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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쿠니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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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쿠니 친왕은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쇼군으로, 1308년 8세의 나이로 취임했으나, 막부의 실권은 호조 씨가 장악하고 있어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그는 불교 종파 간의 논쟁을 벌였으며, 1332년 정토진종의 혼간지를 칙원사로 공인하는 등 종교 관련 활동을 했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으로 가마쿠라가 함락되자 쇼군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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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쿠니 친왕
기본 정보
이름모리쿠니 친왕 (守邦親王)
재위 기간1308년 8월 26일 – 1333년 7월 4일
직책쇼군
이전히사아키 친왕
다음모리요시 친왕
섭정 (군주)하나조노 천황, 고다이고 천황
섭정 (싯켄)호조 모로토키, 호조 무네노부, 호조 히로토키, 호조 모토토키, 호조 다카토키, 호조 사다아키, 호조 모리토키
출생일1301년 6월 19일
출생지가마쿠라, 일본
사망일1333년 9월 25일
사망지가마쿠라, 일본
아버지히사아키 친왕
어머니고레야스 친왕의 딸
모리쿠니 친왕 서명
모리쿠니 친왕 서명
정보
가명/작위가마쿠라 막부 9대 쇼군
칭호친왕
신위이품
아버지히사아키 친왕
어머니중어소(고레야스 친왕의 딸)
자녀모리에
사망 장소무사시국 히키군 (전승)
매장 장소다이바이 사원 (전승)

2. 생애

1301년 8대 쇼군 히사아키 친왕7대 쇼군 고레야스 친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308년(엔쿄 원년) 8월, 아버지의 뒤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쇼군에 취임했으나, 막부의 실권은 싯켄(執権) 호조 씨(北条氏)와 그 종가인 도쿠소케(得宗家)가 장악하고 있어 쇼군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모리쿠니 친왕은 쇼군 재임 기간 동안 불교계에 영향을 주었다. 1318년(분포 2년) 니치렌의 제자 니치인이 여러 종파를 논파하고 막부로부터 제목종(題目宗) 포교를 정식 허가받았다. 1332년(겐코 2년)에는 정토진종의 교뇨에게 혼간지 유수직(留守職)을 안도하고, 혼간지를 칙원사로 공인했다.

1333년(겐코 3년),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겐코의 난)이 일어났다. 닛타 요시사다 등의 공격으로 가마쿠라가 함락되었고(가마쿠라 전투),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했다.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는 같은 해 5월 22일에 자결했고, 모리쿠니 친왕도 같은 날 쇼군직을 사임하고 출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쿠라에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쇼군 취임

1301년 8대 쇼군 히사아키 친왕7대 쇼군 고레야스 친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5] 1308년(엔쿄 원년) 8월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쇼군에 취임하였으나,[5] 막부의 실권은 싯켄(執権) 호조 씨(北条氏)와 그 종가인 도쿠소케(得宗家)가 장악하고 있어 쇼군은 이름뿐인 존재였다.[5] 같은 해 9월에는 고후카쿠사 천황의 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삼품 친왕으로 서임되었다.

2. 2. 쇼군 재임 기간

모리쿠니 친왕의 쇼군 재임 기간은 다음과 같은 연호들로 구분된다.[3]

시대연호
남북조 시대 이전



1308년, 8세의 어린 나이로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였으나, 싯켄 호조 씨(호조 도쿠소케)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 쇼군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1317년(분포 원년) 4월, 내리(레이젠 도미코지 전) 조영의 공으로 이품으로 승서되었다.

1318년(분포 2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319년(겐오 원년) 9월 15일까지 일본 불교 전 종파와 니치렌의 제목종(題目宗) 간의 교리 논쟁(가마쿠라 전중 문답)이 벌어졌다. 니치렌의 제자 니치인이 여러 종파를 논파하고 막부로부터 제목종 포교를 정식 허가받았다.

1332년(겐코 2년), 정토진종의 교뇨에게 혼간지 유수직(留守職)을 안도하고, 혼간지를 칙원사로 공인했다.

