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중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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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후중상설(Dolchstoßlegende)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을 독일 내부의 배신, 특히 혁명가, 사회주의자, 유대인,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한 세력에게 돌리는 신화이다. 이 신화는 독일 군부와 보수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독일 국민들에게 널리 퍼졌다. 독일의 패배가 전장에서의 군사적 실패가 아닌, 내부의 '배신' 때문이라는 주장은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부추기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 나치당은 이 신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권력을 잡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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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중상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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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돌히슈토슬레겐데 (Dolchstoßlegende) 11월 범죄자 (Novemberverbrecher) |
로마자 표기 | Dolchstoßlegende |
의미 | 등 뒤에서 칼 찌르기 |
설명 | |
내용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이 군대가 아닌 내부의 배신 때문이라는 음모론. |
주요 주장 |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정치인들이 전쟁 중에 독일군을 배신했다. 유대인이 독일의 패배에 책임이 있다. 공화주의자들이 독일 제국을 전복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 |
역사적 배경 | |
발생 시기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
주요 원인 | 독일의 패전과 그에 따른 혼란 극심한 경제난과 사회 불안 군부의 불만과 정치적 선동 |
전파 | 군부와 우익 정치 세력에 의해 널리 퍼짐 나치즘의 주요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이용됨. |
영향 | |
정치적 결과 |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 심화 나치당을 비롯한 극우 세력의 성장 독일 내 유대인과 소수자에 대한 박해 정당화. |
사회적 결과 | 사회 분열과 갈등 심화 전쟁 책임에 대한 논쟁 격화 독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김. |
관련 용어 | |
유사 개념 | 유대 볼셰비즘 11월 범죄자 |
반대 주장 | 실제로는 군부의 전략 실패와 국내외의 복합적인 요인이 패전의 원인이었다. |
참고자료 | |
관련 연구자 | 에버하르트 콜브 (Eberhard Kolb) 알렉산더 왓슨 (Alexander Watson) 리처드 J. 에반스 (Richard J. Evans) 나루세 오사무 (成瀬治) 야마다 킨고 (山田欣吾) 키무라 세이지 (木村靖二) |
기타 | |
국가기록원 문서 | 국가기록원 문서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최고육군사령부(OHL)는 군사뿐만 아니라 보조 서비스 법을 통해 경제도 통제했다. 힌덴부르크 계획에 따라 전시 생산을 위한 경제 총동원을 목표로 했으나, 힌덴부르크 원수와 루덴도르프 참모총장은 노동조합과 독일 제국 의회에 양보해야 했다.[3] 1917년 7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황제에게 총리 베트만 홀베크 해임을 요구하며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독일 제국 의회 평화 결의안 이후 의회 신임을 잃고 사임했고, 미하엘리스가 그를 대신했지만 100일 만에 축출되었다.[4]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침공을 경계했지만, 연합국은 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고 전투 준비된 군대를 보유했다.[5] 서부 전선에서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고 독일군이 후퇴했지만, 연합군은 알자스-로렌 일부 지역에서만 1914년 독일 국경을 넘었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러시아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었다. 서부 전선에서 독일은 1918년 봄 공세에서 성공했지만, 100일 공세에서 연합군에게 지역을 빼았겼다. "돌격대 전설"은 무기 산업 파업으로 병사들이 군수품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이 파업은 유대인들이 선동한 것으로 여겨졌다.[14]
독일은 1918년 말 연합군의 마케도니아와 이탈리아 전선 승리로 전략적 위치가 약화되었다. 불가리아는 1918년 9월 29일 휴전을,[6] 오스만 제국은 10월 30일 무드로스에서 항복했다.[6]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빌라 주스티 휴전을 체결했다.
10월 5일, 독일 총리 바덴 대공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 조항을 논의 기초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윌슨은 독일이 의회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영토를 포기하고, 고해군을 포함한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6일, 루덴도르프는 해임되었고, 그뢰너 중장이 그를 대신했다.[9]
1918년 11월 11일, 독일 혁명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대표자들은 휴전 조약에 서명했다. 군 사령관들은 책임을 회피했지만, 공화당 정치인들은 휴전과 관련되었다. 휴전 문서에 서명한 에르츠베르거는 나중에 살해되었다.
