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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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다 씨는 가와치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를 시조로 하는 일본의 씨족이다. 요시미쓰는 가이노카미로 임명되어 가이에 정착했으며, 그의 아들 요시키요가 히타치국 다케다 향을 본관으로 다케다 성을 사용하면서 다케다 씨가 시작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고케닌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가이 다케다 씨로 번성하며 다케다 신겐을 배출했다. 다케다 씨는 아키, 와카사, 가즈사 등 여러 분가를 두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다이묘로,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사족으로 존속했다. 다케다비시 문장을 사용하며, 고슈합토, 고요군칸과 같은 문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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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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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성씨 | 다케다 (武田) |
가문 문양 | 네 잎 마름풀 (武田菱, Takeda bishi) |
가문 | 무가, 사족 |
본성 | 가와치 겐지요시미쓰 류 |
출신지 | 히타치국, 가이국 |
근거지 | 가이국, 아키국, 와카사국 등 |
역사 | |
창시자 | 미나모토노 요시키요 |
시조 | 다케다 노부요시 |
마지막 통치자 | 다케다 가쓰요리 |
창건 연도 | 12세기 |
해체 | 1582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다케다 노부요시 다케다 노부미쓰 다케다 마사요시 다케다 노부타케 다케다 노부시게 다케다 노부마사 다케다 노부토라 다케다 신겐 다케다 요시노부 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구니노부 |
가계 | |
본거지 | 가이국 |
분가 | 아키 다케다 와카사 다케다 가즈사 다케다 마쓰마에 씨 난부 씨 요네쿠라 씨 야나기사와 씨 고토 씨 오가사와라 씨 미요시 씨 아키야마 씨 유가와 씨 이타가키 씨 아마리 씨 가나마루 씨 마리야쓰 씨 아나야마 씨 겐지 니시나 씨 가와쿠보 씨 고마이 씨 이와사키 씨 등 |
가문 | 미나모토 씨 (源氏) |
2. 시조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로부터 가이 토착까지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도료(棟梁)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신라사부로 요시미쓰)는 가이노카미(甲斐守)로 임관한 아버지 요리요시의 뒤를 이었다. 요시미쓰는 처음으로 가이의 부임지에 실제 발을 들였고 나아가 그곳에 토착하기까지 한 인물로 여겨지며, 일본 야마나시현의 호쿠토시 스고 정(須玉町)의 와카미코(若神子)에 있는 와카미코 성이 가이에서 요시미쓰가 머무른 곳이라는 전승이 있다. 1981년의 발굴조사에서 유물들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이곳이 요시미쓰가 머물렀던 곳임을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한 고대 가이에서 고쿠가(国衙) 즉 관아는 야시로 군에 있었다는 점에서 요시미쓰가 정말 가이에 왔었는가를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요시미쓰의 가이노카미 임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현재는 시다 준이치가 1968년 『가쓰다 시사』(勝田市史)에서 제창한, 요시미쓰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키요가 히타치 국(常陸国) 나카군(那珂郡) 다케다 향(武田郷, 일본 이바라키현 히타치나카시 다케다)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다케다라는 성을 칭한 것에서 발상했다는 설이 정설로 지지를 받고 있다. 다이지(大治) 5년 요시키요의 적남인 미나모토노 기요미쓰의 낭자한 행위가 원인이 되어 부자는 히타치를 추방당하고, 가이 국 고마군(巨摩郡) 이치카와 장(市河荘, 야마나시 현 니시야시로군(西八代郡) 이치카와미사토 정)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다른 배류지로는 야마나시 현의 나카고마군(中巨摩郡) 쇼와 정 사이조(西条)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요시키요 부자는 하치가다케(八ヶ岳) 산록의 이치미 장(逸見荘)으로 진출하여, 키요미쓰는 이치미씨(逸見氏)(이치미) 성(逸見冠者)을 사용한다. 그 후, 요시키요의 손자인 노부요시(信義)는 원복(元服)에 즈음해 다케다하치만궁(武田八幡宮)에서 조부인 요시키요의 다케다 성을 복귀하고, 카이국(甲斐国) 고마군(巨摩郡) 다케다(현재의 야마나시현(山梨県) 니라사키시(韮崎市)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그 후를 잇는 다케다 씨의 초대 당주로 여겨진다.
노부요시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고케닌(御家人)이 되어 스루가국(駿河国) 슈고(守護)에 임명되었고, 그 아들인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는 카이·아키 수호에도 임명되어, 다케다 씨가 카이·아키에서 번영하는 기초를 쌓았다.
2. 1. 가와치 겐지와 가이 국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도료(棟梁) ・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신라사부로 요시미쓰)는 가이노카미(甲斐守)로 임관한 아버지 요리요시의 뒤를 이었다. 요시미쓰는 처음으로 가이의 부임지에 실제 발을 들였고 나아가 그곳에 토착하기까지 한 인물로 여겨지며, 일본 야마나시현의 호쿠토 시(北杜市) 스고 정(須玉町)의 와카미코(若神子)에 있는 와카미코 성이 가이에서 요시미쓰가 머무른 곳이라는 전승이 있다. 1981년의 발굴조사에서 유물들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이곳이 요시미쓰가 머물렀던 곳임을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한 고대 가이에서 고쿠가(国衙) 즉 관아는 야시로 군(八代郡)에 있었다는 점에서 요시미쓰가 정말 가이에 왔었는가를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요시미쓰의 가이노카미 임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으며, 쇼라는 악기를 연주하였다.[3][4]

현재는 시다 준이치(志田諄一)가 1968년 『가쓰다 시사』(勝田市史)에서 제창한, 요시미쓰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키요가 히타치 국(常陸国)의 나카 군(那珂郡) 다케다 향(武田郷, 일본 이바라키현 히타치나카시 다케다)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다케다라는 성을 칭한 것에서 발상했다는 설이 정설로 지지를 받고 있다. 다이지(大治) 5년(1130년) 요시키요의 적남인 미나모토노 기요미쓰의 낭자한 행위가 원인이 되어 부자는 히타치로 쫓겨났는데, 가이 국 고마 군(巨摩郡) 이치카와 장(市河荘, 야마나시 현 니시야시로 군 이치카와미사토 정)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다른 배류지로는 야마나시 현의 나카코마 군(中巨摩郡) 쇼와 정(昭和町) 사이조(西条)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요시키요 부자는 야쓰가타케(八ヶ岳) 산기슭의 에미 장(逸見荘)으로 진출하였고, 기요미쓰는 에미를 성으로 써서 에미노 가쟈(逸見冠者)라는 이름을 썼다. 그 뒤 요시키요의 손자 노부요시(信義)는 원복(元服)에 즈음해 다케다 하치만구(武田八幡宮)에서 할아버지 요시키요가 썼던 다케다 성을 회복했고, 가이 국 고마 군의 다케다(武田, 야마나시 현 니라사키 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부터 다케다 씨의 초대가 되었다.
노부요시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고케닌(御家人)이 되어 스루가슈고(駿河守護)로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노부미쓰(信光)는 가이와 아키(安芸)의 슈고를 맡기도 하는 등, 다케다 씨가 가이 ・ 아키에서 번영을 누리는 기초를 쌓았다.
2. 2. 다케다 씨의 발상
다케다 씨는 세이와 천황을 시조로 하는 세이와 겐지의 일족으로 가와치 겐지를 칭한 미나모토노 요리노부를 선조로 한다.[3][4] 미나모토노 요리노부는 조겐 2년(1029년) 가이노카미로 임관했고,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거쳐 요리요시의 셋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로 이어졌다. 요리요시 대까지는 교토에 머무르며 현지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요시미쓰는 처음으로 가이에 부임하여 토착한 인물로 여겨진다. 야마나시현 호쿠토 시 스고 정의 와카미코 성이 요시미쓰가 가이에서 머무른 곳이라는 전승이 있으나, 1981년 발굴조사에서 이를 확정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대 가이 국아가 야시로 군에 있었다는 점과 요시미쓰의 가이노카미 임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존재한다.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으며, 쇼라는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3][4]
1968년 시다 준이치가 『가쓰다 시사』에서 제창한 설에 따르면, 요시미쓰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키요가 히타치 국 나카 군 다케다 향(지금의 이바라키현 히타치나카시 다케다)을 본관으로 하여 다케다를 칭한 것이 다케다 씨의 발상이라고 한다. 다이지 5년(1130년) 요시키요의 적남 미나모토노 기요미쓰의 난폭한 행동으로 부자는 히타치에서 쫓겨나 가이 국 고마 군 이치카와 장(야마나시 현 니시야시로 군 이치카와미사토 정)에 유배되었다. 요시키요 부자는 야쓰가타케 산기슭의 에미 장으로 진출하였고, 기요미쓰는 에미를 성으로 칭했다. 그 뒤 요시키요의 손자 다케다 노부요시는 원복 때 다케다 하치만구에서 조부 요시키요가 썼던 다케다 성을 회복하고 가이 국 고마 군의 다케다(야마나시 현 니라사키 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다케다 씨의 초대 당주가 되었다.
노부요시는 가마쿠라 시대에 고케닌이 되어 스루가슈고로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다케다 노부미쓰는 가이와 아키의 슈고를 맡는 등 다케다 씨가 가이 ・ 아키에서 번영을 누리는 기초를 쌓았다.
2. 3. 가이 겐지의 발전
다케다 씨의 시조는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도료(棟梁)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신라사부로 요시미쓰)로 모셔졌다.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는 조겐 2년 가이노카미(甲斐守)로 임관했고, 요리요시-요시미쓰 부자로 이어졌다. 요리요시 대까지는 교토에 머무르며 현지에 부임하지 않았지만, 요시미쓰는 처음으로 가이에 발을 들여 토착한 인물로 여겨진다.[3][4] 야마나시현 호쿠토 시 스고 정의 와카미코 성이 가이에서 요시미쓰가 머무른 곳이라는 전승이 있으나, 1981년 발굴조사에서 유물들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대 가이의 고쿠가(国衙)는 야시로 군에 있었다는 점에서 요시미쓰의 가이 부임 및 가이노카미 임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1968년 시다 준이치(志田諄一)가 『가쓰다 시사』(勝田市史)에서 제창한, 요시미쓰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키요(源義清)가 히타치 국 나카 군 다케다 향(현 이바라키현 히타치나카시 다케다)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다케다라는 성을 칭했다는 설이 정설로 지지를 받고 있다. 요시키요는 아버지로부터 히타치 국의 다케다 영지를 하사받으면서 처음으로 다케다라는 성을 사용하였다.[3][4] 다이지 5년 요시키요의 적남 기요미쓰(清光)의 낭자한 행위로 부자는 히타치로 쫓겨났는데, 가이 국 고마 군 이치카와 장(현 야마나시 현 니시야시로 군 이치카와미사토 정)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다른 배류지로는 야마나시 현 나카코마 군 쇼와 정 사이조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요시키요 부자는 야쓰가타케 산기슭의 에미 장으로 진출하였고, 기요미쓰는 에미를 성으로 써서 에미노 가쟈(逸見冠者)라는 이름을 썼다. 그 뒤 요시키요의 손자 노부요시(信義)는 원복(元服)에 즈음해 다케다 하치만구(武田八幡宮)에서 할아버지 요시키요가 썼던 다케다 성을 회복했고, 가이 국 고마 군의 다케다(현 니라사키 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부터 다케다 씨의 초대가 되었다.
노부요시는 가마쿠라 시대 고케닌(御家人)이 되어 스루가슈고(駿河守護)로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노부미쓰(信光)는 가이와 아키(安芸)의 슈고를 맡기도 하는 등, 다케다 씨가 가이 ・ 아키에서 번영을 누리는 기초를 쌓았다.
