디자인은 둥근 형태였는데, 안정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벽돌공들은 몇 줄마다 직각으로 벽돌을 쌓아 이를 보완했다. 햇볕에 구운 벽돌은 내구성이 약해 건물이 주기적으로 훼손되었고, 이에 따라 같은 장소에 반복적으로 재건축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도시의 높이를 점차 높여 주변 평원보다 높은 언덕, 즉 텔을 형성하게 했다.
건물 외벽은 채색된 돌 원뿔, 테라코타 패널, 점토 못 등으로 장식되었으며, 레바논산 삼나무, 아라비아산 섬록암, 인도산 청금석 등 수입 건축 자재가 사용되기도 했다.[4]
바빌론 사원은 부벽으로 지지되는 거친 벽돌 구조물이었으며, 빗물 배수를 위한 배수로가 설치되었다. 우르에서는 납으로 만든 배수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벽돌 사용은 필라스터와 기둥, 프레스코와 에나멜 타일의 발달을 이끌었으며, 벽은 화려한 색상으로 칠해지거나 아연, 금으로 도금되거나 타일로 덮였다. 횃불용 테라코타 원뿔이 석고에 박히기도 했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건축을 모방하여 벽돌로 궁전과 사원을 지었지만, 돌이 풍부한 북부 지역에서는 벽돌 플랫폼의 필요성이 적었다.
주거 건축에서는 우바이드 주택에서 발전된 안뜰 주택이 주요 유형이었으며, 이는 ''é'' (설형 문자: 𒂍, ; 수메르어: ; 아카드어: )로 불렸다. 안뜰은 집의 주요 구성 요소였으며, 모든 방이 안뜰로 연결되었다. 외부 벽은 특징이 없었고, 집과 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입구만 있었다. 일반적인 수메르 주택의 크기는 90m2였다.
주택 건축에는 갈대, 암석, 나무, 애슐러,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나무 문 등이 사용되었다.[7] 주택은 삼분법, 둥근형, 직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였으며, 대부분 사각형 중앙 방에 다른 방들이 부착된 형태였다. 가장 작은 방이 반드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 공간은 아니었으며, 도시 외부에 갈대와 같이 썩기 쉬운 재료로 집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9]
3. 도시 계획
초기 도시들은 신석기 혁명의 결과로 성장했으며, 계획적인 부분과 유기적인 부분이 혼합되어 있었다. 성벽, 사원, 운하, 주요 거리는 계획적으로 건설되었지만, 주거 및 상업 공간은 불규칙한 설계를 따랐다.
기원전 19세기에서 1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건축 유적으로서 우르와 마리가 대표적이다. 우르의 도시 유적은 신전을 신역(神域)에 모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분산 배치했다. 닌갈 여신을 모신 신전은 240m2의 부지를 두꺼운 벽으로 둘러쌌으며, 예배용 제단, 외정(外庭), 제사를 지내는 내진(內陣)과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일반 주택은 무계획하게 세워져 규모와 방수가 일정치 않았으며, 이층집, 빵집, 요리점, 대장간 등이 발견되었다.
마리의 도시 유적은 궁전의 규모가 컸으며, 특히 마리의 대왕궁은 220실(室)로 구성되어 미로(迷路)를 이루고 있었다. 벽이 두껍게 포장된 궁전은 타일을 붙인 방과 창고, 도서관, 프레스코 대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신전 건축에는 이슈타르 신전, 닌쿠르사그 신전, 다곤 신전과 지구라트의 기단(基壇) 등이 있었는데 거의 함무라비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도시 계획의 일부로 가장 초창기부터 열린 공간 계획이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우루크의 묘사에는 그 도시의 3분의 1이 과수원으로 할당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계획된 열린 공간은 니푸르의 5분의 1 구획에서도 발견된다. 또 다른 중요한 조경 요소는 빈터(아카드어: ''키슈부'')였다.
도시 외곽에서는 수메르 관개 농업이 역사상 최초의 정원 형태를 만들어냈다. 정원(사르)은 둘레에 운하가 있는 144제곱 규빗이었다.[22] 이 형태의 폐쇄된 사각형은 이후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 정원의 기초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분수의 사용은 기원전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예로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조각된 바빌로니아 유역이 있으며, 이는 기르수, 라가시에서 발견되었다. "코멜강 협곡에서 발견된 고대 아시리아 분수는 견고한 바위에 새겨진 유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단식으로 시내까지 내려간다." 물은 작은 도관에서 이끌어졌다.[23]
3. 1. 도시 구조
수메르인들은 계획된 구조물로서 도시를 구상하고 건설한 최초의 사회였다. 그들이 이러한 업적에 자부심을 가졌다는 것은 길가메시 서사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서사시는 우루크—그 거대한 성벽, 거리, 시장, 사원, 정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우루크는 식민화와 정복을 통해, 그리고 사회가 더 커지고 정교해짐에 따라 서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도시 문화의 표본이 되었다.[5]
도시 건설은 신석기 혁명에서 시작된 추세의 최종 결과물이었다. 도시의 성장은 부분적으로 계획되었고 부분적으로 유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계획성은 성벽, 높은 사원 지구, 항구가 있는 주요 운하, 그리고 주요 거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거 및 상업 공간의 더 세밀한 구조는 계획된 구역에 의해 부과된 공간적 제약에 대한 경제적 힘의 반응으로, 규칙적인 특징을 가진 불규칙한 설계를 낳았다. 수메르인들이 부동산 거래를 기록했기 때문에, 설형 문자 자료를 통해 도시 성장 패턴, 밀도, 재산 가치 및 기타 지표의 상당 부분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5]
전형적인 도시는 공간을 주거, 복합 용도, 상업 및 시민 공간으로 나누었다. 주거 지역은 직업별로 그룹화되었다.[5] 도시의 핵심에는 항상 지리적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높은 사원 단지가 있었다. 이 높은 사원은 대개 도시가 세워지기 전에 존재했으며, 도시 형태가 성장하는 중심핵이었다. 문에 인접한 지구는 특별한 종교적, 경제적 기능을 수행했다.
도시는 항상 작은 촌락을 포함한 관개 농경지를 포함했다. 도로와 운하의 네트워크가 도시를 이 땅과 연결했다. 교통망은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넓은 의례 거리(아카드어:''sūqu ilāni u šarri''), 공공 통행 거리(아카드어:''sūqu nišī''), 그리고 개인적인 막다른 골목(아카드어:''mūṣû'')이었다. 블록을 정의하는 공공 거리는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막다른 골목은 훨씬 더 유동적이었다. 현재 추정치는 도시 면적의 10%가 거리이고 90%가 건물이다.[6] 그러나 운하는 훌륭한 교통을 위해 도로보다 더 중요했다.