독일 언론은 전쟁 내내 승리 소식만 보도했고, 독일은 점령되지 않은 채 외국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독일 국민은 휴전 요청에 당황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비난받지 않고, 독일군은 패배하지 않았다고 여겨졌으며, 공화당 정치인,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독일을 배신했다고 비난받는 "등에 칼 꽂히는 신화"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불안정한 공화국에 대한 영토 손실, 재정적 고통, 배상금 지불 일정으로 더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전직 군 지도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정치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판했다. 가톨릭교도조차 교황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 충성심 부족으로 의심받았다. 이들은 전쟁을 지원하지 않고 독일을 팔아넘기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되었다. "11월 범죄자"는 독일 민족주의(German nationalism)을 비판하거나, 불안을 조장하고 파업을 일으키거나, 폭리를 통해 "등에 칼을 꽂았다"고 여겨졌다.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는 1918년 10월 독일 혁명 전 독일 조국당 계열 신문에서 독일의 고전 원인을 패배주의자들 탓으로 돌리는 비판론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패전 후 “군은 최선을 다했다. 책임은 후방에 있다”는 생각이 국민들 사이에 공감을 얻었다. 독일 혁명에서 권력을 잡은 의장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는 1918년 12월 귀환 병사들에게 “어떤 적에게도 여러분은 패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며 ‘배후 찌르기설’ 형성을 도왔다.
단검으로 찔렸다는 표현은 1918년 12월 중순 스위스 취리히 신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 기자가 “독일군은 민간인에 의해 배후에서 단검으로 찔렸다”고 쓴 데서 시작되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조인 후, 독일 국민의회 조사위원회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원수는 “제국은 뒤에서 칼에 찔렸다”고 증언했다. 좌익 세력이 반전, 혁명 운동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전쟁 지속이 불가능해졌고, 패전 책임은 혁명가와 사회주의자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영국 소장의 『마지막 4개월』(The Last Four Months)이 독일 신문에 “독일군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배신당했지만 전장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소개되어 배후 찌르기설이 퍼졌다. 힌덴부르크도 “어떤 영국 장군이 말한 것은 옳다”며 언급했지만, 모리스는 부인 성명을 발표했다. 배후 찌르기설은 보수파와 우익이 좌익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역사관으로, 독일 국가인민당이 좌익 정당 공격에 이용했다.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등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이 배후 찌르기설에 유대인을 엮는 주장을 불러왔다.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은 독일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혁명을 일으키려 한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선전이 지지를 얻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도 배후 찌르기설을 신봉하여 독일 혁명 혁명가들과 바이마르 공화국파를 “11월의 범죄자”라고 비난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는 『국가의 적 시오니스트』(Der Staatsfeindliche Zionismus)에서 “독일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이 발포어 선언 실행을 위해 독일 패전을 모의했다”는 유대인 음모론을 전개했다. 나치에 의해 계승된 배후 찌르기설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패전까지 유지되었다.
