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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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를린 장벽 붕괴는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의 여행 규제 완화 발표 이후 발생한 사건으로,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1980년대 후반 동구권 개혁의 영향과 동독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면서 일어났으며,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와 동독 지도부의 혼란, 여행 자유화 발표의 오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동유럽 민주화 운동을 촉진하고 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붕괴 이후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이후 다양한 기념 행사와 역사적 평가를 통해 그 의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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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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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사건 명칭 | 베를린 장벽 붕괴 |
일부 | 1989년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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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89년 11월 9일 |
시간 | 18:53–19:01 (중앙 유럽 표준시, UTC+1, 기자 회견) |
장소 | 동베를린, 동독 서베를린, 서독 |
원인 | 1989년 혁명 |
역사적 배경 | |
관련 사건 | 마르크트브루크 전투 베를린 봉쇄 베를린 위기 (1961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이 장벽을 허무시오! |
관련 사건 | |
동유럽 혁명 | 폴란드 민주화 운동 헝가리 민주화 운동 범유럽 피크닉 독일 재통일 벨벳 혁명 루마니아 혁명 (1989년) |
베를린 역사 |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 (1157–1806) |
프로이센 왕국 | (1701–1918) |
독일 제국 | (1871–1918) |
프로이센 자유주 | (1918–1947) |
바이마르 공화국 | (1919–1933) |
1920년대 베를린 | 탈라트 파샤 암살 사건 대베를린 법 |
나치 독일 | (1933–1945) |
서독 및 동독 | (1945–1990) |
독일 연방 공화국 | (1990–현재) |
참고 | 베를린 연표 |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수도 베를린 역시 4개국 공동 관리 하에 놓였다. 그러나 동서 냉전이 심화되면서 1949년 독일은 동구권의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과 서구권의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으로 분단되었고, 베를린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베를린 시내 동서 간 경계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여 베를린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막았다.[78] 이는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약 300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서베를린을 통해 탈출했다. 동독은 서베를린이 탈출 통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우고, 이를 "반파시즘 방벽"이라 칭했다.[78]
1960년대 동독은 발터 울브리히트 정권 하에 신경제시스템을 도입하여 동구권에서 가장 번영했지만, 1970년대 에리히 호네커 집권 이후 경제난에 직면했다. 동독은 서독의 경제 지원에 의존했고, 1989년에는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인구 유출이 심화되었다.
1980년대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지만, 호네커 정권은 국가보안부를 통해 사회 통제를 강화했다.[85]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독은 개혁을 거부하고 고립을 자초했다.[89]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 "이 벽을 허물어라!" 연설을 통해 동독의 변화를 촉구했다.
1989년 8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이 개방되면서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208][209][210][211][212][213] 1989년 여름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탈출도 증가했다. 동독 정부는 10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지만, 이는 오히려 동독 주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04]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분단
베를린 장벽 건설은 동독 체제가 강제에 의존하고 있으며, 주민들이 국토를 떠나는 것을 폭력으로 막는 것 외에는 붕괴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소련이 유럽의 전진기지인 독일을 포기할 의도가 없고, 그 붕괴를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서방과의 대결이 아니라 동독인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82] 소련의 흐루쇼프 수상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간에 서베를린 주둔 미·영·프 3개국의 주둔권, 서베를린에 대한 자유 통행권, 서베를린 시민의 정치적 자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 하에 장벽 건설이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미·소 양국 정상을 괴롭혔던 베를린 문제는 1958년 흐루쇼프의 자유 도시 선언 최후통첩 주장에서 크게 후퇴하여 이후 안정되고 고착화되었다.이는 동독 사람들에게 앞으로 동독을 떠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의 불편함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음을 의미했다.[83] 또한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탈출함으로써 단순히 노동력 유출을 방지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상황에 타협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 영향이 컸고,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에게는 국가 운영이 용이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2. 2. 베를린 장벽 건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 영국, 프랑스, 미국의 승전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수도 베를린도 승전 4개국의 공동 관리 지역이 되었다.이후 동서 대립에 따라 1949년에 동구권에 속하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서구권에 속하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수도 베를린 역시 소련 측 관리 지역인 동베를린과 영미불 3개국 관리 지역인 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 1961년 여름까지 베를린 시내에서 동서 간의 왕래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1961년 8월 13일, 동독 측은 갑자기 베를린 시내의 동서 왕래를 차단하고 경계선 근처에 벽을 건설하여 베를린 시민들의 동서 간 자유 통행을 단절시켰다( '''베를린 장벽''' ).[78] 이는 동서 분단 이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인구 유출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약 300만 명에 달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당시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서베를린을 경유하여 서독으로 탈출했다.
