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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좀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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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너 좀바르트는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했으나, 이후 민족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나치 정책을 이론적으로 지지했다. 주요 저서로는 《근대 자본주의》, 《유대인과 경제생활》, 《부르주아》 등이 있으며, 경제사 및 사회학 분야에 기여했다. 그는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막스 베버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를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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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좀바르트
기본 정보
이름베르너 좀바르트
출생일1863년 1월 19일
출생지에름슬레벤, 프로이센 왕국
사망일1941년 5월 18일
사망지베를린, 나치 독일
국적독일
분야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로마자 표기Be-reu-neo Jom-ba-reu-teu
경력
소속 기관브로츠와프 대학교
베를린 상업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학문적 배경
박사 지도교수구스타프 폰 슈몰러
아돌프 바그너
박사 제자바실리 레온티예프
리하르트 뢰벤탈
업적
알려진 업적"후기 자본주의" 용어 창시

2. 생애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885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피사에서 유학했다.[43] 독일 하르츠 지방 에름슬레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유력한 농장주이자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안톤 좀바르트였다. 김나지움을 거쳐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 진학하여 구스타프 폰 슈몰러와 아돌프 바그너에게 배웠다. 졸업 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1886년 이탈리아의 농촌 문제에 관한 박사 논문 「로마의 평원」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 브레멘 상공회의소 고문을 역임한 후, 막스 베버로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초빙되었으나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1890년부터 1906년까지 브레슬라우 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며 1902년에는 대표작인 『근대 자본주의』를 완성했다. 1906년부터 베를린 상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1911년 『유대인과 경제생활』, 1913년 『연애와 자본주의』와 『전쟁과 자본주의』, 그리고 『부르주아: 근대 경제인의 정신사』를 출판했다. 1917년부터 아돌프 바그너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나치 시대인 1931년 다시 베를린 상과대학으로 돌아왔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이었으나,[24][25] 이후 나치의 정책을 이론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26] 1934년 『독일적 사회주의』를 출판하여 "독일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및 유대인 정신과의 투쟁이다"라는 나치에 공감하는 주장을 펼쳤다.[27]

1936년 자진 해산할 때까지 사회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1938년 『인간에 관하여』를 발표했으며,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사회정책학회는 전쟁 후인 1948년에 부활했다.

1911년 저서 『유대인과 경제생활』에서 중세의 봉건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유대인적인 이익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개성적이고 자연스러운 독일 경제 속에 유대인들이 침입하여 영리 추구를 내세웠다고 기술했다.[28]

1915년 저서 『상인과 영웅』에서는 영웅의 나라 독일과 상인 국가 영국을 대비시키며, 전쟁의 근대화에서 기술의 의미는 의무, 희생, 공동체, 명예, 용기, 권위와 같은 고귀한 미덕으로부터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좀바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독일을 상업주의에 빠뜨리려는 영리적인 에토스에 대한 독일적 이상주의의 싸움이라고 칭찬했다.[34]

1927년 저서 『고도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생활』[35]에서는 게르만 민족이 전향적인 추진력, 파우스트적인 의지, 인내력, 끈기에 기여한 반면, 유대인은 근면, 투기적인 민감성, 계산력, 진보에 대한 열망을 가진다고 대비시키며, 상인과 금융업자에 의해 비합리적이고 자발적인 기업가가 소멸할 위험에 처했다고 논했다.[34]

1934년 저서 『독일적 사회주의』에서 유대적인 국제 사회주의·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융합된 국민적 사회주의로서의 독일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다.[34] 같은 해 국민투표에서 좀바르트는 하이데거, 하르트만, 아브데르할덴과 연명으로 히틀러 총통을 지지하는 학자 성명을 나치당 기관지 폴키셔 베오바흐터에 발표했다.[36]

1904년 이후로 막스 베버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인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아카이브』 편집을 담당했다. 또한, 경제사회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경제 체제’ 개념을 제시하여 역사와 경제 이론을 종합하고, 그 결과로 주저인 『근대 자본주의』(1902년)와 『고도 자본주의』(1928년)를 발표했다.

1928년 저서 ''Wirtschaftsleben im Zeitalter des Hochkapitalismus''

2. 1. 초기 생애와 학문적 성장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885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피사에서 유학했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하르츠 산맥의 에름슬레벤에서 부유한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산업가이자 지주였던 안톤 루트비히 좀바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피사, 베를린, 로마 대학교에서 법학경제학을 공부했다. 1888년, 그는 당시 가장 저명한 독일 경제학자였던 구스타프 폰 슈몰러와 아돌프 바그너의 지도 아래 베를린에서 Ph.D. 학위를 받았다.