3. 2. 교통망
수메르인들은 계획된 구조물로서 도시를 구상하고 건설한 최초의 사회였다. 도시 건설은 신석기 혁명에서 시작된 추세의 최종 결과물이었다. 도시의 성장은 부분적으로 계획되었고 부분적으로 유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계획성은 성벽, 높은 사원 지구, 항구가 있는 주요 운하, 그리고 주요 거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메르인들이 부동산 거래를 기록했기 때문에, 설형 문자 자료를 통해 도시 성장 패턴, 밀도, 재산 가치 및 기타 지표의 상당 부분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5]
도시는 항상 작은 촌락을 포함한 관개 농경지를 포함했다. 도로와 운하의 네트워크가 도시를 이 땅과 연결했다. 교통망은 다음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블록을 정의하는 공공 거리는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막다른 골목은 훨씬 더 유동적이었다. 현재 추정치는 도시 면적의 10%가 거리이고 90%가 건물이다.[6] 그러나 운하는 훌륭한 교통을 위해 도로보다 더 중요했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건축 유적은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9세기~16세기)의 우르와 볼시파 등지가 왕조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볼시파는 수도의 중심부에 나부·나나·신 세 신전과 지구라트를 세웠고 길은 기준에 정한 방향으로 닦았으며 사방 1.5km의 주위에 호(濠)를 파는 도시계획이었다. 길은 왕궁 앞에서 남북으로 마르두크 신전까지의 개선도로(凱旋道路)와 여기에 90도로 교차하는, 성역에서 나온 마르두크 가로는 주요한 도로로서 규칙 바른 형식이었다.
4. 건축 양식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건축 양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주택 건축메소포타미아 주택 건축에는 갈대, 암석, 나무, 애슐러,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나무 문 등이 사용되었다.[7] 대부분의 집은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포플러로 만들어졌다. 주택은 삼분법, 둥근형, 직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였으며, 긴 지붕이 있는 중앙 복도, 안뜰, 층이 있었다. 대부분 다른 방이 부착된 사각형 중앙 방이 있었지만, 크기와 재료의 차이는 거주자들이 직접 지었음을 시사한다.[8] 가장 작은 방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아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 외부에 썩기 쉬운 재료로 집을 지었을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9] 주택에는 상점, 작업장, 창고, 가축 우리가 포함되기도 했다.
주거 설계는 우바이드 주택에서 직접 발전했다. 원통형 인장에는 갈대 집이 묘사되지만, 안뜰 주택이 주요 유형이었으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é'' (설형 문자: , ; 수메르어: ; 아카드어: )로 불리는 이 집은 열린 안뜰을 향해 안쪽으로 향했으며, ''tarbaṣu''(아카드어)로 불리는 안뜰은 집의 주요 구성 요소였다. 외부 벽은 특징이 없었고, 집과 거리 사이에는 작은 전실을 통해 90° 회전해야 했다. 수메르인들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거리에서는 전실의 뒷벽만 보였고, 안뜰에서도 거리를 볼 수 없었다. 수메르 주택의 일반적인 크기는 90m2였다.
우바이드 시대 가옥은 길고 지붕이 있는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들이 연결된 세 부분으로 나뉜 형태였다. 중앙 복도는 식사 및 공동 활동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바이드 가옥은 다양한 형태였고, 일부는 다른 가옥보다 더 풍부한 유물을 포함했다. 우바이드 가옥은 서로 연결되기도 했으며, 건축 양식은 우바이드 사원과 구별하기 어려웠다.[15] 우르크 시대 가옥은 직사각형이나 둥근 형태 등 다양했다. 일부는 방이 하나만 있었지만, 다른 가옥은 여러 개의 방을 가졌고, 일부 방은 지하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4천년에는 안뜰이 도입되어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기초가 되었다. 안뜰은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홀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홀들은 아마도 손님 접견실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가옥은 2층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2층은 식사, 수면, 접대 용도로 사용되었을 수 있고, 침실도 포함했을 수 있다.[16] 사람들은 지붕에 채소를 심거나 종교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12] 1층은 상점, 작업장, 창고, 가축 사육장으로 사용되었으며,[17] 한 방은 보통 성소였다.[18]
4. 1. 수메르-아카드 건축
수메르의 조적술은 일반적으로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역청이 사용되었다. 벽돌 스타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달라졌으며, 시대별로 분류된다.[4]시대 | 벽돌 종류 | 크기 (cm) |
---|---|---|
우루크 시대 후기 (기원전 3600–3200년) | 파첸 | 80×40×15 |
우루크 시대 후기 (기원전 3600–3200년) | 림첸 | 16×16 |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3100–2300년) | 편볼록형 | 10x19x34 |
선호되는 디자인은 둥근 벽돌이었는데, 이는 다소 불안정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벽돌공들은 몇 줄마다 나머지 벽돌과 직각으로 벽돌을 쌓았다. 편볼록형 벽돌의 장점은 제조 속도가 빠르다는 점과 울퉁불퉁한 표면으로 다른 유형의 벽돌에서 나오는 매끄러운 표면보다 마감 석고 코팅을 더 잘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벽돌은 햇볕에 구워 굳혔다. 이러한 유형의 벽돌은 오븐에서 구운 벽돌보다 훨씬 내구성이 떨어지므로 건물은 결국 훼손되었다. 정기적으로 파괴, 평탄화되어 동일한 장소에 재건되었다.
건축 유구는 키시, 우르, 우루크 등 수메르인이 만든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키시 궁전의 예와 같이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긴 흙으로 벽을 만들고, 중정(中庭) 둘레에 원주(円柱)를 세운 회랑(廻廊)을 두른 구조가 있었다. 원주는 특별한 형태의 햇볕에 말린 벽돌로 만들어졌고, 벽에는 동물이나 사람 형태를 조개껍질을 사용한 상감(象嵌) 장식이 있었다. 신전 건축은 보통 주택의 평면을 확대하고 호화롭게 만든 것으로, 직사각형 중정의 한구석에 있는 소실(小室)에서 예배소로 통하는 가늘고 긴 형식으로 신좌(神座), 공양대(供養臺), 관전용(灌奠用) 수반(水盤) 등을 갖추고 있었다.
