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베데레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벨베데레 궁전은 오이겐 폰 사보이가 여름 별궁으로 1714년부터 1723년까지 건설한 바로크 건축물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마리아 테레지아를 거쳐, 나폴레옹 실각 후 빈 회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955년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되며, 상궁은 오스트리아 갤러리로 19세기 이후 오스트리아 회화를, 하궁은 중세와 바로크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나치 약탈 미술품 논쟁과 관련된 사건들이 있었으며, 정원은 프랑스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스트리아의 정원 - 쇤브룬궁
쇤브룬 궁전은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었으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오스트리아의 랜드마크이자 관광 명소이다.
벨베데레궁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명칭 | 벨베데레 |
원래 용도 | 여름 거주지 |
현재 용도 | 박물관 |
위치 | 빈, 오스트리아 |
건축 양식 | 바로크 |
웹사이트 | www.belvedere.at |
지정 | WHS (세계 문화 유산) |
건축 | |
건축가 |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
건설 시작 | 1723년 |
의뢰자 | 사보이 공자 외젠 |
2. 역사
벨베데레궁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한 오이겐 공작이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에게 의뢰하여 여름 별궁으로 지은 건물이다.[18] 하궁(''Unteres Belvedere'')은 1714년부터 1716년까지, 영빈관 용도의 상궁(''Oberes Belvedere'')은 1720년부터 1723년까지 건설되었다.
오이겐 공작 사후인 1752년,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매각되었다.[18] 이후 나폴레옹 실각 후 빈 회의 당시에는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55년에는 상궁에서 연합국과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조인되는 등 오스트리아 현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현재 벨베데레궁은 미술관으로 사용된다. 상궁은 19세기 이후 오스트리아 회화를 전시하는 '오스트리아 갤러리'로, 하궁은 '중세와 바로크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20센트 유로 주화 뒷면에는 벨베데레궁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상궁 동쪽 옆 건물은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만년을 보낸 곳이며, 상궁 입구 옆에는 빈 대학교 식물원이 자리한다.
2. 1. 건설 배경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한 오이겐 공자는 1697년 11월 30일, 자신의 슈타트팔레 건설을 시작한 지 1년 후에 헝가리로 가는 주요 도로인 렌베크 남쪽에 넓은 토지를 매입하였다. 이 부지에 벨베데레 정원 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슈타트팔레의 설계자였던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 대신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를 수석 건축가로 선정했다. 힐데브란트는 오이겐 공자가 피에몬테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던 중 만났던 인물로, 이미 1702년 부다페스트 남쪽 체펠 섬에 라체베 궁전을 지어준 경험이 있었다. 힐데브란트는 로마에서 카를로 폰타나 밑에서 토목 공학을 공부하고, 요새 건설 기술을 배우기 위해 1695년부터 1696년까지 제국 군대에 복무했으며, 1696년부터는 비엔나에서 궁정 건축가로 활동했다. 벨베데레 외에도 호프 성, 슈바르첸베르크 궁전, 킨스키 궁전, 괴트바이크 수도원 등이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오이겐 공자가 부지를 매입할 당시 이 지역은 미개발 상태로, 조경된 정원과 여름 궁전을 짓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공자가 토지를 사들이기 한 달 전, 제국 대원수 하인리히 프란츠 폰 만스펠트 백작이 인접한 땅을 먼저 구입하여 힐데브란트에게 정원 궁전 건설을 의뢰한 상태였다. 오이겐 공자는 부지 매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건설 중이던 슈타트팔레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고, 이후 1708년, 1716년, 그리고 1717년에서 1718년 사이에 인접한 토지를 추가로 매입하여 정원을 단계적으로 확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하궁(''Unteres Belvedere'') 건설은 1712년에 시작되었으며, 오이겐 공자는 1713년 7월 5일에 건물 검사를 요청했다.[1] 볼로냐 출신의 마르칸토니오 키아리니가 1715년 중앙 홀에 콰드라투라 작업을 시작했고, 1716년 4월에는 스페인령 플랑드르 대사가 하궁과 슈타트팔레를 방문했다. 하궁은 1714년부터 1716년까지 건설되었다.[18] 하궁 건설과 동시에 정원 조성 작업도 진행되었는데, 1717년 도미니크 지라르가 정원 계획을 크게 변경하여 다음 해 여름까지 완공될 수 있도록 했다. 지라르는 베르사유에서 수자원 기술자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의 추천으로 오이겐 공자에게 고용되었다. 정원 난간의 조각상은 조반니 스타네티의 작품이다.
