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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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사회는 프랑스 왕이 왕족, 귀족, 주교, 재판관 등 주요 인사들의 자문을 구하고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이다. 신세 설립 승인을 위해 주로 활용되었으며, 1470년 투르에서 처음 소집된 이후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1787년과 1788년 루이 16세가 소집한 명사회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으나, 특권 계급 과세 문제로 반대에 직면했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중단되었다. 명사회는 정부 개혁, 종교 문제, 과세 계획 등 다양한 사안을 논의하는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왕의 칙령 발표나 개혁 시행에 영향을 미쳤다.
명사회는 프랑스 왕정 시대에 국왕이 왕족, 귀족, 성직자, 판사 등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여 특정 의제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열었던 회의이다. 국왕은 명사회의 자문을 통해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특히 새로운 세금 부과 등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명사로 선출되는 것 자체가 큰 영예로 여겨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국왕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보다는 동의하거나 부수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역사
명사회는 1470년 투르에서 처음 소집된 이후 필요에 따라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초기 명사회는 주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정책 추진의 동력을 얻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왕권에 대한 견제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마지막 명사회는 루이 16세 통치 시기인 1787년과 1788년에 베르사유에서 열렸다. 당시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루이 16세와 재무총감 칼론은 특권 계급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약 160년 만에 명사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 계급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명사회는 새로운 세금 문제는 국민 전체의 대표 기구인 삼부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명사회는 더 이상 소집되지 않았다.
2. 1. 초기 명사회
국왕은 왕족, 귀족, 주교, 판사, 그리고 경우에 따라 지방 정부의 관료 등을 소집하여 특정 의제에 대해 자문하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의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소집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영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의제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보다는 부대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은 이 회의의 자문을 통해 국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안건, 특히 새로운 세금 부과와 같은 사안을 국민 대표자들의 논의를 거친 것으로 간주하여 법제화의 근거로 삼았다.
1560년, 앙부아즈 음모 사건 이후 기즈 가문이 주도하는 정부는 왕국의 종교 문제와 앙리 2세 사망 이후 심화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사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바라 왕 앙투안 드 부르봉과 콩데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은 체포될 위험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그 외 왕국의 주요 귀족 대부분이 참석했다. 참석한 40명의 귀족들은 기즈 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에 동의했으며, 그해 말 모(Meaux)에서 열릴 예정이던 삼부회 소집을 지지했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제독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임시 공존을 제안하여 기즈 가문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결국 로렌 추기경 샤를의 제안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개혁을 제안하기 위한 전국 종교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초기 명사회가 개최된 기록이다.
연도 | 월 | 장소 |
---|---|---|
1470년 | 6월 | 투르 |
1506년 | 5월 | 투르 |
1527년 | 12월 | 파리 |
1558년 | 1월 | 파리 |
1560년 | 8월 | 퐁텐블로 |
1575년 | 7월 | 파리 |
1583년 | 1월 | 생제르맹앙레 |
1596년 | 11월 | 루앙 |
1617년 | 12월 | 파리 |
1625년 | 9월 | 퐁텐블로 |
1626년 | 12월 | 파리 |
2. 2. 16세기 후반 ~ 17세기 명사회
1560년, 앙부아즈 음모 사건 이후 로렌-기즈 정부는 왕국의 종교 문제와 앙리 2세 사망 이후 심화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퐁텐블로에서 유력자 회의를 소집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바라 왕 앙투안 드 부르봉과 콩데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은 체포될 위험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그 외 왕국의 주요 귀족 40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기즈 정부의 개혁안에 동의하고, 그해 말 모에서 열릴 삼부회 소집을 지지했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제독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임시 공존을 제안하여 기즈 가문의 반발을 샀으나, 결국 로렌 추기경 샤를의 제안에 따라 전국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개혁안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1575년 7월, 앙리 3세는 파리에서 보조금 확보를 목적으로 명사 회의를 소집했다.