3. 가이 다케다 씨(甲斐武田氏)
# 다케다 노부요시(미나모토노 기요미쓰의 아들)
# 다케다 노부미쓰 (다케다 노부요시의 아들)
# 다케다 노부마사 (다케다 노부미쓰의 아들)
# 다케다 노부토키 (다케다 노부마사의 아들)
# 다케다 도키쓰나 (다케다 노부토키의 아들)
# 다케다 노부무네 (다케다 도키쓰나의 아들)
# 다케다 노부타케 (다케다 노부무네의 아들)
# 다케다 노부나리 (다케다 노부타케의 아들)
# 다케다 노부하루 (다케다 노부나리의 아들)
# 다케다 노부미쓰 (다케다 노부하루의 아들)
# 다케다 노부시게 (다케다 노부미쓰의 아들)
# 다케다 노부모리 (다케다 노부시게의 아들)
# 다케다 노부마사 (다케다 노부모리의 아들)
# 다케다 노부쓰나 (다케다 노부마사의 아들)
# 다케다 노부토라 (다케다 노부쓰나의 아들)
# 다케다 하루노부(신겐)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
#* 다케다 노부시게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 다케다 신겐의 동생)
#* 다케다 노부카도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 다케다 신겐의 동생)
# 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신겐의 아들)
#* 다케다 요시노부 (다케다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의 형)
#* 니시나 모리노부 (다케다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의 동생)
# 다케다 노부카쓰 (다케다 가쓰요리의 아들)
== 지쇼-주에이의 난에서의 활동 ==
다케다 노부요시(미나모토노 노부요시)는 1180년(지쇼 4년) 4월 모치히토 왕으로부터 헤이케 타도를 명하는 영지(令旨)를 받고 가이 겐지 일족을 거느리고 거병했다.[63][16] 가이 겐지는 후지 강 전투에서 주력이 되어 승리하였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다케다 노부요시가 스루가의 슈고로, 야스다 요시사다가 도토미의 슈고로 임명되었다(『아즈마카가미』).[63][16]
지쇼-주에이의 난에서 가이 겐지 일족은 『아즈마카가미』 이외의 기록 사료를 종합해 볼 때 요리토모의 산하가 아닌 독자적인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3][16] 스루가 슈고 임명 역시 패주하는 헤이케를 추토한 노부요시 등이 슨엔 지방을 점거한 뒤 가이 겐지의 전공을 요리토모가 추인한 것으로 여겨진다.[63]
이후 요리토모는 가이 겐지의 세력을 경계하여 숙청을 단행, 노부요시는 실각하고 그의 동생 및 아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다.[63][16] 그러나 노부요시의 다섯째 아들 노부미쓰만은 요리토모의 신임을 얻어 가이 국 슈고로 임명되었고, 니라사키에서 다케다 씨의 적류가 되었다.[63][16] 노부미쓰는 조큐의 난에서도 전공을 세워 아키 국의 슈고직에 임명되어 아키 다케다씨의 시조가 되었다.[63][16]
== 가마쿠라 시대 ==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지원한 다케다 노부요시(1128~1186)의 요청을 받아 다케다 가문은 2만 5천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노부요시의 아들인 다케다 노부미쓰(1162~1248)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이 국의 슈고(守護)에 임명되었다. 그는 죠큐 전쟁에서 호조 씨를 도와 아키 국의 지지를 받았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 다케다 씨를 대신해 니카이도 씨가 가이 슈고로써 확인된다. 그 뒤 이사와 류(石和流) 다케다 씨의 다케다 마사요시가 가이 슈고가 되었다. 마사요시는 1331년 고다이고 덴노가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목적으로 거병한 겐코의 난에서 막부측을 따라 가사기 산을 공격하였고, 훗날 막부 타도 세력에 가담하여 막부 멸망 뒤에는 겐무 신정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1335년에 호조 도키유키 등이 가마쿠라 막부 부활을 목적으로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에도 참가하였다.
== 난보쿠초에서 무로마치로 ==
난보쿠초 시대에는 아키 슈고였던 노부토키류(信時流) 다케다 씨의 다케다 노부타케가 북조의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속하여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간노(観応) 연간에는 남조의 마사요시(政義)를 배제하고 가이 국 슈고가 되었다. 노부타케의 자손인 노부나리(信成)[64][17] ・ 노부하루(信春) 부자도 가이 슈고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론도 존재한다.
노부타케의 아들 대에서 다케다 씨의 총령가(惣領家)는 가이 다케다 가(甲斐武田家) ・ 아키 다케다 가(安芸武田家) ・ 교토 다케다 가(京都武田家)의 세 집안으로 분파되었다.
가이 국은 가마쿠라부 관할이었는데, 무로마치 시대 오에이(応永) 23년(1416년)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우지노리(우에스기 젠슈)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에 반기를 든 우에스기 젠슈의 난을 일으켰다. 가이 슈고였던 다케다 노부미쓰는 우에스기 젠슈의 편에 섰으나 막부의 개입으로 젠슈는 멸망하였고, 노부미쓰는 가마쿠라 부의 토벌로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가이는 슈고가 부재한 상태가 되었고, 가이의 고쿠진인 에미 씨(逸見氏)가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지지를 얻어 슈고직을 요구하며 대두하였다. 한편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다케다 노부모토를 환속시키고 시나노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씨 등에게 그를 조력케 하여 가이로 파견하였다. 제6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노리 무렵에는 에이쿄의 난으로 가마쿠라 부가 쇠망하고, 다케다 노부시게가 막부의 지원을 받아 가이로 파견되어 유키 합전에서 공적을 세워 재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 센고쿠 시대 ==
16대 노부마사 시대에는 가신단의 통제를 통해 국내 안정화를 꾀했으나, 후계 문제로 내란이 발생했다. 18대 노부토라 시대에는 가이 국내를 통일하고 고후에 쓰쓰지가사키칸을 세웠다. 또한 이웃 시나노로 침공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19대 하루노부(晴信), 즉 다케다 신겐 시대에는 치수(治水)와 금광 개발 사업을 벌여 영지를 정비하고 시나노로 영토를 확장했다. 신겐은 이마가와 씨, 호조 씨와 동맹을 맺고 우에스기 겐신과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벌였다.[7]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에 시작되었고, 그중 가장 유명하고 치열했던 전투는 1561년 9월 10일에 벌어졌다.[7] 이마가와 씨가 쇠퇴한 뒤에는 아들 요시노부를 할복시키고 동맹을 파기, 스루가로 침공했다.
1572년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전투를 벌이며 서상 작전을 개시했으나,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교토 상경전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신겐이 병사하면서 다케다군은 가이 국으로 물러났다.
신겐은 그의 전술적 천재성과 혁신으로 유명하다.[7]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 전술은 다케다 군대를 ''키바 군단''(騎馬軍団), 즉 '기병 군단'으로 불리게 했다.[7] 16세기 중반까지 기마 사무라이는 주로 궁수였으나, 신겐은 이들을 창병으로 변모시켜 원거리 무기 부대를 물리쳤다.[7]
최전성기 다케다 씨는 가이 ・ 시나노 ・ 스루가 및 고즈케 ・ 도토미 ・ 미카와 ・ 미노 ・ 히다 ・ 엣추 일부까지 9개 구니(国)에 이르는 120만 석의 영토를 가졌다. 다케다 가쓰요리 시대에는 미노로 진출하여 영토를 넓혔으나,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중신들을 잃으며 쇠퇴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노부카쓰와 함께 멸망했다(덴모쿠 산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신 아나야마 노부하루를 거쳐, 자신의 다섯째 아들 후쿠마쓰마루(福松丸)에게 다케다 노부요시라는 이름으로 가독을 잇게 했으나, 이후 단절되었다.
센고쿠 시대 직전, 다케다는 우에스기 젠슈의 반란(1416~1417) 진압에 기여했다.[5] 우에스기 젠슈(사망 1417)는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관령''(최고 고문)이었다.[5] 우에스기 씨족의 영주였던 모치우지는 1415년 다케다 씨족에 대한 보복을 가했고, 이는 우에스기 씨족과 다케다 씨족 사이의 약 150년간 지속되는 라이벌 관계를 시작시켰다.[6]
신겐은 1573년 5월 13일 5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8] 그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1546~1582)가 실질적인 후계자가 되었지만, 명목상의 당주는 그의 손자 다케다 노부카쓰였다. 가쓰요리는 신겐의 확장 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케다 씨의 지배 영역을 잠시 최대치로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다케다 씨는 전투에서 많은 저명한 사무라이들을 잃으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1582년, 그의 친척 두 명이 오다·도쿠가와 연합에 투항했고, 노부나가는 그 직후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 다케다 씨는 사실상 멸망했지만, 다케다 씨의 후손들은 1603년에 설립된 도쿠가와 막부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에도 시대 ==
덴모쿠 산 전투 이후 신겐의 차남인 류호(운노 노부치카)의 아들 노부미치는 오다 씨에 의한 다케다 잔당 색출 사냥으로부터 도망쳤다.[18] 그 뒤 노부미치는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에 휘말려 이즈 오시마로 유배되었으나 그 아들 노부마사 대에 사면되어 겐로쿠 13년(1700년) 막부 신하로 고케로 출사했다.[18] 다만 이 가계는 에도 시대에 다케다 노부야스의 양자로 노부아키를, 메이지 시대에 같은 뿌리를 둔 야나기사와 씨로부터 양자를 들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다른 집안으로부터 양자를 들여 가독을 이었기에, 신겐의 피를 이은 것은 아니다.[18]
막부 말기에는 고게 다케다 가의 가록은 500석이었다.[18] 당주 다케다 다카노부는 안세이 4년(1857년)부터 오쿠고게의 반열에 들었는데, 다른 고게와 마찬가지로 미리 조정에 귀순하여 영지를 안도받았고 막부 신하에서 조정의 신하로 전향해 중대부 자리를 받게 되었다.
이 고게 다케다 이외에도 계보가 있어서 신겐의 다섯째 아들 니시나 모리노부의 장남 노부모토와 차남 노부사다가 도쿠가와의 하타모토로 출사하여 두 집안 모두 현대까지 계보를 전하고 있다.[18] 신겐의 일곱째 아들 야스다 노부키요는 자형인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로 달아나서 훗날 다케다 성을 회복해 대대로 그 집안에 출사하여 남계 후손은 단절되었어도 여계로 현대까지 존속하고 있다.[18] 신겐의 동생 가와쿠도 노부자네의 아들 노부토시는 이에야스에게 하타모토로 출사하였고, 이쪽 역시 훗날 다케다 성을 회복했다.[18]
도쿠가와 시대 동안 여러 다이묘 가문이 다케다 가문의 직계 후손이었다. 1868년 이 다이묘 가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 마쓰마에(松前): 홋카이도 유일의 번인 마쓰마에의 다이묘였다.
- 난부(南部): 모리오카, 시치노헤, 하치노헤(무쓰국)의 다이묘였다.
- 야나기사와(柳澤): 고리야마(야마토국), 구로카와, 미카이치(에치고국)의 다이묘였다.
- 요네쿠라(米倉): 무쓰우라번(무사시국)의 다이묘였다.
- 오가사와라(小笠原): 고쿠라(부젠국), 아시(하리마국), 가라쓰(히젠국), 가쓰야마(에치젠국)의 다이묘였다.
== 메이지 유신 이후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다케다 씨는 모두 사족(士族)으로 편입되었다. 고게 다케다 가는 당주 다케다 다카노부가 1874년(메이지 7년) 사망하고 양자(도야마 가게타카의 다섯째 아들) 다케다 노부토가 집안을 이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華族令)으로 화족(華族)이 오작제(五爵制)가 될 때, 옛 고게인 다케다 가도 남작 작위를 받을 집안으로 거명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서작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족으로 남았다.
1915년(다이쇼 4년) 다이쇼 덴노의 어대전(御大典)을 계기로 신겐이 종3위 관위가 추서될 때, 당시의 당주 다케다 노부야스(武田信保)에게 신겐에 대한 위기선명(位記宣命)이 전해졌다. 이후 이 가계가 신겐과 가장 가까운 정통으로 인정받아, 현대의 당주 다케다 히데노부(武田英信)에 이르기까지 집안이 이어지고 있다.
도쿠가와 시대 동안 여러 다이묘(大名) 가문이 다케다 가문의 직계 후손이었다. 1868년 이 다이묘 가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 마쓰마에(松前): 홋카이도(北海道) 유일의 봉토(藩)인 마쓰마에의 다이묘였다.
