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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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이 전투는 1757년 9월 7일, 7년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콜린 전투에서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작센까지 추격당했고, 프랑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동하면서, 슐레지엔 방어를 위해 남겨진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결과,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했고,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가 전사하면서 슐레지엔으로의 철수를 강요받았다. 이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으로 진격하여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승리했고, 프로이센은 로스바흐 전투에서 승리 후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반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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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모이스 전투 |
분쟁 | 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 |
날짜 | 1757년 9월 7일 |
장소 | 모이스, 상루사티아, 현재의 폴란드 |
결과 | 오스트리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로이센 왕국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군주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로이센 |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 (전사) |
오스트리아 |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슈디 |
병력 규모 | |
프로이센 | 13,000명 |
오스트리아 | 26,000명 |
사상자 | |
프로이센 | 1,800명 |
오스트리아 | 1,500명 |
추가 정보 | |
![]() | |
관련 캠페인 | 7년 전쟁: 유럽 전역 슐레지엔 전쟁 |
2. 7년 전쟁의 배경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1748) 이후 유럽 강대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발생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차지했고,[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했다.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을 견제할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 역시 영국의 해상 무역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오랜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에는 하노버 등 영국 왕이 개인 연합으로 소유한 영토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헤센-카셀 방백령 등 친척들의 영토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는 외교 혁명으로 불렸다.[2]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을 점령한 후 보헤미아에서 작전을 펼쳐 프라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보헤미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가 이끄는 부대는 나이세강 우안의 모이스 마을에 포진하였다.
2. 1. 유럽 대륙의 갈등
7년 전쟁은 전 세계적인 분쟁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1748)의 연장선에서 유럽 대륙에서 더욱 격화되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겼다.[1]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군대를 재건하고 동맹을 맺을 시간을 벌기 위해 조약에 서명했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했다.[1]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오스트리아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세력 확장을 억제할 기회를 포착했다. 프랑스 역시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 경쟁 관계를 뒤로하고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에는 하노버를 포함한 영국의 국왕이 개인 연합으로 소유한 영토뿐만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과 헤센-카셀 방백령에 있는 그의 친척들의 영토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을 외교 혁명이라 불렀다.[2]
작센을 점령한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헤미아에서 작전을 펼쳐 1757년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보헤미아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다. 프랑스군이 서쪽 측면을 위협하자 프리드리히는 그들과 교전하기 위해 이동했고, 슐레지엔과 루사티아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브라운슈바이크-베른의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휘하에 약 40,000명의 병력을 남겨두었다.
베른의 임무는 오스트리아군의 작센 진격을 막는 것이었고,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가 그를 돕도록 남았다. 프리드리히는 베른 공작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빈터펠트를 더 신뢰했지만,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베른은 당황했고, 빈터펠트는 제약에 짜증을 냈다.
베른은 보급품 부족에 불안해하며 괴를리츠로 후퇴했고, 빈터펠트의 군단은 모이스 근처 루사티아 네이세 강 반대편에 남았다.
전투 전날, 카를 공은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시에게 강 오른쪽 제방, 거의 모이스에, 다음 날 젝켈스베르크(언덕)를 점령하라는 지시와 함께 보냈다. 그는 15,000명에서 20,000명 사이의 병력과 포병을 가지고 있었다.[3]
2. 2. 북아메리카 식민지 분쟁
7년 전쟁은 전 세계적인 분쟁이었지만, 최근 종결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1-1748)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특정한 강도를 띠게 되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은 오스트리아와의 이전 전쟁을 종결시켰다.[1]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끊임없이 증가하는 힘을 제한할 기회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깨뜨리려 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래된 경쟁 관계를 제쳐두고 그들만의 연합을 형성했다.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은 하노버를 포함한 영국의 국왕이 개인 연합으로 소유한 영토뿐만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과 헤센-카셀 방백령에 있는 그의 친척들의 영토까지 끌어들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책략은 외교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3. 전투 전 상황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 지방을 얻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우위를 되찾고자 했다.[1] 외교 혁명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2]
1757년 6월, 프로이센군은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했지만,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와 레오폴트 폰 다운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작센까지 추격당했다.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공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가 이끄는 일군은 각각 Landeskrone|란데스크로네de 산과 나이세 강 우안의 모이스 마을에 있는 홀츠베르크 산에 배치되었다.
