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집 장창 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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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집 장창 보병대(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에 사용된 전투 대형으로, 방패와 창을 든 보병들이 밀집하여 전진하는 전술이다. 초기에는 시민들이 직접 장비를 제공하여 중장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사리사(긴 창)를 도입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더욱 강력해졌다. 팔랑크스는 평지에서 강력했지만, 측면과 후방이 취약하고 험준한 지형에서는 약점을 보였다. 로마 군단의 등장과 함께 쇠퇴했으며, 18세기까지 파이크(긴 창)를 사용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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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집 장창 보병대 | |
---|---|
개요 | |
![]() | |
유형 | 보병 전술 |
기원 | 수메르 또는 고대 이집트 |
사용 시기 | 기원전 25세기 ~ 17세기 |
사용 국가 | 수메르 고대 이집트 그리스 도시 국가 마케도니아 왕국 헬레니즘 국가 로마 공화국 한(나라) 조선 기타 다수 |
상세 정보 | |
어원 | 그리스어: φάλαγξ (phalanx, 팔랑크스) 한국어: 밀집 장창 보병대 |
역사적 의의 | 고대 전쟁에서 중요한 보병 전술로 사용됨 사회 및 정치 구조에 영향 |
구성 | 밀집 대형 긴 창 (예: 사리사) 방패 갑옷 |
장점 | 정면 돌파에 강력 방어에 유리 |
단점 | 측면 공격에 취약 유연성 부족 |
변형 |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로마식 팔랑크스 (마니풀루스) 방진 (square formation) |
관련 전술 및 부대 | |
관련 전술 | 망치와 모루 전술 포위 전술 |
관련 부대 | 호플리테스 페제타이로이 레기오 |
기타 | |
참고 | 팔랑크스는 고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유사한 형태의 밀집 보병 전술이 사용됨 팔랑크스의 성공은 훈련된 병사들의 협동심과 규율에 크게 의존 |
2. 역사
고대 그리스 이전에는 수메르와 고대 이집트에서 팔랑크스와 유사한 형태의 대형이 발견된다. 독수리 비석에는 기원전 25세기 수메르 병사들이 창, 투구, 몸 전체를 덮는 방패를 갖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2] 호메로스는 '팔랑크스'(φαλαγξ|팔랑크스grc)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조직적인 전투 대형으로 싸우는 호플리테스를 묘사했다.[2]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 대형과 호플리테스의 선구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방패 벽과 창 울타리의 원칙은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사성이 확산보다는 수렴 진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기원을 기원전 8세기 스파르타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7세기 고대 아르고스에서 아스피스가 도입된 이후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기원전 6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키지 항아리에서 아스피스, 창, 투창 등으로 무장한 호플리테스를 묘사하고 있어 더욱 입증된다.[2]
고대 그리스의 고졸기와 고전기(기원전 800–350년경)의 중장보병 팔랑크스는 중장보병들이 밀집 대형으로 줄을 서는 전술이었다. 중장보병들은 방패를 맞물리고, 앞쪽 몇 줄의 병사들은 첫 줄의 방패 위로 창을 내밀었다. 팔랑크스는 적에게 방패 벽과 빽빽한 창날을 제시하여 정면 공격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더 많은 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팔랑크스 간의 전투는 평평한 평원에서 이루어졌으며, 험한 지형에서는 대열 유지가 어려웠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두 세력 중 하나가 도망치면서 끝났다.[4] 팔랑크스는 보통 걸음으로 전진했지만, 마지막에는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러한 느린 접근은 대형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5]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이 적에게 달려들어 돌격한 최초의 그리스인들이었다고 기록했다. 팔랑크스 창에는 뾰족한 엉덩이(소로테르)가 있어 쓰러진 적 병사를 마무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마케도니아식 장창보병대 전술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스파르테의 용병 장수 크산티포스는 카르케돈에 이 전술을 도입하여 한니발 장군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식 방진은 외적이 많지 않아 후계자 국가들이 방진에 더 의존하게 되었고, 경보병과 기병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필리포스 5세의 경우 로마 군단병의 유연성에 대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2. 1.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기원전 25세기 수메르의 독수리 비석에서 팔랑크스와 유사한 형태의 초기 묘사가 발견된다. 고대 이집트 보병 또한 이와 비슷한 대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호메로스는 '팔랑크스'(φαλαγξ|팔랑크스grc)라는 용어를 조직적인 전투 대형으로 싸우는 중장보병(호플리테스)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2]고대 그리스 팔랑크스의 기원은 기원전 8세기 스파르타로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 고대 아르고스에서 아스피스 방패가 도입된 이후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2] 이는 기원전 6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키지 항아리에서 아스피스, 창, 투창 등으로 무장한 호플리테스를 묘사하고 있어 더욱 입증된다.