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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잇코 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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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카와 잇코 잇키는 1563년 미카와국에서 발생한 잇코슈(一向宗) 신도들의 반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와국을 통일하려는 시도에 대해, 혼간지 교단의 지원을 받은 잇코슈 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잇키는 1564년 바토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승리하고 화의를 맺으면서 해산되었으며, 이후 이에야스는 잇코슈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이 사건은 도쿠가와 가문이 센고쿠 다이묘로서 미카와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겪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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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잇코 잇키
전투 개요
전투명미카와 잇코 잇키
전역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투
분쟁센고쿠 시대 (일본)
날짜에이로쿠 6년 - 7년
장소미카와국 서부
결과마쓰다이라 가의 지배 확립
교전 세력
교전국 1마쓰다이라 군
교전국 2잇코 잇키 군
지휘관 및 지도자
마쓰다이라 군 지휘관마쓰다이라 이에야스
잇코 잇키 군 지휘관기라 요시아키
공서
병력 규모
마쓰다이라 군 병력수천 명
잇코 잇키 군 병력수천 명
사상자 및 피해
잇코 잇키 군 피해잇코 잇키 세력 해체

2. 배경

1563년부터 1564년에 걸쳐 미카와국에서 일어난 미카와 잇코 잇키는 정토진종 혼간지 문도들이 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이다.

현재의 안조시 노데라에 위치한 혼쇼지의 10대 주지 쿠세이(렌뇨의 증손)가 중심이 되어 정토진종의 혼간지 문도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마쓰다이라 이에야스와 싸웠다.[1] 『산슈 잇코슈 란키』에는 "당국 헤키카이군 노데라 마을의 혼쇼지라고 하는 곳은 잇코슈의 소본사로, 수호 불입의 도장이자 당국 3개 사찰 중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중심 세력은 혼쇼지 외에 미카와 3개 사찰(미카와 산가데라)과 키라씨, 아라카와씨, 사쿠라이 마츠다이라씨, 오오쿠사 마츠다이라씨 등이었다. 안죠 마츠다이라가 휘하에 있던 혼다 마사노부, 하치야 사다츠구, 나쓰메 요시노부 등도 참가했다. 이들은 안죠 마츠다이라가가 안죠성을 거점으로 삼던 시절부터 진종 문도 지역 세력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그중 가장 큰 세력은 혼쇼지 문도인 이시카와씨였다. 문도 측과 이에야스 측으로 일족이 분열되는 등 혼란이 극심했다.

미카와 잇코 잇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가고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대 위기로 꼽힌다. 많은 가신이 문도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에게 종교의 무서움을 각인시켰다.

오쿠보 타다요의 『미카와 모노가타리』와 『산슈 잇코슈 란키』에 잇키의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1]

2. 1. 미카와 산가데라와 불입권

혼쇼지(안조시 노지정), 조구지(오카자키시 카미사사키정), 쇼만지(오카자키시 하리사키정)는 미카와 혼간지 교단의 거점으로, 미카와 산가데라라 불렸으며,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이에야스의 아버지) 대에 수호사 불입의 특권을 부여받았다.[1]

2. 2. 잇코잇키 발단의 여러 설

오쿠보 타다노리의 저서 『미카와 이야기』와 『산슈 잇코슈 란키』에는 미카와 잇코잇키의 발단에 관한 개요가 묘사되어 있다. 『산슈 잇코슈 란키』에서는 혼쇼지에서의 발단을 첫째로 들고, 다음으로 혼쇼지에서의 다른 설, 죠구지에서의 설을 두 가지로 들어 여러 설이 있다고 해설한다.

; 오쿠보 타다노리의 저서 『미카와 이야기』의 기술

: 에이로쿠 5년(1562년)에 혼쇼지에 침입한 무법자를 니시오 성주 사카이 마사치카가 포박했기 때문에, 수호사 불입의 특권을 침해했다고 하여 에이로쿠 6년(1563년) 정월에 잇키가 일어났다고 한다.

; 죠구지 발단설

: 에이로쿠 6년(1563년)에 마쓰다이라 씨 가신 스가누마 사다아키에게 명해 죠구지 부근에 요새를 쌓게 하고, 죠구지로부터 군량으로 하는 곡물을 빼앗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가누마 사다아키라는 가신의 실존은 불분명하다.