경제학자이자 특히 사회 운동가로서 좀바르트는 당시 급진 좌파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브레멘 상공회의소의 수석 변호사로서 실무 경험을 쌓은 후에야 외딴 곳에 위치한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조교수직을 얻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와 같은 저명한 대학교의 교수진이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항상 이를 거부했다. 당시 좀바르트는 중요한 마르크스 경제학자였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사용하고 해석했는데,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가 『자본론』을 이해한 유일한 독일 교수라고 말할 정도였다. 좀바르트는 자신을 "확신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지만,[1] 나중에는 "결국 마르크스가 중요한 여러 측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고 썼다.[2]

당대의 사회 정책에 관심을 가진 독일 학자 중 한 명으로서, 좀바르트는 1888년경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막스 베버와 함께 (Verein für Socialpolitik)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당시 역사학파에 속한 독일 경제학자들의 새로운 전문 협회였는데, 이들은 경제학의 역할을 주로 시대의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보고 경제 문제에 대한 대규모 통계 연구를 개척했다.

좀바르트는 1896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사회주의와 사회운동(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에서 사회운동 개념에 전체 책을 할애한 최초의 사회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는 마르크스와 로렌츠 폰 슈타인의 사회운동에 관한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부상하는 노동자 운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모순의 결과였다.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은 "대중에 대한 사랑"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사회적 생산에서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으로의 경향과 함께 사회운동의 주요 특징이었다.

초기 저서인 《사회주의와 사회운동》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나, 나중에는 비판적이 되어 같은 책의 개정판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에서는 민족에 기초를 둔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43]

독일 하르츠 지방 에름슬레벤에서 유력한 농장주이자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안톤 좀바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나지움(Gymnasium)을 거쳐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 진학하여 구스타프 폰 슈몰러와 아돌프 바그너에게 사사했다. 졸업 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1886년 이탈리아의 농촌 문제에 관한 박사 논문 「로마의 평원」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 브레멘 상공회의소 고문을 역임한 후, 막스 베버로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초빙되었으나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1890년부터 1906년까지 브레슬라우 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며 1902년에는 대표작인 『근대 자본주의』를 완성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Marxismus) 입장이었으나[24][25], 나치의 정책을 이론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26]

2. 2. 초기 경력: 사회주의와 경제학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한 후 1885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피사에서 유학했다.

초기 저서인 《사회주의와 사회운동》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을 나타냈으나, 나중에는 비판적이 되어 같은 책의 개정판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에서는 민족에 기초를 둔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43]

경제학자이자 특히 사회 운동가로서 좀바르트는 당시 급진 좌파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브레멘 상공회의소의 수석 변호사로서 실무 경험을 쌓은 후에야 외딴 곳에 위치한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조교수직을 얻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와 같은 저명한 대학교의 교수진이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항상 이를 거부했다. 당시 좀바르트는 중요한 마르크스 경제학자였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사용하고 해석했는데,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가 『자본론』을 이해한 유일한 독일 교수라고 말할 정도였다. 좀바르트는 자신을 "확신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지만,[1] 나중에는 "결국 마르크스가 중요한 여러 측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고 썼다.[2]

당대의 사회 정책에 관심을 가진 독일 학자 중 한 명으로서, 좀바르트는 1888년경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막스 베버와 함께 (Verein für Socialpolitik)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당시 역사학파에 속한 독일 경제학자들의 새로운 전문 협회였는데, 이들은 경제학의 역할을 주로 시대의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보고 경제 문제에 대한 대규모 통계 연구를 개척했다.

좀바르트는 1896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사회주의와 사회운동(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에서 사회운동 개념에 전체 책을 할애한 최초의 사회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는 마르크스와 로렌츠 폰 슈타인의 사회운동에 관한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부상하는 노동자 운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모순의 결과였다.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은 "대중에 대한 사랑"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사회적 생산에서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으로의 경향과 함께 사회운동의 주요 특징이었다.

1903년, 좀바르트는 그의 동료 에드가르 자페와 막스 베버와 함께 일한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의 부편집장직을 수락했다.