이후 영빈관으로 사용될 상궁(''Oberes Belvedere'')은 1720년부터 1723년까지 건설되었다.[18] 벨베데레궁은 본래 오이겐 공자의 여름 별궁으로 계획된 건축물이었다.[18]
2. 2. 하궁 (Unteres Belvedere) 건설
오이겐 공자는 1697년 11월 30일, 슈타트팔레 건설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빈 외곽 렌베크 남쪽에 넓은 토지를 매입하며 벨베데레 정원 단지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슈타트팔레를 설계했던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 대신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를 이 프로젝트의 수석 건축가로 선택했다. 힐데브란트(1668–1745)는 오이겐 공자가 피에몬테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때 만났던 인물로, 이미 1702년 부다페스트 남쪽 체펠 섬에 라체베 궁전을 지어준 경험이 있었다. 힐데브란트는 로마에서 카를로 폰타나 밑에서 토목 공학을 공부하고, 요새 건설 기술을 배우기 위해 1695년부터 1696년까지 제국 군대에 복무했으며, 1696년부터는 빈에서 궁정 건축가로 활동했다. 벨베데레 외에도 호프 성, 슈바르첸베르크 궁전, 킨스키 궁전, 괴트바이크 수도원 영지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오이겐 공자가 토지를 물색하던 시기, 이 지역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조경된 정원과 여름 궁전을 짓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그가 토지를 매입하기 한 달 전, 제국 대원수 하인리히 프란츠 폰 만스펠트 백작이 인접한 땅을 사들여 힐데브란트에게 정원 궁전 건축을 의뢰한 상태였다. 오이겐 공자는 부지 매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건설 중이던 슈타트팔레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고, 이후 1708년, 1716년, 그리고 1717년에서 1718년에 걸쳐 인접 토지를 추가로 사들여 정원을 확장했다.
기록에 따르면[1] 하궁 건설은 1712년에 시작되었고, 오이겐 공자는 1713년 7월 5일에 건물 검사를 요청했다.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1714년부터 1716년 사이에 완공되었다.[18] 1715년에는 볼로냐 출신의 마르칸토니오 키아리니가 중앙 홀에 콰드라투라(환영을 이용한 천장화 기법)를 그리기 시작했다. 1716년 4월에는 스페인령 플랑드르 대사가 하궁과 슈타트팔레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궁 건설과 동시에 정원 조성 작업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1717년 1월과 5월 사이에 도미니크 지라르가 정원 계획을 크게 변경하여 다음 해 여름까지 완공될 수 있도록 했다. 지라르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의 수자원 기술자로 일하다가 1715년부터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의 정원 검사관으로 일했는데, 오이겐 공자에게 고용된 것은 막시밀리안 2세의 추천 덕분이었다. 하궁의 난간 조각상은 조반니 스타네티의 작품이다.