- 난부(南部): 모리오카(盛岡), 시치노헤(七戸), 하치노헤(八戸)(무쓰 국)의 다이묘였다.
- 야나기사와(柳澤): 고리야마(야마토 국), 구로카와(黒川), 미카이치(三宅)(에치고 국)의 다이묘였다.
- 요네쿠라(米倉): 무쓰우라 번(무사시 국)의 다이묘였다.
- 오가사와라(小笠原): 고쿠라(小倉), 치쿠자(부젠 국), 아시(하리마 국), 가라쓰(唐津)(히젠 국), 가쓰야마(勝山)(에치젠 국)의 다이묘였다.
3. 1. 지쇼-주에이의 난에서의 활동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미나모토노 노부요시)는 1180년(지쇼 4년) 4월 모치히토 왕(以仁王)으로부터 헤이케 타도를 명하는 영지(令旨)를 받고 가이 겐지 일족을 거느리고 거병했다.[63][16] 가이 겐지는 후지 강 전투(富士川の戦い)에서 주력이 되어 승리하였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로부터 다케다 노부요시가 스루가(駿河)의 슈고(守護)로,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가 도토미(遠江)의 슈고(守護)로 임명되었다(『아즈마카가미』).[63][16]지쇼-주에이의 난에서 가이 겐지 일족은 『아즈마카가미』 이외의 기록 사료를 종합해 볼 때 요리토모의 산하가 아닌 독자적인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3][16] 스루가 슈고 임명 역시 패주하는 헤이케를 추토한 노부요시 등이 슨엔(駿遠) 지방을 점거한 뒤 가이 겐지의 전공을 요리토모가 추인한 것으로 여겨진다.[63]
이후 요리토모는 가이 겐지의 세력을 경계하여 숙청을 단행, 노부요시는 실각하고 그의 동생 및 아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다.[63][16] 그러나 노부요시의 다섯째 아들 노부미쓰(信光)만은 요리토모의 신임을 얻어 가이 국 슈고로 임명되었고, 니라사키(韮崎)에서 다케다 씨의 적류가 되었다.[63][16] 노부미쓰는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도 전공을 세워 아키 국의 슈고직에 임명되어 아키 다케다 씨(安芸武田氏)의 시조가 되었다.[63][16]
3. 2. 가마쿠라 시대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지원한 다케다 노부요시(1128~1186)의 요청을 받아 다케다 가문은 2만 5천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노부요시의 아들인 다케다 노부미쓰(1162~1248)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이 국의 슈고(守護)에 임명되었다. 그는 죠큐 전쟁에서 호조 씨를 도와 아키 국의 지지를 받았다.가마쿠라 시대 후기에 다케다 씨를 대신해 니카이도 씨(二階堂氏)가 가이 슈고로써 확인된다. 그 뒤 이사와 류(石和流) 다케다 씨의 다케다 마사요시가 가이 슈고가 되었다. 마사요시는 1331년 고다이고 덴노가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목적으로 거병한 겐코의 난에서 막부측을 따라 가사기 산을 공격하였고, 훗날 막부 타도 세력에 가담하여 막부 멸망 뒤에는 겐무 신정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1335년에 호조 도키유키 등이 가마쿠라 막부 부활을 목적으로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에도 참가하였다.
3. 3. 난보쿠초에서 무로마치로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에는 아키 슈고였던 노부토키류(信時流) 다케다 씨의 다케다 노부타케가 북조(北朝)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에 속하여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간노(観応) 연간에는 남조(南朝)의 마사요시(政義)를 배제하고 가이 국 슈고가 되었다. 노부타케의 자손인 노부나리(信成)[64][17] ・ 노부하루(信春) 부자도 가이 슈고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론도 존재한다.노부타케의 아들 대에서 다케다 씨의 총령가(惣領家)는 가이 다케다 가(甲斐武田家) ・ 아키 다케다 가(安芸武田家) ・ 교토 다케다 가(京都武田家)의 세 집안으로 분파되었다.
가이 국은 가마쿠라 부(鎌倉府) 관할이었는데,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오에이(応永) 23년(1416년) 간토 간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우지노리(上杉氏憲, 젠슈禅秀)가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에 반기를 든 우에스기 젠슈의 난(上杉禅秀の乱)을 일으켰다. 가이 슈고였던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満)는 우에스기 젠슈의 편에 섰으나 막부의 개입으로 젠슈는 멸망하였고, 노부미쓰는 가마쿠라 부의 토벌로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가이는 슈고가 부재한 상태가 되었고, 가이의 고쿠진(国人)인 에미 씨(逸見氏)가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지지를 얻어 슈고직을 요구하며 대두하였다. 한편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다케다 노부모토(武田信元)를 환속시키고 시나노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씨(小笠原氏) 등에게 그를 조력케 하여 가이로 파견하였다. 제6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 무렵에는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으로 가마쿠라 부가 쇠망하고,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重)가 막부의 지원을 받아 가이로 파견되어 유키 합전(結城合戦)에서 공적을 세워 재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3. 4. 센고쿠 시대
16대 노부마사 시대에는 가신단의 통제를 통해 국내 안정화를 꾀했으나, 후계 문제로 내란이 발생했다. 18대 노부토라 시대에는 가이 국내를 통일하고 고후(甲府)에 쓰쓰지가사키칸(躑躅ヶ崎館)을 세웠다. 또한 이웃 시나노(信濃)로 침공하여 세력을 확대했다.19대 하루노부(晴信), 즉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시대에는 치수(治水)와 금광 개발 사업을 벌여 영지를 정비하고 시나노로 영토를 확장했다. 신겐은 이마가와 씨(今川氏), 호조 씨(北条氏)와 동맹을 맺고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를 벌였다.[7]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는 1553년에 시작되었고, 그중 가장 유명하고 치열했던 전투는 1561년 9월 10일에 벌어졌다.[7] 이마가와 씨가 쇠퇴한 뒤에는 아들 요시노부(義信)를 할복시키고 동맹을 파기, 스루가로 침공했다.
1572년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전투를 벌이며 서상 작전을 개시했으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요청으로 교토 상경전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신겐이 병사하면서 다케다군은 가이 국으로 물러났다.
신겐은 그의 전술적 천재성과 혁신으로 유명하다.[7]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 전술은 다케다 군대를 ''키바 군단''(騎馬軍団), 즉 '기병 군단'으로 불리게 했다.[7] 16세기 중반까지 기마 사무라이는 주로 궁수였으나, 신겐은 이들을 창병으로 변모시켜 원거리 무기 부대를 물리쳤다.[7]
최전성기 다케다 씨는 가이 ・ 시나노 ・ 스루가 및 고즈케 ・ 도토미 ・ 미카와 ・ 미노 ・ 히다 ・ 엣추 일부까지 9개 구니(国)에 이르는 120만 석의 영토를 가졌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시대에는 미노로 진출하여 영토를 넓혔으나, 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패배하고 중신들을 잃으며 쇠퇴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공격으로 노부카쓰(信勝)와 함께 멸망했다(덴모쿠 산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신 아나야마 노부하루(穴山信治)를 거쳐, 자신의 다섯째 아들 후쿠마쓰마루(福松丸)에게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吉)라는 이름으로 가독을 잇게 했으나, 이후 단절되었다.
센고쿠 시대 직전, 다케다는 우에스기 젠슈의 반란(1416~1417) 진압에 기여했다.[5] 우에스기 젠슈(사망 1417)는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관령''(최고 고문)이었다.[5] 우에스기 씨족의 영주였던 모치우지는 1415년 다케다 씨족에 대한 보복을 가했고, 이는 우에스기 씨족과 다케다 씨족 사이의 약 150년간 지속되는 라이벌 관계를 시작시켰다.[6]
신겐은 1573년 5월 13일 5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8] 그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1546~1582)가 실질적인 후계자가 되었지만, 명목상의 당주는 그의 손자 다케다 노부카쓰(武田信勝)였다. 가쓰요리는 신겐의 확장 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케다 씨의 지배 영역을 잠시 최대치로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패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다케다 씨는 전투에서 많은 저명한 사무라이들을 잃으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1582년, 그의 친척 두 명이 오다·도쿠가와 연합에 투항했고, 노부나가는 그 직후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 다케다 씨는 사실상 멸망했지만, 다케다 씨의 후손들은 1603년에 설립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3. 5. 에도 시대
덴모쿠 산 전투 이후 신겐의 차남인 류호(운노 노부치카)의 아들 노부미치는 오다 씨에 의한 다케다 잔당 색출 사냥으로부터 도망쳤다.[18] 그 뒤 노부미치는 오쿠보 나가요시 사건에 휘말려 이즈 오시마로 유배되었으나 그 아들 노부마사 대에 사면되어 겐로쿠 13년(1700년) 막부 신하로 고케로 출사했다.[18] 다만 이 가계는 에도 시대에 다케다 노부야스의 양자로 노부아키를, 메이지 시대에 같은 뿌리를 둔 야나기사와 씨로부터 양자를 들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다른 집안으로부터 양자를 들여 가독을 이었기에, 신겐의 피를 이은 것은 아니다.[18]막부 말기에는 고게 다케다 가의 가록은 500석이었다.[18] 당주 다케다 다카노부는 안세이 4년(1857년)부터 오쿠고게의 반열에 들었는데, 다른 고게와 마찬가지로 미리 조정에 귀순하여 영지를 안도받았고 막부 신하에서 조정의 신하로 전향해 중대부 자리를 받게 되었다.
이 고게 다케다 이외에도 계보가 있어서 신겐의 다섯째 아들 니시나 모리노부의 장남 노부모토와 차남 노부사다가 도쿠가와의 하타모토로 출사하여 두 집안 모두 현대까지 계보를 전하고 있다.[18] 신겐의 일곱째 아들 야스다 노부키요는 자형인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로 달아나서 훗날 다케다 성을 회복해 대대로 그 집안에 출사하여 남계 후손은 단절되었어도 여계로 현대까지 존속하고 있다.[18] 신겐의 동생 가와쿠도 노부자네의 아들 노부토시는 이에야스에게 하타모토로 출사하였고, 이쪽 역시 훗날 다케다 성을 회복했다.[18]
도쿠가와 시대 동안 여러 다이묘 가문이 다케다 가문의 직계 후손이었다. 1868년 이 다이묘 가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 마쓰마에(松前): 홋카이도 유일의 번인 마쓰마에의 다이묘였다.
- 난부(南部): 모리오카, 시치노헤, 하치노헤(무쓰 국)의 다이묘였다.
- 야나기사와(柳澤): 고리야마(야마토 국), 구로카와, 미카이치(에치고 국)의 다이묘였다.
- 요네쿠라(米倉): 무쓰우라 번(무사시 국)의 다이묘였다.
- 오가사와라(小笠原): 고쿠라(부젠 국), 아시(하리마 국), 카라쓰(히젠 국), 가쓰야마(에치젠 국)의 다이묘였다.
3. 6.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다케다 씨는 모두 사족(士族)으로 편입되었다. 고게 다케다 가는 당주 다케다 타카노부가 1874년(메이지 7년) 사망하고 양자(도야마 가게타카의 다섯째 아들) 다케다 노부토(武田信任)가 집안을 이었다.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華族令)으로 화족(華族)이 오작제(五爵制)가 될 때, 옛 고게인 다케다 가도 남작 작위를 받을 집안으로 거명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서작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족으로 남았다.
1915년(다이쇼 4년) 다이쇼 덴노(大正天皇)의 어대전(御大典)을 계기로 신겐이 종3위 관위가 추서될 때, 당시의 당주 다케다 노부야스(武田信保)에게 신겐에 대한 위기선명(位記宣命)이 전해졌다. 이후 이 가계가 신겐과 가장 가까운 정통으로 인정받아, 현대의 당주 다케다 히데노부(武田英信)에 이르기까지 집안이 이어지고 있다.
도쿠가와 시대 동안 여러 다이묘(大名) 가문이 다케다 가문의 직계 후손이었다. 1868년 이 다이묘 가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 마쓰마에(松前): 홋카이도(北海道) 유일의 봉토(藩)인 마쓰마에의 다이묘였다.