1906년, 좀바르트는 베를린 상업학교의 정교수직을 수락했는데, 이 학교는 브레슬라우보다 열등한 기관이었지만 브레슬라우보다 정치적 "행동"에 더 가까웠다. 여기서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보완적인 책들을 출판했는데, 이 책들은 사치, 유행, 전쟁을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다루었으며, 전자 두 가지는 지금까지 이 주제에 대한 핵심 작품이었다. 또한 1906년에는 그의 저서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Why is there no Socialism in the United States?)』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이 측면에서 미국의 예외성에 관한 유명한 작품이다.[10]

2. 3. 중기 경력: 사회학 연구

1917년, 좀바르트는 그의 스승 아돌프 바그너(Adolph Wagner)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31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지만 1940년까지 강의를 계속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친구 막스 베버보다도 더욱 저명했다. 좀바르트가 사회학을 인문학(''Geisteswissenschaften'')의 한 분야로 고집한 것은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외부의 객관화된 "''Begreifen''"보다는 내부적인 공감적인 "''Verstehen''"(두 단어 모두 영어로 "understanding"으로 번역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귀스트 콩트, 에밀 뒤르켐, 그리고 막스 베버의 전통에 따른 사회과학의 "과학화"와 정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비록 베버가 이 문제에 대한 좀바르트의 견해를 대부분 공유했지만 오해이다), 이 시대에 유행했고 오늘날까지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좀바르트의 접근 방식은 세계를 이해하는 ''Verstehen'' 기반 접근 방식인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 방식에 공감하고 세계의 과학화에 비판적인 일부 사회학 및 철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좀바르트의 주요 사회학 논문들은 그의 사후인 1956년 작품 ''Noo-Soziologie''에 수록되어 있다.

좀바르트는 1929년에 소장 도서의 일부인 사회주의 관련 문헌 등 1만 1,574권을 오사카 상과대학(구제)에 매각했으며, 대학에서는 "좀바르트 문고"로 소장하고 있다.

2. 4. 후기 경력: 나치즘과 논란

1934년, 좀바르트는 《독일 사회주의》(Deutscher Sozialismus)를 출판하여 "새로운 정신"이 "인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시대는 끝났고, "독일 사회주의"(나치즘(국가사회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보았다. 이 독일 사회주의는 "개인의 복지보다 전체의 복지를 우선시한다".[15] 독일 사회주의는 "국가 규정에 따른 계획 경제"를 통해 "삶의 전반적인 질서"를 가져와야 한다.[16] 새로운 법 체계는 개인에게 "권리"가 아닌 "의무"만 부여할 것이며, "국가는 개인을 그 자체로 평가해서는 안 되고, 그 개인을 대표하는 집단만을 평가해야 한다".[17]

독일 사회주의에는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인종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민족 정신(Volksgeist)이 수반된다. "흑인에게서도 독일 정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독일인에게서도 흑인 정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18] 독일 정신의 반대는 유대인 정신이며, 이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거나 유대교를 믿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정신의 문제이다.[19] 좀바르트는 영국인들은 유대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 국민과 국가사회주의의 "주요 임무"는 유대인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9]

좀바르트는 저서 《독일적 사회주의》에서 유대적인 국제 사회주의·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융합된 국민적 사회주의로서의 독일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다.[34] 이 책에 따르면, 19세기에는 경제가 다른 영역(아름다움, 강함, 선함, 현명함, 예술, 가족, 전통, 인종)을 지배했기 때문에, 지성화와 물질화에 의해 영혼과 인격이 박탈되었고, 또한 마르크스주의도 영혼 없는 근대 공장을 진보로 환영했다.[34] 이에 대항하여 독일적 사회주의는 경제 시대와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현재의 "문명" 상태를 없애고 이전과 같은 "문화" 상태에 도달하여, 독일 국민을 경제 시대의 사막에서 독일의 숲으로 되돌린다고 보았다.[34] 그러나 유대 정신은 독일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어, "비록 마지막 유대인과 유대인 가족을 멸망시켰다고 해도" 존속할 것이므로, 반자본주의 투쟁인 독일적 사회주의는 유대 정신과의 투쟁이라고 보았다.[34]

같은 해 국민투표에서 좀바르트는 철학자 하이데거하르트만, 생화학자 아브데르할덴과 연명으로 히틀러 총통을 지지하는 학자 성명을 나치당 기관지 폴키셔 베오바흐터에 발표했다.[36]

좀바르트의 딸 중 한 명인 클라라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을 처음으로 기술한 한스 게르하르트 크로이츠펠트와 결혼했다.

