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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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동진은 1916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난 판소리 명창이다. 다양한 스승에게 판소리를 사사하며 여러 유파를 섭렵했고, 독공을 통해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되었으며,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등 여러 판소리를 완창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다. 또한 개신교에 귀의하여 《성서 판소리》 등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며 선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3년 노환으로 별세하여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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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191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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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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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이름 | 朴東鎭 |
직업 | 판소리 국악인 창극배우 판소리 작사가 판소리 작곡가 판소리 편곡가 인간문화재 수필가 |
장르 | 한국 전통 음악 |
활동 시기 | 1933년 ~ 2003년 |
배우자 | 변녹수(재혼) |
가족 | 자녀는 슬하 4남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916년 7월 12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군 |
사망일 | 2003년 7월 8일 (향년 86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
2. 생애
박동진은 충청남도 공주시 무릉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호(雅號)는 인당(忍堂)이다.[7] 증언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는 땅재주를 넘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재주로 고종에게 참봉(參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7] 그러나 부친은 국악과 관련 없는 농사꾼이었다.
16세 때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본 후 판소리에 입문, 18세에 충청남도 청양의 손병두에게 판소리를 배웠다.[8] 손병두는 명창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얼마 후 손병두의 조부 손필모의 주선으로 김창진에게 《심청가》를 배웠다.[8] 19세에는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으나 다 배우지 못했고, 20세에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21세에 조학진에게 《적벽가》, 22세에 박지홍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이후 다시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송만갑에게도 전반적인 지도를 받았다.[9]
25세를 전후하여 무절제한 생활로 목이 상하여 소리꾼으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9] 중앙 무대에 서지 못하고, 1944년부터 1952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음악단, 김연수 창극단, 조향 창극단 등 여러 창극단을 전전하며 창극 무대에 서거나 고수(鼓手)로 활동했다.[9] 다시 목을 되찾기 위해 100일 독공을 하는 등 소리 수련을 계속하였으나, 생활을 위해 햇님국극단에서 편곡과 무대감독을 담당하기도 했다.[9]
1958년에서 1959년까지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잠시 지냈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된 박동진은,[9] 1968년,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 성경린의 주선과 한일섭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9]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9] 이를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9] 뿐만 아니라 1970년《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9]《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9]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9]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9]
박동진은 특정한 종교가 없었으나, 1969년 장로교 목사 조향록과 극작가 주태익의 요청으로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것을 계기로 개신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며 개신교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82년에는 《성서 판소리》를 미국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1년에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에 임명되었고,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박동진은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공주시에 전수관을 개관하였다.[7] 이와 함께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이어가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7] 2003년 7월 8일 공주시 무릉동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7] 별세 다음날인 2003년 7월 9일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7]
2. 1. 유년 시절과 판소리 입문
박동진은 충청남도 공주시 무릉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호(雅號)는 인당(忍堂)이다.[7] 증언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는 땅재주를 넘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재주로 고종에게 참봉(參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7] 그러나 부친은 국악과 관련 없는 농사꾼이었다.16세 때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본 후 판소리에 입문, 18세에 충청남도 청양의 손병두에게 판소리를 배웠다.[8] 손병두는 명창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얼마 후 손병두의 조부 손필모의 주선으로 김창진에게 《심청가》를 배웠다.[8] 19세에는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으나 다 배우지 못했고, 20세에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21세에 조학진에게 《적벽가》, 22세에 박지홍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이후 다시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송만갑에게도 전반적인 지도를 받았다.[9]
2. 2. 소리꾼으로서의 시련과 좌절
박동진은 25세를 전후하여 무절제한 생활로 목이 상하여 소리꾼으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9] 중앙 무대에 서지 못하고, 1944년부터 1952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음악단, 김연수 창극단, 조향 창극단 등 여러 창극단을 전전하며 창극 무대에 서거나 고수(鼓手)로 활동했다.[9] 다시 목을 되찾기 위해 100일 독공을 하는 등 소리 수련을 계속하였으나, 생활을 위해 햇님국극단에서 편곡과 무대감독을 담당하기도 했다.[9]2. 3. 완창 발표와 전성기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된 박동진은,[9] 1968년,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 성경린의 주선과 한일섭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9]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9] 이를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9] 뿐만 아니라 1970년《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9]《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9]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9]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9]2. 4. 개신교 귀의와 선교 활동
박동진은 특정한 종교가 없었으나, 1969년 장로교 목사 조향록과 극작가 주태익의 요청으로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것을 계기로 개신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며 개신교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82년에는 《성서 판소리》를 미국에서 발표하기도 했다.2. 5. 후진 양성과 말년
1990년대 후반부터 박동진은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공주시에 전수관을 개관하였다.[7] 이와 함께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이어가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7] 2003년 7월 8일 공주시 무릉동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7] 별세 다음날인 2003년 7월 9일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7]2. 6. 별세와 추서
박동진은 2003년 7월 8일 공주시 무릉동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으며,[7] 별세 다음날인 2003년 7월 9일에는 생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7]3. 국악 예술 세계
박동진은 1910년대 중앙 무대에서 판소리가 인기를 얻고 많은 명창들이 활동하면서, 동편제나 서편제와 같은 구분보다는 다양한 스승에게 소리를 배우는 현상이 만연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김창진(중고제 김정근 계통), 정정렬(서편 신제), 박지홍(서편 고제 김창환 계통), 유성준(동편제 송판 계통), 조학진(동편제 박기홍 계통) 등 다양한 계통의 스승에게서 소리를 배웠다.[10] 송만갑의 영향까지 고려하면, 박동진은 매우 넓은 범위의 유파를 겸전했다고 볼 수 있다.