아누/백색 신전 지구라트는 우루크에 위치해 있다. 원래의 피라미드 구조인 "아누 지구라트"는 기원전 4000년경 수메르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백색 신전은 기원전 3500년경에 그 위에 세워졌다.[3]
초기 왕조를 대표하는 것은 우르의 왕묘인데, 호화롭고 현란한 금과 부장품, 많은 공예 유품의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묘실은 석회암 조석(粗石)에 점토를 보충해 벽을 만들고, 석회암 또는 소성연와(燒成煉瓦)를 사용하여 까치발 천장, 궁륭천장(穹隆天障), 원통천장(円筒天障)을 만들었다. 이 기술의 진보는 후세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연와의 형식은 직사각형의 평평한 것에서 한쪽은 평평하지만 다른 한쪽은 불룩한 철형(凸型) 연와로 변했는데, 이는 수메르인이 애호한 형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카드 시대의 왕들은 외적 토벌과 반란 진압에 쫓기어 건축 유물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4. 2. 바빌로니아 건축
기원전 19세기에서 1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건축 유적으로 유프라테스강 하반의 우르와 중부 유프라테스 하반에 있는 도시국가인 마리를 들 수 있다. 우르의 도시 유적은 신전을 신역(神域)에 모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닌갈 여신을 모신 신전은 240m2의 부지를 두꺼운 벽으로 둘러쌌으며, 경내에는 예배용 제단과 외정(外庭), 제사를 지내는 내진(內陣)과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한 신전, 소예배전, 제사자(祭司者)의 주택 등이 격벽(隔壁)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또한 배수구와 포장된 바닥을 설치하여 수메르 신전 건축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1] 일반 주택은 무계획하게 세워져 규모와 방수가 일정치 않았으며, 발굴 결과 이층집, 빵집, 요리점, 대장간 등이 발견되었다.[1]마리의 도시 유적은 1933년에 우연히 발견된 후 조직적인 발굴을 통해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1] 당시의 도시계획은 지상 지배자의 권위가 강화되었던 경향을 반영하여 신전 건축보다 궁전의 규모가 컸다.[1] 특히 마리의 대왕궁은 220실(室)로 구성되었으며, 크레타의 라비린토스의 영향을 받아 미로(迷路)를 이루고 있다.[1] 벽이 두껍게 포장된 궁전에서는 타일을 붙인 방과 창고, 2만 4천 장의 점토판(粘土板)을 소장한 도서관, 프레스코 대벽화 등이 발견되었다.[1] 이슈타르 신전, 닌쿠르사그 신전, 다곤 신전과 지구라트의 기단(基壇) 등 신전 건축물은 대부분 함무라비왕에 의해 파괴되었다.[1] 일반 주택은 안뜰을 둘러싼 가늘고 긴 방의 형식으로 혼잡하게 구성되어 자연 발생적 성격을 보인다.[1]
바빌로니아에서는 부조 대신 입체적인 조형물이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기르수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이 그 초기 사례인데 다소 서투르지만 사실적이다.[2] 바빌로니아에서는 돌이 부족했기에 모든 조약돌이 귀중했고, 보석 세공술이 매우 발전했다. 아카드 사르곤 시대의 두 개의 원통형 인장은 그 종류 중 최고의 예시이다.[2]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초기 야금술의 뛰어난 사례 중 하나는 엔테메나의 은제 화병이다.[2] 후대에는 금 귀걸이와 팔찌와 같은 장신구 제작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었다. 구리 역시 숙련되게 가공되었는데, 바빌로니아가 구리 가공의 발상지일 가능성도 있다.[2]
바빌로니아인들은 초기부터 자수와 융단으로 유명했다.[3] 아시리아 도자기의 형태는 우아하며, 니네베 궁전에서 발견된 유리와 자기는 이집트의 모델에서 유래했다.[3] 투명 유리는 사르곤 치세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3] 석재, 점토, 유리는 꽃병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기르수에서 이집트 초기 왕조 시대의 것과 유사한 경질 석재 꽃병이 발굴되었다.[3]
4. 3. 아시리아 건축
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왕들은 아슈르, 님루드(카라크), 두르 샤르루킨, 니네베 등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여러 도성을 건설했다. 이 유적들을 통해 아시리아 건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아시리아의 발상지인 아슈르는 아누·아다드 양신의 합사형식 신전과 왕궁이 도시 북부에 정비되어 있었다. 왕권이 확대되고 전제정치가 강화되면서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도시의 중심지로 이동하는 변화를 보였다.
도성의 성벽은 매우 높고 두꺼웠는데, 기원전 706년에 건설된 두르 샤르루킨 성의 경우 성벽 두께가 28m에 달했다. 이는 피지배 민족에 대한 가혹한 통치로 인한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군사 방어 태세를 강화한 결과였다. 성문 간 도로는 좁고 굽은 골목길 형태로 만들어져 시야를 가리는 등 도시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건물 기초에는 북메소포타미아산 석재를 많이 사용했고, 가옥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를 사용했다. 내부 장식의 요벽(腰壁)이나 입구에는 앨러배스터나 동석(凍石)으로 만든 부조 화장판을 끼워 넣었다.
도성 내 일반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나 신전에 비해 빈약하고 검소했다. 카라크의 테메노스 부근 발굴 결과, 천막 생활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귀족의 저택은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사방에 방을 배치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를 복잡하게 구성한 것이 궁전 건물이었다.
아슈르 나시르 팔 2세가 건설한 카라크의 테메노스 궁전은 사무 공간, 옥좌가 있는 의식 알현(謁見)의 방, 거실 등 세 가지 형식의 건축물로 나뉘어 있었다. 반면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 궁전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중심으로 석재와 구운 벽돌로 쌓은 높은 기단(基壇) 위에 지어져 일반 저택과는 다른 구조를 보였다. 홀과 계단의 결합, 중정(中庭) 배치 등에서 특징을 보이며,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궁전 형식인 비트 히라니 양식을 채택하여 이후 아시리아 건축 양식의 기본이 되었다.
신전 건축은 궁전 건축에 부속된 경우가 많았다. 측면 출입 양식의 지붕과 전실(前室) 다음에 깊숙한 내진(內陣)을 설치하고 벽감(壁龕)을 만들었다. 성탑 지구라트는 4단 내지 6단의 정방형 또는 장방형 탑을 쌓아 올린 고탑형식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후기 아시리아 건축가들은 바빌로니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석재와 벽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 궁전의 벽은 칼데아처럼 칠하는 대신 조각된 채색 석판으로 장식되었다. 이러한 부조 예술은 세 단계를 거쳤다.
