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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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혜비는 당나라 현종의 후궁으로, 정순황후로 추존되었다. 당나라 광위안에서 태어나 8세에 현종의 측실이 되었고, 현종 즉위 후 후궁이 되었다.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아들 이모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세 왕자를 모함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39세에 사망한 후 정순황후로 추존되었으나, 숙종에 의해 황후 칭호와 명예가 박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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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혜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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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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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상 |
휘호 | 혜비(惠妃) |
시호 | 생전: 혜비(惠妃) 사후: 정순황후(貞順皇后) |
아버지 | 무유지 |
어머니 | 양씨(楊氏) |
배우자 | 당 현종 |
자녀 | 이일, 하도왕(夏悼王) 이민, 회애왕(懷哀王) 상선공주(上仙公主) 이모, 수왕(壽王) 이기, 성왕(盛王) 함의공주(咸宜公主) 태화공주(太華公主) |
출생 | 기원후 698년경 |
사망 | 기원후 738년 1월 (39~40세) |
생애 | |
생애 | 당 현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 |
가계 | |
친척 | 측천무후(친척 고모할머니), 무사량(친정 증조부) |
2. 주요 이력
707년 음력 8월(8세 시절) 이융기의 측실이 되었으며, 712년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하자 후궁이 되었다. 738년 1월 5일 39세로 병사하였고, 사후 당 현종 이융기의 명으로 '''정순황후'''(貞順皇后)로 추존되었다.[5] 생전에 현종과 함께 수왕부를 방문하여 양귀비를 총애하기도 하였다.
2. 1. 출생과 가계
당나라 쓰촨성 광위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당나라 쓰촨성 청두에서 잠시 지내다가 당나라 산시성 창안에서 성장했다. 측천무후의 숙부 무사양의 손녀이자 무유지의 딸이었다.[2][3]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갔다.2. 2. 입궁과 총애
707년 음력 8월(8세 시절) 당시 당나라 황태자 시절 이융기의 측실이 되었으며, 712년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하자 후궁이 되었다.[5]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총애를 받던 다른 이들로는 조려비[5], 황보덕의, 유재인 등이 있었지만, 이들의 총애가 옅어진 후에는 무혜비가 독점했다고 전해진다.
현종의 개원 연간(713–741) 초기에 그녀는 잇따라 두 아들 이일(李一, 사후 소도왕으로 추존)과 이민(李敏, 사후 회애왕으로 추존), 그리고 딸 하나(사후 상선공주로 추존)를 낳았는데, 모두 아름답다고 묘사되었지만 모두 어릴 때 사망했다. 그녀가 나중에 또 다른 아들 이청을 낳자, 현종은 그의 형제 녕왕 이현에게 아이를 기르도록 요청했고, 이현과 그의 아내 원공주는 아이를 직접 키웠다. 그 후, 성왕 이기와 함의 공주와 태화 공주를 낳았다.
한편, 현종의 무혜비에 대한 총애가 커지면서 그의 아내 왕황후에 대한 총애는 줄어들었다. 무혜비는 야심이 많았고, 무측천을 본받아 황후가 되려는 뜻을 품었으며, 왕황후는 이 문제로 현종과 자주 다퉜다고 한다. 724년, 왕황후가 폐위된 후, 혜비의 지위를 받았으며, 궁중에서의 대우는 황후와 동등하게 되었다.
726년, 현종은 무혜비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어사 판호례로부터 "무씨 일족은 폐하의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또한 장설이 입후의 공을 세우고, 재상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게다가 태자 이영(조려비의 아들)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라는 반대에 부딪혀 중단했다고 전해진다.