1333년(겐코 3년),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막부 타도 운동(겐코의 난)이 일어나 가마쿠라가 함락되면서 막부는 무너졌다. 호조 다카토키는 5월 22일에 자결하고, 같은 날 모리쿠니 친왕도 쇼군직을 사임하고 출가하였다.

2. 3.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최후

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겐코의 난)이 일어났다. 닛타 요시사다 등의 공격으로 가마쿠라가 함락되었고(가마쿠라 전투),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했다.[5]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는 같은 해 5월 22일에 자결했고, 모리쿠니 친왕도 같은 날 쇼군직을 사임하고 출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쿠라에서 사망했다.

3. 사후

고안 4년(1345년) 8월 16일, 겐닌지에서 모리쿠니 친왕의 13주기 천승 공양이 거행되었다. 같은 날 아시카가 다카우지, 나오요시 형제가 참석한 가운데 텐류지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7주기 법요가 거행되었다. 음력으로 모리쿠니 친왕과 고다이고 천황은 같은 기일에 해당한다.[6]

모리쿠니 친왕의 자녀 중 유일하게 기록에 남아있는 수혜(생년 미상 ~ 1378년(에이와 4년) 2월 9일)는 조와 2년(1346년) 쇼초주인 별당 겸 닛코산 별당에 임명되었다. 그는 닛코산 별당으로서 조교도 당중과 강중의 대립에 대응하며 고심하다가 에이와 4년(1378년) 2월에 사망했다. 이로써 모리쿠니 친왕의 계통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4. 전승

사이타마 현 히키 군에는 모리쿠니 친왕과 관련된 다양한 전승이 남아 있다. 모리쿠니 친왕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당시 무사시국 히키군 마스오고(현 사이타마 현 히키 군 오가와 마치 마스오)로 도망쳐 삭발하고 우메오지라고 칭했으나 병을 얻어 훙거했고, 같은 지역의 다이바이 사(현 오가와 마치 오쓰카)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오쓰카 하치만 신사(동)는 우메오지의 우지가미인 가마쿠라 하치만 궁을 권청한 것이라고도 한다.[1]

5. 쇼군 재직 당시의 싯켄

대수이름비고
10호조 모로토키(北条師時)무네마사의 아들
11호조 무네노부(北条宗宣)노부토키의 장남
12호조 히로토키(北条煕時)다메토키의 장남
13호조 모토토키(北条基時)도키카네의 장남
14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9대 싯켄 사다토키의 셋째 아들, 도쿠소. 장남 구니토키에게 구니(邦) 자를 헨기로 내림.
15호조 사다아키(北条貞顕)아키토키의 넷째 아들
16호조 모리토키(北条守時)히사토키의 장남, 모리(守)친왕이 헨기로 내린 것.


6. 편휘를 받은 인물


  • 호조 '''모리'''토키: 소손 친왕의 에보시 오야는 요시무네이고, 구아키라 친왕의 에보시 오야는 히사토키로, 아카바시 호조 씨의 당주는 대대로 황족 쇼군과 에보시 오야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만 히사토키는 고레야스 친왕 재임 시, 모리토키는 구아키라 친왕 재임 시 각각 관위를 받는 등 이미 원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 호조 '''쿠니'''토키: 호조 씨도쿠소 가문의 당주는 대대로 쇼군과 에보시 오야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다토키와 타카토키를 제외한 역대 당주는 에보시 친인 쇼군으로부터 한 글자를 하사받았다.
    구니토키의 경우, 이미 '모리'의 글자를 받은 모리토키가 있었기 때문에 '구니'의 글자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고시 호조 씨의 적류였던 호조(나고시) 타카이에의 아들로 나카센다이의 난에서 전사한 호조(나고시) 타카쿠니라는 인물이 있는데, 『타헤이키』에서는 타카쿠니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호조 계도』에서는 사콘노쇼겐 타카코리로 기록되어 있는 점과 나고시류라는 가문의 격으로 미루어 보아 모리쿠니 친왕으로부터 편휘를 받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1] 서적 "Morikuni Shinnō"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005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1834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1834
[4] 서적 群書類従 https://dl.ndl.go.jp[...] 経済雑誌社 1893-08
[5] 서적 元号読本 創元社
[6] 문서 『師守記』康永4年8月16日の条に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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