2. 1. 독일 제국의 상황
1918년 말,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에 의해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고, 동맹국들이 차례로 항복하면서 전략적 위치가 약화되었다.[6]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항복으로 독일 남부 국경이 연합군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6]1918년 서부 전선에서 마지막 독일 공세가 실패한 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전쟁이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휴전 협상과 독일의 민간 정부로의 신속한 전환을 촉구했다. 그들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독일군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7] 루덴도르프는 10월 1일 자신의 참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폐하께서 정부에 사태가 이렇게 된 데 대해 주로 책임이 있는 그러한 세력들을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제 우리는 이 양반들이 각 부처로 진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제 협상해야 할 평화 조약에 서명하게 하자.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이 수프를 그들이 먹게 하자![7]
이러한 방식으로 루덴도르프는 정부에 들어오게 될 공화당 정치인들 – 그중 많은 수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을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힌덴부르크 대신 지게 될 희생양으로 설정했다.[7] 일반적으로 전시 중 휴전은 적대 세력의 군 사령관들 사이에서 협상되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 임무를 새로운 민간 정부에 넘겼다.[7] 군부의 태도는 "좌익 정당들이 이 평화의 불명예를 떠맡아야 한다. 그러면 분노의 폭풍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였고, 그 후 군부는 다시 개입하여 상황이 다시 "옛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할 수 있었다.[7]

2. 2. 연합국의 상황
1930년, 영국의 군사 이론가 바질 리델 하트는 독일이 휴전 조건에 동의한 주된 이유가 서부 전선의 상황보다는 내부 붕괴와 오스트리아 방면에서 새로운 공격 위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12] 그는 11월 4일 오스트리아 항복 이후, 연합군이 뮌헨을 향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트렌차드의 독립 공군은 베를린 폭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유럽 주둔 미군은 208만 5천 명, 42개 사단 규모였으며, 이 중 32개 사단이 전투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12]독일 역사가 이마누엘 가이스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독일 내부 요인이 독일의 평화 결정에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10월 27일 카를 황제의 항복으로 독일이 보헤미아와 티롤을 통한 침입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이는 독일 혁명 운동이 새로운 침략 위협에 취약한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시작된 것과 연결된다고 보았다.[12]
해군 사학자 스티븐 로스킬은 1918년 연합군의 잠수함 대책 부대가 U보트에 큰 타격을 입혔다고 평가하며, '뒷통수 공격'은 독일 군국주의자들의 상상이라고 주장했다.[13] 그러나 그는 "무장 세력의 승리"(연합군의 봉쇄로 인한 독일 민간인의 평화 요구)가 해군, 육군, 공군의 승리와 함께 연합군 승리에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13]
3. 신화의 발전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독일 최고사령부(OHL)는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의 상당 부분도 통제했다. 힌덴부르크 원수와 루덴도르프 참모총장은 노동조합과 독일 제국 의회에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3] 1917년 7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총리 베트만 홀베크를 해임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독일 제국 의회 평화 결의안 이후 의회의 신임을 잃고 사임했으며, OHL의 지원을 받은 미하엘리스가 그를 대신했지만, 그는 취임 100일 만에 의회에 의해 축출된 최초의 총리가 되었다.[4]
수년간의 전투와 수백만 명의 사상자 발생 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침공에 대해 경계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미국으로부터 풍부한 보급을 받았고, 전투 준비가 된 신선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서부 전선에서는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고 독일군이 후퇴했지만, 연합군은 1914년 독일 국경을 넘지 못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끝났다. 독일은 1918년 봄 공세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공세는 추진력을 잃었고, 연합군은 100일 공세에서 잃어버린 지역을 탈환했다. "돌격대 전설"에 기여한 독일 공세의 전반적인 실패는 무기 산업의 파업으로 인해 병사들이 충분한 군수품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난받았다. 이 파업은 반역적인 요소들에 의해 선동된 것으로 여겨졌고,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비난을 받았다.[14]
독일의 전략적 위치 약화는 1918년 말 연합군의 마케도니아와 이탈리아 전선 승리 이후 다른 중앙 강국들의 급속한 붕괴로 인해 악화되었다. 불가리아는 1918년 9월 29일 휴전을 체결했고,[6]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은 무드로스에서 항복했다.[6]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휴전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항복으로 독일의 남부 국경이 연합군의 침공 위협을 받게 되었다.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전직 군 지도자들은 평화와 바이마르 정치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톨릭교도조차도 교황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부족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이들 집단은 전쟁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고 적들에게 독일을 팔아넘기는 데 역할을 했다고 주장되었다.
역사가 리처드 슈타이그만-갈에 따르면, 배후중상설은 1918년 2월 3일 프로테스탄트 궁정 사제 브루노 도링이 설교한 설교에서 비롯되었다.[14] 그러나 독일 학자 보리스 바르트는 도링이 실제로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단지 '배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15] 바르트는 1918년 11월 2일 뮌헨 뢰벤브로이켈러에서 열린 중도 정치 집회에서 독일 제국 국회의 진보인민당 당원인 에른스트 뮐러-마이닝겐이 청중들에게 계속 싸울 것을 촉구하며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을 처음으로 기록했다.