위기감을 느낀 동독은 서베를린이 탈출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선을 벽으로 막아 동독 국민을 가두었고, 이를 “반파시즘 방벽”이라고 불렀다.[78] 국경이 차단되어 철조망이 둘러쳐졌지만, 어떤 곳에서는 도로 한가운데, 또는 운하, 또 다리 한가운데가 국경선이었다. 이후 동서 베를린 간 시민들의 왕래는 불가능해졌다.
2. 3. 동독의 경제난과 사회 통제
동독 경제는 1960년대 발터 울브리히트 정권이 자유주의 경제 정책인 '신경제시스템'(Neues Ökonomisches System der Planung und Leitung|Neues Ökonomisches Systemde, 약칭 NÖS)을 도입하면서 발전하여 동구권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71년 소련의 압력으로 울브리히트가 실각하고, 1973년 1차 석유 파동 이후 경제 당국의 경직된 조직 때문에 산업 구조 전환에 실패하면서 불황에 빠졌다. 에리히 호네커(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가 이끄는 동독 지도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서독 기본조약(1972년)을 통해 사실상 "국교"를 맺은 서독으로부터 경제 지원을 받아 보조금으로 국내 각지에 뿌려 경제를 유지했다.이 사실은 호네커 퇴진 직후에 폭로되었는데, 이미 동독 경제는 경제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수지 균형을 맞추려면 동독 시민의 생활 수준을 30% 정도 삭감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인구 유출이 멈추지 않았고, 이 폭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독은 멸망했다.
2. 4. 동구권의 변화와 동독의 고립
1980년대 헝가리 인민공화국과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난 사회 변혁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에리히 호네커는 비밀경찰인 국가보안부(슈타지)를 동원하여 국민의 속박과 통제를 강화했다.[85] 동독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엄격한 이데올로기 국가였으며, 국가 정체성이 결여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86] 호네커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교조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집하는 것 외에는 국가가 생존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87]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발표하고 동유럽 국가들에도 이를 추진하도록 권고했으며, 많은 국가들이 각자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독에게 사회주의 체제 포기는 분단 국가로서의 독자성, 즉 국가 분단의 정당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개혁 실행을 거부하고 일부 반대파를 체포·구금하여 탄압하는 데 그쳤다.[89] 더욱이 호네커 지도부는 "동독식 사회주의"라는 선전을 내세워 고르바초프와 대립했고, 소련 매체의 정보에도 검열을 가했다.
1987년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베를린 장벽 앞에서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영어 (고르바초프씨, 이 벽을 허물어라!)"고 호소했다.
1989년 이전 동유럽 국가들은 국가가 국민에게 서방으로의 여행을 금지하는 제한을 가하여 이동의 자유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1989년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여행의 자유"가 요구되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동독 시민이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곳은 체코슬로바키아였으며, 신분증 제시만으로 여행이 가능했다.
2. 5. 철의 장막 개방
1989년 8월 19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 철의 장막이 범유럽 피크닉에서 열리면서 평화적 연쇄 반응이 시작되어 동독과 동구권이 붕괴되었다. 헝가리의 GDR 휴양객들 사이에서 포스터와 전단지를 통한 광범위한 광고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동독으로부터의 최대 탈출이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국경 개방에 대한 소련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반응을 시험하기 위한 소풍 이후, 수만 명의 동독인들이 헝가리로 향했다.[208][209][210][211][212][213] 에리히 호네커는 "합스부르크는 폴란드까지 전단을 배포했고, 동독 휴가객들은 소풍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소풍에 와서 선물, 음식, 도이체 마르크를 받았고, 서부로 오도록 설득당했다."라고 언급했다. 동베를린의 GDR 지도부는 국경을 완전히 봉쇄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련은 전혀 대응하지 않아 동구권의 세력권이 무너졌다.[1][2][3][4][5][6]1989년 여름 이후 11월 초까지 난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나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을 통해 헝가리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의 오랜 합의로 이민이 허용되었고, 국경을 넘는 자유 여행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움직임은 너무 커져 양국 모두에게 어려움을 야기시켰다. 게다가 동독은 외국인 차입금에 대한 대출 상환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에곤 크렌츠는 알렉산더 숄크골로코프스키에게 서독에 이자 지불을 위한 단기 대출을 요청하는 데 실패했다.
