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배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배무는 후한 영제 때 출사하여 상서령까지 오른 인물이다. 초평 4년(193년) 헌제의 명으로 죄수 200명을 사면했는데, 이각은 배무를 비난했지만 헌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안 2년(197년) 이각을 토벌하여 열후에 봉해졌으며, 건안 19년(214년)에는 헌제의 명을 받아 조조에게 금새 등을 하사했다. 배무의 아들 배잠, 배준, 배관, 배집, 배휘는 각각 위나라와 촉한에서 활약했다.

2. 생애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대에 출사하여 현령, 태수, 상서를 역임하였고 상서령에까지 올랐다.[2][5]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렸다. 황제는 시어사 배무를 시켜 죄가 가벼운 자 2백 명을 사면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답하였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 배무는 단외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 공적으로 열후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3][6]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 두는 한편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이에 좌중랑장 · 양선정후(楊宣亭侯)인 배무를 지절로 하여 위공에게 전달하였다.[7]

부친 배엽은 병주 자사·도료장군을 지냈다.[3][4]

2. 1. 출사 및 관직 생활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대에 출사하여 현령(縣令) · 군수(郡守) ·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2][5]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려 황제가 시어사(侍御史) 배무를 시켜 죄가 가벼운 자 2백 명을 사면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배무가 멋대로 죄수를 풀어주고 나쁜 무리와 결탁했을 것이라며 배무를 붙잡아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칙명에 따라 은택을 베풀고 죄가 가벼운 자를 풀어주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다며 한쪽은 사면해주는데 한쪽은 죄를 묻는 것은 불가하다며 들어주지 않았다.[9]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는 단외(段煨)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3][6]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 두는 한편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이에 좌중랑장(左中郞將) · 양선정후(楊宣亭侯)인 배무를 지절(持節)로 하여 위공에게 전달하였다.[7]

부친 배엽은 병주 자사·도료장군을 지냈다.[3][4]

2. 2. 이각과의 갈등과 헌제 옹호

배무는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때 출사하여 현령(縣令) · 군수(郡守) ·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2][5]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리자 헌제의 명을 받아 죄가 가벼운 자 200명을 사면하였다.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6]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답하였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는 단외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6] 이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3]

건안 19년(214년) 3월, 헌제의 칙사로서 좌중랑장(左中郞將) · 양선정후(楊宣亭侯)였던 배무는 지절(持節)로써 위공(魏公)에게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하고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7]

2. 3. 이각 토벌 및 공적

배무는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때 출사하여 현령(縣令) · 군수(郡守) ·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2][5]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려 황제는 시어사(侍御史) 배무를 시켜 죄가 가벼운 자 2백 명을 사면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답하였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는 단외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6] 이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3]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 두는 한편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이에 좌중랑장(左中郞將) · 양선정후(楊宣亭侯)인 배무를 지절(持節)로 하여 위공에게 전달하였다.[7]

2. 4. 조조에게 금새 하사

배무는 영제 시대에 출사하여 현령, 태수, 상서를 역임했고, 관위는 상서령에까지 올랐다.[2][5] 초평 4년(193년), 시어사로서 헌제의 명을 받아 옥에 갇힌 200여 명을 석방했는데, 그 중에는 이각에 의해 갇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배무가 함부로 죄수를 석방했다며 체포하려 했으나, 헌제는 따르지 않았다.[6]

건안 3년(198년), 알자복야로서 단외관중의 여러 장수를 이끌고 이각을 토벌하여 삼족을 멸했다.[6] 그 공로로 열후에 봉해졌다.[3] 건안 19년(214년), 좌 중랑장, 양선정후로서 헌제의 칙사로 조조에게 금새, 적불, 원유관을 수여했다.[7]

3. 가계

배무


『산서통지』[1]에는 배무의 다섯 아들의 이름과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 배잠은 위나라의 광록대부·청양정후였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고, 배잠 자신도 세세한 행실을 지키지 않는 성격이라 배무에게 경시되었다[2]
  • 배준은 십여 세 때 촉중의 장사로 부임하는 누이를 보내려다 전란에 휘말려 귀향하지 못하고, 촉한광록훈이 되었다.[8]
  • 배관은 상서령을 지냈으며 중권배씨의 조상이다.
  • 배집은 후한 헌제 시기에 공부상서가 되었으며 동권배씨의 조상이다.
  • 배휘는 위나라의 기주 자사·난릉무공으로 서권배씨의 조상이다.[3]

3. 1. 친족 관계


3. 2. 아들

『산서통지』[1]에는 배무의 다섯 아들의 이름과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 배잠은 위나라의 광록대부·청양정후였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고, 배잠 자신도 세세한 행실을 지키지 않는 성격이라 배무에게 경시되었다[2]
  • 배준은 십여 세 때 촉중의 장사로 부임하는 누이를 보내려다 전란에 휘말려 귀향하지 못하고, 촉한광록훈이 되었다.[8]
  • 배관은 상서령을 지냈으며 중권배씨의 조상이다.
  • 배집은 후한 헌제 시기에 공부상서가 되었으며 동권배씨의 조상이다.
  • 배휘는 위나라의 기주 자사·난릉무공으로 서권배씨의 조상이다.[3]

참조

[1] 간행물 山西通志 s:zh:山西通志_(四庫全書本)/全覽[...]
[2] 서적 三国志 魏書 裴潜伝 s:zh:三國志/卷23#裴潛
[3] 서적 新唐書 s:zh:新唐書/卷071上
[4] 문서 ただし『山西通志』は父の名を裴煜とする。
[5] 문서 s:zh:晉書/卷035#裴秀
[6] 서적 後漢書 董卓伝 s:zh:後漢書/卷72#董卓
[7] 서적 三国志 魏書 武帝紀注『献帝起居注』 s:zh:三國志/卷01
[8] 서적 三国志 蜀書 孟光伝及び注に引く『裴氏家記』 s:zh:三國志/卷42#孟光
[9] 문서 배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