2. 3. 상궁 (Oberes Belvedere) 건설
상궁(''Oberes Belvedere'')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한 오이겐 공작이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인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에게 의뢰하여 1720년부터 1723년까지 영빈관 목적으로 지은 여름 별궁이다.[18]
상궁 건설은 171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1718년 여름 오이겐 공작이 베오그라드에서 그의 하인 베네데티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궁전 작업의 진척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1719년 10월 2일까지 건설이 상당히 진행되어 오이겐 공작은 그곳에서 터키 대사 이브라힘 파샤를 접견할 수 있었다. 내부 장식은 1718년부터 시작되었다. 1719년 그는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솔리메나에게 궁전 예배당의 제단화와 황금 방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의뢰했다. 같은 해 가에타노 판티는 대리석 홀에 환상적인 콰드라투라 회화를 의뢰받았다. 1720년 카를로 카를로네는 1721년부터 1723년까지 대리석 홀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
건물은 1723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층 홀인 '살라 테레나'(''Sala Terrena'')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붕괴 위험에 처해 있었고, 1732년에서 1733년 사이 겨울에 힐데브란트는 아틀라스 기둥 4개로 지지되는 아치형 천장을 설치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방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인츠 선제후의 궁정 기술자인 살로몬 클라이너는 1731년부터 1740년 사이에 총 90개의 판으로 구성된 10부작 출판물 ''Wunder würdiges Kriegs- und Siegs-Lager deß Unvergleichlichen Heldens Unserer Zeiten Eugenii Francisci Hertzogen zu Savoyen und Piemontde''("우리 시대 최고의 영웅 오이겐 프란츠, 사보이아 공작 겸 피에몬테 공작의 경이로운 전쟁과 승리의 진영")을 제작하여 당시 벨베데레 단지의 상태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2. 4.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외젠 공자가 1736년 사망한 후 법적 상속인이 없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임명한 위원회는 그의 조카인 사보이 공녀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를 상속자로 지정했다. 빅토리아 공녀는 상속에 관심이 없어 궁전을 매각하려 했고,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요제프 공과 결혼했으나 1744년 이혼했다. 빅토리아 공녀가 토리노로 돌아간 후, 1752년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 저택을 구매했다.[18] 이때 작성된 매매 계약서에서 처음으로 '벨베데레궁'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황실 가족은 벨베데레궁에 직접 거주하지 않았으며, 초기에는 건물이 활용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른 황실 궁전들처럼 로어 벨베데레궁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조상 갤러리를 만들었다. 1770년 4월 17일, 황녀 마리아 안토니아(훗날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도팽(훗날 루이 16세)의 결혼을 기념하는 가면 무도회가 열리면서 궁전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 무도회에는 약 16,000명의 손님이 초대되었다.

177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 황제는 계몽 절대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호프부르크 왕궁의 황실 마구간에 있던 황실 회화 갤러리(k.u.k. Gemäldegalerie|카 und 카 게멜데갈레리de)를 상 벨베데레궁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5] 이는 황실 소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5] 갤러리는 5년 뒤 문을 열었으며, 세계 최초의 공공 박물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갤러리는 1891년 새로 지어진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컬렉션이 옮겨갈 때까지 여러 저명한 화가들이 관장을 맡아 운영되었다.
18세기 말, 상 벨베데레궁이 갤러리로 사용되는 동안 로어 벨베데레궁은 프랑스 혁명을 피해 온 왕족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유일한 생존 자녀였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와 밀라노 공국의 전 총독이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곳에 머물렀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1799년 루이 앙투안 공작과 결혼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티롤을 바이에른에 할양하게 되면서, 인스브루크 근처 암브라스 성에 있던 황실 컬렉션을 옮겨야 했다. 컬렉션은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해 잠시 페트로바라딘으로 옮겨졌다가, 1811년 프란츠 2세 황제의 명으로 로어 벨베데레궁에 자리 잡게 되었다. 공간이 협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어 벨베데레궁은 이 컬렉션을 수용하며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빈 회의(1814–15) 기간에는 이미 많은 방문객을 끌어모았다. 이후 이집트 골동품 컬렉션(1833년)과 로마 이정표(1844년) 등이 추가되었으며, 1888년–1889년에 컬렉션이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이전될 때까지 박물관으로 운영되었다.
2. 5. 황실 회화 갤러리
177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 황제는 k.k. Gemäldegalerie|카이저리히 쾨니글리헤 게멜데갈레리de("황실 회화 갤러리")를 호프부르크 왕궁의 일부였던 황실 마구간 건물에서 상 벨베데레궁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5] 이는 계몽 절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황실이 소장한 예술품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려는 진보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5] 갤러리는 5년 뒤 문을 열었으며, 세계 최초의 공공 박물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후 여러 저명한 화가들이 관장을 맡아 황실 컬렉션을 관리했으며, 이 컬렉션은 1891년 빈의 링슈트라세에 새로 건립된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상 벨베데레궁에 전시되었다.