10월 3일, 동독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다. 이로 인해 동독 국민이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측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출국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동독 국민의 불만은 체제 비판으로 전환되었다.[104]
3.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여행하거나 이민하는 것을 더 쉽게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6]
샤보프스키는 이 새로운 규정에 대한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충분한 정보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21] 기자회견 직전, 에곤 크렌츠로부터 변화를 알리는 메모를 받았지만,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다. 메모에는 동독 시민들이 이전의 여행 요건 없이 해외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고, 동서 베를린 간을 포함한 모든 국경을 통해 영구 이민도 허용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19]
기자회견이 끝나갈 무렵, 안사 통신의 리카르도 에르만(Riccardo Ehrman) 기자가 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질문했다. 샤보프스키는 잠시 망설인 후 "제가 아는 한, 즉시, 지체 없이 발효됩니다"라고 대답했다.[19][25][26][20] 이는 메모의 첫 문장을 바탕으로 한 추측이었다.
한 기자가 이 규정이 서베를린(West Berlin)으로의 통행에도 적용되는지 묻자, 샤보프스키는 메모를 확인하고 그렇다고 답했다.[19] 이후,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의 다니엘 존슨이 이 법이 베를린 장벽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질문하자, 샤보프스키는 장벽이 더 큰 군축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장황한 설명을 했다.[27]
샤보프스키의 이러한 발언은 사실상 오해였다. 그는 새로운 규정의 시행 시점을 다음 날인 11월 10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자회견에서의 답변은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처럼 들렸다. 기자회견 후 샤보프스키는 NBC 뉴스(NBC News) 앵커 톰 브로코(Tom Brokaw)와의 인터뷰에서 동독인들이 국경을 통해 이민할 수 있고 규정이 즉시 발효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28][29]
이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서독의 독일통신사(DPA)는 오후 7시 4분에 동독 시민들이 "즉시" 독일 내부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속보를 발표했다.[160] 샤보프스키의 기자회견 내용은 서독의 주요 뉴스 프로그램에서 주요 뉴스로 보도되었다. ARD의 ''타게샤우(Tagesschau)''에서 앵커 한스 요아힘 프리드리히스는 "오늘 11월 9일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동독은 즉시부터 국경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고 발표했습니다.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20][21]
이 발표를 들은 동독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어 국경 경비대에게 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21] 경비병들은 상부의 지시를 받지 못해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 시민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보른홀머슈트라세 검문소를 개방했다.[176] 이어서 다른 검문소들도 연쇄적으로 개방되었다.[178]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춤을 추며 기뻐했고, 서베를린 시민들은 동독 시민들에게 꽃과 술을 건네며 환영했다.
1989년 8월 19일 판유럽 피크닉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철의 장막이 열리면서 평화적인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고, 결국 동독은 사라졌으며 동구권은 붕괴되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소련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국경 개방에 대한 반응을 시험하기 위해 기획된 피크닉 이후, 수만 명의 언론의 영향을 받은 동독인들이 헝가리로 향했다. 에리히 호네커는 판유럽 피크닉에 대해 ''데일리 미러''에 "합스부르크는 폴란드 깊숙이까지 전단지를 배포했고, 그 전단지에는 동독 휴가객들을 피크닉에 초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피크닉에 온 사람들에게는 선물, 음식, 그리고 독일 마르크가 제공되었고, 그들은 서독으로 가도록 설득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동베를린의 동독 지도부는 자국 국경을 완전히 봉쇄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련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1][2][3][4][5][6]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발표하고 동유럽 국가들에도 이를 추진하도록 권고했으며, 많은 국가들이 각자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독에게 사회주의 체제 포기는 분단 국가로서의 독자성, 즉 국가 분단의 정당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개혁 실행을 거부하고 일부 반대파를 체포·구금하여 탄압하는 데 그쳤다. 더욱이 호네커 지도부는 "동독식 사회주의"라는 선전을 내세워 고르바초프와 대립했고, 소련 매체의 정보에도 검열을 가했다.