불입 특권을 주장하는 미카와 산가데라와 교단의 이권을 해체하고 미카와국 통일을 목표로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립이 심화되고, 수호사 불입의 특권이 침해된 것을 발단으로 혼쇼지 제10대 쿠세이(렌뇨의 증손)는 죠구지나 쇼만지와 함께 격문을 날리고 혼간지 문도를 소집하여 스가누마 씨의 성채를 습격했다. 진종 문도인 마쓰다이라 씨 가신과 키라 씨 등 유력 호족, 이마가와 씨 잔당 등도 가세해 마쓰다이라 씨의 본성인 오카자키 성까지 쳐들어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궁지에 빠뜨렸다.

다만, 이 같은 잇키의 묘사에는 이견도 나오고 있다. 히라노 아키오는 에이로쿠 6년의 이에야스의 동향을 분석한 결과, 우에노 성의 사카이 다다나오의 거병이 에이로쿠 6년 6월 (혹은 그 이전), 테라베 성의 오가사와라 히로시게의 거병이 동년 10월 이전, 토조 성의 키라 요시아키의 거병은 같은 해 10월 하순, 잇코 잇키의 발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같은 해 12월 (혹은 그 이전)에 잇키군이 혼다 히로타카의 도이 성을 공격한 후의 일이라고 보았다. 또한 사카이, 오가사와라, 키라가 잇코 잇키나 이를 지지한 이에야스 가신과 연락을 취하거나 공동작전을 취했다고 하는 흔적이 없는 점 (잇코 잇키가 오카자키 성에 육박한 시기에도 자령에 머물러 오카자키로 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에 주목해, 사카이, 키라 씨 등의 거병과 잇코 잇키는 모두 이에야스를 표적으로 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양자에는 관련성이 없었다고 한다.

3. 전개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가고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대 위기로 꼽히는 미카와 잇코 잇키는 1563년(에이로쿠 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와 국 통일을 위해 교단 이권을 해체하려 하자, 불입 특권을 주장하는 미카와 3개 사찰과 혼쇼지 제10대 쿠세이(렌뇨의 증손) 등이 혼간지 문도를 소집하여 일으킨 무력 봉기이다.[1][2]

오쿠보 타다요의 『미카와 이야기』에 따르면, 1562년(에이로쿠 5년) 혼쇼지에 침입한 무법자를 니시오 성 성주 사카이 마사치카가 체포하여 수호사 불입 특권 침해 문제가 발생했고, 이듬해 정월에 잇키가 일어났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1563년 마쓰다이라 씨 가신 스게누마 사다아키가 조쿄지 근처에 요새를 쌓고 병량을 빼앗은 것이 발단이라고도 하나, 그의 실존 여부는 불분명하다.[1]

진종 문도인 마쓰다이라 씨 가신, 키라 씨 등 유력 호족, 이마가와 씨 잔당 등이 가세하여 오카자키 성까지 쳐들어갔다.[1] 그러나 히라노 아키오는 가미노 성의 사카이 타다나오, 테라베 성의 오가사와라 히로시게, 토조 성의 키라 요시아키 거병이 모두 이에야스를 표적으로 했지만, 잇코 잇키와는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히라야마 유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산슈 급용" 징세가 이들 거병의 계기가 되었고, 결국 잇코 잇키와 이이오 렌류 등의 반란 세력이 서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각개격파되는 공멸을 초래했다고 본다.[1][2]

3. 1. 잇키군의 결성

안죠시 노데라의 혼쇼지 10대 쿠세이(렌뇨의 증손)를 중심으로 정토진종 혼간지 문도들이 격문을 보내어 영주 마츠다이라 이에야스와 싸웠다. 『三州一向宗乱記』에는 "당국 벽해군 야데라 촌의 혼쇼지(本證寺)는 일향종의 소본사(小本寺)로, 수호불입(守護不入)의 도량이며, 당국 삼개사(三箇寺) 중 하나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1]