왕 | 특징 |
---|---|
아슈르나시르팔 2세 | 활기차지만 단순함 |
사르곤 2세 | 신중하고 사실적 |
아슈르바니팔 | 세련되었지만 대담함 부족 |
4. 4. 신바빌로니아 건축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건축 유적은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9세기~16세기)의 우르와 볼시파 등지가 왕조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볼시파는 수도 중심부에 나부, 나나, 신 세 신전과 지구라트를 세웠고, 길은 기준에 정한 방향으로 닦았으며, 사방 1.5km 주위에 호(濠)를 파는 도시 계획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앗시리아 도시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바빌론일 것이다. 바빌론은 거의 4각형인데 중앙에 유프라테스강이 남북으로 뚫려 흐르고 그 왼편 강가, 즉 도시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 최고신(最高神)인 마르두크 신전과 바벨탑으로 유명한 지구라트를 포함한 신역(神域)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왕궁과 부속된 요새(要塞) 건축은 북단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다. 왕궁은 중정(中庭)에 연속되는 구성으로 전체적인 플랜은 장방형이었다. 이 성채(城砦)의 동북 구석진 곳에 아치 천장을 가진 다수의 협소한 방이 있는데, 이것은 헤로도투스 이래의 유명한 옥상정원(屋上庭園)의 하부구조라 생각되고 있다. 지구라트는 한 변이 90m, 높이 90m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마르두크 신전은 각각 80m와 85m의 규모이며, 특히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예배소의 호화로움으로 미루어 당시의 신전이 얼마나 웅장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길은 왕궁 앞에서 남북으로 마르두크 신전까지의 개선도로(凱旋道路)와 여기에 90도로 교차하는, 성역에서 나온 마르두크 가로는 주요한 도로로서 규칙 바른 형식이었다.[1]5. 주요 건축물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건축물로는 궁전, 신전, 지구라트 등이 있다.
궁전궁전은 초기 왕조 1기 시대에 생겨났으며, 처음에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권력이 집중되면서 규모와 복잡성이 증가했다. 궁전은 '큰 집'(설형 문자: E₂.GAL, 수메르어: e₂-gal, 아카드어: ''ekallu'')이라고 불렸으며, 루갈 또는 엔시가 거주하며 일하는 곳이었다.
초기 메소포타미아 엘리트들의 궁전은 대규모 복합 건물이었으며,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했다. 가장 초기의 예는 디얄라 강 계곡의 카파자(Khafajah)와 텔 아스마르(Tell Asmar)와 같은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기원전 3천년기의 궁전들은 대규모 사회 경제 기관의 역할을 했으며, 주거 및 개인적인 기능과 함께 장인 작업장, 식량 저장고, 의례용 안뜰을 갖추고 있었고, 종종 신사와 관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우르(Ur)에 있는 "기파루"(수메르어: e₂gi₆-par₄-ku₃)는 달의 신 난나의 여사제가 거주했던 곳으로, 여러 개의 안뜰, 많은 성소, 죽은 여사제를 위한 묘실, 의례용 연회장이 있는 주요 복합 건물이었다. 시리아의 마리에서 발굴된 메소포타미아 궁전은 고 바빌로니아 왕조 시대의 복잡한 구조를 보여주는 유사한 예시이다.
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궁전들은 벽에 새겨진 아시리아 궁전 부조로 유명하다. 이 부조는 정방석이라고 불리는 돌 판에 조각되었으며, 숭배 장면이나 왕의 군사적, 시민적 업적을 묘사했다. 문과 중요한 통로에는 라마수와 날개 달린 정령과 같은 주술적 신화적 인물의 거대한 석조 조각상이 양쪽에 서 있었다. 이러한 궁전들은 크고 작은 안뜰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의 옥좌실은 주요 국가 협의회가 열리고 국가 의식이 거행되는 거대한 의례용 안뜰로 열려 있었다.
상아 가구가 아시리아 궁전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북 시리아 신 히타이트 국가와의 격렬한 무역 관계를 보여준다. 주요 건물의 나무 문은 청동 압착 띠로 장식되었지만, 제국 멸망 시 대부분 약탈당했다. 발라와트 문이 주요 생존 유물이다.
신전신전은 종종 도시 정착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며, 수메르 역사 2,500년 동안 작고 단칸 구조에서 정교한 다 에이커 규모의 복합 건물로 성장했다. 수메르 신전, 요새, 궁전은 부벽, 움푹 들어간 곳, 반기둥과 같은 발전된 재료와 기술을 사용했다. 수메르 신전은 초기 우바이드 신전에서 진화했으며, 신전이 쇠퇴하면 의례적으로 파괴되었고 그 기초 위에 새로운 신전이 건설되었다. 에리두의 E₂.abzu 신전의 진화는 이 과정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많은 신전에는 텔 우카이르의 신전과 같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궁전과 도시 벽은 초기 왕조 시대의 신전보다 훨씬 늦게 등장했다.[19]
수메르 신전은 근동 우주론을 반영하여, 세 개의 층을 연결하는 세계 축인 세계 산을 가지고, 짠물 바다로 둘러싸인 땅의 원반으로 세계를 묘사했다. 신전은 신과 인간 사이의 만남의 장소인 세계 축 역할을 했다.[19] 신전의 평면도는 산에서 세계의 네 지역으로 흐르는 네 개의 강을 상징하기 위해 모서리가 사방을 가리키는 직사각형이었다. 신전은 다짐 흙으로 만든 낮은 테라스에 지어졌으며, 이는 창조 동안 물에서 나타난 최초의 땅인 '순수한 흙'(수메르어: du₆-ku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신전의 긴 축의 문은 신들이 들어오는 지점이었고, 짧은 축의 문은 인간들이 들어오는 지점이었다. 이 구성은 굽은 축 접근법이라고 불렸는데, 들어가는 사람이 중앙 홀 끝에 있는 숭배 조각상을 마주하기 위해 90도 회전을 하기 때문이다. 제물상은 축의 교차점에 있는 신전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우루크 시대의 신전은 삼분할, T자형 또는 결합된 평면도로 나누어졌다. 우바이드 시대에서 유래한 삼분할 평면도는 양쪽에 두 개의 작은 홀이 있는 큰 중앙 홀을 가지고 있었고, T자형 평면도는 중앙 홀에 수직으로 직사각형의 한쪽 끝에 홀이 있었다. 우루크의 에안나 지구에서 발견된 신전 C는 고전적인 신전 형태의 사례 연구이다.
초기 왕조 시대에는 신전 설계가 다양해졌다. 신전은 방위, 직사각형 평면, 부벽과 같은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안뜰, 벽, 분지, 병영을 포함한 다양한 새로운 구성을 갖추었다. 카파자의 신전은 켈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안뜰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전형적인 예이다.
