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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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은 1618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프로이센 공국의 동군 연합으로 시작되어,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 아래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다. 1701년 프리드리히 1세가 왕국을 선포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 시기에 군사력을 강화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개혁을 통해 극복하고 독일 통일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1871년 독일 제국 성립에 기여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멸망할 때까지 절대 군주제와 입헌 군주제를 거치며, 독일인, 폴란드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를 이루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15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라는 인적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제2차 북방 전쟁 과정에서 1657년 9월, 호엔촐레른 가문은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
1848년 혁명 이후 1849년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통일된 독일의 왕관을 제안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적인 의회가 왕위를 수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또한 이 제안이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권력 투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며, 독일 제국의 성립이 프로이센의 독립을 끝낼 것이라고 우려했다.[19]
2. 역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의 대가로, 1701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는 "프리드리히 1세"로서 "프로이센의 왕"으로 즉위했다. 법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에는 왕국이 존재할 수 없었으나,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이 제국에 속한 적이 없고 호엔촐레른 가문이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왕국 승격을 주장했다.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법적으로 이전 공국에서만 왕이라는 허구를 인정하기 위해 채택되었다. 브란덴부르크와 제국 내 영토에서는 여전히 황제 지배 아래의 선제후였지만, 당시 황제의 권위는 명목상이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삼십년 전쟁의 폐허에서 회복 중이었고 천연자원이 부족했다. 1708년경 동프로이센 인구의 약 3분의 1이 대북방전쟁 중 페스트로 사망했다.[14]
대북방전쟁은 프로이센 왕국이 참여한 최초의 주요 분쟁이었다. 171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은 포메라니아 영유권 주장 등 여러 이유로 연합군에 합류했다.[5][15] 스톡홀름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오데르 강 동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전체를 얻었다. 대북방 전쟁은 스웨덴 제국의 몰락과 함께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시켰다.[16]
1740년, 프리드리히 2세는 실레시아를 침공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1742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실레시아를 정식 할양받았고,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실레시아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실레시아 할양에 굴욕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1756년 프리드리히의 선제공격으로 제3차 실레시아 전쟁과 7년 전쟁이 발발했다.
부르커스도르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승리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은 유럽 대륙에 ''현상 유지''를 강요하며 독일 내 주요 역할과 유럽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18세기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점차 약화되었다. 1772년,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간의 최초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여 바르미아를 포함한 폴란드의 왕립 프로이센 지역 대부분을 합병,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786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 프레드릭 빌헬름 2세는 1793년 폴란드 서부 지역 상당 부분을 획득하는 등 분할을 계속했다.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소멸했고, 바르샤바를 포함한 동프로이센 남쪽과 동쪽의 광대한 지역이 프로이센의 일부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년)에서 패배,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 절반을 잃었다. 그러나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이후 동맹을 탈퇴, "해방 전쟁" 동안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최종 승리에 기여했다.
프랑스 패배에 대한 공로로 프로이센은 빈 체제에서 1806년 이전 영토 대부분과 작센 왕국의 40%, 베스트팔렌과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포함한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 독일 건설을 위해 세 번의 전쟁을 이끌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하노버 왕국, 헤세 선제후국, 나사우 공국, 프랑크푸르트 자유시 등 4개의 소규모 동맹국을 합병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유도하여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게 했다. 독일 국가들이 연합하여 프랑스를 패배시켰고,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으며, 빌헬름 1세가 초대 황제가 되었다.
2. 1. 왕국의 성립
1618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프로이센 공국이 요한 지기스문트에 의해 동군연합이 되면서(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의 기반이 마련되었다.[36]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1657년 베흘라우-브롬베르크 조약과 1660년 올리바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와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로써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701년 1월 18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다. 레오폴트 1세(레오폴트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필요한 병력 지원을 대가로 프리드리히의 왕호를 인정했다.[37] 그러나 1700년 11월 16일 왕관 조약을 통해 인정된 칭호는 신성 로마 제국 영역 밖의 "프로이센의 왕"(König '''in''' Preußende)이었고, "프로이센 국왕"(König '''von''' Preußende)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루이 14세를 모방하여 화려한 생활을 즐겼고, 이로 인해 국고가 압박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과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을 건설하는 등 베를린을 문화 도시로 발전시켰다.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은 라이프니츠였다.
이 시기 프로이센 왕국은 호엔촐레른가가 세습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구 프로이센 공국, 그리고 여러 작은 영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영토들은 방어에 불리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지리적 통합을 위한 확장을 지속해야 했다.
