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마세 고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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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마세 고개 전투는 전국 시대 다케다 신겐이 호조 우지테루와 호조 우지쿠니가 이끄는 호조 군과 벌인 전투이다. 다케다 신겐은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후, 호조 군의 요격을 피해 미마세 고개에서 전투를 벌였다. 다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기습으로 승리했지만, 아사리 노부타네를 잃는 등 피해를 입었다. 전투 후, 다케다 군은 가이로 철수했고, 이 전투는 다케다 씨의 스루가 침공을 진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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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마세 고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명 | 미마세 고개 전투 (三増峠の戦い) |
| 시기 | 1569년 |
| 장소 | 가나가와현 아이코군 미마세 고개, 사가미국 주변 |
| 원인 | 다케다 신겐의 오다와라성 공격 후 퇴각 |
| 결과 | 호조 군 퇴각 다케다 군 성공적인 철수 |
| 교전 세력 | |
| 교전 1 | 다케다 신겐 군 |
| 교전 2 | 호조 우지야스 군 |
| 지휘관 | |
| 다케다 군 지휘관 | 다케다 신겐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하라 마사타네 오바타 마사모리 사나다 마사유키 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노부카도 나이토 마사히데 아사리 노부타네 (전사) 소네 마사요 |
| 호조 군 지휘관 | 호조 우지테루 호조 우지쿠니 호조 쓰나시게 호조 우지타다 다카기 구란도 하라 타네히데 우에다 토모나오 |
| 병력 규모 | |
| 다케다 군 병력 | 10,000 ~ 20,000명 |
| 호조 군 병력 | 6,000 ~ 20,000명 (다양한 설 존재) |
| 피해 규모 | |
| 다케다 군 사상자 | 900명 전사 |
| 호조 군 사상자 | 3,200명 전사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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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전투 | |
2. 합전의 경위
1569년, 다케다 신겐이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 침공을 개시하면서 고소 동맹이 파탄나자, 호조 우지야스는 우에스기 겐신과 엣소 동맹을 맺어 다케다 씨에 대항했다.[1] [2]
1569년 10월 1일, 다케다 신겐은 2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호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2] 우에스기 겐신이 10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도 함락시키지 못한 견고한 성이었기에, 신겐은 직접 공격 대신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고 도발했으나 고호조 씨는 응하지 않았다. 다케다 군은 포위 4일 후인 10월 5일에 철수했다.[3]
호조 우지테루와 호조 우지쿠니는 2만 군세를 이끌고[3] 미마세 고개에서 다케다 군을 요격하려 했다. 호조 우지마사도 2만 군세를 이끌고 협공을 계획했으나, 도착이 늦어졌다. 10월 6일 다케다 군과 호조 군이 대치했다.
신겐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호조 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별동대로 하여금 호조 군을 측면에서 급습하는 작전을 펼쳤다. 10월 8일 양군은 교전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호조 군이 우세하여, 호조 쓰나시게가 지휘하는 철포대의 총격으로 다케다 군 좌익의 아사리 노부타네와 우라노 시게히데가 전사했다.[4]
그러나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다케다 별동대가 높은 곳에서 기습하여 전황이 역전되었다. 결국 다케다 군이 승리하고 가이 국으로 퇴각했다.
2. 1. 전국시대 갑상관계와 다케다 씨의 스루가 침공
전국 시대에 영토를 접하고 있던 다케다 씨와 호조 씨는 다케다 노부토라・호조 우지츠나 시기에는 가이 쓰루군에서 항쟁을 계속했지만, 가와고에 야전과 동시에 종결된 가토 이란의 강화에서 호조 우지야스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리인인 다이겐 셋사이의 중재를 한 것이 다케다 하루노부(다케다 신겐)로 여겨진다. 이 일로 인해 양자는 화해하여 고소 동맹이 맺어졌고, 이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동맹을 맺어 고소 슨 삼국 동맹의 체결에 이르렀다. 다케다 씨는 시나노 침공을 감행하여 호쿠신 지역에서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와 항쟁했고, 호조 씨는 기타칸토 침공을 감행하여 역시 에치고 우에스기 씨와 항쟁하여, 양자는 상호 협조하여 우에스기 씨에 대항했다.다케다 씨의 시나노 침공은 5차례의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계기로 수습되었고, 다케다 씨는 방침을 전환하여 에이로쿠 11년(1568년) 12월에는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 이마가와 영토로 침공을 감행한다(스루가 침공). 다케다 씨의 스루가 침공은 고소 동맹의 파탄을 초래했고, 호조 씨는 우에스기 씨와 엣소 동맹을 체결하여 다케다 씨에 대항했다.[1] [2]
2. 2. 오다와라 성 포위
1569년 10월 1일, 다케다 신겐은 2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호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2] 당시 오다와라성은 총구축이 착공 전이었지만, 과거 우에스기 겐신이 10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도 함락시키지 못한 견고한 성이었다. 신겐은 성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고 세 차례에 걸쳐 도발했다. 그러나 고호조 씨는 오다와라성을 나오지 않았다. 다케다 군은 포위를 시작한 지 4일 후인 10월 5일에 성 아래에 불을 지르고 군세를 철수시켰다.[3]2. 3. 미마세 고개에서의 격돌
1569년, 호조 우지마사는 삿타 고개에 도착하여 다케다 세력과 대치했다[2]。 8월 24일, 다케다 신겐은 2만 군세를 이끌고 고후를 출발, 가미노쿠니를 경유하여 남하, 하타리 고전장에서 오야마다 노부시게 측 1,000명이 호조 씨 측 2,000명을 격파하고, 10월 1일 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 4일 후인 10월 5일 다케다 군은 철수했다.호조 우지테루와 호조 우지쿠니는 2만 군세를 이끌고[3] 미마세 고개에서 다케다 군을 요격하려 했다. 호조 우지마사도 2만 군세를 이끌고 협공을 계획했으나, 도착이 늦어졌다. 10월 6일 다케다 군과 호조 군이 대치했다.