[2]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팔랑크스를 활용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이는 시민병들의 결속력과 전술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2. 2.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필리포스 2세는 테베에서 인질 생활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피크라테스의 군제 개혁을 참고하여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를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마케도니아 군은 기존의 밀집 방진을 개량하여, 6미터 길이의 창 (사리사)을 가진 보병으로 16열 × 16열의 집단을 1 신타그마로 구성했다. 이 신타그마가 옆으로 늘어서면서 방진을 형성했다.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의 보병은 비교적 가벼운 갑옷과, 목에서 걸어 팔에 거는 작은 방패를 장비했다. 또한, 양손으로 긴 창을 지탱할 수 있게 된 것도 효과가 컸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사리사는 그 길이와 무게 때문에 양손으로만 다룰 수 있었다).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본대 보병 우익에 상비 근위 보병을, 좌익에는 징집된 경장 보병을 배치했다. 우익에는 돌격에 뛰어난 헤타이로이 기병, 좌익에는 테살리아 기병을 배치하고, 전위는 활이 주 장비인 보병과 경기병이 담당했다. 좌익에서 방어하는 동안, 우익에서 적 전열 파괴를 하는 전술은 측면 공격에 약한 기존 팔랑크스를 압도했다. 이처럼 한쪽 날개로 지키고, 다른 한쪽 날개를 타격 부대로 하는 전술은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불린다.[1]
필리포스 2세는 이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를 바탕으로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등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을 격파했으며,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툰 디아도코이에게 계승되었다. 디아도코이 간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간의 싸움이 되었고, 그들은 창을 더욱 길게 하거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갑옷을 중장비로 하는 등 다른 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려 했다.[2]
그러나 이러한 개량은 유연성 및 기동력의 더욱 큰 저하로 이어졌다. 후에 이러한 결점과 기동력을 보완할 기병의 부족 등으로 인해 로마 군단에게 패하게 된다.[3]
2. 3. 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팔랑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전성기를 누린 후, 팔랑크스는 헬레니즘 계승 국가들이 쇠퇴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사용된 혼성 부대 전술은 점차 호플리테 팔랑크스의 더 단순한 정면 돌격 전술로 회귀하면서 대체되었다. 지원 부대와 기병의 비용, 그리고 용병의 광범위한 사용은 디아도코이가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팔랑크스 대 팔랑크스 전술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디아도코이와 팔랑크스의 쇠퇴는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 군단의 부상과 관련이 있었다. 카우디움 협곡 전투는 로마 팔랑크스의 경직성을 삼니테에 비해 보여주었다. 로마인들은 원래 팔랑크스를 사용했었지만 점차 더 유연한 전술로 진화했다. 그 결과 로마 공화국 중기, 즉 마니풀룸 시스템의 3열 로마 군단이 탄생했다. 로마인들은 세 번째 군사 대열인 ''트리아리''에 팔랑크스를 사용했다. 이들은 ''하스타'' 또는 창으로 무장한 베테랑 예비군이었다.[26] 로마는 다양한 그리스 도시 국가 및 동맹과 함께 헬레니즘 계승 국가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 국가들이 존재를 멈추면서 전통적인 팔랑크스를 사용하던 군대도 사라졌다. 그 후, 이 지역의 병사들은 로마 모델을 사용하여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받았으며 전투를 벌였다.
풀콘이라는 팔랑크스 대형이 후기 로마 군대와 비잔틴 군대에 등장했다. 그것은 고전적인 그리스와 헬레니즘 팔랑크스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유연했다. 그것은 보병보다 기병에 대항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팔랑크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피드나 (기원전 168년), 키노스케팔레 (기원전 197년), 마그네시아 (기원전 190년)와 같은 로마 군대와 헬레니즘 팔랑크스 간의 일부 전투에서 팔랑크스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심지어 로마 보병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키노스케팔레와 마그네시아에서는 팔랑크스의 측면을 방어하지 못한 것이 패배로 이어졌다. 피드나에서는 후퇴하는 로마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팔랑크스가 응집력을 잃었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대형을 뚫고 들어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로마의 근접전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팔랑크스에 대한 로마 군단의 효과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로마인들이 팔랑크스가 효과적인 곳에서는 팔랑크스와 싸우는 것을 거부하고, 군단이 팔랑크스의 경직성과 부동성을 이용할 수 있을 때만 전투를 제안했다고 추론한다.