- 난부(南部): 모리오카(盛岡), 시치노헤(七戸), 하치노헤(八戸)(무쓰 국)의 다이묘였다.
- 야나기사와(柳澤): 고리야마(야마토 국), 구로카와(黒川), 미카이치(三宅)(에치고 국)의 다이묘였다.
- 요네쿠라(米倉): 무쓰우라 번(무사시 국)의 다이묘였다.
- 오가사와라(小笠原): 고쿠라(小倉), 치쿠자(부젠 국), 아시(하리마 국), 카라쓰(唐津)(히젠 국), 가쓰야마(勝山)(에치젠 국)의 다이묘였다.
4. 그 외의 다케다 씨
다케다 씨(Takeda clan)는 일본 전역에 걸쳐 3개의 주요 분가(分家, cadet branches)와 여러 개의 소규모 분가를 설립했다. 이러한 분가의 설립으로 인해, 가이국의 본가인 다케다 씨는 가이 다케다 씨(Kai Takeda clan)라고도 불린다.
==== 아키 다케다 씨 ====
다케다 씨(武田氏)는 현재 히로시마현(広島県)의 서부에 해당하는 아키 지방(安芸国)에 세워졌다.[1]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는 가이(甲斐)의 수고(守護)였으며 1221년 아키 지방의 지사직을 받았다.[1] 다케다 노부타케(武田信武) (1362년 사망)는 가이(甲斐)와 아키(安芸) 두 지방의 마지막 다케다 수고(守護)였다. 그의 장남 노부나리(信成)는 가이를, 차남 우지노부(氏信)는 아키 지방을 상속받았다.
안芸 다케다씨(安芸武田氏)는 5대 다케다 노부미쓰 시대인 조큐(承久) 3년(1221년)에 일어난 조큐의 난의 전공으로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아키(安芸) 수호(守護)에 임명된 것에서 시작된다. 초창기에는 수호대(守護代)를 파견했지만, 후에 7대 다케다 노부토키(武田信時) 시대에 원(元)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키 국(安芸国)에 사토 은산성(佐東銀山城)을 쌓고 본격적인 영토 지배에 나서게 되었다.
겐코(元弘) 3년/세이케이(正慶) 2년(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했을 때 10대 다케다 노부타케는 막부의 록파라(六波羅)에 가담하였고, 겐무 신정에서는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측이 된 카이(甲斐) 수호 다케다 마사요시(武田政義)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에 다케다 마사요시가 남조(南朝) 측이었던 반면, 노부타케는 북조(北朝) 측의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워 카이 국(甲斐国)과 아키 국(安芸国)의 양 수호에 임명되었고, 노부타케의 아들 다케다 노부나리가 카이 수호를, '''다케다 우지노부'''가 아키 수호를 계승했다.
이 우지노부가 안게 다케다씨의 초대가 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노부타케가 원래 소유하고 있던 아키 수호와 이즈(伊豆) 수호의 관직을 계승한 것은 우지노부였기 때문에, 카이 다케다씨(甲斐武田氏)의 다케다 노부나리는 서자(庶子)이며, 안게 다케다씨(安芸武田氏, 후의 와카사 다케다씨(若狭武田氏)) 쪽이 다케다씨(武田氏)의 적류(嫡流)였다고 여겨진다.[30] 그러나 노부나리의 아들 다케다 노부하루(武田信春)가 노부타케가 칭했던 또 다른 관직명인 무쓰(陸奥) 수호에 임명된 것과 후에 카이 자체가 중앙에서 멀어져 가마쿠라부(鎌倉府)의 관할이 된 것으로 미루어,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부의 권력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다케다씨 적류도 무로마치 막부 지배하(아키)와 가마쿠라후 지배하(카이)로 분리되었다고 하는 다른 설도 제기되고 있다.[31] 또한 우지노부는 오안(応安) 원년(1368년)에 막부에 의해 수호직을 해임되었고, 이후 아키 수호직은 이마가와씨(今川氏)나 호소카와씨(細川氏) 등 아시카가 일문(足利一門)이 담당했지만, 안게 다케다씨 자체는 은산성(銀山城)을 중심으로 한 분군 수호(分郡守護)[32]로 존속하고 있었다.
응인의 난 중인 분메이(文明) 3년(1471년) 1월,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의 넷째 아들로 아키 분군을 다스리던 대관이었던 '''다케다 모쓰나'''가 형인 와카사 다케다 씨의 다케다 노부카타(武田信賢)로부터 독립했다. 아키 다케다 씨와 서군의 주방 수호 오우치 씨는 대립 관계에 있었고, 오닌 원년(1467년)에 시작된 응인의 난에서도 동군 측에 참전했지만, 모쓰나는 오우치 씨의 압력에 굴복하여 서군으로 돌아섰다. 이후 와카사 다케다 씨와 화해했지만, 모쓰나의 아들인 '''다케다 모토시게'''는 아시카가 요시타다(足利義稙)를 섬긴 에이쇼(永正) 5년(1508년)의 오우치 요시오키의 상락(上洛)에 참가하여 제11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 측이었던 와카사 다케다 씨와 결별했다. 그러나 에이쇼(永正) 12년(1515년), 오우치 요시오키가 모시게를 귀국시키자 아마고 씨 등과 손을 잡고 오우치 씨에 대항했다.
아키 다케다 씨 9대 '''다케다 노부자네''' 시대, 덴분(天文) 10년(1541년) 오우치 씨의 명을 받은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은산성은 함락되어 멸망했다. 전국 시대 말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모리 씨의 외교 승려로 활약한 안코쿠지 에케이는 노부사네의 사촌 형제인 다케다 노부시게의 아들로 여겨지며, 아키 다케다 씨 중 유일하게 후세에 유명한 인물이다.
또한, 고와의 서자였던 다케다 고사부로(武田光和)는 모리 씨에 따라 이후 대대로 섬겼다. 모리 씨의 방장 이봉에 따라 주방 다케다 씨라고 칭하고 있다.
하기번 가신록에 따르면, 다카스기 씨가 제출한 가보록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조상은 비고쿠 다카스기 성주 다카스기 고시로 하루토키(高杉小四郎春時)로 되어 있으며, 아키 다케다 씨 서류의 이와이 씨를 내세우고, 나중에 다카스기로 성씨를 바꾸어 초대 하루토키 → 하루미쓰 → 하루사다 → 나리하루 → 하루토시 → 하루노부 → 하루젠 → 하루아키라 → 하루토요 → 하루키 → 하루카제(신사쿠)로 이어졌다.
==== 와카사 다케다 씨 ====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는 아키 다케다 씨(安芸武田氏) 4대 다케다 노부시게의 적장자(嫡男)인 '''다케다 노부사다'''가 1440년(에이쿄(永享) 12년)에 이치시키 요시츠라를 주살(誅殺)한 공으로 와카사(若狭) 슈고직에 임명됨으로써 시작되었다.[1]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명령을 받아 이치시키 요시쓰라를 주살한 것이다. 아시카가(足利) 쇼군가(将軍家) 및 호소카와 쿄쵸케의 신임이 두터웠고, 역대 다케다(武田)씨 대부분이 시조(始祖) 다케다 노부미쓰 이래의 다케다 이즈노카미(武田伊豆守)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다케다(武田)씨 일문(一門) 중 가장 높은 관직(官職)에 임명되었고, 단고 슈고(守護)를 겸임하여 막부가 있는 키나이 주변에서 두 개의 국(國)의 슈고(守護)를 맡았던 점 등을 고려하여 다케다(武田)씨의 본류(本流)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노부시게(信繁)의 적장자(嫡男)인 노부사다(信栄)는 일국 슈고가 된 것을 계기로 안키(安芸)에서 와카사(若狭)로 다케다(武田)씨의 본거지를 옮겼다.[1] 노부사다(信栄) 시대에는 이치시키씨의 측근이 많았고 와카사(若狭)에서 손꼽히는 항만 도시로 번영했던 오와리 군(郡)의 오바마(현 오바마시)에는 들어가지 않고, 오오이 군(郡) 다카하마(현 다카하마정)에 다케다(武田)씨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34] 노부사다(信栄)는 1441년(에이쿄(永享) 13년) 28세에 병사(病死)하였으나,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타'''가 계승하여 안키(安芸)국(國)과 병행하여 와카사(若狭)국(國) 경영에 착수했다. 노부사다(信栄)의 묘소는 본거지가 있었던 오오이(大飯) 군(郡) 다카하마(高浜)에 현존한다.
노부카타는 와카사국내의 이치시키씨 잔당과 잇키를 차례로 진압하여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오닌 원년(1467년)부터 시작된 오닌·분명의 난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다나고쿠에 침공하는 등 활약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신임도 두터웠고, 문화인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노부카타 이후, 다케다가는 분열하여, 아키 다케다 씨는 노부카타의 사남인 다케다 모토쓰나가 계승하고, 와카사 다케다 씨는 노부카타의 삼남인 '''다케다 구니노부'''가 계승하였다.[1] 구니노부는 와카사국·다나고쿠 가사군을 중심으로 영토 경영을 하는 한편 막부의 출병 요청에 응하여 자주 교토로 출병하였다. 단바 수호인 호소카와 경조가의 요청에 의한 단바로의 출병도 많았다. 분명 18년(1486년)에는 금리어료소인 고하마의 지배도 인정받았다.[34]
구니노부의 아들인 '''다케다 모토노부'''와 손자인 '''다케다 모토미쓰''' 시대에 와카사 다케다 씨는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모토미쓰는 다이에이 2년(1522년) 고하마에 고세야마성을 쌓고, 다이에이 7년(1527년)에 관령 호소카와 다카쿠니에게 의지하여 제12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하여 상락하였으나, 호소카와 하루모토 측의 미요시 씨와 하타노 씨에게 패배하였다(계천원의 싸움). 그 후, 주변 여러 나라의 압력, 유력 국인의 이반 등이 잇따라 국내에서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모토미쓰의 손자인 '''다케다 요시무네''' 시대에는 가독 쟁탈까지 더해져 더욱 약화가 진행되었다.
요시무네는 에이로쿠 9년(1566년) 8월에 의형인 요시무네를 의지하여 입국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호하였으나, 요시아키는 다케다가 내부의 혼란을 보고 일찍 에치젠국 아사쿠라를 의지하여 와카사를 출국하였다.
와카사 다케다 씨도 2년 후인 에이로쿠 11년(1568년) 8월에, 에치젠 아사쿠라 씨의 와카사 침공으로 영토를 잃었다. '''다케다 모토아키'''는 아사쿠라 씨에 의해 일승곡성 거주를 강요당하였으나, 덴쇼 원년(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아사쿠라 씨가 멸망하자 와카사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로부터 와카사국을 맡은 것은 니와 나가히데였고, 모토아키는 오오이군 남부의 이시야마 3,000석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 덴쇼 10년(1582년) 6월의 혼노지의 변에서는, 구 영토 회복을 노리고 니와 나가히데의 거성인 사와야마성을 함락시키고, 노부나가를 멸망시킨 아케치 미쓰히데를 가담하였으나, 미쓰히데를 승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에 의해 자살을 명령받아 와카사 다케다 씨는 멸망하였다. 아들(일설에는 동생)인 요시카쓰는 쓰가와 성, 후에 사사 성을 이름으로 삼고, 교고쿠 다카쓰구를 섬겼다.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 다케다 노부시게의 친척인 카키자키 스에시게(蠣崎季繁)나 다케다 노부카타의 아들 다케다 노부히로가 에조로 건너가 카키자키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승도 있으며, 와카사 다케다 씨는 오바마를 거점으로 무쓰국의 난부 씨나 홋카이도 등 가이 겐지 일족이 거주하는 지역과의 키타마에센을 이용한 일본해 교역을 했다. 카키자키 씨의 일부는 에도 시대에 성을 바꿔 마쓰마에 씨가 되어 마쓰마에 번의 번주가 되었다. 참고로, 무쓰국의 도고가 다케다 씨의 후예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이치시키 씨의 가신이었던 다케다 씨가 몰락 후 에조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이 다케다 씨도 이치시키 씨가 와카사 슈고였던 시대에 같은 국의 고슈고다이를 역임했으며, 별개 계통의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라고 할 수 있다)[35].