신겐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호조 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별동대로 하여금 호조 군을 측면에서 급습하는 작전을 펼쳤다. 10월 8일 양군은 교전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호조 군이 우세하여, 호조 쓰나시게가 지휘하는 철포대의 총격으로 다케다 군 좌익의 아사리 노부타네와 우라노 시게히데가 전사했다[4]。
그러나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다케다 별동대가 높은 곳에서 기습하여 전황이 역전되었다. 호조 군은 배후의 쓰쿠이 성 수비대 등 예비 전력이 다케다 군 별동대에 억눌려 큰 피해를 입었다. 다케다 좌익 대장 아사리 노부타네가 전사한 좌익에서는 군감이었던 소네 마사요시가 지휘를 맡아 호조 군을 격퇴했다.
결국 다케다 군이 승리하고 가이 국으로 퇴각했다. 오다와라에서 추격해 온 호조 우지마사의 본대는 자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진격을 멈추었다.
2. 4. 자결에 얽힌 전설
이 전투에서는 다케다 군과 호조 군 양측 모두 무사들의 자결에 얽힌 여러 유사한 일화가 전해진다.다케다 군의 무사 일부는 가이국으로 철수하던 중 호조 군의 추격을 받았다. 도망치기 위해 산속을 헤매던 그들은 가이국 방향에서는 보일 리 없는 바다를 보게 된다. 이는 메밀밭의 하얀 꽃을 착각한 것이었지만, 길을 잘못 들어 적국으로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애도하여 메밀을 재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조 군 측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전투에서 패한 패잔병들이 산속을 도망치던 중, 옥수수 수확 후의 줄기를 다케다 군의 창으로 착각하여 도망칠 길이 없다고 ভেবে 자결했다. 이 지역에서는 이들을 위령하기 위해 옥수수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5][6]
이는 전투의 참혹함과 당시 무사들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전설들이다.
3. 합전의 평가
미마세 고개 전투는 전국 시대 최대 규모의 산악전 중 하나로, 지형의 높낮이 차이가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군은 승리했지만, 유력 무장인 아사리 노부타네를 잃는 등 피해도 컸다.[4] 전략적으로 보면, 이 전투의 결과로 다케다 씨는 스루가 침공을 크게 진전시켰고, 우에스기 겐신은 본거지 에치고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전투는 2년 후 호조 우지야스가 이끄는 호조 가문이 우에스기 겐신의 우에스기 가문과 관계를 끊고, 다케다 신겐의 다케다 가문과 다시 동맹을 맺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역사학자 시바쓰지 슌로쿠는 신겐의 오다와라 공격이 엣소 동맹을 흔들고, 간토 지역의 반(反) 호조 세력에게 위세를 떨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 지적한다. 실제로 호조 가문과 엣소 동맹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에스기 겐신은 동맹 조건에 따라 다케다 군을 견제하기 위해 시나노로 출병해야 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는 겐신이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다케다 씨와의 화친을 명령받아 성립된 "갑에쓰 화여"의 영향도 있었다. 신겐은 이러한 "갑에쓰 화여"를 통해 겐신이 호조 씨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침공을 감행한 것이다.[9][10][11]
4. 참전 무장
| 다케다 군 무장 | 호조 군 무장 |
|---|---|
| 다케다 신겐 | 호조 우지테루 |
| 다케다 가쓰요리 | 호조 우지쿠니 |
| 다케다 노부카도 | 호조 쓰나시게 |
| 야마가타 마사카게 | 호조 우지타다 |
| 나이토 마사히데 | 다카시로 구라토 |
| 바바 노부하루 | 하라 타네나가 |
| 아사리 노부타네 | 우에다 아사나오 |
| 오바타 노리시게 | |
| 소네 마사요 |
5. 관련 작품
츠쿠다 호비에서 제작한 보드 게임 《카이노 토라》(甲斐の虎)와 《간토 제압》(関東制圧)은 모두 절판되었다.[4] GMT Games에서 2007년에 발매한 보드 게임 《RAN》은 영어로 되어 있다.[4]
참조
[1]
서적
甲陽軍鑑
[2]
간행물
戦国遺文後北条氏編
[3]
서적
甲陽軍鑑
[4]
서적
甲陽軍鑑
[5]
서적
かながわの山
神奈川新聞社
[6]
문서
[7]
문서
山吉文書
[8]
문서
豊前氏古文書
[9]
문서
上越史
[10]
서적
上杉氏年表(増補改訂版)
高志書院
2013
[11]
서적
武田信玄
吉川弘文館
[12]
서적
北条氏康と東国の戦国世界
夢工房
2005
[13]
서적
武田信玄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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