3. 구성 및 전술
고대 그리스의 고졸기와 고전기의 중장보병 팔랑크스는 중장보병들이 밀집 대형으로 줄을 서는 전술이었다. 중장보병들은 방패를 맞물리고, 앞쪽 몇 줄의 병사들은 첫 줄의 방패 위로 창을 내밀어 적에게 방패 벽과 빽빽한 창날을 제시하여 정면 공격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4]
두 팔랑크스 간의 전투는 일반적으로 전진과 대형 유지가 쉬운 평평한 평원에서 이루어졌다. 험한 지형에서는 안정적인 대열 유지가 어려워 팔랑크스의 목적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전투는 주로 적합한 땅을 찾아 이루어졌으며, 전투는 한쪽이 도망치면서 끝났다.[4]
팔랑크스는 보통 걸음 속도로 전진했지만, 마지막에는 속도를 냈다. 이는 대형 유지를 위한 것이었으며, 대형을 잃으면 적에게 취약해졌다. 속도 증가는 초기 충돌 시 기세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5]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의 그리스인들이 적에게 달려든 최초의 그리스인들이라고 언급했으며, 이는 페르시아 궁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팔랑크스 창에는 뾰족한 엉덩이()가 있어 쓰러진 적 병사를 마무리했다.
"신체적 밀어내기 싸움" 이론은 전투가 최전선 병사들의 용맹에 의존하며, 후방 병사들은 방패로 압력을 가해 적 대형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고대 자료 해석에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빅터 데이비스 핸슨 등은 깊은 팔랑크스 대형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한다.[7]
그리스 미술 작품에는 밀어내기 싸움이 묘사되지 않아, 이 가설은 추측의 산물이며 학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밀다"는 그리스어는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어, 신체적 밀어내기를 의미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오티스모스''(밀어내기)가 신체적 밀어내기를 의미한다면, 깊은 팔랑크스가 항상 승리해야 하지만, 얕은 팔랑크스가 버틴 예도 있다. 델리움 전투에서 8열 깊이 아테네 좌익은 25열 깊이 테베 대형을 막아냈다.[8] 애드리안 골즈워디는 밀어내기 싸움 모델이 사상자 수치나 대규모 병력 이동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9]
각 호플리테는 왼팔에 방패를 들어 자신과 왼쪽 병사를 보호했기 때문에, 오른쪽 병사들은 절반만 보호받았다. 전투에서 팔랑크스는 적 오른쪽 측면을 노렸고,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네메아의 스파르타는 이를 이용하려 했지만,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다.[10]
팔랑크스 각 열에는 지도자가 있었고, 뒤쪽에는 (꼬리 지도자)가 질서를 유지했다. 호플리테는 서로 신뢰해야 했고, 약한 요소만큼만 강했다. 효과는 대형 유지 능력에 달려 있었고, 친구와 가족을 가까이 배치하여 심리적 동기를 부여했다. 군대 훈련도와 용맹성이 중요했으며, 그리스 도시 국가 간 교전은 한쪽이 도망치는 것으로 해결되기도 했다. ("싸우려는 의지")는 대형 유지 힘을 표현한다.
3. 1. 무장
호플리테는 2.4m 길이의 도리라는 창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이 창은 한 손으로 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아스피스라는 방패를 들었다.[12] 창 머리는 잎사귀 모양이었고, 뒤쪽에는 ('도마뱀 살해자')라는 뾰족한 부분이 있어 창을 땅에 세우거나 보조 무기로 사용했다.[12] 크시포스라는 단검이나 코피스라는 굽은 칼도 보조 무기로 휴대했다.[20]호플리테의 갑옷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청동 흉갑, 투구, 경갑 등을 착용했지만,[13] 후기에는 린토락스(접착된 린넨 층)나 가죽 코르셋으로 대체되기도 했다.[14][15] 크세노폰은 더 무거운 갑옷이 여전히 존재했다고 언급했다.[16]
호플리테는 아스피스라는 지름 약 1미터(3.3피트)의 원형 방패를 휴대했다. 이 방패는 나무로 만들어져 청동으로 덮여 있었고, 무게는 였다.[21]
마케도니아 왕국의 팔랑기테스는 사리사라는 더 긴 창을 사용했다. 사리사는 약 4.27m 이상, 약 5.49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양손으로 사용했다.[12] 팔랑기테스는 왼팔에 펠테라는 작은 방패를 묶거나, 가죽 끈으로 어깨에 매달았다.
