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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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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상대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네 호수 전투,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며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패배하고 자마 전투에서 패하며 카르타고로 소환되었다. 이후 그는 정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망명 생활을 하다 자살했다. 한니발의 전술은 로마군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군사 전략의 중요한 사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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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니발 - 제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8년부터 201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을 계기로 시작되어 그의 이탈리아 침공과 로마의 저항 끝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활약으로 로마가 승리하며 지중해 패권을 확고히 하고 카르타고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 기원전 247년 출생 - 전한 고제
    진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워 초한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전한 고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민생 안정에 힘썼다.
한니발
기본 정보
이름한니발 바르카
로마자 표기Hannibal Barca
출생기원전 247년
출생지카르타고, 고대 카르타고, 튀니지
사망기원전 183년 ~ 181년 (향년 64~66세)
사망지리비사, 비티니아
신분군인, 정치인
국적카르타고 (기원전 221년 ~ 202년)
셀레우코스 제국 (기원전 198년 ~ 188년)
비티니아 왕국 (기원전 188년 ~ 181년)
배우자임일케
자녀하스파르 (추정)
친척하밀카르 바르카 (아버지)
하스드루발 (형제)
마고 (형제)
하스드루발 페어 (매형)
카푸아에서 발견된 한니발 흉상
카푸아 흉상, 한니발의 것으로 추정됨
한니발 조각상
한니발의 대리석 조각상
군사 경력
소속카르타고 제국
최종 계급카르타고 군 총사령관
참전 전쟁바르카의 히스파니아 정복
제2차 포에니 전쟁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페르가몬-비티니아 전쟁
주요 전투사군툼 공성전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
실라루스 전투
헤르도니아 전투
자마 전투
기타
별명전략의 아버지
지도

2.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지도자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오늘날 튀니지 북부에 위치한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카르타고는 레바논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지역인 페니키아에서 온 가나안인들이 식민지화한 곳이었다.[10]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어린 한니발은 아버지에게 함께 이베리아반도 원정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하밀카르는 한니발에게 살아있는 동안 로마와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매우 어린 나이(9세)에 해외 전쟁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니발의 아버지는 그를 제단으로 데려갔고, 하밀카르는 한니발을 방 안에서 타오르는 불 위에 올려놓고 로마와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다른 자료에는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나이가 허락하는 대로... 나는 불과 강철을 사용하여 로마의 운명을 막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13][14] 전통에 따르면, 한니발의 맹세는 오늘날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일부인 페니스콜라 마을에서 이루어졌다.[15]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가데스의 지원을 받아 이베리아 반도의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르타고는 군대를 수송할 수 있는 해군이 부족했기에, 하밀카르는 군대를 누미디아를 거쳐 헤르쿨레스의 기둥까지 행군한 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야 했다.[12]

아버지 하밀카르가 전투에서 사망하자,[16] 한니발의 매제인 하스드루발이 군대 지휘권을 계승했고, 한니발(당시 18세)은 그의 부하 장교로 복무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이익을 통합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로마와 조약을 체결하여 카르타고는 로마가 남쪽으로 확장하지 않는 한 에브로 강 북쪽으로 확장하지 않기로 했다.[17]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26세가 된 한니발은 군대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선포되었고 카르타고 정부에 의해 그의 임명이 확정되었다.

2. 1. 하밀카르 장군의 아들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6] 여러 명의 누이와 하스드루발, 마고라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11]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카르타고에서도 해외 식민지 경영을 중요시하는 해외파에 속하는 명문 가였으며 아버지 역시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로마에 맞섰던 인물이었다.

1850년경 찰스 터너(Charles Turner)가 그린 '젊은 한니발'(왼쪽) 판화


한니발은 셈족(Semitic) 페니키아-카르타고계 이름이었다. 카르타고 자료에는 𐤇𐤍𐤁𐤏𐤋|흐느브을xpu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페니키아 남성 이름인 한노(Hanno)와 셈어(Northwest Semitic) Canaan 신인 바알(Baal)의 결합으로, 카르타고인들의 조상 땅인 페니키아(Phoenicia)의 주요 신이었다. 정확한 발음은 이견이 있는데, "바알/주님은 자비로우시다", "바알이 자비로우셨다",[3][4] 또는 "바알의 은총"을 의미한다.[5] 이는 셈족의 히브리어 이름인 하니엘(Haniel)과 같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이 이름을 ''Anníbas'' (Ἀννίβαςgrc)로 표기했다.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들은 세습적인 성을 사용하지 않았고, 별칭(epithet)을 사용했다. 그는 "함일카르의 아들 한니발" 또는 "바르카 가문의 한니발"로 불렸다. ''바르카(Barca)'' (𐤁𐤓𐤒|브르크xpu)는 "번개" 또는 "천둥"을 의미하는 셈족(Semitic) 관칭(cognomen)으로,[6] 함일카르가 그의 공격의 신속함과 맹렬함 때문에 얻은 성이다.

바르카는 이스라엘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아람인, 아랍인, 아모리인, 모압인, 에돔인 및 기타 아시아 셈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번개에 대한 유사한 이름과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7] 함일카르의 자손들은 바르카 가문(Barcids)으로 알려져 있다.[8]



한니발은 카르타고 지도자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중 한 명이었으며,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오늘날 튀니지 북부에 위치한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카르타고는 레바논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에 해당하는 지역인 페니키아에서 온 가나안인들이 식민지화한 곳이다. 그가 당시 카르타고의 일부였던 몰타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덜 지지받는 이론이다.[10] 그는 자매들이 결혼했을 때 아직 어린아이였으며, 그의 매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용병 전쟁과 이베리아 반도 정복에서 싸우는 동안 가까운 동료였다.[11]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가데스의 지원을 받아 이베리아 반도(현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르타고는 그의 군대를 수송할 수 있는 해군이 부족했기에, 하밀카르는 그의 군대를 누미디아를 거쳐 헤르쿨레스의 기둥까지 행군한 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야 했다.[12]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아버지에게 함께 가도록 간청했고, 하밀카르는 한니발에게 살아 있는 동안 로마와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매우 어린 나이(9세)에 아버지에게 해외 전쟁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한니발의 아버지는 그를 제단으로 데려갔다. 하밀카르는 한니발을 방 안에서 타오르는 불 위에 올려놓고 로마와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다른 자료에는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나이가 허락하는 대로...나는 불과 강철을 사용하여 로마의 운명을 막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13][14] 전통에 따르면, 한니발의 맹세는 오늘날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일부인 페니스콜라 마을에서 이루어졌다.[15]

한니발의 아버지는 히스파니아 정복을 계속했다. 그의 아버지가 전투에서 죽자,[16] 한니발의 매제인 하스드루발이 그의 군대 지휘권을 계승했고, 한니발(당시 18세)은 그의 부하 장교로 복무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이익을 통합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로마와 조약을 체결하여 카르타고는 로마가 남쪽으로 확장하지 않는 한 에브로 강 북쪽으로 확장하지 않기로 했다.[17]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원주민 부족과 북아프리카 연안의 원주민 베르베르인들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카르타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18]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26세가 된 한니발은 군대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선포되었고 카르타고 정부에 의해 그의 임명이 확정되었다. 로마 학자 리비우스는 젊은 카르타고 장군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도착하자마자...늙은 병사들은 마치 젊은 시절의 하밀카르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밝은 눈빛, 똑같은 눈 속의 불꽃, 똑같은 표정과 얼굴 특징. 반대에 맞서고, 복종하고, 명령하는 데 있어 더욱 능숙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18]