고(高) 신전은 도시의 수호신이 있는 특별한 유형의 신전으로, 사제단을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장 및 배포 센터 역할도 했다. 우루크의 백색 신전은 아도베 벽돌 플랫폼 위에 매우 높이 지어진 고 신전의 전형적인 예이다. 초기 왕조 시대에 고 신전은 지구라트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지구라트
지구라트(Ziggurat)는 수메르(Sumer) 도시 국가에서 처음 건설된 거대한 피라미드형 사원 탑으로, 이후 바빌로니아(Babylon)와 아시리아(Assyria) 도시에서도 발전했다.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는 32개의 지구라트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28개는 이라크(Iraq)에, 4개는 이란(Iran)에 있다.[3] 주요 지구라트로는 이라크 나시리야(Nasiriyah) 인근의 우르 대 지구라트(Great Ziggurat of Ur), 이라크 바그다드(Baghdad) 인근의 아카르 쿠프 지구라트(Ziggurat of Aqar Quf), 이란 후제스탄주(Khūzestān)의 초가 잔빌(Chogha Zanbil)(가장 최근에 발견됨), 이란 카샨(Kashan) 인근의 테페 시알크(Tappeh Sialk) 등이 있다.
지구라트는 지역 종교를 기리는 기념물로서 수메르인, 바빌론인, 엘람(Elam)인, 아시리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가장 초기의 지구라트는 기원전 4천년 우바이드 시대(Ubaid period)의 융기된 플랫폼이며,[20] 가장 늦은 것은 기원전 6세기이다. 지구라트의 꼭대기는 평평했으며, 계단식 피라미드 양식은 초기 왕조 시대 말에 시작되었다.[21]
지구라트는 직사각형, 타원형 또는 사각형 플랫폼 위에 단을 이루며 건설된 피라미드(pyramid)형 구조였다. 햇볕에 구운 벽돌이 지구라트의 핵심을 이루었고, 겉면은 구운 벽돌로 마감되었다. 마감재는 종종 다양한 색상으로 유약을 칠했으며 점성술(astrology)적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 왕들은 때때로 유약 처리된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단의 수는 2개에서 7개까지 다양했으며, 정상에는 신전이나 사원이 있었다. 지구라트 한쪽에 있는 일련의 경사로 또는 기저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경사로를 통해 신전에 접근했다.
고전적인 지구라트는 굽은 부벽, 유리질 벽돌 피복, 높이의 엔타시스(entasis)를 특징으로 하는 신수메르 시대에 등장했다. 우르 지구라트는 이 양식의 가장 좋은 예이다. 이 시대 사원 설계의 또 다른 변화는 굽은 축이 아닌 직선 축으로 사원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우르에 있는 우르-남무의 지구라트는 3단계 구조로 설계되었지만, 오늘날에는 2단계만 남아 있다. 진흙 벽돌 핵심 구조는 원래 역청에 설치된 구운 벽돌 외피로 덮여 있었으며, 첫 번째(가장 낮은) 단계는 2.5m, 두 번째 단계는 1.15m였다. 구운 벽돌 각각에는 왕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단계의 경사진 벽은 부벽으로 지지되었다. 꼭대기로의 접근은 3중 기념 계단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계단은 모두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 사이 착륙 지점에서 열리는 문으로 모였다. 첫 번째 단계의 높이는 약 11m였으며, 두 번째 단계는 약 5.7m 상승했다. 일반적으로 세 번째 단계는 지구라트 발굴자(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사원으로 장식되었다. 초가 잔빌(Chogha Zanbil) 지구라트에서 고고학자들은 지구라트 구조 핵심을 가로질러 진흙 벽돌 덩어리를 묶었던 거대한 갈대 밧줄을 발견했다.
5. 1. 주택
메소포타미아의 주택 건축 재료는 오늘날과 유사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갈대, 암석, 나무, 애슐러,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나무 문 등이 도시 주변에서 자연적으로 구할 수 있었다.[7] 대부분의 주택은 진흙 벽돌, 진흙 플라스터, 포플러로 만들어졌다. 주택은 삼분법, 둥근형, 직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였으며, 긴 지붕이 있는 중앙 복도, 안뜰, 층을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의 주택은 사각형 중앙 방에 다른 방들이 붙어 있는 형태였지만, 크기와 재료는 매우 다양했는데, 이는 거주자들이 직접 집을 지었음을 보여준다.[8] 가장 작은 방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아니었을 수 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 외부에 갈대와 같이 썩기 쉬운 재료로 집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9] 주택에는 상점, 작업장, 창고, 가축을 들여놓을 수도 있었다.주거 설계는 우바이드 주택에서 직접 발전했다. 수메르의 원통형 인장에는 갈대 집이 묘사되기도 했지만, 안뜰 주택이 주요 유형이었으며, 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é'' (설형 문자: 𒂍, e₂|에sux; 아카드어: bītu|비투akk)라고 불린 이 집은 대류 현상을 통해 냉각 효과를 제공하는 열린 안뜰을 향해 안쪽으로 설계되었다. ''tarbaṣu''(타르바수, 아카드어)라고 불리는 이 안뜰은 집의 주요 구성 요소였으며, 모든 방이 안뜰로 연결되었다. 외부 벽에는 특징이 없었고, 집과 거리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입구만 있었다. 집과 거리 사이를 이동하려면 작은 전실을 통해 90° 회전해야 했다. 거리에서는 전실의 뒷벽만 보였고, 안뜰에서도 거리를 볼 수 없었다. 이는 수메르인들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수메르 주택의 일반적인 크기는 90m2였다.
