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들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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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작들의 도피"는 1607년 9월, 아일랜드의 티론 백작 휴 오닐과 티르코넬 백작 로리 오도넬을 비롯한 얼스터의 귀족들이 90명의 수행원과 함께 도네갈 주 라스멀런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망명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1601년 킨세일 전투 패배 이후 권한이 축소되고 잉글랜드의 압박이 심화되자,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지위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망명을 선택했다. 도피는 낡은 게일식 질서의 종말을 의미하며, 얼스터 플랜테이션의 시작과 아일랜드 민족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잉글랜드는 이들의 토지와 작위를 몰수하고, 얼스터 플랜테이션을 통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출신 정착민들을 이주시키면서 얼스터 지역의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2007년에는 도피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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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들의 도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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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이름 | 백작들의 도피 |
발생일 | 1607년 |
관련 인물 | 티론의 백작 휴 오닐 티르코넬의 백작 로리 오도넬 |
배경 | |
주요 원인 | 아일랜드에서의 게일 문화와 권력 약화, 잉글랜드의 영향력 확대 |
이전 사건 | 9년 전쟁 패배 티론의 반란 실패 |
도피 경로 | |
출발지 | 아일랜드 |
목적지 | 유럽 대륙 |
주요 경유지 | 프랑스 스페인령 네덜란드 로마 |
결과 | |
정치적 결과 | 아일랜드 귀족 사회의 붕괴 얼스터 지역 식민화 가속화 (얼스터 식민지화) 게일 문화 쇠퇴 |
관련 사건 | 야생 거위들의 비상 |
기타 | |
관련 용어 | 아일랜드어: Imeacht na nIarlaí (이메흐트 나 니얼라이) |
2. 명칭
1601년 킨세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티르코넬의 휴 로 오도넬은 펠리페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으나 실패하고 사망했다. 그의 동생 로리 오도넬이 티르코넬 백작위를 계승했다.[1] 오닐 가문과 오도넬 가문은 토지와 작위를 유지했지만, 규모와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다. 1602년의 파괴적인 군사 작전 및 1603년의 기근으로 인해 시골은 황폐화되었다. 1603년 3월, 티론 백작 휴 오닐은 멜리폰트 조약에 따라 사면을 받고 왕에게 복종했다.[2]
이 사건은 1868년에 출판된 C. P. 미한 신부의 저서에서 처음 "도피"로 명명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백작들이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려 했는지, 아니면 1603년 멜리폰트 조약 이후 지위 하락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망명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미한은 백작들의 영지민들이 새로운 전쟁을 원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얼스터 사람들은 오닐이 강제 퇴거자들을 몰아낼 병력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그들이 이 유쾌한 전망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매력은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3. 도피 배경
제임스 6세와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아일랜드 영주들과 반군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오닐은 항복 및 재지급 정책에 따라 이전 브레혼법 체제보다 많은 토지를 잃게 되었다. 이 정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튜더 왕조의 아일랜드 정복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관행이었다. 1602년 9월 10일, 티르코넬 공은 스페인에서 암살당했고, 그의 동생이 오도넬 가문의 25대 수장이 되었다. 그는 1603년 9월 4일 제임스 1세로부터 티르코넬 백작 작위를 받았고, 1604년 2월 10일 티르코넬에서 다소 축소된 영토를 회복했다.
