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당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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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당집단은 1957년 6월, 니키타 흐루쇼프의 권력에 반대하여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소련 공산당 내 보수파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평화 공존 노선에 반발하여, 게오르기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흐루쇼프는 이들을 "반당 집단"으로 규정하고 숙청했으며, 이 사건은 흐루쇼프의 권력 강화와 탈스탈린화 정책 가속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소련의 대외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중국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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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당집단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명칭 | 반당 집단 |
원어 명칭 (러시아어) | антипартийная группа Маленкова, Кагановича, Молотова и примкнувшего к ним Шепилова (안티파르티나야 그룹파 말렌코바, 카가노비차, 몰로토바 이 프리므크누브셰고 크 님 셰필로바) |
지도자 |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드미트리 셰필로프 |
창립일 | 1956년 2월 |
해산일 | 1957년 6월 |
국가 | 소비에트 연방 |
이념 및 정치 성향 | |
이념 | 반수정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
정치 성향 | 극좌 |
구성 | |
소속 정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CPSU) |
정치국 내 의석수 | 7석 |
2. 배경
1953년3월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 공산당은 중앙위원회의 간부회 멤버를 중심으로 한 집단 지도 체제로 변경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5년2월 게오르기 말렌코프를 해임하고, 1956년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반 스탈린 연설을 하는 등 전횡을 일삼으며 동료들과 대립을 격화시켜 갔다.
2. 1.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
1953년3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니키타 흐루쇼프, 니콜라이 불가닌 등의 집단 지도 체제로 변경되었다. 이들은 중앙위원회 고위 간부층으로 구성된 간부회 멤버였다.처음에는 말렌코프가 베리야와 협력했으나, 이후 대립하면서 흐루쇼프와 손을 잡았다. 6월 베리야가 체포, 처형된 후 흐루쇼프의 당내 영향력이 커졌다. 1955년2월 흐루쇼프는 말렌코프를 해임하고 불가닌을 수상에 임명했다.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반 스탈린 연설을 하는 등, 흐루쇼프는 전횡을 일삼으며 동료들과 대립했다.
2. 2.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
반당집단 구성원들은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비밀 연설을 통해 스탈린을 비판한 것을 위선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으며 대숙청 등과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이 국제적으로 자본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3. 전개
1957년 6월 18일, 게오르기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드미트리 셰필로프 외무장관과 합류하여 흐루쇼프 해임 시도에 나섰다. 카가노비치는 이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셰필로프를 설득했다.[1][2] 이들은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흐루쇼프를 제1서기에서 해임하고 니콜라이 불가닌을 총리로 임명하는 제안을 투표에 부쳤다.
간부회에서 이들의 제안은 찬성 7표(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보로실로프, 페르부힌, 사부로프), 반대 4표(흐루쇼프, 미코얀, 수슬로프, 키리첸코)로 통과되었다.[3]
그러나 흐루쇼프는 오직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만이 자신을 해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반격했다. 그는 게오르기 주코프 국방부 장관의 지지를 받았으며, 주코프는 군대를 동원해 흐루쇼프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주코프는 격렬한 연설을 통해 반당 집단이 스탈린의 잔혹 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군대는 이 결의안에 반대하며, 내 명령 없이는 탱크 한 대도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4] 6월 22일 열린 중앙위원회 임시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반대파들을 "반당 집단"이라고 명명했다. 결국 권력 투쟁 끝에 흐루쇼프는 제1서기 직을 유지했다.[5]
윗줄 (왼쪽부터 오른쪽): 게오르기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아랫줄 (왼쪽부터 오른쪽): 라자르 카가노비치, 드미트리 셰필로프ru
3. 1. 반당 집단의 형성
1953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니키타 흐루쇼프, 니콜라이 불가닌 등의 집단 지도 체제로 변경되었다. 이들은 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중앙위원회 중에서 더욱 고위 간부층으로 구성된 간부회의 멤버였다.처음에는 말렌코프가 베리야와 손을 잡고 권세를 떨쳤지만, 차츰 대립하게 되어 흐루쇼프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6월에 베리야가 체포, 처형된 후 흐루쇼프가 당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흐루쇼프는 1955년 2월에 말렌코프를 해임하고 불가닌을 수상으로 앉혔다.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 스탈린 연설을 하는 등, 점차 전횡의 정도를 더해가며 동료들과의 대립을 격화시켜 갔다.