간단한 주택은 갈대를 묶어 땅에 꽂아 지을 수 있었다. 더 복잡한 주택은 돌 기초 위에 흙벽돌로 지어졌다.[10][11] 목재, 애시러 블록, 잡석도 주택 건축에 사용되었다.[16] 흙벽돌은 점토와 잘게 썬 짚을 섞어 틀에 넣고 햇볕에 말려 만들었다. 벽에는 흙 플라스터를 사용했고, 지붕에는 흙과 포플러를 사용했다. 우바이드 시대에는 소성 점토를 벽에 눌러 넣기도 했다. 벽에는 예술 작품이 그려지기도 했다. 지붕은 갈대로 덮인 종려나무 판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지붕 꼭대기는 벽돌이나 나무 계단을 통해 집과 연결되었다. 구운 벽돌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호화로운 건물에만 사용되었다. 문과 문틀은 나무로 만들어졌다.[12] 때로는 문이 소가죽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택 사이의 문은 종종 너무 낮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려면 몸을 구부려야 했다. 주택에는 일반적으로 창문이 없었으며, 창문이 있는 경우 점토나 나무 격자로 만들어졌다. 바닥은 보통 흙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주택은 종종 무너졌기 때문에 자주 수리해야 했다.[13][14]
우바이드 시대의 가옥은 세 부분으로 나뉜 형태였다. 가옥은 길고 지붕이 있는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들이 연결된 구조였다. 중앙 복도는 식사 및 공동 활동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바이드 가옥은 다양한 형태를 보였으며, 어떤 가옥은 다른 가옥보다 더 풍부한 유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바이드 가옥은 서로 연결되기도 했다. 우바이드 가옥의 건축 양식은 우바이드 사원과 구별하기 어려웠다.[15] 우르크 시대에는 가옥이 다양한 형태를 갖추었다. 어떤 가옥은 직사각형이었고, 다른 가옥은 둥근 형태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일부 가옥은 방이 하나만 있었지만, 다른 가옥은 여러 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이러한 방들 중 일부가 지하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4천년에는 안뜰이 메소포타미아에 도입되었다. 안뜰은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안뜰은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홀로 둘러싸여 있었다.[15] 이 홀들은 아마도 손님을 위한 접견실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가옥은 2층 이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층은 식사, 수면, 접대 용도로 사용되었을 수 있으며, 침실도 포함했을 수 있다.[16] 사람들은 지붕에 채소를 심거나 종교 의식을 행하곤 했다.[12] 1층은 상점, 작업장, 창고, 가축 사육장으로 사용되었다.[17] 한 방은 보통 성소였다.[18]
고대 수메르 주택에는 정교하게 장식된 의자, 걸상, 단지, 욕조가 있었다. 부유한 시민들은 변기와 적절한 배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16] 일부 주택에는 주택 중앙에 제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5] 이 제단은 신들에게 바쳐졌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사람들에게 바쳐졌을 수도 있다.
5. 2. 궁전
궁전은 초기 왕조 1기 시대에 생겨났다. 비교적 소규모로 시작하여 권력이 점차 집중되면서 규모와 복잡성이 증가했다. 궁전은 '큰 집'(설형 문자: E₂.GAL 수메르어 e₂-gal 아카드어: ''ekallu'')이라고 불리며, 루갈 또는 엔시가 거주하며 일하는 곳이었다.초기 메소포타미아 엘리트들의 궁전은 대규모 복합 건물이었으며, 종종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가장 초기의 예는 디얄라 강 계곡의 카파자(Khafajah)와 텔 아스마르(Tell Asmar)와 같은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기원전 3천년기의 이 궁전들은 대규모 사회 경제 기관의 역할을 했으며, 주거 및 개인적인 기능과 함께 장인 작업장, 식량 저장고, 의례용 안뜰을 갖추고 있었으며, 종종 신사와 관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우르(Ur)에 있는 소위 "기파루"(수메르어: e₂gi₆-par₄-ku₃)는 달의 신 난나의 여사제가 거주했던 곳으로, 여러 개의 안뜰, 많은 성소, 죽은 여사제를 위한 묘실, 의례용 연회장이 있는 주요 복합 건물이었다. 메소포타미아 궁전의 유사하게 복잡한 예는 시리아의 마리에서 발굴되었으며, 고 바빌로니아 왕조 시대에 속한다.
기원전 19세기에서 1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건축 유적으로서 유프라테스 하반(河畔)의 우르와 중부 유프라테스 하반에 있는 도시국가인 마리를 들 수 있다. 마리의 도시 유적은 1933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그 후 조직적인 발굴로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도시계획은 지상 지배자 권위가 강화되었던 경향을 반영하여 신전 건축보다 궁전의 규모가 컸다. 특히 마리의 대왕궁은 220실(室)로 되어 그 계획은 크레타의 라비린토스의 영향을 받아 미로(迷路)를 구성하고 있다. 벽이 두껍게 포장된 궁전은 타일을 붙인 방과 창고, 2만 4천 장의 점토판(粘土板)을 소장한 도서관, 프레스코의 대벽화 등이 발견되었다.[2]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건축 유적은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9세기~16세기)의 우르와 볼시파 등지가 왕조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왕궁과 부속된 요새(要塞) 건축은 북단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다. 왕궁은 중정(中庭)에 연속하는 구성으로 전체적인 플랜은 장방형이었다. 이 성채(城砦)의 동북 구석진 곳에 아치 천장을 가진 다수의 협소한 방이 있는데 이것은 헤로도투스 이래의 유명한 옥상정원(屋上庭園)의 하부구조라 생각되고 있다.[2]
아시리아 제국 역대의 왕들이 만든 아슈르, 님루드(카라크), 두르 샤르루킨, 니네베 등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산재한 도성(都城)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그 모습을 찾아 더듬어본다. 앗시리아의 발상지 아슈르는 아누·아다드 양신의 합사형식(合祀形式)의 신전과, 왕궁이 도성의 북부에 정비되어 왕권의 확대와 전정(專政)에 의한 신장(伸張)과 더불어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는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귀족의 저택은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방이 사방에 만들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그것을 복잡하게 짠 것이 궁전 건물이었다. 아슈르 나시르 팔 2세가 세운 카라크의 테메노스 궁전은 사무를 취급하는 장소, 옥좌를 포함한 의식 알현(謁見)의 방, 거실 등 세 형식의 건축으로 나뉘어 있다. 이에 대해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의 궁전은 양간(陽乾) 연와를 중심으로 석재와 소성연와로 구축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구축되어 저택의 건축 형식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홀과 계단의 결합 형식과 중정(中庭)의 배치 등에 특색을 볼 수 있는 한편, 소아시아와 시리아 방면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궁전 형식인 비트 히라니 양식을 채용하였으며 그 후 앗시리아 건축 양식의 기본이 되었다.[2]
철기 시대의 아시리아 궁전, 특히 칼후/님루드, 두르 샤루킨/코르사바드 및 니누와/니네베에서 발견된 궁전은 벽에 새겨진 광범위한 그림 및 텍스트 내러티브 프로그램인 아시리아 궁전 부조 때문에 유명해졌으며, 이 부조는 모두 정방석이라고 불리는 돌 판에 조각되었다. 이러한 그림 프로그램은 숭배 장면이나 왕의 군사적, 시민적 업적에 대한 내러티브를 통합했다. 문과 중요한 통로에는 라마수와 날개 달린 정령과 같은 주술적 신화적 인물의 거대한 석조 조각상이 양쪽에 서 있었다. 이러한 철기 시대 궁전의 건축적 배열 역시 크고 작은 안뜰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왕의 옥좌실은 주요 국가 협의회가 열리고 국가 의식이 거행되는 거대한 의례용 안뜰로 열려 있었다.
