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타니 히사노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즈타니 히사노부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 및 평론가이다.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1965년 15승, 1966년 10승을 기록했다. 1974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10을 저지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도 출전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및 MBC 청룡의 코치를 역임했으며, 나고야 TV 방송의 해설자와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주니치 드래건스 선수 - 선동열
선동열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야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MVP를 수상했고, KBO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KBO 리그 통산 평균자책점 1.20, WHIP 0.80의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은퇴 후에는 프로 야구팀 감독과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위원 겸 KBO 기술위원이다. - 주니치 드래건스 선수 - 오카모토 신야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최우수 중간 계투상을 수상하고 여러 팀에서 우승을 경험한 오카모토 신야는 은퇴 후 음식점 운영과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 나고야시 출신 - 아카마츠 켄
아카마츠 켄은 《아이러브 서티》, 《러브히나》, 《마법선생 네기마!》 등의 미소녀 러브 코미디 만화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이자, 2022년 참의원 의원 당선 후 표현의 자유 옹호와 저작권 보호 등의 활동을 하는 정치인이다. - 나고야시 출신 - 가이후 도시키
가이후 도시키는 1960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48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유민주당 총재를 거쳐 제76대, 77대 총리를 역임했고, 2022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미즈타니 히사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선수명 | 미즈타니 히사노부 |
원어명 | Hisanobu Mizutani |
일본어 표기 | 水谷 寿伸 |
출신지 | 아이치현 나고야시 지쿠사구 |
생년월일 | 1941년 1월 3일 () |
신장 | 177 |
체중 | 82 |
수비 위치 | 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연도 | 1959년 |
첫 출장 | 1960년 |
마지막 경기 | 1974년 |
소속 구단 | 주니치 드래건스 (1959 ~ 1974) |
코치 경력 | |
코치 구단 | 주니치 드래건스 (1977 ~ 1978, 1981 ~ 1985, 1993 ~ 1994) MBC 청룡 (1986 ~ 1987) |
기타 정보 | |
고등학교 | 아이치현립 아이치 상업 고등학교 |
2. 선수 경력
미즈타니 히사노부는 아이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 데뷔 직후 어깨 부상을 입어 타격 투수로 1군에 동행하기도 했으나, 1964년 1군에 합류하였다. 1965년에는 선발 투수로 50경기에 등판하여 15승(9선발승), 1966년에는 38경기에 등판하여 10승(모두 선발)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다. 1969년부터는 주로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지만, 1971년 선발로 복귀하여 9승(7선발승)을 올렸고, 그해부터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74년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팀의 20년 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같은 해 롯데 오리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도 2경기에 등판하였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3]
2. 1. 고교 시절
아이치 상업고등학교 시절 1957년 춘계 선발 대회(제29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대기 투수로 출전했다. 1차전에서 다카마쓰 상업고등학교의 이시카와 요조에게 막혀 완봉패를 당했지만[3] 이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고시엔에 첫 등판했다. 1년 위 동료로 유격수 요코치 요시마쓰가 있었다. 그해 가을 주부 대회 아이치현 예선에서도 결승 리그에 진출했지만 4개 학교 가운데 3위에 끝나 본선 출전을 놓쳤다. 1958년 여름에도 아이치현 예선에서 패해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2. 2.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59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 직후 어깨 부상으로, 이후 타격 투수로 1군에 동행했다.1964년에는 1군에 정착했다.
1965년에는 선발 투수로 기용되어 50경기에 등판, 15승(9선발승)을 기록했다.
1966년에는 38경기에 등판하여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인 10승(모두 선발)을 기록했다.
1969년부터는 주로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다.
1971년에는 선발로 복귀하여 9승(7선발승)을 기록했다.