1605년, 새로운 아일랜드 부왕 아서 치체스터 경은 두 백작과 마과이어의 이전 자유를 침해하고, 오카한 수장에게 북 얼스터의 새로운 자유지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오카한은 이전에 오닐의 중요한 신하였으며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 대가로 치체스터는 오닐의 권위를 줄이기를 원했다. 오카한은 또한 오닐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오닐이 새로운 합의에 따르지 않으면 반역죄로 기소될 수 있었다. 같은 해 화약 음모 사건이 드러나면서 가톨릭교도들이 왕과 교황청 모두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오랜 법정 공방 끝에 오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1607년까지 오닐의 동맹인 마과이어와 티르코넬 백작은 수입이 줄어들면서 명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들은 지브롤터 해전 소식이 도착하기 전에 스페인의 지원을 구하려고 계획했다. 그들의 배가 닻을 내렸을 때, 오닐은 충동적으로 그들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체포를 두려워한 그들은 유럽 대륙으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 침공을 위한 군대를 모집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607년 초, 유럽의 주요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에 의해 지브롤터 해전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체포될 뻔했다는 빈번하게 반복되는 이론은 "백작들의 도피"에 대한 주요 역사적 자료인 작가 태그 오 키아난과 모순된다. 그는 그의 기록 시작 부분에서 오닐이 9월 6일 목요일 래스멀른에 닻을 내린 배 소식을 듣고 "다음 토요일에 치체스터 경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며칠 동안 슬레인에서 만나고 있었고, 그를 체포하기 위한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증거도 없으며, 서두른 출항도 아니었다.[3]
또한, 영-스페인 전쟁 (1585–1604년)은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페인의 펠리페 3세는 새로운 스튜어트 왕가 아래에서 잉글랜드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평화 제안의 일환으로 스페인 공주가 제임스의 아들인 헨리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페인은 또한 1598년에 파산했다. 티론은 이 모든 현실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1616년 망명 중에 사망할 때까지 침공 계획을 고수했다.
3. 1. 9년 전쟁과 잉글랜드 지배 강화
1601년 킨세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티르코넬의 휴 로 오도넬은 스페인으로 지원을 요청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사망했다. 그의 동생 로리 오도넬이 그 뒤를 이었다.[1] 오닐 가문과 오도넬 가문은 토지와 작위를 유지했지만,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다. 1603년, 티론 백작 휴 오닐은 멜리폰트 조약에 따라 사면을 받고 왕에게 복종했다.[2]
제임스 6세와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후, 아일랜드 영주들과 반군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1603년 평화 조약으로 오닐은 이전 브레혼법 체제 대신 잉글랜드 체제 하에서 항복 및 재지급을 받게 되어 상당한 토지를 잃게 되었다.
1602년 티르코넬 공은 스페인에서 사망했고, 그의 동생이 오도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1603년 티르코넬 백작 작위를 받았고, 1604년 티르코넬에서 축소된 영토를 회복했다.
1605년, 아일랜드 부왕 아서 치체스터 경은 백작들과 마과이어의 자유를 침해하기 시작했고, 오카한 수장에게 북 얼스터의 새로운 자유지를 강요했다. 오카한은 오닐의 신하였으며, 치체스터는 오닐의 권위를 줄이고자 했다. 오닐이 새로운 합의에 따르지 않으면 반역죄로 기소될 수 있었다. 같은 해 화약 음모가 드러나면서 가톨릭교도들의 입장이 어려워졌다. 법정 공방 끝에 오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1607년까지 오닐의 동맹인 마과이어와 티르코넬 백작은 수입이 줄어 명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들은 스페인의 지원을 구하려 했고, 오닐도 그들과 합류했다. 체포를 두려워한 그들은 유럽 대륙으로 도망쳐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 침공 군대를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1607년 초, 스페인 함대는 지브롤터 해전에서 네덜란드에 패배했다.[3] 영-스페인 전쟁 (1585–1604년)은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페인의 펠리페 3세는 스튜어트 왕가 아래 잉글랜드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스페인은 또한 1598년에 파산했다. 티론은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1616년 사망할 때까지 침공 계획을 고수했다.
3. 2. 경제적 어려움과 스페인과의 관계
킨세일 전투 패배(1601년) 이후, 티르코넬의 휴 로 오도넬은 스페인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사망했다. 그의 동생 로리 오도넬이 뒤를 이었다.[1] 오닐 가문과 오도넬 가문은 토지와 작위를 유지했으나, 권한은 축소되었다. 1602년의 군사 작전과 1603년의 기근으로 시골은 황폐화되었다.[2] 티론 백작 휴 오닐은 1603년 3월 멜리폰트 조약에 따라 사면받고 왕에게 복종했다.[2]
제임스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며 아일랜드 영주들과 반군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항복 및 재지급 정책으로 오닐은 이전 브레혼법 체제보다 많은 토지를 잃게 되었다. 티르코넬 공은 1602년 스페인에서 사망했고, 그의 동생이 오도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1603년 티르코넬 백작 작위를 받았고, 1604년 축소된 영토를 회복했다.