상아 가구가 아시리아 궁전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북 시리아 신 히타이트 국가와의 격렬한 무역 관계를 보여준다. 청동 압착 띠는 주요 건물의 나무 문을 장식했지만, 제국 멸망 시 대부분 약탈당했다. 발라와트 문이 주요 생존 유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후기 아시리아 건축가들은 바빌론의 영향에서 벗어나 석재와 벽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 궁전의 벽은 칼데아처럼 칠하는 대신 조각된 채색 석판으로 장식되었다. 이들 ''부조''의 예술은 세 단계를 거쳤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치하에서는 활기차지만 단순했고, 사르곤 2세 치하에서는 신중하고 사실적이었으며, 아슈르바니팔 치하에서는 세련되었지만 대담함이 부족했다.[2]
5. 3. 신전
신전은 종종 도시 정착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며, 수메르 역사 2,500년 동안 작고 단칸 구조에서 정교한 다 에이커 규모의 복합 건물로 성장했다. 수메르 신전, 요새, 궁전은 부벽, 움푹 들어간 곳, 반기둥과 같은 더 발전된 재료와 기술을 사용했다. 연대기적으로 수메르 신전은 초기 우바이드 신전에서 진화했다. 신전이 쇠퇴하면 의례적으로 파괴되었고 그 기초 위에 새로운 신전이 건설되었다. 후속 신전은 이전 신전보다 더 크고 세련되었다. 에리두의 E₂.abzu 신전의 진화는 이 과정의 빈번한 사례 연구이다. 많은 신전에는 텔 우카이르의 신전과 같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궁전과 도시 벽은 초기 왕조 시대의 신전보다 훨씬 늦게 등장했다.[19]수메르 신전의 형태는 근동 우주론의 발현으로, 이는 세 개의 층을 연결하는 세계 축인 세계 산을 가지고, 짠물 바다로 둘러싸인 땅의 원반으로 세계를 묘사했다. 신전의 역할은 신과 인간 사이의 만남의 장소인 그 세계 축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19] 영역 간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높은 곳'의 신성함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동에서 잘 입증된 우바이드 이전의 신념이다. 신전의 평면도는 산에서 세계의 네 지역으로 흐르는 네 개의 강을 상징하기 위해 모서리가 사방을 가리키는 직사각형이었다. 이 방향은 또한 수메르의 시간 측정에 대한 관측소로 신전 지붕을 사용하는 더 실용적인 목적을 제공한다. 신전은 다짐 흙으로 만든 낮은 테라스에 지어졌으며, 이는 창조 동안 '순수한 흙'(수메르어: du₆-ku₃)으로 불리는 물에서 나타난 최초의 땅의 신성한 언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긴 축의 문은 신들이 들어오는 지점이었고, 짧은 축의 문은 인간들이 들어오는 지점이었다. 이 구성은 굽은 축 접근법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들어가는 사람이 중앙 홀의 끝에 있는 숭배 조각상을 마주하기 위해 90도 회전을 하기 때문이다. 굽은 축 접근법은 선형 축 접근법을 가진 우바이드 신전의 혁신이며, 수메르 가옥의 특징이기도 하다. 제물상은 축의 교차점에 있는 신전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우루크 시대의 신전은 신전 직사각형을 삼분할, T자형 또는 결합된 평면도로 나누었다. 우바이드에서 물려받은 삼분할 평면도는 양쪽에 두 개의 작은 홀이 있는 큰 중앙 홀을 가지고 있었다. 입구는 짧은 축을 따라 있었고, 신사는 긴 축의 끝에 있었다. 우바이드 시대에서 유래한 T자형 평면도는 중앙 홀에 수직으로 직사각형의 한쪽 끝에 홀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삼분할 평면도와 동일했다. 우루크의 에안나 지구에서 발견된 신전 C는 고전적인 신전 형태의 사례 연구이다.
초기 왕조 시대 동안 신전 설계에 다양한 양상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신전은 여전히 방위, 직사각형 평면, 부벽과 같은 특징을 유지했지만, 이제 안뜰, 벽, 분지, 병영을 포함한 다양한 새로운 구성을 취했다. 카파자의 신전은 켈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안뜰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전형적인 예이다.
고(高) 신전은 도시의 수호신이 있는 특별한 유형의 신전이었다. 기능적으로는 사제단을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장 및 배포 센터 역할을 했다. 우루크의 백색 신전은 아도베 벽돌 플랫폼 위에 매우 높이 지어진 고 신전의 전형적인 예이다. 초기 왕조 시대에 고 신전은 지구라트, 즉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련의 플랫폼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구라트는 성경의 바벨탑의 영감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지구라트는 수메르 도시 국가에서 처음 건설된 거대한 피라미드형 사원 탑으로, 이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도시에서도 발전했다.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는 32개의 지구라트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28개는 이라크에, 4개는 이란에 있다. 주요 지구라트로는 이라크 나시리야 인근의 우르 대 지구라트,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의 아카르 쿠프 지구라트, 이란 후제스탄주의 초가 잔빌(가장 최근에 발견됨), 이란 카샨 인근의 테페 시알크 등이 있다. 지구라트는 지역 종교를 기리는 기념물로서 수메르인, 바빌론인, 엘람인, 아시리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지구라트의 가장 초기의 예는 기원전 4천년의 우바이드 시대[20]에 만들어진 융기된 플랫폼이며, 가장 늦은 것은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졌다. 많은 피라미드와는 달리 지구라트의 꼭대기는 평평했다. 계단식 피라미드 양식은 초기 왕조 시대 말에 시작되었다.[21]
직사각형, 타원형 또는 사각형 플랫폼 위에 단을 이루며 건설된 지구라트는 피라미드형 구조였다. 햇볕에 구운 벽돌은 지구라트의 핵심을 이루었고, 겉면은 구운 벽돌로 마감되었다. 이 마감재는 종종 다양한 색상으로 유약을 칠했으며 점성술적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 왕들은 때때로 이 유약 처리된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단의 수는 2개에서 7개까지 다양했으며, 정상에는 신전이나 사원이 있었다. 신전으로의 접근은 지구라트 한쪽에 있는 일련의 경사로 또는 기저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경사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지구라트가 산을 닮도록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고전적인 지구라트는 굽은 부벽, 유리질 벽돌 피복, 그리고 높이의 엔타시스를 특징으로 하는 신수메르 시대에 등장했다. 우르 지구라트는 이 양식의 가장 좋은 예이다. 이 시대의 사원 설계의 또 다른 변화는 굽은 축이 아닌 직선 축으로 사원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우르에 있는 우르-남무의 지구라트는 3단계 구조로 설계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중 2단계만 남아 있다. 이 전체 진흙 벽돌 핵심 구조는 원래 역청에 설치된 구운 벽돌 외피로 덮여 있었으며, 첫 번째 가장 낮은 단계는 2.5m, 두 번째 단계는 1.15m였다. 이 구운 벽돌 각각에는 왕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단계의 경사진 벽은 부벽으로 지지되었다. 꼭대기로의 접근은 3중 기념 계단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계단은 모두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 사이의 착륙 지점에서 열리는 문으로 모였다. 첫 번째 단계의 높이는 약 11m였으며, 두 번째 단계는 약 5.7m 상승했다. 일반적으로, 세 번째 단계는 지구라트 발굴자(레오나드 울리)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사원으로 장식되었다. 초가 잔빌 지구라트에서 고고학자들은 지구라트 구조의 핵심을 가로질러 진흙 벽돌 덩어리를 묶었던 거대한 갈대 밧줄을 발견했다.
