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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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 박문국에서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박영효 등 조선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현대 언론의 발달을 접하고 고종의 윤허를 받아 발행되었다. 국내외 뉴스를 다루었으며, 외국 신문 기사를 번역하여 게재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소실되면서 1884년 폐간되었으나, 1886년 주간지인 한성주보로 계승되어 한국 근대 언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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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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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한성순보 |
한자 표기 | 漢城旬報 |
로마자 표기 | Hanseong sunbo |
![]() | |
발행 정보 | |
창간일 | 1883년 10월 31일 |
폐간일 | 1884년 12월 |
창립자 | 박영효 |
언어 | 한문 |
발행 국가 | 조선 |
본사 위치 | 서울 저동 |
독자층 | 공공 및 사적 |
2. 역사적 배경
조선 정부는 조보 외에 근대적 신문을 발행하기로 하고, 1883년 8월 17일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을 설치했다. 박영효의 건의와 고종의 윤허 아래,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지원을 받아 신문 발행이 추진되었다. 박문국 초대 총재에는 민영목이, 부총재에는 김만식이 임명되었다.[11]
유길준과 박영효는 신문 발행 준비를 주도하였으나, 1883년 4월경 박영효는 강등되고 유길준은 병에 걸렸다.[1] 박영효의 강등은 여흥 민씨의 영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 이후, 신문 발행은 외무부의 온건한 군주주의자들이 이끌게 되었고, 김만식과 김인식 등이 담당하게 되었다.[1][3]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인 자문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3][1]
1883년 10월 31일, 박문국에서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1][4][3]
2. 1. 조선 정부의 조보 발행
신문 발행 이전에 한국 정부는 이미 조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간행물은 주로 정부 관리들을 위한 것이었고, 대부분 국내 문제에 국한되었다.[3] 당시 한국은 수세기 동안의 쇄국주의에서 벗어난 직후였으며, 외국을 방문한 사절들은 국제 문제를 다루는 일반 대중을 위한 현대 신문의 유용성을 확인하였다.[3]2. 2. 박영효의 건의와 고종의 윤허
조선은 정부에서 발행하는 기존의 조보(朝報)가 아닌 근대적 의미의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박영효가 건의하였는데, 그는 신문의 역할 및 발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간행 허가를 간청하였다.[9][10] 1883년 2월 고종은 한성부에서 관장하는 신문을 발행토록 허가하였다.[1][3]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제물포 조약의 공식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일행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조선의 차관과 방일 경비 등에 대해 상담하는 한편, 조선 개혁을 주장하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도 면담하였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독립과 계몽을 위해 교육(유학)과 신문 발간을 제안하였고, 박영효도 차관의 일부를 계몽과 교육에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신문 발간이 결정되었다.[6] 1882년, 박영효와 조선수신사(조선의 일본 사절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일본에서 현대 언론의 부상에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한국에서 토착 언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본인 기자와 인쇄 전문가들을 자문으로 초빙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1][3]
2. 3. 박문국 설치와 창간
조선 정부는 기존의 조보가 아닌 근대적 의미의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박영효가 신문의 역할 및 발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간행 허가를 건의했기 때문이다.[9][10] 1883년 2월, 고종은 한성부에서 관장하는 신문을 발행토록 허가하였다.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제물포 조약의 공식 수신사로 박영효 등이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박영효 일행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조선의 차관과 방일 경비 등에 대해 상담하는 한편, 조선 개혁을 주장하던 후쿠자와 유키치와도 면담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독립과 계몽을 위해 교육(유학)과 신문 발간을 제안하였고, 박영효도 차관의 일부를 계몽과 교육에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신문 발간이 결정되었고, 이후 서재필 등 수십 명이 게이오기주쿠와 사관학교에 유학하게 되었다.[6]