3. 2. 부대 편성
(줄, 보통 8~16명 규모) 또는 ("맹세한", 2~4개의 로 구성되어 총 32명까지 가능)는 그리스 군대의 기본 전투 단위였으며, 두 단위 모두 가 지휘하고 한 명과 (단수형 ) 두 명이 보조했다. 4개에서 최대 32개의 (시대 또는 도시에 따라 다름)가 로코스를 형성했고, 이를 로카고스가 지휘했는데, 초기에는 100명의 중장보병에서 후기 헬레니즘 시대 군대에서는 최대 500명까지 이르렀다. (스파르타의 경우 모라)는 500명에서 1,500명 규모의 최대 표준 중장보병 부대였으며, 스트라테고스(장군)가 지휘했다. 전체 군대는 여러 개의 또는 로 구성되었고, 장군 회의에서 지휘했다. 최고 사령관은 일반적으로 또는 라고 불렸다.크세노폰 시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 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1]
- 12명 1열 × 3열 종대(36명)로 1개 에노모티아[1]
- 2개 에노모티아로 1개 펜테코스투스[1]
- 2개 펜테코스투스로 1개 로코스[1]
- 4개 로코스(=16개 에노모티아)로 1개 모라[1]
- 6개 모라로 1개 군단을 편성하며, 그 최우익에는 총사령관인 스파르타 왕이 포진한다.[1]
폴리스마다 구체적인 편성은 변화했지만, 부대 편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 에노모티아: 최소 편성 단위로, 25~36명의 병사로 편성되며, 전투 시에는 8~12열의 종심을 이루는 3열 종대로 행진한다.[2]
- 펜테코스투스(50인대): 2개 에노모티아로 편성. 펜테코스투스의 대장은 직솔하는 에노모티아의 대장도 겸임한다.[2]
- 로코스: 2~4개 펜테코스투스로 편성.[2]
- 모라: 스파르타 고유의 편성 단위. 4개 로코스로 편성된다.[2]
고대 마케도니아 군은 6m 길이의 창 (사리사)을 가진 보병으로 16열 × 16열의 집단을 1 신타그마로 구성, 이 신타그마가 옆으로 늘어서면서 방진을 형성했다.[3]
3. 3. 전술적 운용
고대 그리스의 고졸기와 고전기(기원전 800–350년)의 중장보병 팔랑크스는 중장보병들이 밀집 대형으로 줄을 서는 전술이었다. 중장보병들은 방패를 맞물리고, 앞쪽 몇 줄의 병사들은 첫 줄의 방패 위로 창을 내밀었다. 따라서 팔랑크스는 적에게 방패 벽과 빽빽한 창날을 제시하여 정면 공격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주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앞줄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4]두 팔랑크스 간의 전투는 일반적으로 전진하고 대형을 유지하기 더 쉬운 평평한 평원에서 이루어졌다. 험한 지형이나 언덕이 많은 지역에서는 안정적인 대열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팔랑크스의 목적을 무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4]
팔랑크스는 보통 걸음 속도로 전진했지만, 마지막 몇 야드 동안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러한 느린 접근 방식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팔랑크스가 적에게 접근하면서 대형을 잃으면 쓸모가 없게 되며, 심지어 전진하는 부대에 해가 되어 적 부대가 뚫고 들어가기 쉬운 약한 대형을 만들 수 있었다. 팔랑크스의 중장보병이 전진의 후반부에서 속도를 높여야 했다면, 이는 초기 충돌 시 적에 대한 기세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5]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아는 한, 적에게 달려들어 돌격한 최초의 그리스인들이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러한 적응이 페르시아 궁술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그들의 열망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믿는다.
팔랑크스의 창에는 뾰족한 엉덩이(소로테르)가 있었다. 전투에서, 후방 대열은 소로테르를 사용하여 쓰러진 적 병사를 마무리했다.