와카사 다케다는 예술 후원과 다케다류 무예(武田流武芸)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저명한 다례가인 다케노 조오는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 출신으로 전해진다.
==== 가즈사 다케다 씨 ====
가즈사 다케다 씨(가즈사 다케다 씨/上総武田氏일본어)는 가이국의 가이 다케다 씨 일족으로, 가즈사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씨족이다.[1] 제12대 가이 다케다 씨 당주 다케다 노부미쓰의 아들 다케다 노부나가를 시조로 한다.
다케다 노부나가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서 가즈사 국 지배를 인정받았다. 노부나가의 아들 다케다 노부타카 사후, 본가는 조난 성에, 분가는 마리야쓰 성에 본거지를 두었다. 적류는 지명을 따서 '''조난 다케다 씨'''(庁南武田氏)를 칭했고, 분가는 '''마리야쓰 씨'''(真里谷氏)를 칭했다.[1]
마리야쓰 씨는 센고쿠 시대 전반에 가즈사 국 서부에서 중부 일대를 영유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마리야 노부키요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마사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맞이하여 "고유미 공방"(小弓公方)이라 칭하고, 자신은 "보소 간료"(房総管領)를 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리야 노부타카에게 가문의 실권을 양도한 후 정실에게서 둘째 아들 마리야 노부오가 태어나면서 가신단이 분열되었다. 신세이 사후, 노부타카가 당주가 되었지만, 노부오파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사토미 요시타카와 동맹을 맺고 노부타카를 몰아냈다. 노부타카는 호조 우지쓰나에게 망명했고, 이는 고노다이 전투(제1차)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 전투 후, 노부오와 지지자들은 항복했고, 노부타카가 당주로 복귀했다. 노부타카 사후 사토미 요시타카가 마리야 노부마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고노다이 전투(제2차) 후에는 다시 호조씨에 복속되었다.
조난 다케다 씨 최후의 당주 다케다 도요노부는 다케다 신겐의 셋째 아들 다케다 노부유키와 동일인물로 여겨지며, 오다씨에 의한 가이 다케다 씨 멸망 후 동생 니시나 모리노부의 가족을 숨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도요노부는 호조씨의 휘하 장수로서 반 오다 씨, 반 도요토미 씨 노선을 고수했고,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중 도요토미 군에 의해 거성이 포위되자 자결하여 멸망했다.[1]
다케다 도요노부의 아들 다케다 우지노부는 살아남아 가신단에 의해 보호받아 인근으로 이주하여 향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자손들은 에도 시대에는 한방 의사로서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현재에도 가즈사 지역을 중심으로 지바현에 조난 다케다 씨 후손이 경영하는 의료기관이 많이 존재한다.
분가인 마리야쓰 씨의 이후는 불명이다.
==== 인바 다케다 씨 ====
야마나씨의 가신 중에는 와카사 다케다씨(若狭武田氏)의 방계가 있었다. 언제부터 인바 야마나씨를 섬겼는지는 불명이나, 『음량헌일록(蔭涼軒日録)』 연덕(延徳) 3년(1491년) 11월 6일 조에 야마나 토요토키(山名豊時)의 가신으로서 "다케다 사에몬다유(武田左衛門大夫)"의 기록이 보인다. 1545년(덴문 14년), 야마나 마사미치(山名誠通)의 가신 다케다 쿠니노부(武田国信)가 구스마야마성(후의 돗토리성(鳥取城))을 개축했으나, 너무 견고했기 때문에 주군에게서 반역의 의심을 사고 모살되었다. 쿠니노부의 최후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덴문 9년의 하시즈가와 전투(橋津川の戦い)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덴문 연간에 히요도이성(鵯尾城)이 축성되고, 쿠니노부의 적남인 다케다 타카노부(武田高信)가 들어갔다. 타카노부는 아우인 다케다 마타자부로(武田又三郎)에게 히요도이성을 맡기고, 자신은 돗토리성에 들어가 수호 야마나 토요카즈(山名豊数)에 대항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1563년(에이로쿠 6년), 아키의 모리씨(毛利氏)와 결탁한 타카노부는 카노성(鹿野城) 주인인 야마나 토요나리(山名豊成)(마사미치의 아들)를 독살하고, 같은 해 4월의 유쇼구치 전투(湯所口の戦い)에서 토요카즈를 격파했다. 후세 덴진야마성(布勢天神山城)에서 쫓겨난 토요카즈는 카노성으로 도망쳤으나, 후에 병사했다. 1573년(텐쇼 원년), 이즈모의 전국 다이묘(戦国大名) 아마고씨(尼子氏)의 지류인 신궁당(新宮党)의 유자(遺児)인 아마고 카츠히사(尼子勝久)와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가 인바에 침입하여 코시야마성(甑山城)에 입성한다. 다케다씨는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아마고 카츠히사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이들을 공격하지만 패배하고, 돗토리성을 주가인 야마나씨에게 넘겨주고 히요도이성으로 물러났다.
1578년(텐쇼 6년), 미사키의 국인 영주(国人領主)인 쿠사카리씨(草刈氏)가 인바국 치즈군(智頭郡)에 요도야마성(淀山城)을 쌓고 세력을 넓히자, 야마나씨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동국 사누키의 다이기지(佐貫の大義寺)에 진을 치고, 다케다 타카노부에게 군의에 응하도록 초빙했다. 타카노부가 절에 들어가자 문을 닫고 그를 토벌했기 때문에, 인바의 다케다씨는 멸망했다.
참고로, 최근의 연구에 의해 다케다 타카노부의 죽음은 1573년(텐쇼 원년) 5월 이전임이 판명되었고, 같은 해 5월 4일자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서장"(『하지한벌열록(萩藩閥閲録)』)에는 "불측의 사고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수년 후의 모리씨 측 사료에는 오다 측과의 밀통이 명확해졌기 때문에,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에 의해 할복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덕태평기(陰徳太平記)』『인바민담기(因幡民談記)』등에 의하면, 타카노부의 유자(遺児)인 다케다 겐고로(武田源五郎)는 난죠 모토츠구(南条元続)의 곁에, 겐자부로(다케다 스케노부(武田助信))는 코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의 곁에 몸을 의탁했다고 한다. 이 중, 다케다 겐자부로는 무라오카번(村岡藩)주가 된 야마나 토요쿠니가 200석으로 모셨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원년(1868년) 1월의 『야마나가 가봉지시 반시각록 인명(山名家加封之時藩士格録人名)』에는 다케다씨의 이름이 보이고, 인바 다케다 일족의 일부는 야마나가에 섬기고, 무라오카 번사가 되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다.
==== 히타치 다케다 씨 ====
미나모토 요리미쓰의 아들 미나모토 요리키요가 히타치국 나카군 다케다향에서 일어났다.
1392년(''명덕 3년''), 가이 다케다 가(家) 12대 다케다 노부하루의 아들 노부히사가 가이국에서 히타치국 나카타군 타카이에 향(현재의 이바라키현 나카타시)에 내려와 키자키성을 거성으로 삼고, 타카이에 향을 다케다 향으로 개명하여 영지를 다스리는 한편 검술의 일류를 구축했다. 이후 성신, 노부토시, 마사노부, 노부마사, 노부치카, 노부하루, 쓰네코미가 세습하여, 9대째인 쓰네코미의 아들 노부후사는 덴쇼 19년(1591년 2월) 많은 다이죠우씨 일족과 함께 오타성에서 사타케 요시시게에게 초살되었다(''남방 삼십삼관 주모 살해 사건''). 살아남았다고 하는 노부후사의 아들 스케노부의 후계자 겐스케, 쇼토쿠가 미토번에 섬기며 사범이 되어, 가전(家傳) 검술 외에 호쿠신 일도류 검술, 가시마 신당류, 텐진쇼덴 고토리 신도류를 익히고, 후계자 스케나가에게 전수했다
4. 1. 아키 다케다 씨
다케다 씨(武田氏)는 현재 히로시마현(広島県)의 서부에 해당하는 아키 지방(安芸国)에 세워졌다.[1]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는 가이(甲斐)의 수고(守護)였으며 1221년 아키 지방의 지사직을 받았다.[1] 다케다 노부타케(武田信武) (1362년 사망)는 가이(甲斐)와 아키(安芸) 두 지방의 마지막 다케다 수고(守護)였다. 그의 장남 노부나리(信成)는 가이를, 차남 우지노부(氏信)는 아키 지방을 상속받았다.안芸 다케다씨(安芸武田氏)는 5대 다케다 노부미쓰 시대인 조큐(承久) 3년(1221년)에 일어난 조큐의 난의 전공으로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아키(安芸) 수호(守護)에 임명된 것에서 시작된다. 초창기에는 수호대(守護代)를 파견했지만, 후에 7대 다케다 노부토키(武田信時) 시대에 원(元)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키 국(安芸国)에 사토 은산성(佐東銀山城)을 쌓고 본격적인 영토 지배에 나서게 되었다.
겐코(元弘) 3년/세이케이(正慶) 2년(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했을 때 10대 다케다 노부타케는 막부의 록파라(六波羅)에 가담하였고, 겐무 신정에서는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측이 된 카이(甲斐) 수호 다케다 마사요시(武田政義)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에 다케다 마사요시가 남조(南朝) 측이었던 반면, 노부타케는 북조(北朝) 측의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워 카이 국(甲斐国)과 아키 국(安芸国)의 양 수호에 임명되었고, 노부타케의 아들 다케다 노부나리가 카이 수호를, '''다케다 우지노부'''가 아키 수호를 계승했다.
이 우지노부가 안게 다케다씨의 초대가 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노부타케가 원래 소유하고 있던 아키 수호와 이즈(伊豆) 수호의 관직을 계승한 것은 우지노부였기 때문에, 카이 다케다씨(甲斐武田氏)의 다케다 노부나리는 서자(庶子)이며, 안게 다케다씨(安芸武田氏, 후의 와카사 다케다씨(若狭武田氏)) 쪽이 다케다씨(武田氏)의 적류(嫡流)였다고 여겨진다.[30] 그러나 노부나리의 아들 다케다 노부하루(武田信春)가 노부타케가 칭했던 또 다른 관직명인 무쓰(陸奥) 수호에 임명된 것과 후에 카이 자체가 중앙에서 멀어져 가마쿠라부(鎌倉府)의 관할이 된 것으로 미루어,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부의 권력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다케다씨 적류도 무로마치 막부 지배하(아키)와 가마쿠라후 지배하(카이)로 분리되었다고 하는 다른 설도 제기되고 있다.[31] 또한 우지노부는 오안(応安) 원년(1368년)에 막부에 의해 수호직을 해임되었고, 이후 아키 수호직은 이마가와씨(今川氏)나 호소카와씨(細川氏) 등 아시카가 일문(足利一門)이 담당했지만, 안게 다케다씨 자체는 은산성(銀山城)을 중심으로 한 분군 수호(分郡守護)[32]로 존속하고 있었다.
응인의 난 중인 분메이(文明) 3년(1471년) 1월,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의 넷째 아들로 아키 분군을 다스리던 대관이었던 '''다케다 모쓰나'''가 형인 와카사 다케다 씨의 다케다 노부카타(武田信賢)로부터 독립했다. 아키 다케다 씨와 서군의 주방 수호 오우치 씨는 대립 관계에 있었고, 오닌 원년(1467년)에 시작된 응인의 난에서도 동군 측에 참전했지만, 모쓰나는 오우치 씨의 압력에 굴복하여 서군으로 돌아섰다. 이후 와카사 다케다 씨와 화해했지만, 모쓰나의 아들인 '''다케다 모토시게'''는 아시카가 요시타다(足利義稙)를 섬긴 에이쇼(永正) 5년(1508년)의 오우치 요시오키의 상락(上洛)에 참가하여 제11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 측이었던 와카사 다케다 씨와 결별했다. 그러나 에이쇼(永正) 12년(1515년), 오우치 요시오키가 모시게를 귀국시키자 아마고 씨 등과 손을 잡고 오우치 씨에 대항했다.
