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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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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문국은 1883년 고종의 지시로 설립된 조선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이다. 일본에서 서양의 인쇄술을 접한 김기수와 박영효 등의 건의를 통해 설립되었으며, 신문 발행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이후 근대 인쇄 기술 도입과 한국 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대량의 서적 출판이라는 목표는 갑오개혁 이후에야 실현되었다.

2. 설립 배경

1876년 수신사 김기수가 일본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 특히 인쇄술을 접하고 서적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조선에서도 근대식 인쇄술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를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인쇄 기술자와 인쇄기, 인쇄 활자를 주선하는 등 박문국 설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후쿠자와는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이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박문국 설치를 지원했다. 그에 따라 박문국 운영은 조선인 관리가 배치되었음에도 실제로는 일본인이 맡아 하게 되었다. 또한, 후쿠자와의 지시를 받는 이노우에는 출판 업무에 전념하지 않고 급진 개화파와 어울리면서 조선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심지어 급진 개화파 인사들에게 무기 구매를 주선하기까지 하였으며,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박문국에서는 한국 최초로 연활자를 사용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목활자가 아닌 신식 연활자(납으로 만든 활자)였으며, 크기는 4호였다. 인쇄기는 소형 수도 원압식 활판기로서 족답식(발로 밟아 작동)이었다. 활자와 인쇄기는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수구파는 박문국이 불온사상을 전파한다고 판단하여 군중을 사주해 박문국과 기계를 파괴하였다. 이후 박문국은 폐지되었다가 1885년 5월 12일(음력 3월 28일) 통리아문의 건의에 따라 다시 설치되었다. 박문국에서 찍던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인쇄소인 광인사로 옮겨 속간하고,[4] 외국 서적을 비롯한 서적도 출판하였다. 1888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부속되었다.

2. 1. 수신사 김기수와 박영효의 역할

1876년 수신사 김기수는 일본에서 근대식 인쇄 기술을 접하고 서적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는 귀국 후 고종에게 근대식 인쇄소 설립을 건의했다.[3]

2. 2. 고종의 결단과 박문국 설치

1876년 수신사 김기수가 일본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 특히 인쇄술을 접하고 서적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3년 2월, 고종은 박영효의 건의를 수용, 박문국 설치를 명했다.

1883년(고종 20년) 8월 7일(음력 7월 5일) 지금의 을지로 2가 부근에 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의 부속기관으로 박문국이 설치되었다. 박영효에게 규정을 만들라는 명이 떨어졌고, 김옥균,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박문국은 조선 정부에서 운영하였으며, 신문 발행을 목적으로 설립하였고, 그 해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를 창간했다. 동문학에 설치된 이유도 영어를 비롯한 서양 언어를 번역할 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영효가 만든 규정에 따라 박문국에는 총책임자를 두되 한성부의 판윤·좌윤·우윤 가운데 한 사람이 겸임하도록 했다. 교서원 두 명을 두어 번역·교정·인쇄·회계의 일을 맡게 했다. 번역은 따로 두 명을 두는데 한 사람은 내국인, 다른 한 사람은 외국인으로 하기로 했다. 교서원은 당하관이나 사대부 가운데 한성 판윤이 추천을 받아 뽑아 쓰기로 하였다. 박문국 초대 총재에 외아문 독판인 민영목, 김만식 등을 당상관으로 하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파견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고문으로 하였다.[3] 부사과 김인식을 주사로 삼고, 유학 장박, 오용묵, 김기준을 사사로 삼았다.[4]

3. 초기 운영과 일본의 영향

1876년 수신사 김기수가 일본에서 인쇄소를 시찰한 후 서적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3년 8월 7일(음력 7월 5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박문국이 설치되었다. 박문국은 신문 발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 가쿠고로를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인쇄 기술자와 인쇄기, 인쇄 활자를 주선하는 등 박문국 설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박문국은 한국 최초로 으로 만든 연활자를 사용했으며, 활자 크기는 4호였다. 인쇄기는 소형 수도 원압식 활판기로 발로 밟아 작동시켰으며, 활자와 인쇄기는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문국은 불온사상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군중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1885년 5월 12일(음력 3월 28일) 통리아문의 건의로 다시 설치되었고, 광인사(廣印社)에서 《한성순보》를 속간하고 외국 서적을 비롯한 서적도 출판하였다. 1888년 통리교섭통상아문에 부속되었다.