2. 6. 19세기 이후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티롤을 바이에른에 넘겨주게 되면서, 인스브루크 근처 암브라스 성에 있던 황실 컬렉션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찾아야 했다. 컬렉션은 처음 프랑스 군대의 약탈을 피해 페트로바라딘(현재 세르비아 노비사드, 보이보디나)으로 옮겨졌다. 18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는 이 컬렉션을 로어 벨베데레궁에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로어 벨베데레궁은 컬렉션을 보관하기에는 다소 협소했지만, 이 조치로 박물관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빈 회의(1814–15) 기간에는 이미 상당수의 방문객을 끌어들였다.황실 궁정 도서관 관장인 디트리히슈타인-프로스카우-레슬리 백작 모리츠의 지휘 아래, 1833년부터 이집트 골동품 컬렉션과 골동품 실이 로어 벨베데레궁의 암브라스 컬렉션에 추가되었다. 1844년에는 당시 테세우스 신전 지하 묘지에 보관되어 있던 로마 시대 이정표들이 비밀 정원의 야외 공간으로 이전되었다. 카를 괴벨 주니어의 수채화와 요제프 베르크만이 1846년에 작성한 컬렉션 안내서는 로어 벨베데레궁이 박물관으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로어 벨베데레궁의 컬렉션은 1888년에서 1889년 사이에 링슈트라세에 새로 지어진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상 벨베데레궁에 있던 황실 회화 갤러리(k.u.k. 게멜데갈레리) 역시 1891년에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5]
나폴레옹 실각 후 열린 빈 회의 당시 벨베데레궁은 화려한 연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55년에는 상궁에서 연합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조인되었다.
현재 벨베데레궁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대한 부지 남쪽에 있는 상궁은 '오스트리아 갤러리'로 운영되며, 19세기 이후의 오스트리아 회화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세기말 미술 컬렉션이 충실하며, 빈 미술사 박물관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미술관이다. 상궁에서는 빈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있는 하궁은 '중세와 바로크 미술관'으로 사용된다.
오스트리아 유로 주화 중 20센트 동전 뒷면에는 벨베데레궁 정문 너머로 보이는 궁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상궁 동쪽 옆에 있는 단층 건물은 원래 궁전 직원들의 주거 공간이었으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만년을 보낸 저택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벽에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부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상궁 측 입구 옆에는 빈 대학교 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2. 7.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거처
황실 소장품이 이전된 후, 벨베데레 궁전 두 곳은 한동안 박물관 기능을 중단했다. 189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상궁을 황위 계승자이자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거처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황위 계승자는 황실 차관이기도 했던 건축가 에밀 폰 푀르스터의 감독 아래 궁전을 개조하여 거처로 삼았다.한편, 하궁에서는 몇 년 뒤인 1903년 5월 2일에 모데르네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빈 분리파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예술가 연합의 주도로 설립된 오스트리아 최초의 현대 미술 전문 국립 컬렉션이었다. 설립 목적은 오스트리아 예술과 국제적인 모더니즘을 함께 선보이는 것이었다. 개관 초기부터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조반니 세간티니와 같은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이 수집되었다. 1911년에는 전시 범위를 현대 미술뿐 아니라 이전 시대의 작품까지 넓히기로 하면서 박물관 명칭을 ''k.u.k. 슈타츠갈레리''("제국 및 왕립 갤러리")로 변경했다.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이 암살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며, 이후 1918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붕괴되면서 벨베데레 궁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 8.