1583년 11월, 앙리 3세는 국가 붕괴를 위협하는 종교적 소요에 대처하기 위해 생제르맹앙레에서 명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부르봉 추기경은 프랑스가 오직 가톨릭 신앙만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성직자들이 왕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3] 그러나 앙리 3세는 이를 강하게 반박하며, 가톨릭 통일을 강요하는 것은 자신의 동생 앙주 공작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가톨릭을 유일 종교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기존의 합의를 깨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3]
앙리 3세 암살 이후 왕위를 계승한 앙리 4세는 1596년 11월 루앙에서 명사 회의를 소집하여 국가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95명의 명사들은 국가 부채 해결을 위한 새로운 과세 계획 수립에 참여하여, 모든 판매에 5%의 특별 판매세(판카르트, pancarte)를 부과할 것을 권고했다. 다만, 식량 폭동을 우려하여 밀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 세금으로 500만 리브르를 징수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최대 156만 리브르를 걷는 데 그쳤다. 예상보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이는 왕실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앙리 4세와 쉴리 공작은 효율적인 조세 제도 운영이 재정 문제 해결의 핵심임을 인식하게 되었다.[4]
1626년 12월, 루이 13세는 파리에서 귀족 13명, 주교 13명, 판사 29명으로 구성된 명사 회의를 소집했다. 이전의 명사 회의들이 구체적인 개혁 실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회의의 역할을 간과한 시각이다. 명사 회의는 입법이나 행정 권한 없이 정부의 개혁안을 제안하고 검토하는 자문 기구의 성격을 가졌다. 실제로 성공적인 회의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칙령을 발표하거나 중요한 개혁을 시행했는데, 1579년의 블루아 칙령이나 1629년의 미쇼 법전이 대표적인 예이다.[5]
1626년 회의에서 국왕과 명사들은 프랑스 정부의 네 가지 기본 방향에 합의했다. 첫째, 개신교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하며, 위그노의 독립적인 요새망을 해체하려는 국왕의 계획을 지지했다. 둘째, 이전 회의들과 마찬가지로 지방 총독들의 권한 남용을 비판하며 국왕이 군대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혼란스러운 국가 행정을 바로잡기 위해 중앙 정부의 강력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넷째, 심각한 재정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 이 문제 해결에 논의를 집중했다.[6] 이 회의는 이후 리슐리외 추기경 주도의 중앙 집권 강화 정책과 라 로셸 공성전 등 위그노 세력 약화 정책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3. 1787년 및 1788년 명사회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된 것은 루이 16세 통치 시기인 1787년과 1788년이었다.1787년 2월 22일 베르사유에서 소집된 명사회는[15] 당시 재무총감 칼론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심각한 국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인지세와 새로운 토지세 도입 등 세제 개혁안의 승인을 얻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며,[17] 이는 약 160년 만에 열린 명사회였다.[16] 그러나 개혁안이 토지를 많이 소유한 귀족이나 가톨릭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를 포함했기 때문에, 명사회 대다수의 반대에 부딪혔다.[17] 결국 칼론의 개혁안은 좌절되었고, 그는 정적들의 공격 끝에 1787년 4월 8일 해임되었다.[18] 명사회는 새로운 국채 발행과 곡물 거래 자유화 등 일부 부수적인 사안만 승인한 채 5월 25일 해산되었으며,[12][13] 이 과정에서 새로운 세금 문제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11]
이후 1788년 11월, 다가올 삼부회의 구성과 투표 절차 등을 논의하기 위해 베르사유에서 명사회가 다시 한번 소집되었다.[14] 이것이 역사상 마지막 명사회였다.