후안 데 디오스 데 라 라다가 그린 1868년 이밀케와 그의 아들 하스파르 바르카의 그림


리비우스는 또한 한니발이 카르타고와 긴밀히 동맹을 맺은 강력한 스페인 도시 카스툴로의 여성과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 로마 서사시 작가 실리우스 이탈리쿠스는 그녀의 이름을 이밀케라고 한다.[19] 실리우스는 이밀케의 기원을 그리스로 추정하지만, 질베르 샤를-피카르는 셈어 어근 m-l-k('지도자', '왕')에서 유래한 어원을 바탕으로 푸니크 유산을 주장했다.[20] 실리우스는 아들의 존재를 암시하지만,[21] 리비우스, 폴리비오스 또는 아피아누스는 그를 기록하지 않았다. 아들의 이름은 하스파르 또는 아스파르였을 수도 있지만,[22]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3]

한니발은 지휘권을 맡은 후 2년 동안 그의 영토를 통합하고 에브로 강 남쪽의 히스파니아 정복을 완료했다.[24] 그의 첫 번째 원정에서 한니발은 올카데스의 가장 강력한 중심지인 알리티아를 공격하고 함락하여 즉시 항복을 받아냈고, 푸니크의 세력을 타구스 강 근처까지 가져왔다. 기원전 220년 그의 다음 원정은 서쪽의 바케아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바케아이의 거점인 헬만티케와 아르부칼라를 함락했다. 많은 전리품을 싣고 귀환하던 중, 카르페타니가 이끄는 스페인 부족 연합이 공격해왔고, 한니발은 타구스 강 전투에서 그의 첫 번째 주요 전투 승리를 거두고 그의 전술적 기술을 과시했다.[25]

이베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로마는 에브로 강 남쪽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는 사군토 도시와 동맹을 맺고 그 도시를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한니발은 이것을 하스드루발과 체결한 조약 위반으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로마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전쟁을 시작할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군토를 포위했고, 8개월 만에 함락되었다.[26]

한니발은 사군토에서 얻은 전리품을 카르타고로 보냈는데, 이는 정부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은 현명한 조치였다. 리비우스는 한노 2세만이 그에게 반대했다고 기록한다.[18] 로마에서는 상원이 이러한 조약 위반에 대해 카르타고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한니발이 카르타고의 명령에 따라 사군토를 파괴했는지 여부를 요구했다. 카르타고 상원은 위반되었다고 주장하는 조약에 대해 양국 정부 모두 비준하지 않았다는 법적 주장으로 답변했다.[27] 사절단의 지도자였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르쿠코수스는 카르타고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그의 청중은 로마가 선택할 수 있다고 답했다. 파비우스는 전쟁을 선택했다.[18]

2. 2. 이베리아반도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로마에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한다. 전쟁 패배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대농장 지주들 위주로 구성된 내부파들과의 정쟁에서 밀려 쫓겨났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며, 실제로도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본국의 지원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갔고 광산 경영에 성공하면서 카르타고 역시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며 로마를 두렵게 하였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시칠리아가 로마 공화정의 속주가 되고, 로마 공화정과 모국인 카르타고가 무역을 하는 관계가 된 시기 동안 에스파냐의 과달키비르 강 유역을 정복한 후에, 라틴어로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뜻인 카르타고 노바(Carrthago Nova) 또는 카르타헤나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국가였으므로, 로마 공화정은 카르타고의 힘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훗날 아버지에게 함께 가도록 간청했고, 하밀카르는 동의하고 한니발에게 살아있는 동안 로마와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매우 어린 나이(9세)에 아버지에게 해외 전쟁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니발의 아버지는 그를 제단으로 데려갔고, 하밀카르는 한니발을 방 안에서 타오르는 불 위에 올려놓고 로마와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다른 자료에는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나이가 허락하는 대로... 나는 불과 강철을 사용하여 로마의 운명을 막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13][14] 전통에 따르면, 한니발의 맹세는 오늘날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일부인 페니스콜라 마을에서 이루어졌다.[15]

한니발의 아버지는 히스파니아 정복을 계속했다. 그의 아버지가 전투에서 죽자,[16] 한니발의 매제인 하스드루발이 군대 지휘권을 계승했고, 한니발(당시 18세)은 그의 부하 장교로 복무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이익을 통합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로마와 조약을 체결하여 카르타고는 로마가 남쪽으로 확장하지 않는 한 에브로 강 북쪽으로 확장하지 않기로 했다.[17]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26세가 된 한니발은 군대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선포되었고 카르타고 정부에 의해 그의 임명이 확정되었다.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카르타고와 긴밀히 동맹을 맺은 강력한 스페인 도시 카스툴로의 여성과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 로마 서사시 작가 실리우스 이탈리쿠스는 그녀의 이름을 이밀케라고 한다.[19] 실리우스는 아들의 존재를 암시하지만,[21] 리비우스, 폴리비오스 또는 아피아누스는 그를 기록하지 않았다. 아들의 이름은 하스파르 또는 아스파르였을 수도 있지만,[22]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3]

한니발은 지휘권을 맡은 후 2년 동안 그의 영토를 통합하고 에브로 강 남쪽의 히스파니아 정복을 완료했다.[24] 그의 첫 번째 원정에서 한니발은 올카데스의 가장 강력한 중심지인 알리티아를 공격하고 함락하여 즉시 항복을 받아냈고, 푸니크의 세력을 타구스 강 근처까지 가져왔다. 기원전 220년 그의 다음 원정은 서쪽의 바케아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바케아이의 거점인 헬만티케와 아르부칼라를 함락했다. 많은 전리품을 싣고 귀환하던 중, 카르페타니가 이끄는 스페인 부족 연합이 공격해왔고, 한니발은 타구스 강 전투에서 그의 첫 번째 주요 전투 승리를 거두고 그의 전술적 기술을 과시했다.[25]

이베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로마는 에브로 강 남쪽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는 사군토 도시와 동맹을 맺고 그 도시를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한니발은 이것을 하스드루발과 체결한 조약 위반으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로마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전쟁을 시작할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군토를 포위했고, 8개월 만에 함락되었다.[26]

한니발은 사군토에서 얻은 전리품을 카르타고로 보냈는데, 이는 정부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은 현명한 조치였다.