박동진은 스승에게서 배운 소리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독공을 통해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었다. 판소리 사설을 확장하여 이야기로서의 서사성을 살리고, 과거 축약적 사설의 이면적 괴리를 보완했다.
박동진의 판소리는 대중성을 지향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연 실황 자료를 보면 욕과 재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현장에 따라 즉흥적인 사설을 구사하여 대중적인 흥미를 끌었다.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수와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를 넘어,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수를 무대 위 주역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이론과는 상충되지만, 현장성을 살린 것이었다.
박동진의 성음은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이며 칼칼한 느낌이 난다. 독공으로 인해 성량이 매우 커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 묘사에 능했고, 《적벽가》의 전투 장면 묘사에도 뛰어났다. 일각에서는 재담에 치중하여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1970~90년대 공연 실황을 보면 고음, 중음, 저음이 모두 두텁고 붙임새 사용도 자유자재로 이루어졌다. 김희조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에서 민요를 부르고, 햇님국극단 활동 당시 편곡을 담당했던 점을 보면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중시했으며, 노랑목을 쓰지 않으면서도 시김새를 적절히 구사했다.
박동진은 이러한 예술 행위를 '광대 놀음'이라 칭하고 자신을 광대라 지칭했다. 최동현은 이를 두고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 평했다. 박동진은 자신의 미학을 신재효의 단가 《광대가》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고, 실전된 단가의 곡조를 창작하여 부르기도 했다.
1960~1970년대에 가장 많이 활약한 고수는 김명환이었지만, 박동진은 이정업,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 등과 더 많은 호흡을 맞췄다. 특히 김득수와 김동준의 북을 선호했다. 이들은 모두 판소리 창자로 시작하여 고수로 전향한 인물들이거나, 줄광대 출신으로 고수로 전향한 이정업처럼 소리꾼의 미학을 체감하는 이들이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전주의 주봉신을 수행고수로 하여 자주 활동했다.
1974년, 김동준의 북 반주로 《적벽가》 전판을, 박후성의 북 반주로 《성웅 이순신》 4시간 창본을 녹음했다.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주봉신의 북으로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일부, 《변강쇠타령》 2종, 《배비장타령》, 《예수전》 등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출반했다. 동아방송에서 김득수와 《숙영낭자전》을 녹음하기도 했으나, 음원은 확인되지 않고 DBS 데이터 목록에서만 확인된다. 1968년~1972년까지의 완창 공연 릴테이프는 국립국악원에, 1970년대 이후 국립극장 자료실에 각종 연창회와 완창 발표회, 감상회 실황이 보관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예술의 전모를 알 수 있다.
3. 1. 다양한 사승 관계와 독공
박동진은 1910년대 중앙 무대에서 판소리가 인기를 얻고 많은 명창들이 활동하면서, 동편제나 서편제와 같은 구분보다는 다양한 스승에게 소리를 배우는 현상이 만연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김창진(중고제 김정근 계통), 정정렬(서편 신제), 박지홍(서편 고제 김창환 계통), 유성준(동편제 송판 계통), 조학진(동편제 박기홍 계통) 등 다양한 계통의 스승에게서 소리를 배웠다.[10] 송만갑의 영향까지 고려하면, 박동진은 매우 넓은 범위의 유파를 겸전했다고 볼 수 있다.박동진은 스승에게서 배운 소리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독공을 통해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었다. 판소리 사설을 확장하여 이야기로서의 서사성을 살리고, 과거 축약적 사설의 이면적 괴리를 보완했다.
박동진의 판소리는 대중성을 지향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연 실황 자료를 보면 욕과 재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현장에 따라 즉흥적인 사설을 구사하여 대중적인 흥미를 끌었다.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수와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를 넘어,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수를 무대 위 주역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이론과는 상충되지만, 현장성을 살린 것이었다.
