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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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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억은 평안북도 출신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한국 자유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10년대 후반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학지광》에 시를 발표하고, 낭만주의 문예지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서구 문학 이론을 소개하고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했으며, 김소월을 발굴하여 문단에 소개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자유시를 창작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 번역과 민요 발굴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수성사 편집주간과 문학 강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고,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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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억
한자金億
로마자 표기Gim Eok
출생일1896년
출생지정주, 평안북도,
직업시인
국적대한제국
언어한국어
필명김포몽
활동 시기일제 강점기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르
작품
주요 작품해파리의 노래
오뇌의 무도
학력
기타

2. 생애

김억은 평안북도 곽산 출신으로,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나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하고,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해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했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25]

해방 후 한국 전쟁으로 월북하였고,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22]

김억의 생애 요약
연도내용
1896년 11월 30일평안북도 정주군 출생
1907년오산중학교 입학
1913년게이오기주쿠 대학 영문과 입학
1916년오산학교 교사 (김소월 지도)
1920년『창조』, 『폐허』 동인
1921년『고뇌의 무도』 간행
1924년동아일보 학예부 기자
1950년 9월 10일한국 전쟁 중 월북 후 소식 두절
1956년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23]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김억은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버지 김기범과 어머니 김준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熙權)이었으나, 이후 억(億)으로 개명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3]

1907년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3] 1913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유학 시절 영어, 일본어, 한문, 에스페란토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3]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에 창간부터 참여하여 "이별", "밤중", "밤과 나(夜と私)", "나의 작은 새야(私の小さい鳥よ)" 등의 시와 "예술적 생활", "-와-"(要求と悔恨)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1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3] 오산학교에서 제자 김소월을 지도하며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발굴했다. 김억은 김정식이 문단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숭덕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2. 2. 문단 활동

1914년 도쿄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25] 1918년 창간된 문예지 《태서문예신보》에서 서구 문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시 〈봄은 간다〉를 발표했다.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다.[25]

1921년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출간했고,[3] 1923년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출간하여 자유시 운동을 주도했다.[3]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관심을 가졌다.[25]

1924년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25] 1925년 시집 《금모래》와 《봄의 노래》를 출판하고 문예지 《가면》 편집장을 역임했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을 했는데,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문단 지위 때문에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25]

2. 3. 에스페란토 운동

김억은 에스페란토 연구 및 보급의 선구자였다. 1916년 도쿄물리학교에서 고사카 겐지(小坂狷二)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우고[20] 조선으로 돌아와 보급을 위해 강습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개벽》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고,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토어 교재인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를 간행하였다. Verda E. Kim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일본의 《La Revuo Orienta》지에 조선 문학 단편의 에스페란토 번역을 게재하였다.[21]

2. 4. 친일 행적

일제강점기 말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의 친일 저작물이 밝혀져 있다.[26]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1937년에는 "종군간호부의 노래"와 같은 친일 성향을 반영한 노동가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의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른 친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7]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5. 해방 이후 ~ 한국 전쟁 납북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9월 10일 김억은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27] 1956년 평양에서 북한으로 간 주요 인사들이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나,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27] 1958년 평안북도 철산군의 한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27]

3. 작품 세계

김억은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을 펴냈다.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김억은 외국의 문학 이론을 소개하고 서구식 자유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으나, 이후 중국시 번역, 민요 발굴, 동양식 정형시 창작 등 전통시와 형식에 주목했다.[8][9]

3. 1. 초기: 자유시 개척

김억은 초기에는 외국의 문학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고 서구식 자유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였다.[8][9]

초기 대표작은 〈봄은 간다〉(1918)이다. 이 작품은 4음보 형식[3]과 전통시의 고정된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시적 언어의 상징성과 의미를 강조하고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형상화하여 현대 자유시의 면모를 보여준다.[10]

《해파리의 노래》(1923)는 민요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이전 그의 시적 특징을 보여주는 초기 작품집이다.[11] 이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는 고전적인 한시 형식을 따르지 않고 개성적인 리듬과 자유시의 형태를 보인다. 또한, 고전적인 시어(雅語體)를 사용하여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며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았다.[1]

3. 2. 중기: 전통 회귀

1920년대 초까지 김억은 주로 외국의 문학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고 서구식 자유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전통시와 형식에 주목하여 중국시를 번역하고, 민요를 발굴하며 동양식 정형시를 창작하였다.[8][9]