3.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의 침입로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키웠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9살 때 타니트 신에게 로마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은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으나,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이 로마에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동맹 세력으로 삼기 위해 북이탈리아에서 전투를 벌이고 싶어했다.[28]

이베리아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한니발의 경로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은 기원전 229년 그의 매형인 하스드루발이 계획한 것이었다.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와 포 계곡 켈트족의 동맹, 그리고 켈트족의 이탈리아 침략 계획을 알고 있었다. 이에 로마는 기원전 225년 포 지역을 선제 침략, 기원전 220년에는 키살피나 갈리아로 병합했다.[29]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늦봄, 스페인 카르타헤나(뉴 카르타헤나)를 출발, [30] 북부 부족들을 진압하고 4만 명의 보병과 1만 2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갈리아에 진입했다.[31] 그는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그리고 많은 강을 건너야 했고,[32] 갈리아 족의 방해를 받았다. 기원전 218년 봄, 피레네 산맥을 넘어 9월까지 론 강에 도착했지만, 3만 8천 명의 보병, 8천 명의 기병, 38마리의 코끼리 중 대부분이 알프스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했다.[33]

하인리히 로이테만이 그린 1866년 한니발과 그의 군대가 알프스를 횡단하는 그림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 경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34]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이 알프스 고개 중 가장 높은 곳을 건넜다고 기록했고,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식초와 불을 사용하여 암석 낙하를 뚫는 등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기록했다.[43][44]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2만 명의 보병, 4천 명의 기병, 그리고 몇 마리의 코끼리만을 데리고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 역사학과 제공,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빨강)의 궤멸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포위 전술을 사용하여 5만~7만 명의 로마군을 사상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13] 여기에는 집정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였다.[55]

알프스 산맥을 넘는 한니발의 군대


한니발의 알프스산맥 횡단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이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보병 9만 명, 기병 1만 2천 명, 전투 코끼리 37마리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를 출발했다.[124]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몰아냈다.[47]

트레비아 전투에서 사용된 전술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이탈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로 향했다. 그는 로마군에게는 엄격했지만, 동맹 도시 포로는 정중하게 대우하고 석방하며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촉구했다. 이 전투 중 늪지 행군으로 인해 한니발은 전염병에 감염되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붉은색)의 파괴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초승달 전법으로 로마군을 대파, 로마를 궁지에 몰아넣는다.[55] 이 여파로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칸나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의 뛰어난 사례로 전쟁사에 기록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흉상


스키피오네 가의 묘지에서 발견된 흉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것일 가능성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 전략으로 한니발을 압박했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 시라쿠사, 타렌툼을 잃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최종 전투, 자마 전투 (기원전 202년)


로마는 풍부한 인적 자원과 국가적 단결을 바탕으로 카르타고를 압도했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략으로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본국으로 귀환,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 식민지 양도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항복을 요구하며 협상은 결렬되었다.[139]

1567년 코르넬리스 코르트 작 자마 전투 판화. 카르타고가 사용한 작은 북아프리카코끼리가 아닌 아시아코끼리 묘사.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은 기병, 카르타고군은 보병에서 우세했다. 로마 기병은 마시니사의 배신 덕분에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했고, 로마군은 나팔을 불어 코끼리를 놀라게 하는 전술 등으로 카르타고 전투 코끼리의 효과를 제한했다.[63]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기병 격파 후 한니발의 후방을 공격, 카르타고 진형을 붕괴시켰다. 카르타고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로마군은 2,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패배로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잃었다.

3. 1.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28세의 젊은 장군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알프스산맥을 넘었다. 하지만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126][127] 당시 로마 공화정은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공화정식민지였으므로,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 그 지역의 갈리아 민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어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반면,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다.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로마공화정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8]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한 한니발은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훗날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었지만, 이들은 모두 여름에 산맥을 넘었다. 더욱이 하스드루발과 나폴레옹은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지만, 한니발 이전에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행군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은 기원전 229년 그의 매형인 하스드루발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장군이 된 후 계획한 것이었다.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와 이탈리아 북부 포 계곡켈트족 사이의 동맹을 알게 되었고, 켈트족은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남쪽으로 침략할 계획이었다. 이에 로마는 기원전 225년에 선제적으로 포 지역을 침략했고, 기원전 220년에는 그 지역을 키살피나 갈리아로 병합했다.[29]

이 무렵(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면서 한니발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로마는 갈리아-카르타고 연합군의 침략 위협을 해결했고, 카르타고 사령관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착각에 빠진 것 같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늦봄에 스페인 카르타헤나(뉴 카르타헤나)를 출발했다.[30] 그는 북부 부족들을 거쳐 피레네 산맥 기슭까지 전투를 벌이며 부족들을 진압했다. 그는 새로 정복한 지역을 주둔시키기 위해 2만 명의 병력을 남겼고, 피레네 산맥에서 고향을 떠나기를 꺼리는 1만 1천 명의 이베리아 병력을 해산시켰다. 한니발은 4만 명의 보병과 1만 2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갈리아에 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1]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그리고 많은 큰 강을 건너야 했다.[32] 게다가 그는 지나가는 갈리아 족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기원전 218년 봄부터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로마가 그의 진격을 막기 전에 통과하는 갈리아 족장들을 회유함으로써 9월까지 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3만 8천 명의 보병, 8천 명의 기병, 그리고 38마리의 코끼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알프스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했다.[33]

한니발은 그의 횡단을 막으려 했던 원주민들을 제압했고, 지중해 연안에서 진군하는 로마군을 피해 론 강 계곡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했다.

그의 알프스 횡단 경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34]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 드롬 계곡을 따라 진군하고 몽제네브르 고개 위의 현대 고속도로 남쪽에 있는 주요 산맥을 횡단
  • 이제르와 아르크의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더 진군하여 현재 몽세니스 고개 또는 쁘띠 생 베르나르 고개 근처의 주요 산맥을 횡단


최근의 화폐 증거는 한니발의 군대가 마터호른이 보이는 곳을 지났다는 것을 시사한다.[35] 스탠퍼드 지구고고학자 패트릭 헌트는 한니발이 클라피에르 고개를 통과했다고 주장하며, 클라피에르 고개가 이탈리아의 넓은 전망, 연중 내내 눈이 내리는 곳, 그리고 큰 야영장 등 고대 경로의 묘사와 가장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한다.[36]

가장 최근에 W. C. 마하니는 트라베르세트 고개가 고대 저자들의 기록과 가장 잘 맞는다고 주장했다.[37] 생물층서 고고학적 자료는 트라베르세트 고개에 대한 주장을 강화했는데, 고개 정상 양쪽의 수로 근처 이탄 습지 분석 결과, "수천, 어쩌면 수만 마리의 동물과 인간에 의해" 지면이 심하게 교란되었고, 토양에는 말과 노새의 소화관과 관련된 독특한 수준의 ''클로스트리디움'' 박테리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38]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은 기원전 2168년 BP 또는 기원전 218년, 즉 한니발의 진군 년도를 확인했다. 마하니 등은 이것과 다른 증거들이 가빈 드 비어가 1954년에 주장했던 것처럼 트라베르세트 고개가 "한니발 경로"라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고 결론지었다. 드 비어는 알프스 고개를 모두 방문하고 어떤 고개가 가장 그럴듯한지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 세 명의 해석자 중 한 명이었다(나머지 두 명은 존 레이젠비와 야콥 자이베르트). 드 비어와 자이베르트 모두 고대 묘사와 가장 잘 일치하는 고개로 트라베르세트 고개를 선택했다.[39]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이 알프스 고개 중 가장 높은 곳을 건넜다고 적었다. 상부 기유 계곡과 상부 포 강 사이에 있는 트라베르세트 고개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게다가 그것은 가장 남쪽에 있는데, 바로가 그의 ''농업론''에서 한니발의 고개가 서알프스에서 가장 높고 가장 남쪽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 언급하고 있다. 마하니 등은 드 비어가 트라베르세트 고개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요소들을 고려하면, 한니발의 침략이 그렇게 진행되었다는 "뒷받침하는 증거, 즉 증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40] 만약 한니발이 트라베르세트 고개를 올라갔다면, 포 계곡은 고개 정상에서 실제로 보였을 것이고, 폴리비오스의 기록을 입증했을 것이다.[41][42]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횡단은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여 이루어졌다.[43] 한니발은 식초와 불을 사용하여 암석 낙하를 뚫는 등의 기발함으로 이를 극복했다.[44]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2만 명의 보병, 4천 명의 기병, 그리고 몇 마리의 코끼리만을 데리고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암석 낙하 사건은 리비우스에 의해서만 언급된다; 폴리비오스는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45] 폴리비오스가 론 강 횡단 후 지휘했던 병력 수에 대한 수치가 정확하다면, 그는 병력의 거의 절반을 잃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르주 랑셀과 같은 역사가들은 그가 히스파니아를 떠났을 때 보유했던 병력 수에 대한 수치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46]