박동진의 성음은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이며 칼칼한 느낌이 난다. 독공으로 인해 성량이 매우 커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 묘사에 능했고, 《적벽가》의 전투 장면 묘사에도 뛰어났다. 일각에서는 재담에 치중하여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1970~90년대 공연 실황을 보면 고음, 중음, 저음이 모두 두텁고 붙임새 사용도 자유자재로 이루어졌다. 김희조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에서 민요를 부르고, 햇님국극단 활동 당시 편곡을 담당했던 점을 보면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중시했으며, 노랑목을 쓰지 않으면서도 시김새를 적절히 구사했다.
박동진은 이러한 예술 행위를 '광대 놀음'이라 칭하고 자신을 광대라 지칭했다. 최동현은 이를 두고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 평했다. 박동진은 자신의 미학을 신재효의 단가 《광대가》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고, 실전된 단가의 곡조를 창작하여 부르기도 했다.
1960~1970년대에 가장 많이 활약한 고수는 김명환이었지만, 박동진은 이정업,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 등과 더 많은 호흡을 맞췄다. 특히 김득수와 김동준의 북을 선호했다. 이들은 모두 판소리 창자로 시작하여 고수로 전향한 인물들이거나, 줄광대 출신으로 고수로 전향한 이정업처럼 소리꾼의 미학을 체감하는 이들이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전주의 주봉신을 수행고수로 하여 자주 활동했다.
1974년, 김동준의 북 반주로 《적벽가》 전판을, 박후성의 북 반주로 《성웅 이순신》 4시간 창본을 녹음했다.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주봉신의 북으로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일부, 《변강쇠타령》 2종, 《배비장타령》, 《예수전》 등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출반했다. 동아방송에서 김득수와 《숙영낭자전》을 녹음하기도 했으나, 음원은 확인되지 않고 DBS 데이터 목록에서만 확인된다. 1968년~1972년까지의 완창 공연 릴테이프는 국립국악원에, 1970년대 이후 국립극장 자료실에 각종 연창회와 완창 발표회, 감상회 실황이 보관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예술의 전모를 알 수 있다.
3. 2. 대중성을 지향한 판소리
박동진의 판소리 예술은 대중성을 지향한 것으로 유명하다.[10] 욕과 재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현장에 따라 즉흥적인 사설을 구사하여 대중적인 흥미를 크게 유발하는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았다.[10]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10]고수와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를 넘어,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수를 무대 위 주역으로 끌어올렸다.[10] 이는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이론과는 상충되지만, 현장성을 살린 공연 방식이었다.[10] 박동진은 소리꾼으로 활동하며 그 미학을 직접 체감하는 고수들의 북 장단을 선호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전주의 주봉신을 수행고수로 하여 자주 활동하였다.[10]
박동진은 다양한 유파를 겸전했지만, 독공을 통해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었다.[10] 판소리 사설을 확장하여 이야기로서 판소리의 서사성을 살리고, 과거 축약적 사설의 이면적 괴리를 보완했다.[10] 그의 성음은 약간 쉰듯한 수리성이며, 독공으로 다져진 큰 성량으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 묘사에 능했다. 특히 《적벽가》의 전투 장면 묘사가 뛰어났다.[10] 일각에서는 그의 판소리가 재담에 치중하여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다양한 음역과 붙임새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김희조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에서 민요를 직접 부르고, 햇님국극단 활동 시 편곡을 담당한 점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10]
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중시하며 노랑목을 쓰지 않고도 시김새를 적절히 구사했다.[10] 그는 이러한 예술 행위를 '광대 놀음'이라 칭하고 자신을 광대라 지칭했으며, 이는 신재효의 단가 《광대가》에 근거한 미학이었다. 최동현은 그를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 평했다.[10]
1974년, 김동준의 북 반주로 《적벽가》 전판을, 박후성의 북 반주로 《성웅 이순신》 4시간 창본을 녹음했다.[10]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주봉신의 북으로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일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예수전》 등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출반했다.[10] 이 외에도 김득수와 《숙영낭자전》을 녹음했으나 음원은 확인되지 않는다.[10] 1968년~1972년까지의 완창 공연 릴테이프와 1970년대 이후 국립극장 공연 실황은 국립극장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예술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10]
3. 3. 성음과 음악적 특징
박동진의 성음은 쉰 듯하면서도 칼칼한 수리성이며, 넓은 성량을 바탕으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 묘사에 능했다. 특히 《적벽가》에서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10] 일각에서는 재담에 치중하여 음악적 성격이 결여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고음, 중음, 저음이 모두 두텁고 붙임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김희조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에서 민요를 부르고 햇님국극단 활동 시 편곡을 담당한 점으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10]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중시하고 노랑목을 지양하며 시김새를 적절히 활용하는 소리 미학을 추구했다.[10] 그는 판소리의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했으며, 고수와의 관계에서도 자유로운 재담과 대화를 통해 고수를 무대 위 주역으로 끌어올렸다.[10] 이는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이론과는 상충되지만, 현장성을 살린 것이었다.[10]
그는 이러한 예술 행위를 '광대 놀음'이라 칭하고 자신을 광대라 지칭하며, 신재효의 단가 《광대가》에 기반한 미학을 추구했다.[10] 최동현은 이를 두고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 평했다.[10]
3. 4. 광대 정신
박동진은 스스로를 광대라 칭하며 모든 예술 행위를 '광대 놀음'이라고 불렀다.[10] 최동현은 이를 두고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고 평가했다.[10] 박동진은 이러한 자신의 예술관이 신재효의 단가 《광대가》에 기반한 것으로 보았으며, 실전된 단가의 곡조를 직접 창작하여 부르기도 했다.[10]박동진은 판소리의 대중성을 지향하며 욕과 재담, 즉흥적인 사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대중적인 흥미를 크게 일으켰다.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수와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를 넘어,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수를 무대 위 주역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이론과는 상충되지만, 현장성을 살린 것이었다.