2. 2. 군사 강대국으로서의 발전
프리드리히 1세가 1713년에 서거하고,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였다. ‘군인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관료제도를 정비하여 프로이센을 군사강국으로 키웠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국가 번영과 영토 확장을 위해 군사력이 강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결과 프로이센은 병력 규모는 유럽 4위였지만, 실제 군사력은 유럽 최강을 자랑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군국주의 국가이자 고도로 능률적인 관료주의 국가가 되었다.[45]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강인한 정신과 예리한 지성을 갖춘 계몽군주였다. 그는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병력을 20만으로 증강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고,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74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를 계승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두 차례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을 통해 오데르강 유역의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았다. 또한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동프로이센을 브란덴부르크 공국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북방전쟁은 프로이센 왕국이 참여한 최초의 주요 분쟁이었다. 1700년에 시작된 이 전쟁에는 스웨덴 제국에 대항하여 차르 러시아가 이끄는 연합군이 참전했다.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705년에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노력했으나, 1713년이 되어서야 즉위하였다.[15] 171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은 포메라니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 등 여러 이유로 연합군에 합류했다.[5][15] 프로이센은 뤼겐 섬에서 벌어진 스트레소 전투에 참전했는데, 이미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전쟁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상황이었다. 스톡홀름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오데르 강 동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전체를 얻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1815년까지 포메라니아의 일부를 유지했다. 대북방 전쟁은 스웨덴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동시에 쇠퇴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대신하여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시켰다.[16]
1740년, 프리드리히 2세는 1537년 조약을 구실로 실레시아를 침공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실레시아를 점령한 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실레시아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보호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다른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고, 결국 프리드리히는 1742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실레시아를 정식으로 할양받았다.
1744년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평화가 회복되었고, 프로이센은 실레시아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실레시아 할양으로 굴욕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프로이센은 영국과 영국-프로이센 동맹을 형성했다. 프리드리히가 1756년 작센과 보헤미아를 선제적으로 침공하면서 제3차 실레시아 전쟁과 7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과 동시에 맞서 싸웠으며, 하노버(그리고 영국)만이 동맹국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760년 10월 러시아군이 베를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할 때까지 심각한 침략을 막았다. 그러나 1762년 엘리자베타의 죽음(브란덴부르크가의 기적) 이후, 친프로이센파인 표트르 3세의 즉위로 상황이 완화되었다. 스웨덴도 거의 같은 시기에 전쟁에서 탈퇴했다.
부르커스도르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승리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은 유럽 대륙에 ''현상 유지''를 강요할 수 있었다. 이 결과는 독일 내에서 프로이센의 주요 역할을 확인하고 유럽 열강으로서의 국가를 확립했다. 프로이센의 거의 패배와 경제적 파괴에 경악한 프리드리히는 훨씬 더 평화로운 통치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프로이센의 동쪽과 남쪽에 위치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8세기 동안 점차 약화되었다. 폴란드 내정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와 러시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우려 속에, 프리드리히 2세는 1772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간의 최초 폴란드 분할을 주도했다. 프로이센 왕국은 바르미아를 포함한 폴란드의 왕립 프로이센 지역 대부분을 합병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합병된 왕립 프로이센 지역은 다음 해 서프로이센 주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네체 지구가 되어 1775년 서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1786년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인 프레드릭 빌헬름 2세는 1793년 폴란드 서부 지역의 상당 부분을 획득하는 등 분할을 계속했다. 첫 번째 분할 이후에도 폴란드에 남아 있던 토른과 단치히는 서프로이센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남프로이센 주가 되었다.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소멸했고, 동프로이센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광대한 지역(바르샤바 포함)이 프로이센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 처형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으나, 바젤 조약(1795년)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종식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년 10월 14일)에서 패배하여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그러나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이후, 프로이센은 동맹을 탈퇴하고 프랑스 점령에 맞선 "해방 전쟁" 동안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다.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원수 휘하의 프로이센 군대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최종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프랑스 패배에 기여한 공로로 프로이센은 빈 체제에서 보상을 받아 1806년 이전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또한 작센 왕국의 40%, 베스트팔렌과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포함한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
1848년 혁명의 결과로, 호헨촐레른지그마링엔 공국과 호헨촐레른헤힝엔 공국은 1850년에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통일된 독일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프로이센을 세 번의 전쟁으로 이끌었다.
이 전쟁들 중 첫 번째는 프로이센이 시작하고 성공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덴마크는 완패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각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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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분열된 행정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하노버 왕국, 헤세 선제후국, 나사우 공국, 프랑크푸르트 자유시 등 4개의 소규모 동맹국을 합병했다.