1605년, 아서 치체스터 경은 백작들과 마과이어의 자유를 침해하고, 오카한 수장에게 북 얼스터의 자유지를 강요했다. 오카한은 오닐의 신하였으나, 치체스터는 오닐의 권위를 줄이고자 했다. 같은 해 화약 음모로 가톨릭교도들의 입지가 약화되었으나, 법정 공방 끝에 오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1607년, 오닐의 동맹인 마과이어와 티르코넬 백작은 수입 감소로 스페인 지원을 계획했다. 지브롤터 해전 소식이 전해지기 전, 오닐은 충동적으로 그들과 합류했다. 체포를 두려워한 그들은 유럽 대륙으로 도피하여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 침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1607년 초, 스페인 함대는 지브롤터 해전에서 패배했다. 오닐이 체포될 뻔했다는 주장은 태그 오 키아난의 기록과 모순된다.[3]
영-스페인 전쟁 (1585–1604년)은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페인의 펠리페 3세는 스튜어트 왕가와 평화를 원했다. 스페인 공주와 제임스 아들의 결혼이 예정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스페인은 1598년에 파산했다. 티론은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에서 1616년 사망할 때까지 침공 계획을 고수했다.
3. 3. 오닐과 오도넬 가문의 상황
1601년 킨세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티르코넬의 휴 로 오도넬은 펠리페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으나 실패하고 사망했다. 그의 동생 로리 오도넬이 티르코넬 백작위를 계승했다.[1] 오닐 가문과 오도넬 가문은 토지와 작위를 유지했지만, 규모와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다. 1603년 3월, 티론 백작 휴 오닐은 멜리폰트 조약에 따라 사면을 받고 왕에게 복종했다.[2]
제임스 6세와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아일랜드 영주들과 반군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오닐은 항복 및 재지급 정책에 따라 이전 브레혼법 체제보다 많은 토지를 잃게 되었다. 1602년 9월 10일, 티르코넬 공은 스페인에서 사망했고, 그의 동생이 오도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1603년 9월 4일 제임스 1세로부터 티르코넬 백작 작위를 받았고, 1604년 2월 10일 티르코넬에서 축소된 영토를 회복했다.
1605년, 아서 치체스터 경은 두 백작과 마과이어의 자유를 침해하고, 오카한 수장에게 북 얼스터의 자유지를 강요했다. 오카한은 오닐의 신하였으나, 치체스터는 오닐의 권위를 줄이고자 했다. 오닐이 새로운 합의에 따르지 않으면 반역죄로 기소될 수 있었다. 화약 음모 사건으로 가톨릭교도들이 왕과 교황청 모두에게 충성하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법정 공방 끝에 오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1607년, 오닐의 동맹인 마과이어와 티르코넬 백작은 수입 감소로 명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져 스페인의 지원을 계획했다. 지브롤터 해전 소식이 있기 전, 오닐은 충동적으로 그들과 합류했다. 그는 체포를 두려워하여 유럽 대륙으로 도망쳤고,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를 침공할 군대를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1607년 초,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에 의해 지브롤터 해전에서 패배했다. 태그 오 키아난에 따르면, 오닐은 9월 6일 목요일 래스멀른에 닻을 내린 배 소식을 듣고 "다음 토요일에 치체스터 경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체포 영장 발부나 서두른 출항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
영-스페인 전쟁 (1585–1604년)은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페인의 펠리페 3세는 스튜어트 왕가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티론은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1616년 사망할 때까지 침공 계획을 고수했다.