1987년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베를린 장벽 앞 연설에서 " (고르바초프씨, 이 벽을 허물어라!)"고 호소했다.
3. 1.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동독의 무신론 국가 정책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 휘러 목사는 1982년부터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기도 모임을 가졌다.[31][32] 7년 동안 당국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은 늘어났고, 예배 후 평화로운 촛불 행진이 이어졌다.[31] 비밀경찰의 위협에도 군중은 계속 모였고, 1989년 10월 9일, 경찰과 군부대는 강제력 사용 허가를 받았지만, 7만 명이 참여한 평화 시위를 막지 못했다.[31][32]
1989년 6월, 폴란드에서 자유 선거로 비공산당 정권이 탄생했다. 헝가리에서도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동독에서는 개혁 지연에 대한 실망으로 탈출 희망자가 증가했다. 1989년 1월 1일 새로운 여행법 발효 후 9개월 동안 16만 1천 명이 영구 출국을 신청했는데, 이는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의 총 신청자 수(3만 2천 명)와 비교하면 동독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90]
1989년 5월 7일 지방의회 선거에서 많은 유권자가 반대표를 던졌지만, 지도부는 선거 결과를 98.85% 찬성으로 조작했다. 또한 동독 정부는 64 천안문 사건에 대한 중국 당국의 대응을 지지하여 동독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91] 6월 18일에는 폴란드에서 다당제에 의한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폴란드 민주화 운동을 이룩했다.
3. 2. 동독 지도부의 혼란
1989년 10월 18일, 오랜 기간 동안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가 에곤 크렌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호네커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고, 그를 대체하려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해결책"을 기다리려 했지만, 10월이 되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20] 호네커는 사임 연설에서 크렌츠를 지명하며 그의 선택을 승인했고,[11] 인민의회(Volkskammer)는 그를 정식으로 선출했다. 크렌츠는 첫 공개 연설에서 개혁을 약속했지만,[12] 동독 국민들은 그가 전임자의 정책을 따르고 있다고 여겼고,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다.[20]1989년 여름 이후, 11월 초까지 난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나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을 통해 헝가리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의 오랜 합의로 이민이 허용되었고, 국경을 넘는 자유 여행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움직임은 너무 커져 두 나라 모두에게 어려움을 야기시켰다. 게다가, 동독은 외국인 차입금에 대한 대출 상환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에곤 크렌츠는 알렉산더 숄크골로코프스키에게 서독에 이자 지불을 위한 단기 대출을 요청하는데 실패했다.
11월 1일, 크렌츠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봉쇄했던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 재개방을 승인했다.[13] 11월 4일에는 알렉산더 광장 시위가 발생했다.
10월 3일, 동독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다. 이로 인해 동독 국민이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측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출국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동독 국민의 불만은 체제 비판으로 전환되었다.[104]
11월 7일, 크렌츠는 빌리 슈토프 총리와 정치국 3분의 2의 사퇴를 승인했지만, 중앙위원회는 크렌츠를 만장일치로 총서기로 재선출했다.[20] 11월 19일, 크렌츠는 게르하르트 라우터에게 새로운 여행 정책 초안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라우터는 전 인민경찰 장교였으며, 최근 내무부에서 여권 발급 및 시민 등록을 담당하는 부서장으로 승진했다.