"신체적 밀어내기 싸움" 이론은 전투가 최전선에 있는 병사들의 용맹에 의존하는 이론으로, 후방의 병사들은 방패로 전열에 압력을 가하고, 전체 대형은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앞으로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 자료에 대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므로 두 개의 팔랑크스 대형이 교전했을 때, 그 싸움은 본질적으로 밀어내기 싸움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어 φάλαγξ|팔랑크스grc는 굴림대로 사용된 통나무나 통나무를 가리킬 수 있으며, 신체적인 노력을 연상시킨다.[6])
빅터 데이비스 핸슨과 같은 역사가들은 이 이론이 묘사하는 신체적인 밀어내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깊은 팔랑크스 대형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처음 두 열 뒤에 있는 병사들은 실제 창으로 찌르는 데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깊은 팔랑크스 대형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7]
어떤 그리스 미술 작품도 팔랑크스 밀어내기 싸움과 같은 것을 묘사하지 않으므로, 이 가설은 동시대 자료의 명시적인 증언이 아닌, 교육받은 추측의 산물이며, 학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밀다"에 대한 그리스어는 영어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과 동일한 비유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수사학적 논쟁의 과정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반드시 문자 그대로의 신체적 밀어내기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
예를 들어, ''오티스모스''(밀어내기)가 신체적 밀어내기 싸움을 정확하게 묘사한다면, 더 깊은 팔랑크스가 항상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개인의 신체적 힘은 적 측에 단 하나의 열이 추가되는 것조차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얕은 팔랑크스가 상대를 막아낸 예는 많다. 예를 들어, 기원전 424년 델리움 전투에서 아테네의 좌익, 즉 8열 깊이의 대형이 즉시 붕괴되지 않고 25열 깊이의 테베 대형을 막아냈다.[8] 신체적 밀어내기 모델로는 8명의 병사가 25명의 상대방의 밀어내는 힘을 몇 초 동안, 심지어 전투의 절반 동안이나 견딜 수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주장은 신체적 밀어내기 이론가들에 대한 반대 비판의 물결을 일으켰다. 애드리안 골즈워디는 그의 논문 "오티스모스, 신화와 이단: 호플리테 전투의 본질"에서 신체적 밀어내기 싸움 모델은 호플리테 전쟁의 평균 사상자 수치나 전투에서 대규모 병력 대형을 이동시키는 실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9] 이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호플리테 팔랑크스는 보통 8명 이상의 대열로 배치되었으며,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보통 16명 깊이였고, 때로는 32명 깊이로 배치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주목할 만한 극단적인 예도 있다. 레욱트라 전투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좌익을 정예 호플리테 50열 깊이의 "해머헤드" 형태로 배치했고(아래 참조), 깊이가 덜 중요했을 때는 마라톤 전투에서처럼 팔랑크스가 4열 깊이로 기록되기도 했다.[22]
팔랑크스의 깊이는 그 순간의 필요와 장군의 계획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팔랑크스가 행군할 때는,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느슨한, 문자 그대로 "깊이"를 의미) 대형이 채택되었다. 이는 또한 초기 전투 대형이기도 했는데, 아군의 공격이나 후퇴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팔랑크스는 일반적인 깊이의 두 배였으며, 각 호플리테는 폭 약 1.8m를 차지해야 했다. 적 보병이 접근하면 () 대형(밀집 또는 빽빽한 대형)으로 빠르게 전환해야 했다. 이 경우 각 병사의 공간은 절반으로 줄었고 대형 깊이는 정상으로 돌아갔다. 더 밀집된 대형인 또는 (초밀집 또는 방패 결합 대형)는 팔랑크스가 추가적인 압력, 격렬한 미사일 일제 사격 또는 전면 기병 돌격을 겪을 것으로 예상될 때 사용되었다. 에서 열 깊이는 일반 팔랑크스의 절반이었고 각 병사가 차지하는 폭은 0.45m만큼 작았다.
호플리테스 전투의 여러 단계를 정의할 수 있다.
- (에포도스): 호플리테스는 ''파이안''(전투 찬가)을 부르는 것을 멈추고 적을 향해 이동하며, 점차 속도와 탄력을 높인다. 충돌 직전에는 함성(, 단수 )을 질렀다. 주목할 만한 함성은 아테네()와 마케도니아()의 였다.
- (크루시스): 상대 팔랑크스가 전선을 따라 거의 동시에 만난다.