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붕괴되자 벨베데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미술사학자 프란츠 하베르디츨은 교육부에 궁전을 국립미술관에 넘겨줄 것을 요청했고, 이는 다음 해에 승인되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한스 티에체가 작성한 구 제국 컬렉션 재구성 초안에는 벨베데레 궁전 단지의 국유화가 명시되었다. 이 계획에는 오늘날 존재하는 박물관 외에도 "Österreichische Galerie"(오스트리아 미술관)와 "Moderne Galerie"(현대 미술관)를 설립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의 재구성 기간 동안, 하궁에 바로크 박물관이 추가되었으며, Moderne Galerie는 1929년 오랑제리에서 문을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궁전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상궁의 대리석 홀과 하궁의 그로테스크 홀 일부가 폭탄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쟁 후 복구 작업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진행되었다. 이 기간 중인 1950년에는 상궁 상층의 황금 회랑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중요한 방과 전시 작품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복구 후 1953년 2월 4일 Österreichische Galerie가 재개관했고, 바로크 박물관도 뒤이어 다시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오랑제리에서 "Museum mittelalterlicher österreichischer Kunst"(중세 오스트리아 미술관)이 개관했다.[6]
1996년, 세계 기념물 기금(WMF)은 전후 복구가 미흡하여 "살라 테레나"와 웅장한 계단이 "원래의 특징을 많이 잃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7] 같은 해, WMF는 "많은 사랑을 받는 비엔나의 랜드마크의 쇠퇴한 상태"를 알리기 위해 벨베데레 정원을 WMF 감시 목록에 추가했다.[7] 199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연방 정부의 박물관 현대화 계획에 따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복원 계획이 추진되었다.[6]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정원은 원래의 바로크 양식으로 복원되었고, "살라 테레나"와 웅장한 계단도 대대적으로 개조되었다.[7]
하궁과 오랑제리는 특별 전시회를 위한 공간으로 개조되었다. 건축가 공모에서 당선된 수잔네 조틀은 오랑제리를 기존 바로크 구조를 보존하면서 현대적인 전시관으로 바꾸었다. 이 공간은 2007년 3월 "Gartenlust: Der Garten in der Kunst"(정원의 즐거움: 예술 속의 정원) 전시회로 문을 열었다. 몇 달 후, 베를린 건축가 빌프리트 퀜이 재설계를 맡은 하궁이 비엔나-파리 전시회와 함께 재개관했다. 퀜은 입구를 Cour d'honneur|쿠르 드 오뇌르fra(명예의 뜰)의 원래 위치로 옮겨, 하궁 정문에서 대리석 홀을 거쳐 상궁의 정원 파사드로 이어지는 원래의 시야를 복원했다. 대리석 홀에 부속된 원래 오랑제리의 여러 부분도 원래 상태로 복원되어 새로운 전시 공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대리석 갤러리, 황금 회랑, 그로테스크 홀과 같은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주요 공간들은 변경 없이 그대로 유지되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8]
2. 9.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체결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55년에는 연합국과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이곳에서 조인되었다.3. 현대의 벨베데레
1955년 연합국과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조인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대한 부지의 남쪽에 있는 상궁은 "오스트리아 갤러리"로, 19세기 이후의 오스트리아 회화를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세기말 미술 컬렉션이 충실하다. 미술사 박물관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미술관이다. 상궁에서는 빈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있는 하궁은 "중세와 바로크 미술관"이다.
오스트리아 20센트 유로 주화 뒷면에는 문 너머로 보이는 궁전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상궁 동쪽 옆에 있는 평층 건물은 원래 궁전 직원용 주거였으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만년을 보낸 저택으로 알려져 있다. 벽에 기념비가 있지만 내부는 공개되지 않았다.
상궁 측 입구 옆에는 빈 대학교 식물원이 있다.