3. 주요 연구 및 이론

좀바르트는 막스 베버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아카이브』 편집을 담당했으며, '경제 체제' 개념을 제시하여 역사와 경제 이론을 종합하고자 했다. 그의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 독일적 사회주의: 1934년 저서에서 좀바르트는 유대적인 국제 사회주의·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융합된 국민적 사회주의로서의 독일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다.[34] 그는 19세기의 경제 지상주의가 영혼과 인격을 박탈했다고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도 비판했다.[34] 독일적 사회주의는 경제 시대와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독일 국민을 "문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34] 그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유대 정신과의 투쟁이라고 주장했다.[34]


같은 해, 좀바르트는 하이데거, 하르트만, 아브데르할덴과 함께 히틀러 총통 지지 성명을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발표했다.[36]

3. 1. 근대 자본주의

1904년 이후로 막스 베버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인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아카이브』(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편집을 담당했다. 또한, 경제사회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경제 체제’ 개념을 제시하여 역사와 경제 이론을 종합하고, 그 결과로 주저인 『근대 자본주의(1902년) 2권과 『고도 자본주의』(1928년)를 발표했다.

3. 2. 유대인과 자본주의

좀바르트는 초기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를 비판했으나, 곧 “자본주의 정신” 중 모험적인 기업가적 요소는 독일인에게, 계산적인 부르주아 정신은 유대인에게 속한다고 주장했다.[28]

1911년 저서 『유대인과 경제생활(Die Juden und das Wirtschaftsleben)』에서 중세의 봉건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유대인적인 이익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개성적이고 자연스러운 독일 경제 속에 유대인들이 폭풍처럼 침입하여 영리 추구를 내세웠다고 기술했다.[28] 좀바르트에 따르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유대인들은 지역적인 전통보다 경제적 합리성을 중시했고, 시민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정치가 아닌 경제에 주목하여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담당자가 되었다.[28] 유대인은 지역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며, 국민적이지 않고 국제적이며,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28] 자본주의 제도의 창시자인 사막의 민족 유대인은 방랑적이고 빈틈없는 반면, 숲의 민족 게르만인은 마음이 넓다.[29] 유대교는 지성의 종교이며, 감성과 정서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연 세계나 유기적인 세계와 대립하며, 합리주의와 지식주의는 유대교와 자본주의의 특징이다.[28] 따라서 근대 합리주의를 추진한 것은 베버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니라 유대교라고 주장했다.[28] 자본주의와 유대교의 본질은 화폐로 표현되며, 화폐와 유통은 사회 관계를 추상화하고, 추상화의 정신은 유대인에게 구체화된다.[28] 그는 유대 세계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한다는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마르크스 등의 견해를 재활용하여 “태양처럼 이스라엘(유대인)은 유럽을 비상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는 곳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그들이 물러서는 곳에서는, 지금까지 꽃피었던 모든 것이 황폐로 돌아간다”고 말했다.[30][31] 좀바르트의 이 저서는 친구인 막스 베버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히틀러가 자료로 사용했다.[29]

1912년 소책자 『유대인의 미래(Die Zukunft der Juden)』에서는 유대인이 독일의 예술, 문학, 음악, 연극, 신문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것은 유대인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기 때문이지만, 이 유대인의 우위는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인류 최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30][32]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도 유대인 추방 이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렇다고 유대인과 유럽인의 동화나 융합도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며, 유대인 종족과 북방 민족의 피의 융합은 불길한 별에 지배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독일은 유대인 없이는 안 된다고 좀바르트는 논했다.[30][33] 폴리아코프는 이러한 좀바르트의 주장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라고 하고 있다.[30]

1915년 저서 『상인과 영웅(Der Kaufmann und der Held)』에서는 영웅의 나라 독일과 상인 국가 영국을 대비시키며, 전쟁의 근대화에서 기술의 의미는 의무, 희생, 공동체, 명예, 용기, 권위와 같은 고귀한 미덕으로부터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34] 좀바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독일을 상업주의에 빠뜨리려는 영리적인 에토스에 대한 독일적 이상주의의 싸움이라고 칭찬했다.[34]

1927년 저서 『고도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생활(Lebenshaltung im Zeitalter des Hochkapitalismus)』에서는 게르만 민족이 전향적인 추진력, 파우스트적인 의지, 인내력, 끈기에 기여한 반면, 유대인은 근면, 투기적인 민감성, 계산력, 진보에 대한 열망을 가진다고 대비시키며, 상인과 금융업자에 의해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자발적인 기업가가 소멸할 위험에 처했다고 논했다.[34]