4. 도피 과정
1607년 9월 14일, 백작들은 90명의 수행원과 함께 도니골 주 로프 스윌리 해안의 라스뮬란을 떠났다.[5] 이들 중 상당수는 얼스터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몇몇은 아내를 남겨두고 돌아오거나 나중에 데려올 것을 희망했다.[5] 아마(아르마) 대주교 토마스 오 피아히는 1988년 9월 라스뮬란에서 강연을 통해 티론 백작이 “진실된 십자가의 유물을 담은 금 십자가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이 십자가를 배 뒤의 물에 끌고 다녔다"고 전했다.[5] 오키아닌에 따르면, 이 십자가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퀼뵈프 쉬르 센으로 건너가는 동안 폭풍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주었다고 한다.[5] 그들은 1601년 킨세일로 가는 길에 성 십자가 수도원에 보관된 작은 유물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
백작들의 목적지는 스페인이었지만, 1607년 10월 4일 프랑스에 하선했다.[5][6] 일행은 육로로 스페인령 플랑드르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뢰벤에 머물렀고, 주요 일행은 이탈리아로 계속 갔다.[7] 타드 오 키아닌은 그 여정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했다.[7] 일행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많은 중요 관리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오 키아닌은 백작들과 스페인 사이에서 백작들의 재산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협상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7]
오 키아닌의 일기는 도피의 유일한 연속적이고 동시대적인 기록으로서 중요하다.[8] 원래 제목은 ''Turas na dTaoiseach nUltach as Éirinn'' (얼스터 지도자들의 아일랜드에서의 출발)이었으나, "백작들의 도피"라는 극적인 구절이 만들어진 이후 ''Imeacht na nIarlaí''로 변경되었다.[8] 오 무라일레 교수에 따르면 ''turas''는 종교적인 순례를 의미할 수도 있다.[8]
5. 도피의 결과
5. 1. 게일 귀족 사회의 몰락
라쓰멀런 마을을 떠난 백작들은 얼스터의 주요 게일 가문과 함께 프랑스 선박을 타고 스윌리 호로 내려갔다.[4] 이들의 출국은 낡은 게일식 질서의 종말을 의미했는데, 이는 백작들이 수 세기 동안 얼스터의 일부를 통치했던 게일 씨족 왕조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4] 백작들의 도피는 고대 게일 귀족들이 영구적인 망명길에 오르면서 아일랜드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4] 백작들의 조상은 1540년대에 항복 및 재수여 정책(이 정책에 따라 앵글로-아일랜드와 게일 아일랜드 통치자들은 자신과 그들의 토지를 헨리 8세에게 항복하고, 헨리 8세는 그들에게 영국 칭호와 함께 토지를 다시 부여했다)에 따라 영국이 통치하는 아일랜드 왕국으로부터 백작령을 받아들였다.[4] 일부 역사가들은 그들의 도피가 아일랜드 튜더 정복의 여파로 인해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얼스터 플랜테이션의 길을 열어준 엄청난 전략적 실수였다고 주장한다.[4]1616년부터 얼스터 외부의 많은 음유 시인들은 "음유 시인들의 논쟁"에서 시적 논쟁을 벌였고, 그 논쟁 중 하나는 제임스 1세의 게일-아일랜드 밀레시안 혈통을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를 통해 기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게일식 질서가 종말을 고했는지, 아니면 진화하고 있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5. 2. 얼스터 플랜테이션
제임스 1세는 1607년 11월 15일 "티론 백작과 티르코넬 백작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여 그들의 행동을 반역으로 묘사하고, 결국 그들의 토지와 작위의 몰수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9] 이 선언에 대한 알려진 답변은 없었다.
그들의 작위는 1614년에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대륙에서는 계속 인정받았다. 당시 대륙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사형 선고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잉글랜드와 식민지 아일랜드 통치 상황에서도 사형 선고는 티르코넬 제1대 백작 로리가 이미 사망한 지 6년 후에 이루어졌다. 기소된 그가 제대로 재판을 받으려면, 그는 아일랜드 귀족원에서 아일랜드 고위 스튜어드의 주재 하에 그의 동료 귀족들에 의해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망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고, 그의 작위는 이미 그의 아들 휴 "앨버트" 오도넬에게 상속되었다. 따라서 작위를 사형 선고하려면, 실제로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휴 "앨버트"를 재판했어야 했다.
사형 선고 심리가 6년이나 지연된 것은 불가피했는데, 그의 아일랜드 상원의 동료들이 1613년에 다음 회기에 모여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 선고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정의의 희극으로 여겨졌고, 대륙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효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티르코넬 백작의 아들 휴 앨버트 오도넬의 제2대 티르코넬 백작(제1창설) 계승은 스페인 제국에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었고, 그는 새로운 스페인 작위인 "콘데 데 티르코넬"과 동일한 지위를 받았다.