3. 1. 나치 약탈 미술품 논쟁
나치 독일 시대에 약탈된 미술품과 관련하여 벨베데레궁은 여러 반환 논쟁에 직면했다.1959년 8월 26일, 홀로코스트 생존자 앨리스 모겐슈테른은 과거 소유했던 에곤 실레의 그림 '네 그루의 나무'가 상부 벨베데레에 전시되어 있다며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그림을 판매한 적이 없으며, 지인인 변호사 로베르트 뢰를에게 보관을 맡겼으나 그가 사망한 후 그림이 어떻게 벨베데레궁 소장품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진술했다.[9]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2020년 3월 20일, 오스트리아 자문위원회는 이 그림을 모겐슈테른의 상속인에게 반환할 것을 권고했다.[10]
2006년에는 여러 건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50년 넘는 법적 분쟁 끝에, 오스트리아 중재 패널은 에드바르드 뭉크의 "해변의 여름밤"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 알마 말러의 손녀이자 유일한 상속인 마리나 피스툴라리-말러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11] 같은 해, 오스트리아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5점을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상속인에게 반환했다.[12][13]
그러나 같은 해 오스트리아 중재 패널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인 "아말리에 추커칸들" 초상화는 나치에 의해 약탈된 것이 아니므로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14] 이 결정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그림의 모델인 아말리에 추커칸들이 딸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사실과 더불어, MSNBC가 보도했듯이 "분명히 약탈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반환하는 대신 벨베데레궁에 보관하도록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15]
에곤 실레의 또 다른 작품인 '월리의 초상' 역시 나치 약탈과 관련된 논란의 대상이었다. 2012년 다큐멘터리 ''월리의 초상''은 이 그림이 1939년 나치 프리드리히 벨츠가 빈의 미술상 레아 본디의 개인 소장품에서 압수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수로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박물관으로 반환된 과정을 폭로했다.[16]
2014년에는 빌헬름 라이블의 "농부의 부엌 / 부엌 내부" 그림이 나치 박해로 인해 막스 리에베르만의 미망인 마르타 리에베르만의 상속인에게 반환되도록 명령받았다.[17]
4. 주요 시설
벨베데레궁은 본래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한 오이겐 폰 사보이가 당대 유명 건축가인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에게 의뢰하여 여름 별궁으로 지은 건물이다.[18] 궁전은 크게 하궁, 상궁, 그리고 정원으로 구성된다.
- '''하궁'''(Unteres Belvedere|운터레스 벨베데레de): 1714년부터 1716년까지 먼저 건설되었다. 현재는 "중세와 바로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상궁'''(Oberes Belvedere|오베레스 벨베데레de): 1720년부터 1723년까지 영빈관 용도로 건설되었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갤러리로 운영되며, 19세기 이후의 오스트리아 회화, 특히 세기말 미술 컬렉션이 유명하다. 미술사 박물관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미술관이며, 이곳에서는 빈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 '''정원''': 상궁과 하궁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으며, 프랑스식 정원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 '''기타 시설''':
- 안톤 브루크너 기념관: 상궁 동쪽 옆 평층 건물로, 원래 궁전 직원 숙소였으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벽에 기념비가 있지만 내부는 공개되지 않는다.
- 빈 대학교 식물원: 상궁 측 입구 옆에 자리하고 있다.
오이겐 공작 사망 후 1752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매각되었으며, 나폴레옹 실각 후 열린 빈 회의 당시에는 화려한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55년에는 연합국과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이곳 상궁에서 조인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20센트 유로 주화 뒷면에는 벨베데레궁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4. 1. 상궁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상궁(Oberes Belvedere|오베레스 벨베데레de)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한 오이겐 폰 사보이가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인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에게 의뢰하여 여름 별궁의 영빈관으로 지은 건물이다.[18] 1714년부터 1716년까지 하궁(Unteres Belvedere|운터레스 벨베데레de)이 먼저 건설되었고, 상궁은 1720년부터 1723년까지 건설되었다.
상궁 건설은 1717년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1718년 여름 오이겐 공이 베오그라드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1719년 10월 2일까지 공사가 상당히 진행되어 오이겐 공은 이곳에서 터키 대사 이브라힘 파샤를 접견할 수 있었다. 내부 장식은 1718년부터 시작되었다. 1719년에는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솔리메나에게 궁전 예배당의 제단화와 황금 방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의뢰했고, 같은 해 가에타노 판티는 대리석 홀에 환상적인 콰드라투라 회화를 그리도록 의뢰받았다. 1720년에는 카를로 카를로네가 대리석 홀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맡아 1721년부터 1723년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건물은 1723년에 완공되었지만, '살라 테레나'(Sala Terrena|살라 테레나it)는 구조적 문제로 붕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1732년에서 1733년 사이 겨울에 힐데브란트는 아틀라스 기둥 4개로 지지되는 아치형 천장을 설치해야 했고, 이 방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인츠 선제후의 궁정 기술자였던 살로몬 클라이너는 1731년부터 1740년까지 총 90개의 판으로 구성된 10부작 출판물, ''Wunder würdiges Kriegs- und Siegs-Lager deß Unvergleichlichen Heldens Unserer Zeiten Eugenii Francisci Hertzogen zu Savoyen und Piemont|분더 뷔르디게스 크릭스 운트 지크스라거 데스 운페어글라이힐리헨 헬덴스 운저러 차이텐 오이게니 프란치스키 헤어초겐 추 자포이엔 운트 피에몬트de''("우리 시대 최고의 영웅, 사보이아 공작 외젠과 피에몬테 공작의 경이로운 전쟁과 승리의 기록")을 제작하여 벨베데레 단지의 상태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오이겐 공작이 사망한 후, 상궁은 1752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매각되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열린 빈 회의 당시에는 화려한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55년에는 연합국과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이곳에서 조인되었다.