발간 준비에 협력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신문 편집자로 우시바 타쿠조(牛場卓蔵), 다카하시 마사노부(高橋正信), 인쇄공인 미와 히로쿠라(三輪広蔵), 사나다 켄조(真田謙蔵) 등을 소개하였고, 우시바 등이 고용되었다.[7] 귀국한 박영효는 1883년 1월 한성판윤(현재의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자 신문 발행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2월 조선 국왕으로부터 신문 발행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1883년 4월, 박영효는 조선 보수파의 반발로 한성판윤에서 해임되었고, 신문이 ‘정치 개혁’을 주장할 계획이었기에 신문 발행 계획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고용되었던 일본인 인쇄공과 중도에 신문 발행 계획에 참여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문하의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제외한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1883년 8월 17일, 고종은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명하였다. 박문국 초대 총재에는 외아문 독판인 민영목이, 부총재에는 김만식이 임명되어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11] 그해 10월 20일(음력 9월 20일) 한성순보 창간호가 발간되어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발행되었다.[11]
2. 4. 일본의 지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역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제물포 조약의 공식 수신사로 박영효 등이 일본을 방문하였다.[5] 박영효 일행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조선의 차관과 방일 경비 등에 대해 상담하는 한편, 조선 개혁을 주장하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도 면담하였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독립과 계몽을 위해 교육(유학)과 신문 발간을 제안하였고, 박영효도 차관의 일부를 계몽과 교육에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였다.[6] 이에 따라 신문 발간이 결정되었고, 이후 서재필(徐載弼) 등 수십 명이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와 사관학교에 유학하게 되었다.[6]발간 준비에 협력한 후쿠자와는 신문 편집자로 우시바 타쿠조(牛場卓蔵), 다카하시 마사노부(高橋正信), 인쇄공인 미와 히로쿠라(三輪広蔵), 사나다 켄조(真田謙蔵) 등을 소개하였고, 우시바 등이 고용되었다.[7]
1883년 1월 한성판윤(현재의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된 박영효는 신문 발행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2월 조선 국왕으로부터 신문 발행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4월, 박영효는 조선 보수파의 반발로 한성판윤에서 해임되었고, 신문이 ‘정치 개혁’을 주장할 계획이었기에 신문 발행 계획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고용되었던 일본인 인쇄공과 중도에 신문 발행 계획에 참여했던 후쿠자와 문하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제외한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일본에서는 박영효 등과 접촉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신문 발행에 도움을 주었다.[11] 극우 일본인이나 신친일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보내어 《한성순보》 제작을 돕는 등 조선 개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침략주의자였다. 1885년 (양력) 8월 13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일본어)에 “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한성순보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면서 한 일은 조선의 이익과는 거리가 멀었다.[13]
한성순보 제10호에서 청병의 횡포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는데, 이른바 친일배청 노선이었다.[12][13]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조선으로 보내면서 “좌우간에 일본 이외의 국가가 조선에 손을 대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13]
3. 발행 및 구성
1883년 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을 시작한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박영효가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건의하고 고종이 이를 허가하면서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창간호가 발행되었다.[11]
《한성순보》는 가로 19cm, 세로 26.5cm 크기에 전체 18쪽 분량으로, 잡지 형태로 제본되어 1부에 30전에 판매되었다.[10] 표제와 본문은 모두 4호 활자를 사용하여 순한문으로 작성되었다. 활자 준비 등의 문제로 국한문이 아닌 순한문으로 발행되었다.[10]
인쇄는 박문국에서 담당했으며, 기술 및 편집은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담당했고, 자금은 정부에서 지원했다.[11] 편집 인원과 기자는 모두 조선의 관원이었다.
"박문(博文)"이라는 이름은 대조선 국민이 널리 문학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고, 더 나아가 박학다식하게 지식을 익히도록 하는 바람을 담은 의미이며,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博文”과는 무관하다.
3. 1. 발행 주기와 형태
한성순보는 열흘에 한 번 발행되는 순보(旬報)였으며, 잡지 형태로 제본되었다. 기사는 모두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관보, 국내 사보(사회면), 각국 근사(외신), 시직탐보(물가 정보) 등으로 구성되었다.[1] 1392년을 기원으로 하는 개국(李氏朝鮮) 연호를 사용하였다.[1]3. 2. 기사 내용
《한성순보》는 순보서(旬報序)에서 밝힌 바와 같이, ‘외국 신문을 많이 번역하여 게재하고 국내 사건도 실으며,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해서 취사선택하도록 하였고, 신문으로서 바름(正)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였다.[9] 기사는 크게 관보, 국내 사보(사회면), 각국 근사(외신), 시직탐보(물가 정보) 등으로 구성되었다.- 관보(官報): 승정원에서 돌리던 조보의 내용을 실었다.[10]
- 국내 사보(社會面): 개인, 관청, 한성시에서 하는 일 등을 구분하여 게재하였다.[9]
- 각국 근사(各國近事):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전쟁, 군사 장비 등 외국의 상황을 보도했다.[9]
- 시직탐보(市直探報): 물가 동향을 알렸다.