3. 2. 한니발의 리더십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한니발이 피레네산맥알프스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눈병으로 한쪽 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을 베풀어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138]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이 과학 지식을 활용했다고 보았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 해소를 위해 식초를 휴대했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138]

한니발의 군대는 다양한 민족 출신의 용병으로 구성된 다국적 군대였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은 15년 이상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워야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내부 균열로 붕괴될 수 있었지만, 한니발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이들을 완벽하게 통솔했다.[138]

기원전 216년 봄,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포위 전술을 사용하여 로마군을 대파했다. 그는 로마군의 열의를 이용해 함정을 팠다. 가장 신뢰할 수 없는 보병을 반원 형태로 중앙에 배치하고, 양쪽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하여 로마군을 유인했다. 로마 군단이 중앙을 돌파하려 할 때, 리비아 용병들이 측면을 위협했고, 한니발의 기병 사령관 마하르발이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 기병을 격파한 후, 한노가 이끄는 이베리아와 갈리아 중기병과 함께 로마군을 뒤에서 공격하여 완전히 포위했다.

thumb들의 반지를 세고 있는 한니발, 1704년 세바스티앙 슬로츠의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

이 뛰어난 전술로 한니발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적군 대부분을 섬멸했다. 5만~7만 명의 로마군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13] 여기에는 집정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전년도 집정관 2명, 퀘스토르 2명, 군사 트리뷰누스 29명, 80명 이상의 상원의원이 포함되었다.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였다.[55]

한니발의 알프스산맥 횡단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이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보병 9만 명, 기병 1만 2천 명, 전투 코끼리 37마리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를 출발했다.[124] 피레네산맥을 넘어 갈리아에 진입한 후, 론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손실했지만, 알프스에 도착했을 때에도 보병 4만 6천 명과 전투 코끼리 30여 마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험난한 산악 지형과 추위, 갈리아 부족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한니발은 갈리아인들을 회유하고, "로마인들이 적이다"라고 설득하는 등 뛰어난 전략을 구사했다. 이탈리아 도착 당시 병력은 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으로 줄었지만, 로마 상원을 경악시키기에는 충분했다.[126] [127]

3. 3. 티키누스 전투와 트레비아강 전투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겼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47]

한니발의 위험천만한 알프스 횡단은 로마 영토로 진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포 계곡의 갈리아인들은 한니발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로마에 대한 충성에서 이탈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군을 지휘한 집정관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였다.[47]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스키피오는 갈리아에 있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한니발을 저지하려 시도했고, 빠른 이동을 통해 군대를 이탈리아로 해상 수송하여 한니발과 만났다. 한니발의 군대는 포 계곡을 지나 티키누스 전투에 참여했고, 여기서 한니발은 우수한 기병대 덕분에 로마군을 롬바르디아 평야에서 몰아냈다.[47] 이 승리는 갈리아인들과 리구리아인들이 카르타고에 합류하도록 고무시켰고, 한니발의 군대는 약 4만 명으로 늘어났다. 스키피오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의 아들이 쓰러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가 목숨을 건졌다. 스키피오는 트레비아 강 너머로 후퇴하여 플라켄티아에 진영을 쳤다.[47]

로마 집정관 군대는 포 계곡으로 급파되었다. 티키누스에서 패배 소식이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상원은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군대를 시칠리아에서 데려와 스키피오와 합류하고 한니발에 맞서도록 명령했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스키피오를 지원하기 위해 행군해야 할 플라켄티아와 아르미눔 사이의 직선 도로에 있었다. 한니발은 클라스티디움을 점령하여 많은 양의 보급품을 확보했다. 그러나 셈프로니우스는 한니발의 감시를 피해 트레비아 강 근처 플라켄티아 근처 그의 동료의 진영에 합류했다. 그해 12월, 한니발은 트레비아에서 우월한 로마 보병을 지치게 한 후, 기습 공격과 매복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전쟁 코끼리 대부분은 그 겨울 부상이나 추위로 죽었고,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및/또는 칸나이 전투에서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3. 4. 늪지대 통과와 트라시메네호 전투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전장을 옮기기로 결심한다. 남쪽으로 가는 두 길은 새로 선출된 집정관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막고 있었는데, 한니발은 이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 늪지대를 통과하는 길을 택한다. 이 늪지대는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무릎까지 물이 차 있었고, 병사들이 쉴 수 있는 막사를 짓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니발은 3일 밤낮 쉬지 않고 늪지대를 행군했고,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게 된다.[1]

한니발은 갈리아인들과 함께 겨울을 보냈는데, 갈리아인들의 지지가 약해지고 있었다. 갈리아 동맹군의 암살 시도를 우려한 한니발은 여러 가발을 만들어 나이가 다른 사람들의 외모에 맞춰 염색하고 끊임없이 바꿔 써서 암살자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다.[1] 기원전 217년 봄, 한니발은 더 남쪽에 있는 더 안정적인 작전 기지를 찾기로 결정했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로마의 새로운 집정관)는 한니발이 로마로 진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니발이 사용할 수 있는 동쪽과 서쪽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갔다.[48]

중부 이탈리아로 가는 유일한 대안 루트는 아르노 강 어귀에 있었다. 이 지역은 거대한 늪지대였고, 특히 그 해에는 평소보다 더 범람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이 루트가 어렵지만, 중부 이탈리아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임을 알고 있었다. 폴리비우스는 한니발의 군대가 "물에 잠긴 땅"을 4일 밤낮으로 행군하여 극심한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펜니노 산맥을 무방비로 넘었고 (그 과정에서 결막염으로 인해 오른쪽 눈을 잃었다[49]), 아르노 강도 건넜지만, 늪지대 저지대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50]