- (도라티스모스):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창을 빠르게 반복적으로 찌르는 행위. 긴 창을 사용하면 적을 멀리 떨어뜨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줄에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동료를 도울 수 있었다. 찌르기는 또한 동료가 창으로 찌를 수 있도록 사람을 노출시킬 수도 있었다. 너무 세게 찌르면 창이 방패에 박힐 수 있었는데, 이 경우 무장 해제된 사람에게 뒤에 있는 사람이 창을 빌려줘야 했다.
- (오티스모스): 문자 그대로 "밀치기"로, 대부분의 창이 부러진 후 호플리테스는 창과 창 자루로 상대의 방패를 밀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장 긴 단계일 수 있다.
아래: 사선 대형은 테베의 에파미논다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강력한 좌익이 전진하는 동안 약한 우익은 후퇴하거나 정지했습니다.

팔랑크스의 초기 역사는 경쟁적인 그리스 폴리스의 중장 보병 군대 간의 전투에 관한 것이었다. 보통 결과는 거의 동일하여, 유연하지 못한 대형이 서로 밀어붙이다가 한쪽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팔랑크스가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은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에서 입증되었다. 훨씬 더 큰 다리우스 1세의 군대에 맞서 아테네는 팔랑크스를 얇게 만들고 그 결과 전선을 길게 늘려 포위당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심지어 얇아진 팔랑크스도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보병을 막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양 날개를 격파한 후 아테네 날개의 중장 보병들은 안쪽으로 돌진하여 페르시아 중앙의 엘리트 부대를 파괴했고, 아테네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동안 중장 보병 팔랑크스는 페르시아 보병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예: 테르모필레 전투와 플라타이아 전투).
아마 팔랑크스의 진화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사선 대형이었으며, 이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유명해졌다. 그곳에서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우익과 중앙을 얇게 하고 좌익을 50명 깊이로 깊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우익이 가장 강력하다는 관습을 뒤집었다. 이것은 테베인들이 상대 팔랑크스의 우익에 있는 엘리트 스파르타 군대를 강력하게 공격할 수 있게 했다. 한편, 테베 선의 중앙과 우익은 상대 팔랑크스에서 물러나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약화된 대형 부분이 교전되지 않도록 했다. 스파르타의 우익이 테베의 좌익에 의해 격파되자 나머지 스파르타 선도 무너졌다. 이처럼 에파미논다스는 중장 보병의 공격력을 국소화하여 이전에 무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인질로 테베에서 몇 년을 보냈고, 에파미논다스의 혁신에 주목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리스 세계의 모습을 바꿀 혁신적인 새로운 보병 부대를 소집했다. 필리포스의 팔랑기테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하고 고대 그리스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전문 군인이었다. 그들은 더 긴 창 (사리사)으로 무장했고, 더 발전되고 복잡한 전술과 기동 훈련을 더 철저히 받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필리포스의 팔랑크스는 다양한 산병과 기병, 특히 유명한 친위 기병을 포함한 다면적이고 결합된 부대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이제 적의 중앙선을 묶어두는 데 사용되었고, 기병과 더 기동적인 보병은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리스 폴리스가 내세운 더 정적인 군대에 대한 우위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보여졌는데, 필리포스 2세의 군대는 연합한 테베와 아테네 팔랑크스를 격파했다.
4. 한계 및 쇠퇴
팔랑크스는 기동성이 부족하고 측면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4] 특히, 팔랑크스 중심의 전술은 지원 부대가 부족할 경우 주 전선이 돌파되거나 측면이 무력화되면 쉽게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다.[12]
아테네의 장군 이피크라테스는 레카이움 전투에서 경장 보병(펠타스타이)을 활용하여 스파르타의 중장 보병을 격파하는 전술을 선보였다.[24] 그는 경장 보병의 투창과 활 공격으로 스파르타 군을 약화시킨 후, 증원군을 보내 스파르타 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궤주시켰다.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사선 대형을 활용하여 스파르타 군을 격파했다. 그는 팔랑크스의 좌익을 강화하고 우익과 중앙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스파르타 군의 우익을 집중 공격하여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하여 아테네와 테베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는 팔랑크스로 적의 중앙을 묶어두고, 기병과 경보병으로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로마 군단은 마니풀룸(Maniple) 시스템과 같은 유연한 전술을 통해 팔랑크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와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 군단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상대로 승리했는데, 이는 로마 군단의 유연성과 근접전 능력이 팔랑크스의 약점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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