관습법에 따르면, 제임스 1세가 부여하고 백작이 수락한 작위는 백작이 국왕의 허가 없이 배를 타고 아일랜드를 떠난 직후 잠정적으로 효력을 잃었을 수 있으며, 효력을 잃으면 특별한 포기 없이 그의 후손에게 넘어갈 수 없었다. 휴 앨버트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처벌받고 심리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사형 선고의 법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휴 앨버트는 아버지의 상속인으로서 아일랜드 상원에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결코 받지 못했다. 휴 앨버트는 또한 1614년에 그의 포기에 대한 주장을 위해 더블린에 온 적이 없으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제임스 1세를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그의 작위와 귀족 지위 주장은
이러한 사형 선고는 얼스터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세 명의 영주와의 1603년 평화 협정은 그들이 허가 없이 왕국을 떠남으로써 조건을 어겼고, 그들의 남은 자유 보유지가 몰수되면서 종료되었다. 치체스터는 런던 시 상인들이 부분적으로 후원하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착민들을 위한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제안했는데, 이는 얼스터 플랜테이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얼스터의 하위 계층 게일 문화 거주자들에게 엄청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5. 3. 아일랜드 민족 정체성 형성
6. 잉글랜드의 법적 조치
오닐과 오도넬의 문장 아래, 제임스 1세는 1607년 11월 15일 "티론 백작과 티르코넬 백작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여 그들의 행동을 반역으로 묘사하고, 그들의 토지와 작위를 몰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9] 이 선언에 대한 알려진 답변은 없었다.
그들의 작위는 1614년에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대륙에서는 계속 인정받았다. 당시 대륙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사형 선고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9] 잉글랜드와 식민지 아일랜드 통치 상황에서도 사형 선고는 티르코넬 제1대 백작 로리가 이미 사망한 지 6년 후에 이루어졌다. 기소된 그가 제대로 재판을 받으려면, 그는 아일랜드 귀족원에서 아일랜드 고위 스튜어드의 주재 하에 그의 동료 귀족들에 의해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망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고, 그의 작위는 이미 그의 아들 휴 "앨버트" 오도넬에게 상속되었다. 따라서 작위를 사형 선고하려면, 실제로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휴 "앨버트"를 재판했어야 했다. 사형 선고 심리가 6년이나 지연된 것은 불가피했는데, 그의 아일랜드 상원의 동료들이 1613년에 다음 회기에 모여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 선고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정의의 희극으로 여겨졌고, 대륙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효라고 간주했다.[9] 따라서 휴 앨버트 오도넬의 제2대 티르코넬 백작(제1창설) 계승은 스페인 제국에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었고, 그는 새로운 스페인 작위인 "콘데 데 티르코넬"과 동일한 지위를 받았다.
관습법에 따르면, 제임스 1세가 부여하고 백작이 수락한 작위는 백작이 국왕의 허가 없이 배를 타고 아일랜드를 떠난 직후 잠정적으로 효력을 잃었을 수 있으며, 효력을 잃으면 특별한 포기 없이 그의 후손에게 넘어갈 수 없었다. 휴 앨버트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처벌받고 심리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사형 선고의 법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휴 앨버트는 아버지의 상속인으로서 아일랜드 상원에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결코 받지 못했다. 휴 앨버트는 또한 1614년에 그의 포기에 대한 주장을 위해 더블린에 온 적이 없으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제임스 1세를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그의 작위와 귀족 지위 주장은