기원전 217년 봄 에트루리아에 도착한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가 보호하도록 파견된 지역을 황폐화함으로써 로마 주력군을 유인하여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폴리비우스는 "[한니발] 진영을 지나 그 너머 지역으로 내려가면 플라미니우스가 (대중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과 개인적인 짜증 때문에) 수동적으로 나라의 황폐화를 지켜보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며 자발적으로 그를 따라 공격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계산했다."라고 기록했다.[51]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가 로마군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로마 동맹국들의 충성심을 깨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플라미니우스는 아레티움에 수동적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의 좌측 측면을 대담하게 돌파하여 로마로부터 그를 효과적으로 차단, 군사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포위 기동을 수행했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고지대를 진격하여 플라미니우스를 급히 추격하게 하고 협곡에 몰아넣었다. 트라시메누스 호수 기슭에서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호수나 인접한 비탈에서 섬멸했고 플라미니우스도 죽였다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참조). 이것은 카르라이 전투에서 파르티아 제국에 맞서 싸울 때까지 로마가 입은 가장 큰 피해를 준 매복이었다. 한니발은 이제 로마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야전군을 제거했다. 그는 공성병기 없이는 수도를 함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로 진입하고 로마의 주권에 대한 전반적인 반란을 조장하여 승리를 활용하기로 했다.[52]

북이탈리아에 세력 기반을 구축한 한니발은 기원전 217년 봄, 에트루리아에 침입한다. 로마군은 새로운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한니발의 진로를 막으려 했으나,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패배하고 두 집정관 모두 전사했다. 한니발은 이 기세를 몰아 로마의 동맹 도시를 이탈시키고 로마를 멸망시키고자 남이탈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로 향했다. 그는 로마 본군과 포로에게는 엄격하게 대했지만, 동맹 도시의 포로는 정중하게 대우하고 즉시 석방하며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전투 중 비위생적인 늪지 행군으로 인해 한니발은 전염병에 감염되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3. 5.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 로마의 집정관에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르로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당선되었다. 이 중 파비우스의 전술에 불만을 가진 바르로는 한니발에게 과감하게 맞서 싸운다. 바르로는 로마군을 증강하고, 동맹 도시에서도 병사를 모아 한니발이 있는 아풀리아로 남진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상대의 성급함을 이용해 결전을 유도하고, 역사상 유명한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완전히 궤멸시킨다.

thumb들의 반지를 세고 있는 한니발, 1704년 세바스티앙 슬로츠의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

이 전투에서 로마군 5만 명에서 7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13] 전사자에는 집정관 파울루스와 차기 집정관 내정자 2명, 그리고 집정관 보좌관 2명과 고급 장교 48명에 이르렀고, 로마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지도층의 25%를 잃는, 과거에 전례 없는 완패를 당했다. 이후 로마는 한니발에 대해 소극적인 전법을 고수하게 된다.

새로 선출된 바로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이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와 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에 겨우 5만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이나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55]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섬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칸나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포위 섬멸전의 가장 뛰어난 사례로 남아 전쟁사를 다루면 반드시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 전투로 남았다.

3. 6. 한니발의 몰락



기원전 212년, 한니발은 기습 공격으로 타렌툼(Tarentum)을 점령했지만, 항구는 장악하지 못했다. 전세는 점차 로마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로마는 카푸아를 포위 공격했고, 한니발은 실라루스 전투와 헤르도니아 제1차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지만, 카푸아는 결국 함락되었다.

기원전 210년, 한니발은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다시 한번 승리했지만, 로마는 삼니움과 루카니아를 점진적으로 재정복하며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한니발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형제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와 합류하려 했으나, 메타우루스 강 전투에서 형제가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좌절되었다. 이후 한니발은 칼라브리아로 물러나 몇 년간 머물렀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가 이끄는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고국을 방어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소환되었다. 그는 크로토네에 있는 유노 라키니아 신전에 원정 기록을 남기고 아프리카로 항해했다.[62]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평화 회담을 가졌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으며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튀니스 만에서 로마 함대를 나포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자마 전투가 벌어졌다.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은 기병에서, 카르타고군은 보병에서 우세했다. 로마 기병은 마시니사의 배신 덕분에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했고, 로마군은 나팔을 불어 코끼리를 놀라게 하는 전술 등으로 카르타고 전투 코끼리의 효과를 제한했다.[63]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한 후 한니발의 후방을 공격하여 카르타고 진형을 붕괴시켰다. 카르타고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로마군은 2,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패배로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패권을 잃게 되었다.

3. 6. 1.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전략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을 펼치면서 한니발의 보급을 방해하고,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지 않는 카르타고 군대에는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는데,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 중에는 로마군을 상대할 만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며 로마의 6개 군단을 며칠 만에 궤멸시키는 등 활약했지만, 그동안 로마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를 겹겹이 포위했다. 한니발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주력 부대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로마군은 이를 막아냈다. 포위망을 풀기 위해 한니발은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했지만,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지 않았고 로마의 성벽은 매우 튼튼했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를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시라쿠사 도시도 로마군에 함락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마저 친 로마 성향의 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에 섰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부임하여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를 완전히 격파하고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은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로 진입했지만, 한니발보다 먼저 대기하고 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하지 않았고, 결국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의 끝인 칼라브리아로 쫓겨났다.

3. 6. 2.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

로마 공화정은 카르타고와의 전쟁 의지가 강했고, 인적 자원도 풍부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중해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였다. 반면 한니발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던 카르타고 군대는 한계를 보였다.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하며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다. 칸나이 전투 이후, 스페인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형제에게 대패했고, 사르디냐섬의 반란을 돕기 위해 침공한 카르타고 군도 전멸했다. 베네벤툼에서는 한노가 그라쿠스 군에게 궤멸당했다. 이러한 패배는 한니발이 승기를 굳힐 기회를 날려버렸다. 로마는 군대의 양과 질, 지도층의 능력, 국가적 단결에서 카르타고를 압도했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카르타고 전쟁파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소환되었다. 그는 크로토네의 유노 라키니아 신전에 원정 기록을 남기고 아프리카로 항해했다.[62] 그의 도착은 전쟁파의 우세를 회복시켰고, 한니발은 아프리카 징집병과 이탈리아에서 온 용병들을 합친 군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평화 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사군툼 공격과 로마 함대 공격을 언급하며 "푸니크의 신의"를 주장했다. 스키피오와 카르타고는 평화 계획을 세웠지만, 카르타고는 튀니스 만에서 로마 함대를 나포하여 물자를 약탈하면서 협상을 악화시켰다. 한니발과 보급품으로 강화된 카르타고인들은 조약을 거부했고, 결정적인 자마 전투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패배했다.

기원전 215년, 한니발은 안티고노스 왕조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압박했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을 이탈리아반도에 봉쇄하고 해외의 적대 세력을 격파했다. 기원전 211년,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반도를 공략하고, 그리스의 아이톨리아 동맹과 결탁하여 필리포스 5세마케도니아를 억눌렀다.

한니발은 기원전 210년 아프리아로 진격했지만, 타렌툼을 잃었다. 기원전 208년 로크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전사시켰지만, 타렌툼 손실로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로마가 루카니아와 삼니움을 장악하자, 한니발은 남이탈리아에서 전략적 주도권을 빼앗겼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북상하여 아프리아를 제압하고, 동생 하스드루발의 원군을 기다렸지만, 동생은 메타우루스 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니발과 함께 했던 동생 마고의 리구리아 공략 실패, 필리포스 5세와의 연계 균열 등으로 한니발은 남이탈리아 주도권 회복 수단을 잃었다.