결과적으로 루이 16세 시기의 명사회는 재정 개혁이라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특권 계급의 저항만 확인했으며, 오히려 삼부회 소집 요구를 확산시켜 프랑스 혁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3. 1. 배경
명사회는 프랑스 국왕이 왕족, 귀족, 주교, 판사, 그리고 때로는 지방 정부의 관료 등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여 특정 의제에 대해 자문하기 위해 열린 회의이다. 회의에서는 주어진 의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명사로 소집되는 것 자체가 영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국왕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기보다는 부수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은 명사회의 자문을 통해 중요한 정책, 특히 새로운 세금 부과와 같은 사안에 대해 대표자들의 동의를 얻는 형식을 취하여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주로 새로운 세금을 정하거나 승인받기 위해 활용되었다.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된 것은 루이 16세 통치 시기인 1787년과 1788년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고, 튀르고, 네케르, 칼론과 같은 재무 총감들은 세금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법은 고등법원인 ''파르르망''(''parlements'')에 등록되어야 했는데, 판사들은 자신들의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세금 인상에 반대하며 개혁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켰다.[7]
이러한 상황에서 재무 총감 칼론은 ''파르르망''의 반대를 우회하기 위해 루이 16세에게 명사회 소집을 제안했다. 명사회 자체에는 입법 권한이 없었지만, 칼론은 명사회가 개혁안을 지지한다면 ''파르르망''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787년 2월 22일[15], 약 160년[16] 만에 명사회가 소집되었다.[17] 칼론은 국가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 인지세와 지조(地租, 토지세)의 승인을 얻고자 했으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요 개혁안을 제시했다.[8]
# 단일 토지 가치세 도입
# 코르베(''corvée'')를 현금 납부로 전환
# 내부 관세 폐지
# 선출된 지방 의회 창설
전통적으로 1787년 명사회의 실패는 세금 부담 증가를 원치 않았던 특권 계급(왕족, 대주교, 귀족 등 144명의 명사)의 반대 때문으로 여겨졌다.[17] 그러나 역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명사들이 실제로는 급진적인 정치 변화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명사들은 귀족 신분의 모든 세금 면제 폐지를 제안했고, 다른 이들은 지방 의회 선거의 소득 자격 요건 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8] 샤마에 따르면, 명사들은 칼론의 개혁 방향 자체보다는 그 방식이나 불충분함에 불만을 가졌다.[8]
명사회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칼론은 '경고'(Avertissement프랑스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며 명사들을 압박하려 했다. 그는 명사들을 국민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특권만 지키려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명사들을 격분시켰고, 그들은 칼론이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여겼다.[9]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반대파의 공작으로 루이 16세는 1787년 4월 8일 칼론을 해임했다.[10][18]
칼론의 후임으로 부바르 드 푸르크(4월 9일~5월 1일)와 툴루즈 대주교인 로메니 드 브리엔(5월 1일~5월 25일)이 명사회를 이끌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명사들은 왕권에 대한 더 강력한 견제를 요구하며, 세금 개혁과 같은 중대한 사안은 오직 삼부회만이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11] 왕 역시 명사들의 권한을 제약하려 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1787년 5월 25일 명사회는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되었다.[12] 이 회의에서는 새로운 세금 대신 새로운 기채(起債, 채권 발행) 승인, 곡물 거래 자유화, 지방 의회 설립 지원, 코르베의 현금 납부 전환 등 일부 부수적인 사안만 승인되었다.[13]
결과적으로 1787년 명사회는 재정 위기 해결에 실패하고 특권 계급의 저항만 확인했으며, 오히려 삼부회 소집 요구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명사회 소집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혁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이후 1788년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삼부회 소집 방식과 투표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마지막 명사회가 잠시 열렸으나[14], 이것이 명사회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2. 3. 2. 1787년 명사회
1787년 2월 22일[15], 루이 16세는 약 160년 만에 명사회를 소집했다.[16] 이는 당시 프랑스가 직면한 심각한 재정 위기 때문이었다. 튀르고, 네케르, 칼론 등 역대 재무 장관들은 국가 부채를 해결하고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세금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법은 제정되기 전에 고등법원 역할을 하던 ''파르르망''에 등록되어야 했는데,[7] ''파르르망''의 판사들은 대부분 세금 인상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한다고 여겨 개혁안에 번번이 반대했다.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재무 장관이었던 칼론은 루이 16세에게 명사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명사회 자체에는 입법 권한이 없었지만, 칼론은 명사회가 개혁안을 지지한다면 ''파르르망''이 이를 승인하도록 압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7] 명사회는 왕족, 대주교, 귀족 등 144명의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칼론은 명사회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요 개혁안을 제시했다.[8]
- 단일 토지 가치세 도입
- 코르베(''corvée'')를 현금 납부로 전환
- 국내 관세 장벽 철폐
- 선출된 지방 의회 설립
전통적인 시각에 따르면, 명사회는 주로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 계급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세금 인상안, 특히 토지세 신설에 강력히 반대하여 칼론의 개혁안은 실패했다.[17] 이들은 새로운 채권 발행이나 곡물 거래 자유화 등 일부 사안만 승인한 채 개혁의 핵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명사회 의원들이 실제로는 급진적인 정치 개혁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의원들은 귀족의 모든 세금 면제를 폐지하자고 제안하거나, 지방 의회 선거의 소득 자격 요건을 낮추자고 주장하기도 했다.[8] 샤마에 따르면, 문제는 개혁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칼론이 제시한 개혁안의 구체적인 방식이나 그가 의원들을 설득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었다는 것이다.[8]
칼론은 명사회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경고'(Avertissement프랑스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통해 직접 국민에게 호소하며 명사회 의원들을 자신들의 특권만 지키려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의원들의 분노를 사 칼론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9]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반대파의 공세로 칼론은 1787년 4월 8일에 해임되었다.[10][18] 그의 후임으로는 툴루즈 대주교인 로메니 드 브리엔이 임명되었으며, 그 사이 잠시 부바르 드 푸르크가 직무를 대행했다.