패전 후에도 전선 병사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군은 최선을 다했다. 책임은 모두 후방에 있다"는 생각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공감을 얻었다.
'등 뒤에서 단검으로 찔렸다'는 표현은 1918년 12월 중순 스위스 취리히의 신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이 기자의 논평으로 "독일군은 민간인에 의해 배후에서 단검으로 찔렸다"고 쓴 데서 시작되었다. 해외 중립국으로부터 나온 발언으로서 배후중상설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크게 이용되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조인 후, 독일 국민의회에서 독일 패전 원인을 조사하는 조사위원회가 열렸다.
또한 영국의 프레데릭 모리스 소장이 1919년에 출판한 『마지막 4개월』이 독일 신문에 의해 "독일군은 국내 전선에서 사회주의자들에게 배신당했지만 전장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는 내용으로 소개된 것도 배후중상설이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 모리스는 독일 신문에 부인 성명을 발표했지만, 일단 퍼진 소문은 더 이상 없앨 수 없었다.
배후중상설은 보수파와 우익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좌익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편리한 역사관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전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했다. 특히 보수 정당 독일 국가인민당이 좌익 정당을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
더욱이 당시 러시아와 독일에서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던 레프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쿠르트 아이스너 등이 유대인이었던 것이 배후중상설에 유대인을 엮는 주장을 불러왔다.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은 독일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패전 틈을 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 한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선전이 지지를 얻게 되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와 아돌프 히틀러도 배후중상설을 신봉하여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들과 혁명 후 실권을 잡은 바이마르 공화국파를 "11월의 범죄자"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나치의 역사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22년에 저술한 『국가의 적 시오니스트』에서 "독일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이 영국의 승리와 발포어 선언 실행을 위해 독일의 패전을 모의했다"는 유대인 음모론을 전개했다. 나치에 의해 계승된 배후중상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까지 유지되었다.
존 휠러-베넷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부터 연합군이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는 배후중상설을 다시는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33]
3. 1.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의 역할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마지막 독일 공세가 실패한 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전쟁이 실패할 운명임을 인정하고,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휴전 협상과 독일의 민간 정부로의 신속한 전환을 촉구했다. 그들은 전쟁 패배 책임을 자신들과 독일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7] 루덴도르프는 10월 1일 자신의 참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Ich habe aber S.M. gebeten, jetzt auch diejenigen Kreise an die Regierung zu bringen, denen wir es in der Hauptsache zu danken haben, daß wir so weit gekommen sind. Wir werden also diese Herren jetzt in die Ministerien einziehen sehen. Die sollen nun den Frieden schließen, der jetzt geschlossen werden muß. Sie sollen die Suppe jetzt essen, die sie uns eingebrockt haben!de[8]
> 나는… 폐하께 정부에 사태가 이렇게 된 데 대해 주로 책임이 있는 세력들을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제 우리는 이 양반들이 각 부처로 진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제 협상해야 할 평화 조약에 서명하게 하자.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이 수프를 그들이 먹게 하자!