마지막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으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유도하여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게 했다. 독일 국가들이 하나로 뭉쳐 프랑스를 신속하게 패배시켰다. 1871년 1월 18일, 독일 제국이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에서 선포되었고, 빌헬름 1세가 초대 황제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대 강화에 힘썼고, 프리드리히 2세 통치하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폴란드 분할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며 프로이센의 군국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가 설치한 "병참 참모부"는 왕국 시대에 프로이센 참모본부로 발전하여, 이후 여러 나라 참모본부의 모범이 되었다.
당시 재학 중이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1년 자원병으로 포병사단에 자원 입대했으나, 낙마 사고로 인한 큰 부상과 강한 근시로 제대했다.
2. 3. 위기와 개혁의 시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 프로이센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왕은 어리석었고 군대는 나약해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 등에서 연달아 패배하였다. 이에 따라 1807년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의 절반을 잃고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대륙 봉쇄령에 따른 대영무역금지와 프랑스군 주둔 등의 경제적 압박을 당하여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18]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샤른호르스트, 클라우제비츠,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등은 근대화를 위해 개혁을 실시하여 농민 해방과 행정 기구의 쇄신을 달성했다.
프랑스에 의한 지배는 독일인들에게 민족으로서의 자각심을 불어넣어,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프로이센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열광적인 애국자들이 나타나 민족주의를 고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아직 그러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1848년 혁명의 결과로, 호헨촐레른지그마링엔 공국과 호헨촐레른헤힝엔 공국(호헨촐레른가의 가톨릭 방계가 통치)은 1850년에 프로이센에 합병되었고, 나중에 호헨촐레른 주로 통합되었다.
2. 4. 복고와 반동의 시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프로이센은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폴란드 분할로 얻었던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했지만, 베스트팔렌 등을 획득하여 인구가 1,000만 명에 달했다. 또한 독일 연방에 가맹하여 맹주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력을 양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프로이센에 있어 정신적인 정체를 불러온 반동의 시대였다.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신성 동맹을 체결한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 운동을 억압하여 개혁은 정체되었고, 관료절대주의가 만연하였다. 1848년 3월 혁명으로 캄프하우젠, 한제만 등 라인란트 시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성립되기도 하였으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주 지배 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1817년,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파운드화 표시 5% 이자 부착 국채를 발행했다.[47] 1818년에는 로스차일드의 권고에 따라 왕유지를 담보로 런던에서 액면가의 72%로 50만 파운드의 5% 국채를 발행했다. 1834년 독일 관세 동맹은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경제권을 형성했다.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농업 국가였던 프로이센의 산업화가 진행되었다.[47]
1848년 혁명 직전인 1845년과 1847년, 유럽은 흉작과 금융 위기에 시달렸다. 베를린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시민 폭동이 빈발했다(감자 혁명).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47년 2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은 칙령을 내려 제1회 Vereinigter Landtag|프로이센 연합 주의회de를 소집했다.
1848년 2월, 프랑스 2월 혁명이 발생했다. 이것이 독일로 파급되어 3월에는 베를린에서 3월 혁명이 발생했다. 국왕은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하여 군대를 베를린에서 철수시키고, 루돌프 캄프하우젠을 수상으로, David Hansemann|다비트 한제만de을 재무장관으로 하는 최초의 자유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자유주의 내각은 Preußische Nationalversammlung|프로이센 국민의회de를 설치했지만, 1848년 여름 이후 혁명의 분위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1월에는 프로이센에서도 보수파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수상에 취임하여 혁명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베를린은 다시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프로이센 국민의회는 휴회되었다.
동시에 국왕은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포함한 Preußische Verfassung (1848/1850)|프로이센 헌법 (1848년/1850)de을 발포했고, 이 헌법에 따라 프로이센 의회가 설립되었다. 1855년까지는 25세 이상의 남성 국민에 의한 Dreiklassenwahlrecht|삼급 선거권 제도de에 기반한 프로이센 하원(衆議院)과 세습 의원과 종신 칙임 의원으로 구성된 프로이센 상원(貴族院)의 양원제 의회가 확립되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유주의에 의한 통일을 원치 않아 즉위를 거부했다. 국왕은 황태자 빌헬름 왕자를 사령관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면서, 자유주의 우파 Joseph von Radowitz|요제프 폰 라도비츠de 중장의 구상을 채택하여 5월 26일 작센 국왕, 하노버 국왕과 함께 삼왕 동맹을 맺고, 소독일주의의 에어푸르트 헌법과 에어푸르트 연합 의회를 창설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을 초래했고, 결국 국왕은 연합 구상을 포기하고 11월 2일에 라도비츠를 외상에서 해임했다. 후임 수상 겸 외상 오토 테오도어 폰 만토이펠은 오스트리아와 올뮈츠 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완전한 굴복으로 여겨지며, “올뮈츠의 굴욕”이라고 불렸다.