칼론 해임 이후에도 명사회는 계속되었지만, 점차 왕권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많은 의원들은 중요한 개혁, 특히 새로운 세금 부과는 명사회가 아닌 삼부회를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11] 왕과 명사회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양측 모두 회의 지속에 대한 의지를 잃었고, 결국 1787년 5월 25일 명사회는 해산되었다.[12]
비록 핵심적인 세제 개혁에는 실패했지만, 1787년 명사회는 지방 의회 설립 지원, 곡물 자유 무역 재확립, 코르베의 현금 납부 전환, 단기 국채 발행 승인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13] 그러나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라는 핵심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명사회 소집의 본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켜 프랑스 혁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3. 3. 1788년 명사회
1788년 11월 베르사유에서 명사회가 개최되었다.2. 3. 4. 결과
국왕은 명사회를 통해 왕족, 귀족, 주교, 판사 등 명사들의 자문을 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 특히 새로운 세금 부과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15][16][17] 명사로 소집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기에, 회의는 주로 국왕의 의제에 동의하거나 부대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그러나 마지막으로 개최된 명사회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루이 16세는 파산 직전의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1787년 2월 22일, 약 160년 만에 명사회를 소집했다.[15][16][17] 당시 재무총감 칼론은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제시하고 명사회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7][8]
# 단일 토지 가치세 도입 (특권 계급 포함)
# 코르베를 현금세로 전환
# 국내 관세 폐지
# 선출된 지방 의회 창설
칼론은 명사회가 개혁안을 지지하면, 법안 등록 권한을 가진 고등법원도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 기대했다.[7] 하지만 토지세를 비롯한 개혁안은 귀족이나 가톨릭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게 과세하는 내용을 포함했기 때문에, 명사회의 대다수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17] 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는 입장이었다.
역사가 사이먼 샤마는 명사회 의원들이 단순히 기득권 수호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재정적 평등과 같은 급진적인 변화에도 상당히 개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샤마에 따르면, 일부 의원들은 귀족의 모든 세금 면제 폐지를 제안하거나 지방 의회 선거의 소득 자격 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8] 그는 명사회가 칼론의 계획에 반대한 이유가 개혁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칼론이 제시한 방식이나 개혁의 불충분함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8]
칼론은 명사회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팸플릿을 통해 직접 국민에게 호소하며 명사회 의원들을 압박하려 했다. 그는 의원들이 국민을 희생시키며 자신들의 특권만 지키려 한다고 비난했지만, 이는 오히려 의원들을 격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9]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반대파의 공작으로 칼론은 1787년 4월 8일 해임되었다.[10][18]
칼론의 후임으로 부바르 드 푸르크와 로메니 드 브리엔이 잠시 명사회를 이끌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명사회 의원들은 점차 왕권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며, 중요한 개혁은 오직 삼부회만이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11] 결국 세제 개혁안은 부결되었고, 명사회는 새로운 국채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코르베의 현금 납부 전환 등 일부 사안만 승인한 채 1787년 5월 25일에 해산되었다.[12][13]
이후 1788년 11월, 삼부회의 구성과 투표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명사회가 다시 소집되었으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14] 결국 명사회는 왕권 강화와 재정 개혁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오히려 특권 계급의 저항을 확인하며 삼부회 소집 요구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발단 중 하나가 되었다.