이러한 방식으로 루덴도르프는 정부에 들어오게 될 공화당 정치인들(그중 많은 수가 사회주의자였다)을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힌덴부르크 대신 지게 될 희생양으로 설정했다.[7] 일반적으로 전시 중 휴전은 적대 세력의 군 사령관들 사이에서 협상되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 임무를 새로운 민간 정부에 넘겼다.[10] 군부의 태도는 "좌익 정당들이 이 평화의 불명예를 떠맡아야 한다. 그러면 분노의 폭풍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였고, 그 후 군부는 다시 개입하여 상황이 다시 "옛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할 수 있었다.[7]
1918년 11월 11일, 1918~1919년 혁명 이후 황제의 퇴위를 강요한 새로이 형성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자들은 적대 행위를 종식시킨 휴전 조약에 서명했다. 군 사령관들은 평화를 구걸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공화당 정치인들은 휴전과 관련되었다.[10] 휴전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중앙당 소속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였고, 그는 나중에 반역죄로 살해되었다. 루덴도르프의 후임인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는 자서전에서 "군대와 최고 사령부가 이 비참한 휴전 협상에서 가능한 한 무죄로 남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적합했다. 그 협상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10]
엄격하게 검열된 독일 언론이 전쟁 내내 승리 소식만 보도했고, 독일 자체는 점령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한 외국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이 휴전 요청에 당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들은 군 지도자들이 휴전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몰랐고,[10] 마지막 공세가 실패한 후 독일군이 완전히 후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7]
따라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비난받지 않고, 독일군은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여겨지고, 공화당 정치인들 – 특히 사회주의자들 – 은 독일을 배신했다고 비난받는 "배후중상설"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후, 불안정한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영토 손실, 심각한 재정적 고통, 엄청난 배상금 지불 일정이 초래되자, 이들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뒷통수를 찌르다"라는 신화가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진 것은 독일 최고 군부의 사용을 통해서였다. 1919년 봄, 루덴도르프의 정치 및 경제 분야 최고 자문관이었던 막스 바우어(Max Bauer) 대령은 ''우리는 전쟁을 피하거나, 승리하거나, 중단할 수 있었는가?''를 출판했는데, 그는 여기서 "[전쟁은]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조국의 실패로 인해 패배했다"고 썼다.[10] "뒷통수를 찌르다"라는 구체적인 용어 자체는 1919년 가을, 루덴도르프가 베를린 주재 영국 군사 사절단장인 영국군 네일 맥컬럼(Sir Neill Malcolm) 장군과 식사를 했을 때 생겨났다. 맥컬럼은 루덴도르프에게 왜 독일이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루덴도르프는 조국이 군대를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포함한 변명 목록으로 대답했다.

> 맥컬럼은 그에게 물었다. "장군님, 뒷통수를 찔렸다는 뜻입니까?" 루덴도르프의 눈이 번쩍였고 그는 마치 개가 뼈를 발견한 것처럼 그 말에 달라붙었다. "뒷통수를 찔렸다고요?" 그는 되물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뒷통수를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전설이 탄생했다.[16]
루덴도르프는 그 표현을 좋아했고, 이것이 "공식적인" 버전이라고 참모들에게 알렸고, 이로 인해 독일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었다.
1919년 11월 18일,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전쟁과 독일의 패배 원인을 조사하고 있던 새로 선출된 바이마르 국회의 제1차 세계 대전 책임에 대한 국회 조사 위원회에 출석했다. 두 장군은 사복을 입고 나타나 제복을 입는 것은 위원회에 대한 존중을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힌덴부르크는 위원장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루덴도르프가 쓴 성명을 낭독했다. 그는 증언에서 프레더릭 모리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을 인용했는데, 이것이 그의 증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제공했다.[10] 힌덴부르크는 그의 – 또는 루덴도르프의 – 연설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영국 장군이 매우 정확하게 말했듯이, 독일군은 '뒷통수를 찔렸다'".[17]
특히 힌덴부르크의 이 증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에서 배후중상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였다.
