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슨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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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슨 호 사건은 1837년 미국 상선 모리슨 호가 일본의 쇄국 정책 하에 에도 만에 접근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찰스 W. 킹 선장은 난파된 일본인 송환과 기독교 선교사들의 동행, 통상을 목적으로 했지만, 일본 측의 무력 대응으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은 통상 압력을 강화했다. 모리슨 호 사건은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쇄국 정책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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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슨호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모리슨호 사건 |
발생 시기 | 1837년 |
관련 인물 | 찰스 W. 킹 야마모토 빈 존 하울랜드 구니유키 무라카미 |
배경 | |
배경 | 쇄국정책 천보의 흉작 |
모리슨 호 | |
선박 | 모리슨 호 |
선장 | 찰스 W. 킹 |
목적 | 통상 요구 및 조난 일본인 송환 |
경과 | |
경과 | 우라가에서 포격 가고시마에서 포격 오이타에서 포격 |
영향 | |
영향 | 존 하울랜드의 비판 무라카미 구니유키의 비판 만사의 옥 발발 |
2. 역사적 배경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825년에는 이국선 타격령이 제정되어,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서양 선박에 대해 발포하도록 명령했다.
1837년 7월, 미국의 상선 '모리슨 호'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본과의 통상을 시도했다. 모리슨 호는 마카오에서 구조된 일본인 표류민 7명을 송환하고, 통상과 기독교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에 접근했으며, 평화적인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다.[2]
그러나 모리슨 호가 에도 만 입구의 우라가 해협에 도착하자, 미우라 반도의 언덕에서 대포가 발사되었다. 이는 이국선 타격령에 따른 것이었다. 배는 가고시마로 이동했지만, 그곳에서도 포격을 받고 결국 임무를 포기하고 광저우로 돌아갔다.[2]
이 사건은 1년 후 알려지면서 쇄국령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 와타나베 카잔, 타카노 초에이 등은 막부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다가 반샤의 옥으로 체포되기도 했다.[1]
모리슨 호 사건은 1845년 미국 의회에서 일본과의 통상을 개방하라는 결의안이 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는 제임스 비들 (제독) 휘하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일본과의 협상을 시도하게 된다.[3]
2. 1. 이국선 타격령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이국선 타격령이 제정되었다.[1] 가고시마 만,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의 상선 ‘모리슨 호’(Morrison)에 대해 사쓰마번 우라가 봉행이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포격을 했다.[1]2. 2. 페이튼 호 사건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은 이국선 타격령 제정의 필요성을 더 크게 만들었다.[1]3. 모리슨 호의 일본 방문
가고시마 만,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상선 '모리슨 호'(Morrison)는 쇄국령에 따라 사쓰마 번과 우라가 봉행으로부터 포격을 받았다. 에도 만에서는 오다와라 번과 가와고에 번이 포격을 명령받았다.
모리슨 호는 비무장 상태였으며, 당시에는 영국 군함으로 오인받고 있었다. 이는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이국선 타격령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훗날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한 와타나베 카잔, 《무진몽물어》(戊戌夢物語)를 저술한 타카노 초에이 등이 막부의 대외 정책을 비판한 혐의로 체포되는 ‘반샤의 옥’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39년, 찰스 W. 킹은 일본의 대응에 분개하여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험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미국의 국기에 외국 정부가 발포했으며, 일본과의 다음 접촉은 "미국 정부의 더 강력하고 현명한 조치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1845년, 미국 의회에 일본의 통상을 개방하라는 결의안이 제출되었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제임스 비들 (제독) 휘하의 원정대를 두 척의 중무장한 배와 함께 파견하여 일본과의 협상을 유도했다.[3]
3. 1. 방문 목적
모리슨 호는 일본인 표류민 송환, 통상, 기독교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다.[2] 1년 후, 모리슨 호의 방문 목적이 알려지면서 쇄국령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1837년 7월, 찰스 W. 킹은 마카오에서 구조한 일본인 표류민 7명을 태우고 '모리슨' 호라는 미국 상선을 이끌고 에도 만 입구의 우라가 해협으로 향했다. 이 배는 평화적인 의도를 보이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다.[2]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와 같은 기독교 선교사들도 이 배에 함께 타고 있었다.