현재 상궁은 오스트리아 갤러리(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외스터라이히셰 갈레리 벨베데레de)라는 이름의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로 19세기 이후의 오스트리아 회화를 전시하며, 특히 세기말 미술 컬렉션이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사 박물관 다음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미술관이며, 상궁에서는 빈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20센트 유로 주화 뒷면에는 문 너머로 보이는 상궁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상궁 동쪽 옆에는 원래 궁전 직원용 주거였던 평층 건물이 있는데,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벽에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으나 내부는 공개되지 않는다. 상궁 측 입구 옆에는 빈 대학교 식물원이 자리하고 있다.
4. 2. 하궁 (바로크 미술관 및 중세 미술관)
하궁(''Unteres Belvedere'')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한 오이겐 공자가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인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에게 의뢰하여 여름 별궁으로 지은 건물이다.[18] 오이겐 공자는 슈타트팔레 건설을 시작한 지 1년 후인 1697년, 렌베크 남쪽에 넓은 토지를 매입하여 벨베데레 정원 단지 계획을 세웠다. 그는 슈타트팔레 설계자인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 대신 힐데브란트를 이 프로젝트의 수석 건축가로 선택했다. 힐데브란트는 로마에서 카를로 폰타나 밑에서 토목 공학을 공부하고 제국 군대에서 요새 건설을 배운 후, 1696년부터 비엔나에서 궁정 건축가로 활동했다.기록에 따르면 하궁의 건설은 1712년에 시작되었으며, 오이겐 공자는 1713년 7월 5일에 건물 검사를 요청했다.[1] 공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볼로냐 출신 마르칸토니오 키아리니가 1715년에 중앙 홀에 콰드라투라(환영 기법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스페인령 플랑드르 대사는 1716년 4월에 하궁과 슈타트팔레를 방문했다. 1714년부터 1716년까지 하궁 건설이 완료되었다.[18]
1736년 오이겐 공자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인 사보이 공녀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가 궁전을 상속받았으나, 그녀는 상속에 큰 관심이 없었다. 1738년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요제프 공과 결혼했지만 순탄치 않았고, 결국 1752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궁전을 매입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하궁에 합스부르크 왕조의 조상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후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을 피해 온 왕족들이 하궁을 주로 사용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와 밀라노 공국의 전 총독이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곳에 거주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티롤을 바이에른에 양도하게 되자, 인스브루크 근처 암브라스 성의 황실 컬렉션을 옮길 장소가 필요해졌다. 1811년 프란츠 2세 황제는 이 컬렉션을 하궁으로 이전하도록 명령했고, 이로써 하궁은 박물관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빈 회의 (1814–15) 당시 이미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1833년에는 이집트 골동품 컬렉션과 골동품 실이 추가되었고, 1844년에는 로마 시대 이정표들이 비밀 정원으로 옮겨졌다. 이 컬렉션들은 1888–89년 링슈트라세에 새로 지어진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이전될 때까지 하궁에 전시되었다.