박동진의 성음은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이며 칼칼한 느낌이 난다. 독공 기간이 길었던 만큼 성량이 매우 커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 묘사에 능했고, 《적벽가》의 전투 장면 묘사에도 뛰어났다. 일각에서는 그의 판소리가 재담에 치중하여 음악적 성격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하지만, 1970~90년대 공연 실황을 보면 고음, 중음, 저음이 모두 두텁고 붙임새 사용이 자유자재하며, 김희조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에서 민요를 직접 부르고 햇님국극단 활동 시 편곡을 담당했던 점을 볼 때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3. 5. 선호한 고수와 음반
박동진은 고수와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를 넘어,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수를 무대 위 주역으로 끌어올렸다.[10] 이는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고법 이론과는 다소 상충되지만, 현장성을 살린 것이었다. 1960~1970년대에 가장 많이 활약한 고수는 김명환인데, 박동진은 김명환보다는 이정업,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와 많은 호흡을 맞추었고, 김득수와 김동준의 북을 가장 선호하였다.[10] 김명환은 장판개에게 고법을 배웠고, 소리도 배웠으나 소리꾼으로 행세하기 위해 배웠다기 보다는 오로지 북을 치기 위해 배웠고, 소리는 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부수적으로 배운 이에 속하였으나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 등은 모두 판소리 창자로 시작하여 고수로 전향한 인물들이었고 이정업의 경우에도 본래 줄광대로 시작하였다가 역시 고수로 전향하였던 인물이다.[10] 즉 박동진은 직접 소리꾼으로 활동하여 그 미학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이들의 북 장단을 선호하였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전주의 주봉신을 수행고수로 하여 자주 활동하였다.[10]1974년, 김동준의 북 반주로 《적벽가》 전판을 녹음하였고, 같은 해에 박후성의 북 반주로 《성웅 이순신》의 4시간 창본을 녹음하였다.[10]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주봉신의 북으로 《흥보가》 전판, 《수궁가》 전판,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의 일부, 《변강쇠타령》 전판 2종, 《배비장타령》 전판, 《예수전》 등을 녹음하여 각각 음반으로 출반하였다.[10] 이 외에도 동아방송의 기획으로 김득수와 함께 《숙영낭자전》을 녹음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음원으로 확인되지 않고 다만 DBS의 데이터 목록에서만 확인된다.[10] 여러 판소리를 발표하였지만 출반된 녹음은 사실상 극소수에 속하는데, 그나마 1968년~1972년까지의 완창 공연 릴테이프가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고, 1970년대 이후 국립중앙극장 자료실에 각종 연창회와 완창 발표회, 감상회 당시의 실황이 보관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예술의 전모를 알 수 있다.[10]
4. 평가
5. 작품 목록
6. 수상 경력
참조
[1]
서적
Perspectives on Korean music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2006-11-18
[2]
웹사이트
Pak Tongjin
http://www.oxfordmus[...]
Oxford Music Online
[3]
서적
판소리답사기행
Minyewŏn
[4]
문서
변녹수의 아명은 변기이다.
[5]
뉴스
박동진 장로(국악인, 초동교회)
http://www.fgnews.co[...]
순복음가족신문
[6]
뉴스
https://n.news.naver[...]
[7]
간행물
원로예술인들에게 듣는다. - 박동진의 소리 세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1-05
[8]
문서
김창진과 김창룡 형제의 소리 비교
[9]
문서
박동진 증언
[10]
문서
조학진의 적벽가 계보와 소리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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