3. 2.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발언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1918년 11월, 귀환하는 병사들에게 "어떤 적도 여러분을 정복하지 못했다"라고 연설했다.[10] 이 발언은 본래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등에 칼 꽂히는 신화"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14]3. 3. 언론의 역할
엄격하게 검열된 독일 언론은 전쟁 내내 승전 소식만 보도했고, 독일 자체는 점령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한 외국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휴전 요청에 당황했다. 특히 그들은 군 지도자들이 휴전을 요청했다는 사실[10]과 마지막 공세가 실패한 후 독일군이 완전히 후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7]4. 반유대주의적 측면
"등에 칼 꽂히는 신화"는 반유대주의와 결합하여 더욱 위험한 형태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패전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전직 군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 등에게 책임을 전가했다.[14]
특히, 레프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쿠르트 아이스너 등 유명 사회주의자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은 독일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 한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선전이 힘을 얻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과 아돌프 히틀러는 배후중상설을 이용하여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들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11월의 범죄자"라고 비난했다. 나치 역사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22년 저서 『국가의 적 시오니스트』에서 "독일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이 영국의 승리와 밸푸어 선언 실행을 위해 독일의 패전을 모의했다"는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고, 결국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4. 1. 유대인 인구 조사
1916년, 독일 군부는 군대 내 유대인들의 복무 실태를 조사하는 유대인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군 복무를 회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군부는 이 결과를 은폐하고, 반유대주의 선전을 계속했다.4. 2.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주장
일부 독일인에게 '등 뒤에서의 칼침'이라는 생각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1876년 오페라 ''신들의 황혼''을 연상시켰다. 이 오페라에서 하겐은 이야기의 영웅인 지그프리트를 창으로 등 뒤에서 살해한다.[23][24]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독일군의 붕괴를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비유했다.[25]5. 신화의 영향 및 결과
"등에 칼 꽂히는 신화"는 독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 신화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결국 나치당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승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고 연합군의 100일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 영토는 점령되지 않았고, 독일 언론은 승전 소식만을 보도했기에 독일 국민들은 패전을 예상하지 못했다.
1918년 말, 연합군의 승리가 잇따르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항복하면서 독일의 남쪽 국경이 위협받게 되자,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휴전 협상을 촉구했다. 이들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자신들에게서 다른 이들에게 돌리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된 공화주의 정치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7]
1918년 11월 11일, 11월 혁명 이후 새로이 형성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자들은 휴전 조약에 서명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평화를 구걸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고, 공화주의 정치인들이 휴전과 연관되도록 만들었다.[10] 휴전 문서에 서명한 에르츠베르거는 훗날 반역죄로 살해되었다.
"뒤에서 단검으로 찔렸다"는 표현은 1918년 12월 중순 스위스 신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의 기사에서 "독일군은 민간인에 의해 배후에서 단검으로 찔렸다"고 쓴 데서 시작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 독일 국민의회에서 패전 원인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열렸다. 11월 18일, 이 위원회에 소환된 힌덴부르크는 "제국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뒤에서 날카로운 칼에 찔렸다(돌히슈토스)"라고 증언하며, 좌익 세력이 반전 운동과 혁명 운동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7]
존 휠러-베넷(John Wheeler-Bennett)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이 독일의 무조건 항복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는 배후중상설을 다시는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33]
군사적 패배 이후 국가적 외상에 대한 평행적인 해석은 다른 국가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28][29]과 남부 동맹의 몰락 신화에도 적용되었다.[30][31]
5. 1.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전직 군 지도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톨릭교도조차도 교황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부족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14] 이들은 전쟁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고 적들에게 독일을 팔아넘기는 데 역할을 했다고 주장되었다. 이른바 "11월 범죄자" 또는 새로 형성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비판하거나, 불안을 조장하고 중요한 군수 산업에서 파업을 일으키거나, 폭리를 통해 국내에서 "등에 칼을 꽂았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행동은 독일이 막판에 거의 확실한 승리를 빼앗겼다고 여겨지게 했다.[14]5. 2. 나치당의 선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군대가 전장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국내의 배신자들, 특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대인들이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는 이른바 "등에 칼 꽂히는 신화"가 널리 퍼졌다. 이 신화는 나치당의 선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독일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이 신화를 만들고 퍼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7] 그들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자신들과 독일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공화주의 정치인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7] 1918년 10월 1일, 루덴도르프는 자신의 참모에게 "그들이 이제 협상해야 할 평화 조약에 서명하게 하자.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이 수프를 그들이 먹게 하자!"라고 말했다.[7]
1918년 11월 11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자들은 휴전 조약에 서명했다. 군 사령관들은 평화를 구걸한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지만, 공화주의 정치인들이 휴전과 연관되었다.[10] 휴전 문서에 서명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는 나중에 반역죄로 살해되었다.