아키 다케다 씨 9대 '''다케다 노부자네''' 시대, 덴분(天文) 10년(1541년) 오우치 씨의 명을 받은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은산성은 함락되어 멸망했다. 전국 시대 말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모리 씨의 외교 승려로 활약한 안코쿠지 에케이는 노부사네의 사촌 형제인 다케다 노부시게의 아들로 여겨지며, 아키 다케다 씨 중 유일하게 후세에 유명한 인물이다.
또한, 고와의 서자였던 다케다 고사부로(武田光和)는 모리 씨에 따라 이후 대대로 섬겼다. 모리 씨의 방장 이봉에 따라 주방 다케다 씨라고 칭하고 있다.
하기번 가신록에 따르면, 다카스기 씨가 제출한 가보록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조상은 비고쿠 다카스기 성주 다카스기 고시로 하루토키(高杉小四郎春時)로 되어 있으며, 아키 다케다 씨 서류의 이와이 씨를 내세우고, 나중에 다카스기로 성씨를 바꾸어 초대 하루토키 → 하루미쓰 → 하루사다 → 나리하루 → 하루토시 → 하루노부 → 하루젠 → 하루아키라 → 하루토요 → 하루키 → 하루카제(신사쿠)로 이어졌다.
4. 2. 와카사 다케다 씨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는 아키 다케다 씨(安芸武田氏) 4대 다케다 노부시게의 적장자(嫡男)인 '''다케다 노부사다'''가 1440년(에이쿄(永享) 12년)에 이치시키 요시츠라를 주살(誅殺)한 공으로 와카사(若狭) 슈고직에 임명됨으로써 시작되었다.[1]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명령을 받아 이치시키 요시쓰라를 주살한 것이다. 아시카가(足利) 쇼군가(将軍家) 및 호소카와 쿄쵸케의 신임이 두터웠고, 역대 다케다(武田)씨 대부분이 시조(始祖) 다케다 노부미쓰 이래의 다케다 이즈노카미(武田伊豆守)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다케다(武田)씨 일문(一門) 중 가장 높은 관직(官職)에 임명되었고, 단고 슈고(守護)를 겸임하여 막부가 있는 키나이 주변에서 두 개의 국(國)의 슈고(守護)를 맡았던 점 등을 고려하여 다케다(武田)씨의 본류(本流)라는 견해도 존재한다.노부시게(信繁)의 적장자(嫡男)인 노부사다(信栄)는 일국 슈고가 된 것을 계기로 안키(安芸)에서 와카사(若狭)로 다케다(武田)씨의 본거지를 옮겼다.[1] 노부사다(信栄) 시대에는 이치시키씨의 측근이 많았고 와카사(若狭)에서 손꼽히는 항만 도시로 번영했던 오와리 군(郡)의 오바마(현 오바마시)에는 들어가지 않고, 오오이 군(郡) 다카하마(현 다카하마정)에 다케다(武田)씨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34] 노부사다(信栄)는 1441년(에이쿄(永享) 13년) 28세에 병사(病死)하였으나,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타'''가 계승하여 안키(安芸)국(國)과 병행하여 와카사(若狭)국(國) 경영에 착수했다. 노부사다(信栄)의 묘소는 본거지가 있었던 오오이(大飯) 군(郡) 다카하마(高浜)에 현존한다.
노부카타는 와카사국내의 이치시키씨 잔당과 잇키를 차례로 진압하여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오닌 원년(1467년)부터 시작된 오닌·분명의 난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다나고쿠에 침공하는 등 활약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신임도 두터웠고, 문화인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노부카타 이후, 다케다가는 분열하여, 아키 다케다 씨는 노부카타의 사남인 다케다 모토쓰나가 계승하고, 와카사 다케다 씨는 노부카타의 삼남인 '''다케다 구니노부'''가 계승하였다.[1] 구니노부는 와카사국·다나고쿠 가사군을 중심으로 영토 경영을 하는 한편 막부의 출병 요청에 응하여 자주 교토로 출병하였다. 단바 수호인 호소카와 경조가의 요청에 의한 단바로의 출병도 많았다. 분명 18년(1486년)에는 금리어료소인 고하마의 지배도 인정받았다.[34]
구니노부의 아들인 '''다케다 모토노부'''와 손자인 '''다케다 모토미쓰''' 시대에 와카사 다케다 씨는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모토미쓰는 다이에이 2년(1522년) 고하마에 고세야마성을 쌓고, 다이에이 7년(1527년)에 관령 호소카와 다카쿠니에게 의지하여 제12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하여 상락하였으나, 호소카와 하루모토 측의 미요시 씨와 하타노 씨에게 패배하였다(계천원의 싸움). 그 후, 주변 여러 나라의 압력, 유력 국인의 이반 등이 잇따라 국내에서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모토미쓰의 손자인 '''다케다 요시무네''' 시대에는 가독 쟁탈까지 더해져 더욱 약화가 진행되었다.
요시무네는 에이로쿠 9년(1566년) 8월에 의형인 요시무네를 의지하여 입국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호하였으나, 요시아키는 다케다가 내부의 혼란을 보고 일찍 에치젠국 아사쿠라를 의지하여 와카사를 출국하였다.
와카사 다케다 씨도 2년 후인 에이로쿠 11년(1568년) 8월에, 에치젠 아사쿠라 씨의 와카사 침공으로 영토를 잃었다. '''다케다 모토아키'''는 아사쿠라 씨에 의해 일승곡성 거주를 강요당하였으나, 덴쇼 원년(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아사쿠라 씨가 멸망하자 와카사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로부터 와카사국을 맡은 것은 니와 나가히데였고, 모토아키는 오오이군 남부의 이시야마 3,000석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 덴쇼 10년(1582년) 6월의 혼노지의 변에서는, 구 영토 회복을 노리고 니와 나가히데의 거성인 사와야마성을 함락시키고, 노부나가를 멸망시킨 아케치 미쓰히데를 가담하였으나, 미쓰히데를 승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에 의해 자살을 명령받아 와카사 다케다 씨는 멸망하였다. 아들(일설에는 동생)인 요시카쓰는 쓰가와 성, 후에 사사 성을 이름으로 삼고, 교고쿠 다카쓰구를 섬겼다.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 다케다 노부시게의 친척인 카키자키 스에시게(蠣崎季繁)나 다케다 노부카타의 아들 다케다 노부히로가 에조로 건너가 카키자키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승도 있으며, 와카사 다케다 씨는 오바마를 거점으로 무쓰국의 난부 씨나 홋카이도 등 가이 겐지 일족이 거주하는 지역과의 키타마에센을 이용한 일본해 교역을 했다. 카키자키 씨의 일부는 에도 시대에 성을 바꿔 마쓰마에 씨가 되어 마쓰마에 번의 번주가 되었다. 참고로, 무쓰국의 도고가 다케다 씨의 후예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이치시키 씨의 가신이었던 다케다 씨가 몰락 후 에조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이 다케다 씨도 이치시키 씨가 와카사 슈고였던 시대에 같은 국의 고슈고다이를 역임했으며, 별개 계통의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라고 할 수 있다)[35].
와카사 다케다는 예술 후원과 다케다류 무예(武田流武芸)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저명한 다례가인 다케노 조오는 와카사 다케다 씨(若狭武田氏) 출신으로 전해진다.
4. 3. 가즈사 다케다 씨
가즈사 다케다 씨(가즈사 다케다 씨/上総武田氏일본어)는 가이국의 가이 다케다 씨 일족으로, 가즈사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씨족이다.[1] 제12대 가이 다케다 씨 당주 다케다 노부미쓰의 아들 다케다 노부나가를 시조로 한다.다케다 노부나가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서 가즈사 국 지배를 인정받았다. 노부나가의 아들 다케다 노부타카 사후, 본가는 조난 성에, 분가는 마리야쓰 성에 본거지를 두었다. 적류는 지명을 따서 '''조난 다케다 씨'''(庁南武田氏)를 칭했고, 분가는 '''마리야쓰 씨'''(真里谷氏)를 칭했다.[1]
마리야쓰 씨는 센고쿠 시대 전반에 가즈사 국 서부에서 중부 일대를 영유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마리야 노부키요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마사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맞이하여 "고유미 공방"(小弓公方)이라 칭하고, 자신은 "보소 간료"(房総管領)를 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리야 노부타카에게 가문의 실권을 양도한 후 정실에게서 둘째 아들 마리야 노부오가 태어나면서 가신단이 분열되었다. 신세이 사후, 노부타카가 당주가 되었지만, 노부오파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사토미 요시타카와 동맹을 맺고 노부타카를 몰아냈다. 노부타카는 호조 우지쓰나에게 망명했고, 이는 고노다이 전투(제1차)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 전투 후, 노부오와 지지자들은 항복했고, 노부타카가 당주로 복귀했다. 노부타카 사후 사토미 요시타카가 마리야 노부마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고노다이 전투(제2차) 후에는 다시 호조씨에 복속되었다.
조난 다케다 씨 최후의 당주 다케다 도요노부는 다케다 신겐의 셋째 아들 다케다 노부유키와 동일인물로 여겨지며, 오다씨에 의한 가이 다케다 씨 멸망 후 동생 니시나 모리노부의 가족을 숨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도요노부는 호조씨의 휘하 장수로서 반 오다 씨, 반 도요토미 씨 노선을 고수했고,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중 도요토미 군에 의해 거성이 포위되자 자결하여 멸망했다.[1]
다케다 도요노부의 아들 다케다 우지노부는 살아남아 가신단에 의해 보호받아 인근으로 이주하여 향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자손들은 에도 시대에는 한방 의사로서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현재에도 가즈사 지역을 중심으로 지바현에 조난 다케다 씨 후손이 경영하는 의료기관이 많이 존재한다.
분가인 마리야쓰 씨의 이후는 불명이다.
4. 4. 인바 다케다 씨
야마나씨의 가신 중에는 와카사 다케다씨(若狭武田氏)의 방계가 있었다. 언제부터 인바 야마나씨를 섬겼는지는 불명이나, 『음량헌일록(蔭涼軒日録)』 연덕(延徳) 3년(1491년) 11월 6일 조에 야마나 토요토키(山名豊時)의 가신으로서 "다케다 사에몬다유(武田左衛門大夫)"의 기록이 보인다. 1545년(덴문 14년), 야마나 마사미치(山名誠通)의 가신 다케다 쿠니노부(武田国信)가 구스마야마성(후의 돗토리성(鳥取城))을 개축했으나, 너무 견고했기 때문에 주군에게서 반역의 의심을 사고 모살되었다. 쿠니노부의 최후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덴문 9년의 하시즈가와 전투(橋津川の戦い)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덴문 연간에 히요도이성(鵯尾城)이 축성되고, 쿠니노부의 적남인 다케다 타카노부(武田高信)가 들어갔다. 타카노부는 아우인 다케다 마타자부로(武田又三郎)에게 히요도이성을 맡기고, 자신은 돗토리성에 들어가 수호 야마나 토요카즈(山名豊数)에 대항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1563년(에이로쿠 6년), 아키의 모리씨(毛利氏)와 결탁한 타카노부는 카노성(鹿野城) 주인인 야마나 토요나리(山名豊成)(마사미치의 아들)를 독살하고, 같은 해 4월의 유쇼구치 전투(湯所口の戦い)에서 토요카즈를 격파했다. 후세 덴진야마성(布勢天神山城)에서 쫓겨난 토요카즈는 카노성으로 도망쳤으나, 후에 병사했다. 1573년(텐쇼 원년), 이즈모의 전국 다이묘(戦国大名) 아마고씨(尼子氏)의 지류인 신궁당(新宮党)의 유자(遺児)인 아마고 카츠히사(尼子勝久)와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가 인바에 침입하여 코시야마성(甑山城)에 입성한다. 다케다씨는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아마고 카츠히사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이들을 공격하지만 패배하고, 돗토리성을 주가인 야마나씨에게 넘겨주고 히요도이성으로 물러났다.