3. 2. 항해 과정
1837년 7월, 찰스 W. 킹은 마카오에서 구조된 일본인 7명을 태우고 SS 모리슨 호라는 미국 상선을 이끌고 에도 만 입구의 우라가 해협으로 향했다. 이 배는 평화로운 의도를 보이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다.[2]배가 우라가에 접근하자 미우라 반도의 언덕에서 대포가 발사되었다. 이는 1825년부터 1842년까지 쇼군이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서양 선박에 대해 발포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킹은 해안 포대의 사정거리 밖 안전한 곳에 닻을 내렸다. 여러 작은 어선에서 사람들이 SS 모리슨 호에 올라 사케와 과자를 밤늦게까지 나누었다. 그러나 동이 트자 대포가 해안 가까이로 옮겨졌고, 다시 배에 포격을 가했다. 각각 작은 대포를 앞쪽에 장착한 수백 척의 작은 배들도 배를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리슨 호는 큰 피해 없이 항해를 계속했다.
이후 킹은 규슈의 가고시마로 항해했다.[2] 첫날 그는 그곳의 관리들을 만나 난파자 2명을 넘겨주었다. 다음 날, 한 어부가 배에 접근하여 선원들에게 즉시 떠나라고 경고했다. 배가 돛을 올리자 일본인들은 밤새 배 근처로 옮겨놓은 대포로 포격을 가했다. 킹은 임무를 포기하고 남은 난파자들과 함께 광저우로 돌아갔다.[2]
4. 사건의 전개
1837년, 가고시마 만과 우라가 앞바다에 미국의 상선 '모리슨 호'가 나타났다. 사쓰마 번과 우라가 봉행은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모리슨 호에 포격을 가했다. (\[\[에도 만]]에는 오다와라 번과 가와고에 번이 포격을 명령받았다.)
모리슨 호에는 마카오에서 보호받던 일본인 표류민 오토키치, 쇼조, 주사부로 등 7명이 타고 있었다. 모리슨 호는 이들의 송환과 통상,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에 왔으나, 이 사실은 1년 후에야 알려져 이국선 타격령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또한 모리슨 호는 비무장 상태였으며, 당시에는 영국 군함으로 오인받고 있었다. 이는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이국선 타격령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훗날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한 와타나베 카잔, 《무진몽물어》(戊戌夢物語)를 저술한 타카노 초에이 등이 막부의 대외 정책을 비판한 혐의로 체포되는 '반샤의 옥'이 일어나게 된다.
모리슨 호에는 상업적 목적 외에도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와 같은 기독교 선교사들도 타고 있었다.[2]
킹은 일본의 대응에 분개하여 1839년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험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미국의 국기에 외국 정부가 발포했으며, 일본과의 다음 접촉은 "미국 정부의 더 강력하고 현명한 조치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
1845년, 일본의 통상을 개방하라는 결의안이 미국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는 제임스 비들 (제독) 휘하의 원정대를 두 척의 중무장한 배와 함께 파견하여 일본과의 협상을 유도했다.[3]
배의 임무의 성격은 사건 발생 1년 후에 알려졌고, 이는 쇄국령에 대한 비판을 더욱 증가시켰다.[2]
4. 1. 우라가 포격
1837년 7월, 찰스 W. 킹은 일본인 7명을 태운 미국 상선 '모리슨 호'를 이끌고 에도 만 입구의 우라가 해협으로 향했다. 이 배는 평화적인 의도를 보이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다.[2]배가 우라가에 접근하자 미우라 반도의 언덕에서 대포가 발사되었다. 이는 쇼군이 1825년부터 1842년까지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서양 선박에 대해 발포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2]
킹은 해안 포대의 사정거리 밖 안전한 곳에 닻을 내렸다. 여러 작은 어선에서 사람들이 모리슨 호에 승선하여 사케와 과자를 늦은 밤까지 나누었다. 그러나 동이 트자 대포가 해안 가까이로 옮겨졌고, 다시 배에 발포되었다. 각각 작은 대포를 앞쪽에 장착한 수백 척의 작은 배들도 배를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리슨 호는 별다른 피해 없이 항해를 계속했다.[2]
4. 2. 가고시마에서의 상황
킹은 규슈의 가고시마로 항해했다. 그곳에서 며칠간 관리들을 만났고, 관리들은 난파자 2명을 구금했다.[2] 다음 날, 한 어부가 배에 접근하여 선원들에게 즉시 떠나라고 경고했다. 배가 돛을 올리자 일본인들은 밤새 배 근처로 옮겨놓은 대포로 포격을 가했다. 킹은 임무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난파자들과 함께 광저우로 돌아갔다.[2]4. 3. 귀환
킹은 일본에서의 임무를 포기하고 나머지 난파자들과 함께 광저우로 돌아갔다.[2]5. 사건 이후
마카오에서 보호받던 일본인 표류민 7명을 송환하고 통상과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에 온 모리슨 호는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포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리슨 호는 비무장 상태였고, 당시 영국 군함으로 오인받고 있었다.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이국선 타격령이 제정되어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계가 강화된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찰스 킹은 분개하여 1839년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모험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미국의 국기에 외국 정부가 발포했으며, 일본과의 다음 접촉은 "미국 정부의 더 강력하고 현명한 조치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2]