11월 8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즉각적인 영구 이민 문제를 다루는 여행 규정 초안의 일부를 제정했다. 처음에 정치국은 이 이민을 위해 특별히 쉬른딩 근처에 국경 통과 지점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내무부 관리들과 새로운 문구 작성을 담당하는 슈타지 관료들은 이 제안이 실행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짓고, 이민과 임시 여행 모두와 관련된 새로운 문구를 작성했다. 개정된 문구에는 동독 시민이 이전의 여행 요건을 충족할 필요 없이 해외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크렌츠가 이끄는 정치국은 11월 9일 난민들이 동독과 서독 사이, 동서 베를린 사이를 포함한 국경 통과 지점을 통해 직접 출국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같은 날 늦게, 행정부는 개인적인 왕복 여행을 포함하도록 제안을 수정했다. 새로운 규정은 다음 날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국경 검문소의 혼란으로 현장 지휘관이 내무부에 전화 연락을 했고, 조직 간부가 정치국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디켈 내무장관은 기존 방침과 맞지 않는 새로운 지시를 독단적으로 내릴 생각이 없었다. 출입국 관리국 국장은 이날 밤 극장에 갔다가 밤 10시 30분경 집에 돌아와 국경 검문소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교외에 있던 샤보프스키도 검문소로 급히 향했지만 이 사이 크렌츠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181] 중앙위원회 및 집행부 구성원이 대거 교체된 직후였고, 국내 체제도 약화되어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코체마소프에게도 이날 밤 기자회견 내용은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코체마소프 대사는 기자회견 내용을 알고 급히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두 사람 모두 바쁘다는 답변을 받았다. 불과 일주일 전 크렌츠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때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거나, 또는 직통 회선으로 이야기했다고 대사는 이해하고, 베를린에서의 상황 변화를 TV로 그저 지켜볼 뿐 아무도 모스크바에 알리지 않았다. 10일 오전 5시(모스크바 시간 오전 7시)에 본청 관계자로부터 "저쪽 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전화로 처음 전달받았다. 측근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이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고 한다.[184]
3. 3. 여행 자유화 발표와 오해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여행하거나 이민하는 것을 더 쉽게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6]샤보프스키는 이 새로운 규정에 대한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충분한 정보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21] 기자회견 직전, 에곤 크렌츠로부터 변화를 알리는 메모를 받았지만,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다. 메모에는 동독 시민들이 이전의 여행 요건 없이 해외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고, 동서 베를린 간을 포함한 모든 국경을 통해 영구 이민도 허용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19]
기자회견이 끝나갈 무렵, 안사 통신의 리카르도 에르만(Riccardo Ehrman) 기자가 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질문했다. 샤보프스키는 잠시 망설인 후 "제가 아는 한, 즉시, 지체 없이 발효됩니다"라고 대답했다.[19][25][26][20] 이는 메모의 첫 문장을 바탕으로 한 추측이었다.
한 기자가 이 규정이 서베를린(West Berlin)으로의 통행에도 적용되는지 묻자, 샤보프스키는 메모를 확인하고 그렇다고 답했다.[19] 이후,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의 다니엘 존슨이 이 법이 베를린 장벽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질문하자, 샤보프스키는 장벽이 더 큰 군축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장황한 설명을 했다.[27]
샤보프스키의 이러한 발언은 사실상 오해였다. 그는 새로운 규정의 시행 시점을 다음 날인 11월 10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자회견에서의 답변은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처럼 들렸다.
기자회견 후 샤보프스키는 NBC 뉴스(NBC News) 앵커 톰 브로코(Tom Brokaw)와의 인터뷰에서 동독인들이 국경을 통해 이민할 수 있고 규정이 즉시 발효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28][29]
이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서독의 독일통신사(DPA)는 오후 7시 4분에 동독 시민들이 "즉시" 독일 내부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속보를 발표했다.[160] 샤보프스키의 기자회견 내용은 서독의 주요 뉴스 프로그램에서 주요 뉴스로 보도되었다. ARD의 ''타게샤우(Tagesschau)''에서 앵커 한스 요아힘 프리드리히스는 "오늘 11월 9일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동독은 즉시부터 국경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고 발표했습니다.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20][21]
3. 4. 국경 개방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는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은 동독 시민들이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고, 동·서 베를린 간을 포함한 모든 국경을 통해 영구 이민도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1] 샤보프스키는 이 규정이 "즉시, 지체 없이 발효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5][26][20]이 발표를 들은 동독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어 국경 경비대에게 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21] 경비병들은 상부의 지시를 받지 못해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 시민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보른홀머슈트라세 검문소를 개방했다.[176] 이어서 다른 검문소들도 연쇄적으로 개방되었다.[178]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동독 시민들에게 꽃과 술을 건네며 환영했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4. 베를린 장벽 붕괴의 영향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독, 독일, 그리고 전 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1989년 8월 19일,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아이디어로 기획된 판유럽 피크닉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철의 장막이 열리면서 평화적인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다.[1][2][3][4][5][6] 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국경 개방에 대한 반응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만 명의 동독인들이 헝가리로 향했고, 에리히 호네커는 이에 대해 동독 휴가객들이 서독으로 가도록 설득당했다고 언급했다. 동독 지도부는 국경을 완전히 봉쇄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련은 반응하지 않았다.
