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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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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너 하제는 나치 독일의 의사로,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였다.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친위대에 소속되었으며,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총통 관저에 머물며 히틀러의 애견 블론디에게 청산가리를 투여하는 것을 도왔다. 히틀러의 자살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요제프 괴벨스 가족의 시신을 검시했다. 1945년 나치 일당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투옥되었으며, 1950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1992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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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소련 포로로 잡힌 베르너 하제
직업의사, 의학 교수
알려진 정보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출생일1900년 8월 2일
출생지독일 제국 작센안할트주 쾨텐
사망일1950년 11월 30일
사망지소련 러시아 USSR 모스크바 부티르카 교도소
군사 경력
소속슈츠슈타펠
최종 계급중령
참전제2차 세계 대전

2. 생애

안할트쾨텐에서 태어난 베르너 하제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의학을 공부해 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는 선박 의사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고 이듬해 친위대(SS)에도 가입했다. 카를 브란트의 추천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부주치의 중 한 명이 되어 개인적인 신뢰를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베를린 시가지 전투 중에는 총통 관저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 애견 블론디에게 청산가리를 시험하는 과정에 참여했으며,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까지 총통 지하 벙커 근처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소련 포로 수용소에 수감 중 1950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1992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하세는 안할트쾨텐에서 태어났다. 1918년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세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66보병 연대에 입대했다. 종전 후, 1924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외과 의사가 되었다.

2. 2. 경력

베르너 하제는 쾨텐 출신으로, 1927년부터 선박 의사로 경력을 시작했다. 1933년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34년부터는 베를린 대학교 외과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카를 브란트의 추천으로 히틀러의 부주치의 중 한 명이 되었고, 친위대(SS)에도 입대하여 활동했다. 그는 히틀러의 개인적인 신뢰를 얻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베를린 시가지 전투 중에는 총통 관저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며 부상병을 치료했다.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 그의 애견 블론디에게 청산가리를 시험하는 과정에 관여했으며,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까지 총통 지하 벙커 근처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1945년 6월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투옥되었다. 소련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50년 11월 결핵으로 사망했다. 사망 장소는 모스크바의 부티르카 형무소 병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후 1992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2. 2. 1. 나치 친위대 장교

하제는 1933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4년 4월 1일에는 친위대(SS)에 입대했으며, 같은 해 카를 브란트의 추천으로 히틀러의 부주치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개인적인 신뢰를 얻었던 것으로 보이며, 1943년 생일에는 히틀러로부터 직접 축하 전보를 받기도 했다. 1943년 6월 16일, 하제는 친위대 중좌(SS-Obersturmbannführer|오버슈투름반퓌러deu) 계급으로 진급했다.

1945년 4월 베를린 시가지 전투 막바지에는 에른스트-귄터 쉔크와 함께 군의관으로 총통 관저에 머물렀다. 4월 29일, 그는 총통 지하 벙커로 호출되어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루트비히 슈툼페거가 히틀러의 자살에 사용할 청산가리의 효능을 시험하기 위해 히틀러의 애견 블론디에게 독약을 먹이는 것을 도왔다. 히틀러가 자살한 4월 30일 이후, 하제는 총통 지하 벙커 옆의 다른 지하 벙커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5월 6일에는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요제프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그리고 그들의 여섯 자녀 시신을 검시했다.

1945년 6월, 하제는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투옥되었다. 그는 소련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50년 11월 결핵으로 사망했다. 소련 측 기록에 따르면 사망 장소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부티르카 형무소 병원이었다.

이후 러시아 정부는 1991년 10월 18일 제정된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92년 4월 28일 하제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2. 2. 2. 베를린 전투와 히틀러의 죽음 (1945)

1945년 4월 말, 베를린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하제는 에른스트-귄터 쉥크와 함께 총리관저 지하의 응급 구호소에서 부상당한 독일 군인과 민간인을 치료하는 데 힘썼다. 그는 결핵으로 쇠약해져 있었지만, 수술 경험이 부족했던 쉥크에게 말로 지시하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총리관저의 넓은 지하실은 약 1.5m 아래에 위치한 방공호인 ''포어벙커''와 연결되어 있었고, ''포어벙커''는 다시 계단을 통해 사실상 히틀러의 마지막 사령부가 된 ''퓌러벙커''로 이어졌다.

1945년 4월 23일,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테오도어 모렐 등이 베를린을 떠나면서 남겨둔 약품은 하제와 히틀러의 집사 하인츠 린게가 히틀러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관리했다. SS 의사 루드비히 슈툼프에거는 벙커 내 사람들에게 청산가리(시안화물) 캡슐을 나누어 주었다. 히틀러는 이 캡슐의 효과를 의심하여 4월 29일 하제를 ''퓌러벙커''로 불러 자신의 애견 블론디에게 실험하도록 지시했다. 하제는 슈툼페거의 도움을 받아 블론디의 입에 캡슐을 넣어 터뜨렸고, 개는 즉시 죽었다. 히틀러는 하제에게 가장 확실한 자살 방법을 물었고, 하제는 청산가리 캡슐을 깨무는 동시에 머리에 총을 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제는 다음 날인 4월 30일 오후, 히틀러가 자살할 때까지 ''퓌러벙커''에 머물렀다. 이후 다시 응급 구호소로 돌아가 부상자 치료를 계속했으며, 쉥크와 함께 일한 7일 동안 약 370건의 수술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 2일, 하제는 헬무트 쿤츠, 간호사 에르나 플레겔, 리젤로테 체빈스카와 함께 소련 붉은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

5월 6일, 하제는 소련 당국에 의해 전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 그리고 그들의 여섯 자녀의 시신을 확인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는 괴벨스가 기형인 오른발에 착용했던 금속 보조기를 통해 부분적으로 불에 탄 괴벨스의 시신을 식별했다.

2. 2. 3. 체포와 사망

1945년 5월 베를린 시가지 전투 이후 소련군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직후인 5월 6일, 그는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요제프 괴벨스마그다 괴벨스 부부 및 그들의 여섯 자녀 시신을 검시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은 하제를 전 독일 제국 수상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로서 나치당 고위 인사들과 친위대 대원들을 치료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구체적인 형량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이후 수감 생활 중 결핵을 앓게 되었고, 1950년 11월 모스크바에 위치한 부티르카 형무소 병원에서 사망했다.

소련 붕괴 후인 1992년 4월 28일, 러시아 정부는 1991년 제정된 '정치적 탄압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하제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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