중심 세력은 미카와 산가데라와 혼슈지, 미카와 슈고가인 키라씨 외에 아라카와씨, 사쿠라이 마츠다이라씨, 오오쿠사 마츠다이라씨였다.[1] 안죠 마츠다이라가 휘하의 혼다 마사노부, 하치야 사다츠구, 나츠메 요시노부도 참가했다.[1] 이는 마츠다이라 종가인 이와즈 마츠다이라를 대신하여 대두된 안죠 마츠다이라가가 안죠성에 거성하던 시절부터 진종 문도의 지역 세력을 지배하에 거둔 것이며, 그 중 가장 큰 것은 혼쇼지 문도인 이시카와씨였다.[1] 일족간에 문도 측과 이에야스 측으로 분열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했다.[1]

미카와 잇코 잇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가고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3대 위기로 여겨진다.[1] 가신단의 상당수가 문도 측에 합류하는 등, 이에야스에게 종교의 무서움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1]

오오쿠보 타다노리의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와 『三州一向宗乱記』에 개황이 그려져 있다.[1]

3. 2. 이에야스 가신들의 분열

마쓰다이라 이에야스의 가신단은 정토진종 문도 세력과 이에야스 측으로 나뉘어 분열되었다.

잇코 잇키 측 가신이에야스 측 가신



이처럼 미카와 잇코 잇키는 이에야스 가신단을 분열시키고, 이에야스에게 종교 세력의 위협을 각인시켰다.

3. 3. 잇키군의 주요 구성원



잇키군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주요 가담 무장



이들 외에도, 중심 세력은 미카와 산가데라와 혼슈지 및 미카와 슈고가인 키라씨 외에 아라카와씨, 사쿠라이 마츠다이라씨, 오오쿠사 마츠다이라씨가 있다. 또, 안죠 마츠다이라가 휘하에 있던 혼다 마사노부, 하치야 사다츠구, 나츠메 요시노부가 참가했다. 이는 마츠다이라 종가인 이와즈 마츠다이라를 대신하여 대두된 안죠 마츠다이라가가 안죠성에 거성하던 시절부터 진종 문도의 지역 세력을 지배하에 거둔 것이며, 그 중 가장 큰 것은 혼쇼지 문도이기도 한 이시카와씨이다.[1] 일족간에 문도측과 이에야스 측으로 분열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했다.[1]


  • '''혼다 마사노부''': 전쟁 후 도망쳐 행방을 감췄다.[1]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섬기는 등 여러 쿠니를 유랑하다가, 후에 오오쿠보 타다요의 중재로 귀참해 중용되어, 창업기의 에도 막부의 중신이 된다.[1]
  • '''혼다 마사시게''': 형 마사노부와 함께 참가했다.[1] 후에 사면을 받아 귀참해 전공을 올리는데도 도망쳐 행방을 감춰, 타키가와 카즈마스, 마에다 토시이에, 가모 우지사토를 섬긴 후 귀참했다.[1]
  • '''와타나베 모리츠나''': 사면을 받아 귀참했다.[1] 후에 도쿠가와 요시나오츠케가로가 되었다.[1] 도쿠가와십육신장.[1]
  • '''하치야 사다츠구''': 에이로쿠 7년 (1564년)에 항복하여 귀참했다.[1] 도쿠가와십육신장.[1]
  • '''나츠메 요시노부''': 노바성 (롯쿠리성이라는 설도 있음) 함락 시, 마츠다이라 코레타다에게 포박되어, 코레타다의 탄원에 의해 사면을 받아 귀참했다.[1]
  • '''나이토 키요나가''': 칩거 처분.[1] 아들인 이에나가는 아버지와 달리 이에야스 측으로 임했다.[1]
  • '''가토 노리아키''': 전쟁 후 도망쳐 행방을 감췄다.[1]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긴 후,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다.[1] 자식인 요시아키는 히데요시 밑에서 출세했다.[1]
  • '''사카이 타다나오''': 잇코 잇키 발발 이전에, 거성에 틀어박혀있었다는 설도 있다.[1] 또, 잇큐측과 연계된 흔적이 없다.[1] 잇코 잇키 수습 후에도 저항했다.[1]
  • '''이시카와 야스마사''': 아버지 이사카와 키요카네는 미카와의 혼간지 신도총대 였다는 등, 이시카와씨는 잇코슈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1] 다만, 키요카네의 아내(의 어머니)는 이에야스 어머니의 여동생이며, 야스마사, 이에나리 형제는 이에야스의 사촌이다.[1] 이 연척 관계에 의해 야스마사 적남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개종하여 이에야스측, 동생 이에나리도 이에야스 측으로 참전했다.[1]