2. 3. 황후 책봉 시도와 좌절
현종의 아내 왕황후가 폐위된 후, 현종은 무혜비에게 당시 황후의 최고위 등급인 '혜비(惠妃)'의 품계를 내렸다. 726년에는 무혜비를 황후로 책봉하는 것을 고려했다.[5] 그러나 이는 관리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현종은 무혜비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지만, 다른 후궁들과 시녀, 그리고 환관들에게 궁궐 안에서는 그녀를 황후처럼 대우하도록 했고, 관리들부터 백성들에게까지 그녀를 그렇게 대하도록 했다.[5]
2. 4. 세 왕자 모함 사건
개원 24년(736년), 무혜비는 태자 이영, 악왕 이요(황보덕의의 아들), 광왕 이거(유재인의 아들)가 자신에 대해 원망했다고 현종에게 모함했다. 이임보는 무혜비의 뜻에 따라, 이모(양옥환의 남편)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조정에서 공작을 벌였다.[5]개원 25년(737년), 무혜비는 이영, 이유, 이거를 속이기 위해 "궁궐에 도적이 있으니 즉시 갑옷을 입고 보고하라!"라는 전갈을 보냈다. 세 왕자가 무장하고 도착하자, 무혜비는 현종에게 "세 왕자가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갑옷을 입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종은 환관에게 확인하게 했고, 세 왕자는 갑옷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선의공주의 남편 양회는 이영, 이유, 이거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현종이 재상들과 논의했을 때, 이임보는 "황제의 집안일이니 간섭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세 왕자는 곧 처형되었다.
2. 5. 죽음과 추존
당 현종 이융기의 황명으로 로 추존된 무혜비는 738년 1월 5일에 39세의 나이로 병사(훙서)하였다.[5] 훙서 2개월 후인 738년 3월 18일에 정순황후로 추존되었다.무혜비는 자신의 장남 이모를 수왕으로 책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영, 이유, 이거에게 "궁궐에 도적이 있으니 갑옷을 입고 보고하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세 왕자가 무장한 채 도착하자 현종에게 그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했다. 현종은 환관을 시켜 확인 후 세 왕자를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후 무혜비는 꿈에서 세 왕자의 환영에 시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사망했다.[5] 현종은 그녀를 황후로 추존하고 황후에 걸맞은 장례를 치렀으나, 애도 기간 준수는 거부했다. 세 왕자에 대한 범죄가 널리 알려져 아들은 태자 지위를 잇지 못했고, 황후 칭호와 명예는 숙종에 의해 박탈되었다.



3. 평가
무혜비는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황후 책봉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음모를 꾸몄고, 이로 인해 여러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사후 황후로 추존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지위를 박탈당하는 등 복잡한 평가를 받는다.
3. 1. 부정적 평가
현종은 무혜비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관리들은 무씨 가문이 황실과 적대 관계에 있다는 점과 무혜비에게 이미 아들이 있어 태자 이영(이사건)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현종은 무혜비를 황후로 책봉하지는 않았지만, 궁궐 안팎에서 황후처럼 대우하도록 했다.무혜비는 자신의 아들 이모(李瑁)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관료 이임보와 결탁했다.[1] 이임보는 재상이 된 후 이모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1]
무혜비는 이영, 이유, 이거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3] 그녀는 세 왕자가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고, 이임보는 황제의 집안일이라며 간섭하지 않았다.[3] 세 왕자는 곧 처형되었고, 무혜비는 꿈에서 세 왕자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병에 걸려 사망했다.[3]
현종은 무혜비를 사후에 황후로 추존했지만, 세 왕자에 대한 범죄 때문에 아들 이모는 태자가 되지 못했고, 무혜비의 황후 칭호와 명예는 숙종에 의해 박탈되었다.[3]
4. 가족 관계
5. 기타
무혜비의 묘인 경릉은 2004년에 도굴되어 폭 4m, 무게 27톤의 석곽이 도난당했다. 석곽은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유출되었으나 2011년에 반환되어 산시 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황후의 천당』에 상세히 나와있다. 궁전을 본뜬 석곽의 외관은 높이 약 2.45m, 폭 약 2.58m, 길이 약 3.99m이다. 이 석곽은 현재까지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크기도 최대이며,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등 그림으로서의 가치 또한 매우 크다.
참조
[1]
서적
Jiu Tang Shu
[2]
서적
Xin Tang Shu
[3]
웹사이트
漢川草廬-二十四史-新唐書-卷七十四‧表第十四
http://www.sidneyluo[...]
2009-03-13
[4]
서적
Old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08-04-19
[5]
문서
[6]
웹사이트
http://japanese.c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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