1845년 미국 의회에서 일본의 통상을 개방하라는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5. 1. 쇄국 정책에 대한 비판
가고시마 만과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의 상선 '모리슨 호'는 사쓰마 번과 우라가 봉행에 의해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포격을 받았다.[2] 그러나 이 배에는 마카오에서 보호받던 일본인 표류민 7명이 타고 있었고, 모리슨 호는 이들의 송환과 통상,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은 사건 발생 1년 후에 알려져 쇄국령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3]모리슨 호는 평화적인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은 1808년 나가사키에서 영국 군함이 일으킨 ‘페이튼 호 사건’ 이후 제정된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외국 선박에 대한 강경 대응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한 와타나베 카잔, 《무진몽물어》(戊戌夢物語)를 저술한 타카노 초에이 등은 막부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다가 ‘반샤의 옥’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5. 2. 반샤의 옥
모리슨호 사건 이후, 와타나베 카잔, 타카노 초에이 등이 막부의 대외 정책을 비판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반샤의 옥’이다.[1] 이 사건으로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한 와타나베 카잔과 《무진몽물어》(戊戌夢物語, 무진년 꿈 같은 얘기)를 저술한 타카노 초에이가 체포되었다.[1]5. 3. 미국의 대일 통상 압력
1837년 7월, 찰스 W. 킹은 일본인 7명을 태우고 미국 상선 ''모리슨''호를 타고 에도 만 입구의 우라가 해협으로 출발했다. 이 배는 평화로운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무장을 해제했다.[2]배가 우라가에 접근하자 미우라 반도의 언덕에서 대포가 발사되었는데, 이는 1825년부터 1842년까지 쇼군이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서양 선박에 대해 발포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2]
킹은 일본의 대응에 분개하여 1839년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험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외국 정부가 미국의 국기에 발포했으며, 일본과의 다음 접촉은 "미국 정부의 더 강력하고 현명한 조치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2]
1845년, 미국 의회에 일본의 통상을 개방하라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는 제임스 비들 휘하의 원정대를 두 척의 중무장한 배와 함께 파견하여 일본과의 협상을 유도했다.[3]
이 사건 발생 1년 후, 배의 임무 성격이 알려지면서 쇄국령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2]
5. 4. 제임스 비들 제독의 파견
1845년, 미국 의회에 일본과의 통상 개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는 제임스 비들 제독에게 두 척의 중무장한 배를 주어 일본과의 협상을 시도하도록 파견하였다.[3]6. 평가 및 의의
모리슨호 사건은 19세기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과 서구 열강 간의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이 처했던 국제 정세의 어려움과, 서구 열강의 침략적 접근 방식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은 서구 열강과의 군사력 격차를 실감하고, 개항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외세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모리슨호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남긴다. 국제 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폐쇄적인 정책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며, 국제 사회와의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7. 관련 작품
2008년 NHK 대하드라마 아츠히메에서 모리슨호 사건이 잠시 묘사되었다.
7. 1. 아츠히메 (드라마)
2008년 NHK 대하드라마 아츠히메의 첫 에피소드에서 모리슨호 사건이 잠시 묘사되었다.[1]8. 참고 문헌
- L. M. 컬렌 (2003). 《일본사, 1582–1941: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 존 S. 소월 (1905). 《선장의 서기 항해 일지: 중국 해에서의 모험》. Chas H. Glass & Co. \[R. R. Donnelly & Sons, 1995 재판]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582-1941: Internal and External Worlds.
2003
[2]
서적
[3]
서적
The Logbook of the Captain's Clerk: Adventures in the China Seas
1905
[4]
웹사이트
Japanese Castaways of 1834: The Three Kichis
https://www.historyl[...]
HistoryLink.org
2020-12-15
[5]
웹사이트
モリソン号事件とは
https://kotobank.jp/[...]
朝日新聞
202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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