4. 잇키의 진압과 결과

미카와 잇코 잇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가 고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대 위기로 꼽힌다. 이 사건으로 이에야스는 가신단의 상당수가 잇키 측에 가담하면서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했다.

오쿠보 타다요의 『미카와 모노가타리』와 『산슈 잇코슈 란키』에 잇키 진압과 결과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잇키는 1583년까지 미카와국에서 혼간지 교단 금지령으로 이어졌다. 이에야스는 혼간지 교단에 엄격한 처분을 내렸지만, 배신한 가신에게는 관대한 조치를 취해 가문의 결속을 다졌다. 혼다 마사노부 등 일부 가신은 도망쳤으나, 와타나베 모리쓰나, 하치야 사다쓰구 등은 사면받았다. 실제로는 혼다 마사노부 등 잇키에 참가한 대부분의 가신이 가중 통제를 위해 추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4] 교단 금지 해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가중 융화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잇키는 이에야스의 미카와국 분국 지배 확립 시도에 잇코슈 세력이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마쓰다이라 종가(도쿠가와씨)가 센고쿠 다이묘로서 영지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고 평가된다.

잇키 가담 후 이에야스에게 돌아오거나 다른 길을 걸은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결과
혼다 마사노부전후 출분. 여러 나라를 떠돌다 오쿠보 타다요의 주선으로 귀참, 에도 막부 중신이 됨.
혼다 마사시게형과 함께 참가. 사면 후 귀참, 전공을 세웠으나 출분.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을 섬긴 후 귀참.
와타나베 모리쓰나사면 후 귀참.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가신이 됨. 도쿠가와 16신장.
하치야 사다쓰구1564년 항복 후 귀참. 도쿠가와 16신장.
나쓰메 요시노부노바 성(무쓰리 성 설도 있음) 함락 시 마쓰다이라 이야다다에게 포박, 이야다다의 탄원으로 사면 후 귀참.
나이토 기요나가칩거 처분. 아들 이에나가는 이에야스 측에서 근무.
가토 노리아키전후 출분. 무로마치 막부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긴 후,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김. 아들 요시아키는 히데요시 밑에서 출세.
사카이 타다나오잇키 발발 전 거성 농성 설 있음. 잇키 측 연계 흔적은 없으며, 잇키 수습 후에도 저항.
이시카와 야스마사아버지 이시카와 기요카네는 미카와 혼간지 신도 총대. 야스마사와 이에나리 형제는 이에야스의 사촌. 적남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개종하여 이에야스 측, 동생 이에나리도 이에야스 측 참전.


4. 1. 이에야스의 우세와 화의

에이로쿠 7년(1564년) 1월 15일, 바토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위를 점하고 화의를 통해 잇키를 해체하는 데 성공한다. 화의 중개에 관여한 미즈노 노부모토의 서한에는 에이로쿠 7년 봄에 화의가 성립되어 국내가 평온해졌다는 기록이 있다.[3] 같은 해 4월, 오가사와라씨이에야스에게 귀순하였고, 이후에도 저항을 계속한 키라씨와 사카이 타다히사는 추방되었다.

잇키에 가담했던 무사들 중에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신앙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잇키에서 이탈하여 이에야스에게 돌아가기를 바랐고, 결국 잇키는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편, 이때 혼슈지는 승려를 불태웠고, 쇼만지는 가람을 불태웠다. 이에야스는 화의를 맺어 잇키 세력을 완전히 해산시킨 후, 혼간지 사찰에 다른 종파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하면 절을 해체시켰다.