1578년(텐쇼 6년), 미사키의 국인 영주(国人領主)인 쿠사카리씨(草刈氏)가 인바국 치즈군(智頭郡)에 요도야마성(淀山城)을 쌓고 세력을 넓히자, 야마나씨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동국 사누키의 다이기지(佐貫の大義寺)에 진을 치고, 다케다 타카노부에게 군의에 응하도록 했다. 타카노부가 절에 들어가자 문을 닫고 그를 토벌했기 때문에, 인바의 다케다씨는 멸망했다.
참고로, 최근의 연구에 의해 다케다 타카노부의 죽음은 1573년(텐쇼 원년) 5월 이전임이 판명되었고, 같은 해 5월 4일자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서장"(『하지한벌열록(萩藩閥閲録)』)에는 "불측의 사고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수년 후의 모리씨 측 사료에는 오다 측과의 밀통이 명확해졌기 때문에,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에 의해 할복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덕태평기(陰徳太平記)』『인바민담기(因幡民談記)』등에 의하면, 타카노부의 유자(遺児)인 다케다 겐고로(武田源五郎)는 난죠 모토츠구(南条元続)의 곁에, 겐자부로(다케다 스케노부(武田助信))는 코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의 곁에 몸을 의탁했다고 한다. 이 중, 다케다 겐자부로는 무라오카번(村岡藩)주가 된 야마나 토요쿠니가 200석으로 모셨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원년(1868년) 1월의 『야마나가 가봉지시 반시각록 인명(山名家加封之時藩士格録人名)』에는 다케다씨의 이름이 보이고, 인바 다케다 일족의 일부는 야마나가에 섬기고, 무라오카 번사가 되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다.
4. 5. 히타치 다케다 씨
미나모토 요리미쓰의 아들 미나모토 요리키요가 히타치국 나카군 다케다향에서 일어났다.1392년(''명덕 3년''), 가이 다케다 가(家) 12대 다케다 노부하루의 아들 노부히사가 가이국에서 히타치국 나카타군 타카이에 향(현재의 이바라키현 나카타시)에 내려와 키자키성을 거성으로 삼고, 타카이에 향을 다케다 향으로 개명하여 영지를 다스리는 한편 검술의 일류를 구축했다. 이후 성신, 노부토시, 마사노부, 노부마사, 노부치카, 노부하루, 쓰네코미가 세습하여, 9대째인 쓰네코미의 아들 노부후사는 덴쇼 19년(1591년 2월) 많은 다이죠우씨 일족과 함께 오타성에서 사타케 요시시게에게 초살되었다(''남방 삼십삼관 주모 살해 사건''). 살아남았다고 하는 노부후사의 아들 스케노부의 후계자 겐스케, 쇼토쿠가 미토번에 섬기며 사범이 되어, 가전(家傳) 검술 외에 호쿠신 일도류 검술, 가시마 신당류, 텐진쇼덴 고토리 신도류를 익히고, 후계자 스케나가에게 전수했다. 스케나가는 이를 다케다 신당류로 확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다른 설에는 노부히사 이전에 다케다 타카노부가 히타치 슈고다이를 역임했다고도 한다.
센고쿠 시대까지 가이 다케다 씨의 서류이자 슈고다이였던 아토베 씨는 다케다 씨 멸망 시 주가(主家)에 반역하여 후에 도쿠가와 씨의 가신이 된다. 그 후, 자손은 미토번(미토 도쿠가와가)에 봉직했으나, 막말에 주가에 반역한 아토베 성을 싫어한 코운사이가 주군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 청하여 본성인 다케다 성으로 복성했다.
4. 6. 아와 다케다 씨
안예 다케다 씨의 다케다 노부시게의 동생(또는 다케다 노부카타의 동생이라고도 함)이자 금산성의 수비대장이었던 다케다 노부토모가 주군 다케다 쿠니노부로부터 독립한 후, 고노 씨로부터 객장으로 초빙된 것을 시작으로 한다. 또한 에도 시대 전기, 조정과 도쿠가와 쇼군가, 제후들을 진료했던 다케다 미치야스도 이 이요 다케다 씨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미치야스(속명·노부시게)의 아버지는 다케다 노부하루이다. 노부하루는 이요의 고노 미치나오에 속해 있었지만,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모리 씨의 코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패하고 도요토미의 휘하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시작된 규슈 정벌에 센가쿠 히데히사 휘하의 시코쿠 세력의 일각으로 분고국으로 건너갔지만, 정벌의 선봉전이었던 토지가와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은 대패했고, 센가쿠나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과 마찬가지로 노부하루도 전장을 이탈하여 도주했다. 히데요시는 패전에 격노하여 센가쿠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했다. 노부하루도 죄를 물을까 두려워 고야산에서 은거했지만, 오다 노부카쓰의 중재로 용서받고 노부카쓰를 섬겼다.
아들 노부시게는 1584년에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전술한 경력으로 인해 고향에 머물 수 없었던 듯, 교토의 겐닌지 장로 에이호 에이유에게 사사하여 학문을 닦았다. 에이호는 와카사 다케다 씨 출신이었으므로, 동족의 보호를 받은 셈이다. 노부시게는 의학을 배우고 아사노 유키나가를 섬겼지만, 교토에서도 그 명성이 높아져 천황과 도쿠가와 쇼군, 고산케 등도 진료하는 당시 의사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노부시게의 아들 노부요시와 노부나리는 고명한 의사였으며, 자손들은 대대로 의사로서 막부와 조정에 봉직했다.
武田信虎(武田信虎)의 서자(庶子)로 전해지는 武田信顕(武田信顕)은 阿波 脇성주 三好兼則(三好兼則)를 대신하여 脇성주가 되었고, 그의 자손들이 아와에 토착했다. 그 이전에도 東条関兵衛(동조 관병위)의 아버지로 武田信綱(武田信綱)이라는 인물이 확인되며, 이 또한 가이 다케다 씨 출신으로 전해진다.
信顕은 어떤 이유로 大和국(야마토 국)에 있었지만, 미요시 나가요시의 초청으로 脇성주가 되어, 長慶의 사후에는 계속해서 미요시 나가하루를 섬겼다. 덴쇼 6년(1578년)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침공을 받아, 인접한 阿波 이와쿠라 성주 미요시 야스토시와 함께 항복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시코쿠 침공 당시에는, 康俊의 아버지인 미요시 야스나가의 설득으로 미요시 측으로 돌아왔으나, 혼노지의 변 이후 다시 長宗我部元親의 침공을 받는다. 信顕은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에 틀어박혀, 3000명의 장종가부군 앞에서 5일간 버텼으나, 信顕의 적자(嫡子) 신정(武田信定)은 자결하고, 信顕 자신은 사누키국으로 탈출한 후 추격병에게 쫓겨 전사했다.
아와 다케다 씨 3대 武田與次(다케다 요지)는 아와 일국의 다이묘로 입국한 하치스카 이에마사를 섬겼고, 脇성주의 자리는 다시 아와 다케다 씨에게 돌아왔다.[37] 與次의 사후에는 그 아들 4대 요지사에몬(武田與次左衛門)이 가독을 계승했다. 요지사에몬의 적자(嫡子) 武田武貞(다케다 무사다)를 초대 조상으로 하는 다케다 가문의 계보가 6대 武田武久(다케다 무히사)에 의해 기록되어、『蜂須賀家家臣成立書并系図』에 수록되어 도쿠시마 대학 부속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분가(分家)로 川原氏가 있으며, 다케다 씨가 원씨(源氏)임을 근거로 "원(源)"자를 "가와(川)"와 "하라(原)"로 분해한 성씨라고 한다.
실선은 친자, 점선(세로)은 양자, 점선(가로)는 혼인 관계.
武田信虎(武田信虎) | 신綱(武田信綱)? | |
세이신/신겐(武田信玄) | 신견(武田信顕) | |
신정(武田信定) | ||
요지(與次) | ||
요지사에몬(與次左衛門) | ||
무사다(武貞) | ||
사다무(貞武)[38] | 사다무 부인(貞武室) | |
에이시노스케(衛士之助) | 쿠스미(楠実)[39] | |
마사후사(正房) | 사다노부(貞信) | 하야시 미야(林美雅)[40] |
무케이(武之) | 키무라 주유(木村周由)[41] | 무히사(武久) |
무히사(武久)[42] |
5. 주요 일족 및 가신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는 씨족 구성원을 위한 99가지 규칙을 소개한 『구주구각훈(九十九箇訓)』을 저술했다.[10]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는 승려가 되어 가이(甲斐)의 다케다 가문을 창건하였다.[11]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는 대도류 합기유술/다케다류(武田流)를 발전시켰다.[12]
다케다 씨의 주요 인물로는 노부요시, 노부토라, 하루노부(信玄), 가쓰요리, 마쓰히메(松姫) 등이 있다. 다케다 소각 (1859–1943)은 대동류 합기도 유술 학교를 부흥시킨 인물이며, 다케다 가문 외부에 이 무술을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다.[13]
다케다씨는 전국 다이묘 가문의 가신단에 관한 군제나 소령의 실태가 기록된 군역장이나 소령역장 등의 기초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신단의 실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에도 시대에 기록된 군기물인 『甲陽軍鑑(갑양군감)』에는 하루나가(信玄) 말년기・가쓰요리(勝頼) 시대에 관한 가신단의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에도 시대 이후의 유행에 의해 일반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군감』은 메이지 시대의 사학회에서 田中義成(타나카 요시나리)에 의해 사료성이 부정되어 오랫동안 실증 연구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酒井憲二(사카이 켄지)에 의한 국어학적 연구가 행해져 재평가되고, 사료성의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케다 신겐의 가신으로는 武田信繁 (다케다 노부시게), 武田信廉 (다케다 노부카즈), 一条信龍 (이치조 노부타츠), 河窪信実 (가와쿠보 노부사네), 海野信親 (우미노 노부치카), 仁科盛信 (니이나 모리노부), 葛山信貞 (쿠즈야마 노부사다), 武田信豊 (다케다 노부토요), 穴山信君 (아나야마 노부키미), 今井信隣(이마이 노부토모), 今井信昌(이마이 노부마사), 今井信俊(이마이 노부토시), 今井勝澄(이마이 마스즈미), 山本晴幸(야마모토 하루유키), 岩手信盛(이와테 노부모리), 岩手信景(이와테 노부카게), 安西有味(안자이 아리아), 加津野信昌(카츠노 노부마사), 桜井信忠(사쿠라이 노부타다), 武藤常昭(무토 쓰네아키), 板垣信方(이타가키 노부카타), 甘利虎泰(아마리노 토라야스), 飯富虎昌(이이토미 토라마다), 室住虎光(무로즈미 토라미쓰)/諸角虎定(모로즈미 토라사다), 馬場信春(바바 노부하루), 春日虎綱(가스가 토라쓰나), 山県昌景(야마가타 마사카게), 内藤昌豊(나이토 마사유타카), 秋山虎繁(아키야마 토라시게), 浅利信種(아사리 노부타네), 原昌胤(하라 마사타네), 土屋昌続(쓰치야 마사쓰구), 三枝昌貞(사에구사 마사사다), 曽根昌世(소네 마사요), 小山田信有(오야마다 노부아리), 小山田信茂(오야마다 노부시게), 駒井政武(고마이 마사타케), 駒井昌直(고마이 마사나오),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사나다 노부쓰나(真田信綱), 사나다 마사테루(真田昌輝),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코바타케 토라모리(小畠虎盛), 코바타 마사모리(小幡昌盛), 코바타 노리시게(小幡憲重), 코바타 노부사다(小幡信貞), 하라 토라타네(原虎胤), 요코타 타카마쓰(横田高松), 타다 미츠요리(多田満頼), 키소 요시야스(木曾義康), 키소 요시마사(木曾義昌),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등이 있다.