현재 하궁은 "중세 미술관"과 "바로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4. 3. 정원
오이겐 공자는 1697년 슈타트팔레 건설을 시작한 지 1년 후, 렌베크 남쪽에 정원을 조성할 넓은 땅을 사들였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를 수석 건축가로 선택했다.[1] 오이겐 공자는 1708년, 1716년, 1717-18년에 걸쳐 인접한 땅을 추가로 사들여 정원을 단계적으로 넓혀나갔다.벨베데레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정원 계획은 도미니크 지라르가 맡았다. 지라르는 앙드레 르 노트르의 제자로서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훈련받았고, 1715년부터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의 정원 검사관으로 일하다가 오이겐 공자에게 고용되었다. 그는 1717년 정원 계획을 변경하여 다음 해 여름까지 완공될 수 있도록 했다. 정원은 가지런히 정돈된 나무 울타리, 자갈길, 그리고 지라르가 설계한 '물놀이'(fra: jeux d'eau, 분수와 수경 시설)가 특징이다. 정원 난간의 조각상은 조반니 스타네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 곳곳에는 신화적인 상징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오이겐 공자를 태양신 아폴로에 비유하며 그의 명성을 높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2] 상부 정원(파르테르)의 큰 물웅덩이와 상부와 하부 정원을 연결하는 계단 및 폭포는 여전히 남아있다. 과거에는 정교한 문양의 화단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잔디밭으로 남아 있다가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베르나르도 벨로토가 그린 "벨베데레에서 본 비엔나" 그림은 상부 벨베데레 궁전에서 바라본 정원과 비엔나 시내의 유명한 전망(카날레토 블릭)을 담고 있다. 이 전망은 오늘날에도 비엔나 역사 지구의 스카이라인 변경과 관련된 도시 계획 논의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3]
상궁 동쪽 옆에는 빈 대학교 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4. 4. 빈 대학교 식물원
상궁 측 입구 옆에는 빈 대학교 식물원이 있다.참조
[1]
서적
Das Belvedere in Wien. Bauwerk, Menschen, Geschichten
Verlag Anton Schroll & Co
1971
[2]
웹사이트
Sculptures in the Gardens: From the Historical Ages to the "Neo-embarrassing" Trends
http://193.16.218.14[...]
2023-07-05
[3]
뉴스
Sichtachsen: Wie Wien den freien Blick schützt
https://www.diepress[...]
2024-05-13
[4]
간행물
Zum Baugedanken des Oberen Belvedere-Schlosses
1955
[5]
학술지
Museums and Museality: Celebrating the 150th Anniversary of Vienna's Ringstrasse
http://dx.doi.org/10[...]
2018
[6]
웹사이트
History Belvedere {{!}} Belvedere Museum Vienna
https://www.belveder[...]
2023-07-02
[7]
웹사이트
Belvedere Palace & Gardens
https://www.wmf.org/[...]
2023-07-02
[8]
서적
The Belvedere: 300 Years a Venue for Art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23
[9]
웹사이트
CASE STUDIES Egon Schiele, Four Trees/Autumn Allée
https://www.lootedar[...]
[10]
웹사이트
Morgenstern_Josef_2020-03-06 BESCHLUSS
https://www.provenie[...]
[11]
웹사이트
Munch painting stolen by Nazis is returned to Mahler heir
https://www.lootedar[...]
2021-04-28
[12]
뉴스
A Homecoming, in Los Angeles, for Five Klimts Looted by Nazis
https://www.nytimes.[...]
2021-04-28
[13]
웹사이트
Austria to Return Art Stolen by Nazis
https://www.lootedar[...]
New York Times
2021-04-28
[14]
웹사이트
Arbitration panel decides Klimt portrait was not looted by the Nazis
https://www.lootedar[...]
2021-04-28
[15]
웹사이트
The last prisoners of war: Inside the battle to recover Nazi-stolen artwork
https://www.msnbc.co[...]
2021-04-28
[16]
웹사이트
The Painting That Launched a Thousand Lawsuits
https://hyperallergi[...]
2021-04-28
[17]
웹사이트
Belvedere muss Bild an Liebermann-Erben restituieren - Belvedere must restitute a painting to the Liebermann heirs
https://www.lootedar[...]
Der Standard
2021-04-28
[18]
서적
いつかは行きたいヨーロッパの世界でいちばん美しいお城
大和書房
20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