1989년 여름 이후, 난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하거나 프라하 서독 대사관을 통해 헝가리로 향했다. 9월 30일, 서독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난민들에게 서독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의 연설은 큰 환호를 받았다.[7][8]
초기에는 양국 간 자유로운 통행이 허용되었으나, 인구 이동이 커지면서 양국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동독은 대출금 상환에도 어려움을 겪었고, 에곤 크렌츠는 서독에 단기 대출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20]
1989년 11월 9일, 귄터 샤보프스키가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여행 규정이 발표되었다. 샤보프스키는 충분한 정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동독 시민이 해외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으며 모든 국경을 통한 영구 이민도 허용된다고 발표했다.[21] 기자회견에서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질문을 받자, 샤보프스키는 "즉시, 지체 없이" 발효된다고 답했다.[25][26][20]
11월 9일 22시 45분, 보른홀머슈트라세 국경 검문소 사령관 하랄트 예거는 검문소를 열고 사람들을 통과시켰다.[33][34] 서베를린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 위로 뛰어올랐고, 동독 젊은이들도 합류했다. 이 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밤으로 알려져 있다.[35]
4. 1.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붕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독 (SED)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189]한스 모드로 내각은 11월 13일에 출범하여 정치·경제 개혁을 약속했다. 11월 23일, 사회주의 통일당은 에리히 호네커의 비리 조사를 시작하고, 야권 세력과 원탁회의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당에 의한 국가 지도' 조항을 삭제하여(12월 1일 헌법 개정) 일당독재를 포기했다.[190]
12월 3일, 사회주의 통일당은 긴급 중앙위원회 총회를 열어 에곤 크렌츠를 포함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 전원이 사퇴했다. 빌리 슈토프, 에리히 밀케(전 국가보안부장) 등과 함께 호네커는 당에서 제명되었다. 크렌츠는 12월 6일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도 물러나면서, 불과 2개월도 안 되어 크렌츠 정권은 막을 내렸다.
12월 8일과 9일에 열린 사회주의 통일당 당대회에서는 당명을 사회주의통일·민주사회당(SED-PDS)으로 바꾸었다. 1990년 1월에는 귄터 샤보프스키와 함께 크렌츠도 당에서 쫓겨났고,[191] 2월 4일에는 당명을 민주사회당(PDS)으로 다시 변경하면서 SED라는 이름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처럼 사회주의 통일당의 일당 독재 체제는 무너졌고, 모드로우는 정치·경제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급격한 동서독 통일에는 반대하며 조약 공동체를 통한 연방을 제안했다.[192]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하루에 약 2,000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빠져나갔고, 동독 마르크의 가치는 10분의 1로 폭락하면서 원래부터 취약했던 동독 경제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192] 12월, 모드로우는 헬무트 콜에게 150억 독일 마르크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193]
지식인들은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서 동독의 존속을 원했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드러난 호네커 등 구 사회주의 통일당 간부들의 비리와 사치스러운 생활에 분노한 일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자체에 대해 등을 돌렸다.[194]
군과 경찰의 기능은 마비되었고,[195] 국민을 억압하던 국가보안성의 지방 기관이 군중에게 공격당해도 동독 정부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192] 1990년 초, 시민의 70%가 동독의 존속을 원했지만,[195] 라이프치히의 월요일 시위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de)"라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2월이 되자 동독 스스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196] 결국 동독의 구 정권 간부들이 우려했던 대로, '사회주의 이념'이 붕괴된 동독은 국가로서 존립 기반을 잃고 무너져 갔다.
4. 2. 독일 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독일 통일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는 1945년 독일 분할 이후 독일인들의 숙원이었다.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통일 독일이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197]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심지어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조차도 빠른 통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독의 모드로 정권은 자유 선거와 새 헌법 초안 작성을 결정했다. 1990년 3월 동독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 선거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지원한 기독교민주연합 중심 세력이 승리하면서, 서독이 동독을 편입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결정되었다.
이처럼 독일 통일은 소련, 여러 유럽 국가, 미국, 서독 수뇌부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놀라운 속도의 배경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한 "환희"와 "감동", 그리고 동독의 국가적 붕괴가 있었다.