이러한 사형 선고는 얼스터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세 명의 영주와의 1603년 평화 협정은 그들이 허가 없이 왕국을 떠남으로써 조건을 어겼고, 그들의 남은 자유 보유지가 몰수되면서 종료되었다. 치체스터는 런던 시 상인들이 부분적으로 후원하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착민들을 위한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제안했는데, 이는 얼스터 플랜테이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얼스터의 하위 계층 게일 문화 거주자들에게 엄청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7. 스페인의 정책 변화
1555년의 교황 칙서 ''Iliusla''에서 교황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메리 여왕과 결혼했을 때 그에게 아일랜드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펠리페 2세는 1558년 메리 여왕 사후 아일랜드 왕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여왕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와 1585년부터 오랜 전쟁을 벌였으며, 펠리페 2세와 그의 계승자 펠리페 3세는 1601년 킨세일 포위전까지 아일랜드 가톨릭 반군을 지원했다. 1595년 오닐과 그의 동맹국으로부터 왕위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이러한 오랜 지원에도 불구하고, 1607년 중반까지 스페인은 아일랜드 반군을 도울 의지도 수단도 없었다. 스페인의 정책은 1604년 잉글랜드와의 조약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스페인의 유럽 함대는 4개월 전 네덜란드와의 지브롤터 해전을 포함한 여러 분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1590년대 스페인의 정책은 아일랜드 군벌을 잉글랜드에 대한 골칫거리로 돕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1603년에 패배했고, 1607년에 스페인이 실패한 전 동맹국을 지원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스페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8. 400주년 기념
백작들의 도피 400주년은 2007년 9월 14일 도네갈 전역에서 기념되었으며, 대형 범선 경주, 불꽃놀이, 강연 및 컨퍼런스 등이 포함되었다.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맥알리스는 존 베한이 제작한 래스멀런의 도피를 묘사한 동상을 공개했다.[10] 북아일랜드의 드레이퍼스타운과 래스멀런의 마르텔로 타워에 있는 "백작들의 도피 센터"에는 백작들의 도피와 그 이후의 플랜테이션에 헌정된 영구 전시회가 있다.
아일랜드 우체국은 기념 우표를 발행했는데,[11] 휴 오닐, 티론 백작, 로리 오도넬, 티르코넬 백작을 특징으로 하며, 래스멀런을 떠나 항해하려 할 때 만들어진 숀 오 브로게인의 원본 삽화를 기반으로 했다.
2008년에는 백작들이 로마에 도착한 지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산티냐지오 교회에서 아일랜드 국경 횡단 오케스트라의 축하 공연도 열렸다.[12]
9. 도피자 명단
태그 오 키아난은 도피에 참여한 난민들의 기록을 보관했다.[23] 1972년, 토마스 오 피아히와 파드라이그 데 바라가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난민 명단을 확대한 《Imeacht na nIarlaí》를 출판했다.[13][23]
도피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23]
- 존 코너, 선장[23]
- 존 래스(또는 배스), 조종사[23][14]
- 휴 오닐, 티론 백작(Hugh O'Neill, Earl of Tyrone)[23]
- 캐서린 오닐, 티론 백작 부인(Catherine O'Neill, Countess of Tyrone), 그의 부인[23]
- 휴 오닐, 던가논 남작(Hugh O'Neill, 4th Baron Dungannon), 그의 아들[23]