《한성순보》는 서양 사상 등을 소개하고[9], 지구도해를 비롯하여 서양 각지의 생물, 풍물을 소개하는 문명 개화란도 마련했다. 소수 기사에서는 의회 민주주의와 시민권 개념을 소개하기도 했다.[1]
《한성순보》가 자주 번역·인용한 외국 자료는 다음과 같다.
- 일본: 《동경일일신보》[9], ''도쿄 니치니치 신문'', ''호치 신문''[1]
- 중국: 《중외신보》[9], 《상해신보》, 《순환일보》, 《문회보》, 《복주일보》[10], ''申報'', ''만국공보''[1]
그 밖에도 미국, 영국, 독일, 인도 등지의 신문과 잡지를 번역·소개하였다.
한편, 《한성순보》 제10호(1884년 양력 1월 30일자)에 실린 “화병범죄”(華兵犯罪) 기사는 한국 최초의 필화(筆禍) 사건으로 기록되었다.[12] 이 기사는 한성 내 한 약방에서 약값 시비로 청나라 병사가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보도했는데, 청나라는 사건 발생 2개월 반이 지난 4월에 조선 정부에 “허위가 있어서는 안 되며 확실한 증거 없이 씌어서는 안 된다.”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기사 작성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한성순보》에서 손을 떼고 일본으로 귀국했다.[12]
3. 3. 번역 및 인용 자료
《한성순보》는 일본의 《도쿄 니치니치 신문》, 《호치 신문》과 중국의 《중외신보》[9], 《상해신보》, 《순환일보》, 《문회보》, 《복주일보》[10], ''申報'', ''字林滬報|Zi Lin Hu Bao중국어'', ''中外新报|Chinese and Foreign Gazette중국어'', 만국공보[1] 등의 기사를 번역·인용하였다. 그 밖에도 미국, 영국, 독일, 인도 등지의 신문과 잡지를 번역·소개하였다.4. 운영 및 평가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발행하였으며, 기술 및 편집은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담당하였고, 자금은 정부에서 지원하였다. 편집 인원과 기자는 모두 조선의 관원이었다. 주사(主事) 또는 사사(司事)로 불린 기자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순한문으로 작성되어 일반 대중에게는 인기가 없었고, 관보의 성격을 띠어 정부 관계자 외에는 구독층이 적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성순보》는 일본의 《동경일일신보》와 중국의 《중외신보》[9]·《상해신보》·《순환일보》·《문회보》·《복주일보》[10], 미국, 영국, 독일, 인도 등지의 신문과 잡지를 번역·소개하였다.
1884년 1월 30일 자 《한성순보》 제10호에 실린 “화병범죄”(華兵犯罪)라는 제목의 기사는 청나라의 간섭을 불러왔다. 이 기사는 한성의 한 약방에서 약값 시비로 인해 청나라 병사가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보도했는데, 청나라는 조선 정부에 공문을 보내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사 작성에 관련되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순보》에서 손을 떼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필화(筆禍) 사건으로 기록된다.[12]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면서 《한성순보》는 간행을 멈추었고, 이후 《한성주보》로 바뀌어 간행된다.