결국 베를린 장벽 붕괴 1년도 채 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실현되었다. 통일 기념식에서는 옛 제국 의사당에 흑·홍·금 삼색기가 게양되었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과 "환희"는 콜 총리가 예상했던 폐해도 가져왔다. 동독에서는 통일된 "독일 국민"이라는 의식이 커지면서 급속한 통일을 지지하게 되었다. 통일 직후 서독 정부가 동독 시민에게 지급한 일시금은 경제적 불안을 잠시 잊게 했다.
독일 재통일은 동독 시민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너무 빠른 통일은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구 서독과 구 동독 간의 빈부 격차는 컸고, 현재도 동서 간 소득 격차가 남아 있다. 구 동독에서는 국영 기업의 도산으로 실업자가 증가했고, 구 서독에서는 구 동독에 대한 투자 비용 등으로 경기 침체가 발생하여 양측 시민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4. 3. 냉전 종식과 동유럽 민주화
1989년 12월 3일,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서독 통일의 방향이 정해진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는 이전부터 신사고 외교를 통해 냉전의 긴장 완화를 추구했지만,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었기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냉전 종식을 말하기 어려웠다.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유럽 전역의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미 민주화를 이룬 폴란드, 헝가리뿐만 아니라, 붕괴 당일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는 토도르 지브코프가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퇴했다. 11월 1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벨벳 혁명이 일어났고, 바르샤바에서는 체카(KGB의 전신) 설립자 펠릭스 에드문도비치 젤린스키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몰타 회담 직후인 12월 16일에는 루마니아 혁명 (1989년)이 발생했다.
몽골에서도 1989년 12월 10일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여, 1990년 몽골 민주화 운동을 통해 몽골 인민혁명당의 일당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다당제가 도입되었다.
1991년 8월 20일에는 발트 3국이 독립했고, 12월 25일에는 소련 자체가 붕괴되었다.
4. 4. 베를린 장벽의 잔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장벽의 잔해는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부터 시민들이 기념품으로 장벽 조각을 떼어가면서 비공식적인 철거가 시작되었고, Mauerspechte|마우어슈페히테de(벽을 쪼는 새)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들이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장벽을 파괴했다.[37]1990년 6월 13일, 동독 국경수비대는 베르나우어 거리(Bernauer Straße)와 미테 지역을 시작으로 공식적인 장벽 철거를 시작했다.[39][40] 철거 작업은 1990년 12월까지 베를린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약 170만 톤의 건설 잔해가 발생했다. 철거에는 300명의 동독 국경경비대원과 10월 3일 이후 600명의 독일 연방군(Bundeswehr) 개척대원이 참여했으며, 175대의 트럭, 65대의 크레인, 55대의 굴착기, 13대의 불도저가 동원되었다.[39] 베를린 장벽으로 단절되었던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연결하는 모든 도로는 1990년 8월 1일까지 복구되어 재개통되었다.
기념물로 보존될 여섯 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벽은 제거되었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이 그려진 장벽 부분은 1990년 베를린과 몬테카를로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1990년 7월 1일, 동독이 서독 통화인 도이치마르크를 채택하면서 모든 법적 국경 통제가 중단되었고, 장벽 철거는 1994년에 완료되었다.[39]

벽 붕괴 후, 파괴된 벽 조각들은 활발하게 거래되기 시작하여 동독 말기 최대의 수출 효자 상품이 되었다. 동독은 벽 조각 판매를 통제하려 했으나, 국가 자체가 소멸하면서 무산되었다.[199] 60톤의 "베를린 장벽의 부품"이 미국으로 운반되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기도 했고, 서독인들은 수천 마르크로 벽의 한 구역을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런던의 경매장에서는 대량의 벽 구역이 경매에 부쳐져 를 벌어들이기도 했다.[200]
베를린시는 외국 귀빈들에게 벽의 잔해를 선물로 주기도 했으며, 여기에는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많은 양의 벽 잔해는 파쇄되어 도로 건설의 기반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201]
당시 벽의 95% 이상은 철거 시 파괴되었고, 겨우 수백 개의 벽 구역만이 그대로 보존되어 베를린의 여러 곳에 총 연장 1.5km의 벽만이 존재할 뿐 대부분이 사라졌다.[202]
5. 기념 및 평가
베를린 장벽 붕괴는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평가된다.
