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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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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정지는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체구가 크고 무략에 뛰어났다. 1265년 7세의 어린 나이에 금위에 소속되어 도지가 되었으며, 1270년 개경 환도 시 왕을 호종하여 대정에 보임되었다. 1291년 합단적 격퇴에 큰 공을 세워 원나라 황제로부터 칭찬과 포상을 받았으며, 이후 찰방사를 역임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1318년 제주도 반란을 진압했으나, 1321년 당옥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은거하다가 1322년 사망했으며, 사후 군사적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관리로서의 능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2. 생애

배정지는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뛰어난 무예와 충성심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318년(충숙왕 5) 제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후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에 올랐으나, 1321년(충숙왕 8) 당옥(黨獄)에 연루되어 경상도 죽림으로 유배되었다.[6] 차남 배천경(裴天慶)이 대신 유배를 가겠다고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배천경 또한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다.[5]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는 병을 핑계로 거문고와 바둑으로 소일했다.[5] 배정지는 수염이 많고 머리털은 희었으며 키가 큰 인물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의 군사적 지략은 높이 평가했지만, 행정 능력은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1322년 5월 27일, 64세로 사망했다.[6]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배정지는 체구가 크고 무략(武略)에 뛰어났다. 아버지는 사후 증 통헌대부 민부전서(贈通憲大夫 民部典書)에 추증된 배영(裵瑩)이고, 어머니는 우계군부인 이씨(羽溪郡夫人 李氏)로 내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을 역임한 이신송(李臣松)의 딸이다.

1265년(원종 6) 겨우 7살[1]에 금위(禁衛)에 소속되어 도지(都知)가 되었고,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12세[2]로 왕을 호종하여 대정(隊正)에 보임되었다.

1291년(충렬왕 17) 별장(別將)으로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합단적(哈丹賊)과 싸웠다.[3] 원나라에서 패주한 합단은 고려를 침략하여 강원도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 배정지가 칼을 뽑고 말을 달리자 가는 곳마다 적병이 바람에 불리듯 쓰러졌는데, 화살이 날아와 아래 잇몸을 꿰뚫었으나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워 숱하게 적을 사로잡거나 베었다. 이 공으로 중랑장(中郞將)으로 뛰어올랐으며, 인후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황제를 만나니 황제가 그를 용사(勇士)라고 칭찬하며 백금(白金) 50냥을 하사하였다.

1305년(충렬왕 31) 양부(兩府)[4]의 천거로 충청도찰방사(忠淸道察訪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찰방사(全羅道察訪使)로 옮겼는데, 간교한 자들을 억누르고 고아나 홀아비 등 소외된 백성들을 잘 보살피니 그 일대가 편안해졌다. 이후 충선왕(忠宣王)조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신군호군(弘信軍護軍), 응양군호군(鷹揚軍護軍), 비순위대호군(備巡衛大護軍),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등을 역임했으며, 전농사(典農司)와 유비창(有備倉)이 설치되었을 때 왕명으로 그 업무를 주관했다.

1318년(충숙왕 5) 제주(濟州)의 백성인 김성(金成), 사용(士用), 엄복(嚴卜) 등이 흉포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반란을 일으켜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를 축출했는데, 이 때 배정지가 존무사(存撫使)로서 군대를 이끌고 제주에 파견되어, 반란군의 소굴을 쳐서 두목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용서하자 서리와 백성들이 평안해졌다.

2. 2. 합단적 격퇴와 원나라 황제 알현

1291년(충렬왕 17) 별장으로서 만호 인후를 따라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합단적(哈丹賊)과 싸웠다.[3] 당시 원나라에서 패주한 합단은 고려를 침략하여 강원도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배정지는 칼을 뽑고 말을 달리자 가는 곳마다 적병이 바람에 불리듯 쓰러졌는데, 화살이 날아와 아래 잇몸을 꿰뚫었으나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워 숱하게 적을 사로잡거나 베었다.

이 공으로 중랑장으로 뛰어올랐으며, 인후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가 그를 용사(勇士)라고 칭찬하며 백금(白金) 50냥을 하사하였다.

2. 3. 찰방사 재임과 백성을 위한 정치

1305년(충렬왕 31) 양부(兩府)[4]의 천거로 충청도 찰방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 찰방사로 옮겼는데, 간교한 자들을 억누르고 고아나 홀아비 등 소외된 백성들을 잘 보살피니 그 일대가 편안해졌다.

2. 4. 제주도 반란 진압과 유배

1318년(충숙왕 5) 제주의 백성인 김성(金成), 사용(士用), 엄복(嚴卜)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를 축출했다. 이때 배정지는 존무사(存撫使)로서 군대를 이끌고 제주에 파견되어 반란군의 소굴을 공격하여 두목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용서하여 백성들이 평안을 되찾게 하였다.[6]

귀환 후 밀직사 부사(密直司副使) 통헌대부(通憲大夫)가 더해졌으나, 1321년(충숙왕 8) 당옥(黨獄)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경상도 통영의 죽림(竹林)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차남인 전 별장 배천경(裴天慶)은 자신을 대신하여 유배를 보내달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배천경까지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다.[6]

2. 5. 사망과 평가

1321년(충숙왕 8) 당옥(黨獄)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경상도 죽림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차남인 전 별장 배천경(裴天慶)은 자신을 대신 보내달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배천경까지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다.[5]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는 집 문을 닫아걸고 병을 핑계로 매일 거문고와 바둑으로 소일했다.[5] 그는 수염이 많고 머리털은 희었으며 키가 크고 장대하였다. 당대 사람들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지략(智略)이 우수한 점은 탄복했지만, 그가 관리로서 유능한 점은 알아주지 못했다.

이듬해(1322년) 5월 27일에 64세로 사망했다.[6]

3. 사후

사후 묘지문(墓誌文)은 당시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었던 이제현이 짓고, 글씨는 박유(朴濡)가 썼다. 나주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1797년 (조선 정조 21) 나주 무열사에, 1856년 (조선 철종 7) 경상남도 고성 마암의 수림서원(繡林書院)에 배향되었다. 1980년 3월 무안 태봉리에 세워진 태봉사에 배향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배손적(裴孫迪)증 대호군(大護軍)
조부배인검(裴仁儉)증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아버지배영(裴瑩)증 민부전서(民部典書)
어머니우계군부인 이씨내시(內侍)·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이신송(李臣松)의 딸
동생배정란(裴廷蘭)
부인낭장(郎將) 정승백(鄭承伯)의 딸
장남배성경(裴成慶)
차남배천경(裴天慶)계림부윤(鷄林府尹), 달성군(達成君)
3남배함경(裴咸慶)
첫째 사위오인경(吳仁景)
둘째 사위이홍택(李洪澤)


참조

[1] 서적 배정지 묘지명
[2] 서적 배정지 묘지명
[3] 역사 합단
[4] 정치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와 밀직사(密直司)
[5] 서적 1322-05-27
[6] 서적 1322-05-27
[7] 문학 익재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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