2. 5. 독일 제국의 맹주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62년 프로이센 내각 총리 대신으로 취임하여 의회와 언론의 요구를 무시하고 "독일의 통일은 오직 철과 피로써 결정된다."라는 철혈 정책을 추진했다.[19] 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1871년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1860년 빌헬름 1세 즉위 당시, 의회 내 자유주의 세력이 성장하여 국왕의 군 지휘권이 부정당하고 퇴위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혈과 철의 정책”을 내세우자 보수파가 세력을 키웠고, 프로이센은 군사 강국으로 나아갔다.
1864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마크에 선전포고하여 승리했다(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 통일 주도권을 획득했다. 이후 프로이센은 산업력과 군사력을 발전시켰다.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몰트케 등의 활약으로 알자스-로렌을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로부터 빼앗고 파리에 입성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어 '''독일 제국''' 황제가 되면서 독일 제국이 성립, 독일 통일이 완료되었다.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왕과 독일 황제를 겸임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제국에 편입되어 국가 의식을 잃어갔다. 프로이센 주민들은 독일 제국 신민임을 자랑스러워했고, 프로이센의 독자적 기풍은 잊혀졌다. 프리드리히 3세는 백일 황제라 불렸고, 빌헬름 2세는 "카이저"(Kaiser)로만 불렸다.
3. 정치
1848년 덴마크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대해 취한 조치는 덴마크와 독일 연방 간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1848-1851)을 일으켰고, 덴마크가 승리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48년 프로이센 최초의 헌법을 발표하고 1850년 헌법에서 수정했다. 이 헌법은 양원 의회인 ''란트타그'']를 규정했다. 하원(이후 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de)은 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이 3계급 선거권을 사용하여 선출되었는데, 유권자는 납세액에 따라 세 계급으로 나뉘어 부유한 남성들의 지배를 보장했다.[19] 상원(이후 헤렌하우스de)은 국왕이 임명했다. 국왕은 완전한 행정권을 유지했고 장관은 그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융커들의 지배는 깨지지 않았지만, 헌법에는 배심원 재판 도입과 종교, 언론, 출판의 자유를 포함한 여러 자유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20]
185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뇌졸중을 앓자 동생 빌헬름 1세가 섭정이 되었고, 1861년 빌헬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빌헬름 1세는 의회와 군대 규모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의회는 빌헬름의 연대 수 증가 희망에 반발하여 예산 승인을 거부했다. 빌헬름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했고, 비스마르크는 헌법의 "구멍"을 이용해 예산 없이 정부를 운영하며 빌헬름의 군사 개혁을 시행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된 독일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프로이센을 세 번의 전쟁으로 이끌었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에서 덴마크를 격파하고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차지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여러 소규모 국가들을 합병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독일 북부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 연방은 해체되고, 프로이센은 마인 강 북쪽의 21개 주를 설득하여 1866년 북독일 연방을 구성했다. 프로이센은 연방에서 지배적인 국가였으며, 비스마르크가 작성한 헌법에 의해 행정권은 프로이센 통치자들의 세습 직책인 대통령에게 위임되었다. 양원 의회가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연방 평의회에서 17표를 가지고 있어 절차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유도하여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게 했고, 독일 국가들이 뭉쳐 프랑스를 신속하게 패배시켰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고, 빌헬름 1세가 초대 황제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1848년까지 절대 군주제였으며, 이후 입헌 군주제가 되었다. 1848년 독일 혁명 이후 프로이센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지방 의회라 불리는 양원제 의회가 구성되었다.
3. 1. 역대 프로이센 국왕
1701년 1월 18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그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에게 군사 8000명을 원군으로 파견하여 지원하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영역 밖인 프로이센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 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전체가 프로이센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56]
프리드리히 1세는 루이 14세를 모방하여 화려한 생활을 즐겼으며, 낭비벽이 심했다. 그는 국고를 탕진했지만, 동시에 교양인이기도 하여 프로이센 대학교를 세우고 예술 아카데미와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수도 베를린을 고대 아테네에 버금가는 문화 도시로 만들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역대 국왕은 다음과 같다.
1871년부터 1918년까지는 프로이센의 왕이 독일 제국의 황제를 겸하였다.
3. 2. 프로이센 왕가 수장 (1918년 이후)
주어진 소스는 1918년까지의 프로이센 왕(및 독일 황제) 목록이며, "프로이센 왕가 수장 (1918년 이후)"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이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이 섹션은 빈칸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4. 행정 구역
(1879년부터 1917년까지는 슐레스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