5. 4. 지구라트
지구라트(Ziggurat)는 수메르(Sumer) 도시 국가에서 처음 건설된 거대한 피라미드형 사원 탑으로, 이후 바빌로니아(Babylon)와 아시리아(Assyria) 도시에서도 발전했다.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는 32개의 지구라트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28개는 이라크(Iraq)에, 4개는 이란(Iran)에 있다.[3] 주요 지구라트로는 이라크 나시리야(Nasiriyah) 인근의 우르 대 지구라트(Great Ziggurat of Ur), 이라크 바그다드(Baghdad) 인근의 아카르 쿠프 지구라트(Ziggurat of Aqar Quf), 이란 후제스탄주(Khūzestān)의 초가 잔빌(Chogha Zanbil)(가장 최근에 발견됨), 이란 카샨(Kashan) 인근의 테페 시알크(Tappeh Sialk) 등이 있다. 지구라트는 지역 종교를 기리는 기념물로서 수메르인, 바빌론인, 엘람(Elam)인, 아시리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지구라트의 가장 초기의 예는 기원전 4천년 우바이드 시대(Ubaid period)의 융기된 플랫폼이며,[20] 가장 늦은 것은 기원전 6세기이다. 많은 피라미드와는 달리 지구라트의 꼭대기는 평평했다. 계단식 피라미드 양식은 초기 왕조 시대 말에 시작되었다.[21]
지구라트는 직사각형, 타원형 또는 사각형 플랫폼 위에 단을 이루며 건설된 피라미드(pyramid)형 구조였다. 햇볕에 구운 벽돌이 지구라트의 핵심을 이루었고, 겉면은 구운 벽돌로 마감되었다. 마감재는 종종 다양한 색상으로 유약을 칠했으며 점성술(astrology)적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 왕들은 때때로 유약 처리된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단의 수는 2개에서 7개까지 다양했으며, 정상에는 신전이나 사원이 있었다. 지구라트 한쪽에 있는 일련의 경사로 또는 기저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경사로를 통해 신전에 접근했다. 지구라트가 산을 닮도록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문헌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고전적인 지구라트는 굽은 부벽, 유리질 벽돌 피복, 높이의 엔타시스(entasis)를 특징으로 하는 신수메르 시대에 등장했다. 우르 지구라트는 이 양식의 가장 좋은 예이다. 이 시대 사원 설계의 또 다른 변화는 굽은 축이 아닌 직선 축으로 사원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우르에 있는 우르-남무의 지구라트는 3단계 구조로 설계되었지만, 오늘날에는 2단계만 남아 있다. 진흙 벽돌 핵심 구조는 원래 역청(bitumen)에 설치된 구운 벽돌 외피로 덮여 있었으며, 첫 번째(가장 낮은) 단계는 2.5m, 두 번째 단계는 1.15m였다. 구운 벽돌 각각에는 왕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단계의 경사진 벽은 부벽으로 지지되었다. 꼭대기로의 접근은 3중 기념 계단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계단은 모두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 사이 착륙 지점에서 열리는 문으로 모였다. 첫 번째 단계의 높이는 약 11m였으며, 두 번째 단계는 약 5.7m 상승했다. 일반적으로 세 번째 단계는 지구라트 발굴자(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사원으로 장식되었다. 초가 잔빌(Chogha Zanbil) 지구라트에서 고고학자들은 지구라트 구조 핵심을 가로질러 진흙 벽돌 덩어리를 묶었던 거대한 갈대 밧줄을 발견했다.
6. 조경 건축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열린 공간을 조성한 사례가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우루크 도시의 3분의 1이 과수원으로 할당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니푸르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열린 공간이 발견되었다. 빈터(아카드어: ''키슈부'') 역시 중요한 조경 요소였다. 도시 외곽에서는 수메르 관개 농업을 통해 만들어진 정원이 있었는데, 이는 이후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 정원의 기초가 되었다.[22]
분수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용되었으며, 기르수와 라가시에서 발견된 바빌로니아 유역이 그 예시이다. 코멜강 협곡의 고대 아시리아 분수는 바위에 새겨진 유역과 계단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도관을 통해 물을 공급받았다.[23]
6. 1. 정원
문헌에 따르면 도시 계획의 일부로 가장 초창기부터 열린 공간 계획이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우루크의 묘사에는 그 도시의 3분의 1이 과수원으로 할당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계획된 열린 공간은 니푸르의 5분의 1 구획에서도 발견된다. 또 다른 중요한 조경 요소는 빈터(아카드어: ''키슈부'')였다.도시 외곽에서는 수메르 관개 농업이 역사상 최초의 정원 형태를 만들어냈다. 정원(사르)은 둘레에 운하가 있는 144제곱 규빗이었다.[22] 이 형태의 폐쇄된 사각형은 이후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 정원의 기초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분수의 사용은 기원전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예로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조각된 바빌로니아 유역이 있으며, 이는 기르수, 라가시에서 발견되었다. "코멜강 협곡에서 발견된 고대 아시리아 분수는 견고한 바위에 새겨진 유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단식으로 시내까지 내려간다." 물은 작은 도관에서 이끌어졌다.[23]
6. 2. 분수
메소포타미아에서 분수의 사용은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예로는 기원전 3000년경 기르수와 라가시에서 발견된 조각된 바빌로니아 유역이 있다. 코멜강 협곡에서 발견된 고대 아시리아 분수는 견고한 바위에 새겨진 유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단식으로 시내까지 내려간다. 물은 작은 도관에서 이끌어졌다.[2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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