벤첼 안톤 카우니츠가 고급 지휘관들과 향후 작전 계획을 검토하기 위해 Jauernick-Buschbach|야우에르니크de 근처 오스트리아 대본영에 도착하면서 다가올 전투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3. 1. 프로이센군의 배치
7년 전쟁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을 확보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대를 재건하고 동맹을 맺어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지위를 회복하려 했다.[1] 외교 혁명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2]작센을 점령한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지만,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보헤미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는 슐레지엔과 루사티아를 방어하기 위해 브라운슈바이크-베른의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휘하에 약 40,000명의 병력을 남겼다.
베른은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의 도움을 받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베른은 보급 부족으로 괴를리츠로 후퇴했고, 빈터펠트의 군단은 모이스 근처 나이세 강 반대편에 남았다.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공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본대는 Landeskrone|란데스크로네de 산에 포진했다.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가 이끄는 일군은 나이세 강 우안의 모이스 마을에 있는 홀츠베르크 산을 점령했다.
3. 2. 오스트리아군의 계획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1748)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 지방을 획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대를 재건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기 위해 조약에 서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에서 우위를 되찾고자 했다.[1]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힘을 견제할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 역시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깨뜨리려 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 경쟁 관계를 뒤로하고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은 하노버를 포함한 영국의 국왕이 개인 연합으로 소유한 영토뿐만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과 헤센-카셀 방백령에 있는 그의 친척들의 영토까지 포함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은 외교 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2]프리드리히는 작센을 점령한 후 보헤미아에서 작전을 펼쳐 1757년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지만,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보헤미아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다. 슐레지엔과 루사티아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브라운슈바이크-베른의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휘하에 약 40,000명의 병사를 남겨두었다.
베른의 임무는 오스트리아군의 작센 진격을 막는 것이었고,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가 그를 돕도록 남겨졌다. 프리드리히는 베른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빈터펠트를 더 신뢰했지만,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베른은 당황했고, 빈터펠트는 제약에 짜증을 냈다.
베른은 보급품 부족으로 괴를리츠로 후퇴했고, 빈터펠트의 군단은 모이스 근처 루사티아 네이세 강 반대편에 남겨두었다.
전투 전날, 카를 공은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시에게 강 오른쪽 제방, 거의 모이스에, 다음 날 젝켈스베르크(언덕)를 점령하라는 지시와 함께 보냈다. 그는 15,000명, 어쩌면 20,000명의 병력과 포병을 가지고 있다.[3]
4. 전투 경과
9월 7일, 빈터펠트는 베버른과 상의했는지, 아니면 바우첸에서 식량 수송 호송대를 이끌고 나갔는지에 대해 출처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1] 오스트리아군은 예켈스베르크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첫 번째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전선 전체에 걸쳐 더 큰 공격이 시작되었다. 빈터펠트는 곧 약간의 증원군과 함께 도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에서 사망했다.[1] 오스트리아군은 예켈스베르크를 점령하여 다른 프로이센 진지를 위협했고, 프로이센 군단 전체는 괴를리츠 방향으로 후퇴해야 했다.[1]