혼간지 사찰 탄압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가신들의 배반에 시달린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협력한 가신들에게 도쿠세이령을 내려 혼간지 사원 등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채무 변제를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잇코 잇키와의 화의 이후 이 조치의 처리가 문제가 되었다. 화의 중재에 나선 미즈노 노부모토는 도쿠세이령의 일부라도 인정해 줄 것을 혼슈지 등에 요청했지만,[3] 혼간지 사원은 도쿠세이령이 화의 조건에 어긋난다고 반발했다. 화의 조건과 가신과의 약속 사이에서 궁지에 몰린 이에야스에이로쿠 7년 12월 또는 그 이후에 혼간지 사찰 탄압을 단행했다고 한다.

잇키가 종결된 후 19년 뒤인 덴쇼 11년(1583년)까지 미카와국은 혼간지 교단이 금지된 땅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혼간지 교단에 엄격한 처분을 내리는 한편, 배신한 가신들에게는 관대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혼다 마사노부 등 일부 가신은 도망쳐 행방을 감췄다.)

4. 2. 종교적, 정치적 영향

정토진종 혼간지 문도들이 미카와국에서 일으킨 미카와 잇코 잇키는 종교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의 안조시 노데라에 위치한 혼쇼지의 10대 주지 쿠세이(렌뇨의 증손)가 중심이 되어, 영주 마쓰다이라 이에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싸웠다.[1] 『산슈 잇코슈 란키』에는 "당국 헤키카이군 노데라 마을의 혼쇼지라고 하는 곳은 잇코슈의 소본사로, 수호 불입의 도장이자 당국 3개 사찰 중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

중심 세력은 미카와 3개 사찰과 혼소지 외에 키라 씨, 아라카와 씨,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씨, 오쿠사 마쓰다이라 씨 등이었다. 안조 마쓰다이라 가 휘하의 혼다 마사노부, 하치야 사다쓰구, 나쓰메 요시노부 등도 참가했다. 이는 안조 마쓰다이라 가문이 안쇼 성을 거점으로 삼던 시절부터 진종 문도 지역 세력을 지배하에 두었기 때문이며, 그중 가장 큰 세력은 이시카와 씨였다. 이로 인해 일족 간에 문도 측과 이에야스 측으로 분열되는 혼란이 발생했다.

미카와 잇코 잇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가 고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대 위기로 꼽힌다. 많은 가신이 문도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는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하게 되었다.

에이로쿠 7년 (1564년) 1월 15일, 마토바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우위를 점하고 화의를 통해 잇키를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미즈노 노부모토의 서한에 따르면, 같은 해 봄에는 화의가 성립되어 국내가 평온해졌다고 한다.[3] 이후 오가사와라 씨가 이에야스를 따랐고, 저항을 계속한 키라 씨와 사카이 타다나오는 추방되었다.

잇키에 가담한 무사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신앙심 사이에서 갈등했고, 이탈하여 이에야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아 잇키는 수습 국면을 맞았다. 이때 혼쇼지는 불타고, 쇼만지는 가람이 소실되었다. 이에야스는 화의 후 혼간지 사찰에 다른 종파로 개종을 강요하고, 거부하면 절을 해체했다.

일부에서는 이에야스가 가신들에게 도쿠세이령을 내려 채무 변제를 면제했으나, 화의 후 혼간지 사원이 이에 반발하여 사찰 탄압이 이루어졌다는 견해도 있다.[4]

잇키 종결 19년 후인 덴쇼 11년 (1583년)까지 미카와 국은 혼간지 교단 금지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배신한 가신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취해 가문의 결속을 다졌다. 혼다 마사노부 등 일부 가신은 도망쳤지만, 와타나베 모리쓰나, 하치야 사다쓰구 등은 사면받았다.

미카와 잇코 잇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센고쿠 다이묘로서 영국의 일원 지배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4. 3. 장기적 영향

에이로쿠 7년(1564년) 1월 15일, 바토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리한 입장에서 화의를 맺고 잇키를 해체하는 데 성공한다. 화의 중개에 참여했던 미즈노 노부모토의 서한에는 에이로쿠 7년 봄에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국내가 평온해졌다는 기록이 있다.[3] 같은 해 4월에는 오가사와라씨가 이에야스를 따랐고, 이후에도 저항하던 키라씨와 사카이 타다히사는 추방되었다.