- 셰인 오닐(Shane O'Neill), 그의 아들[23][16]
- 브라이언 오닐(Brian O'Neill), 그의 아들[23][16]
- 아트 오그 오닐(Art Óg O'Neill)[23]와 그의 부인[23]
- 브라이언 오닐, 휴 오닐의 조카[23]
- 페어도르차, 휴 오닐의 손자 (콘 오닐(Conn O'Neill)의 아들)[23]
- 아오드 오그, 휴 오닐의 증손자[23]
- 마이그베아드 오 네일(Maigbheathadh Ó Néill)[23]
- 아오드 맥 에인리 오 네일(Aodh Mac Éinrí Ó Néill)[23]
- 헨리 호벤든 (Henry Hovenden), 비서 (또한 오닐의 양자)[23][6][15]
- 페드로 블랑코 (Pedro Blanco), 시종[23][16]
- 헨리 오해건 (Henry O'Hagan), 오닐의 비서[23]
- 무이르케르타흐 오 키온네 (Muirchearttach Ó Cionne), 원수[23]
- 크리스토퍼 플런켓 (Christopher Plunkett), 마스터 오브 호스[23]
- 콜만 (Colmán), 사제[23]
- 휴 오닐의 시동[23]
- 오닐의 하인 2명[23]
- 숀 나 부푼타 오 하긴 (Seán na bpunta Ó hÁgáin), 지대 수집인[23]과 그의 아내[23]
- 티르코넬 백작 로리 오도넬(Rory O'Donnell, 1st Earl of Tyrconnell)[23]
- 그의 아들 티르코넬 백작 휴 오도넬(Hugh O'Donnell, 2nd Earl of Tyrconnell)[19]
- 캐스바 오도넬(Cathbarr O'Donnell), 로리의 형제[17][23]
- 그의 아내 로사 오닐(Rosa O'Donnell)[23][18][16]
- 그의 아들 휴 오도넬(Hugh O'Donnell)[19]
- 누알라 오도넬(Nuala O'Donnell), 로리의 누이[23][19]와 그녀의 딸 그라니아 오도넬[20]
- 메리 오도넬(Mary O'Donnell), 로리의 누이[21]
- 도날 오게 오도넬(Donal Oge O'Donnell|Domhnall Óg), 로리의 이복 형제 도널 오도넬(Donnell O'Donnell)의 아들[23][22]
- 네크타인 오도넬(Nechtain O'Donnell), 로리의 사촌[23]
- 숀 크론 맥다이비드, 집사[23]
- 매튜 툴리, 비서[23][16]
- 케실리아 오갤러거, 휴 앨버트 오도넬의 유모
- 뮤리스, 시종[23]
- 오도넬의 하인 4명[23]
- 오도넬의 하인 3명[23]
- 대기 여성 3명[23]
- 쿠코너트 맥과이어,[23][16] 페르마나 영주[24]
- 세머스 맥 에이머 맥코넬, 그의 아들[23]
- 또 다른 아들[23]
- 돈카 Ó 브리안,[23] 토몬드와 클랜리카드 백작들의 사촌으로, 쿠코너트 맥과이어가 라스뮬런에 도착하는 것을 도왔다[16]
- 프. 무리스 울타크,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23]
- 프. 로버트 맥 아서(또는 체임벌린)[23]
- 프. 토마스 스트롱[23]
- 프. 파드라익 오 두이브,[23] 오닐의 개인 사제[16]
- 프. 파드라익 오 로르카인,[23] 캐서린의 사제[16]
- 프. 파드라익 오 루크라인[23]
- 프. 니알란 맥 티아르나인[23]
- 프. 토이레라크 오 슬레이빈[23]
- 프. 브라이언 오 고름라익[23]
- 프. 플라이트리 오 마올코나이레[23]
- 프. 디어마이드 오 둘레인[23]
- 파드라익 맥 에인리 오 하간[23]
- 파드라익 맥 코르마익 오 하이간[23]
- 에이먼 오 메일크라오이브[23]
- 파르가스 맥 카흐바일[23]
- 마하 맥 트렌히르[23]
- 월터 래스[23]
- 던돌크의 리처드 웨스턴[23][16]
- 드러헤다의 존 배스[23]
- 이몬 그루암다 맥다비드[23]와 맥다비드의 아내[23]
- 아오드 맥돔나일 오 갈코버[23]
- 틸라크 카라 오 갈코버[23]
- 에드먼드 브레아트나흐[23]
- 헨리 오켈리[23]
- 조지 캐셸[23]
- 타드 오 키아닌, 작가[23]
- 제임스 배스[23]
- 돈나카드 맥 수이븐[23]
- 게로이드 오 콘추버[23]
- 시어 맥 타말린[23]
- 데이비드 크라포트[23]
- 조지 이칭엄[23]
- 돈차 오 하긴[23]
- 파드라익 오 코인[23]
- 조지 무어[23]
- 피터 프레스턴[23]
- 패트릭 라스[23]
- 파드라익 맥 위르[23]
- 에드먼드 드 부르고[23]
- 카하오르 맥 아르트 오 갈코어[23]
- 투아탈 오 갈코어[23]
- 아오드 오그 오 갈코어[23]
- 에오건 루아드 맥 안 바르드[23][16]
- 숀 맥 필립[23]
- 아옹거스 맥 두이페[23]
- 윌리엄 오 롱시[23]
- 카탈 오 브로인[23]
- 버나드 모리스[23]
- 닐란 맥 다비트[23]
- 콘크바 오그 오 두베나니[23]
- 돈카드 코플란[23]
- 더멋 돌란[23]
- 브라이언 오헤가티[23]
- 도이거 오 두이게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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