4. 1. 빈터펠트의 분전과 전사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시디가 이끄는 2만 명의 병사와 24문의 대포를 갖춘 군대가 모이스 근교의 프로이센군 전초 기지를 공격했다.[1] 이때 빈터펠트는 반 마일 떨어진 괴를리츠의 군영에 있었다.[1] 빈터펠트는 오스트리아군의 내습을 알자 5개 대대를 이끌고 급히 구원에 나섰으나, 열세로 인해 일단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냈다.[1] 그러나 아우구스트 빌헬름 공으로부터 추가 증원이 오지 않아 나다시디는 프로이센군을 우회하여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1] 빈터펠트는 치명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기념비가 남아있다.[1] 결국 빈터펠트의 군단은 철수해야 했다.[1]4. 2. 프로이센군의 패배
9월 7일, 빈터펠트는 베버른과 상의하거나 바우첸에서 식량 수송 호송대를 이끌고 나가면서 그의 군단에 부재했다.[1] 오스트리아군은 예켈스베르크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첫 번째 공격은 격퇴되었다. 그 후 그들은 프로이센 전선 전체에 걸쳐 더 큰 공격을 시작했다. 빈터펠트는 곧 약간의 증원군과 함께 도착했지만 전투에서 곧 사망했다.[1] 오스트리아군은 예켈스베르크를 점령하여 다른 프로이센 진지를 위협하고 프로이센 군단 전체가 괴를리츠 방향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전투 중 베버른은 빈터펠트를 증원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1]7월 9일,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시디가 이끄는 병사 2만 명과 대포 24문의 군대는 모이스 근교의 프로이센군 전초 기지를 공격했다. 그는 빈터펠트가 이 시점에서는 반 마일 떨어진 괴를리츠의 군영에 있다는 상황을 이용했다. 빈터펠트는 오스트리아군의 내습을 알자 5개 대대를 이끌고 급히 구원에 나섰다. 그리고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을 일단 밀어냈다. 그러나 아우구스트 빌헬름 공으로부터 추가 증원이 도착하지 않아 나다시디는 프로이센군을 우회하여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빈터펠트는 치명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기념비가 남아있다. 최종적으로 빈터펠트의 군단은 철수를 강요받았다.[2]
5. 전투의 영향
모이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실레지아로 진격하여 11월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베버른을 격파했다. 프리드리히는 로스바흐 전투와 로이텐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프로이센은 실레지아에서 연이은 패배를 겪었다.
5. 1. 슐레지엔에서의 연이은 패배
1757년 11월 5일, 프리드리히는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오스트리아군이 실레지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Hans Karl von Winterfeldt)가 사망하면서 아우구스트 빌헬름 공은 유능한 조언자를 잃게 되었다. 이후 몇 주 동안 프로이센군은 9만에 육박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받으며 보급이 끊긴 채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프로이센군의 퇴각은 라우지츠와 슐레지엔을 거쳐 브레슬라우 성문까지 이어졌다. 1757년 11월에는 요새 도시 Świdnica|슈피드니차|슈바이트니츠영어 (1차 슈바이트니츠 포위전)가 함락되고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연이은 패배를 겪었다.[1]
5. 2. 빈터펠트의 죽음이 프로이센에 미친 영향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의 죽음으로 아우구스트 빌헬름 공은 유능한 고문을 잃었다.[1] 그 후 몇 주 동안 9만에 육박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받으며, 보급이 끊긴 채로 공은 질서 정연하게 철수했다.[1] 프로이센군의 철수는 라우지츠와 슐레지엔을 지나 브레슬라우 성문까지 이어졌다.[1] 1757년 11월에는 요새 도시 슈바이트니츠(Świdnica) (1차 슈바이트니츠 포위전)의 함락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의 패배가 잇따랐다.[1]6. 전투 이후의 상황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은 실레지아로 진격하여 11월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베버른을 격파했다.[1]
1757년 11월 5일, 프리드리히는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고,[1] 곧 자신이 부재한 동안 오스트리아군이 실레지아를 점령했음을 알게 되었다.[1] 프리드리히는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
참조
[1]
서적
The Heart of Europe: A History of the Holy Roman Empire
Penguin Publishing
2016
[2]
논문
"The Diplomatic Revolution"
1957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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