소속 가신으로는 다케다 요시츠네(武田義統), 와카사 다케다씨 다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 아와야 카츠히사(粟屋勝久), 아와야 모토유키(粟屋元行), 아와야 미츠와카(粟屋光若), 아와야 카츠하루(粟屋勝春), 헨미 마사츠네(逸見昌経), 무토 토마마스(武藤友益) 등이 있으며, 소속 가신이라고 여겨지는 인물로는 겟포 세이코(月甫清光 ※이름의 읽는 법에는 여러 설이 있음)가 있다.
6. 다케다 씨 연구
15세기에 편찬된 『고슈합토(甲州法度)』는 다케다 가문의 법전이며,[9] 16세기 중반에 고사카 마사노부가 주로 편찬한 『고요군칸(甲陽軍鑑)』은 다케다 가문의 역사와 신겐의 군사 전술 혁신을 기록한 서사시이다.[9]
가이 다케다 씨(甲斐武田氏)는 근세에 군기물인 『고요군칸』이 성립되어, 다케다 신겐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에도 시대부터 근대에 걸쳐 현지에서도 고향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메이지 시대에는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 신겐을 궁정에 충성하는 자이자 고향의 영웅으로 위치짓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나, 전사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또한, 다이쇼・쇼와 초기에는 현내의 실업가와 명망가를 중심으로 향토 연구가 유행하여, 『가이 시료 집성』이나 『가이 총서』 등의 사료 간행도 이루어졌고, 야마나시 향토 연구회도 발족하여 실증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전후에는 쇼와 30년대부터 연구가 활발해져, 오쿠노 타카히로, 이소가이 마사요시, 우에노 세이로 등이 각각 실증적인 신겐 평전을 발표하였다. 자료적 제약으로 연구는 신겐・카츠요리 시대가 중심이 되고 있지만, 전대의 신코 시대나 후대의 카츠요리 시대에도 시선이 향해지고, 3대 이전에서도 『아즈마카가미』의 사료 비판에 의한 가마쿠라 시대의 가이겐지(甲斐源氏)와 다케다 씨에 관한 연구나, 우에스기 젠슈의 난을 계기로 하는 가이 국의 동향에 주목한 남북조・무로마치 시대의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후에는 다케다 씨 관련 문서의 신발견이나 문서 편찬도 진행되어(후술), 『군감』이나 근세의 종합 지지인 『가이코쿠시』 등 사료 간행도 이루어졌고, 『카츠야마키』 등 신사료도 발견되었다. 1987년에는 다케다 씨 연구회가 발족하여 현재까지 다케다 씨 연구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한편, 고고학 분야에서는 야마나시 현 매장 문화재 센터와 현내외의 시정촌 교육위원회 등에 의한 발굴 조사가 진전되어, 다케다 씨 관적이나 가츠누마 씨 관적 등 다케다 씨와 관련된 고고 유적에 대한 발굴과, 중세 고고학의 진척에 의해 발견이 잇따르고, 사적 정비도 진행되고 있다. 또한, 2005년에는 야마나시 현립 박물관이 개관하여, 다케다 씨에 관한 자료의 수집이나 조사 연구, 전시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는 사회 경제사적 시점에서의 연구나 전국 다이묘 다케다 씨의 권력 구조 해명, 가신단의 개별 연구 외에, 재정이나 치수 사업, 군사나 외교, 교통이나 도시 문제, 상공인 지배나 향촌 지배, 종교, 미술 등 세분화된 분야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나 민속학적 접근 등 연구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24] 한편, 아미노 요시히코는 이러한 다케다 씨와 가이겐지 중심의 연구에 대해 가이 중세사에서 다른 씨족이 수행한 역할을 강조하고, 다케다 씨 이외의 씨족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25]
7. 다케다 씨 관계 문서
15세기에 편찬된 『고슈합토(甲州法度)』는 다케다 가문의 법전이며,[9] 16세기 중반에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가 주로 편찬한 『고요군칸(甲陽軍鑑)』은 다케다 가문의 역사와 신겐(信玄)의 군사 전술 혁신을 기록한 서사시이다.
다케다 씨(武田氏) 연구와 병행하여 다케다 씨 관련 문서의 편찬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케다 씨는 종가가 멸망했기 때문에 가전 문서가 산일되어 있으며 필사본이나 영인본으로만 알려진 것도 많지만, 현재는 3300여 점의 문서가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에도 시대에 막부가 편찬한 『제주고문서』에서 가이(甲斐)의 고문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가이 국(甲斐国)의 종합 지지로서 편찬된 『가이 국지(甲斐国志)』에서는 다케다 씨 관련 기록은 『군감(軍鑑)』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편찬에 따른 고문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에 수록된 문서에는 현재 원본을 확인할 수 없는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실증적인 다케다 씨 연구가 본격화된 쇼와(昭和) 전후기에는 다케다 씨 관련 문서집의 간행도 이루어져, 1966년(쇼와(昭和) 41년)에는 『고후 시사(甲府市史)』의 편찬에 즈음하여 『고후 시사 사료 목록(甲府市史史料目録)』에 "가이 다케다 씨 문서 목록(甲斐武田氏文書目録)"이 포함되었고, 1969년(쇼와 44년)에는 오기노 산시치히코(荻野三七彦)·시바츠지 슌로쿠(柴辻俊六)에 의해 『신편 고슈 고문서(新編甲州古文書)』가 간행되었다. 그 후에도 신출 문서의 증가와 무년호 문서의 검토 작업이 진척되어, 『야마나시 현사(山梨県史)』 편찬 사업의 시작과 함께 종합적인 사료 조사가 이루어져, 현재는 시바츠지 슌로쿠·쿠로다 모토키(黒田基樹) 『센고쿠 유문(戦国遺文)』 다케다 씨 편이나, 가문별로 편찬한 『야마나시 현사』 자료편 중세에서 문서가 집성되어 있다.
다케다 씨 관련 문서의 특징으로서, 문서의 대부분은 전국 시대에 다케다 씨의 확대 영토가 확립된 신겐(信玄)·카츠요리(勝頼) 시대에 집중하고, 신토라(信虎) 시대 이전의 것이 극단적으로 적으며, 신겐·카츠요리 시대에서도 당주 이외의 다케다 일족의 문서나 가신단 관계의 문서, 지배에 관한 문서는 적다. 다케다 가에서는 최소 3명의 우필(右筆)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26], 신겐 문서는 먹의 농담이 극단적인 특징을 가지는 것이 지적된다. 다케다 씨는 가전 문서의 대부분이 산일되어 있기 때문에, 사나다 씨(真田氏)의 자료를 사용하는 등의 꼼수가 필요하게 된다. 외교 문서에서는, 예를 들어 근세 다이묘가로서 존속하고 있는 우에스기 가(上杉家)와의 관계에서는 다케다 씨 측에서 발급한 문서의 대부분이 우에스기 가에 전존하고, 한편 우에스기 씨 측에서 발급한 문서의 대부분은 전존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8. 다케다 씨의 위조 문서
15세기에 편찬된 『고슈합토(甲州法度)』는 다케다 가문의 법전이며,[9] 16세기 중반에 고사카 마사노부가 주로 편찬한 『고요군칸(甲陽軍鑑)』은 다케다 가문의 역사와 신겐의 군사 전술 혁신을 기록한 서사시이다.
다케다 씨 관계 고문서에는 위조 문서가 많다는 지적이 있으며, 쉽게 위조임을 알 수 있는 조잡한 것부터 지역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 만든 정교한 것까지 다양하다.[27][28] 이미 에도 시대부터 가이 국과 시나노 국에 위조 문서가 많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다케다 신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것이다. 가이 국에서는 大小切税法이라는 독특한 금납 세법을 취하고 있었는데, 근세 후기에는 환금 시세가 고정되어 상대적으로 연공이 낮아졌고, 이는 다케다 가문 이래의 은총이라는 유서가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은차증문(恩借証文)'이라 불리는 위조 문서가 각지의 마을이나 집에 전래되었고, 그 중에는 목판으로 인쇄된 것도 존재한다. 또한, 다케다 구신이라는 유서를 자랑하는 다케다 낭인들도 위조 문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공을 칭찬하는 내용에 다케다 씨가 사용한 용의 주인이 찍힌 감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지행宛行이나 본령 안도의 주인장을 함께 위조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종문인별개장(宗門人別改帳)조차도, 화지의 가장자리를 물로 풀어 그 섬유를 이용하여 종이를 잇는 '식렬계(喰裂継)'라는 수법을 써서 다른 문서에 덧붙여 내용을 고치는 수법을 쓴 정교한 위조 문서도 발견된다.[27][28] 이처럼 많은 위조 문서가 만들어진 것은, 촌락에서 지역 명가로 성장한 지주들이 그 가산에 걸맞은 가명을 원했고, 지역적 유서인 다케다 신겐과 전국적인 유서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결합함으로써 무사와의 유사성을 강조하여 촌락에서의 가문의 우위를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27][28]
9. 가문 문장
가이 다케다씨의 가몬은 '''다케다비시'''(武田菱)라고 불리는 「와리비시」(割り菱)이다.[43] 다른 다케다 씨족도 사용한다. 그 외에 「하나비시」(花菱)를 사용한 기록도 있다. 『견문제가문(見聞諸家紋)』에는 「와리비시」와 「마쓰카와비시」(松皮菱)가 실려 있다. 다케다(武田)의 "田" 자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고도 전해진다.[43]
마치무로 막부의 공식 가문 문장집인 『견문제가문』에는 신라 사부로 요시미쓰(義光)의 손자인 라이기(頼義)가 고레이제이 천황의 칙령으로 오슈 아베노 요리토키(安倍頼時)를 공격할 때 스미요시샤(住吉社)에 참배하여 평정과 이적 복종을 기원했고, 신탁에 따라 기(旗) 한 벌과 갑옷 한 벌을 하사받았는데, 이것이 신코 황후가 삼한정벌 때 사용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코 황후의 갑옷 옆에 있던 방패를 가진 자, 스미요시(住吉)의 미코(御子) 코우라 다이묘진(香良大明神)의 갑옷 소매에 있던 문양이 '''와레비시(割菱)'''였으며, 삼한이 귀국한 후 셋쓰 국(摂津国) 스미요시(住吉)에 봉안되었다가 원 라이기(源頼義)에게 하사되었다고 한다. 라이기의 셋째 아들 신라 사부로 요시미쓰가 이를 이어받아 요시미쓰의 후손 당가가 문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1051년부터 1062년까지 이어진 전9년의 역 때, 다케다 씨의 시조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에 무운장구를 기원했을 때,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에 봉납되어 있던 "다테나시(楯無)" 갑옷을 신탁에 따라 받았다. 그 갑옷 소매에 붙어 있던 "와레비시(割菱)" 문양을 다케다 씨의 정문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공황후가 삼한정벌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다테나시(楯無) 갑옷은 이후 다케다 가문의 가보로 전해졌다.
야마나시현에서는 고후역부터 일반 가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다케다비시(武田菱)를 볼 수 있다. 또한, 야마나시 현을 지나는 JR 특급 열차에 사용되는 E257계 0번대의 차체 디자인에도 다케다비시(武田菱)가 채용되었다. 야마나시 현의 현장은 다케다비시(武田菱)를 기반으로, 후지산의 정상을 이미지하여 네 귀퉁이가 톱니 모양으로 된 마름모꼴로 둘러싸인 형태이다.
10. 주요 성
가와스미관(石和館), 적죽가사키관(躑躅ヶ崎館), 신푸성(新府城)을 주성으로 삼았다. 그 외 가미하라성(上原城), 코모로성(小諸城), 다카토요성(高遠城), 오시마성(大島城), 토이시성(戸石城), 우미즈성(海津城), 에지리성(江尻城), 미누와성(箕輪城)을 주요 지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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旗本・芦敷戸田家戸田政峯の次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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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江三上藩主・遠藤氏の一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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旗本・鵜殿長一の五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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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窪信有の五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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広戸正状の四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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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窪武田家宗家・武田信村の三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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館野忠四郎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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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藤八郎右衛門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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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平宮内少輔(浅野長賢または池田忠雄)の家臣・三宅伊邦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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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科信辰の嫡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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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川雄広の次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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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川宣彪の三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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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우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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