1989년 11월 9일,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기자회견은 베를린 장벽 붕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9] 그는 동독 주민들의 여행 자유화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는데, 이는 즉시 발효된다는 그의 발언과 함께[25][26]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국경 검문소로 몰려들게 했다. 결국 국경수비대는 압도적인 인파에 밀려 장벽을 개방했고,[33][34] 이는 곧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장벽 붕괴 당일, 베를린을 방문 중이던 달라이 라마 14세는 붕괴 현장을 찾아 동베를린에 발을 들여놓고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노벨 평화상 수상 한 달 전의 일이었다.[204]
붕괴 이후, 1990년 2월에는 가마야쓰 히로시가 철거 직전의 장벽 위에서 게릴라 공연을 펼쳤다. 이때 불렀던 “반반반”은 앨범에 수록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핫셀호프는 1989년 1월 1일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Looking For Freedom”을 불렀고,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3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핫셀호프는 후에 “벽 양쪽에서 민중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라고 회고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재통일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동독의 집권 여당이었던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은 사회민주당으로 개명하여 명맥을 유지하려 했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신중도 노선에 반발한 극좌파와 함께 좌파당을 결성했다. 좌파당은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며 구 동독 지역에서 어느 정도 부활을 이루었다.[205]
독일 통일에 기여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2003년 조지아 대통령에서 축출된 후 독일 망명 제안을 받았으나, 감사 인사를 전하며 조지아에 남았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 분단 극복과 통일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며,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5. 1. 기념 행사
2009년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 행사는 독일 전역에서 열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이 브란덴부르크 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통과하며 우호를 과시했다. 다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불참했다. 레흐 바웬사 폴란드 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 소련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53] 200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일"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정부 주최 행사가 열렸고, 베를린 장벽을 본뜬 스티로폼 도미노 약 1000개를 쓰러뜨리는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며, 바웬사가 처음으로 도미노를 쓰러뜨렸다.[53]2009년 10월 31일,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베를린에서 재회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인물 | 발언 내용 |
---|---|
콜 | “아무도 믿지 않았던 통일을 이뤄낸 것은 자랑이다.” |
부시 전 대통령 |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은 냉전을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상처를 지워냈다.” |
고르바초프 |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영웅이었다.” |
2014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행사에서는 과거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 일부에 흰 풍선을 설치하여 밤에 일제히 하늘로 날리는 “리히트그렌체(Lichtgrenze, Lichtgrenzede)” 이벤트가 개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베를린을 방문하여 "우리가 현재 이렇게 살고 있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인사했다.[206]
5. 2. 역사적 평가
베를린 장벽 붕괴는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의 종식과 독일 통일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벽이 무너진 것을 넘어, 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 그리고 분단 극복과 통일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1989년 11월 9일,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기자회견은 베를린 장벽 붕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9] 그는 동독 주민들의 여행 자유화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는데, 이는 즉시 발효된다는 그의 발언과 함께[25][26]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국경 검문소로 몰려들게 했다. 결국 국경수비대는 압도적인 인파에 밀려 장벽을 개방했고,[33][34] 이는 곧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 총리는 독일 재통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지만,[41][42] 독일 통일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다양한 예술 공연들이 장벽 붕괴를 기념했다. 1989년 12월 25일,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며 "기쁨"(Freude)을 "자유"(Freiheit)로 바꿔 부르는 역사적인 공연을 선보였다.[45] 1990년 7월 21일에는 로저 워터스(Roger Waters)가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에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앨범 《더 월(The Wall)》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47]
베를린 장벽 붕괴는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 속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통일에 대한 희망과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2009년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마우어라이제"(장벽 여정)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을 비롯한 분단 국가에 장벽 벽돌이 전달되기도 했다.[59]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장벽을 옹호하거나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일부 독일인들은 여전히 장벽이 존재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응답하기도 했다.[68][69][70][71][72][73][74] 2019년 베를리너 차이퉁(Berliner Zeitung) 여론조사에서는 베를린 시민의 8%가 장벽 유지를 지지했지만, 대다수인 87%는 장벽 붕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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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 dann ging das Tor a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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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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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 dann ging das Tor auf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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