반당 집단의 구성원들은 흐루쇼프가 대숙청 등 스탈린 시대의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의 비밀 연설에서 스탈린을 비판한 것을 위선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또한,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이 국제적으로 자본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3. 2. 흐루쇼프 해임 시도
1957년 6월 18일, 게오르기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드미트리 셰필로프 외무장관과 합류하여 흐루쇼프 해임 시도에 나섰다. 카가노비치는 이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셰필로프를 설득했다.[1][2] 이들은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흐루쇼프를 제1서기에서 해임하고 니콜라이 불가닌을 총리로 임명하는 제안을 투표에 부쳤다. 투표 결과는 찬성 7표(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보로실로프, 페르부힌, 사부로프), 반대 4표(흐루쇼프, 미코얀, 수슬로프, 키리첸코)로 가결되었다.[3]그러나 흐루쇼프는 오직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만이 자신을 해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반격했다. 그는 게오르기 주코프 국방부 장관의 지지를 받았으며, 주코프는 군대를 동원해 흐루쇼프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주코프는 격렬한 연설을 통해 반당 집단이 스탈린의 잔혹 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군대는 이 결의안에 반대하며, 내 명령 없이는 탱크 한 대도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4] 6월 22일 열린 중앙위원회 임시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반대파들을 "반당 집단"이라고 명명했다. 결국 권력 투쟁 끝에 흐루쇼프는 제1서기 직을 유지했다.[5]
3. 3. 중앙위원회 총회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흐루쇼프는 게오르기 주코프 국방장관과 KGB의 지원을 받아 중앙위원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했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은 흐루쇼프의 기존 내외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중앙위원 대다수는 흐루쇼프를 지지했고, 반대파의 행위를 엄중히 비판했다. 주코프는 붉은 군대가 흐루쇼프를 지지한다고 강조하며 "군대는 이 결의안에 반대하며, 내 명령 없이는 탱크 한 대도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 이 결과, 반대파는 '반당집단'으로 규정되어 당 직책에서 해임되었다.4. 결과 및 영향
반당 집단 사건은 흐루쇼프의 권력 기반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요 경쟁자들이 제거되면서 흐루쇼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반당 집단 가담자들은 당과 정부 요직에서 해임된 이후, 몰로토프는 몽골 인민 공화국 대사, 말렌코프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력 발전소 소장, 카가노비치는 우랄 산맥의 작은 칼륨 공장 소장, 셰필로프는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현지 과학 아카데미 경제 연구소장 등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직책을 받았다.[6]
1958년, 흐루쇼프는 반당 집단의 움직임으로 이득을 볼 뻔했던 불가닌 총리를 은퇴시키고 총리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1961년에는 국방부 장관 주코프를 해임했는데, 주코프는 반당 집단에 대항하는 흐루쇼프를 도왔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이견이 발생했다. 흐루쇼프는 주코프 해임의 정당성으로 보나파르티즘을 주장했다.
이 사건의 결과, 흐루쇼프의 국제 공산주의 블록 내 입지는 한동안 불안정해졌고,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지지가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흐루쇼프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소련의 핵무기 기술을 얻었고, 그해 10월에 ''국방을 위한 신기술 협정''이 체결되었다.[7]
4. 1. 흐루쇼프 권력 강화
1957년 반당집단 제거 이후, 흐루쇼프는 자신의 측근들을 당과 정부 요직에 앉히며 권력을 강화했다. 1958년에는 니콜라이 불가닌 총리가 은퇴를 강요받았고, 흐루쇼프가 총리직을 겸임하며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6]4. 2. 탈스탈린화 가속화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셰필로프는 언론의 비난을 받았고, 1957년 6월 29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 결정에 따라 당과 정부에서 해임되었다.[6] 이들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직책을 맡았다. 몰로토프는 몽골 인민 공화국 대사, 말렌코프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력 발전소 소장, 카가노비치는 우랄 산맥의 작은 칼륨 공장 소장, 셰필로프는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현지 과학 아카데미 경제 연구소장이 되었다.1961년, 탈스탈린화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셰필로프는 공산당에서 완전히 제명되었고, 이후 대부분 조용한 삶을 살았다. 셰필로프는 흐루쇼프의 후임자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1976년 당에 다시 가입했지만, 주변부에 머물렀다.
4. 3.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반당 집단 사건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헝가리 혁명(1956) 진압 과정에서 소련의 강경 대응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외교 정책은 서방 세계와의 긴장 완화에 기여했으나, 동시에 중소 분쟁으로 대표되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했다. 특히, 흐루쇼프는 반당 집단 사건 직후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핵무기 기술을 제공하는 등 중대한 양보를 했다. 그해 10월에 '국방을 위한 신기술 협정'이 체결되었다.[7]5. 평가 및 역사적 의의
반당 집단 사건은 스탈린 사후 소련의 정치적 변화와 권력 투쟁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참조
[1]
서적
Khrushchev—a political life
http://archive.org/d[...]
St. Martin's Press
1995
[2]
서적
Executive Power and Soviet Politics: The Rise and Decline of the Soviet State
https://books.google[...]
M.E. Sharpe
1992
[3]
간행물
Declassified Materials from CPSU Central Committee Plenums. Sources, Context, Highlights
1999
[4]
서적
Нет другого пути
[5]
웹사이트
The Anti-Party Group
http://soviethistory[...]
2015-06-19
[6]
문서
Khrushchev Expels the ‘Anti-Party Group’
https://soviethistor[...]
[7]
서적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2. The Great Leap Forward, 1958–1960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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