한니발군이 아프리아에 봉쇄된 가운데, 스키피오는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병사를 훈련시켰다.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출항을 허가했고,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왕국 마시니사의 기병을 원군으로 요청했지만 패배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와 휴전 협상, 한니발 소환을 모색했지만, 소환 공작이 드러나 휴전 협상은 무산되었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3. 6. 3. 스키피오의 전략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시칠리아 등 카르타고 식민지 양도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항복을 요구하며 협상은 결렬되었다.[139] 이는 마치 노동조합사용자 간의 교섭이 결렬되어 쟁의행위가 발생하는 것과 유사했다.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습득한 스키피오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완승을 거두었다.[139] 카르타고의 젊은 기병들은 경험 부족으로 로마군의 노련한 전술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마치 신인왕전에서 우승한 젊은 프로복서가 노련한 상대의 기술을 미리 학습하여 판정승을 거두는 것과 비슷했다. 이 전투로 카르타고 군인들이 전사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카르타고 전쟁파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소환되었다. 그는 크로토네에 있는 유노 라키니아 신전에 원정 기록을 남기고 아프리카로 항해했다.[62] 그의 도착은 전쟁파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한니발은 아프리카 징집병과 이탈리아 용병을 합친 군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평화 회담을 가졌으나, 로마가 카르타고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아 실패했다.

로마의 승인을 받은 평화 계획이 있었지만, 카르타고는 튀니스 만에서 로마 함대를 나포하여 물자를 약탈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강화된 카르타고는 조약을 거부했고, 자마 전투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한니발의 불패 이미지는 사라졌다.

기원전 215년 한니발은 안티고노스 왕조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로마를 압박했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 봉쇄하고, 기원전 211년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하여 필리포스 5세마케도니아 왕국을 억눌렀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동생 하스드루발의 원군을 기다렸지만, 동생은 메타우루스 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니발과 함께 했던 동생 마고의 리구리아 공략 실패, 필리포스 5세와의 연계 균열 등으로 한니발은 남이탈리아 주도권 회복 수단을 잃었다.

한니발이 아프리아에 봉쇄된 사이, 히스파니아에서 공을 세운 스키피오는 로마군을 공세로 전환하려 했다.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병사를 훈련시켰지만, 원로원은 출항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허가를 얻은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로 건너갔고, 카르타고는 누미디아마시니사 기병을 원군으로 요청했지만 패배했다.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소환하려 했지만, 소환 공작이 드러나 휴전 협상은 무산되었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3. 6. 4. 자마 전투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본국으로 돌아왔다. 한나발은 스키피오와 교섭을 하였으나,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항복을 주장하여 결렬되었다.[139] 결국 한니발은 스키피오자마에서 싸워 완패했다. 당시 카르타고 육군의 젊은 기병들은 한나발과 달리 전쟁 경험이 부족하여,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육군의 노련한 전술에 휘둘려 전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139] 이 전투로 인해 주로 신병이었던 군인들이 전사하였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전쟁파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소환되었다. 그는 푸니크어와 그리스어로 원정 기록을 새긴 청동판을 남긴 후 아프리카로 항해했다.[62]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평화 회담을 가졌으나, 로마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끝낸 카르타고의 사군툼 공격과 표류한 로마 함대에 대한 카르타고의 공격을 언급하며 "푸니크의 신의" (Punic Faith)를 주장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대부분 전투와 달리, 자마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기병에서 우세했고, 카르타고군은 보병에서 우세했다. 로마 기병의 우세는 마시니사의 배신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수년간의 전투로 인해 노령의 한니발은 정신적 쇠약과 건강 악화에 시달렸지만, 카르타고군은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했고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신속하게 격파하여 조기에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군은 나팔을 불어 코끼리를 놀라게 하고 카르타고 진영으로 돌진하게 하는 전술 등으로 카르타고 전투 코끼리의 효과를 제한하는 데 성공했다.[63] 한때 한니발이 승리 직전에 이른 것처럼 보였지만, 스키피오는 그의 병사들을 다시 결집시킬 수 있었다.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한 스키피오의 기병은 한니발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러한 양면 공격으로 카르타고 진형이 붕괴되었다.

카르타고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추가로 1만 5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반면 로마군은 2,500명의 사상자만 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는 동료 카르타고인들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만들었다. 패배의 조건은 카르타고가 더 이상 지중해의 패권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이전 전투에서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를 몰아내고, 로마 편에 서 있던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카르타고군은 그때까지 누미디아 기병에 의존해 왔지만, 세력 구도가 바뀌면서 로마에 대한 기병력의 우위를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직접 협상을 제안했고,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회담을 가졌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로마와 카르타고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지중해를 경계로 북쪽을 로마 영토, 남쪽을 카르타고 영토로 하는 휴전 조건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이번 전쟁은 한니발의 사군툼 침략이 발단이었다고 지적하며,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자마 전투는 보병에서 유리한 카르타고가 기병에서는 로마군에 열세인 상황이었다. 한니발은 선두에 전쟁 코끼리를 배치했다. 스키피오는 경보병으로 편성된 보병 중대를 넓은 간격으로 배치하여 전쟁 코끼리를 회피시키고, 적의 선봉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대집단의 밀집한 중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카르타고군은, 후방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로마 기병의 공격을 받고, 또한 전면을 로마 보병에 막혀 대패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나고, 지중해에서의 우위성을 완전히 잃었다.

4. 전쟁사에서의 발자국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 카르타고 제국, 마케돈, 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 여러 강대국들이 지중해 패권을 두고 다투던 시대에 살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반도로부터 피레네산맥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로 진격하여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이다.

터너의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1812)에서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은 낭만주의적 분위기로 묘사되어 있다.


전쟁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횡단한 한니발의 업적은 유럽의 전설로 남았다. 야코포 리판다의 프레스코화, 카피톨리니 미술관, 로마.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알프스 횡단 이후, 한니발은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이 전투에서 연이어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의 정예군을 격파한 후,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15년 동안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러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베리아반도에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을 격파하고 북아프리카를 공격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해야 했다. 결국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하여 로마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한니발을 물리치고 로마의 영웅이 되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로스와 함께 고대 지중해 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꼽고 자신은 세 번째라고 답했다. 스키피오가 자신이 한니발에게 이기지 않았냐고 묻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왕을 넘어 자신이 최고가 되었을 것이라고 답했다.[135] 이 이야기의 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등장한다.[136]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로마조차 한니발을 이기기 위해 그의 전략을 활용해야 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칭송했다.[137]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한니발은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정치 고문으로 일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의 외교 사절로 그곳에 도착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체육관에서 있었던 한 만남에서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군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누구를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생각하는지 물었고, 한니발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라고 대답했다.영어

스키피오도 알렉산더를 최고로 여겼기에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다음으로 누구를 꼽는지 물었고, 한니발은 "에피루스의 피르루스"라고 답했다. 그는 대담함을 장군의 첫 번째 자질로 여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두 왕보다 더 기업가적인 두 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영어