이처럼 유대인을 “상업 민족”으로 간주하고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유대인이 많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좀바르트에 대해, 루요 브렌타노(Lujo Brentano)는 “유대 민족과 자본주의”라는 논문에서 유대인은 오히려 “농경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며 좀바르트를 비판했다. 브렌타노는 또한 자본주의 정신도 유대교와는 다른 기원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4. 유산과 영향

좀바르트의 유산은 나치와의 연루 때문에 객관적인 재평가가 어려워, 특히 독일에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초기 사회주의적 성향은 부르주아 집단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경제사 분야에서 그의 저서 《근대 자본주의》는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지지만, 많은 세부 사항은 의문을 받고 있다. 그의 경제학 연구의 핵심 통찰은 자본주의의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복식부기의 등장(오스발트 슈펭글러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과 도시 연구의 의미에서 도시에 대한 학제 간 연구에 관한 것이다. 베버와 마찬가지로 좀바르트는 복식부기 시스템을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보았다. 그는 《중세 및 근대 상업 기업》에서 "자본의 개념 자체가 이러한 관점에서 유래했으며, 자본은 범주로서 복식부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은 이윤을 창출하는 데 사용되고 회계에 기록되는 재산의 양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적었다.[20] 그는 또한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와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조지프 슘페터혁신 이론의 핵심 요소이다(슘페터는 실제로 좀바르트에게서 많은 것을 차용했지만, 항상 좀바르트의 원저에 대한 적절한 참조를 하지는 않았다).[21][22] 사회학에서는 주류 학자들이 여전히 좀바르트를 '소소한 인물'로 간주하고 그의 사회학 이론을 특이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단적인 경제학자들과 함께 철학적 사회학자와 문화학자들이 그의 연구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그의 연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오랫동안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라는 고전적인 연구는 예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사회학자들은 좀바르트의 연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보이고 있다.[23]

5. 저서


  • 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사회주의 및 사회운동de (1896년)
  • Der moderne Kapitalismus|근대 자본주의de (1902년-1927년)
  • Die deutsche Volkswirtschaft im 19. Jahrhundert|19세기 독일 경제de (1903년)
  • Das Proletariat. Bilder und Studien|프롤레타리아: 이미지와 연구de (1906년)[37]
  • Warum gibt es in den Vereinigten Staaten keinen Sozialismus|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de (1906년)
  • Die Juden und das Wirtschaftsleben|유대인과 경제 생활de (1911년)
  • * ユダヤ人と経済生活|유대인과 경제생활일본어 가나모리 세이야(金森誠也)・안도 츠토무(安藤勉) 역, 신인물왕래사, 1994년 ISBN 475-2100843
  • ** ユダヤ人と経済生活|유대인과 경제생활일본어 고단샤 학술문고, 2015년. (제3부: 유대적 본질의 탄생 부분 삭제) ISBN 406-2923033
  • Studien zur Entwicklungsgeschichte des modernen Kapitalismus|현대 자본주의 발전사 연구de (1913년)
  • * Luxus und Kapitalismus|사치와 자본주의de
  • ** Liebe, Luxus und Kapitalismus|사랑, 사치, 그리고 자본주의de (1967년 재판)[38]
  • ** 恋愛と贅沢と資本主義|연애와 사치와 자본주의일본어 가나모리 세이야 역, 론소샤, 1987년. 고단샤 학술문고, 2000년. ISBN 406-1594400
  • * Krieg und Kapitalismus|전쟁과 자본주의de
  • ** 戦争と資本主義|전쟁과 자본주의일본어 가나모리 세이야 역, 론소샤, 1996년. 고단샤 학술문고, 2010년. ISBN 406-2919974
  • Der Bourgeois|부르주아de (1913년)[39]
  • * ブルジョワ:近代経済人の精神史|부르주아: 근대 경제인의 정신사일본어 가나모리 세이야 역, 추오코론신샤, 1990년. 고단샤 학술문고, 2016년. ISBN 406-2919974
  • Händler und Helden|상인과 영웅de (1915년)
  • Der proletarische Sozialismus ('Marxismus')|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de (1924년)[40]
  • * プロレタリア的社会主義|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일본어 타나베 타다오 역, 니혼횻론샤, 1932년
  • Die Ordnung des Wirtschaftslebens|경제 생활의 질서de (1925년)
  • Das Wirtschaftsleben im Zeitalter des Hoch-Kapitalismus|고도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 생활de (1927년)
  • Hochkapitalismus|고도 자본주의de (1928년)
  • * 高度資本主義|고도 자본주의일본어 카지야마 치카라 역, 유히가쿠, 1940년. (부분 번역)
  • Die drei Nationalökonomien. Geschichte und System Lehre von der Wirtschaft|세 가지 국민 경제: 경제에 대한 역사와 체계 이론de (1930년)
  • Die Zukunft des Kapitalismus|자본주의의 미래de (1932년)
  • * 資本主義の将来|자본주의의 미래일본어 우지 이노스케 역, 코분도쇼텐, 1934년
  • Deutscher Sozialismus|독일 사회주의de (1934년)
  • Vom Menschen. Versuch einer geisteswissenschaftlichen Anthropologie|인간에 대하여: 정신과학적 인류학 시도de (1938년)[41]
  • * 人間について|인간에 관하여일본어 가나모리 세이야 역, PHP연구소, 2013년. (발췌 번역) ISBN 456-9815693
  • Noo-Soziologie|누-사회학de (1956년)
  • Nationalökonomie als Kapitalismustheorie. Ausgewählte Schriften|자본주의 이론으로서의 국민 경제학: 선정 저술de (2002년)
  • Das Proletariat|프롤레타리아de (2008년)[42]
  • Der moderne Kapitalismus. Historisch-systematische Darstellung des gesamteuropäischen Wirtschaftslebens von seinen Anfängen bis zur Gegenwart|현대 자본주의: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전유럽 경제 생활에 대한 역사적-체계적 서술de (2012년)