독일 국민은 휴전 요청에 당황했는데, 이는 엄격하게 검열된 독일 언론이 전쟁 내내 승전 소식만 보도했고, 독일 본토는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군 지도자들이 휴전을 요청했다는 사실과[9] 독일군이 완전히 후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9]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비난을 면하고, 독일군은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공화주의 정치인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독일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7]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영토 손실과 막대한 배상금 지불 등으로 인해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전직 군 지도자들은 바이마르 정치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 심지어 교황에게 충성하는 가톨릭 신자들까지 비판하며, 이들이 전쟁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고 독일을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1월 범죄자"로 불렸으며, 국내에서 "등에 칼을 꽂았다"고 여겨졌다.

"등 뒤에서의 칼침"이라는 생각은 일부 독일인들에게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에서 하겐이 영웅 지그프리트를 창으로 등 뒤에서 살해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23][24]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독일군의 붕괴를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비유하기도 했다.[25]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조차도 1918년 11월 10일 귀환하는 군대에게 "적에게 정복당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 신화 확산에 기여했다.[16] 이 말은 ''im Felde unbesiegt''(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음)로 단축되어 라이히스베어의 준공식 슬로건이 되었다.
1919년 11월 18일,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출석하여 "독일군은 '뒷통수를 찔렸다'"고 증언했다.[17]
6. 다른 국가의 유사 사례
다른 국가에서도 "등에 칼 꽂히는 신화"와 유사한 사례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패배 이후 "배후 중상설"이 등장하여, 반전 운동가들과 언론이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13]
6. 1. 미국의 베트남 전쟁
일부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 패배 이후, 반전 운동과 언론의 비판적인 보도가 전쟁 수행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등에 칼 꽂히는 신화"와 유사한 형태로, 패배의 책임을 내부의 '배신자'들에게 돌리려는 시도였다.[13]6. 2. 역사적 사실과의 불일치
1918년 당시 독일군의 상황과 연합군의 전력을 비교해 보면, "등에 칼 꽂히는 신화"가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연합국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보급을 받았고, 전투 준비가 완료된 신병을 보유하고 있었다.[5] 반면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고 후퇴하는 상황이었다.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은 1914년 독일 국경을 넘어 알자스-로렌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5]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1918년 봄 공세 이후 전력이 약화되었다.[14]
100일 공세에서 연합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고, 독일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돌격대 전설"에서는 독일의 패배 원인을 무기 산업 파업과 유대인의 선동으로 돌렸지만,[14] 실제로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독일의 전략적 위치 약화가 주요 원인이었다.
1918년 말,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독일의 전략적 위치는 더욱 악화되었다.[6] 오스트리아-헝가리마저 항복하면서 독일의 남쪽 국경이 연합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12]
영국군 정보부는 독일 예비군이 매우 부족하며, 서부 전선에 투입 가능한 병력이 20개 사단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또한 힌덴부르크 방어선 너머에는 준비된 요새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11]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군부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루덴도르프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공화당 정치인, 특히 사회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7][8]
바질 리델 하트(B. H. Liddell Hart)는 독일이 휴전 조건에 동의한 것은 서부 전선의 상황보다는 내부 붕괴와 오스트리아를 통한 후방 공격 위협 때문이라고 분석했다.[22] 독일 역사가 이마누엘 가이스(Imanuel Geiss)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독일 내부 요인이 평화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12]
해군 사학자 S.W. 로스킬(Stephen Roskill) 대령은 연합군의 잠수함 대책 부대가 독일 U보트에 큰 타격을 입혔다고 평가했다. 그는 "배후 찌르기"는 독일 군국주의자들의 상상일 뿐이라고 말했다.[13]
알프레드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와 같은 나치 이론가들은 유대인들이 독일의 패배를 위해 일했다고 주장했지만,[20]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대인 인구 조사(Judenzählung) 결과, 유대인들은 군대와 최전방 전투 부대 모두에서 높은 비율로 복무하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통해 이러한 역사 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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