스키피오는 다소 언짢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에게 누구를 세 번째로 꼽을 것인지 물었다. 적어도 세 번째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나 자신입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헤라클레스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영어

스키피오는 그가 자화자찬을 계속할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한니발, 당신이 내게 패배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어디에 놓겠습니까?" 한니발은 이제 그의 질투를 감지하고 "그랬다면 알렉산더보다 앞에 놓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한니발은 자화자찬을 계속했지만, 알렉산더보다 뛰어난 자를 정복한 자신을 암시함으로써 스키피오를 간접적으로 칭찬했다.영어

이 대화가 끝나자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자신의 손님으로 초대했고,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로마인들에게 의심을 받고 있는 안티오쿠스와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그들은 위대한 지휘관다운 방식으로 전쟁이 끝난 후 적개심을 버렸다.영어[109]

전 세계의 육군사관학교들은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하여 한니발의 군사적 업적을 연구하고 있다.[110]

한니발의 흉상, 17세기, 사스커툰 고고학 박물관


막시밀리안 오토 비스마르크 카스파리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1910-1911)에서 한니발을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한니발의 탁월한 군사적 천재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없다. 15년 동안 적대적인 국가에서 여러 강력한 군대와 일련의 능력 있는 장군들에 맞서 자신의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최고의 지휘관이자 전술가였어야 한다. 전략과 매복 작전의 사용에서 그는 확실히 고대의 다른 모든 장군들을 능가했다. 그의 업적이 놀라운 것처럼, 우리는 그가 카르타고로부터 얼마나 인색한 지원을 받았는지 고려할 때 더욱 놀라워해야 한다. 그의 베테랑들이 줄어들자 그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징집병을 조직해야 했다. 북아프리카인, 이베리아인,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그의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대부분 적대적인 출처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를 너무나 두려워하고 미워해서 그에게 정의를 베풀 수 없었다. 리비우스는 그의 위대한 자질에 대해 말하지만, 그의 악덕도 동등하게 컸다고 덧붙이며, 그중에서 그는 푸니의 배신과 비인간적인 잔혹 행위를 특히 지적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그가 매복 작전을 능숙하게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정당화할 것이 없을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는 바로는 특정 위기 상황에서 고대 전쟁의 일반적인 정신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 외에는 근거가 없다. 때로는 그는 적과 가장 유리하게 대조된다. 패배한 하스드루발에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저지른 만행과 같은 잔혹 행위는 그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다. 폴리비우스는 그가 로마인들에게 잔혹함으로, 카르타고인들에게는 탐욕으로 비난받았다고만 말한다. 그는 실제로 격렬한 적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삶은 운명에 맞선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목표 달성의 확고함, 조직 능력, 군사 과학의 숙달 면에서 그는 아마도 동등한 자가 없었을 것이다.영어[111]

로마 역사가들조차도 한니발의 군사적 지도력을 인정하여 "그는 자신이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112]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이 본질적으로 진정한 지도자였고 다른 누구보다 훨씬 뛰어난 정치가였음을 보여주는 놀랍고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는, 그가 17년 동안 전장에서 보냈고, 매우 많은 야만적인 국가들을 통과했으며, 절망적이고 특별한 기업에서 그를 돕기 위해 여러 민족과 언어의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반역을 꾸몄거나 한때 그에게 합류하거나 복종했던 사람들이 그를 버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영어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사용한 포위 전술을 바탕으로 슐리펜 계획(1905/1906)을 개발했다.[113][114] 조지 S. 패튼은 자신이 한니발을 포함한 여러 인물들의 환생이라고 믿었다.[115][116] 1990-1991년 걸프 전쟁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노먼 슈워츠코프는 "전쟁 기술은 변할 수 있고, 무기의 정교함은 확실히 변하지만, 한니발 시대에 적용되었던 것과 같은 전쟁의 원리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117]

군사 역사가 시어도어 에이라울트 도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니발은 전술가로서 뛰어났다. 역사상 어떤 전투도 칸나이 전투만큼 전술의 훌륭한 표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물류와 전략에서 더욱 위대했다. 어떤 함장도 그보다 더 많은 수와 물자를 가진 군대 사이를 그처럼 두려움 없이 능숙하게 행군한 적이 없다. 그런 역경에 맞서 그토록 오랫동안 능숙하게 버틴 사람은 없다. 항상 더 나은 병사들에 의해 능가하고, 항상 존경받고, 종종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장군들에 의해 이끌렸지만, 그는 반 세대 동안 이탈리아에서 그를 몰아내려는 그들의 모든 노력에 도전했다. 알렉산더와 일부 고립된 사례를 제외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까지의 모든 전쟁은 전투 전술에 의해 크게 또는 전적으로 결정되었다. 전략적 능력은 소규모로만 이해되었다. 군대는 서로를 향해 행군하여 평행하게 싸웠고, 정복자는 그의 상대에게 조건을 부과했다. 이 규칙에서의 변화는 매복이나 다른 책략으로 구성되었다. 전투를 피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 승리의 결과는 적의 통신에 대한 공격, 측면 기동, 그가 움직일 경우 안전하게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를 장악함으로써, 그리고 전략의 다른 장치에 의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피하고, 고지대에 있는 난공불락의 진영을 점령하고, 서로의 측면을 따라 행군하여 후방에 있는 도시나 보급품을 장악하고, 소규모 전쟁으로 서로를 괴롭히고,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 있는 전투에 거의 감히 나서지 않는 두 명의 경쟁하는 장군을 본다… 이 모든 것은 상대방을 전략적으로 불리하게 만들려는 잘 생각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한니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영어[13]

5. 죽음

로마는 비티니아에 한니발을 넘겨주도록 압력을 가했다.[80] 프루시아스는 이에 동의했지만, 한니발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한니발의 사망 연도와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82]와 리비우스[83]는 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한니발이 비티니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절을 보내 프루시아스 왕에게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고 전한다. 한니발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이 로마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독약을 마셨다. 아피아누스는 프루시아스가 한니발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기록했다.[84]

플리니우스[85]플루타르코스[86]는 한니발의 무덤이 마르마라 해 연안의 리뷔사에 있다고 기록했다. 일부 학자들은 리뷔사가 부르사와 으스퀴다르 사이의 게브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니발은 죽기 전에 "로마 사람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불안감을 덜어주자. 그들이 늙은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데 너무 지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라고 적은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88]

아피아누스는 한니발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기록했는데, "리뷔사의 땅이 한니발의 유해를 덮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이 예언 때문에 한니발이 리비아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비티니아의 리뷔사에서 죽었다고 한다.[84]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는 그의 저서 ''Annalēs''에서 한니발이 기원전 183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고,[89] 리비우스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사건에 가장 가까운 시기에 기록한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182년로 기록하고 있으며, 술피키우스 블리토[90]는 기원전 18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89]

시리아 전쟁 후, 한니발은 로마의 추격을 피해 크레타섬으로, 그리고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 왕국으로 도피했다. 한니발의 비티니아 체류 사실을 알면서도 한동안 관망하던 로마는, 원로원이 사절로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를 보내 비티니아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이를 눈치 챈 한니발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자살했다.[130]