참조

[1] 논문 Sombart and German (National) Socialism
[2] 서적 Socialism and the Social System Dutton and Sons
[3] 서적 Der moderne Kapitalismus Duncker & Humblot 1902
[4] 웹사이트 Sombart, Werner http://www.encyclope[...] Encyclopedia.com
[5] 서적 Weber's Protestant Ethic: Origins, Evidence, Contex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6] 서적 Frühkapitalismus - Early capitalism Duncker & Humblot 1902
[7] 서적 Hochkapitalismus - High capitalism Duncker & Humblot 1902
[8] 서적 Spätkapitalismus Late capitalism Duncker & Humblot 1927
[9] 서적 The Mass Strike Haymarket Books 2008
[10] 웹사이트 People Who Live in the Shade http://reason.com/ar[...] 2011-02-22
[11] 서적 The Jews and Modern Capitalism
[12] 서적 A History of the Jews
[13] 서적 The quintessence of capitalism: a study of the history and psychology of the modern businessman Howard Fertig
[14] 서적 The Road to Serfdom Routledge & Kegan Paul
[15] 논문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20] 서적 Enterprise and Secular Change: Readings in Economic History https://archive.org/[...] R. D. Irwin
[21] 서적 Creative Destruction in Economics: Nietzsche, Sombart, Schumpeter. In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22] 웹사이트 Creative Destruction in Economics: Nietzsche, Sombart, Schumpeter http://www.stephenhi[...] 2023-11-05
[23] 서적 War and modernity https://books.google[...] Wiley-Blackwell
[24] 논문 Sombart and German (National) Socialism
[25] 서적 Socialism and the Social System Dutton and Sons
[26] 서적 Das Personenlexikon zum Dritten Reich:Wer war was vor und nach 1945 S.Fischer TB
[27] 서적 #ハーフ2010
[28] 서적 #ハーフ2010
[29] 서적 #ポリアコフ1985
[30] 서적 #ポリアコフ 4
[31] 서적 Die Juden und das Wirtschaftsleben
[32] 서적 Die Zukunft der Juden https://archive.org/[...] Duncker & Humblot
[33] 서적 Die Zukunft der Juden https://archive.org/[...] Duncker & Humblot
[34] 서적 #ハーフ2010
[35] 서적 Das Wirtschaftsleben im Zeitalter des Hoch-Kapitalismus
[36] 간행물 Deutsche Wissenschaftler hinter Adolf Hitler Völkischer Beobachter 1934-08-19
[37] 간행물 Nachdruck 2008
[38] 신문기사 Die Liebe schuf den Kapitalismus Frankfurter Allgemeine Sonntagszeitung 2011-07-31
[39] 간행물 Reproduktion rororo, Deutsche Enzyklopädie Nr. 473 rororo
[40] 서적 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 im 19. Jahrhundert
[41] 서적 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 im 19. Jahrhundert Duncker & Humblot 2006
[42] 웹사이트 Rezension http://www.perlentau[...]
[43] 웹사이트 http://dic.paran.com[...]
[44] 웹사이트 http://samsung.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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