1972년에는 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74년에는 중간 계투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20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롯데 오리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도 2경기에 등판했지만,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미즈타니 히사노부는 은퇴 후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주니치 드래건스와 MBC 청룡에서 코치를 맡았고, 나고야 TV 방송에서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기간 | 소속팀 | 직책 |
---|---|---|
1975년 ~ 1976년 | 주니치 드래건스 | 스카우트 |
1977년 ~ 1978년, 1981년 ~ 1985년, 1993년 ~ 1994년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투수 코치 |
1979년 ~ 1980년, 1988년 ~ 1992년 | 나고야 TV 방송 | 해설자 |
1986년 ~ 1987년 | MBC 청룡 | 투수 코치 |
현재 | 주니치 스포츠 | 평론가 |
주니치와 MBC 청룡 코치 시절의 자세한 내용은 각각 하위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3. 1.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시절
은퇴 후에는 주니치에서 스카우트(1975년 - 1976년)・2군 투수 코치(1977년 - 1978년, 1981년 - 1985년, 1993년 - 1994년)를 역임했다. 코치 활동 틈틈이 나고야 TV 해설자(1979년 - 1980년, 1988년 - 1992년)를 맡았다. 현재는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하며, 주로 주니치 2군에 대한 평론을 하고 있다.[2]3. 2. MBC 청룡 코치 시절
미즈타니 히사노부일본어는 1986년부터[4] 1987년까지 MBC 청룡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MBC 코치 시절에는 투수 운영 전권을 위임받았지만, 투수 관리뿐만 아니라 공격, 수비, 그리고 훈련 계획 등 사실상의 팀 운영의 모든 권한을 가진 감독급 대우를 받았다. 타자로 입단한 김건우를 투수로 전향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김건우는 18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신인왕을 획득하게 한 외에도, 일본의 선진적인 트레이닝 기법을 선수들에게 전수하여 국내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2]4. 해설가 및 평론가 경력
은퇴 후에는 주니치에서 스카우트(1975년 ~ 1976년), 2군 투수 코치(1977년 ~ 1978년, 1981년 ~ 1985년, 1993년 ~ 1994년)를 역임했다. 코치직을 맡고 있는 사이에는 나고야 TV 방송 해설자(1979년 ~ 1980년, 1986년 ~ 1992년)로 활동했고, 1986년부터[4] 1987년까지 MBC 청룡에서 투수 코치를 맡았다. MBC 코치 시절에는 투수 운영 전권을 위임받았지만, 투수 관리뿐만 아니라 공격, 수비, 그리고 훈련 계획 등 사실상 팀 운영의 모든 권한을 가진 감독급 대우를 받았다. 타자로 입단한 김건우를 투수로 전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김건우는 18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획득했다. 또한 일본의 선진적인 트레이닝 기법을 선수들에게 전수하여 국내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2] 현재는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로 주니치 2군에 대한 논평을 하고 있다.
5. 상세 정보
미즈타니 히사노부는 1957년 춘계 선발 대회에 대기 투수로 출전하여 고시엔에 첫 등판했고,[3] 고교 졸업 후 1959년 주니치에 입단했다. 프로 데뷔 직후 어깨 부상으로 타격 투수를 하다가 1964년에 1군에 합류, 1965년에는 15승, 1966년에는 10승을 거두며 활약했다. 1971년에는 9승을 기록하며 올스타전에 2년 연속 출전했고, 1974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주니치 스카우트, 2군 투수 코치, 나고야 TV 방송 해설자, MBC 청룡 투수 코치 등을 역임했고,[4] 현재는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5. 1. 출신 학교
아이치현립 아이치 상업고등학교5. 2. 선수 경력
아이치 상업고등학교 시절, 1957년 춘계 선발 대회(제29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대기 투수로 출전했다. 1차전에서 다카마쓰 상업고등학교의 이시카와 요조에게 막혀 완봉패를 당했지만,[3] 이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고시엔에 첫 등판했다. 1년 선배이자 유격수인 요코치 요시마쓰가 있었다. 그해 가을 주부 대회 아이치현 예선에서도 결승 리그에 진출했지만 4개 학교 가운데 3위에 그쳐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듬해인 1958년 여름에도 아이치현 예선에서 패하며 고시엔 대회 출전은 무산되었다.고교 졸업 후 1959년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 프로 데뷔 직후 어깨 부상으로 한동안 타격 투수로 1군에 머물렀다. 그러나 1964년에 1군에 합류했고, 1965년에는 선발진의 일원으로 기용되어 50경기에 등판, 15승(9선발승)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38경기에 등판하여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10승, 모두 선발)를 거두었다. 1969년부터는 주로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으나, 1971년에 선발로 복귀하여 시즌 9승(7선발승)을 올렸고, 그해부터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74년에는 중간 계투로 활약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팀의 20년 만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해 롯데 오리온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도 2경기에 등판했으며,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5.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미즈타니 히사노부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스카우트(1975년 ~ 1976년), 2군 투수 코치(1977년 ~ 1978년, 1981년 ~ 1985년, 1993년 ~ 1994년)를 역임했다.[4] 코치직을 맡는 사이에는 해설자로도 활동하여 나고야 TV 방송 해설자(1979년 ~ 1980년, 1986년 ~ 1992년)를 역임했고, 1986년부터 1987년까지 MBC 청룡에서 투수 코치를 맡았다. 현재는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로 주니치 2군에 관한 논평을 하고 있다.미즈타니 히사노부의 지도자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75년 ~ 1976년 | 주니치 드래건스 | 스카우트 |
1977년 ~ 1978년, 1981년 ~ 1985년, 1993년 ~ 1994년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투수 코치 |
1986년 ~ 1987년 | MBC 청룡 | 투수 코치 |
5. 4. 개인 기록
- 올스타전 출장 : 2회(1971년, 1972년)[3]
5. 5.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59년 ~ 1960년 | 35 |
1961년 ~ 1974년 | 27 |
1977년 | 63 |
1978년 | 78 |
1981년 ~ 1985년 | 75 |
1993년 ~ 1994년 | 92 |
5. 6. 등록명
水谷 伸久|미즈타니 노부히사일본어, 1959년 ~ 1963년)水谷 寿伸|미즈타니 히사노부일본어, 1964년 ~ )
6. 연도별 투수 성적
도
속
판
발
투
봉
4
구
리
전
이
브
드
률
자
닝
안
타
홈
런
넷
4
맞
삼
진
투
크
점
책
점
자
책
H
I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