6. 평가

비록 실패했지만, 한니발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는 상대 로마인들조차도 원수였던 한니발이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 대단한 장군이었다고 평가하였다.[91] 한니발의 전술은 아이러니하게도 적이었던 로마인들이 가장 열심히 탐구하고 적용했으며, 결국 로마군 그리고 나아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전술 전략의 기본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한니발은 2,000여 년에 걸친 역사 동안 로마와 격돌한 수많은 강적들 가운데 그 명성과 후대의 평가가 가장 높은 인물이며, 장군으로서의 재능 역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같은 전설적인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한니발은 로마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재난이 닥칠 때마다 로마인들은 "Hannibal ad portas"("한니발이 성문 앞에 있다!")라고 외치며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했고, 이 표현은 현대 언어에서도 여전히 사용된다.[91]

그의 업적은 그의 그리스인 가정교사인 라케다이몬의 소실루스에 의해 기록되었다.[59] 리비우스, 프론티누스, 유베날리스 등 로마 작가들의 작품들은 한니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감탄을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심지어 그토록 강력한 적을 물리쳤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로마 거리에 카르타고 장군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92][93] 한니발이 로마가 적에게 느꼈던 가장 큰 공포의 원인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패배의 가능성을 엄격하게 부인하고 평화 제의를 모두 거부했으며, 칸나이 전투 후 포로의 몸값 지불도 거부했다.[94]

전쟁 중 로마 시민들 사이의 혁명, 평화를 원하는 상원 내 파벌, 친 카르타고 로마 변절자, 쿠데타에 대한 보고는 없다.[95][96] 실제로 전쟁 내내 로마 귀족들은 로마의 가장 위험한 적과 싸우기 위해 지휘권을 놓고 서로 맹렬하게 경쟁했다. 한니발의 군사적 천재성은 로마의 정치 과정과 로마 사람들의 집단적 정치 및 군사적 역량을 실질적으로 방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기원전 211년 한니발이 로마를 향해 진군하는 동안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두려워했다. 상원에서는 소식이 "사람들의 기질에 따라 다양한 감정으로 받아들여졌다."[98] 그래서 카푸아를 계속 포위하지만 로마에 보병 1만 5천 명과 기병 1천 명을 증원군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98]

칸나이 전투 후 로마인들은 상당한 굳건함을 보였다. 로마의 자신감의 한 예로, 칸나이 전투의 재앙 후 로마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지만, 상원은 여전히 도시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 주에서 단 한 개의 수비대도 철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니발에 대한 역사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대부분은 로마인들의 것이다. 그들은 그를 로마가 직면했던 가장 위대한 적이라고 생각했다.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극도로 잔인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준다. 심지어 키케로도 로마와 그 두 위대한 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명예로운" 에피루스의 피르루스와 "잔인한" 한니발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때때로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한니발의 성공으로 두 명의 로마 집정관이 사망하자 그는 트라시메누스 호수 연안에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시신을 헛되이 찾았고,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를 기리는 의식을 거행했으며, 마르켈루스의 유골을 그의 가족에게 로마로 돌려보냈다.

세베루스 시대에 한니발은 로마 관객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역사상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로 묘사되었다.[108]

한니발은 일반적으로 역사상 최고의 군사 전략가이자 전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칸나이 전투에서 보여준 이중 포위 작전은 전술적 천재성의 지속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수년 동안 한니발은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정치 고문으로 일했고, 스키피오는 로마의 외교 사절로 그곳에 도착했다.

전 세계의 육군사관학교들은 특히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하여 한니발의 업적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110]

막시밀리안 오토 비스마르크 카스파리는 그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1910-1911) 기사에서 한니발을 칭찬한다.

로마의 역사가들조차도 한니발의 최고의 군사적 지도력을 인정하여 "그는 자신이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다"고 썼다.[112]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사용한 포위 기법을 포함한 그의 군사 연구에서 그의 "슐리펜 계획"(1905/1906)을 개발했다.[113][114] 조지 S. 패튼은 자신이 한니발의 환생이라고 믿었다.[115][116] 1990-1991년 걸프 전쟁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노먼 슈워츠코프는 "전쟁 기술은 변할 수 있고, 무기의 정교함은 확실히 변하지만, 한니발 시대에 적용되었던 것과 같은 전쟁의 원리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117]

군사 역사가 시어도어 에이라울트 도지에 따르면 한니발은 전술가이자 전략가였다.

터키 코자엘리 주(Kocaeli Province)에 있는 한니발의 기념비적인 묘


10대 시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한니발을 "영웅"으로 여겼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그는 그의 저서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에서 "로마에 대한 꿈" 분석에서 카르타고 장군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를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이 현상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과 연결시키며, "한니발과 로마는 나에게 유대교의 끈기와 가톨릭 교회의 조직 정신 사이의 대립을 상징했다."라고 적고 있다.[120]

터키 코자엘리 주(Kocaeli Province)에는 한니발의 기념비적인 켄타프(cenotaph)가 세워져 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의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통해 한니발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없었지만, 아타튀르크의 의지와 한니발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1981년 현재 게브제(Gebze) 남쪽에 기념비적인 켄타프가 건설되었다.

데이비드 앤서니 더럼(David Anthony Durham)의 소설 ''카르타고의 자존심(Pride of Carthage)''은 한니발의 정복을 허구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후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노예 반란을 다룬 ''The Risen''이 뒤를 이었다.

2011년부터 한니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와 함께 ''Ad Astra'' 만화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로 등장하며, 미하치 카가노는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의 전개 과정을 추적한다.[121]

튀니지 축구 국가대표팀(Tunisia national football team)의 2022년 FIFA 월드컵(2022 FIFA World Cup) 홈 및 원정 유니폼은 한니발의 지휘하에 있던 카르타고 군인들이 착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인 크수르 에세프 흉갑(Ksour Essef cuirass)에서 영감을 받았다.[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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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이었으며, 로마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한니발에 관한 기록 대부분은 후세 로마인들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히 로마의 적이었던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되면서도 인간미 없는 무서운 장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니발의 지폐 (액면 5튀니지 디나르, 1990년대 발행)


자마 전투 후 수년 후, 에페소스(Ἐφεσος)로 망명했던 한니발(Hannibal)은 사절로 그곳을 방문한 스키피오(Scipio)와 재회하여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리비우스(Titus Livius)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스키피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첫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Ἀλέξανδρος ὁ μέγας, Alexander III of Macedon), 둘째는 퓌로스(Πύρρος) (에페이로스(Ἠπειρος) 왕), 그리고 셋째는 나 자신이다"라고 답했다. 스키피오가 거듭 "자마 전투(Battle of Zama)에서 당신이 나를 이겼다면"이라고 묻자, "알렉산드로스를 넘어서 내가 역사상 최고의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133]

한니발이 사용한 포위 섬멸 전술은 현대 육군사관학교에서도 활용된다.[133]

또한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렇게 말했다.

후에 로마에서는 포에니 전쟁의 승리에 따른 사회 구조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내란의 1세기(Roman Republic)라 불리는 혼란의 시대가 찾아오게 된다.

격언 "문간에 한니발이 있었다" (Hannibal erat ad portas)[134]는 위험이 닥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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