잇키에 참여했던 무사들 중에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신앙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잇키에서 벗어나 이에야스에게 돌아가기를 원했기에, 잇키는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편, 이때 혼슈지는 주지를 불태웠고, 쇼만지는 가람을 불태웠다. 이에야스는 화의를 통해 잇키 세력을 완전히 해산시킨 후, 혼간지 사찰에 다른 종파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면 절을 해체했다.

혼간지 사찰 탄압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가신들의 배반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협력한 가신들에게 도쿠세이령을 내려 혼간지 사원 등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채무 변제를 면제해주었다. 그러나 잇코 잇키와 화의를 맺은 후, 이 조치가 문제가 되었다. 화의 중재에 나섰던 미즈노 노부모토는 도쿠세이령의 일부라도 인정해달라고 혼슈지 등에 요청했지만,[3] 혼간지 사원은 도쿠세이령이 화의 조건에 어긋난다고 반발했다. 화의 조건과 가신과의 약속 사이에서 곤경에 처한 이에야스는 에이로쿠 7년 12월 또는 그 이후에 혼간지 사찰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잇키가 종결된 후 19년 뒤인 덴쇼 11년(1583년)까지 미카와국은 혼간지 교단이 금지된 땅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혼간지 교단에 엄격한 처벌을 내리는 한편, 배신했던 가신들에게는 관대한 조치를 취하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혼다 마사노부 등 일부 가신은 도망쳐 행방을 감췄다.)

이 잇키는 미카와국의 분국 지배 확립을 목표로 한 이에야스에 대해 잇코슈 세력이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마쓰다이라 종가(도쿠가와씨)가 센고쿠 다이묘로서 영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고 평가된다.

미카와 잇코 잇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가 고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대 위기로 꼽힌다. 가신단의 다수가 잇키 측에 가담하는 등, 이 사건은 이에야스에게 종교의 무서움을 각인시켰다.

오쿠보 타다요의 『미카와 모노가타리』와 『산슈 잇코슈 란키』에 잇키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잇키에 가담했다가 이후 이에야스에게 돌아오거나 다른 길을 걷게 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결과
혼다 마사노부전후 출분. 여러 나라를 떠돌다 오쿠보 타다요의 주선으로 귀참하여 에도 막부의 중신이 됨.
혼다 마사시게형 마사노부와 함께 참가. 후에 사면되어 귀참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출분. 다키가와 가즈마스, 마에다 토시이에, 가모 우지사토를 섬긴 후 귀참.
와타나베 모리쓰나사면되어 귀참. 후에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가신이 됨. 도쿠가와 16신장.
하치야 사다쓰구1564년 항복하여 귀참. 도쿠가와 16신장.
나쓰메 요시노부노바 성(무쓰리 성이라는 설도 있음) 함락 시 마쓰다이라 이야다다에게 포박되어 이야다다의 탄원으로 사면되어 귀참.
나이토 기요나가칩거 처분. 아들 이에나가는 아버지와 달리 이에야스 측에서 근무.
가토 노리아키전후 출분. 무로마치 막부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긴 후,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김. 아들 요시아키는 히데요시 밑에서 출세.
사카이 타다나오잇코 잇키 발발 전 거성에 농성했다는 설이 있음. 잇키 측과 연계한 흔적은 없으며, 잇키 수습 후에도 저항.
이시카와 야스마사아버지 이시카와 기요카네는 미카와의 혼간지 신도 총대였음. 그러나 기요카네의 아내(어머니)는 이에야스 어머니의 여동생으로, 야스마사와 이에나리 형제는 이에야스의 사촌. 이 인척 관계로 인해 야스마사의 적남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개종하여 이에야스 측, 동생 이에나리도 이에야스 측으로 참전.


참조

[1] 서적 新説 家康と三方原合戦-生涯唯一の大敗を読み解く- NHK出版 2022
[2] 서적 徳川家康と武田信玄 KADOKAWA〈角川選書〉 2022
[3] 문서 水野信元書状 本光寺常盤歴史資料館 "1564-12-01"
[4] 서적 戦国期三河松平氏の研究 岩田書院 20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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