김억은 서구 문학 경향과 서정 및 서구 시의 한국어 번역을 중단하고 800여 수의 중국 시를 번역하기 시작하며 이를 한국어에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12] 이는 중국 시의 영향을 받은 "근대 한국식 시가"인 격조시의 탄생과 민요시 운동으로 이어졌다.[13] 1925년 그의 문학적 지향은 외래적인 것에서 전통적인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그의 시집 『안서시집』(1929)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4] 『안서시집』에서 김억은 7·5조의 운율을 사용하여 한국의 자연을 노래하며 시의 전통성 회복을 시도한다. 특히 『안서시집』의 "오다 가다"는 고정된 운율을 완벽하게 활용하고 "산길"과 "매화"와 같은 시적 이미지를 강조하며 자연으로의 회귀 의지를 담은 동양적 세계관을 보여준다.[15]

3. 3. 번역 활동

김억은 《오뇌의 무도》(1921)를 통해 서구 상징주의 시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으로 기록된다.[16] 또한, 「프랑스 시단」(1918)과 「스핑크스의 고뇌」(1920)를 통해 외국 문학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였다.[16]

김억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인도 시인 타고르를 《기탄자리》(1923), 《신월》(1924), 《원정》(1924) 등의 번역을 통해 한국에 소개했다.[16] 1925년 이후에는 중국 시 번역에 주력하여 《망우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지나명시선》(1944) 등을 출판했다.[16]

그는 「역시론」(1930) 등의 글을 통해 번역이 또 다른 창작 활동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번역 방법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16]

4. 주요 작품 목록

김억은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을 출간했다.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이고,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

4. 1. 시집

김억의 시집으로는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1]

제목출판사연도
오뇌의 무도1921
《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1923
《금모래》조선문단사1925
《봄의 노래》매문사1925
《안서시집》한성도서1929
《안서시초》박문서관1941
《먼동 틀 제》백민문화사1947
《안서민요시집》한성도서1948


4. 2. 번역서

김억은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를 출판하였다.[16] 그는 〈프랑스 시단〉(1918)과 〈스핑크스의 고뇌〉(1920)를 통해 외국 문학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였고, 〈역시론〉(1930) 등의 글을 통해 번역이 또 다른 창작 활동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번역 방법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16] 또한 에스페란토 사용을 전파했으며, 《기탄자리》(1923), 《신월》(1924), 《원정》(1924) 등의 시 번역을 통해 인도 시인 타고르를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16] 1925년 이후에는 중국 시 번역에 주력하여 《망우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지나명시선》(1944) 등을 출판했다.[16]

김억의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원제출판사출판 연도
오뇌의 무도Onoeui mudo광익서관1921
기탄자리Gitanjali이문관1923
신월The Crescent Moon문우당1924
원정The Gardener애동서관1924
잃어진 진주Ireojin jinju평문관1924
망우초Mangucho박문서관1934
동심초Dongsimcho조선출판사1943
꽃다발Kkotdabal박문서관1944
지나명시선Jinamyeongsiseon한성도서1944
야광주Yagwangju조선출판사1944
선역애국백인일수Seonyeok aeguk baegin ilsu한성도서1944
금잔디Geumjandi동방문화사1947
옥잠화Okjamhwa이우사1949


5. 평가

김억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뉜다.

김억은 한국 자유시의 선구자로, 해외 문학 이론을 소개하고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5] 서구 상징시를 한국에 소개해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데 기여했으며, 김소월의 스승으로서 그를 문단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에스페란토 연구 및 보급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20]

반면,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시를 발표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26]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5. 1. 긍정적 평가

김억은 한국 자유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하고,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했다.[25] 서구의 상징시를 한국에 처음 소개해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25]

김소월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문단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으로 유명하다.

김억은 에스페란토 연구 및 보급의 선구자였다. 1916년 도쿄물리학교에서 고사카 겐지(小坂狷二)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우고[20] 조선으로 돌아와 보급을 위해 강습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5. 2. 부정적 평가

일제강점기 말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친일 저작물은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졌다.[26]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2002년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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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과사전 ko:김억 http://www.doopedia.[...] 2019-10-07
[3] 서적 Yakjeoneuro ingneun munhaksa 1-2 http://www.krpia.co.[...] Somyung Books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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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널 List of Pro-Japanese Literary Works http://www.artnstudy[...] 2019-10-07
[6] 웹사이트 [List] 4,776 People to be Named in the Dictionary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http://www.ohmynews.[...] 2008-04-29
[7] 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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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백과사전 Haepariui norae https://terms.naver.[...] Academy of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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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백과사전 Oda gada http://www.do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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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日本エスペラント運動人名事典
[21] 간행물 La Revuo Ori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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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現代朝鮮人名辞典 1962年版 世界ジャーナル社 1962-08-01
[24]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25] 서적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26] 저널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www.artnstudy[...] 2007-10-09
[27] 웹사이트 납북인사 명록 http://www.korwarabd[...]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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