3. 구성 및 역할
국왕은 명사회를 소집할 때 왕족, 귀족, 주교, 판사, 그리고 경우에 따라 지방 정부의 관료 등을 지명하여 이들에게 자문할 의제를 제시했다. 명사회에서는 주어진 의제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회의에 소집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의제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보다는 부대 의견을 표명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은 명사회의 자문을 통해 국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안건이 국민의 대표자들에 의해 논의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법률 제정 및 공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거나 기존 세금의 승인을 얻는 데 주로 활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된 것은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된 1787년과 1788년이었다. 1787년 2월 22일[15] 열린 명사회는 당시 재무총감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소집되었다. 파산 직전의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도입 등 세제 개혁안의 승인을 얻으려는 목적이었으며, 이는 약 160년[16] 만의 소집이었다.[17] 하지만 이 개혁안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사회의 다수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17] 결국 새로운 국채 발행 승인, 곡물 거래 자유화 등 일부 안건만 통과시킨 채 5월에 회의는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세금 문제는 더 넓은 계층의 대표가 참여하는 삼부회를 통해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과적으로 명사회 소집은 더 이상 실효성을 갖기 어렵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이 진전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세제 개혁안을 추진했던 칼론은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1787년 4월 8일 해임되었다.[18]
4. 평가
국왕은 명사회를 소집할 때 왕족, 귀족, 주교, 재판관, 그리고 때로는 지방 정부의 관료 등을 명단에 올려 참여시키고, 이들에게 자문할 의제를 부여했다. 회의에서는 주어진 의제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명사회에 소집되는 것 자체가 명예로 여겨졌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의제에 대한 강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기보다는 부수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은 명사회에서의 자문을 통해 국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나 법안이 국민 대표자들의 논의를 거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법률로서의 등기나 국내 공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새로운 세금 도입 승인을 얻기 위해 주로 활용되었다.
1626년 루이 13세가 소집한 명사회를 포함하여 이전의 회의들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은 특정 개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명사회가 가진 본래의 역할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명사회는 입법권이나 행정권을 가진 기구가 아니라, 정부의 개혁안에 대해 제안하고 적절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자문 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성공적인 명사회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주요 칙령을 발표하거나 중요한 개혁을 단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1576년 삼부회 이후의 1579년 블루아 칙령이나 1626–27년 명사회 이후의 1629년 미쇼 법전(Code Michau)이 대표적인 예이다.[5]
1787년 루이 16세가 소집한 명사회는 재정 개혁안, 특히 토지세 도입을 논의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 회의는 귀족, 성직자 등 특권 계층으로 구성된 명사들이 자신들의 세금 부담 증가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된다.[8] 그러나 역사가 사이먼 샤마(Simon Schama)는 명사들이 실제로는 급진적인 정치 변화, 심지어 조세 평등 원칙에도 상당히 개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샤마에 따르면, 명사들이 칼론의 개혁안에 반대한 것은 개혁 자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칼론이 제시한 개혁의 방식이나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8]
결과적으로 1787년 명사회는 칼론 재무총감의 해임으로 이어졌고, 이후 회의를 주도한 로메니 드 브리엔 시기에는 명사들 사이에서 개혁을 단행할 권한은 명사회가 아닌 삼부회에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11] 특히 마지막으로 열린 1787년과 1788년의 명사회는 파탄 직전의 국가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나,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 문제에 직면하자 명사 대다수가 반대했다. 결국 새로운 국채 발행 승인과 곡물 거래 자유화 등 일부 사안만 승인한 채 마무리되었다. 새로운 세금 도입과 같은 근본적인 개혁은 더 광범위한 국민 대표 기구인 삼부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으면서, 명사회 소집의 실효성은 사라졌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명사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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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사
198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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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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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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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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