3. 1. 조직 구성

박문국의 총책임자는 한성부 판윤, 좌윤, 우윤 가운데 한 명이 겸임했다. 번역, 교정, 인쇄, 회계 업무는 교서원 두 명이 담당했다. 번역관은 내국인과 외국인 각 한 명씩 두었다. 초대 총재는 외아문 독판 민영목(閔泳穆), 김만식(金晩植) 등이었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파견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고문으로 참여했다.[3] 부사과(副司果) 김인식(金寅植)은 주사(主事)를, 유학(幼學) 장박(張博)·오용묵(吳容默)·김기준(金基俊)은 사사(司事)를 맡았다.[4]

3. 2. 후쿠자와 유키치와 일본의 지원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 가쿠고로조선에 파견하여 인쇄 기술, 인쇄기, 인쇄 활자 등을 지원하며 박문국 설치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3] 이러한 지원은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그 결과, 박문국은 조선인 관리가 배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운영은 일본인이 맡게 되었다. 또한, 후쿠자와의 지시를 받은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출판 업무보다 급진 개화파와 어울리며 조선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3]

3. 3.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정치 개입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를 받은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출판 업무에 전념하지 않고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와 어울리면서 조선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3] 심지어 급진 개화파 인사들에게 무기 구매를 주선하기까지 하였으며,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한다.

4. 기술적 특징

박문국은 한국 최초로 연(鉛)활자(납으로 만든 활자)를 사용했다. 활자 크기는 4호였다. 인쇄기는 소형 수도 원압식 활판기로서 발로 밟아 작동시켰기에 족답식으로도 불렸다. 활자와 인쇄기는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3]

5. 갑신정변과 박문국의 시련

1884년 갑신정변 때 수구파는 박문국을 불온사상 전파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군중을 선동하여 박문국 건물과 그 안에 있던 기계를 파괴하였다.[3]

6. 재건과 이후의 변화

1885년 5월 12일(음력 3월 28일) 통리아문의 건의에 따라 박문국이 재설치되었다.[4] 박문국에서 발행하던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인쇄소인 광인사로 옮겨 속간되었다.[4] 1888년 박문국은 통리교섭통상아문에 부속되었다.

7. 평가

1883년 박문국은 한국 인쇄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이곳에서 근대식 인쇄와 신문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박영효와 고종이 기대했던 만큼 서적 출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출판물은 매우 적었다. 실제로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10년 후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나서였다.[1]

7. 1. 근대 인쇄 기술 도입의 선구자

1883년과 박문국은 한국 인쇄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다. 그해 그곳에서 근대식 인쇄를 비롯하여 근대식 신문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1884년에 한국 최초의 민간 인쇄소인 광인사가 설립되었고, 1885년에는 배재학당 내에 근대식 인쇄소가 설립되었다(한국 최초의 학내 인쇄소). 1886년에는 마침내 처음으로 한글 연활자가 만들어졌다.

7. 2. 한계와 아쉬움

1883년과 박문국은 한국 인쇄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다. 그해 그곳에서 근대식 인쇄를 비롯하여 근대식 신문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고종이 바랐던 것처럼 서적이 홍수와 같이 출판되지는 않았고, 출판물은 겨우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실제로 출판물이 홍수처럼 쏟아진 때는 10년 뒤 갑오경장이 일어난 뒤였다.

참조

[1]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2] 백과사전 박문국 http://preview.brita[...] 2008-09-23
[3] 백과사전 박문국 http://www.encyber.c[...] 2008-08-23
[4] 문서 《고종실록》 22권, 고종 22년(1885년) 3월 28일(정묘)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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