4. 1. 독자층과 평가
《한성순보》는 순한문 신문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소식 전달의 효과는 컸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문 신문은 인기가 없어졌다. 조보를 대체할 관보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정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구독층이 적었다. 1부에 30전이라는 가격에 판매되었는데, 낯선 읽을거리를 돈을 주고 사려는 대중이 적었다.[10]5. 논란과 한계
《한성순보》는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1년 12월 10일에 부산에서 창간된 《Chōsen Shinpō|조선신보 (1881)영어》이다. 하지만 이 신문은 일본인 상업단체인 부산항 상법회의소가 발행하였다.[13]
일부 극우 일본인이나 신친일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보내 《한성순보》 제작을 돕는 등 조선 개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침략주의자였다. 1885년 8월 13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일본어)에 “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순보》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면서 조선의 이익과는 거리가 먼 일을 했다.[13]
5. 1. 청나라의 간섭과 필화 사건
1884년 1월 30일 자 《한성순보》 제10호에 "화병범죄"(華兵犯罪)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한성의 한 약방에서 약값 문제로 시비가 붙어 청나라 병사가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보도한 것이었다. 기사가 나온 지 2개월 반이나 지난 4월에 청나라는 조선 정부에 "허위가 있어서는 안 되며 확실한 증거 없이 씌어서는 안 된다"라는 공문을 보내며 간섭하였다.[12]이 사건으로 이 기사 작성에 관련되었다고 알려진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순보》에서 손을 떼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신문 기사가 문제가 된 한국 최초의 필화(筆禍) 사건이다.[12]
5. 2. 한국 최초의 신문 논란
흔히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알려져 있으나, 엄밀히 말해 한국인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1년 12월 10일에 부산에서 창간된 《Chōsen Shinpō|조선신보 (1881)영어》이다. 다만 이 신문은 일본인 상업단체인 부산항 상법회의소가 발행하였다. 달에 세 번, 10일 간격으로 국판 18면 체계를 갖추어 발행하였다.[13]5. 3. 일본 극우/신친일파의 주장 비판
극우 일본인이나 신친일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보내어 《한성순보》 제작을 돕는 등 조선 개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침략주의자였다. 1885년 (양력) 8월 13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일본어)에 “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순보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면서 조선의 이익과는 거리가 먼 일을 했다.[13]한성순보 제10호에서 청병의 횡포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는데, 이는 친일배청 노선이었다.[12][13]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조선으로 보내면서 “좌우간에 일본 이외의 국가가 조선에 손을 대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13] 그 뒤 당시 외무대신 무쯔(陸奥宗光)는 1894년 갑오개혁에 대해 “우리 나라의 이익을 주안으로 삼는 정도에 그치고, 우리의 이익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13]
6. 폐간과 영향
1884년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소실되어 《한성순보》는 간행이 중단되었다.[1] 총 36호가 발행되었으며, 1886년 주간지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다.[1]
《한성순보》는 한국 근대 언론의 선구자로서 이후 신문 발간과 개화 사상 전파에 영향을 주었다. 국내외 뉴스를 균형 있게 다루어 한국 근대화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했으며,[1][3] 외국 신문 기사를 번역하여 세계 정세와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1]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 근대 언론의 영향을 받아 창간을 주도했다.[1][3]
《한성순보》는 민족의 자주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외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 1. 갑신정변과 박문국 소실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면서 《한성순보》는 간행을 멈추게 되었다.[1] 《한성순보》는 총 36호가 발행되었다. 이후 1886년에 주간지인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다.[1]6. 2. 한성주보로의 계승
1884년 12월,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 과정에서 본사와 인쇄 장비가 불에 타 파괴되면서 『한성순보』는 폐간되었다.[1] 이후 휴간하였다가, 1886년 주간지인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을 시작하였다.[1]6. 3. 한국 근대 언론에 미친 영향
『한성순보』는 한국 근대 언론의 선구자로서 이후의 신문 발간과 개화 사상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3년 10월 31일 창간된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발행되었으며, 정부 관리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구독할 수 있도록 하여 정보 접근성을 높였다.[1]『한성순보』는 국내외 뉴스를 균형 있게 다루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였다.[1][3] 특히, 외국 신문의 기사를 번역하여 게재함으로써 세계 정세와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1]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의 근대 언론에 영향을 받아 『한성순보』 창간을 주도하였다.[1][3] 비록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1884년 12월에 폐간되었지만,[1] 이후 『한성주보』로 이어져 한국 근대 언론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한성순보』는 민족의 자주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외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한성순보』가 한국 사회에 남긴 긍정적인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4-02-09
[2]
논문
Korea's First Newspaper: The Japanese Chosen shin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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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9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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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삼문
1995
[5]
문서
明治15年10月19日、花房と同船して済物浦条約履行のために訪日した修信使は、朴泳孝(正史)、金晩植(副使)、徐光範(従事官)である。また、視察目的で閔泳翊、金玉均が随行している。
[6]
문서
朴定陽が視察のために来日した前年(1881年)に、福澤からの提案で兪吉濬など23名が日本へ留学している。
[7]
문서
軍事訓練所をつくりたいとの朝鮮側の意向により、このとき松尾三代太郎、原田一も雇用されている。
[8]
백과사전
한성순보(漢城旬報)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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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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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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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01
[11]
웹사이트
엔싸이버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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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백과사전
한성순보
http://preview.brita[...]
2008-10-04
[13]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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